<-- 150화 기념 외전2 - 미공개 이야기들 --> 검호side.
시간의 오버시어. 무능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이 망할 년에게서 조금이라도 쓸모있는걸 얻어내기 위해 내가 무릉에서 했던 고군분투는 사흘밤낮 눈물흘리며 구구절절 늘어놓아도 모자라지 않을거다.
"너 시간의 오버시어라며? 미래 예지같은거 못하냐?"
「할 수 있어.」
"그럼 나중에 나한테 일어날 중요한 일들같은거 미리 좀 알려줘. 위험같은게 오면 피하게."
대야 안 물 속에 비쳐진 망할 여자의 얼굴이 갸웃~해졌다.
「알려줘도 의미없어 그거.」
"뭔 뜻인데?"
「너는 이 세상에 있는한 계속 위험이 닥칠거야.」
아 미친.
"그러니까, 그 위험들 중에서, 좀 심한 것들을 미리 알려달라고."
「충격이 큰 것들만 꼽자면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것, 니가 너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있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 그거."
「말 그대로인데.」
틀렸어. 말이 안통해.
"오버시어란 종족 죄다 언어장애있냐……."
「나 정도면 평균인데.」
이 지랄맞은 종족 다 멸종해버렸으면.
"그럼 반대로 좋은 일같은건 없냐?"
「없어.」
"뭐 그렇게 단호해?!"
심지어 1초의 고민조차 없어!
「정말로 없는걸.」
"아니 왜!"
「우리를 봉인한 이는 우릴 해방시킬 너를 전력으로 방해할테니까.」
"잠깐, 그러고보니 너희 왜 봉인당한건데? 누구한테 당해서 그 꼴이 됬냐고."
생각해보면 어찌됬든 저년 씹사기잖아. 그러나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그나마 너는 내가 만든 몸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의 악의를 어느정도 버틸 수 있을거야. 잘 해줘.」
"내 말에 대답 좀 해! 왜 혼자 주절거려!"
그 년은 끝내 대답하지않고 물에서 사라졌고, 대야는 또 내가 홧김에 휘두른 검에 두동강났다.
이때 오버시어년이 했던 말들의 뜻을 알게 된건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나, 피눈물 나도록 '세계'의 잔혹함을 겪은 뒤였다.
틀린 말은 없었다. 정말, 단 하나도.
****
검호side.
팔찌에 들어있던 힘으로 막 봉인에서 풀려난 생명의 오버시어가 그 자리에서 알리샤 먹방쇼를 보여주고는 어딘가로 휙 사라진 뒤, 나는 안드로메다로 도망친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어찌어찌 아쿠아리움으로 돌아가기 위해 심해를 올라갔다.
"진짜 별, 거지같은……!"
[그 애는 대체 뭐였던거야 마스터?]
"나도 몰라! 모른다고!"
이 사태를 어쩌면 좋다냐. 세계수가 죽어버렸어!! 그 바다괴물인지 애새끼인지 모를 개막장 오버시어가 흔적도 안남기고 쳐묵쳐묵 해버렸다고!
안그래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건만 미래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이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할 것 같다.
[마스터. 귀환서를 쓸 수 있는 곳까진 아직 더 가야할 것 같아.]
"…… 다시는 바다에 않올거야."
엎친데 덥친격으로 기껏 준비해온 귀환서는 마을에서 너무 멀어 사용도 못한다. 인게임에서 사용시 가장 가까운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 귀환서는 현실보정으로 일정이상 마을에서 멀어지면 그냥 종이쪼가리가 되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내려올땐 그냥 쭉쭉 내려오면 됬는데, 다시 올라가려니까 정신이 아주 그냥 SAN치★ 해지는 느낌이다. 하하 여기가 수심 몇천 미터지? 내 미래처럼 사방이 깜깜해서 알 수가 없네!
어쨌든 나침반을 써서 겨우 방향을 잡은 나는 심해 암벽등반을 하기 싫어서 아스카를 타고 아쿠아리움을 향해 갔다.
[어? 저기 빛이 보여 마스터!]
"벌써?"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을 생각하면 아직 아쿠아리움은 멀었을텐데? 물도 아직 시커멓고.
하지만 정말 아스카의 말대로 빛이 보였다. 마을의 빛이라기보단 뭔가 크리스마스 트리같은 느낌의 빛이. 심해인만큼 초롱아귀나 그 비슷한 몬스터의 빛인가하는 의심도 되었지만, 그래도 뭔가 궁금해서 아스카에게 저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어째서인지 빛에 점점 가까워지며 물 속임에도 악기소리가 들렸다. 악기. 내가 아는 한 지금 이 바다속에서 악기를 다룰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
나와 함께 아쿠아리움까지 같이 갔던 기타를 다루던 여자.
그녀는 희게 빛나는 돌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타소리에 호응하듯 빛나는 돌은 더욱 밝은 빛을 흩뿌렸고,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비주얼상 좋은건 아닌 것 같은 검은 안개가 빛에 움츠러들었다.
'저것들은 뭐야?'
빛나는 돌이나 검은 안개나 뭐가뭔지 모르겠다.
[저게 홀리코라스인가?]
"그거 뭔데?"
[아쿠아리움의 사람들이 말하는걸 들었는데, 심해의 바닥엔 스스로 자라며 빛나는 돌이 있대. 그 돌의 힘으로 바다의 어둠을 정화하고 아쿠아리움을 띄우고 있다나]
게임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잘 기억 안나는걸 보면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언급되고 그 뒤로 안나온 설정인가보다.
"그녀가 여기 온 이유가 저건가."
[글쎄. 자세한건 물어봐야 알겠네.]
어느새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다. 검은 안개는 살충제 맞은 벌레떼처럼 빌빌거리다 이내 흩어졌고, 심해의 등대처럼 환하게 빛나던 돌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아우우…… 목이야."
"뭐하고 있나."
"으앗?!"
그녀는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화들짝 놀라며 크게 휘청였다. 그 모습이 넘어질 것 같아서 급하게 붙잡았다.
"괜찮나?"
"아, 예, 예.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 손 좀……."
너무 세게 잡았나. 나는 난처하게 웃으며 몸을 바로 세우는 그녀를 보고 손을 놓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거지."
"돌아가는 길에 검은 안개가 좀 방해를 해서 급한대로 좀 처리를 하고 있었어요."
"검은 안개?"
아까 그거 말하는건가.
"심해의 망령같은건데, 가까이에 있는 떠있는 것을 붙잡아 가라앉히는 고약한거에요."
[홀리코라스가 그것들로부터 아쿠아리움을 띄우고 있다던데 사실이야?]
"네. 그래서 저걸 좀 쓴거죠."
그새 좀 나아졌는지 그녀는 아까보다 생기도는 얼굴로 웃었다.
"당신은 왜 여기 있나요?"
"심해에 일이 있어서 잠깐 내려갔다가 오는 길이다."
[일이 엄청 안풀렸어.]
"저런……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운내세요."
완전 남이지만 저런 말이라도 들으니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 저 여자 좋은 사람이구나. 초반에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아쿠아리움에 돌아가는 길인가요?"
"그렇다."
"혹시 마을 귀환서가 없으신건가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귀환서가 사용되지 않아.]
"아, 음…… 텔레포트도 안되나요?"
[물 속이라 거리감이 안좋아서 말이지. 처음 오는 곳이라 눈으로 보고 써야하는데 풍경이 흐려서 잘 안돼.]
만약 아스카가 텔레포트를 제대로 쓸 줄 알았으면 옛저녁에 아쿠아리움에 도착했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마을 귀환서가 사용되는 곳까지 데려다드릴 수 있는데."
순간 여자의 뒤로 헤일로가 보였다. 성녀다, 성녀가 여기있어!!
"전 물 마법 전문이라 물 속에서도 텔레포트 잘 쓰거든요."
"그럼 부탁해도 되나."
"물론이에요."
[있잖아, 나중에 물 속에서 텔레포트 잘 쓰는법 알려줄 수 있어?]
"해줄 수는 있는데 세부적인 이론은 무리에요. 요령이나 느낌같은 거라서. 그거라도 괜찮나요?"
[그것도 좋아!]
아무튼 일이 잘 해결되었다. 악사 여자는 기타를 등에 메며 텔레포트를 쓸 준비를 했고, 나는 속으로 지긋지긋한 심해를 벗어난다는 것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막 이동하려는 순간, 아스카가 갑자기 외쳤다.
[저기봐 마스터!]
"또 몬스터냐."
"이 부근의 몬스터는 모두 정리했을텐데?"
악사 여자는 막 등에 멘 기타를 다시 앞으로 돌려멨고, 나는 빠르게 검을 뽑아들며 아스카가 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다인데 눈이 내리고 있어!]
"…… 아 그래."
완전히 김새버렸잖아 임마. 그런건 빨리 말해.
아스카의 말대로 이곳이 심해임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린스노우(Marine snow:바다눈) 현상을 메이플 월드에서 보게 되다니, 원래 세계였다면 이런 깊은 곳까지 올 일따위 없었을테니 이것도 나름 행운이라면 행운이려나.
바다에서 내리는 눈은 확실히 절경이었다. 아스카는 물론이고 악사 여자 역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예쁘다아……."
감상에 초쳐서 미안한데 저거 그냥 플랑크톤 시체야. 위쪽 바다에서 죽은 플랑크톤 시체가 뭉쳐져서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현상에 불과하다고. 나는 예전에 지나가듯이 봤던 다큐멘터리에서 해준 친절하기 짝에 없는 설명을 그녀에게 해줄까 망설이다 입을 다물었다.
"정말 아름답죠?"
그녀는 새하얗게 내리는 마린스노우를 보다 고개를 돌리며 내게 물었다. 환하게 웃고있는 와중에 바다색 눈동자가 무엇보다 빛나고 있었다.
"…… 그렇네."
긍정의 대답이 가리킨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코멘란의 브금을 들으며 보세요)
검호side.
나 혼자서 군단장의 습격을 온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다. 언제나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뿐. 파픈스타가 얼마나 열심히 군단장의 습격을 알려주든, 내 몸은 하나고 나는 일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지키지 못해 죽는 이가 나오는건 어쩔 수 없는거였다.
[마스터…….]
아무리 군단의 공세에서 사람들을 대피시켜도, 모두를 지키는건 처음부터 무리니까.
"죄송,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구하지 못하서 정말─"
나는 미처 다 잡지못한 몬스터들에게 짓밟히고, 찢기고, 뜯어먹힌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 앞에 주저앉아 한참동안 죄송하다고 빌었다. 그 사람의 가족과 친지들로 추정되는 분들이 그만하라고 말릴때까지 계속.
죽은 이들의 시체는 화장(火葬)되었다. 고기굽는 것과 유사하지만 훨씬 역겨운 냄새와 연기에 머리가 핑 돌았고, 차마 그것들을 끝까지 볼 수 없어 자리에서 도망치다시피 벗어났다.
정신을 차렸을때 하늘은 불탈때의 연기처럼 검게 칠해져 있었다.
[오늘은 푹 자 마스터. 잡다한 생각은 하지말고.]
누구보다 걱정어린 목소리에 폐 깊숙한 곳에 고여있던 탁한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무력하다는 사실은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되새기고싶지 않았다.
지구에서 죽은 사람들의 원혼때문에 잠을 못잔다고 말하면 중2병 취급받지만, 현실은 중2병이 아니라 정신병이었다.
보이지않는 검에 푹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불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며 억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낮의 일을 모르는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마스터는 최선을 다했어.]
"괜히 쌍둥이들이랑 싸우다 늦어서 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어."
스우와 오르카따위에게 시간낭비하는게 아니었는데.
"나…… 계속 사람들을 구할 자신이 없어졌어."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군단장이랑 싸워봤자 사람들을 다 지킬 수 없잖아. 얼마나 열심히 하든, 결국 오늘처럼 누군가가 또 죽어버릴거야."
나때문에, 내가 무능해서 죽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죽어나갈 이들의 생명이 너무 무거워서 숨조차 못 쉬겠어.
뭉그러지는 시야와 함께 달빛이 흘러내렸다.
[마스터. 마스터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뭐가 잘못하지 않았다는거야……! 나때문에, 내가 늦어서 그 사람들이 죽었다고!"
[사람들이 죽은게 왜 마스터 잘못인데! 마스터는 그들을 구하려고 했잖아!]
"구하지 못했잖아!! 그게 잘못이 아니면 뭐야?!"
눈을 감으면 떠올라버린다. 지키지못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그리고 그들을 잃어 시체와 다를바없는 눈으로 저를 보는 그들의 주변인들이.
그런 나에게 아스카가 외쳤다.
[잘못한건 마스터가 아니라 습격한 군단장과 몬스터들이라고! 마스터가 자책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
"뭘 자책하지 말라는거야! 내가 조금만, 조금만 더 잘했으면 분명─!"
[마스터는 할 수 있는건 다 했잖아!!]
검은 거체가 요동치더니 아스카가 머리를 확 들이밀었다. 황금색 눈은 달보다 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걸 다 하고도 안되는거면 정말 안되는거야 마스터. 거기에 매달리지 마. 마스터만 망가져.]
"그럼, 그럼 죽은 사람들은 뭐가 되는데……?"
아스카는 망설임없이 답했다.
[불행했던 것 뿐이지.]
"…… 뭐야 그게."
[그러니까 제발 모든게 마스터 탓이라고 여기지마.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았던것 뿐이라고.]
운이 안좋았던것 뿐이라니. 그런걸로 납득될리가 없잖아. 하지만 나는 더이상 말하지않고 아스카의 거대한 몸에 힘없이 기댔다. 더이상 아스카와 말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아 아스카."
[마스터.]
눈을 감는 순간 낮에 보았던 시체들이 어둠속에서 떠오른다. 썩 좋지않았던 제 기억력은 유혈낭자한 충격에 고장난 필름이 되어 그때만을 반복재생하고 있었다.
아스카의 말대로 내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군단장들이 악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확실하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불행하다는 이유로, 정말 그것만으로 죽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생명의 오버시어를 찾기전에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군단장들과 맞닥뜨리게 될까. 싸우는건 어떻게든 한다 치더라도, 내가 그놈들에게 싸우는동안 군단에게 죽는 이들이 반드시 생길거라는걸 생각하면 그냥 다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피곤한데 잘수가 없어."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근처의 나무를 향해 걸었다.
[뭘 하려는거야 마스─]
빠악!!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이마에 얼얼한 통증이 밀려왔다. 동시에 머리를 박았던 나무가 뒤로 꺾였다.
"…… 보통 이러면 기절하던데 왜 안되지."
[마스터는 튼튼하잖아.]
"튼튼하기는 개뿔이, 걸핏하면 근육통에 관절이 덜컹거려서 앓아눕는데…… 이젠 하다하다 기절도 마음대로 못하는군."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한데, 눈이 감겨지지 않는다.
누가 좀 도와줬으면.
깨어난건지 잠든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의식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건 그때였다.
「─검호, 일어나 있어?」
아까 머리를 박아서 그런가, 환청같은게 들리는 것 같은데.
「혹시 자고있는거야? 역시 시간이 너무 늦었나?」
"…… 일어나 있다."
「아? 아아? 그래? 미안해, 대답이 없어서 착각했어.」
환청이 아니었다. 파픈스타 그녀가 맞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한거냐."
「벼, 별건 아니고 요즘 어떻게 지내나 해서. 최근들어서 군단장들이 당신의 훼방을 많이 받는다고 꽤 화나있거든.」
"걱정하는건가."
「그냥, 그냥 좀 신경쓰였을 뿐이야.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놈들을 모두 상대하는건 꽤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힘든 수준이 아니야. 죽을맛이라고.
「기분나빴어?」
"전혀."
「내가 이런 도움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다."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다. 그녀가 알려주는 정보에 따라 군단장에게 습격받는 곳으로 가서 싸운건 나였고,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을 지키지 못한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나 그녀나 일반인에 비해 좀 더 강한 사람, 단지 그뿐이니까.
결국 다 구하지 못할걸 알면서, 그렇기에 힘들어도 노력할 수 밖에 없는거겠지.
「그런데 왜 이 시간까지 자지 않은거야? 혹시 수련같은거라도 하는거야?」
"…… 잠이 오지 않는다."
「뭐?」
"아침에 윙마스터와 싸웠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
아아, 탄식같은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있잖아 검호, 내가 도와줄까?」
"어떻게 도와주겠다는거지."
여기에 직접 오기라도 할건가.
「내가 가진 스킬중에 '안식의 연주'라고, 이게 연주를 들은 대상을 잠들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거든.」
"정말인가?"
「응. 원래는 수면 디버프를 거는 스킬이지만…… 이렇게 자장가로 쓸 수도 있어.」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준비 좀 하고.」
무슨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통신 마법 너머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주하기 편하게 방이라도 정리하는걸까.
몇 분 뒤,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그녀의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내가 이런식으로 잠들어도 될까. 죄책감을 이긴 것도, 마음이 편해진 것도, 무엇하나 납득한 것도 아닌 그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어찌보면 편법에 불과한 걸로 자도 되는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더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So what more can I do? Here in the end…….」
영어로 된 가사는 뜻을 해석하기도 전에 기타소리를 타고 다음으로 넘어갔고, 피로에 찌든 눈꺼풀은 겨우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수마(睡魔)에 완전히 잠기기 직전, 노래의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가사가 희미하게 들렸다.
「But I'll give up for you.」
곧바로 영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뇌에 한탄하며, 좀 더 영어공부 해둘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사그라들었다.
다음 날, 메이플 월드에 온 이래 가장 깊이 자고 일어난 나는 그 노래의 가사를 무엇하나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
파픈스타side.
"당신을 좋아해. 나와 사귀어줘."
순간 무슨 말을 들은건가 귀를 의심했다. 일단 청력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거…… 고백이야?"
"응.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야."
나는 어느때보다 진지하게 빛나는 그의 청록색 눈에 침음을 삼켰다. 맙소사 고백이라니, 이 세계에서 고백같은걸 받을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당황은 당황이고 대답을 해야겠지.
"정말 고맙지만 거절할게."
"아…… 어째서?"
"선약이 있어서 안돼."
내 말에 그, 세피로트는 보이지않는 귀가 축 처진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안쓰러워보였지만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이미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니까.
"그, 검호라는 사람때문이야?"
"응. 그와 약속했으니까. 당신의 마음은 알겠지만, 미안해."
세피로트는 우두커니 선채로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왜 내가 반하는 멋진 여자들은 하나같이 임자가 있는거지……."
"인기가 많으니까?"
"아아, 엄청 용기낸건데 이게 뭐야."
"나보다 더 멋진 여자를 만나길 바래."
정수리가 훤히 보이는 그의 흰 더벅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줬다.
"있잖아 파픈스타, 검호라는 남자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몇 년째 그 사람만 보고 있는거야?"
"강한 사람이야. 내가 살면서 본 사람중에서 가장."
질 것을 알면서 검은 마법사와 정면으로 싸웠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듬에도 사람을 구하는걸 주저하지 않는 영웅이란 단어의 화신같은.
동시에─ 지키지못했다는 죄책감에 허덕이기도 하고, 자신이 힘든 와중에 다른 이의 처지를 동정하기도 하는 평범함으로 이루어진.
누구보다도 믿고있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호의어린 손을 내밀어준 이.
"그래서 좋아."
내 말에 세피로트는 불퉁한 얼굴로 무어라 꿍얼거렸다. 언젠가 그 검호라는 사람을 직접 봐야겠다는데, 근거는 없지만 그와 세피로트는 상성이 안좋을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고백했어?"
"내일부터는 바빠서 말걸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
"하긴."
헬리시움 탈환 작전이 내일부터 시작이었지.
이후 세피로트는 애써 어색하게라도 웃어보이며 '이만 실례, 좋은 꿈 꿔 파픈스타'라고 말하곤 방에서 나갔다.
다음 날, 우리는 노바족의 수도 탈환을 위해 헬리시움으로 향하는 포탈에 몸을 실었다.
========== 작품 후기 ==========
저 뒤에 파픈이 어떻게 됬는지는 더이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본편에서 잘린 장면들. 150화 기념 외전은 이거랑 앞에 있던 If외전 이렇게 2개였어요. 아무튼 이제 끝! 다음부터는 본편!
@Ratios - 레이븐은 큰까마귀란 뜻이죠.
@Sisre - 챕터 하나를 이래저래 다듬어서 압축한거라 다음화는 없습니다.
@min03 - 제가 지쳐서 안됩니다.
@익재공 - 그런데 일상물은 제가 힘듬.
@흑접아 - 보석 아름다움 묘사가 힘들어서 그냥 끼워넣은겁니다.
@Eluines - 둘이 친구가 됬으면 과정만은 평화로웠을겁니다. 과정만.
@올블랙메인쿤 - 언젠가 써보겠습니다만 기대하지 마세요.
@ReFrante - 본편도 폭풍 챕터 끝나면 좋아질... 겁니다 아마.
@칼크래프트 - 레이븐이란 암시=노란 눈이었습니다.
@제시카블랙 - 이 루트로 가면 아스카와 계약하지 않습니다. 히로인 둘을 잃고 친구 둘을 얻는거죠.
@땅콩양갱 - 없어요 없어. 제가 넉다운되서 무리.
@레시코 - 유래는 옆동네 사이퍼즈의 모 캐릭의 별명 아메리칸 핫게이였습니다.
@악마달팽 - 정확합니다. 다만 후대의 둘보다는 스무스함.
@류동지 - 이후 보석을 되찾았는지, 레이븐을 잡았는지는 안정했습니다.
@핑구친구 - 도망쳐!
@SourcesMoon - ...(대답하기 지침)
@타카라블랙 - 회심의 드립이었습니다.
@대어의예감 - 간장치킨을 먹고나서 썼습니다.
@Jaiha - 부족한 가슴크기는 사랑으로 채웁시다! 그리고 파픈이는 빈유 아니에요! B~C라고요!
@노란우산s - 나중에 하얀 마법사한테도 별명 붙일예정.
@소라루 - 용병은 제외하세요. 3명이상 쓰는건 무리임. 그리고 이 외전 다음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