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52화 (152/208)

<-- Tempest -->  키네시스side.

왜 이렇게 된거지.

"마실걸로는 커피랑 콜라가 있는데, 어느쪽이 좋나?"

"코, 콜라."

"알았다. 사실 커피는 사무쪽 사람들이 많이 먹어서 거의 없거든."

왜 여기에, 그가, 저런 모습으로.

"긴장푸시죠. 저희는 음료에 독같은거 안탑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콜라말고 다른걸 마시고 싶으셨다면 유감입니다. 지금 남아있는게 저것뿐이라서. 아, 저는 아이스 커피로 가져오세요."

주문을 다 들은 이름모를 용의 후예 한 명이 음료를 가지러갔다. 검호…… 와 이데아는 그 사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있는데 뭐라고 말하는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사이의 최근 상태는 어떻죠? 더 심해지지 않았나요?"

"그, 많이 괜찮아졌어."

오늘 일때문에 사실 더 악화된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다행이군요. 저희가 가고난 이후로 협회 마법사들이 잘 할지 걱정했었는데."

"너희만큼은 아니지만 협회도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온김에 정밀 검사를 한 번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녀를 검사해도 되나?"

"아…… 사이가 하겠다고 하면."

"알겠습니다."

그러는동안 아까 음료를 가지러갔던 용의 후예 한 명이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흠, 이제 좀 살겠네요. 그쪽도 마시세요. 콜라는 김빠지면 맛없으니까요."

"아니 그게."

"콜라 맛은 프렌즈 월드, 그러니까 니가 왔던 세계의 그것과 별 차이 없으니 걱정마라."

"그런 문제가 아니라,"

"혹시 회의가 안좋게 끝난것이 아직도 걸리나요?"

회의가 어떻게 끝났는지 이데아 저 여자가 어떻게 아는거야!

"그 부분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마라. 우리도 최선을 다해 그들을 구하고 있─"

"아니 그게 아니잖아?! 검호 너는 대체 왜 여기있어? 이데아 당신은 또 왜 검호와 같이 있고? 거기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뭐라도 좋으니 제대로 설명을 해달라고!"

내 외침이 막 끝나기가 무섭게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이데아가 아이스 커피가 든 유리컵을 컵받침에 세게 내려둔 것이다.

"혼란스러운건 알지만 하나씩 말하세요. 저는 키네시스 군이 나이에 비해 꽤 침착한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 그야……."

"안그래도 이제부터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데아 너무 애 기죽이지마."

"실례했습니다. 겨우 머리가 식고있는데 연속으로 말을 쏟아내니 짜증이 났었습니다."

화풀이였던거냐. 나는 아이스 커피의 얼음을 전투적으로 빠득빠득 깨물어 부수는 이데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일단 하나씩 물어봐라. 대답해줄테니."

"…… 너는 내가 알고있는 검호가 맞아?"

에레브에서 보았던 시그너스와 기사 단장들처럼 우연히 비슷한 사람이 아닌 동일인물이 맞냐고. 사실 나를 회장이라고 부른 시점에서 사실상 확정이지만, 그럼에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눈앞의 검호는…… 내가 알고있는 그와 달랐으니까.

생긴건 내가 기억하고있는 그와 완전히 똑같았지만, 감돌고 있는 분위기는 좀 더 무겁고 어두웠으며, 어딘가 지쳐보였다.

"맞다. 너와 같은 사립영재학교 학생이었던 그 검호다."

"그럼 어째서 니가 이데아랑─"

"잠깐만요.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왜 그에게 반말을 쓰는겁니까 키네시스 군. 당신네 세계에서는 연장자에게 존댓말을 쓰는 예의가 없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나랑 검호는 동갑인데?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겁니까. 그는 좀 있으면 서른이라고요."

"서…… 뭐?"

"이데아."

내 귀가 잘못됬나.

"지금 상황이랑 관련없는 말은 할 필요 없잖아."

"실례했습니다. 예의없는 태도가 꽤 걸려서 말이죠. 그래도 당신은 저희들의 상사인데 저런 소년한테 얕보이면 저희까지 덩달아 얕보이는게 되잖습니까."

"상사? 검호 니가?"

"키네시스 군."

차가운 황록색 눈이 뱀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이쪽을 쏘아보았다. 비유가 아니라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져있어 반사적으로 등받이에 붙듯이 몸을 뒤로 뺐다.

"존댓말 쓰라고, 방금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잘못했습니다."

"알았으면 이제부터 계속 그렇게 말하세요."

확실한건 이데아의 심기를 거스르면 뭔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그녀한테 뭔 짓을 당할지도 모른다는거였다.

"큼, 메이플 월드와 니가 왔던 세계 - 프렌즈 월드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거기다 니가 있던 시간대 자체가 미래의 시간대이기도 하고. 내가 여기로 온지 시간이 꽤 많이 지났지."

"너─ 가 아니라 당신이 사라진지 2달밖에 안지났는데 여긴 10년이나 지났다고, 요?"

세계가 다르니 시간 흐름도 다르다는 설정은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서 많이 보던거지만 진짜일줄은 몰랐네. 잠깐 그러면 지금 서울은 며칠밖에, 아니 10년이 2달정도니 싱크홀 사건으로부터 몇 시간밖에 안지났을수도 있다는 거잖아?

"아니. 약 8백년이 지났다만."

"……."

아까 한 말이랑 다르잖아. 고교생이 30이 코앞이 된 정도면 10년정도 흘렀다는 뜻인데 뜬금없이 무슨 8백년이야.

"오해할까봐 말하는데, 난 그 시간동안 가사상태였다. 인간이 어떻게 8백년을 살겠나."

"아, 그, 그렇지 참."

그런것 치고는 8백년 전부터 산 사람들을 회의장에서 꽤 보고 왔는데. 그중에 인간은 없긴 했지만. 영웅들은 대부분 검은 마법사의 저주로 얼음에 갇혀있었다가 깨어났다니 제외하…….

"검호.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거라면 뭐든 된다."

"8백년동안 가사상태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거 설마 얼음 속에 갇혀있었다던가 하는 형태는 아니지, 요?"

분명 영웅즈중에 그와 같은 이름, 이라기보단 칭호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조금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다. 그때 나는 심하게 다쳐서 가사상태가 되었고, 오랜 시간동안 치료를 받아 겨우 깨어났다."

"하, 하하, 어쨌든 살아나서 정말 다행이네. 난 또 니가 그, 영웅즈중 한 명인 최강의 검사 검호라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 요. 역시 그냥 동명이인이었구나. 그럴리가 없는─."

"아니 그건 나 맞는데."

"어째서─?!"

경악과 함께 나도 모르게 염동력이 새어나가 테이블과 의자가 한차례 크게 들썩였다.

"감정조절 훈련 다시 해야겠군요 키네시스 군.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저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다쳤을수도 있습니다."

"검호 니가 왜 니가 영웅즈 중 한 명이야?! 여기로 온 뒤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아니 거기다 영웅이라면 왜 블랙윙인 이데아랑 같이 있어? 그, 블랙윙은 군단장 휘하 조직이라며?"

"키네시스 군."

"거기다 아까 이데아가 너보고 무슨 상사라던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마치 니가 블랙윙의 간부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말끝을 흐렸다. 겨우 정면으로 마주본 그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있어 더이상 말을 잇기 힘들었다.

거기다 간신히 제대로 살펴본 그는 굉장히 위압감 넘치는 차림새였다. 맹수가 연상되는 몸을 검은색의 쫙 빠진 제복으로 감싸고 있는데다, 장갑에 롱부츠까지 신어 얼굴빼고는 살색이 보이지 않았다. 입고 있지는 않지만 의자에 걸쳐진 겉옷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는걸 증명하듯 금사슬 장식과 술이 달린 어깨견장이 달려 있었다.

"간부 맞다만."

생각하는걸 포기할 뻔 했다.

내가 메이플 월드의 사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충격이 덜한거겠지만, 만약 영웅 중 한 명이나 회의장에서 보았던 사람 아무나 한 명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기절하거나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을까.

"난 이 세계에서 과거 영웅 중 한 명이라 불렸던 검호고, 동시에 지금은 블랙윙의 간부인 용의 후예들의 수장인 소드 댄서다. 답이 됬나?"

소설로 치자면 주인공과 아군측 뒷통수를 흔적도 없이 박살냈을 모닝스타급 반전을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내 뒷통수가 아파오거든. 나는 주위에 그때 그 하얀 남자도 없는데 다시 폭주하려는 염동력을 겨우 제어하며, 간신히 단어를 짜맞춰 더듬더듬 말했다.

"부탁인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해줘."

"당연히 할거다. 다만 꽤 길어질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나?"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듣지않으면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는건 물론이고, 중대 기밀을 알게된 요주의 인물을 보는 이데아의 강렬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녀의 양 뿔이 전지라도 된 것마냥 스파크가 일어났고, 그녀는 음산하게 말했다.

"키네시스 군. 그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아까 말했습니다만."

"아, 사용할게요, 사용할테니까 그 전기는 좀."

"그리고 검호. 아무리 지인이라 하더라도 상황이 상황인만큼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세요."

저 이상 위엄있으면 시그너스 여제보다 더할것 같은데. 아니, 솔직히 포스는 여제를 일찌감치 능가했다.

"후…… 먼저 내가 어떻게 프렌즈 월드에서 여기로 이동됬는지 얘기해줄까?"

"응. 그건 나도 궁금한 것이었으니까, 요."

"워터파크, 수영장이었나? 아무튼 거기서 나는 그녀가 한 충격요법으로 기억을 되찾았고, 그녀의 말을 듣고난 후 여기에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그녀라 한다면 그때 워터파크에서 나한테 노래하게 해달라고 협박했던 여자일테고, 기억을 되찾았다는 말은 곧 이전의 그는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는 말인데 내가 아는 검호는 딱히 기억상실증 환자로 보이진 않았다. 거기다 돌아왔다니. 마치 자신이 메이플 월드의 사람이라는 투잖아.

이데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선 알기 힘들잖습니까. 전후 사정도 자세히 설명해야죠."

"그건 너무 길어. 프렌즈 월드에 가기 전의 시간만 5년이 넘는다고.

"3줄 요약하세요. 아니면 요점정리 하시든가요."

"구르고, 구르고, 구르다 검은 마법사놈과 싸우다 죽어서 저쪽 세계로 흘러들어갔고, 천신만고 끝에 동료가 날 찾아내 기억 되살려줘서 메이플 월드로 돌아갔다, 정도일까."

아, 음, 그러니까 검호는 원래부터 여기쪽 사람이었다 이거지?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프렌즈 월드쪽 사람도 아니지.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난 양판소의 주인공같은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된다."

"엥?"

생각지도 못한 비유에 바보같은 소리가 나왔다. 그는 조용히 장갑을 낀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말했다.

"아무 예고도 뭣도 없이 정신을 차려보니 게임이나 만화에 나올법한 이세계에 도착, 로리신같은게 나타나 어쩌구저쩌구한 이유로 널 이 세계에 보냈어! 같은 개소릴 지껄이며 대신 이러이러한 특전을 주는 그런 거지같은 양판소를 생각하면 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사람은 그걸로 끝이었다는거죠."

"판타지 세계인데 스너프 필름만 대하 드라마 수준으로 찍었지."

말을 하는 검호의 목소리가 굉장히 우울하게 잠겨있어서, 이 얘기를 계속 진행했다간 뭔 일이 생길 것 같아 급히 질문을 바꿨다.

"그, 그건 이제 됬어! 아 그런데 널 찾아왔었던 동료라는 여자말인데, 지금 어디 있어? 그 날 워터파크가 반파되서 뒷수습하는데 한참 걸렸었다고. 이유는 알겠는데 사과라도 좀 받아야─"

"…… 그녀는 죽었다."

미친. 시한폭탄 피하려다 대전차 지뢰를 밟았잖아.

"자세한건 묻지 마라."

"응. 절대로 안물어볼게."

어째서인지 이데아까지 덩달아 가라앉은 분위기여서 그녀에 대한건 더이상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건 그 여자에 대한 것은 그들 앞에서 절대적으로 피해야할 주제라는 것이다.

몇 분간 침묵이 이어졌고, 검호는 눈을 덮던 손을 겨우 내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기로 돌아온 이후 다시 검은 마법사와 싸우러 갔다. 그와 결착을 짓기 위해, 망할 로리신 새끼의 부탁을 들어주고 모든걸 다 끝내기 위해서."

어조가 굉장히 험악한데. 모르긴 몰라도 검호는 그를 이곳에 데려온 로리신이라는 존재에게 밀가루 알갱이 하나만큼의 호의도 없는 모양이다. 대충 상상만 해도 호의같은게 생길리 없다는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알다시피 실패했지."

"회의장에서 들었어. 당시의 영웅들은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는 것만으로 한계였다고."

"그때 나는 루미너스가 그와 함께 봉인되는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앞서 다른 동료가…… 스스로 희생하는걸 봐서 더 그랬고. 뒷일같은건 생각하지도 않고 뛰어들었는데, 마지막 일격을 제대로 먹어버렸지."

예상밖이라는 생각은 의외로 거의 들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는 무뚝뚝한 얼굴과는 달리 감정적인 면이 적잖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희생한 동료라니. 대마법사 프리드를 말하는건가?

"이후 사실상 죽은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나를 어떤 초월적인─ 아, 이 표현은 좀 싫군. 신같은 존재가 도와줘 8백년만에 겨우 살아났지. 솔직히 아직도 상태가 영 안좋지만."

"그건 이후에 입은 부상때문이지 오버시어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막 깨어났을때 난 사후경직에 시달렸었다고. 좀 걷고 뛰면 숨차는 지경이었는데."

"부활의 대가치고는 싼 편이군요."

말은 어느새 딴데로 새버려 두 사람은 상사와 부하 사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가벼운 잡담을 나누었고, 나는 그동안 들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일단 그가 과거에 세계의 운명을 바꾼 영웅 중 한 명인건 확실하다. 군단장과 검은 마법사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고, 또 그들과 싸운 영웅. 그러다 어떤 일때문인지 죽어서 지구, 어째선지 프렌즈 월드라고 불리는 우리 세계로 흘러들어와 환생? 아무튼 기억을 잃은 채로 잠시 살았었고 그게 내가 기억하는 동급생 검호. 그러다 동료라는 여자가 그를 찾아와 기억을 되찾아주었고, 메이플 월드로 되돌아 갔다…… 로 정리할 수 있겠군.

다시 메이플 월드로 돌아온 검호는 검은 마법사와 마지막 결전을 하러 갔으나 쓰러뜨리지 못했고, 대신 봉인에 가담. 이 과정에서 동료를 구하려다 검은 마법사의 최후의 발악에 또다시 빈사상태가 되어버림. 이후 오버시어라 불리는 신같은 존재의 도움으로 현 시대에 부활─ 무엇때문인지 군단장 휘하 조직의 간부가 된 상황이다.

'…… 파란만장이란 표현도 모자라구나.'

그런걸 다 겪었으니 분위기가 저리 어둡고 우울하지. 그가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지만, 동정심까지 들었다.

헌데 아직 가장 중요한걸 듣지 못했다.

"그래서 왜 니가 블랙윙에 들어가 있는거야? 내가 듣기로 블랙윙은 군단장 휘하의 조직이라는데, 영웅인 니가 그런데 있는 이유를 난 모르겠거든."

"그건─"

검호가 뭐라고 설명을 하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찰나지만 그의 눈에 물감이 퍼진 것처럼 붉어졌던데 내가 잘못봤나?

"아스카? 잠깐, 갑자기 왜?"

"에델슈타인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런 것 같다. 미안한데 이데아, 뒤의 설명은 당신이 대신 해줄 수 있나. 난 빨리 저쪽으로 가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빠르게 겉옷과 모자를 챙겨들고 밖으로 휙 가버렸다. 왜 저러는거지? 아스카는 또 뭐고. 전화같은게 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텔레파시라도 왔나.

"또 그 군단장이 입을 턴 모양이군요."

"에델슈타인의 군단장이라면 윙마스터를 말하는거야?"

"예에. 아무튼 이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아까 한 질문에 답해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이 뒤의 이야기는 그가 직접 말하기엔 좀 괴로울테니 제가 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말까지 하는걸까.

"그가 블랙윙에 들어온 것엔 저희 '용의 후예', 노바족이 엮여있습니다."

"노바족?"

"저희가 블랙윙 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의 후예라는 명칭은 사실 저희 종족의 수식어 중 하나일뿐, 정식 종족 명칭은 노바(Nova)입니다."

이데아는 얼음이 거의 다 녹은 커피를 마저 털어마신 뒤 말을 이었다.

"키네시스 군은 저희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합니까."

"나야 모르지. 사람들은 역사에 드러난적 없는 소수 종족 중 하나거나 용족의 변종이라고 추측하던데."

이곳 메이플 월드엔 너무 많은 종족들이 있어서 노바족같은 종족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게 없으니까.

"저희가 용족과 비슷해보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저희 종족이 메이플 월드의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초에 메이플 월드에 없는 종족이기 때문이죠."

"잠깐만, 그 말은……?"

"그리고 역사에 아주 출현하지 않은것도 아닙니다. 종족의 배신자 매그너스가 이 세계로 건너와 군단장으로 뛰었었으니까요. 여기서나 저기서나 하는 짓이 남 통수치고 폭군짓하는 거라니, 참 배신자답더군요."

그러고보니 아란이 용의 후에, 노바족과 같은 특징을 가진 군단장이 과거에 있었다는 말을 했었지? 진짜 동족이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일어난 차원의 벽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요 키네시스 군?"

"당연하지. 세계와 세계를 가르는 경계인 차원의 벽이 무너져서 두 세계가 이어져버렸고, 무너진 벽을 통해 세계가 섞이고 있는게 현 차원의 벽 사건이잖아."

"정확합니다."

"애초에 이거 당신이 설명해준거잖아?"

"제대로 기억하고 있으니 기쁘네요. 그럼 여기서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녀는 손가락을 2개 펴며 물었다.

"이번 차원의 벽 사건이, 과연 최초일까요?"

그 질문에 나는 어렴풋이 보이던 윤곽의 실체를 알았다. 세계가 이어지고 섞이는 차원의 벽 사건, 메이플 월드에 출현한 역사가 없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종족. 답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설득력이 넘쳤다.

이데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열고는 이리로 와보라고 손짓했다.

"저기를 보세요."

그녀가 가리킨 것은 허공에 떠있는 어떤 빛나는 기류의 소용돌이였다.

"저건……?"

"디멘션 게이트. 이곳 메이플 월드와 저희의 세계 그란디스를 잇는 구멍입니다. 키네시스 군의 세계에 생겨난 싱크홀과 같은 것이라 한다면 이해가 갑니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노바족은 다른 차원의 종족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합쳐지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 하루동안 얼마나 많은 진실들을 알게된걸까.

***

검호side.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화끈한 무언가에 순간 시야가 붉어져 당황했다.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는 분노가 내것이 아닌건 알았지만, 머리로 안 것과 흘러들어오는 감정을 참는건 다른 문제였다. 심호흡을 몇 번 해 들끓는 숨을 고르고, 몇 번 머리를 두들겨 붉어진 시야를 어느정도 되돌린 나는 팬텀을 가둔 감옥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도 아스카의 감정이 나한테까지 왔다는 시점에서 보통 심각한게 아니다. 최악의 경우, 스우가 아스카를 도발해 감옥을 부수게 만들고 본인은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한참 갱도를 내려가니 기지내에 남아있던 노바족들이 감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빠르게 그들을 지나쳐 감옥에 다다를때, 무너진 벽의 파편 너머로 한쪽 팔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인영이 흙먼지 속에 어렴풋이 있는게 보였다.

"아스카!!"

내 말에 인영이 들썩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스우놈이 또 뭐라고 지껄였어?"

겉옷을 휘둘러 흙먼지를 몰아내자 아스카의 상태가 비로소 제대로 보였다. 변신 마법을 일부 풀어 한쪽 팔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어째선지 얼굴은 새빨갛게 물든채로 울고있었다. 나를 본 아스카가 황급히 말했다.

"마스, 마스터…… 나는, 그러니까 이건,"

"일단 진정해. 팔도 다시 변신시키고, 숨 좀 고른뒤에 차근차근 설명해줘."

손수건을 가지고다니지 않기에 나는 제복 안쪽의 셔츠 소매자락을 당겨 아스카의 얼굴을 닦아주었고, 가볍게 안고 토닥여주었다. 격정적인 숨이 서서히 가라앉아갔고, 나한테 밀려오던 감정 역시 옅어졌다.

다소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될때,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위험했어요. 농담이 아니라 이 감옥에 쳐진 결계가 조금만 더 약했으면 그대로 죽었을겁니다."

아스카의 거대한 팔에 깔려있었는지 이곳에 있어야함에도 보이지 않았던 놈이 거기 있었다.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농도 짙은 어둠에 감싸여진 채로.

분명히 마법을 사용 못하도록 마력 구속구를 채웠는데.

"구속구와는 별개로 어둠 자체가 제 힘이잖습니까. 생명의 위협이 가해지니 빙의한 상태임에도 어떻게든 써지더군요."

속마음을 읽은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한 스우는 피어오르는 어둠을 갈무리하며 팬텀의 얼굴로 웃어보였다.

"감옥 결계가 튼튼하긴 했지만 저 드래곤이 어지간히 강해서 도박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성공할줄은─"

빠악! 거꾸로 잡아 휘두른 검손잡이에 쳐맞은 놈이 풀썩 쓰러졌다. 영력을 실어서 갈겼으니 당분간 조용하겠지. 마음같아선 몽둥이질이 아니라 베어버리고 싶은데 팬텀 몸이라 참아야 했다. 이 망할 자식이.

"아스카. 이제 진정됬어?"

"미안해애─ 흐끅! 정말, 정말 미안해애 마스터어─."

화는 진정된것 같은데 울음은 여전했다. 이제 막 도착한 노바족들은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카한테 상황이 전해졌나?"

"아니요, 아직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곳 위치도 그녀의 방에서 꽤 머니 눈치 못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슨 일 생겼냐고 물어보면 정리되지 않은 몬스터가 날뛰었거나 갱도가 일부 무너졌다고 해라. 여기로 오는 통로도 공사중이니 출입금지라고 표지판 세우고, 저놈은 좀 더 엄중한 곳에 가둬라. 어둠을 일부 다시 쓸 수 있게 됬으니까."

"알겠습니다. 헌데 간수는 누구를……."

또 아스카한테 간수역을 맡겼다간 진짜 스우+팬텀까지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영혼밖에 안남은 스우의 지긋지긋한 독설이 건재하다는건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고, 빙의밖에 못 쓰는 상태에서 본래의 힘인 어둠까지 다시 쓸 수 있게 되버렸으니.

아스카 다음으로는 세피로트가 좋은데, 이쪽은 프라이쉬츠를 전력 마크중이다. 카이저는 힐라에게, 엔젤릭 버스터는 메이플 월드 곳곳에서 구호활동 및 자금을 모으고 있고, 은월은 스우에게 빙의당한 팬텀을 보는 것만으로 괴롭겠지. 저놈 독설까지 맞으면 못 견딜거다. 이데아는 안그래도 하는 일이 많으니 아예 논외.

저놈 말에 휘둘리지 않고, 여차하면 제압할 수 있는 이가 정말 드물어서 한숨밖에 안나왔다.

"당장은 깨어나지 않을테니 너희들이 돌아가면서 감시해라. 놈이 깨어나면 즉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나는 한쪽 팔로 아스카를 부축하듯이 안고 무너진 감옥에서 나왔다. 이래선 힐라의 계획을 파토내는 작전이 시작도 전에 엎어질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이제와서 에레브의 황제 혈통을 조사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어서 다른 방법을 짜낼 수도 없다.

이래저래 생각이 복잡해질때 울음을 거의 그친 아스카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마스터…… 나한테, 화났어?"

"조금 그럴지도."

어깨가 크게 떨리는게 그대로 느껴졌다. 아스카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게 보여 속이 울렁거렸지만, 감시하라고 한 사람을 죽일 기세로 공격한 행위가 잘한건 절대로 아니었기에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니가 그런 일을 한건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아까 니 감정이 나한테 흘러들어왔거든. 그것때문에 순간적이지만 이성을 잃을뻔했고."

"그, 그런! 미안해 마스터!"

"아니야. 니가 그렇게 화를 냈다는건 스우가 정말 역린을 찔렀다는 뜻이잖아."

스우의 거짓말에 넘어갈만큼 아스카가 멍청했으면 애초에 간수역을 맡기지도 않았을거다. 하지만 이렇게 됬다는건 그놈이 무슨 말로 아스카의 속을 긁어놓았다는 뜻인데, 십중팔구 나와 관련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스우 그 자식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뭣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나한테 얘기해줘."

"…… 알았어."

우리는 기지내에 있는 내 방에 돌아왔다. 그새 르티에가 몇 번 왔다갔는지 책상에 서류가 꽤 쌓여있었지만 저건 나중에 처리하면 되고.

방에 와서도 아스카는 한동안 조용했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재촉하지않고 그것을 기다렸다.

"마스터."

"응."

"마스터가 바라는건 뭐야?"

생뚱맞은 질문이었지만 아스카가 갑자기 아무 관계없는 질문을 할 리가 없었기에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곧바로 답해주었다.

"원래 세계에, 집에 돌아가는거지."

이곳에 처음 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것만 바라봤는데. 아스카가 조심스레 물었다.

"메이플 월드에 남을 생각은─ 잠깐 마스터 인상, 인상 좀. 엄청 험악해."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순간 무시무시하게 얼굴을 구겨버렸는지 나는 미간을 문질러 주름을 폈다.

"난 메이플 월드에 남아있을 생각 없어. 여기서 한 고생도 고생이지만, 계속 여기 있어봤자 괴롭기만 하니까."

"괴롭다고……?"

"내가 여기 트립된지 몇 년이나 지났는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 너도 알거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까 원래 세계에서의 기억이 조금씩 잊혀지더라고."

그건 어쩔 수 없는거였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이곳에서 겪은 일들은 너무 강렬했으니까.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느낌은 대충 기억나는데 눈매라던지, 입모양이라던지 하는게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이젠 모르겠어."

"아……."

"학교에서 친구가 꽤 있었는데, 몇 명이나 있었는지 걔들 이름은 또 뭐였는지 이제 생각도 안나. 초창기엔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 모르겠는거 있지."

그래서 무릉에서 아란과 수련할 무렵 밤마다 울었던것 같다. 그때 곧잘 내 좋지않은 기억력에 저주를 퍼붓기도 했고.

"돌아가고 싶어. 이젠 지쳤어."

"마스터."

"이곳에 오래 있었던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거하고 여기에 정착하는건 별개야. 난 이 세계에 남아있고싶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체감하게 된다. 수 년동안 있었으니 익숙해질때 안됬냐고? 그래 익숙해졌어. 무언가를 베고 찌르는 기술이 매우 능숙해졌고, 뼈가 두어대 나가고 근육이 파열되도 '아씨 아프네'라고 생각하게 됬다.

…… 이딴거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아스카, 난 니가 너무 고마워."

"으, 응?"

"처음엔 내가 대체 왜 너랑 계약하게 됬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이유같은건 아무래도 좋아. 이 세계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별의별 일을 다 겪었었고, 그중엔 죽고싶을만큼 괴로운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건 니가 있었기 때문이야."

이 세계에서 생긴 의미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파픈스타와 함께 아스카를 당연히 꼽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니가 옆에 있어줘서, 그래서 계속 버틸 수 있었어."

게임을 통해 알았다한들 지구와는 아예 메이플 월드에 트립당한 이래, 다른건 몰라도 외로움만은 느끼지 않았던건 아스카가 옆에 있어줬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온갖 위험과 역경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도, 절망해 주저앉아 있을때 날 일으켜준 것도 모두 아스카였다.

내 말을 들은 아스카는 동그랗게 황금색 눈을 뜬채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푸─ 작게 웃었다.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 망할 년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는데, 뭘로 할까 꽤 고민했어. 솔직히 여태껏 구른게 있어서 그 년에게 패게 해달라고 할까 진지하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게 있잖아."

복수보다 더 중요한게 있었다.

"너랑 같이 지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할거야. 이런저런 삽질을 거하게 하긴 했지만 세계창조도 손쉽게 하는 년이니 그 정도는 당연히 들어줄 수 있겠지."

"…… 우으."

"신분이나 그런 문제는 덤으로 해달라고 하면 되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오히려 걱정되는건 니가 쓰는 마법쪽인데 그건─"

"마스터!!"

앉아있던 아스카가 갑자기 나한테 뛰어들어 몸이 뒤로 확 넘어갈뻔했다. 허리, 허리가! 우두둑 소리가 났어! 나는 겨우 자세를 잡으며 아스카의 뿔에 찍힌 부위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꾹 참았다.

"나, 나는, 마스터에 대해서 많이 몰랐어. 그놈이 그랬어. 이 중요한 상황에 내가 간수따위를 하고 있는 이유가 마스터와 내가 대화를 안해서라고. 가장 가깝다면서 원하는 것조차 마스터에게 말하지 않는 내 탓이라고."

아 제기랄. 역시 아까 베어버리는 거였다.

"정말로 화가 났는데, 반박할 수 없었어.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 같잖아. 마스터를 누구보다도 믿고있는데, 마스터도 나를 믿어주는데, 정작 난 마스터 옆이 아니라 망할자식 감시하고 있고."

"미안해 아스카 그 일이 그렇게 싫다면 당장이라도─"

"사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야. 나는 거절하지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어. 그래서 계속 간수 일을 시킨것일테고. 안그래?"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따졌을때 아스카가 가장 적격이었고, 그래서 아스카에게 그 일을 맡겼다. 이후 마땅히 싫다고 하지 않아 괜찮은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스터. 마스터한테 말하지 않았지만 나도 바라는게 있어. 원하는게 있다고."

"그게 뭔데?"

"내 바램이 이루어지려면, 마스터의 바램이 이루어져야돼. 아까 물어본건 그것때문이었는데, 덕분에 확실하게 정했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아스카는 고개를 들어 웃어보이고는 끝까지 바램이 뭔지 말해주지 않았다. 이후 스우의 간수 역은 문제를 일으킨 아스카에게 또 맡길 수 없어 밀린 서류를 처리할 겸 내가 잠시 하게 되었다.

***

이데아side.

위험했다. 그의 눈이 붉어졌다는건 그 스킬이 사용될뻔 했다는 뜻이고, 예고도 없이 루타비스 한가운데에서 그가 그 상태가 됬으면 필히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가 빠르게 자리를 떠서 참사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갑자기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건 그의 계약자인 오닉스 드래곤쪽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뜻밖에 안된다. 그리고 그 드래곤은 현재 영웅에게 빙의한 군단장을 감시중이니 무언가 심한 마찰이 생겼다는 추측은 간단히 나왔다.

마음같아선 당장 에델슈타인 기지로 가서 제대로된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가 간 마당에 나까지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눈앞의 소년을 설득하고 회유하는 것이었고, 이를 충실하게 행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지금 당신들의 세계 그란디스와 여기 메이플 월드, 내가 살던 지구까지 다 같이 멸망해가고 있는 상태다─ 이 말이지……?"

"예. 정확합니다."

나의 확인사살에 소년은 머리를 감싸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가 제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많이 똑똑하고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는 한낱 고등학생 - 미성년자에 불과했기에 이 사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과거의 검호가 그러했듯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염동력이 슬금슬금 흘러나와 설명을 위해 썼던 종이와 펜이 떠올라 잡아챘다.

"…… 그래서 검호가 봉인석을 모으고 있고?"

"그게 창조신을 깨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연료니까요."

세계를 만든 신이라는 존재는 왜 이렇게 사람 힘들게 만드는지. 뭐, 그런 신이니 세계도 이 모양이겠지.

"당신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던거야?"

"다른 대체방안이 있으면 당장 말해주세요. 기꺼이 들어드리겠습니다."

소년은 뭔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끝내 아무말도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우리도 좋아서 이 일 하는거 아닙니다. 수십년간 이어졌던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고, 빼앗겼던 수도도 겨우 탈환했는데, 대대적인 복구 작업에 매달려야하는 판에 왜 정예병을 이끌고 다른 세계까지 왔겠습니까."

하고많은 곳중에서 왜 하필 판테온 아래에 차원붕괴 폭탄같은 신이 있는지. 심란한 얼굴의 소년에게 나는 슬며시 물어보았다.

"키네시스 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겁니까."

"어떻게라니……?"

"메이플 월드로 강제이동된 프렌즈 월드의 사람들 대부분은 저희가 돌려보냈고, 나머지도 최대한 찾아서 돌려보내 드릴겁니다. 그러니 이참에 저희와 협력하는게 어떻습니까."

"나더러 블랙윙에 가입하라는 말이야?"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여러모로 인력이 부족해서 현재진행형으로 그를 회유중이지만 한참 어린 그를 블랙윙에 넣는다는 발상을 할만큼 막장은 아니다.

"저희가 하고있는 인명구조를 키네시스 군이 좀 거들어주고, 그 외 자잘한 일거리들을 대신 해주는 걸로 충분합니다. 물론 이 '자잘한 일'이라는 것도 위험한 전투가 아닌 간단한 심부름같은 거고요."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야?"

"예. 저희는 언제나 사람이 부족하거든요."

고질적인 인력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키네시스와 사이 둘뿐이라도 이 두 사람이라면 최소 십 수명의 사람을 대체할 수 있고.

"키네시스 군. 당신은 강제이동된 사람들을 다 돌려보낸 뒤에, 저쪽 세계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사실 수 있습니까?"

"그, 그건."

"무리겠죠. 거기다 전부 다 알아버렸으니 손놓고 있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을거고."

긴긴 설명을 한 이유였다. 검호 그의 말대로 소년은 히어로 체질 - 곤경이나 위험에 처한 이들을 두고볼 수 없는 선한 사람이었고, 세계 멸망까지 앞으로 한 걸음! 같은 현재의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소년은 이내 결심한듯 물었다.

"…… 내가 뭘 하면 돼?"

"일단은 강제이동된 사람들의 구조입니다. 각 대륙의 마을이나 마을 주변에 이동된 사람들은 이미 다 찾아내 돌려보냈고, 이제 험지쪽을 둘러봐야 하는데 여기서 사람이 부족하거든요."

"그건 당연한거야. 그보다 심부름이라는건 구체적으로 어떤거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물품 운송류입니다."

"고작 그것 뿐이야?"

저 소년은 보급품의 중요성을 모르는건가.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있지만 말 그대로 자잘한 심부름류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에게 전투를 부탁할 일은 없을겁니다."

"알았어. 당신들을 도울게."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계약서 작성을─"

"언제 준비되있던 거야?!"

뭘 그렇게 놀라는건지. 구두로만 하는 계약만큼 불안한게 또 어디있다고.

"여기랑 여기, 여기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적지만 어떤 일을 처리했냐에 따라서 수당도 드릴겁니다."

"돈도 주는거야?"

"뭐 열정페이로 부려먹을 줄 알았습니까? 저희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

블랙윙조차도 말단 하나하나에게 월급은 꼬박꼬박 주는데. 그런데 그게 블랙윙의 유일한 장점인게 문제지.

"아무튼 감사합니다. 오늘은 날이 많이 저물었으니 내일부터 일을 하는게 좋겠군요."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예?"

뜬금없이 왜 고맙다는거지 이 소년은.

"우리 세계의 사람들을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계속 걸렸어. 요 한 달동안 이 세계로 떨어진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지,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알 수 없는데 가만히 있어야해서 죄스러웠거든. 그래서 당신들이 대부분 구했다는 말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어."

"그랬습니까."

딱히 선행을 하기위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동족의 누구도 이 일만큼은 불평하지 않았다. 경위는 다르지만 재해에 휩쓸린 사람을 구하는 일이었으니까.

"아, 그런데 하나 질문해도 될까?"

"뭡니까."

"어떻게 메이플 월드에 떨어진 우리 세계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찾아낸거야?"

저걸 질문이라고 한걸까…… 싶었지만 차원의 벽 사건이 벌어진 첫째 주에 총 실종자의 3분의 1가량을 찾아 돌려보냈다는 전적이 워낙 화려했으니 의아할만 했다.

"간단합니다. 먼저 그 지역의 현지인들과 다른 생김새와 옷차림의 사람을 찾았고, 그 다음에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건물 파편이나 도로 파편을 뒤졌죠."

"그것만으로 대부분 구조했다고?"

"물론 이건 일차적인 거였습니다. 이 다음엔 마을마다 구호소를 열었죠. 마침 메이플 월드 전역에 군단이 습격중이라 구호소가 열려도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었고, 여기에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현수막?"

"예. '서울에서 온 사람은 여기오세요!'라든지, 'From Seoul here!'같은 문구를 적어서요."

"……."

낯선 세계에서 서울이라는 말을 보자 어떻게든 반응하는 프렌즈 월드 사람들을 찾는건 꽤 쉬웠다. 키네시스 소년은 작게 '그러고보니 몇 만 명이라면 그중 외국인도 있었겠네'같은 말을 했다.

"그런걸로 진짜 됬어?"

"상당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저도 반신반의 했는데 괜찮은 성과를 거두니 역시 전직 자원봉사자는 뭔가 다르구나 했습니다. 아, 이 현수막 의견 내놓은 사람이 전직 자원봉사자 출신입니다. 나중에 만나면 그에게도 고맙다고 하세요."

"응. 알았어."

이걸로 간신히 인재 포섭인가. 물자수송 관련해선 한시름 제대로 놨다.

그리고 며칠 후, 메이플 연합이 창설되었다는 사실이 선포된지 얼마 지나지않아 니할 아리안트에서 시그너스 여제의 혈통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 작품 후기 ==========

매번 글이 늦네요. 슬럼프인가. 방학 끝날때까지 2편은 더 올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드네. 거기다 이번 편은 재미도 없어.

많은 분들이 아스카가 배신할거라고 생각하시는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스카는 검호의 절대적인 우군이니까요. 하지만... 좋은 의도로 한 일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아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잖아요?

외전에 대한 리코멘은 #입니다.

@류동지 - DEEP♂DARK♂FANTASIES

@래몽 - 당연히 주인공 멘탈이 박살나죠.

@SourcesMoon - (면역되었다!)

@hakuya - 제 글에서 키네시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등학생입니다. 이 글 초반의 검호를 생각하면 되요... 아, 좀 다를까.

@월화쨩 - 효과는 굉장했다!

@고양이선생님 - 주인공 굴리는게 너무 좋아요!

@Sisre - 누군가 코멘란에 적절하게 표현해주신게 있습니다.

@Kzkey - 비중이 폭발한다는 사실 자체가 긍정적인거 아닌가요(웃음)

@Ascaron - 키네시스:정신공격에 취약.

@Jaiha - 느긋하게 해주세요! 참고로 검호와 기내식의 파티 조합은 영 좋지 않다는 사실.

@좀비라스 - 매그니튜드 9.

@밤일 -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서로서로 눈에 띄였다고 해야할까요.

@슈엘리안 - 학생회장이란 뜻입니다.

@오만의루시퍼 - 만약 그렇게 되면 한바퀴 돌아서 맞을지도.

@육합 - 연참은 무리에요...

@마서 - 사실 스우는 도망쳐도 의미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간 이데아가 대륙 전체에 깐 정보망을 풀가동해서 스우를 곧바로 찾아낼테니까요.

@Blackcode - 스우는 의외로 오래 살겁니다.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대어의예감 - 아스카는 빙의 면역입니다. 영혼이 검호와 이어진터라.

@라그실 - 잉?!

@노란우산s - 하지만 검호는 설명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건전한독자 - 그리고 영 이상한 곳마저 현실보정이 들어감.

@ReFrante - 심지어 외국인까지 이동됬음(웃음) 아니 몇 만명인데 한둘쯤 있어도 이상할건 없잖아요? 참고로 검마가 차원의 벽을 뚫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칼른 - 설정부터 반박하자면 검호의 몸은 세계의 것이 아닌 오버시어 특제이므로 에르다로 안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애들이 5차 전직 찍어도 검호가 더 강함ㅋ

@x흑란x - 좀 더 진지한 대화는 큰 홍역 한 번 앓은 뒤에!

@케르닉 - 괜히 계약했겠습니까.

@Eluines - 그리고 키네시스는 졸지에 수송선으로 취직.

@Dt월 - 외전은 재밌으셨나요?

@Ratios - 군단장을 1:1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는게 함정.

@여행자구름 - 검호의 멘탈을 박살낼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Yoontlemin - 지금은 땜빵. 하지만 그 땜빵이 터지면...?

@갓타치 - 초창기 검호가 생각나는 얼빠진 반응들.

@네임0306 - 현재의 검호는 여러모로 패기가 넘치게 되었죠.

@칼크래프트 - 솔직히 하얀 마법사 외모를 설명하는데 저것보다 쉬운 표현이 있을까요.

@라모니아 - 지금은 당근입니다. 채찍은 일단 뒤로.

@레시코 - 2편 쐈습니다.

@적현월 - 그리고 현재 3차 멘붕.

@에누마엘리시 - 스우가 어둠을 되찾아버려 살긴 살았는데...

@소라루 - 설명 듣는 내내 염동력이 마구 날뛰었다고 합니다.

@책벌레씨 - 절단마공이겠죠. 저도 다른 작가분의 이 기술에 여러번 당했었습니다.

@비탄의과학자 - 결과적으로 스우 좋은일만 되버림.

#육합 - 나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 는 뜻입니다.

#팬더토끼 - 시오버의 미래 예지는 누구의 미래를 예지하느냐에 따라 성능이 갈립니다. 메이플 월드의 흔한 생명들의 미래는 백발백중이고, 검호같은 트립퍼들도 거의 다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나 같은 오버시어, 본인의 미래는 거의 예지 못함.

#적현월 - ... 몇 달만에 투베래. 잠깐 봤었는데 굉장하네요.

#Eluines - 에필로그까지 기다리세요~ 그때까지 연재될지는 모르겠지만~

#Sisre - 가사를 해석하셨다면 파픈의 최후가 더 서글프게 다가오실겁니다.

#리세니안 - 이번 화가 답이 되었습니까?

#노란우산s - 하마와 친구가 됬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생각했던 화는 3화에 불과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150화 외전이고, 다른 두 개는 검호가 프라이쉬츠에게 죽는 것, 그리고 그걸 본 하마가 검마로 되고 레이븐만 남아 쓸쓸히 떠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적현월 - 노답 아닙니다.

#ReFrnate - 주의! 상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건전한독자 - 일러스트로 봤을때 빈유같아 보이지만 여기선 거유입니다!

#Jaiha - 주인공 시련이 큰 것만 3개쯤 남았던가.

#Blake117 - 아니요. 가까운 이에게 거부당함, 입니다.

#Asar - 어떤식으로 나올지는 기다려보세요~

#책벌레씨 - 암세포가 암에 걸려 죽었어!

#갓타치 - 이 글 마지막 화까지 까이겠군요.

#이년아 - 과거의 부정이라는건 의외로 간단한겁니다만, 몹시 힘든 일이기도 하죠.

#대어의예감 - 스포일러 하자면, 데미안이 다시 나올쯤에 일이 터질겁니다.

#비탄의과학자 - 그녀는 과거회상을 제외하면 본편에 다시 안나올겁니다.

#칼크래프트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입니다.

#SourcesMoon - 검호가 흑화하는건 꽤 힘든 일인데. 차라리 폭주가 쉬움.

#소라루 - 이 글의 장르중 하나는 다크가 아니었나요 하하.

#Yoontlemin - 검호도 몇 번 죽은 이후로 변해버렸죠.

#x흑란x - 힐라의 여제 후손 사칭건과 함께 온갖 사건을 다 터뜨릴거라서.

#익재공 - 아스카를 누구보다도 검호를 위해줍니다만... 그것을 받는 검호는 과연 좋을까요?

#Ratios - 현대의 마법을 손에 넣었군요!

#Endogeny -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차피 다 나올건데.

#레시코 - 마지막 가는길~ 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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