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53화 (15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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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하고 언데드 군단에게 습격을 받고있던 아리안트였지만, 태양의 결계덕에 도시자체가 점령당하는 심각한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다. 때문에 병사들과 모험가, 기사단은 결계를 믿고 다소 방심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태양의 결계에 거의 영향을 받지않는 짐승형 몬스터의 습격이라는 허를 찔리고 말았다.

모험가중에서도 강한 축에 드는 올리비아와 론도가 정찰도중 이를 목격하고 시간을 끌기로 했고, 그동안 슈가가 아리안트에 이 사실을 알렸다.

단지 습격하는 몬스터의 종류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힐라의 군단 주력이 언데드였던지라 짐승형 몬스터에 대한 방비는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아 이번만큼은 매우 큰 피해가 있을거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런 참사는 천만다행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홀연히 나타난 한 여인과 그녀를 따르는 강력한 마법사, 기사들의 활약으로.

여인은 아름다웠다. 사막의 모래색 머리카락이 길게 물결쳤고, 고양이같은 황금색 눈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련함과 동시에 고귀함을 느끼게 하였다. 피부는 백옥처럼 희었으며, 팔과 어깨를 내놓은 드레스 차림임에도 전혀 천박하게 보이지 않았다.

"모두 무사하신가요?"

그런 그녀를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건 시간문제조차 아닌,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를 힐라라고 소개한 여인은 이후로도 타고난 신통력을 써 몬스터들의 습격을 수 차례 예지했고, 몇 번이나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전선을 직접 지휘해 아리안트를 구해냈다. 그에 따라 그녀의 명성도 나날히 치솟았으며, 메이플 연합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질쯤엔 거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었다.

사치를 일삼으며 국민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아레다 왕비와 무능한 압둘라 8세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순식간에 가진 것이다.

'한심하게도.'

진상을 알고있는 용의 수호자가 뒤로 혀를 차는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댔고, 그러다 어떤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성녀가 신묘한 신통력과 뛰어난 지휘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여제의 혈통을 이었기 때문이라고. 아리안트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모으던 나인하트는 그 소문에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막 창설된 메이플 연합은 엘나스와 함께 군단의 습격에 크게 시달리고 있는 아리안트를 지원해주기로 했고, 대표로 온 기사단장 호크아이는 왕과 왕비에게 인사한 뒤 힐라와 대면하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 지원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번개의 기사단장님."

"하하, 당연한 일인걸요. 그나저나 직접 보니 듣던 것보다 더 미인이시네요 성녀님은."

"칭찬 감사합니다."

호위를 맡고있던 카이저가 속으로 저거 다 화장빨이라고 격렬하게 까든말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당신처럼 가녀려보이는 분이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다니…… 의외로 터프하시군요?"

"후훗, 하지만 사실이랍니다. 저분이 꽤 보조해주시긴 했지만 말이죠."

저 여자 지휘 능력의 근원이 뭔지 알면 식겁할텐데. 카이저는 투구써서 얼굴보이지 않는다고 아예 대놓고 반쯤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군요~ 아리안트의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성녀님이 여제의 혈통이라 이런 전적을 세울 수 있었다는 말들을 하고있던데, 역시 저잣거리 소문은 믿을게 못 되는─"

"그건 사실입니다."

웃으며 얘기하던 호크아이의 표정이 굳었다.

"……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사실이라고요. 제가 여제의 혈통이라는 소문이."

사태가 본격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

키네시스side.

이데아와 계약을 맺은지 며칠이 지났다.

…… 그리고 그 며칠사이에 나는 계약이라는건 절대 경솔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특히 계약 조항에 대해서 가능한한 자세히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키네시스 오빠, 괜찮아?"

"안괜찮아……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려."

분명 그녀는 내가 할 일이라는게 물품 운송류라고 했고, 실제로도 그쪽 일들을 주로 시켰다.

그래. 연말, 연초의 성수기 우체국마냥 끝이 보이지않는 온갖 상자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오고, 그것들을 도착지별로 일일이 구분해 쌓은다음 일정량 이상 쌓으면 그걸 배달하는 그런 일.

"돌아가면 상하차 알바를 엄청 잘하게 될 것 같아."

"염동력가지고 고작 상하차 알바하게?"

"말이 그렇다는거지."

누가보면 어차피 염동력으로 옮기면서 뭔 엄살이 그리 심하냐고 생각할수도 있을거다. 하지만 염동력이라는건 정신력과 직결되어 있어서 장시간 사용할게 그리 못되는데다, 도저히 끝이 안보이는 상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경악보다 실성하게 된다. 실제로 처음 박스 러쉬를 봤을때 헛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물품 배달하러 디멘션 게이트 타고 다른 지역에 간 뒤엔 그곳의 노바족과 함께 우리 세계 사람들 구조까지 해야했고. 아무튼 그래서 근 한 달간의 못했던 일을 요 며칠만에 다 한 느낌이다.

'정말 알뜰하게 부려먹네 그 여자.'

예전에 두 다리로 설 수 있게되면 실컷 부려먹겠다고 말했었는데 진짜 그걸 고스란히 실행하고 있어. 하 젠장, 내가 하겠다고 한거라 따지지도 못하겠고.

"좀 녹긴 했지만 이 쿨팩이라도 줄까 오빠?"

"제발 줘."

사이가 염동력으로 넘겨준 쿨팩을 받아든 나는 그걸로 이마를 문지르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얼굴에 물이 뚝뚝 떨어지긴 했지만 시원한 냉기에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오늘 많이 힘들었었나봐?"

"니할 사막은 너무 더웠다고."

상자 정리도 정리지만 그걸 배달하는것도 상당수 우리가 해야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보통의 사람이 그것들을 배달하려면 족히 수십이 필요한데 우리가 나서면 한 지역당 한 명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궁극의 가성비네 우리.

"사이 넌 어디 갔었어?"

"엘나스."

내가 간 곳과는 정 반대인 곳에 갔네

"거기 몬스터들이 극성이라 물자소모가 꽤 심하더라고. 그래서 잠깐 토벌을 도왔는데, 실수로 눈사태를 일으켜버렸어."

"그, 그랬어?"

"곧바로 사람들을 대피시켜서 몬스터들만 쓸려가는걸로 끝났지만."

다행이네. 그나저나 사이의 능력이 나보다 강한건 알고있었지만 이 정도로 차이날줄은 몰랐다. 똑같이 일했는데 쟤는 딱히 지쳐보이지도 않고. 사이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우으으~ 10분 뒤에 다시 일하러 가야하는거 알지 오빠?"

"알아, 안다고."

10분 뒤에 또 그 지긋지긋한 상자들을 보게되겠구나. 그 사실을 떠올리니 쿨팩으로 겨우 가라앉힌 두통이 다시 밀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는 갑자기 이데아에게 불려가게 되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러냐 따지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한 그녀의 방은…… 사람만한 키의 서류들이 한가득 쌓여있고, 실시간으로 처리된 것들을 부하들이 가져가고 또 새로 뭉텅이로 들어오고 있어 말이 안나왔다.

"이제 왔습니까 키네시스 군, 사이 양."

한 손으로는 경이로운 속도로 펜을 놀림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5종류의 도장을 빠르게 바꿔가며 정확하게 찍는 그녀의 솜씨에 내가 지금 뭘 보고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않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합니다. 이번에 급히 해줘여할 심부름이 있어서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심부름?"

"예."

이데아는 책상의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휘갈긴다음 부하에게 넘겼고, 겨우 고개를 들어 목을 좌우로 몇 번 꺾었다. 우두둑거리는 살벌한 소리에 그녀의 목건강이 심히 염려되었다.

"간신히 이 물건을 입수한터라…… 시간이 촉박하니 이걸 들고 엘리니아 깊숙한 곳에 있는 페어리족의 영역으로 가 페어리 퀸에게 이것의 해독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주세요."

"페어리 퀸이라면─"

"예. 페어리 퀸 아마란스말입니다."

화장품 상표명같은 이름에 나는 대륙 회의에서 만났던 그녀를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판타지 세계답게 정말 판타지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던 그 여인. 스쳐지나가듯이 보았다가 바보같이 한참 넋을 놓아버렸었지.

"페어리족은 독에 능통한 종족, 그들의 여왕인 그녀는 독을 다룸에 있어서 제일이라 봐도 무방하니 금방 이것의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테죠."

"굳이 페어리 퀸에게까지 갈 필요 있어?"

나는 그녀가 책상에 올려둔 분홍색 액체가 얕게 찰랑이는 꽉 잠긴 병을 보았다. 내가 알기로 노바족은 마법뿐만 아니라 이상할정도로 독에 빠삭한 이들인데

"유감스럽게도 저희 마법으로도 좀 힘들거든요. 이건 조금이라도 흡입했다간 대부분 즉사, 운좋게 살아나도 식물인간이 되는 극악한 맹독입니다."

"뭐……? 그런걸 대체 왜 만든거야?"

"저희가 만든거 아닙니다. 블랙윙의 한 미치광이 과학자가 만든거죠."

이데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맹독이 든 병에서 한 걸음 떨어졌고, 사이는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말을 들으니 가까이 가기도 싫어지잖아. 실수로라도 깨면 어떡해. 그런 내 속을 읽은듯 그녀가 말했다.

"걱정마세요. 이 병은 특수 재질이라서 막 던져도 안깨집니다."

"그, 그 말 진짜지?"

"네. 보시죠."

이데아는 곧바로 병을 벽에다 휙 던져버렸다. 야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음과 동시에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고, 나는 본능적으로 방어막을 펼쳤다.

천만다행으로 병은 벽에 부딪히지 않았다. 사이가 재빨리 염동력으로 잡은 것이다.

"자자, 자, 잡았, 잡았어……!"

"굳이 잡으시지 않아도 됬습니다만. 재질이 특별할뿐더러 마법으로 강화까지 해서 벽에 부딪린다고 깨지지 않는다고요. 그걸 보여드리려고 던진거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런걸 막 던지지 말라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렇게 의심을 하시니 직접 보여드리려는거 아닙니까. 이리 주시죠. 이번엔 제대로 보여드릴─"

"믿을테니까 하지마!!"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지르지 마세요. 머리 울립니다.'라고 말하곤 서랍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하나 더, 이걸 가지고 가세요."

"꽃팔찌를 왜?"

이데아가 건넨 것은 몇 분전에 만들었는지 싱그러운 분홍색의 작은 꽃이 엮인 팔찌였다.

"이 팔찌를 페어리 퀸에게 보여주면 이쪽의 부탁을 확실하게 들어줄겁니다."

"일종의 프리패스같은 물건이란 말이지?"

"비슷하다 볼 수 있죠. 이게 있어도 저희는 페어리 퀸을 직접 만나는 것도, 부탁을 하는 것도 힘들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하는겁니다. 빨리 출발해주세요."

나는 연합에서 대대적으로 노바족을 블랙윙의 일원이라고 알려버려 이들의 활동이 더더욱 조심스럽고 은밀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환영 마법과 인식을 홰곡시키는 마법을 쓴다해도, 수백 년을 산 요정 여왕쯤 되는 이와 대면하는건 힘들겠지.

그렇게 루타비스에서 나온 나와 사이는 페어리족의 영역을 찾아 엘리니아 숲을 걸었다. 모처럼의 휴식이라 겸사겸사 농땡이도 조금 피울겸 일부러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건 큰 비밀이 아니었다.

"어째 앞으로 할 심부름이란 것들도 이런 계통의 일일것 같네."

"아마 그럴거야."

우리도 이계인이지만 신분면에서 노바족보다 여러모로 처지가 나으니까.

"그런데 이런 독은 대체 왜 만든거래. 위험하게."

"그 독, 겔리메르가 만든거야."

"…… 겔리메르?"

사이는 염동력을 띄워둔 병을 불만스럽게 보며 말을 이었다.

"레티옥신이라고, 그 영감이 자기 대머리 고치려고 발모제 개발하다가 우연히 만들어진걸로 알고 있어."

이름은 둘째치고 개발 사유가 뭐냐 저거.

"그거 진짜야? 이데아는 그런 것까지 설명 안했는데."

"어, 어쩌다가 알게됬어! 아무튼 빨리 가자 오빠!"

"모처럼 산책하는건데 느긋하게─"

"늦으면 해가 져서 완전히 길잃을거라고!"

사이는 작은 손으로 내 팔을 붙잡으며 그대로 질질 끌고갔다. 얘는 힘이 왜이렇게 좋은걸까. 염동력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상하기 짝에 없다.

검호의 말로는 사이 역시 그과 같은 다른 세계의 사람─ 이른바 트립퍼라는 부류라서 그렇다는데…… 힘은 로리신이라는 존재가 준 특전이라 쳐도 전투경험은 대체 어디서 쌓은거지? 검호한테 자세한걸 물어봐도 잔뜩 찡그리며 알 필요 없다고만 하고.

이래저래 생각하면서도 착실하게 발걸음을 옮긴 끝에, 우리는 담처럼 높고 빽빽히 자라난 거대 나무들과 커튼처럼 쳐진 덩굴과 잎사귀의 장막끝에 있는 페어리족의 땅에 겨우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방인이다!"

"인간들이 왔어!"

"길 잃은거야 너희?"

마치 동화속의 한 장면같은 신비로운 풍경을 감상할새도 없이 색색의 날개들과 하이톤의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벌떼처럼 윙윙 들이닥쳐 귀를 막아야 했다. 사이는 어정쩡하게 들어올린 양손을 내리고 있었는데, 어째 나처럼 귀를 막으려했다기 보단 반사적으로 모기잡듯이 하려했던 모양이다.

"어린 인간! 왜 여기 왔어?"

모여든 페어리들중 개나리색 날개를 가진 페어리가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나는 몸을 뒤로 빼며 답해주었다.

"페어리 퀸을 만나러 왔는데……."

"우리 여왕님?"

"여왕님을 찾아왔어?"

"인간이 여왕님을 보러 왔대!"

"너도 여왕님한테 반해서 온거야?"

왜 얘기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가는거지. 페어리 퀸이 엄청난 미녀인건 맞지만 이들의 반응은 마치 '아 이놈도 마찬가지구나'였다. 이런 식으로 찾아온 사람 상대하는게 한 두번이 아닌듯 했다.

"여왕님은 너처럼 어린 인간한테 관심없으니까 꿈 깨!"

"우린 그런 일로 온게 아니야."

"응? 너 여왕님한테 반해서 온거 아니었어?"

"전혀."

솔직하게 말하자면 페어리 퀸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개인적인 감정보다 경이로움이 먼저 든다.

"그럼 왜 여왕님을 만나러 왔어?"

"잠깐 그분께 부탁할게 있어서."

"부탁?"

"여왕님은 바쁘셔서 너같은 인간의 부탁따윌 들어줄 시간 없는데."

이놈들 귀여운 얼굴로 아무렇지않게 날카로운 말을 하네. 페어리들의 수다에 질린 얼굴이던 사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혹시 지금 구와르가 여기있어?"

"구와르님?"

"그분은 리프레에 가셨어!"

"거기서 이상한 조짐이 생기고 있대!"

"아, 그, 그래? 다행이네."

그러고보니 전직 군단장중 한 명인 대정령 구와르가 페어리족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고 했었지…… 아 잠깐만, 얘가 구와르에 대한걸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대륙 회의때 오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한테 들었나? 생각에 막 잠길때 노란날개의 페어리가 재차 말했다.

"여왕님은 너희의 부탁을 들어줄 여유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

"그건 곤란해. 꽤 힘들게 찾아온데다, 급한 일이거든. 그리고 부탁을 들어주고 말고의 여부는 니가 아니라 페어리 퀸께서 결정할 부분 아니야?"

"하지만 여왕님은─"

"─무슨 일이 생겼길래 이렇게 모여있는거죠?"

앵앵거리는 페어리들의 목소리에 지친 고막의 피로를 한 방에 날려주는 맑은 목소리에 나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보석을 갈아 뿌린듯한 눈부신 날개를 느리게 흔들며, 그 자체로 빛나는것 같은 얼굴을 당당히 든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페어리 퀸, 아마란스.

"소년은……?"

"예고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여왕님."

"아, 안녕하세요!"

그녀의 등장에 사이는 곧바로 얼굴이 보이지 않을만큼 고개를 푹 숙였고, 나 역시 그녀에게 허리숙여 인사했다. 페어리 퀸은 노란날개의 페어리를 비롯한 다른 페어리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들은 뒤 말했다.

"흐음, 일단 자리부터 옮기도록 할까요? 계속 여기서 대화할 수 없으니 저를 따라오세요 소년 군, 소녀 양."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녀를 뒤따라 영역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는동안 사이는 페어리 퀸에게 죄지은 사람마냥 필사적으로 내 뒤에 숨었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페어리 퀸이 너무 아름다워서 저러나?

여왕의 거처는 거대한 꽃봉오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요정이 사는 곳답다고 해야할까? 거처 안은 의외로 꽤 넓었다. 그녀는 가볍게 손짓해 평평한 의자같은 식물들을 자라게 했고, 우리더러 편히 앉으라고 했다.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나요?"

"숲이 워낙 울창해서 조금 헤매긴 했지만 크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군요."

미려하게 웃어보인 페어리 퀸은 꽃잎색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물었다.

"저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다고 아이들에게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예."

"이계의 소년 군이 직접 여기까지 와서 제게 할 부탁이라는게 무엇인지 짐작가질 않지만, 일단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해보세요."

부드럽지만 위엄있는 목소리에 그녀가 단순히 아름답기만한 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8백년 전부터 거의 몰락한 종족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여왕. 그것이 눈앞의 여인이었다.

나는 사이에게서 병을 건네받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바로 눈치채셨겠지만, 이 안에 든건 굉장히 위험한 독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걸 만든겁니까!"

블랙윙의 겔리메르란 과학자가 발모제 개발하려가 얼떨결에 만들었답니다─라고 대답할까 했지만, 이데아에게 부탁을 하고 와라고만 했지 이런 뒷사정까지 말해도 된다고는 안했기에 말을 삼켰다.

"저희가 여왕님께 드릴 부탁은, 가능한한 빨리 그 독의 해독제를 만들어주셨으면 하는겁니다."

"그 전에 이 흉악한 물건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말하세요. 저는 이걸 만든 작자의 얼굴을 꼭 봐야겠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걸─."

독을 분석하기위해 마법을 쓰고 있는지 페어리 퀸의 눈에 푸른빛이 서려있었다.

"어떤 미치광이가 이걸 만든겁니까."

"…… 그건 말하기 좀 곤란한데요."

저 독을 제작자에 대해 설명하려면 자동적으로 입수 루트를 말해야하는데 그러면 내가 온 보람이 없어진다. 나의 대답에 여왕은 딱딱하게 말했다.

"말해주지 않으면 소년 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하, 하지만."

"이 독이 단순한 맹독이 아니라는걸 소년 군도 알고있잖습니까. 이건 사람의 정신을 죽이는 물건이에요. 그마저도 소량만 흡입했을때의 얘기고, 그 이상은 즉사해버리는 끔찍한 것이라고요."

운좋게 살아도 식물인간이 된다는게 그런 뜻이었나. 머리카락 자라게하는 약을 만드려다 머리를 죽이는 물건을 만들다니, 진짜 겔리메르란 양반 면상을 보고싶어지네.

여왕님은 굳은 얼굴로 반드시 내 대답을 듣고말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일이 곤란하게 됬다고 생각할때 옆에 있던 사이가 툭툭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 그거, 그거."

"응?"

"그 팔찌 보여줘봐봐."

아 맞다. 이럴때 쓰라고 받은게 있었지. 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꽃팔찌를 꺼냈다. 이게 왜 프리패스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데아가 괜히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왕님. 잠깐 이걸 봐주실─"

"왜 당신이 그걸 갖고 있는겁니까?!"

우아하게 앉아있던 페어리 퀸이 튕겨나듯이 일어나 내게 확 다가왔다. 가, 가까워! 너무 가깝다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그래도 부족해 등을 젖혔는데, 그대로 넘어질뻔한걸 사이가 염동력으로 받혀주었다.

"어디서 그 물건을 얻은거죠? 혹시 그에게 직접 받은겁니까?"

"그, 그 전에 좀 떨어져주실 수 있나요……."

다시는 없을 절세의 미인이 코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는건 내 심장에 매우 안좋았다. 거기다 꽃밭 한가운데 있는듯한 향기까지 훅 밀려와 홧홧 열이 올랐다. 그 노란날개의 페어리도 그렇고 페어리족은 너무 막 다가오는 것 같아.

여왕님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그러면서 내가 들고 있는 꽃팔찌를 한참 바라보았다.

"…… 너무 놀라서 무례한 일을 해버렸군요. 미안해요 소년 군."

"아아, 아─ 아닙니다."

루타비스에서 썼던 쿨팩이 필요해. 나는 필사적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야했다. 저 미모는 진짜 흉기급이야.

"그 팔찌는 제가 직접 만든 것으로, 몇 년전에 만났던 그분께 드린 물건이었거든요."

"그분?"

"모르시나요? 현 시대에 깨어난 영웅중 한 명인 검호님 말입니다."

무려 페어리 퀸이 직접 만들고 선물해준 물건이었냐! 그런 물건을 프리패스라고 떡하니 주다니, 무슨 생각인거야!

"그분께 받은게 아닌가요?"

의심쩍은 시선에 나는 퍼뜩 말했다.

"바, 받은건 맞는데 여왕님이 직접 만든 물건이라고는 못 들어서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조금 사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의심어린 눈빛에 나는 뒤로 식은땀을 흘려야했다. 이런건 미리 좀 설명해줄것이지.

"혹시 요즘 그분이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최근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서 꽤 궁금하거든요."

"아…… 그게……."

블랙윙 간부가 되어 - 이유와 속사정이 굉장히 깊지만 결과적으로 - 세계 멸망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리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기엔 상대가 너무 연륜이 넘치고. 어줍지않게 혀를 놀렸다간 곧바로 간파당할거다.

"많이, 바빠요. 좀 다쳐서 상태가 안좋긴 하지만─"

"그분이 다쳤다고요?!"

경악에 찬 얼굴이 또다시 다가오려해 이번엔 팔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

"그게 정말인가요? 검호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겁니까!"

"아니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

"그분의 부상이 중요하지 않다니요!! 설마 저 독에 중독되기라도 한건가요?!"

역시 난 거짓말같은건 못하겠어.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그러나 날 잡아먹을 기세로 바짝 다가왔던 페어리 퀸은 어느순간 휙 멀어졌는데, 보다못한 사이가 염동력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소녀 양?"

"오─ 아니, 검호 씨는 멀쩡해요. 다친건 맞지만 그건 몇 년 전이고, 지금은 약간 후유증이 남아있을 뿐이에요."

"저 말이 사실인가요 소년 군?"

"예에……."

온갖 치유 주문이 새겨진 붕대로 양 팔을 싸매놓긴 했지만 막 다쳤을때에 비하면 많이 나은거라고 하긴 했지. 막 다쳤을땐 살갛을 뚫고 피얼음이 솟았던데다 대부분의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뒤틀렸었다나. 듣기만 했었는데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가서 인상을 썼었다.

"아무튼 많이 바빠서 직접 오기 힘든 상황이라 저희한테 이번 일을 부탁했어요."

"그렇다면 이 독은 그분이 입수한 물건입니까?"

"네. 비밀리에 힘들게 얻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런 물건을 어디서 만들지는 여왕님도 잘 아실거에요."

사이의 말에 페어리 퀸은 가라앉은 눈으로 느리게 병을 흔들었다.

"그들, 인가요. 하기사 생각해보니 뻔한 답이군요."

"그러니 제발 해독제를 만들어주세요. 정말 급한 일이에요."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말에 여왕님은 자리에 앉아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알겠습니다. 여러분의 부탁은 들어줄게요."

"정말로요?"

"대신!"

힘주어 말한 그녀는 조건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건이라니, 불안한데. 나는 섣불리 사인한 계약서를 떠올렸다.

"그분께 물건을 전해주세요."

"물건이라면, 어떤 것을……?"

"별거 아닙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있던 바닥에 난 문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황금을 녹인듯한 액체와 무언가가 가득 든 병 여럿이었는데, 한 발 늦게 그것이 뭔지 알았다.

"지금도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거 술 아니에요?"

"네 맞아요. 예전에 빚은건데 지금 꽤 잘 익었거든요. 돌아가셔서 그분을 만난다면 꼭 전해주세요."

무려 술 선물이라니. 직접 만들었다는 꽃팔찌도 그렇고 대체 이 페어리 퀸이랑 검호는 무슨 관계인거야? 나와 사이는 염동력으로 술병들을 띄웠다.

"해독제는 가능한한 빨리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다음주쯤에 찾아오세요."

"고작 일주일만에 만들 수 있어요?"

"저는 페어리족의 여왕입니다."

동문서답같았지만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괜히 이데아가 하고많은 사람중에 페어리 퀸에게 부탁해라고 했을리 없지.

이후 우리는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녀와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주로 검호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진실을 말할 수 없어서 애매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분이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여왕님이 걱정할만큼 검호 씨는 약한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예전에 한 번 뵌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어쩔 수 없이 걱정이 되더라고요."

계속 듣고있으니 이 질문을 안할 수가 없었다.

"여왕님은 검호와 무슨 사이입니까?"

"예?"

"단순히 영웅중 한 명을 대한다고 보기엔 너무 신경쓰는 것처럼 보여서요."

"아아, 그랬나요?"

""네.""

나와 사이의 이구동성에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분은 저희 페어리족의 은인입니다. 과거 검은 마법사에 의해 전대 여왕, 에피네아가 타락해버렸을때 저를 비롯해 아직 타락하지 않은 이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건 검호님 덕이었거든요."

"그가 페어리족을 구했다고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직접적으로 구한건 아니고, 그분이 준 물건덕에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페어리 퀸은 차고있던 목걸이를 내밀어보였다. 그녀의 미모에 어울리지않게 색없는 투박한 보석이 꿰어진 그것은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것 덕에 어둠에 물든 독의 결계에서 도망칠 수 있었죠."

"여기에 마법같은게 걸려있나요?"

"네. 빛을 - 길을 찾아 쫓는 마법이 걸려있답니다."

듣고보니 보통의 보석과 조금 달라보이는 것 같기도하고.

"그때의 그분은 영웅이 아닌 일개 검사였고, 저는 여왕이 아닌 수많은 페어리중 하나에 불과했죠. 이걸 받았을때도 별 생각없이 그냥 주려고 하셔서 겨우 가지고 있던 물건과 교환했었답니다."

"여왕님은 옛날의 검호에 대해 알고 있으세요?"

"네. 검호님은 과거 엘린 숲, 지금은 엘리니아라 불리는 이곳에 머물렀었으니까요. 제가 그분과 만난것도 그때였습니다."

그녀는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리는듯 흐린 시선으로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평화로웠었죠."

그 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제가 여러분께 드린 술도, 그 시절 그분이 드셨던겁니다."

"그 사람이 술을 마셨다고요?"

"정확히는 그때 도움을 받은 답례로 저희가 드렸던 것이지요."

"혼자서 이걸 다 마시다니."

거기다 검호와 술은 전혀 매칭이 안되는데.

"아니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였습니다만……."

여왕님의 말끝이 흐려졌다. 왜지?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그보다 시간이 꽤 됬는데 슬슬 돌아가야할때 아닌가요?"

"아, 벌써?"

바깥을 보니 어느새 해가 상당히 저물어 있었다. 우리는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왕님과 페어리족의 배웅을 받으며 그들의 영역에서 나왔고, 루타비스로 돌아오자마자 이데아에게 왜이렇게 늦었냐며 한소리 들은다음 다시 상하차 일을 빡세게 해야했다. 검호에게 물어볼게 있었다는 사실은 뒤에서 세번째 쯤으로 밀려나버렸고, 나는 다음날까지 소파에 퍼졌다.

이 세계의 근로기준법은 어디로 간걸까.

***

검호side.

영력을 실은 검으로 두들겨맞은 스우가 침묵해있는 사이, 나는 머지않아 시작될 힐라의 작전을 망쳐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스우에게 억눌러져있던 팬텀을 어찌어찌 깨웠다.

'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야?!'

'미안하다. 그놈의 말에 감정적으로 대응해버렸다.'

'그걸 묻는게 아니잖아! 넌 대체─!'

잔뜩 화난 그에게 제대로된 설득이나 항변도 못한 나는 -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으니까 - 한참 입씨름만 벌여야했다. 그렇게 심신 모두 피곤에 쩐 상태로 베개에 얼굴을 쳐박았는데, 어째선지 평소와는 다르게 늪에 빠지듯이 깊게 잠들었다.

"…… 호! 검호!"

익숙하면서도 무척 오랜만인 목소리가 고막에 닿았다.

"언제까지 잘거야? 이제 일어나."

부드럽게 몸을 흔드는 손길에 어쩔 수 없이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올려야했고, 막 깨어나서인지 눈앞이 김이 서린 안경처럼 온통 뿌연 와중에 한 인영이 보였다.

"겨우 일어났네~"

손으로 눈을 몇 번 비벼서야 겨우 시야가 맑아졌고, 그제서야 나는 인영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큼직한 리본으로 묶은 풍성한 짙은 남색 머리카락, 실용적이기보단 장신구에 더 가까워보이는 작은 모자, 팔다리를 거의 다 내놓은 시원한 옷차림에 등에는 별장식의 기타를 메고 있었다.

"잘 잤어?"

물색 눈이 나비처럼 접혔다.

"파픈, 스타……?"

"응. 나야. 아직 잠이 덜깼어?"

그녀였다.

그녀가 눈앞에서 웃고있었다.

"아무튼 이제라도 일어났으니 다행이네. 하마터면 늦을뻔 했다고."

"어떻게……."

당신이 내 앞에 있는거야.

파픈스타는 무슨 말을 하냐는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있는게 뭐 이상해?"

"당신은 나한테─"

죽었잖아.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내뱉은 순간 눈앞에서 웃고있는 그녀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그녀는 멍하니 있는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계속 앉아있을거야? 일어나. 이제 가야지."

"…… 가다니? 어디를?"

"응? 그야 당신의 집이지."

─집?

"돌아왔잖아 우리."

아아.

이건 정말이지.

"빨리 가자."

웃고있는 그녀와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더없이 익숙한 공원의 정경에 심장이 터질듯이 뛰며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반강제로 일으켜진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갔다.

"나 당신네 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혹시 가족들한테 실례가 되는건 아니지?"

그녀의 들뜬 목소리도, 경쾌한 발걸음도, 한낮의 거리도.

"하하, 갑자기 생각난건데 아까 당신 표정 진짜 바보같았어. 얼빠진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온걸 본 것 같은─"

"닥쳐."

속이 뒤집혔다.

"뭐……?"

"이런 짓이 재밌나."

확실히 이건 내가 언제나 꿈꾸던 미래, 꿈만같은 상황이었다.

"당장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라."

하지만 그 꿈이 이딴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되었다.

"계속 그녀의 모습을 하고있으면 니놈을 두들겨팰 수 없으니까."

파픈스타는, 아니 파픈스타의 모습을 한 그것은 내 말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어떻게 눈치챈거죠?"

"진짜 그녀였다면 애초에 그 모습이었을리가 없어. 거기다 제일 먼저 좋은 식당에 가자고 했겠지. 내 집이 아니라."

2년이 지났지만, 고작 그 정도 시간따위에 그녀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사람 어쩌고하는 비유따위 절대 쓰지 않았을거다."

"…… 그건 몰랐네요."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나 해라."

나는 허리춤의 검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후후, 알았으니 검을 뽑진 말아주세요. 이곳은 나의 공간이지만, 당신이라면 왠지 손쉽게 부숴버릴 것 같거든요."

"하는 꼴 봐서."

"의외로 성격나쁘네요 영웅 씨."

니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의외니 뭐니 하는거야. 그녀의 모습을 한 놈은 나에게서 몇 걸음 물러서더니 갑자기 풍경이 녹아내렸다.

하늘도 땅도 순식간에 사라진 가운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몽환적인 빛을 뿌리는 나비들이 날개짓했다.

"그래서, 제가 보여드린 꿈은 어땠는지?"

소녀는 꽃과 깃털이 장식된 검은 실크햇을 한 손으로 벗으며 마술사처럼 인사했다. 짧게 정리된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긴 귀가 눈에 띄였다.

"최악이다."

"너무하네요. 꽤 공들여서 만든 무대인데."

"닥치고, 뭣때문에 이런 짓을 한거냐."

겨우 생각났다. 군단장 중에 꿈을 조종하는 이가 있었다는걸. 이름은 모르지만.

"제 정체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군단장이겠지. 뻔한거 아닌가."

"…… 재미없게, 너무 쉽게 맞추네요."

"용건이나 말해라."

내 재촉에 소녀는 살짝 어깨를 떨며 검은 공간 한쪽을 가리켰다. 사방이 새카만 가운데 그곳만은 어둠이 고동치고 있었다. 마치 생물의 심장처럼.

"제가 누구의 명령으로 이 일을 했을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아실거라고 생각해요."

"하, 젠장."

그래. 생각해보면 뻔했다. 왜 꿈을 조종하는 군단장이 굳이 내 꿈에 기어들어왔는지, 이런 조작질을 했는지, 그걸 또 누가 지시했는지.

나는 요동치는 어둠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중심에서부터 나뭇가지처럼 뻗어져나온 사슬들이 간혈적으로 철그럭거렸고, 앞으로 가면 갈수록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꿈일텐데 눈도 조금씩 아파왔다.

[이제 왔는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한치의 다름없는 그가, 어둠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 설명이 없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검은 마법사가 마침내 봉인에서 풀려났다.

========== 작품 후기 ==========

당초의 계획이 모조리 틀어지게되는 계기.

새로 공개된 루시드 도트가 묘하게 마음에 안들어... 머리가 커보이잖아.

@신월야 - 그렇게 심하지 않을겁니다(웃음)

@칼른 - 세계가 배척하는 존재인건 맞습니다.

@조선텔레비전 - 과연 반가운 재회가 될까요?

@SourcesMoon - 하렘 엔딩이라니... 이런건 있을 수 없어...

@sanya - 사이키커의 다음 엔딩까지 보시면 기절하시겠네요.

@라세니안 - 이번 챕터 안으로 나올겁니다.

@Jaiha - 하루에 몇 톤씩 운반한다는.

@sadgfdfh - 검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확실.

@루서스 - 검호는 파픈때의 일때문에 언데드 트라우마가 있어서 무리.

@라모니아 - 아스카는 검호만을 위한 선택을 할겁니다.

@l초코빙수 - 그 전에 불완전한 초월자가 되지 않을까요.

@마서 - 그건 파픈스타의 소원으로 될지도.

@인리연찬 - 비슷한건 나올겁니다.

@소라루 - 인게임에선 화려한 등장이지만 여기선...

@노란우산s - 당연히 세피로트의 아이디어죠. 사망플래그보다는 뭐랄까... 영 안좋은 플래그인건 맞음.

@sjdjabqh - 그 부분은 어떻게든 전개될 예정.

@레시코 - 아스카의 성별에 대해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Sisre - 그리고 상하차 알바를 뛰게됨.

@Ratios - ...제가 와우를 안해서 그쪽 드립을 받지 못하겠네요.

@건전한독자 - 따지고보면 검호와 함께 최다출연인데!

@Endogeny - 외전 루트의 레이븐은 별로 좋지않은 결말을 맞이할겁니다.

@대어의예감 - 기내식은 심부름 갔다가 페어리퀸의 적극적인 공세(?)에 당황함.

@ReFrante - 반드시 사망해야만 헤어지는건 아니잖아요? 안심하세요.

@Yoontlemin - 키네시스는 머리가 좋아서인지 나이에 비해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합니다. 뭐 그래봤자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던 이들에 비하면 많이 떨어질 수 밖에 없지만요.

@x흑란x -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지위를 떠나서 편하게 얘기합니다. 이데아쪽이 더 연상이지만 나이차이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케르닉 - 스우때문이긴 하지만 맞아서인지 꽤 빡친 상태.

@Eluines - 많이 진도를 빼긴 했지만 과연 완결시킬 수 있을까 저 자신도 의문스럽긴 하지만요...

@적현월 - 뭘까~요?

@갓타치 - 사망플래그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알 수 있겠죠.

@칼크래프트 - 따지고보면 검호가 메이플 월드에 온 이래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는 엘린 숲에서 머물때였습니다. 레알.

@비탄의과학자 - 무슨 플래그를 꼽긴 했습니다.

@렙파드 - 하핫!

@Blake117 -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검호와 연합, 군단장(특히 윙마스터)까지 혼파망 되는 그런 챕터가 될겁니다.

@프라워스 - 희망은 몰라도 꿈은 있습니다.

@책벌레씨 - 좀 더 말하자면 그 사람을 위해 한 행위가 꼭 그 사람에게 좋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류동지 - 아스카라면 진짜 그런 일도 해주겠지만 검호가 그런걸 부탁할리가 없잖아요!!

@그냥마법사 - 방학이라 새벽까지 새서 쓰기도 합니다... 그래도 늦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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