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56화 (156/208)

<--  -->  검호side.

"무슨 꼴이냐 그거."

하얀 마법사 때의 모습에서 컬러링만 바뀌었잖아. 팔레트 스왑이냐? 내 물음에 검은 마법사는 가장자리에 금장이 둘러진 후드를 넘기며 대답했다.

"분신이니 본체랑 모습이 다른게 당연하지. 그리고 기왕이면 익숙한 쪽이 좋지 않은가."

"나한텐 니 시체같은 모습이 더 익숙한데."

내 심장 뚫어버리고 몸까지 터뜨렸던 그 모습 말이지. 날선 말에 검은 마법사는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 없다. 그땐 다소 감정이 격해져 있었거든."

"산뜻한 얼굴로 개소리 하지마라."

"설마 사과라도 바랬나?"

"하, 그럴리가."

만약 사과나 그 비슷한 소릴 지껄였으면 바로 칼뽑아서 저 자식을 별모양으로 자르기위해 달려들었을거다. 날 그 지경으로 만든 주제에 고의가 아니었어요~ 같은 소리를 해? 사람 놀리는 것도 유분수지, 쳐 뒈질 말을.

저놈에게 몇 번이나 죽임당하긴 했지만, 적어도 거기까지 가는 길은 내가 선택했다. 뻔히 질걸 알면서 싸우겠다고 나선 건 나였고, 더 쉽고 안전한 방법이 있는걸 알고 있음에도 문을 연 것도 나였다. 그런 선택을 하면 죽을걸 다 알면서도 한게 다 난데 저놈에게만 따지는건 바보짓이다.

아 물론 그거랑 감정은 별개. 그렇게 당했는데 화가 안나면 사람이 아니지.

"내가 여기있는건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지."

"찾아오라고 일부러 이런 시골 촌구석으로 유인한거 아니었나."

"그건 맞다만, 어렴풋이 그대라면 왠지 가능할거라 확신하기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찾아낼지는 모르겠더군."

뭐야 그거. 힘은 더럽게 초월적이면서 정신머리는 존재하고 있기는한지 의문이 드는 누구들이 생각나는 얼빵함이잖아.

나는 품안을 뒤져 이곳이 목적지라고 가리켜준 이정표를 꺼내 놈에게 던져주었고, 놈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 이건?"

"여태껏 잘 써먹었다. 무슨 원리인지 몰라도 장소뿐만 아니라 사람 추적도 되더라."

놈은 손안의 그것을 보고 점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만도 하지. 내가 저놈에게 던져준 물건은 과거 8백여년 전, 그가 아직 하얀 마법사였던 시절 엘린 숲을 나가던 나에게 기념으로 준 선물이니까.

세상에 실존하기만 하면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직선 경로로 알려주는 나침반. 그것을 알아본 놈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아직도 있었나?"

"애초에 난 가진게 거의 없었지만, 내가 갖고 있던 물건중에서 8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남아있던게 그거 하나뿐이었거든. 어떻게 생겨먹은건지 지금 시대에도 멀쩡히 작동하고 있고."

덕분에 프라이쉬츠 추적이 가능했지. 현 군단장중에서 가장 강하면서 위험한 놈의 행방을 그나마 쫓을 수 있던게 저거 덕이었다.

"프, 하하하!!."

"뭐가 웃기냐."

분신이라 그런지 본체처럼 웃음소리때문에 몸을 마비되지는 않았지만 속이 꼬이는건 어쩔 수 없었다.

"아하하…… 이걸 그대가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흐, 심지어 이걸로 나를 찾아오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군."

"그러니까 뭐가 웃기냐고."

"모르겠나? 뭐 그것도 상관없네. 아무튼 다시 받게."

놈은 나침반을 내게 돌려주었다.

"이걸 나한테 돌려주면 계속 방해받을텐데?"

"그 물건은 일찍히 내가 그대에게 준 물건. 그대의 것이지."

진짜 뭐가 웃긴건지 아직도 웃음을 피식피식 흘리던 그에게 나는 물었다.

"근데 이거 무슨 재질이길래 8백년동안 멀쩡한거냐?"

초월자가 되기 이전이라고는 하나, 그 당시 최고의 마법사였던 하얀 마법사가 만든거니까 대충 그러려니~ 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기 짝에 없다. 수 백년을 쌩으로 버틴 나침반이라니 뭐야 그거. 심지어 나무 재질인데 썩은 기미조차 없다.

"그 나침반 재료말인가? 운 좋게 생명의 초월자 세계수의 가지가 들어와서 그걸 가공해다가 만들었었지."

"…… 하필 세계수냐."

영 안좋은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생명의 오버시어를 봉인에서 풀자마자 끌려와서는 걔한테 머리부터 발끝까지 먹혀버렸지 알리샤가. 아직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속이 안좋아진다.

"그러고보니 어느순간부터 세계수가 존재하지 않더군. 혹시 오버시어한테 흡수되었나?"

"먹힌지가 언젠데 그걸 이제와서 묻는거냐."

"흠, 그때 그 아이가 찾아왔을때부터 짐작했지만 역시나인가."

"너 생명의 오버시어를 만난적이 있었어?"

"아아."

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와 애송이 놈들에게 봉인당해주었던 그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었지."

"뭐?"

"별 말 없었다네. '무섭나?', '난 널 잡아먹지 않는다'. 대충 그런 말들을 하고는 핏덩어리가 되었던 그대를 데리고 가버렸지."

아무래도 생명의 오버시어는 그때 사실상 죽었던 나를 가지러 직접 시간의 신전까지 행차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하고 끝냈던것 같고. 심지어 봉인식에 빵꾸낸것도 그 아이였나보네.

"솔직히 좀 긴장했는데 봉인석중 하나를 뽑아다 사탕처럼 빨아먹고는 그대를 데리고 휙 가버려서 허망하더군."

"너 초월자면서 긴장씩이나 했냐……."

"초월자이기에 긴장할 수 밖에. 오버시어가 어떤 존재인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것 같나?"

하긴 그렇지. 눈앞의 놈은 빛의 초월자, 지금의 세계를 나락으로 끌고가려는 쌍두마차중 하나인 빛의 오버시어의 대리인이었다.

덧붙여서 다른 쌍두마차중 하나는 생각만해도 깊은 빡침이 밀려오는 시간의 오버시어다. 본인은 그럴 생각이 아니라지만 지금 그년은 봉인석을 안먹이면 깨어나자마자 차원을 싹 날려버릴 희대의 핵폭탄이니까. 그런 년이 이 망할 세계를 재창조하고 내 소원을 들어줄 신이라는 사실에 이젠 한숨조차 안나왔다.

"…… 이 얘기는 이쯤하고."

여기까지 와서 그놈들 떠올리고 싶지 않아. 나는 놈에게 물었다.

"너 대체 뭘 꾸미고 있는거냐."

"흠? 이미 알고있지 않나. 이미 죽은 현재의 세계를 멸망시키고, 빛이 존재하는 완전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나의 목적이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어. 내가 지금 묻는건 왜 군단장들을 전혀 활용하고있지 않느냐야."

놈의 새빨간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전혀라? 그대는 지금까지 대륙에 혼란을 일으킨게 여태 누구라고 생각했는가?"

"내가 똑똑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 군단장들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못 알아챌 정도는 아니야. 만약 놈들이 작정했으면 혼란이 아니라 학살을 일으켰겠지."

노바족들이 뼈빠지게 노력하긴 했지만, 현재까지 지역별 피해가 미미한건 - 주민들이 들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8백년 전 루디브리엄과 리프레 참사를 겪은 내 기준으로 말하자면 - 군단장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고 설렁설렁 습격한 덕이 제일 컸다. 당연하지만 적인 그들이 우리 좋으라고 그런 일을 했을리 없고, 뒤로 꿍꿍이가 있으니까 그랬을게 뻔하다.

아니, 다 떠나서 군단장중에서 제일 강하고 맛이 가 있는 프라이쉬츠가 지 꼴리는대로 날뛰지않고 잠잠하다는 것부터 수상하잖아. 놈은 약간 고개를 기울이다 입을 열었다.

"…… 그대의 추측대로 나의 수하들이 계획하고 있는게 있기는 하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떤 계획이든 결국 그 끝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을텐데."

"그걸 대답이라고 하는거냐. 목표가 뭔지 알아도 그 수단을 모르는데 어떻게 막아?"

"우문이군. 내가 왜 이쪽의 계획을 그대에게 다 알려주겠나."

말 많은 악당 클리셰를 시원하게 깐 놈이 슬며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거기다 이번 계획은 내가 생각해낸게 아니라서 딱히 말할게 없네."

"하?"

"프라이쉬츠가 더 지지부진하게 끌기 싫다고, 한 번에 끝낼 방법이라며 가져온게 이번 계획이라 말이지."

"그놈은 니 부하잖아?"

"대외적으로는 수직 관계지만 실제론 그놈도 빛의 오버시어 직속이라 수평이네. 명령 계통이 조금 꼬인 셈이지."

"……."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왤까. 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하소연하듯이 말을 이었다.

"거기다 현 시점에선 부하들도 말을 영 안듣고."

"그, 그 정도냐."

"아까 그대가 말한 프라이쉬츠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고, 아카이럼은 그놈을 도와 계획을 완성하는게 날 충성하는 길이라 생각중이야."

머리에 풍 맞았나. 그런 혼잣말이 들린것 같아 내 귀가 잘못된건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반 레온은 아예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그나마 힐라와 쌍둥이들이 낫긴한데 큰 도움은 안되고 있지."

"새로 영입한 놈들 있지않았나? 내 꿈속에 기어들어온 그 여자처럼."

내 말에 놈은 훗, 자조하듯이 웃었다.

"루시드말인가? 확실히 그녀의 능력은 특별하지. 그래서 직접 영입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만큼 사용할 수 있는 분야가 한정적이라네."

"그럼 데미안은?"

"─지금 데미안이라고 했나."

확 고개를 돌리며 마주친 놈의 흉흉한 눈에 나는 알았다. 그놈이 제일 문제구나. 생각해보니까 인게임에서도 딱히 검은 마법사에게 충성스러운 놈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마음같아선 그 잡초대가리 버리고 다시 데몬을 영입하고 싶은 심정이네. 받을게 있으니 따르겠다는 마음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두머리란 놈이 그런식으로 행동하니 그놈 휘하의 부하들까지 덩달아 똑같이 행동하는게 문제야!"

"아, 그, 그러냐……?"

"마스테리아에서 군단이 아니라 자기 팬클럽을 데리고 왔다는 생각밖에 안드네. 아니면 중증 광신도 무리들."

심란하다. 옛날에 봤던 그 꼬맹이가 그렇게 변했다고? 물론 8백년이면 한 사람이 바뀌기에 차고넘치는 시간이다. 거기다 나나 영웅들과는 달리 걔는 그 시간을 그대로 살았을테고, 마스테리아 환경도 막장이니 바뀔 수 밖에 없겠지만.

"8백년동안 둘 밖에 영입안했나?"

"하나 더 있긴한데 적당한 관리직이 필요해서 대충 뽑은 놈이니 시간이 지나면 다른 놈들에게 죽임당할게 뻔히 보여서 별 기대 안하고 있네."

그 뭐더라, 루시드랑 데미안 말고 또 하나 더 있던 신 군단장이. 헬리코박터 윌이었나. 오래되서 기억도 잘 안나네.

"…… 군단장들은 예나 지금이나 콩가루군."

이 말이 나올수밖에 없는게, 원래 세계에서야 유저들 평가였지만 여기선 무려 놈들 상사인 검은 마법사 공인이다.

"그렇게 부하들이 개판이면 능력좋으면서 말 잘 듣고, 성격 좋은놈 뽑지 그랬냐?"

"그런 놈이 왜 군단장이 되려 하겠나."

"아."

듣고보니 그렇네. 유능하고 인성 좋은 사람이 군단장이 되려할리가 없잖아. 그는 여전히 시선을 돌린채 다른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옛날엔 좀 나았는데……."

"오른팔이라는 놈과 책사라는 놈이 죽어라 물어뜯었던 때가 나았다고? 뭐 그때는 지금보다 숫자라도 많았으니 그럴수도 있겠네."

놈은 입을 다물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심지어 결전의 날 서로서로 통수 친 애들이 몇이었냐? 과반수 이상이지 않았어? 그중엔 널 대놓고 배신한 놈도 있었잖아."

"그 일은 나도 어이없던 거네!"

"당연히 예상하고 있지 않았어?"

"하, 예상은 무슨."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분명 리프레 공습을 명령했고, 슬슬 끝났다 싶을때 보고를 기다리고있는데 갑자기 놈이 쳐들어와서 '대체 왜 그런겁니까?!'라고 소리치는걸 보고 내가 뭔 생각이 들겠나? 그러고는 자기는 도구였다느니 뭐니 말하며 달려들어서 어이없었네."

옛날에 데몬에게 배신당한 놈이 '에? 난닷테?'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망상을 펼쳤었는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굉장히 황당했을 거라는 추측은 맞았던 모양이다. 리프레 공습이란 말에 자동적으로 안면근육이 일그러졌다가, 이어지는 말에 진지한 주제임에도 헛웃음이 나오려해 꾹 참아야 했다.

데몬이 이 말을 들었으면 발광하지 않았을까.

"이게 뭔 일인가 생각해보니 평소에 사이나쁜 아카이럼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거라 짐작하는건 어렵지않았지. 그래도 제일 총애하던 놈이라 죽이진 않고 적당히 제압했었네."

"그랬으면서 우리가 쳐들어갈때까지 현재의 방에 방치해뒀냐?"

"나중에 아카이럼을 찾아가보니 프라이쉬츠랑 같이 영 안좋은 상태로 있더군. 화풀이로 그의 생가를 공격했다가 그의 동생의 폭주에 휘말렸었다나? 어이없어서, 아무튼 둘 다 벌을 주려고 했는데 배신자를 대신할 다른 쓸모있는걸 바치겠다고 해서 어찌어찌 넘어갔네. 착각이긴 했어도 내 방어막까지 깬 배신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고."

"…… 그 바치겠다는 놈이 설마."

그는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저었다.

"대신하긴 개뿔이. 말 안듣는 늑대 무리만 한 가득 몰려왔어. 마음같아선 아카이럼이고 데미안이고 다 쳐내고 싶은데 그러면 남는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거지."

하, 하하…… 미친 그게 뭐야.

그러니까, 미래에 데미안을 군단장으로 영입시키는걸 조건으로 아카이럼이랑 프라이쉬츠의 병크를 묵인해주고 어쨌든 배신자가 된 데몬을 쳐냈다는 뜻이잖아? 형이나 동생이나 뭐가 씌인 막장 인생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니, 어머니도 포함인가.

"그래놓고 데몬을 다시 영입하고싶다는 개소리를 하는거냐?"

"말이 그렇다는거지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있네."

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그 버릇없는 놈은 제 어미를 살리기 위해 나를 따르고 있지만, 사실 나나 새로운 시간의 초월자도 죽은 자를 살릴 순 없다네. 애초에 초월자라 해도 죽은 자를 살리는건 불가능한 일이라서 말이야."

데몬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상하신 분. 자주 만난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찾아가서 뵌게 전부였지만 내가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 중 손에 꼽을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살리고 싶었는데…… 실패했지.

생명의 오버시어라면 그 분의 부활도 가능하겠지만, 아이의 성격상 그런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 애를 속여서 이용해먹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렇지."

"사실을 알게되면 걔도 배신하겠네."

군단장이 되면 누군가를 통수친다는 저주라도 걸려있나.

"그건 모르는 일이지. 오히려 현실을 부인할 수도 있네. 8백년간 결코 살아날리 없는 시체만 보관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건 힘든 일이니까."

"쯧."

일리있는 말이다. 자기가 해온 일이 사실 아무 의미없었다는걸 인정하는건 힘든 수준이 아니라 한사코 부인하고 싶을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니까. 이래서야 설득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놈은 제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단풍잎을 툭툭 털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계속 서있기도 뭐한데 검호 자네도 앉는게 어떤가?"

"아…… 그래."

나는 그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고 주변에 널려있는 단풍잎을 대충 치워냈다. 이래저래 충격적인 것들을 들어 두통이 몰려오니 그의 말대로 앉긴 해야할 것 같다.

"이번엔 내가 묻겠네. 그대는 어떻게 2번이나 부활할 수 있었나."

날 2번이나 죽인 원흉이 하필 그딴걸 묻는거냐.

"처음엔 심장을 뚫었고, 두 번째엔 몸의 구조를 무너뜨렸지. 그럼에도 살아돌아와 지금 내 앞에 있으니 그 방법이 궁금해져서 말이야."

"…… 지금 세상에 나를 부활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잖아."

"생명의 오버시어인가? 그럼 그때 그 악사 여자는 오버시어를 찾아다녔던거로군."

파픈스타. 당시 그녀가 아스카와 함께 생명의 오버시어를 찾기위해 메이플 월드 곳곳을 돌아다녔었고, 그러는 동안 파픈스타를 잡아가려는 군단장들과 맞닥뜨릴때마다 싸웠다는 얘기를 아스카에게 어렴풋이 들었었다. 실제로 그 둘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고보니 현 시대에 들어선 그 악사 여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더군. 그녀쯤 되는 사람이 조용히 있는 건 말이 안되고, 지금 그 악사는 어떻게 됐─"

"그런건, 묻지, 마."

키네시스도 그렇고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필 그걸.

"거, 검호?"

"죽었어. 몇 년 전에 죽었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 얘기는 하지 마.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그랬…… 나? 그래서 루시드의 꿈에 그런 반응을 보였던거로군."

"알면 입 좀 다물어."

"미, 미안하네."

"왜 사과하는건데?!"

무얼 하려고 했던건지 그는 어정쩡하게 손을 올리고 있다 내 고함에 퍼뜩 내렸다. 뭐냐? 토닥여주기라도 할 생각이었냐. 나는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다행히 놈 앞에서 우는 추태를 보이진 않았다.

"그녀의 능력은 전적으로 고치는데 특화되어 있어 당연히 지금까지 살아있을줄 알았는데, 이미 죽었다니 유감이군."

"살아있었으면 뭐, 예전처럼 끌고가서 힐링 셔틀로 만들게?"

"아니. 그때 그대에게 입었던 상처는 이미 회복되었네."

뭐? 놈은 로브의 앞섶을 열어보였다. 너무 하얘서 병에 걸린 것 같은 가슴팍에 명치를 시작으로 쭉 아래로 이어진 불그스름한 색의 굵은 선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멱살을 잡아당겨보니, 꽤나 최근에 새살이 돋은 흔적이었다.

"씨발 어떻게 나은거야?"

"잠깐. 말이 험하네 검호."

"내가 그때 얼마나 개고생해가며 겨우 한 방 먹였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회복한거냐고!"

"아무렇지 않게는 아니었다만……."

빅토리아 반도에서 놈과 맞서 싸웠던 그 날, 내가 목숨걸고 가한 최후의 일격은 수 년간 그를 약화시켰다고 그녀에게 들었으며, 봉인을 했던 순간까지 상처가 조금도 낫지 않은 것을 확인했었다. 근데 이젠 나아버렸다. 즉 만전의 상태란 뜻이다.

"이건 분신이라 그대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본체에도 똑같은 흉터가 있네."

"썩을. 진짜 무슨 방법으로 고친거야?"

"그때 검호 자네가 가지고 있던 시간의 힘을 일부 빼앗아서 봉인되어 있는동안 고쳤지."

욕지꺼리가 나왔다. 마음같아선 당장 검 뽑아서 달려들고싶은데 눈앞의 놈은 분신이라 의미가 없다.

"그나저나 슬슬 손 좀 놓아주게. 찬바람 들어와서 춥네."

"좀 닥쳐봐. 또 목숨걸고 달려들어서 같은걸 새겨야하다니, 생각만 해도 죽을 맛이라고."

"…… 웃긴 소리로밖에 안들리겠지만 그건 참아주게. 그때 자네에게 입은 상처, 진짜 아팠으니까."

"하아?"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는 내 손을 떼어낸뒤 옷깃을 여미며 한탄했다

"상처의 시간이 폭발적으로 가속해서 뼈와 장기가 다 상할정도로 심하게 악화되었던데다,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고 피도 거의 안멈춰서 초월자가 된 이래 처음으로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거든."

"그, 그 정도였나?"

"자네의 시간 가속 능력은 사람을 오래오래 악랄하게 괴롭히는 류의 것이라는걸 모르나?"

이 악물고 날린 일격이라 아주 제대로 발동되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난 그런 힘이 있는 것도 몰랐다는게 함정이지만.

아니 그보다.

"널 쓰러뜨리려면 당연히 수단방법 안가려야하는데 뭘 쓰라 마라야. 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때보다 더 크게 한 방 먹여줄테니까 각오해라."

"윽."

검에 베인 순간이 떠올랐는지 흉터부위를 붙잡으며 질린 얼굴이 된 놈을 보며 나는 작게 콧웃음을 쳤다.

"크…… 그대는 여전히 날 적대시하는군. 기만자가 한 말이라 조금 의심스러웠는데."

"기만자? 그거 세피로트를 말하는거냐."

"놈이 자네와 함께 한다는걸 알았을때 대체 어떻게 변했길래 저런걸 곁에 두고 있는건가 걱정했는데, 과민했던것 같군."

"완전히 신용하는게 힘든 놈이란건 인정하지. 하지만 필요한 사람이야."

근본이 썩은 놈은 아니다. 하지만 무작정 믿기엔 어딘가 불안하다. 그것이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대답에 그는 조용히 나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대도, 많이 변했군."

"변한게 당연하잖아. 여기서 몇 년을 있었는데."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대를 바꾼건가."

"그런걸 겪었는데 안바뀌면 사람이 아니잖아."

향후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되려 적응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바뀐 것 같다.

"근데 나도 내가 이꼴 날 줄은 몰랐어. 만약 이 세계에 막 왔을때의 나한테 '니가 나중에 이 꼬라지 될거다'고 말했으면 미래의 내가 하는 말이라도 절대 못 믿었을걸."

"푸흐, 그것도 그렇겠군."

"여기서 평생 겪을 고난랑 시련은 다 겪은 느낌이라고."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건가?"

나는 인상을 쓰며 그에게 대꾸했다.

"할 것 같냐. 다 알아버렸는데. 이젠 진짜 포기할 수 없다고."

"'알았다'고 한다면?"

"너를 시간의 신전에서 처음 만났을때 니가 한 말의 뜻을 이해했어."

"흠?!"

"인정하고싶지 않지만, 니 방법도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중 하나인건 확실하지."

이대로 내버려두면 세계는 확실하게 멸망─ 이미 멸망한 상태이니 완전소멸쪽이 정답이다. 시간의 오버시어가 깨어나 재창조하거나 하지 않는이상 이 세계는 정말 머지않아 소멸되는게 확실하게 정해져있고, 소멸과 동시에 지금 살아가는 이들도 같이 사라진다.

그의 목표는 세계가 소멸하기 전에 생명들을 모두 죽임으로 빛의 오버시어를 깨우고, 그를 통해 세계를 안전하게 멸망시킴으로 생명들의 영혼만이라도 구하는 것…… 이라 볼 수 있다. 방법이 말도 안되게 과격하지만 일단 그렇다.

"그걸 알면서 그대는─"

"하지만 그건 니 방법이지 내 방법이 아니야. 나는 니 방법에 동의 못해. 절대로."

모든 생명이 죽고 세계가 멸망하는게 구원의 한 방도라니, 넌센스도 그런 넌센스가 없다. 놈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검호 그대도, 나름의 방법을 찾은건가?"

"그게 아니라면 옛저녁에 다 때려치웠겠지."

"아아…… 그런건가."

언덕을 타고 바람이 불어왔다. 새빨간 단풍잎이 흩날리는 광경은, 마치 불씨가 퍼지는 것처럼 보였다.

"자네와 나. 둘중 누가 먼저 자신의 방법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느냐─가 된거로군."

"그런셈이지."

"흐, 후흐흐, 하하하……!"

곱상하게 생긴 것 답지않게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허탈함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어이없는건지. 아무튼 놈은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한참 그렇게 웃었고 나는 그걸 바라보았다.

그가 느리게 일어났다.

"그대와 대화하는 것은 이런거였군. 좀 더 일찍 해볼걸 그랬어."

"내가 예전에 말했을땐 적나라하게 비웃더니 니가 그러면 어쩌라는거냐."

"이걸로 끝이지않나."

나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나며 단풍잎이 붙은 망토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8백 년 만의 해후를, 본격적으로 나눌때니까."

그에게서 터져나온 어둠의 불길이, 섬을 뒤덮을 기세로 뻗어나갔다.

***

side out.

회의장내의 심각한 분위기를 한 번에 날려버린 팬텀은 당황한 얼굴의 힐라를 즐겁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첫째, 혈통의 문제. 아리아 황제에겐 자식이 없었어. 그 조카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받은건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까 내가 그 후손이라고─"

"아니. 넌 그들의 후손이 될 수 없어. 샌님의 말대로 황제의 혈통을 가진 귀족들이 지상에 내려간건 사실이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대를 잇지 못했거든."

스틸 스킬을 사용한 팬텀의 눈동자에 시그너스와 힐라가 번갈아 비춰졌다. 상대의 마력을 간파하는 효과만은 대마법사인 루미너스와 프리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만큼 통찰에 극대화된 그 스킬은, 모종의 기술로 억눌려진 힐라의 흑마력을 훤히 꿰뚫어보이도록 했다.

"8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시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온갖 전쟁에 그들은 사멸당한지 오래라서 말이야."

"하, 하지만!"

"특히 3백년 전 전쟁이 결정타였지. 뭐, 그럴만도 해. 여제의 후손중 하나였을 그들은 군단장들이 지우고 싶었던 역사를 잘 알고 있었을테니…… 어떻게든 뿌리뽑고 싶었겠지."

군단장들의 전쟁을 통한 역사 조작. 거기에 황제의 혈통을 지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까. 그렇게 제 손으로 없앴을 이들로 가장해 온것도 우습다.

"나는 오히려, 너의 정체가 수상한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둘째. 원래 성인이 되지못한 황제는 몸이 약해. 신수의 힘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본디 황제에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그가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황제와 잘 아는 사이였으니까.

"오랜 시간동안 황제가 없어서 잊혀진데다 어린 상태로 즉위해서 약해졌을 뿐이지, 지금의 여제님도 성인이 되면 힘을 다 받아들임으로 정상인처럼 활동할 수 있어. 그게 지금이 아니라고 무작정 가짜라 매도하면 안되지."

시그너스를 포함한 회의장내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셋째. 스카이아가─ 에레브의 보물이라고 했나?"

여유로우면서 가벼운 목소리 아래에 은은한 노기가 깔려있음을 감지한 루미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괴도 팬텀을 끌어들이기 위한 거짓 소문이었을 뿐, 스카이아는 아리아 황제가 아끼던 평범한 보석에 불과해."

"웃기지마! 대체 당신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지?!"

"…… 믿지 않을수가 없을텐데?"

마력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노바족들은 곧장 전투대형을 갖추고 창을 겨누는 행색을 취했고, 힐라와 시그너스의 사이에서 일어난 까마귀 깃털같은 회오리가 가라앉으며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남자, 팬텀은 로브를 벗어던지며 화려하게 본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스카이아는 바로 나─ 괴도 팬텀의 손에 있으니까!"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된 페르소나 아래로 보라색 눈이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거짓따위가 아니다. 힐라는 그 사실을 직감했다.

""팬텀!""

"오랜만이야, 어여쁜 엘프분들."

"너무 늦었잖아 너!"

"글쎄. 클라이막스에 딱 맞춰 왔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끝나면 나좀 보자 좀도둑."

"그건 사절이야 샌님."

메르세데스와 헬레나, 아란, 루미너스와 짧게 주고받은 팬텀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의 힐라를 보았다.

"어째서 니놈이……."

"내가 왜 스카이아를 갖고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네? 간단해. 다른 지역에까지 소문이 퍼질만큼 유명한 보석을, 이 괴도 팬텀이 노리지 않았을리가 없잖아? 거기다 아까 말했다시피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소문이었고."

쉭! 날카로운 기세로 던져진 카드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붉은 보석을 산산히 부쉈다. 앞 뒤에서 당혹성이 울렸다.

"아직도 연기를 계속할셈인가 힐라?"

그는 케인을 들었다. 궁수들에게 전해지는 집중력을 비약적으로 높히는 버프가, 이어서 전사들이 사용하는 일시적으로 육체를 강건하게 해주는 비기가 그의 몸에 걸렸고, 마지막으로 빛에 휘감겨 활의 형상이 된 케인에 폭풍을 응축한 화살이 매겨졌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게 어때?"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분노로 몸을 떨고있던 그녀는 찢어죽일듯이 팬텀을 노려보다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 뭐야 너. 그 꼴은."

"하아?"

"8백년 동안 굉장히 웃긴 꼴이 됐잖아?"

현 시대 최고의 네크로멘서일 힐라는 지금 팬텀의 상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몸에 두 개의 혼. 하나는 팬텀 본인이라 쳐도 나머지 하나쪽이 굉장히 익숙하다. 그녀 자신과 같은 어둠에 속한, 아니 어둠 그 자체인 힘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여태 조용히 있던 그것이 움직였다.

"─아아. 사정이 꽤 있었거든."

멀찍히 떨어진 곳에서 그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던 은월은 침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투는 다르지만 저 사이하게 빛나고 있는 보라색 눈은 분명!

윙마스터 스우.

"무슨 사정이 있는데 그런 꼴이야?"

"프라이버시는 침해하지 말라고. 그보다 수다는 이쯤하는게 어때? 지금 상황이 안보이나봐?"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거야."

"유감이지만 당신한테 알려줄 의무는 없어."

"흥, 어째 그런 부분은 전혀 변하지 않았네."

의심받지 않도록 일부러 호의적이지 않게, 묘한 뉘앙스의 대화를 이은 스우는 특유의 교활한 미소를 슬며시 지어보였고, 그것을 본 힐라는 상황을 대충 유추했다. 머리 하나는 아카이럼만큼 잘 굴러가는 저놈이 또 무언가를 꾸미고 있구나. 그럼 더이상 자신이 할건 없다. 나머지는 저녀석이 다 할테니.

둘의 기묘한 대화에 뒤에 있던 영웅들은 스산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팬텀의 얼굴이 정면에서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면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을지도 모르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이는 없었다. 단지 루미너스만이 무언가에 반응하듯 끓어오르는 어둠의 힘에 인상을 쓰며 속을 눌렀을 뿐이다.

굳어가는 분위기를 흝어본 카이저가 힐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싸우면 아무리 저희라도 승산이 없습니다. 거기다 당초의 목적을 이루는건 지금 처한 상황을 볼때 사실상 불가능졌고, 퇴각하는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듯 합니다."

"하……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뭐, 좋아."

억누르고 있던 흑마력이 한 순간에 터져나왔다.

금갈색의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게 물들었고, 가련하면서 기품있는 얼굴은 도발적이고 요염한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팔다리를 거의 다 내놓은 유혹적인 차림이 된 그녀는 검은빛이 일렁이는 지팡이를 들었다.

"이번만은 물러서도록 하지."

"가게 내버려둘 줄 알아?!"

곧장 의장석을 박찬 아란이 순식간에 힐라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카가가각─! 거친 금속음이 울렸다. 재빨리 나서 아란의 폴암을 막아낸 카이저는 손저림을 참으며 대검을 고쳐쥐었다.

"이놈이……!"

"그냥 보내주십시오. 지금 상황에서 싸워봤자 손해니까요."

"그건 니들 사정이지!"

설산의 냉기를 머금은 폴암이 연달아 휘둘러졌다. 카이저는 이를 악물며 불꽃을 두른 대검으로 그 모든 공격을 받아냈고, 땅이 좀 패이고 제자리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어떻게든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힐라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야. 메이플 월드는…… 곧 그분의 손에!"

음산하게 빛나는 지팡이를 내려찍음과 동시에 그녀의 몸은 새카만 모래바람에 휘감기며 자취를 감췄다. 에레브 안에서, 이 자리에 되어있는 갖가지 마법대책들을 보란듯이 비웃으며 간 것이다.

힐라가 사라진걸 확인한 카이저는 빠르게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겔리메르에게 받은 소형 워프 게이트의 작성은 일찍히 끝났다.

"다음에 만날 땐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길."

"잠깐, 너 설마!"

노바족들은 식물과 기계가 합쳐진 기묘한 형태의 구조물 속으로 빨려들어갔고, 아란은 그런 카이저의 뒷모습에서 인간에게는 없을 뿔과 꼬리, 날개를 보았다. 강한 열기의 영향으로 홀로그램 장치가 고장나 본 모습이 드러났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가짜 여제 소동이 일단락되는걸 다 본 은월은 불안한 눈으로 팬텀을 응시했다. 스우가 여기까지 오게 해달라고 했던 이유는 간만에 힐라와 만나고 싶었기 때문, 그것이 이루어졌으니 빙의는 이제 풀었을테지만 실제로 그럴거라는 생각은 안들었다.

오히려.

'스우가 여제를 암살하려 할 가능성이 있어. 주의해.'

다른 곳도 아니고 에레브까지 오고자 한다면 그 외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힘들다. 이런 자리에서, 막 사건이 해결된 이 순간 팬텀의 몸으로 여제를 암살하면 어떤 파급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한다.

팬텀의 몸을 뒤집어쓴 놈이 웃으며 여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어둠의 힘을 느낄법도 했지만 좀 전에 힐라가 마구 흩뿌린 흑마력때문에 제대로 감지못하고 있었다. 스우가 무언가를 꾸미는걸 알고 가능한한 도움을 준거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점점 커졌고, 그에 비례해 은월의 초조함도 커졌다. 달려들 타이밍을 재고있던 그는 진짜 스카이아를 꺼내 시그너스에게 쥐어주는 팬텀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다─

'─웃어?'

은신하고 있는 이쪽을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방아쇠나 다름없는 그 행위에 즉시 튕겨나듯이 자리를 박찬 그는 검과 바람의 정령이 깃든 철조를 휘둘러 둘을 갈라놓으려 했다.

분명 갈라놓으려 했는데─

놈의 몸이 갑자기 틀어지며, 공격의 궤적에 뛰어들었고

철조에 깊숙히 꿰뚫린 하얀 제복 위로 붉은색이 퍼졌다.

"패, 팬텀!!"

"블랙윙의, 개따위가…… 지금, 누구를 노리는거야!"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

세피로트side.

"사실이다."

"…… 뭐?"

"니가 한 질문이 사실이라고 했다."

아이의 대답에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던 각종 생각들이 녹아내리며 세 단어들만 둥둥 떠다녔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대답이 됬으면 이제 돌아간다."

"자, 잠깐만!"

"뭐냐."

다급히 아이의 천자락을 잡았으나 정작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잡은거지? 무언가를 말하려는듯 입이 달싹여졌다.

"그…… 부, 부탁이 있어."

"부탁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걸까.

"형씨가, 그 사실을 모르게 해줘."

"뭐?"

"완전히는 아니고, 그냥 이 세계에 있는 동안만 그 사실을 모르게 해줘.

아아. 나는 정말.

최악으로 이기적인 놈이야.

내 말에 생명의 오버시어는 북해처럼 서늘한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그대로 배를 잡고 뒤집어지도록 웃음을 터뜨렸다. 조막만한 손으로 땅을 마구 두들기고, 눈이 쌓인 바닥을 구르며 미친듯이 웃다가 나를 쏘아보며 외쳤다.

"정말 가관이로구나 니놈은!!"

하늘이 울리는듯한 고함이었다. 순간적으로 전신을 강타한 충격에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버렸고, 그런 내 앞에 다가온 아이가 나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크큭, 뭐 좋아. 그런 시시한 부탁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

잠깐 그럼 방금까지 비웃은건 뭐야.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 건?"

"나는 오늘 했던 일과 같은 것을 머지않아 한 번 더 할거다. 니가 그걸 도와라."

아프리엔을 죽였던것과 같은 일을 또 할거라고?

……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당사자만은 스스로 선택해서 편하게 죽었다. 완전히 나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알았어."

내 대답에 아이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그려냈다.

"하나 알려주마. 너는 방금 한 부탁과 그 대답을, 불과 며칠 뒤에 후회할거다."

신의 예언에 밀려오는 불안감을, 그래도 치졸한 욕심을 충족시켰다는 안도감으로 어떻게든 무마시켰다.

========== 작품 후기 ==========

세피로트를 신용하기 힘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평소엔 괜찮은데 결정적인 순간엔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이 안되거든요. 불확정 요소라고 해야할까요.

믿기지 않겠지만 전 은월이를 많이 아낍니다. 아끼지 않으면 애초에 출현시키지도 않았어요.

@cosy - 도망칠 이유가 없죠.

@Eluines - 팬텀은 도망 안칩니다만... 상황이 제대로 개판나기 시작함.

@짐모리아티 - 이미 4차 다 찍었습니다.

@Jaiha - 검호는 모험가보다 훨씬 강합니다.

@비탄의과학자 - 기본 대사는 냅두고 어찌어찌 추가시킴.

@SourcesMoon - 메이플 아일랜드 파괴 시작!

@적현월 - 딱히 사실 정정할 틈도 없었죠. 아리아가 죽어버린고로.

@Sisre - 은월 멘붕.

@류동지 - 음, 배역이 잘못됬습니다. [독자]저자의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하구나... 검호! 마구니를 때려죽여라! [검호]알겠습니다! [작가]살려주시옵소서 독자님! 이쪽이 맞는것 같은데.

@sanya - 사이키커는 마지막에 자신의 잘못을 처절하게 반성하며 갈겁니다.

@대어의예감 - 루시드는 그래도 아직 생존 확률이나마 있음.

@루엔시르온 - 반파예정.

@도서관열매 - 둘이 부딪히는데 섬이 멀쩡할리가 없잖아요?

@랑패키지 - 전혀 없습니다. 차라리 데미안의 히로인이 되길 바래보세요.

@Yoontlemin - 그나마 이번 경우는 팬텀에게 물증이 있어서 어찌어찌 된거.

@익재공 - 개판은 이제부터!

@칼크래프트 - 누가 그 모습 그려주셨으면...

@갓타치 - 주민들은 살겠지만 섬은(이하생략)

@육합 - 솔직히 메이플 스토리인데 이제 메이플과는 쥐뿔도 상관없는 것 같음.

@레시코 - 슬슬 기숙사 들어갈때라서 그래요.

@케르닉 - 스우는 커버칠 수 없는 악당입니다.

@x흑란x - 아직 뱉어내지 못했는데다 그거로는 부족.

@인리연찬 - 하마>팬텀≒루미≥검호, 키네시스? 검호는 잘생겼다기보단 예쁘다에 더 가깝고 키네는 아직 어리니까...

@ReFrante - 그리고 역시나 괜찮지 않았습니다.

@Blake117 - 이번엔 좀 더 썼습니다.

@천궁사월 - 전 150도 못 찍고 접었다죠...

@책벌레씨 - 머지않아 개학이라 연참은 무리입니다.

@Ratios - 연합에서 작정하고 들고 일어날듯.

@브라디온 - 그리고 역시나 병크를 터뜨림.

@소라루 - 칭찬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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