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58화 (158/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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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사람의 몸에 타인의 영혼이 들어가는 현상. 그 말에 루미너스는 눈앞의 놈이 누구인지, 앞서 한 팬텀의 행위가 무슨 뜻이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스우 니놈 짓이었냐."

"이제야 눈치채다니 정말 늦네요."

그는 시그너스의 얼굴로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실 저도 도박을 몇 번 각오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꽤 놀랐습니다."

"언제 이 좀도둑 놈에게 빙의했던거지."

"힐라가 거의 물러나기 직전에요."

위화감이 들던 팬텀과 힐라의 대화가 떠올랐다. 과연, 그 여자가 마지막에 흑마력을 흩뿌린건 이놈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였나.

"빙의…… 라니. 무슨, 말입니까? 거기다 여제님은 왜……?"

평정심이 깨졌는지 경악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나인하트에게 루미너스는 작게 혀를 차며 답해주었다.

"지금 눈앞의 시그너스 여제는 스우에게 빙의당한 상태라는 뜻이다."

"하, 하아……?"

"군단장 윙마스터 스우. 예전에 군단장 중에서 저 성가신 능력으로 악명높은 놈이었지."

또다른 윙마스터인 오르카가 순수한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쳤다면, 스우는 제 빙의 능력을 응용해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또 서로 죽이게 만듬으로 뒤쪽에서 악명을 쌓았다. 둘 다 악질이지만 어느쪽이 더 최악이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데 스우라고 답할 것이다.

"빙의라는것이 그렇게 막 할 수 있는거였습니까?"

"그럴리가요. 편법을 좀 썼죠."

생전이면 모를까, 팬텀에게 죽임당한 이후론 에델슈타인 기지안에 있는 본체와 가까이에 있거나 약한 사람이 아니면 빙의를 쓰기 힘들다. 그리고 현 상황은 두 가지 모두 해당사항이 없었고, 때문에 상대의 동의를 구한다는 편법을 써야했다.

당신의 몸을 빌려줘─ 라고. 멋모르는 그녀는 부축해달라는 말로 오해하고 승낙해버렸지만.

"뭐어, 이런 번거로운 수까지 써가면서 기껏 빙의했는데, 정작 이 계집 몸은 제가 여태까지 빼앗았던 몸들중 최하위로 약해빠져서 맥빠졌지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뺏는거였는데."

"당장 거기서 나와 스우!!"

스우의 등장에 두 여인들의 공세가 멎은 틈을 타 한달음에 뛰어온 은월이 외쳤다. 스우는 그에게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싫은데요?"

"나오지 않으면 강제로 꺼내겠다."

그의 주먹에 주홍빛 화염이 다시 둘러졌다. 지옥의 불길이 연상되는 난폭한 일렁임에 저것이 어떤 종류의 힘인지 한눈에 알아본 스우는 의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안돼요. 내가 이런 일까지 한건─ 그가 해라고 했기 때문이니까요."

"…… 그?"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의 상사."

"이딴 짓을 벌인 이유가 누군가에게 명령받았기 때문이라는거냐."

루미너스는 샤이닝 로드를 가볍게 찍어 시그너스 여제의 위로 무대조명처럼 빛의 구체를 여럿 띄운다음, 강하게 빛을 집중시켜 그녀가 두른 짙은 어둠을 불살랐다. 빙의한 상태라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어둠의 정령이기에 그는 잔뜩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불쾌할정도로 밝은 빛이군요."

"묻는 것에 대답이나 해라."

"저거 치우지 않으면 이 불쌍한 여제님의 목, 잘릴지도 모릅니다?"

농담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듯 단검을 쥔 손에 힘이 실리며 그녀의 목을 눌렀고, 얇은 피부는 당장이라도 갈라져 피를 쏟아낼것 같았다.

"당장 치워주십시오!"

"하지만─"

"여제님을 죽게 만드실겁니까?!"

나인하트의 절박한 외침에 루미너스는 인상을 구기며 구체들을 없애는대신 광량을 줄이는걸로 타협했다. 눈에 띄게 약해진 빛에 다시 어둠이 너울거렸고, 스우는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고─마워요. 에레브의 책사 씨."

"그 입 다무십시오 군단장."

"하핫, 그건 싫어요. 제가 왜 당신같은 인간의 말을 들어야합니까. 그보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그가 니놈한테 그딴 지시를 했을리 없어!"

"아. 거기였죠 참."

스우는 장난치듯이 단검을 휙휙 돌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듣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분명 부탁을 받았어요. 아무래도 당신 반응을 보니 그 사실을 전해받지 못한 것 같지만요."

"그럴리가……!"

"저 블랙윙의 상사라는 작자가 이런 짓을 지시한 이유가 뭐냐."

"이유요? 간단해요."

시그너스의 몸을 뒤집어쓴 그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그리며 답했다.

"─보여주기 위해서죠."

"뭐?"

"더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해야할까요."

"퍼…… 뭐라고?"

"제가 그에게 받은 구체적인 말은 '화려하게 일을 벌여라'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일은 이거였거든요."

상상하지도 못한 대답에 은월을 포함한 이들이 죄다 벙찐 얼굴이 되었고, 스우는 연극조로 과장스럽게 양 팔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연합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에레브의 한복판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제가 군단장에게 빙의당한다! 눈뜨고 코 베인걸 넘어 심장을 뜯긴 것과 같은 상황아닙니까."

"고작…… 고작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거냐?! 니놈은 대체─!!"

은월의 고함에 스우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고작이라뇨! 이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모릅니까? 영웅도, 기사단도, 여길 채 나가지 못한 놈들도. 모두 저 하나만 보고있잖아요?"

그는 단검의 뾰족한 모서리로 시그너스의 쇄골 중앙을 쿡쿡 누르며 말했다.

"멍청하게도,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채 말이죠."

""……?!""

그 말에 나인하트와 루미너스의 머리에 벼락이 내려꽂혔다.

퍼포먼스. 오직 보여주기 위해 벌인 일. 그 말대로 스우는 시그너스 여제에게 빙의함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단숨에 끌어모았고, 다른곳으로 감히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왜?

왜 시선을 잡아끌었지? 무엇에서 시선을 돌린거지?

답은 이미 나와있었다.

저들이 어디 소속인지, 뭐 하는 놈들인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당장 봉인석이 있는 곳을 확인하러 가세요! 당장!!"

"눈속임이다! 이놈들의 본래 목적은 봉인석이야!"

나인하트의 찢어지는 외침과 루미너스의 고함에 기사단과 영웅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그중 몇몇은 퍼뜩 행동에 나섰고, 은월만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제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아하하, 들켰네요. 뭐 어차피 지금쯤이면 늦었을테지만요."

"너 이자식……!"

"왜 그런 얼굴이에요? 당신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이렇게 도와줬는데."

말과는 다르게 교활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은 참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블랙윙이, 정확히는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검호에게 갈 피해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뻐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았을때 은월은 깨달았다. 왜 스우가 답지않게 몇 번이나 도박을 해가며 이 짓을 벌였는지.

저자식은 그냥, 제 쌍둥이 여동생인 오르카를 인질로 잡고 뒤흔드는 검호에게 빡쳐서 마지막으로 제대로 엿먹이려는 심보였던거야!!

"스우 이 개새끼가──!"

상대가 여제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마저 뇌리에서 지워진 그는, 더 볼 것도 없이 뛰쳐나가 거칠게 타오르는 주먹을 내질렀다.

유감스럽게도 닿지 못했지만.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시그너스의 주위에 방울져 부유하고 있던 응축된 어둠이 땅에 떨어졌고, 동시에 연기처럼 흔들리던 어둠이 연필로 친 빗금처럼 빽빽한 검은 빗줄기로 변했다. 스우에게 달려들던 은월의 몸은 갑자기 전신을 강타한 무지막지한 압력에 의해 바닥에 추락했다.

중력. 스우가 어둠의 정령으로서 가진 고유의 힘.

"스우……! 니노옴……!"

"그러면 안돼죠. 이건 메이플 월드 황제의 몸이라고요? 흠집내시면 곤란해요."

니가 그 소릴 지껄이면 안되잖아!! 허나 성대가 짓눌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앞서 두 여인들과 싸워 지친터라 그는 중력의 압박속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렇게 은월을 제압한 스우는 자신을 둘러싼 다른 이들을 쭉 흝어보았다. 하나같이 험악한, 당장이라도 저를 찢어죽이고 싶다는 살기등등한 얼굴이었다.

"아주 열렬한 눈빛이네요."

"나인하트. 저 자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여제님의 몸에 다소 해가 갈것 같다만, 괜찮은가."

"크으…… 여제님도 충분히 이해해주실겁니다."

"알겠다."

서늘하게 오드아이를 빛내던 루미너스가 샤이닝 로드를 바닥에 내리찍자 좀 전에 시그너스의 머리 위로 띄워두었던 빛의 구체들은 아까보다 훨씬 더 밝은 빛을 스우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아까처럼 연기의 형태로 흩어진 어둠이 아닌 중력으로 밀집된 어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되려 짙어진 그림자를 일으켜 차단막을 세워버렸다.

"이쪽 의도를 다 알았으면서 아직도 저를 계속 노리다니, 어리석군요."

"닥쳐라. 봉인석을 지키러 다 가면 그대로 자해해버릴걸 모를 줄 아나."

"흐, 아주 바보는 아니군요."

맞는 말이었다. 여제에게 빙의한 것이 눈속임이라걸 알았다한들 스우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변하는것도 아니고, 오히려 저쪽에까지 신경을 더 분산하면 이도저도 지키지 못한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요. 저쪽을 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됬는데."

"뭐?"

스우는 여제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공중을 가리켰다.

그곳엔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곡예비행을 선보이는 몹시 예쁘장한 소녀와, 그런 소녀를 뒤쫓는 상당한 크기의 오닉스 드래곤이 있었다.

[마스터! 저 계집을 빨리 잡으세요!]

"테, 테이아?"

[저년이 봉인석을 훔쳐가고 있다고요!!]

상황은 한층 더 혼돈으로 치달았다.

***

엔젤릭 버스터가 봉인석을 회수하는데 나선건 힐라가 한참 청문회를 농락할 무렵이었다.

그래도 봉인석을 지키는 것이니 정예병들이 배치되었다지만,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한 종족의 최상급 전사인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이는 그 자리에 없었기에 그녀는 손쉽게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봉인석을 빼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은월이 팬텀에게 중상을 입혀버리고, 루미너스에게 포션을 가져올걸 지시받은 바람의 기사단장 이리나가 엔젤릭 버스터와 맞닥뜨린것이다.

쓰러진 기사들, 빼돌려진 봉인석, 결정적으로 인간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는 뿔과 날개까지. 이리나가 더 볼것도 없이 문답무용으로 엔젤릭 버스터에게 공격을 날림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전투경험의 차로 패배했다.

허나 그녀의 노력은 무색하지 않았다. 아란과 메르세데스, 은월의 전투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회의장에서 빠져나왔다가 몇몇 이들이 둘이 싸움을 벌이는걸 알았고, 나인하트에게 사람들의 대피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던 오닉스 드래곤 테이아는 또 다른 블랙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인하러 갔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쫓은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테이아에게 쫓기며 이리저리 날아가다 대회의장까지 오게 된 엔젤릭 버스터는 개판이 되어있는 장내에 할 말을 잃었다. 시그너스 여제는 왜 어둠을 두르고 있고, 영웅들이랑 기사단장들은 또 왜 그녀를 공격할 태세였으며, 은월은 어째서 땅에 쳐박혀 있는건지.

[이제 포기하시죠 계집!]

"거절할게요!"

오닉스 드래곤의 입에서 길게 내뿜어진 불줄기를 피한 엔젤릭 버스터는 민첩하게 리본을 휘둘러 쓰러진 은월을 낚아챘다. 이어서 그녀는 탄력적인 보호막과 강철의 연꽃봉오리같은 방어막을 연달아 펼치며 대회의장 가장자리에 세워진 구조물 위에 착지했다.

"뭐가 어떻게 된거죠 은월? 힐라랑 카이저가 없는걸 보면 작전은 성공한것 같은데 어째서─"

"…… 스우가."

중력에 짓눌려진 성대는 쩍쩍 갈라진 목소리를 간신히 냈다.

"그 개자식이, 시그너스 여제한테 빙의했어."

"예에?!"

"거기다 그 놈이 자기는 눈속임이라고, 진짜 목적은, 봉인석을 탈취하는거라고…… 다 까발려버렸어."

"아, 아아……?"

그녀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시그너스 여제와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을 다시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쪽을 노려보면서 당장이라도 전력으로 공격할 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어어, 어, 어떡하죠?"

"너는 성물의 힘으로 귀환 스킬을 써서 도망쳐라. 나는 어떻게든 스우 저 자식을 여제의 몸에서 내쫓을테니까."

"하지만 그러면 은월은!"

"내가 저놈을 제때 막지 못해서 일이 이지경이 되었으니 뒷수습이라도 해야한다."

엔젤릭 버스터를 붙잡으며 겨우 몸을 세운 그는 가쁜 숨을 골랐다. 체력적으로 거의 한계에 다다른데다 여러 정령들을 수 차례 소환해서 마력도 바닥이다. 잘해봐야 기회는 한 번, 쥐어짜내면 두 번.

"빨리 도망쳐라."

"은월……."

"누가 놓칠 줄 알아!"

날카로운 목소리에 은월은 반사적으로 엔젤릭 버스터를 밀쳐냈다. 다음순간 황금빛 창들이 그녀가 있던 자리에 번개처럼 꽂혔고, 순식간에 다가온 메르세데스가 깃털같은 표홀한 움직임을 보이며 창대를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다행히 엔젤릭 버스터는 날개를 펼쳐 재빨리 날아올라 무사했지만 공중에 뜬 메르세데스는 그 상태로 듀얼보우건을 겨누고 마법 화살을 연사했다. 앞서 펼쳐둔 두 겹의 방어막 덕에 벌집이 되는 꼴은 면했으나 쉴틈없이 화살이 쏟아져 방어막은 오래 못 버티고 쩍쩍 갈라졌다.

엔젤릭 버스터는 이를 악물며 메르세데스를 향해 소울 슈터를 조준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분홍빛 광탄이 연달아 쏘아졌다.

메르세데스는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허공에서 몸을 틀어 광탄을 피해냈지만, 그렇게 피해낸 광탄은 눈이 달린것마냥 궤도를 선회해 다시 그녀를 노렸다.

"메르! 뒤!"

"응?"

유도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아차한 표정으로 물의 정령을 불러 황급히 보호막을 쳤다. 펑! 퍼벙! 광탄에 두들겨맞은 보호막이 크게 출렁였고, 공격이 끝남과 동시에 엔젤릭 버스터에게 다시 듀얼보우건을 겨누려고 했다.

보호막에 맞은 광탄들이 분열되지만 않았으면.

"하, 하아……?"

"이쪽도 물량으론 지지 않아요!"

분명 대여섯개였던 광탄들은 금방 두자리수로 불어나버렸고, 실시간으로 보호막에 맞고 튕겨나갈때마다 분열되어 어느새 개구리알이 연상될만큼 바글바글해졌다. 저런 양이면 하나하나의 위력이 크지 않아도 다 맞았다간 뼈가 전부 박살난다.

더이상 막았다간 보호막도 의미없어질거라 판단한 메르세데스는 물의 정령을 거두며 외쳤다.

"실피디아!"

그녀의 부름에 따라 소환된 유니콘 실피디아는 그녀를 태우고 허공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분홍색 광탄무리들이 우르르 뒤쫓았고, 그 사이에 엔젤릭 버스터는 테이아와 2차전을 벌였다.

[얌전히 봉인석을 포기하는게 좋을텐데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항복한다면 생존만은 보장해드릴 수 있답니다.]

나긋나긋하지만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에 그녀는 콧웃음으로 대꾸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장난감과 같은 형태의, 그러나 그녀의 몸보다 몇 배는 더 큰 망치가 소환되어 크게 휘둘러졌다. 테이아의 본체는 상당한 크기였지만 때문에 거대한 과녁과도 같았고, 정통으로 망치를 맞으면 데미지가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한차례 휘청인 오닉스 드래곤은 위협적으로 목을 세우며 그녀를 당장이라도 씹어먹을듯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계집이 말로 하니 아주 그냥……!]

"지금 그런게 의미가 있던가요?"

이미 상황은 최악. 하늘을 날며 공중전을 하는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은 테이아와 메르세데스밖에 없었는지 둘 외에 그녀에게 달려드는 이는 없었으나 그 둘도 많이 벅찼다. 그래도 눈앞의 드래곤만 어떻게 하면 귀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텐데.

여태껏 조용했던 에스카다가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티어. 저 드래곤을 잠깐이나마 멈추는건 내 힘으로 가능하다.]

"정말이에요?"

[너는 소환만 해라. 힘은 내가 쓸테니]

"알겠어요 에스카다"

[뭘 그렇게 쫑알쫑알 혼잣말을 하는거죠~?]

그 사이 깨진 비늘을 모두 수복한 테이아가 마법진들을 펼쳤다. 제 마스터가 리엔 출신임을 증명하듯 극한의 냉기와 열기가 공간을 일그러뜨려 저걸 직통으로 맞았다간 제 보호막따위 우습게 녹이고 시체조차 남지 않을 것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진이 재앙을 쏟아내기 직전, 그녀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태를 소환했다.

[또 무슨 해괴한 기술을─]

"에스카다!"

용의 입을 모방한 원형의 태에서 일대를 넘어 에레브 섬 전역에 퍼질만큼 압도적인 포효가 터져나왔다. 소리의 영역을 넘어선 뼛속까지 뒤흔드는 충격파를 정통으로 맞은 테이아는 균형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버렸다.

2중 보호막과 원형 태의 뒤로 몸을 숨겨 어찌어찌 저한테까지 오는 충격을 반감시킨 엔젤릭 버스터는 그대로 귀환 스킬을 사용해 몸을 빼려고 했다.

저 멀리서 아직도 광탄무리들에 쫓기며 이쪽을 향해 미친듯이 날아오는 유니콘과 메르세데스만 아니었다면.

"안놓친다고, 했잖아!!"

붉은빛을 휘감은 유니콘이 조금의 감속없이 엔젤릭 버스터를 뺑소니쳤다. 새된 비명과 함께 그녀는 추락해버렸고, 땅에서 호크아이와 이카르트를 상대하고있던 은월은 황급히 뒤로 몸을 빼내어 그녀를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 2:1의 공중전을 구경하던 스우는 엔젤릭 버스터가 추락하며 떨어져나와 그의 발치에 뒹굴게된 물건을 주워들었다.

"와아─ 일이 이렇게 될줄은 몰랐는데요?"

눈물의 형상을 한 그 보석은 에레브의 봉인석이었다.

그는 파삭파삭 굳어가는 이들의 얼굴을 기분좋게 감상했다.

***

더 이상의 위협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은월과 엔젤릭 버스터에서 시선을 돌린 이들은 스우를 노려보았다.

"하하, 걱정마세요. 저는 이걸 가지고가지 못하니까요."

"니놈 말을 어떻게 믿으란거지."

"제 말이 의심스러우면 이 몸을 믿으세요. 이 여제님은 너무 약해빠져서 당신들을 모두 상대하며 이 섬에서 도망치는게 불가능하거든요."

그렇다고 유령 상태가 되자니 이때는 물리력이 전무해서 봉인석을 들고 갈 수가 없고. 어둠의 힘을 되찾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빙의한 상태에서만 쓸 수 있다.

"저들은 여기서 나갈 수단을 잃어버려서 봉인석을 쥐어줘봤자 의미가 없는걸요."

"같은 편이 아니었나."

"제가 흔한 부하따위에게 무슨 의미를 두었다고 생각합니까?"

하물며 검호, 그 남자 직속인 놈들에게.

"그렇다면 니놈은……."

"하지만 역시 봉인석을 가져가지 못하는건 뼈아프네요. 대신이랄까, 그에 상응하는것 정도는 받아가야 수지가 맞겠어요."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힘을 억누르겠답시고 루미너스는 강한 빛을 내려쬤지만, 그 빛에 의해 생겨난 그림자은 무엇보다 짙었다. 그림자의 방패가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걸로 여제만 2번이나 죽이게 되네요."

시그너스는 한 치의 망설임없이 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찌르다가 막혔다.

"하…… 아?"

단검에 갈라진 살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듯, 그 - 팬텀은 깊게 베인 손으로 단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내가, 니놈을…… 내버려둘 것 같냐 스우……!"

"하, 하하! 하하하! 집념도 이쯤이면 병이네요 팬텀!"

복수심, 더 나아가 증오로 이글거리는 보라색 눈을 마주보며 스우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부터 정신을 차렸는지 모르지만 숨이 넘어가는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저한테 달려드는 꼬라지라니!

"그 몸에서, 나와."

"안그래도 그럴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발밑의 그림자가 날카롭게 벼려지며 한줄기의 창이 되었다.

고기를 꿰뚫는 피륙음이 울렸다.

"커헉……!"

"기억하고 있나요 팬텀?"

가느다랗게 눈을 휘며 스우는 웃었다.

"8백년 전 그날, 시간의 신전에서 당신은 이곳을 찔러 나를 죽였었죠."

비명, 경악, 당혹성. 그는 그 모든 것들을 귀등으로 넘겼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당신을 같은 부위를 찔러 죽이는거에요."

어때요? 공평하죠?

그 말을 끝으로 스우가 빠져나간 시그너스의 몸은 정신을 잃고 끈떨어진 인형처럼 제자리에 쓰러졌다.

유령의 형태로 돌아온 그는 은월과 엔젤릭 버스터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2명이 있어야 하는데 1명 뿐이었다. 여자애쪽은 어찌어찌 돌아간건가? 용의 후예란 것들, 어지간히 튼튼한 모양이군.

"너어어……!"

[왜 남아있어요? 당신도 도망치지. 딱 적절한 타이밍인데.]

"개소리 작작 짖어대!!"

정령의 힘이 둘러진 손이 유령의 형상을 잡아챘다.

"니놈때문에…… 니놈때문에에에─!"

[이거 놓으세요. 불쾌하니까.]

"너같은 자식 옛저녁에 죽이는거였어!! 감시가 아니라 없애야했다고!"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참 늦네요.]

형상을 붙잡혔지만 힘이 거의 실려있지 않아 실질적인 타격은 없었다. 앞서 전투를 너무 많이 해 지쳤기 때문이다.

[도망치지 않을거면 당신은 여기 잡히세요. 내 알 바 아닙니다.]

은월을 버려두고 스우의 모습이 완전히 투명해지며 에레브에서 자취가 감춰지기 직전.

[─그렇게는 안돼요.]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

봉인석. 한 지역의 힘을 응축한 것이자 초월자마저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 보석은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다.

스우는 들고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그냥 방치했지만, 그렇게 시그너스의 손에 들린채로 남아있던 보석은 당장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염원을 구체화시켰다.

팬텀을 살리는 것.

"아리아……?"

[오랜만이에요 팬텀.]

봉인석에서 환영처럼 나타난 여인 - 선대 에레브의 황제 아리아는 쓰러져있는 팬텀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난…… 죽은건가. 당신이 보이다니, 이거 참."

[죽지않았아요. 팬텀 당신은 아직 죽으면 안되잖아요?]

"당신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말 하지말아요. 난 당신이 벌써 죽길 바라지 않으니까.]

아리아는 심장부위를 꿰뚫리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시체와 다를바없는 꼴이 된 팬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은은한 빛이 그의 몸에 번지며 거짓말처럼 상처를 없앴다.

팬텀을 치료한 그녀는 스우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또 당신이군요 스우.]

[어어,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지금 그게 중요한건가요?]

은월은 유령임에도 불구하고 새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스우를 보며 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단순히 자신이 죽였던 이를 만나 놀랐다기보단, 마치 사자를 맞닥뜨린 토끼와 같은 반응이 아닌가?

거기다 아리아 황제가 봉인석에서 나타나다니, 어째서지?

[제 후손된 아이를 헤치고, 에레브를 이 지경으로 만든데다, 팬텀까지 죽이려 하다니…… 정말 안되겠군요.]

[아아, 아, 아아아…….]

[이번에야말로 절대 넘어가지 않겠어요.]

그녀가 나타났던 봉인석을 본 순간 은월은 뭔가가 떠올랐다.

프리드가 말하길, 봉인석을 만들기 위해선 그 지역을 대표하는 매개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루디브리엄에선 블록이었고, 니할에서는 리튬, 빅토리아 반도에서는 요정의 옷. 아무튼 그렇게 매개물을 준비하고 봉인석을 만들었었는데, 딱 한 곳 - 처음으로 봉인석을 만들었던 에레브만은 매개물 없이 봉인석이 만들어졌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사실 매개물이 이미 있었던게 아닐까?

예를 들면, 군단장들에게 살해당한 여제의 영혼이라던가.

신수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에레브의 봉인석은, 장식이 없는 스카이아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팬텀. 제게 힘을 빌려줘요.]

"힘? 내가?"

[놈을 물리칠 수 있도록 절 도와줘요.]

"─알았어."

그가 혼쾌히 고개를 끄덕인 순간 아리아는 생긋 웃으며 팬텀을 껴안았고, 그에게 스며들었다.

[도망, 도망쳐요……! 빨리 여기서 도망치라고요!!]

"지금 나한테 도망칠 방법같은거 없다만."

[차라리 이 섬에서 뛰어내려요! 그쪽이 생존 확률이 더 높을거라고! 당장,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 돌대가리야!!]

거의 발작하듯이 매달리는 모양새에 은월은 별 해괴한걸 본다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놈 왜 이러는거야. 좀 전까지 보였던 여유로우면서도 잔혹한 모습은 거짓말처럼 없어져버려 연기라도 하는건가 싶었다.

"당신이 쓰는 것과 비슷한 방법이라 싫지만, 아무래도 직접 힘을 쓰려면 이것밖에 없더군요."

팬텀의 목소리에 아리아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설마 빙의?

그는 바닥에 나뒹굴던 케인을 들었다. 보는 이가 편안해지는 빛이 케인에 번지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고, 그것은─한 자루의 크고 아름다운 할버드였다.

"…… 응?"

할버드? 아란이나 들법한 무기를 왜 선대 여제님이 드시는거야? 뭔가 엄청난 갭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은월까지 당황한 사이 스우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뭘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겁니까?! 빨리 도망안치고 뭐해요!]

"아니아니, 왜 선대 여제님이 할버드를 드는,"

[저 여자 싸울때 완전 미친개라고 이 인간아─!!]

미, 미친 뭐?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에 은월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사이, 팬텀의 몸을 빌린 아리아는 눈을 감고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기수식을 잡았다. 멍하게 보고있던 아란조차 감탄할만큼 깔끔한 자세였다.

"스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째선지 한 톤 내려가있어 소름이 돋았다.

"이번만큼은."

흡 부릅뜬 눈은 공포에 질린 적을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다는듯 살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살려보내지 않겠어요오오오오──!!"

그제서야 밀어닥쳐오는 초월자마저 능가하는 압도적인 힘의 해일에 그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니놈들은 저딴걸 어떻게 암살한거냐?!"

[암살은 개뿔이, 죽도록 얻어터졌다고요!!]

마치 파괴신이 휘두른 것 같은 거대한 참격에 에레브 일대의 구름이 모조리 갈라졌다.

========== 작품 후기 ==========

은월은 아란과 메르와 싸우고, 스우한테 당하고, 호크아이&이카르트랑 싸운다음 이젠 완전체 아리아랑... 후새드.

실은 제가 아리아를 강하게 설정한 이유가 예전에 봤던 모 메이플 패러디 만화때문입니다. 거기서 아리아가 팬텀에게 빙의한 스우를 파동권으로 한 방에 쫓아냈거든요. 그걸 본 뒤로 '만약 내가 메이플 글을 쓴다면 무조건 아리아를 강하게 쓰자!'고 결심했습니다.

이번에 받은 팬아트가 굉장합니다. 제대로 보고싶은 분은 뜰에 가보세요.

@룰루C - 사실상 사기였습니다.

@슈엘리안 - 대본은 현재 에델슈타인 기지의 검호 방에 있음.

@Sisre - 그리고 이제 스우가 죽창맞을 타임!

@요녀석이 - 하늘에서 정의가 빗발칩니다!

@홀리스 - 년이 아니라 놈이죠. 남자니까.

@키제츠 - 차라리 에레브에서 뛰어내렸다면 진짜 생존확률이 더 높았을지도.

@이슬고둥 - 수정했습니다!

@Pride29 - 작품설정란에 올렸습니다.

@비탄의과학자 - 저번엔 섬을 갈랐으니 이번엔 구름을.

@류동지 - 오로라에서 주운 딜도라, 그거 누구겁니까?

@울트맨 - 프라이쉬츠도 없으니 이번엔 진짜 스우 ㅈ될듯.

@루엔시르온 - 진짜 응원해주세요.

@Legendssj2 - 모두에게 엿먹인 대가로 이제 본인에게 초 특대 엿이 날아옴.

@cosy - 확인사살.

@적현월 - 왜 메르 옆임?

@패러디좋아 - 아리아님이 강림하셨습니다.

@로리는사랑입니다 - 어째선지 님 닉을 보고 코멘을 납득해버렸다...

@케르닉 - 첫타부터 밸런스 오버.

@sjdjabqh - 또라이적인 면모는 닮았을지도.

@루서스 - 요즘 그분이 핫하긴 하죠.

@ReFrante - 진짜 안쓰러워졌음 은월이.

@Blake117 - 암살? 유감! 빙의입니다!

@푸잉밍 - 예전에 올렸던 Q&A를 보고 오시라고 할까 했지만, 귀찮으실테니 답할게요! 시간전이입니다.

@Eluines - 이번 화에 나온 스킬들 다 알아보실 수 있나요?

@Ratios - 별 느낌 없습니다. 남녀노소 안가리고 필요하면 빙의했었으니까요. 당장 듀블 퀘만 봐도 설희한테 빙의했던게 스우입니다.

@키하라스티카 - 망했어요.

@대어의예감 - 팬텀을 사실상 죽였는데 부활해서 지상 최강의 여제님이 강림함.

@산들바람eh - 등장하면서 멘붕시키는건 맞음. 좀 나중이지만.

@Yoontlemin - 부분적으로 팩트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의도가 선동과 날조였죠.

@칼크래프트 - 현재 검호는 메이플 아일랜드를 부수며 검마랑 싸우는중.

@원나중독 - 이 단어 좋네요. 할버드리아.

@socns - 에이 설마요(웃음)

@갓타치 - 그리고 이번엔 아리아의 턴!

@LastㅡEmbryo - 갭이 상당하긴 하죠.

@레시코 - 은월은 이래저래 불행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을겁니다.

@노란우산s - 오해풀리기는... 스우와 함께 휩쓸리고 있습니다.

@익재공 - 8백년만에 죽창을!

@SourcesMoon - 진짜 불쌍해졌어요 은월이.

@책벌레씨 - 맥뎀이 풀렸는데 아직도 안깨진 하드 스우.

@x흑란x - 저건 안좋은 방향으로 벌리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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