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62화 (162/208)

<--  --> (후기가 깁니다)

side out.

"뭐, 뭐야?! 너 이 자식 어떻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닐텐데."

적에게 등을 보인 채 당황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은 것을.

호크아이와 나인하트는 창살에 걸린 일정이상의 충격을 주면 화염이 솟구치는 마법을 꽤나 믿었지만, 은월은 불이 치솟기 전에 모든 창살들을 일격에 망가뜨린다는 기예를 선보이며 화상 한 점 없이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직후 그는 주먹에 적당히 힘을 실어 한 번에 호크아이를 기절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까앙! 금속음이 울리며 주먹은 막혔고, 대신 호크아이가 급히 든 너클의 손등 보호대가 와그작 구겨졌다. 반응 속도는 의외로 빠르군.

"최강의 무투가라니, 농담이 지나치잖아……!"

"확실히 과거형이긴 하지."

지금은 나보다 더한 놈이 있으니까. 그는 흰 더벅머리의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를 떠올리며 보호대에 막힌 주먹에 더 힘을 실었다. 방어를 풀었다간 그대로 정수리에 직격할 그 공격을 호크아이는 제대로 앉은 것도 일어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막아내야했고, 그 사이 은월은 다리에 힘을 실어 하단차기를 날렸다.

빠악!! 나무를 잘라버릴 기세의 날카로운 로우킥이 그의 정강이에 직격하며 자세가 무너졌다. 이어서 호크아이가 뒤로 쓰러지는 찰나지간 힘을 조절한 은월의 주먹이 복부에 틀어박혔고, 내지른 기세를 멈추지않고 그를 그대로 바닥에 쳐박았다.

"잠깐 누워있어라."

구속구 열쇠를 찾는 번거로운 일같은 걸 할 시간조차 없었다. 방어구도 없는데 잠시동안은 하고 있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몸을 돌렸다.

허나 쓰러진 호크아이를 뒤로하고 몇 발자국 걸었을때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크게 울렸고,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자 푸른 전격의 다발이 뱀처럼 그의 머리 위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눈부신 스파크가 잦아들자 방금 전에 쓰러뜨렸다고 생각한 번개의 기사단장이 격통을 참고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위태롭게 자세를 잡고 외쳤다.

"놓칠 것, 같냐!!"

"…… 대단하지만 끈질기군."

아군이었다면 칭찬해 마땅할 근성이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은월은 낮게 숨을 고르며 번개의 기사단장을 보았다. 푸른 전격이 위협적으로 튀었지만 고작 저런 것에 겁먹기엔 과거에 싸웠던 적들이 훨씬 더 강했으며, 또 그들이 몇 배는 더 위험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뇌전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늘어진 다른 감옥의 창살들을 잡아뜯어 던져 전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땅을 박차 그의 코앞에 접근했을 뿐.

"기술은 좋다만, 무르다."

지지는게 아니라 잿더미로 만들 기세로 쏘았어야지.

또다시 복부를 치면 내장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월은 잔상이 남을만큼 빠르게 그의 무릎을 차서 쓰러뜨림과 동시에 수도로 뒷목을 내려쳐 이번엔 확실하게 기절시켰다.

쓰러진 번개의 기사단장이 차고있는 너클을 빼앗을까 고민했지만, 이쪽의 소란이 위에까지 들렸는지 기사들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호크아이님!"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까?!"

그는 망설임없이 땅에 널브러진 창살 하나를 내려오는 기사들의 다리쪽을 향해 던졌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간 창살은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앞에 선 기사의 다리를 정확하게 명중해 휘청이게 했고, 넘어지려는 두 기사의 명치와 목젖을 쳐 단숨에 쓰러뜨린 뒤 굴러떨어지지않게 뒷목을 잡아 계단에 앉혀두었다.

밖으로 나와 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감옥문을 잠그며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기척은 없다. 하지만 안심할수 없기에 길이 아닌 숲 쪽으로 향했다.

여기서 그들이 오기로 한 곳까지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잘 알고 있다. 일찍히 에레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각 건물들과 시설의 위치를 알아내 모두 외웠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아직 오직 않았다면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

'아직까지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을거라고 했다.'

번개의 기사단장의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꽤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세한 내용 역시 아직 모를거고, 더 늦기 전에 되찾아야 한다.

은월은 발에 힘을 실어 땅이 푹푹 패이도록 지면을 박차며 빠르게 숲을 가로질러 갔고, 그러던중 갑자기 저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황색 불꽃이 화려하게 터졌다.

"신호탄?"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그것임을 알았다. 그 외의 무언가라고 생각되지 않았기에.

방향으로 볼때 방금 나온 감옥쪽. 탈출한게 벌써 들킨건가? 너무 빠른데?

'아니…… 잠깐만.'

그러고보니 자신이 수감된 이후로 정오 무렵에 감옥에 찾아오는 이가 있었다. 간수와 죄수에게 식사를 갖다주는 사람. 어제는 어떻게 손을 썼는지 그 소년이 찾아왔지만 본래 그 역할은 다른 기사가 맡고 있었고, 만약 식사를 가져다주려고 왔다가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은 잠긴 감옥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면─.

"쯧."

타이밍이 나빴다.

지금의 그는 결코 많은 전투를 해선 안되는 상황이다. 실의에 빠졌었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며칠동안 굶은 탓에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으며, 변변한 방어구조차 없었다. 물론 바로 어제 제대로된 식사를 하고 푹 자놓았었지만, 마법사가 아닌 그가 이곳의 기사들을 모두 상대하는 짓같은걸 벌였다간 또 지쳐서 쓰러질 수 있다.

요컨대 최소한의 적만을 상대하고 목표를 달성한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뜻.

그러나 방금전에 쏘아진 신호탄으로 에레브에 있는 기사들이 죄다 자신을 잡기위해 쫓아올게 분명한 상황이 되버렸다.

"이렇게 운이 나쁜것도 힘든데."

"블랙윙 주제에 제 처지를 잘 알고있군."

팅! 은월은 재빨리 팔을 들어 차고있던 구속구로 날아온 물체를 막아냈다. 튕겨나간 물체는 반사광이 생기지 않도록 검게 칠해진 표창이었다.

"어둠의 기사단장?"

표창을 비롯한 투척무기를 다루는 기사단장은 그뿐. 돌아오는 대답은 더이상 없었지만 나무 사이로 정확하게 급소만을 노리며 날아오는 표창술의 솜씨는 통상의 기사들의 것이라 볼 수 없을만큼 뛰어났기에 그임을 확신했다.

'역시 그때 너클을 뺏어오는거였나.'

마땅한 방어구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하다니. 혹여나 표창에 독이 발라져 있을지도 몰라 생채기조차 허용할 수 없어 모든 공격을 구속구 부분으로 받아쳐내던 은월은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번거롭군.

"가진 재주는 이것뿐인가."

어둠 속에 은신해 그를 점차 한곳으로 몰아넣고 있던 이카르트는 한 순간 눈이 마주친듯한 착각과 함께 등줄기를 스치는 오한에 손을 멈칫했고, 그 잠깐 사이 은월은 지면이 구겨질만큼 다리에 힘을 실은 뒤 세게 발을 굴러 진각을 일으켰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일대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렸다. 그가 서있던 곳을 중심으로 갈라진 땅이 벽처럼 들고 일어났고, 한치 앞도 볼 수 없을만큼 짙은 흙먼지 구름이 숲에 쫙 퍼졌다.

어디선가 미친?! 이라는 외침이 들렸던 것도 같지만 은월은 신경쓰지않고 진각을 구른쪽 발을 땅에 툭툭 차서 근육을 풀었다. 에레브는 하늘섬이라 이런 기술을 쓸 땐 위력을 조절해야했다.

'이제 기사들이 쫓아오기 전에 빨리─'

"찌익!"

뜬금없이 쥐의 울음소리같은 것이 매우 가까이에서 들렸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새카만 박쥐가 머리를 향해 날아들어와 손으로 쳐냈고, 핏물대신 검은 연기가 흩어졌다.

"시야따윌 가린다고 놓칠 줄 알았나."

그를 둥글게 감싼 벽의 그림자에서 스르륵 일어난 어둠의 기사단장은 단검으로 은월의 목을 눌렀다. 2명이 서 있기엔 협소한 공간. 피할 수 없다. 그 사실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직접 가까이 와줘서 고맙다."

"뭣……?"

주먹이 내질러지며 그들을 둘러싸고있던 흙벽이 터져나갔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풍압에 나무들이 부산스럽게 흔들렸고, 흙먼지 구름이 쫙 갈라졌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바람의 기사단장 이리나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고있는 오즈에게 물었다.

"저놈 정령사라고 하지 않았어?"

"부, 분명 정령사였는데."

"어떻게 봐도 골수까지 무투가잖아! 젠장! 저런 걸 이카르트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고!"

그녀는 활시위를 당기며 화살에 바람을 휘감았다. 시력을 향상시키는 버프가 눈에 번지며 선명하게 은월의 모습을 잡았고, 직후 질풍처럼 빠르게 연사된 화살들이 바람의 조종을 받아 나무들을 모조리 피해 정확하게 은월에게 날아들어─

으직!

"…… 이건 이거대로 대단하군."

바람을 조종할 줄 알면 이런 기술도 가능한건가. 메르세데스도 이런건 못 할 텐데. 낚아챈 화살들을 움켜쥐어 이쑤시개마냥 뚝 부러뜨린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시력 향상 버프덕에 코앞에서 본 것마냥 생생하게 목격한 이리나는 까득, 이를 갈며 힘껏 활시위를 당겨 차가운 냉기을 머금은 화살을 위를 향해 조준했다.

"오즈. 넌 마법 준비해. 저 일대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큰 걸로."

"준비는 가능하지만…… 아직 이카르트가 저기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아?"

"그놈은 살아있을거야.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우릴 도와줄거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이리나는 화살촉에 살얼음이 내려앉은 화살들을 방금 전에 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연사하기 시작했다. 직사가 아닌 곡사로 쏘아진 서리 화살은 공기중의 수분을 끌어모아 얼음비가 되어 은월의 머리 위로 쏟아졌고, 처음 한 두개까진 막았으나 폭우처럼 퍼부어지는 물량에 그는 별 수 없이 근처에 있는 나무를 뽑아다 우산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숲에 뛰어들어 스킬의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갑자기 질척한 무언가가 발목을 붙들었다. 급히 고개를 숙이자 보인 것은.

'그림자?'

속박의 정령이 깃든 공간마냥 그림자가 늪처럼 출렁이며 끈적하게 다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떠오르는건 어둠의 기사단장이었지만 그는 방금 전에 쓰러뜨렸─?

"흥."

꽤 지저분한 꼴이 되었지만 상처없이 멀쩡한 그가 콧웃음치며 출렁이는 그림자를 부리고 있었다. 아아, 그러고보니 도적들의 기술중엔 그림자와 같은 어둠으로 분신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가. 어둠의 기사단장이라 불리는만큼 그쪽 기술에는 당연히 능통하겠군.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만큼 아플겁니다 블랙윙!!"

오즈의 머리 위로 떠오른 작렬하는 마법진에서 흡사 소형 태양을 연상케하는 고열의 불덩어리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따가운 빛과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피부를 달구는 고온에 절로 땀이 흘러내렸고, 채 응축되지 못하고 새어나온 열섬(熱殲)이 한순간에 땅을 태워버리는 광경에 그는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버렸다.

"뭘 죽지 않는다는거야?"

저런 걸 맞으면 아무리 그라도 무사할 수 없다. 얼마나 열이 응축되어 있는지 화염의 구체는 표면이 부글거리고 있었고, 얼음 화살을 두들겨맞아 장작이 되기 직전의 나무따위로는 저걸 막기는 고사하고 닿기 전에 불타버릴 것이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랬듯 그 자신의 몸뿐.

하늘섬이라 조금 불안하지만 단단히 고정되어야 하는 하반신은 무려 저쪽이 직접 잡아주고있다.

은월은 방어구가 없어 계속 차고있던 오른쪽 구속구를 한 방에 잡아뜯은 다음 힘줄이 도드라질만큼 손을 꽉 움켜쥐었다.

친히 저를 불태우기 위해 내려오는 태양을 향해, 그는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

무언가가 쏘아진 것 같은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퍼지며 에레브 상공의 기류가 마구 헤집어졌다. 비행 유적 아브락사스에 타고있던 노바족들은 갑자기 흔들리는 선체에 당황하며 비행 유적의 은신이 풀리지 않도록 노력해야했고, 그들이 한바탕 뛰어다니든 말든 한 점의 동요없이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있던 검호가 조용히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방금 막 기사단장들과 교전중이던 은월이 작정하고 힘을 썼습니다."

"고작 기사단장들을 상대로?"

"그가 맨몸으로 막기 힘든 마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데아는 화면을 확대해 한 손에 다소 화상을 입었지만 기어코 세 기사단장들을 쓰러뜨린 은월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크게 띄웠다.

"우리가 오겠다고 한 곳은 저쪽 방향이 아닐텐데."

"하지만 분명하게 저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방향을 착각하기라도 한 건가. 검호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보입니다."

"짚이는거라도 있나."

"자세한 정보가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무작정 달리고있는게 아니라 어딘가를 목적지로 하고 있는걸로 보입니다. 거기가 어딘지 알면─"

"에레브 지도 펴서 찾아봐."

"…… 예."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폐를 쥐어짜이는 것 같아 이데아는 재빨리 그의 눈을 피하며 지도를 꺼내 현재 은월의 위치와 방향등을 보고 그 경로에 있는 것들을 추려냈다. 산소가 모자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숨이 가빠졌지만, 위기감때문인지 더욱 맹렬하게 돌아간 뇌는 은월이 어디를 향해 가고있는지 단번에 알아냈다.

"에레브의 고위 인사들이 일하는 건물입니다."

"고위 인사라 한다면."

"책사와 기사단장 말입니다."

이데아는 그들에게 내려진 공간은 여제의 거처와 떨어져있다고 첨언했지만 그는 거기에 신경쓰지않고 물었다.

"그래서 왜 그가 우리가 오라고 한 곳이 아닌 거기로 가고있는거지."

"거기까지는……."

검의 비처럼 쏟아지는 날카로운 눈빛에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다못한 키네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들에게 용건이 있어서가 아닐까?"

"구체적으로."

"그들이 일하는 곳에 간다는 건, 일단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뜻이잖아. 기사단장을 4명째 상대중인데도 계속 거기로 가는 건 남은 기사단장이나 책사 중 한 명이 그곳에 있을거라 생각하고 간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일리, 있군요."

눈앞에서 흉흉한 기세를 뿌리고 있는 검호때문에 잔뜩 긴장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하는 부분들을 놓친 모양이다. 이런 기초적인 것을 간과하다니. 이데아는 입술을 세게 깨물어 정신을 일깨운다음 최대한 차분히 분석했다.

간수라던 번개의 기사단장은 제일 먼저 격파한 뒤에 탈출했을거고, 방금 어둠, 불꽃, 바람의 기사단장을 쓰러뜨렸다. 그럼에도 그들이 머무는 곳에 간다는 말은 남은 이들 중 누군가를 반드시 만나야겠다는 뜻이고, 빛의 기사단장은 여제의 최측근 호위로 현재 그곳에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책사, 나인하트군요."

"또다른 짚이는건 없나."

"어, 음……."

키네시스는 조용히 저를 응시하는 붉은 시선에 어제 있었던 일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나인하트 씨랑 뭐라고 대화했더라? 그 뒤에 또 호크아이 씨랑 뭐라뭐라 얘기한 뒤에 은월을 만났는데 그때 했던 말들이─

"'처음 온 날 구속구 찬 상태로 난동을 부려서 철창을 망가뜨렸다'고 했었나?"

그 말에 이데아와 검호는 살짝 물음표를 띄우며 눈살을 찌푸렸다.

"은월이 말입니까?"

"응. 간수로 있던 번개의 기사단장이 그런 말을 했었어."

"이상하군요. 그는 합당한 이유없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때 그는 어떤 상태였었지."

"어제 말했잖아. 무슨 고문을 당한것처럼 반 폐인에 가까웠다고. 어째선지 며칠동안 단식까지 했었고."

지금은 좀 양호해보이지만, 그래도 그의 상태는 만전이라 보기엔 꽤 무리가 있었다.

절망감이라 생각하기엔 은월이란 남자의 삶은 이미 그보다 더한 절망들이 많아 이런 일에 그 지경까지 갈 리 없고, 무언가 다른 이유때문에 난동'씩이나' 부렸을 것이다.

무언가 알듯 말듯한 상태에서 아래쪽에 있던 은월은 그 이유를 알려주겠다는 듯 행동을 개시했다. 마침내 목표로 한 건물에 다다름과 동시에 냅따 뛰어올라 어느 방 창문을 박살내며 그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미 신호탄과 기사단원의 보고를 전해받은 나인하트가 혼자서 그를 상대하는 만용을 부릴리 없었다.

"…… 이데아."

"예."

"지금 여기에 내 예비용 검이 몇 자루 있지."

"10자루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부 가져와."

은월을 엄호해야하니까.

화면 너머로 에레브에 체류중이던 영웅 - 아란이 나인하트의 백업을 받으며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

아란side.

"하! 마침 잘만났네 블랙윙! 왜 니놈이 프리드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장 말해!"

"거절하겠다. 빨리 그걸 내놔라 책사!"

책사 나인하트에게 달려드는 놈을 막으며 폴암을 휘둘러 멀찍히 떨어뜨렸다. 정말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여태껏 얌전히 있던 저놈이 탈출한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블랙윙, 오히려 얌전히 있던게 이상한거겠지. 진짜로 당황한건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놈의 실력이다.

"쫄래쫄래 도망만 치지말라고!!"

저 블랙윙 자식, 미꾸라지도 아니고 나와 책사의 공격을 대부분 상처없이 피하고 있잖아! 처음 몇 번이면 모를까, 서로의 공격이 부딪히며 방안의 가구와 벽, 천장까지 죄다 박살나버려서 실내이기에 폴암을 마음껏 휘두르지 못한다는 변명따위 들 수 없다.

가장 결정적으로.

'내 공격을 거의 다 읽고있어.'

참격의 위력과 범위, 준비자세만 보고 어떻게 무기를 휘두를지까지. 청문회 때 메르와 나를 동시에 상대할 때는 일단 경험많은 무투가의 수준은 아득히 넘어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확신했다. 저놈은 순수한 체술 실력만으로 영웅이라 불렸던 우리랑 동급이다. 정령은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어떻게 저런 놈이 나온거야?'

내지른 폴암의 창날을 왼팔의 구속구로 막으며 흘려내는 솜씨는 기술이 아닌 조건반사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깔끔했다. 하지만 여기오기까지 방어구 대용으로 꽤나 썼는지 굉장히 너덜너덜해진 그것은 몇 번 더 공격을 맞은 끝에 결국 떨어져나갔다.

그가 가진 유일한 방어구인 구속구를 한쪽 다리의 것까지 합해서 이제 2개째 벗겨냈음에도 짜증만 치솟았다. 저게 모두 풀리면 다시 정령을 쓸 수 있을테지. 방패대신 창을 쥐어주는 셈이다.

다행히 저놈은 꽤나 지쳐보이니 시간을 끌면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그때까지 놈에게 시간 - 기회를 줬다간 이쪽 역시 손해다.

"책사! 당장 여기서 나가!"

"예?"

"도움은 고맙지만 니가 있으면 제대로 힘을 못쓰니까 휩쓸리기 싫으면 여기서 멀리 떨어져!"

저 블랙윙이 어떻게 내 공격 패턴을 꿰고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에 대해 아무리 잘 알아도 이 시대에 깨어나서 아예 사용하지 않은 기술까지는 모를 터.

냉기를 폴암에 집중시켰다. 나인하트도 온도 마법을 장기로 삼는 리엔의 마법사였기에 반파된 방 안은 입김이 나올만큼 추운 상태였고, 순식간에 집약된 냉기는 극지의 지배자라 불리는 백색곰과 같은 형상으로 휘몰아쳤다.

내 말에 책사는 곧바로 이 몸을 빼내려 했고, 그를 뒤쫓으려는 놈을 빙벽으로 가로막았다.

"일단 팔다리 몇 개 가져간 뒤에 설명을 듣도록 하지!"

연이어 빙벽을 일으켜 방의 모든 퇴로를 틀어막자 갇힌 것을 깨달은 놈이 당황했고, 그 사이 그의 귀찮은 기동성을 봉한 뒤 눈보라를 휘감은 폴암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강맹한 곰의 앞발에 놈의 어깨죽지가 통째로 뜯겨나갈 것이 자명한 결과였는데.

하늘에서 무언가가 쏘아졌다.

쐐애애애…… 째앵─!!

"…… 어?"

방금, 뭐야.

단숨에 빙벽을 박살내고 내 볼을 스치며 바로 옆에 무언가가 꽂혔다. 그것이 무엇인지 보기위해 끼릭끼릭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어이없게도 한 자루의 검.

검신에 빛나는 문자가 새겨져있긴 했지만 생김새 자체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법한 평범한 그것이 왜 갑자기 이곳에, 그런 무지막지한 위력으로, 어떻게 쏘아졌는지 전혀 알 수 없어 잠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틈에 놈은 도망쳤다.

"뭐, 뭡니까 이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나인하트의 당혹성에 검이 쏘아진 곳이 여기뿐만이 아님을 알았다. 젠장 어떤 자식이 저런걸! 당장 밖으로 나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한시라도 빨리 블랙윙 놈을 잡아야 한다.

둔탁한 타격음과 두어번 울렸다. 그 사이 놈에게 얻어맞았는지 나인하트가 한쪽 팔을 움켜쥔채 주어앉아있는 꼴에 묻는 시간도 아까워 곧장 어깨에 들쳐메며 놈을 뒤쫓았다.

"일기장은?"

"크…… 뺏겼, 습니다."

"제기랄."

욕지꺼리가 올라왔지만 그만을 탓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 검에 한눈팔아 놈을 놓친게 나였으니.

"마법을 쓰려고하니 어깨를 뽑아버리더군요."

"나중에 끼워줄테니 지금은 참아."

축 처진 그의 오른팔이 왼팔에 비해 더 길어 보인 건 그 때문이었나. 놈을 쫓는데 거치적거리는 주위의 나무는 대충 폴암을 휘둘러 처내면 됐지만, 그보다 더 성가신 것들이 있었다.

아까전에 날아온 것과 같은 어디서 쏘아지는건지 알 수 없는 검들. 시퍼런 검기를 두른 그것들이 블랙윙 놈에게 가까워지려고 할때마다 날아와 추적을 방해했다. 위력에 비해 내구도는 보잘것 없어서 크게 휘두르면 단번에 부술 수 있겠지만, 지금 내 한쪽 어깨엔 나인하트가 들려있어 양 손을 다 쓸 수 없었다.

"성가시게! 이거 막을 수 있어 나인하트?"

"이렇게 아프고 흔들리는 상태에선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아 젠장. 루미너스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다못해 메르나 팬텀이라도.

"저놈이 어디로 가고있는지 알아? 일기장을 강탈한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저놈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겠냐고."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계속 가도 정거장은 안나옵니다."

"그렇다면 대체 뭣때문에 이 짓을……."

[뛰어내리려는게 아닐까?]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큰 날개짓 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프리엔이 생각나지만 그보다 작고 유선형의 몸매를 가진 오닉스 드래곤 - 에레브 책사의 계약자인 테이아가 보호 마법을 펼쳐 또다시 날아오는 검을 막아주었다. 그녀의 등 위에 올라타있던 에반과 미르가 빼꼼히 머리를 내밀며 이쪽을 내려보았다.

"괜찮나요 나인하트 씨?"

"별로 괜찮지않습니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나의 마스터.]

"아무리 저라도 특급 무투가와 근접전같은게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사담은 그쯤하고, 아까 뭐라고? 놈이 자살할 것 같다고?"

슬슬 섬의 가장자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자살이 아니라 뛰어내릴것 같아. 놈이라면 정령을 써서 추락사만은 면할 수 있을테니까.]

"가능성은, 있군요."

"그러고보니 구속구도 본의아니게 거의 다 부숴줬지."

회피 능력밖에 못 봤지만 왠지 놈이라면 제 손으로 구속구를 부숴버리는건 일도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렇겠지.

[좀 전에 기사들에게 지시해 주변을 포위하도록 시켰습니다.]

"아란 누나까지 상대했다면 지금쯤 그는 많이 지쳤을거에요."

[숫자가 많으니 시간은 충분히 끌 수 있을거야.]

위의 셋은 꽤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만, 서서히 일어나는 감이 안 좋게 울렸다. 무언가 심상치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듯이.

[저희는 먼저가서 발을 묶고 있겠─?!]

"뭡니까 테이아?"

"당장 뒤로 물러나세요 누나!!"

에반의 다급한 외침에 무슨 일인가 생각하지 않고 곧장 발 앞쪽에 힘을 주어 뒤로 크게 뛰어올랐다. 갑자기 앞쪽에서 밀려오는 불길한 보라색의 기류에 닿은 초목이 빠른 속도로 말라붙어 파스스 흩어져가는 광경이 보였다.

어둠의 힘? 아니야. 그거하고는 달라. 물들이는게 아닌 빼앗는다는 느낌의…… 위에서 에반이 무언가를 보았는지 갑자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기, 기사, 기사들이."

[죽었어……?]

"예? 뭐라고요?"

[모두 쓰러져 있습니다 마스터.]

"미안한데 당신은 따로 와. 당장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말을 끝내며 들고있던 나인하트를 오닉스 드래곤 근처를 향해 집어던졌다. 비명소리라던가 하는게 들렸던 것도 같지만 신경쓸 틈도 없었다. 나는 짐덩이가 없어져 가벼운 몸으로 힘껏 땅을 박차며 단숨에 숲을 빠져나왔고, 그들의 말대로 여기저기 쓰러진 기사단원들이 보였다.

그 가운데 혼자 서있는 블랙윙 놈도 함께.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건 우리를 방심시키기 위해서였나?"

"체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급한대로 이들의 생명력을 흡수하는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들을 모두 죽였어?"

"죽이지 않았다. 기절할정도만 흡수하고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놈을 믿기 힘들었지만, 일단 쓰러진 기사들의 몸이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게 보였다.

"무슨 정령을 쓴거지."

"죽음의 정령."

과연. 그래서 이 일대의 초목이랑 벌레가 순식간에 말라붙어 죽은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자살이든 도망이든 절대 놓치지 않아 블랙윙."

막다른 곳에 몰린 놈은 강탈한 일기장을 놓치지 않겠다는듯 한 손으로 깊이 끌어안으며 자세를 잡았다. 웃기지도 않아. 왜 저놈이 저걸 가지고 있었고, 또 손에 넣으려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겠다. 그 귀찮게 방해하던 검이 안 떨어지는 이 틈에 속전속결로 밀어붙여서 제압할 생각을 다잡았다.

적당히 긴장된 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섰다. 동시에 팽팽히 당겨진 근육이 놈에게 달려들 준비를 끝났다고 말했고, 폴암을 꽉 움켜쥔 뒤 놈에게 달려들었다.

돌진하며 발생한 풍압에 말라붙은 풀이 먼지로 화해 흩날렸다. 옆구리를 반정도 자를 생각으로 휘두른 도끼날은 그대로 놈의 살을 갈라─

카앙!

***

side out.

무언가 떨어졌다.

아니, 떨어졌다는 표현은 부적합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인영은 마치 날개를 가진 요정들처럼 조용히 그리고 강림하듯이 내려왔고, 바람조차 일지 않는 착지에 아란은 그 인영이 걸치고 있는 검은 망토를 날개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여태껏 날아온 검과 똑같은 평범한 생김새의 검으로 그녀의 폴암을 당연하다는듯이 막아낸 새카만 남자는 은월을 아란에게서 지켜내려는듯 그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왜 늦었지."

"미안하다. 빼앗긴 물건을 되찾아야했다."

그는 물끄러미 은월이 껴안고있는 일기장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저것때문이었나.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해라."

"알았다."

"아아 진짜…… 니놈은 또 뭐야?"

또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아란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척 보아하니 저놈이랑 같은 블랙윙인것 같고. 어떻게 들어온거지."

"대충 부쉈다."

"뭐?"

결계가 거치적거려 참격을 한 방 날려 박살냈다는 뜻이었지만 거기까지 해석하지 못한 그녀는 어쨌든 결코 평화적인 수단은 아니었을거라고 확신했다.

밀려오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그녀는 검은 남자를 신중하게 관찰했다. 블랙윙 특유의 마크가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입고있는 제복의 금장과 제 공격을 막아낸 실력까지 보았을때 아무리 못해도 간부급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때 막 도착한 테이아가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경악했다.

[저, 저자가 왜 직접?!]

"놈이 누군지 알아?"

[소드댄서입니다! 얼굴은 안보이지만 블랙윙에서 날아다니는 검을 쓰는건 그놈뿐이라고요! 저자를 무슨 수를 써서든 잡아야 합니다!!]

아란은 퍼뜩 고개를 돌려 놈을 다시 보았다. 그의 어깨 위로 날개처럼 띄워져있는 수 자루의 검들, 자세히 보니 아까전에 쏘아져왔던 그것과 동일한 물건이었다.

"하…… 니가 그 소드댄서였단 말이지."

싸늘해진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녀에게서 피어오르는 기세는 활화산이 터지기 직전처럼 거칠게 일렁였다. 폴암을 움켜쥔 팔의 근육이 부풀며 힘줄이 올라왔고, 심장이 빠르게 뛰며 끓어오른 피를 전신에 돌려 뜨겁게 달궜다.

뇌에서 흘러넘치는 아드레날린이 일말의 피로마저 날려버렸을때, 그녀는 전력으로 소드댄서를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니놈이 그 엿같은 짓을 지시한, 장본인이였냐─!!"

머리를 쪼갤 기세로 내려쳐진 폴암을 그의 주위에 떠있는 검이 빠르게 막았지만 언덕마저 밀어버릴 힘에 철제라는 것이 무색하게 콰직! 단번에 찌그러졌다. 이에 소드댄서는 다른 검을 쥐어 그녀를 향해 휘둘렀고, 아란은 폴암을 돌려 창대로 검을 막아냈다.

"몸 성히 잡을 생각따위 없으니 각오하는게 좋을거다 소드댄서……!"

"마음대로."

이쪽도 잡힐 마음같은건 전혀 없으니.

서슬푸른 기가 맺힌 검과 폴암이 부딪히며 공기를 박살내는 충격파가 발생했다.

포획이 목적임에도 죽일 기세로 휘둘러지는 폴암과,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유연하게 움직이는 검은 실체를 안 보이고 잔상만이 흐리게 남을만큼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았다. 고막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무기가 부딪히는 금속음이 격렬하게 울렸고, 단순히 그 여파만으로 땅이 갈라지고 얼어붙었다.

"저자가 청문회 계획을 세운 사람…… 이라고요?"

[예. 더불어 현재 블랙윙의 실세나 다름없는 이죠.]

"그런 자가 몸소 부하를 구하기 위해 오다니, 무모하군요."

[의외로 부하를 아끼는걸지도.]

멀리 떨어져있던 그들이 있는 곳까지 여파가 올만큼 격한 전투임에도, 싸우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소드댄서의 뒤에 있는 은월은 상처하나 없을만큼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소드댄서라는 남자의 기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증명된거나 다름없었다.

광포한 공격을 퍼붓는 아란의 폴암과는 반대로 물 흐르듯 끊어짐없는 궤적을 그리며 철저히 방어만을 고집하는 소드댄서의 검은 언뜻 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압도하고있는 건 소드댄서 쪽이었다. 아란의 맹공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뒤에 있는 이까지 완벽하게 보호한다는 무지막지한 일을 숨조차 헐떡이지않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열이 올라 마구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웅의 일좌를 차지한 그녀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리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패도적인 공격만을 고집한 이유는 간단했다.

챙그랑! 폴암에 연이어 맞붙은 검이 또 하나 부서지며 그는 인상을 썼다.

"니 잘난 검은 이제 몇 자루나 더 남았지?"

아무리 흘려내며 막아내는 수비식이라 한들, 결국 무기로서 서로 부딪히게 되어있다. 그리고 위력은 모를까 내구도 자체는 평범한 그의 검은 냉기를 두른 묵직한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빠르게 손상되어 소모품마냥 갈아치워야 했다.

소드댄서는 쥐고있던 검을 흘깃 보았다. 마지막 한 자루였지만 아란의 공격을 몇 번이나 받아 검신이 휘어졌고, 손잡이는 그 자신의 악력에 구겨진지 오래다. 이에 미련없이 검을 뒤로 휙 던지며 말했다.

"뛰어내려라 유에."

"알았다."

…… 뭐라고?

그녀의 입이 다 벌어지기도 전에 몸을 다 추스른 은월은 그의 정신나간 지시에 한치의 반박없이 섬의 가장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무, 뭐하는 짓이야!"

"한눈 팔 때가 아닐텐데."

그는 망토 안쪽의 허리 뒷춤에 차고있던 검을 신속하게 뽑아 발도술을 날려서 은월을 뒤쫓으려는 그녀의 발을 멈췄고, 그 사이 은월은 정말로 에레브 아래로 뛰어내렸다.

완전 미친거 아니야? 욕지꺼리가 절로 목구멍에서 올라와 소드댄서에게 뭐라고 말하기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눈이 부릅 떠졌다.

"너어……."

보석 세공이 박힌 새 형상의 금장식이 달린 화려한 붉은색의 검.

결코 잊을 수 없고, 또 착각할 수도 없는 그 물건이.

"왜 니놈이 그걸 들고 있는거야─!"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게 어떤건지 생생히 체감하며 그녀는 폴암을 내려쳤다. 언덕을 한방에 날려버릴 그 공격을, 그는 검으로 도끼날의 옆면을 쳐내어 비껴냈다.

그녀의 외침에 둘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어서 구경만 해야했던 에반과 나인하트, 두 오닉스 드래곤들은 그가 들고있는 검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저걸 블랙윙이?"

"저건 스승님의 것인데."

아까와는 달리 아란은 미친듯이 폴암을 휘두르며 그를 공격했다. 같은 맹격이라도 이성적이지 않은 그것들을 막아내는건 되려 쉬웠으며, 그의 손에 감긴 무기또한 평범한 무기따위와는 아득히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기에 흠 하나 나지않았다.

"너, 너 이 자식 검호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왜 니가 그걸 가지고 있는거냐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는게 이상한가."

"왜 블랙윙따위가 그걸 갖고 있는지 당장 말해!!"

"…… 왜 갖고 있냐니."

그는 목을 날려버릴 기세로 날아드는 도끼날을 몸을 낮추어 피한 뒤, 가볍게 검을 돌리듯이 휘둘러 파캉! 폴암의 머리 부위를 잘라냈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떨어진 폴암의 머리가 땅에 푹 꽂혔다.

섬의 아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솟구치며 거친 돌풍이 불어닥쳤다.

"내 검을 내가 가지고 있는게 이상한가."

그가 눌러쓰고 있던 블랙윙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며 그들은 비로소 소드댄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휘날리는 긴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여성으로 착각할만큼 선이 고운 이목구비였지만, 결코 여자로 볼 수 없는 강인하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깃들어 있는 그 얼굴은.

피나 불, 보석같은 것에 비유할 수 없는 선명한 붉은 눈은.

영웅이 되어서도 존경할만큼 굉장한 실력과 인성을 가졌던 이가 있었다.

"검호오오오오──!!"

그녀가 절규하건 말건 그는 아무런 동요없이 몸을 돌려 아래에서 솟아오른 새와 램프를 합친듯한 기묘한 생김새의 비행선의 선상 위로 뛰어올랐다.

"거기서! 거기 서란 말이야!"

머리가 날아가 창자루만 남은 폴암을 움켜쥔 아란은 그를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으나, 하늘에서 심판과도 같은 빛기둥이 떨어졌다.

한바탕 땅을 구른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았고,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었다. 재앙적인 힘을 머금은 빛의 마법진이 기계장치의 톱니바퀴마냥 맞물려 줄줄이 늘어선 광경은 공포스러운걸 넘어 헛웃음만 나왔다.

신성 마법중에서 유례없이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마법 - 제네시스. 저걸 주력으로 삼아 폭격용으로 쓰던 드래곤이 있었다.

비행선에 탄 용의 후예들과 비슷한 생김새지만, 이질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을 방출중인 왕관같은 황금색 뿔과 눈을 가진 이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퇴각한다."

""알겠습니다.""

그를 태운 비행선은 그들의 눈앞에서 텔레포트하며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 죽겠어요. 저번주 내내 바빠서 도저히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이번주도 바빠서 다음 챕터의 시작은 좀 늦어질듯.

작품 설정의 파워밸런스 부분을 조금 추가했고, 뜰에 트립퍼들의 간략한 프로필을 올렸습니다. 보실 분은 보세요.

에레브에서 스카이 다이빙한 은월은 아래와 같이 되었습니다. 본편에 넣기 어정쩡해서 뺐습니다.

***

뛰어내리라는 지시에 의심같은건 들지 않았다. 나는 아란이 더 쫓아오기 전에 망설임없이 섬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땅조차 보이지 않는 높이에서 떨어져 공기가 온 몸을 두들겨대 전신의 털이 곤두섰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붙잡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은신하고 있던 비행 유적의 장막이 걷히며 선상에 있던 새하얗게 질린 안색의 이름모를 소년이 나에게 달려와 멱살을 잡았으니까.

"당신 미쳤어?! 왜 거기서 뛰어내려!"

"그가 뛰어내리라고 했으니까."

"검호가 그렇게 해라고 해서 진짜 뛰어내리는게 어디있냐고! 내가 아니었다면 자살감이었다는거 알아 이거?!"

"그럴리는 없다. 그가 아무 생각없이 그런 지시를 했을 리 없고, 니가 있었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애초에 나를 구조하러 왔는데 자살을 시킬 리가 없지않나.

내 말에도 소년은 납득하지 못한듯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 말하고 싶은데 말을 만들지 못해 끝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진짜……! 사람을 뭐 이딴식으로 믿냐고!"

"아무튼 나를 받아줘서 고맙다. 너의 이름은 뭐지."

머리를 쥐어뜯어 다소 산발이 된 소년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대답했다.

"…… 키네시스입니다."

"이미 들었겠지만 은월이다."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은 후 소년은 아직 자신은 에레브 사람들의 눈에 띄이면 안된다고 비행선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

@류동지 - 다른건 모르겠고 기계촉수가 꼴리네요.

@abenel - 좀 놀라긴 하겠네요. 죽은애가 살아돌아왔으니.

@Sisre -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녀석이 - 어쨌든 검호 손에 죽겠죠 뭐...

@루서스 - 어째선지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설정.

@SB류현 - 실제로 세피로트는 맨손격투 한정으로 검호보다 강한 놈.

@mmo0522 -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Legendssj2 - 그렇게 사이다였는데 이번편은 엄청 늦어버렸죠. 죄송합니다.

@제레프 - 심지어 은월은 전력조차 아니었음.

@노란우산s - 어차피 모두한테 잊혀져서 상관없을지도.

@허형 - 영고=영원히 고통받는, 테스는 모험가 해적이자 해적 전직관 카이린의 오빠인 쿼터 엘프입니다. 8백년전부터 지금까지 살았어요.

@hakuya - 트립퍼는 모두 지도를 다시 그려야하는 수준의 파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ㅇㅇ군 - 은월은 도망쳤고~ 검호는 이제서야 얼굴 보였고~

@슈엘리안 - 본편에서 불행했던만큼 여기선 행복을... 받을 수 있을까?

@익재공 - 아니요. 여제에게 충성하는 나인하트라도 그 지경까지는 안갑니다. 당장 미래의 문만 봐도 나인하트가 플레이어에게 여제를 쓰러뜨려달라고 하잖아요. 나인하트는 여제에게 충성하되 선은 넘지않는 사람입니다.

@루엔시르온 - 몸상태가 그리 좋지않음에도 기사단장 4명 격파 후 아란과 싸움.

@대어의예감 - 아리아는 초월자 이상으로 강하니 논외입니다.

@앙스럽네 - 그래서 '8백년 전'이라고 말했죠.

@Liber720 - 체술도 좀 넣어주지.

@sanya - 완결날때까지 연참은 없을걸요...

@socns - 파픈이 죽었을때와 맞먹을겁니다 아마.

@칼른 - 분명 정령을 봉인하기 위한 구속구인데 본인은 방어구로 활용해서 에레브 사람들을 엿먹임.

@dumy - 미우미우에서 사냥 용도로만 쓰였다죠.

@찬양천사 - 힐라의 화장은 정말 마법의 영역에 들어가 있을지도.

@카한Kahan - 은월이 해적영웅인 이유가 주먹쓰는 무투가였기 때문.

@여행자구름 - 다음 챕터에서 좀 위험해질겁니다.

@x흑란x - 영웅이 되기 전부터 무명으로 떠돌아다녔던 과거가 있음.

@레시코 - 혼파망 만만세.

@리아카에린 - 다신 이런일 안하겠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날 끌려와서 은월 받아낸 키네시스. 그리고 루카스 촌장이 둘의 외모를 기억하고 있는건... 적어도 검호는 싸움 끝난 뒤에 회복하고 마을 사람들한테 사과하고 갔거든요.

@인리연찬 - 저도 잘 기억 안나네요. 일단 이성적인 호감은 파픈뿐일겁니다. 나머지는 경애, 존경, 동경같은 것이라. 그리고 아스카의 성별은 비밀입니다.

@네임0306 - 나인하트보다 팬텀이 뒷북칠듯.

@SourcesMoon - 모자 회수안하고 걍 갔음.

@Mercurius - 심적인 문제만 빼면 짱짱맨이라죠.

@달빛조각사만세 - 그분은 인간을 초월했으니 논외로.

@Ratios - 은월과 호크아이는 비교하면 안됩니다. 경험치가 어우...

@건전한독자 - 잘될까나~

@Blake117 - 저짓을 사실 프롤로그 때부터 할 수 있었다는게 함정. 본인이 못 썼을 뿐이지.

@눈뜨면지옥 - 기사단장 레벨이 구만렙정도라면 영웅들은 현만렙입니다. 그리고 트립퍼는 최소 300이상.

@폴랭 - 아니나다를까 아수라장.

@책벌레씨 - 사실 별 생각없이 한번쯤 은월한테 이런 대사치게 해주자~ 라고 생각하며 썼는데 생각보다 열렬한 반응에 놀랐음.

@Runatic翰 - 만약 상태가 더 좋았다면 진짜 무쌍이 가능했을지도.

@마이마니 - 그 시대 사람들한테 알려지지 않았으니 제외를...

@표고버섯 - 그런짓을 하기 싫으면 반드시 성공시키라는 뜻이기도 했고, 본인이 너무 쫄아서 그렇지 키네시스 능력이면 실제로 가능함.

@Yoontlemin - 실제로 트립퍼는 모두 영웅 이상 초월자 미만입니다.

@미적분II - 음란마귀는 물럿거라!

@Eluines - 사람은 토막내지 않습니다.

@칼크래프트 - 사실 자세히 보면 눈색이랑 머리색만 겹칠뿐 다르지만 분위기가 닮음.

@육합 - 오즈가 정령 없으면서~ 할때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함.

@키하라스티카 - 고생하는데 가끔 이렇게 띄워줘야죠.

@갓타치 - 나중엔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언가도 쪼갤겁니다.

@천궁사월 - 아스카까지 추가하면 20%에 조금 못미치는 승률이 나옵니다.

@룰루C - 빡쳐서 어깨 탈골시키고 안경도 부숨.

@이레2 - 이번 일까지 생겼으니 진짜 과로사할지도.

@cosy - 일반적인 철창 우그러뜨리는건 법사인 루미너스도 할 수 있다는게 함정.

@여우별65 - 맨몸이라서 회피실력이 엄청난데다 항마력이 낮아서 주먹질로 마법을 박살내는 법까지 익힌 최강의 무투가씨.

@하늘연꽃 - 또 은월이 비중있게 나올때가 언제일지.

@pio10세 - 전투씬 고자라 한 편 이상, 두 편까지 전투씬을 쓰면 제가 죽어나감.

@적현월 - 현 시대의 무투가중에서 은월을 능가하는 무투가는 세피로트뿐이고, 맞먹는 사람은 무릉도장의 무공뿐.

@ReFrante - 둘이 사이좋게 깽판쳐서 섬을 박살냈으니 그냥 싸잡아서 같다고 한걸지도(웃음).

@에누마엘리시 - 물리적 피해는 은월이 끼쳤는데 충격은 검호가 더(애도).

@고양이선생님 - 이 글에서 키네시스는 못 하는건 없지만 그렇다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는 캐릭터입니다. 머리는 이데아가 더 잘쓰고, 힘은 검호 외 기타등등이, 염동력마저 사이키커가 더 잘하는... 거기다 일선에서 굴리기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고 멘탈적인 면까지 부족해서 후방에 배치할 수 밖에 없음.

@크리잔 - 패널티가 패널티가 아닌분.

@sadgfdfh - 근데 무투만으로 영웅까지 갔잖아? 에레브는 안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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