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분노 --> side out.
에레브에서 꽤 떨어진 상공으로 텔레포트한 아브락사스는 곧바로 스텔스 장막을 두른 뒤 빅토리아 아일랜드를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고, 바깥에 나와있던 이들 대부분이 바람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며 선상에는 은월과 아스카, 검호만 남게 되었다.
"너는 들어가지 않는건가."
은월은 에레브를 떠나면서 지금까지 시종일관 표정이 굳어있는 검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일찌감치 각오했었겠지만 역시 그들 앞에서 정체를 밝히는건 아무리 그라도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검호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개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 나중에 들어갈거다."
"너무 오래 바람을 쐬지 마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뜻 덤덤해보였지만 무언가 잔뜩 억눌러진것 같은 목소리에 은월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겨우 발을 돌렸다. 머리가 복잡할때에 옆에 있어봤자 방해겠지.
은월마저 비행선 안으로 들어가며 두 사람만 남게되었을때, 아스카는 조용히 검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마스터?"
"아마도."
"'아마도'는 무슨, 역시 무리했던거지?"
검은 마법사의 분신과 메이플 아일랜드를 박살내가며 싸운게 며칠 전이었는데 후유증이 아직 남은 상태로 아란이랑 싸우다니. 익숙하지도 않은 한손검으로 싸운 것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나인가. 아스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일부러 제 시선을 피하는 검호를 지긋~이 보다 망토로 가려진 그의 오른팔을 콱 잡았다.
"──!?!"
감전된 것처럼 찌르르 밀려오는 격통에 그는 차마 비명을 지를 수 없어 한차례 크게 몸을 들썩였고, 그 꼴에 아스카는 한가득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란말이야 마스터."
"크, 내가 아픈걸 알면서 왜 그러는데?"
"사람 다 갈때까지 혼자 참고있는 모습이 답답해서 그런다!"
미련 곰탱이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아스카는 흥! 크게 콧김을 내뱉으며 그가 걸치고 있는 망토를 거칠게 빼앗아 벗겼다. 순식간에 망토를 빼앗긴 검호는 당황하며 손을 뻗었지만 아스카가 몸을 돌리며 날아온 꼬리가 찰싹! 그의 팔을 쳐냈다.
이후 아스카는 빼앗은 망토를 깔개삼아 바닥에 폈고, 그의 어깨를 눌러 그 위에 앉힌다음 당당히 외쳤다.
"팔!"
"…… 응?"
"벗어서 내놓으라고! 치료 마법 써줄테니까."
"여기 바람 엄청 불어서 추운데."
"내가 옷 다 찢어버리기 전에 그냥 내놔."
황금색 홍채안의 세로꼴 동공이 찢어지며 잡아먹을 기세로 희번뜩하게 빛났고, 그 모습에 불어오는 찬바람과는 별개로 전신에 오한이 든 검호는 더 볼것도 없이 빠르게 상의를 벗어 무릎꿇고 정자세를 취했다. 앞뒤가 안맞는 행동이었지만 하지않으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아스카는 검호의 팔에 감긴 진통과 재생의 주문이 빽빽하게 써진 천을 뜯다시피 풀어냈고, 그렇게 바깥공기를 쐬게 된 팔은 검붉은 피멍이 병에 걸린 것처럼 여기저기에 번져 끔찍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이 정도면 피멍이 아니라 심각한 내출혈이다.
"정말이지……! 왜 이런걸 말도 안하고 꾸역꾸역 참아버리냐고! 마스터가 무슨 초인이야?"
"나 초인 맞는데……?"
일단 검 한 번 휘둘러서 섬을 자르는 사람을 일반인이라 보기엔 무리가 굉장히 많다. 피멍이 든 부위에 손을 얹어 치유의 빛을 쬐어주던 아스카는 그 말에 이를 빠득! 갈며 손에 힘을 주었다.
"으극?!"
"그런 뜻이, 아니잖아─!!"
"잠, 잠깐, 잠깐만 손, 손 좀."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왜 다친걸 말하지 않냐고! 말하지 않으면 얼마나 다쳤는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단 말이야!"
"아파! 지금 아프니까 이 손 좀 놔줘 아스카!"
검호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도 아스카는 소리가 안쪽까지 들리지 않도록 아예 방음결계를 치며 과격한 치료행위를 이어갔다.
한편, 바깥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선체 내부에선 엉망이 된 은월의 머리카락을 적당히 정리해준 키네시스가 막 이데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빼도박도 못하게 완전히 들켜버렸는데 이래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예상범위 안이니까요. 오히려 임팩트있게 까발려서 그들에게 큰 충격을 줬으니 매우 이득입니다."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에 키네시스는 오싹함마저 느꼈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냉철함을 유지하는것이 책사인 그녀의 최대 강점이지만, 저쯤되면 사람같지가 않다.
"여태까지 검호가 블랙윙 간부라는걸 숨기려고 별 짓을 다했던걸로 아는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알려지면 당연히 다른 군단장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겠어? 그랬다간─"
"그런 일 없습니다. 대대적으로 알려지기는 커녕 극 소수에게만 전해지고 오늘 밝혀진 진실은 은폐될테니까요."
"어떻게?"
그런 무지막지한 일이 은폐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나. 아무리 노바족이라도 이건 무리일텐데. 그런 키네시스의 생각을 읽은 이데아는 훗,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나설것도 없이 저쪽에서 직접 다 숨겨줄겁니다."
"하…… 어째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진실을 감당할 수 없거든요. 키네시스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려고 했으나 이데아쪽이 먼저 친절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시를 들어드리죠. 보통의 사람들은 중요하면서 어느정도 영향력을 가진 어떠한 사실을 알았을 때 대체로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알립니다."
"그렇지."
"머지않아 닥쳐올 위험, 감쪽같이 모두를 속인 거짓말, 흥미로운 가십거리등 그런 것들은 그래서 잘 퍼지죠."
하지만 그 '사실'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상황은 반대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심각하고, 위험하고, 그 영향력 역시 엄청난 사실을 알게되면 반대로 입을 다뭅니다."
"그런 경우가 있어?"
"키네시스 군도 그런걸 하나 알고있잖아요?"
이 세계가 이미 멸망했고, 또 차원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 그런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
"바로 그겁니다."
감히 알릴 수 없는 사실.
검호가 소드댄서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에 해당되었다.
***
에반side.
우리는, 나는 무엇을 본걸까.
그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한 이후 머리가 텅 비어버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나도 아란 누나도 숙소에만 틀어박혀있다 굉장히 지쳐보이는 얼굴의 테이아 씨가 우리를 찾아와서야 겨우 몸을 움직였고, 평소라면 내 몰골에 뭐라고 말했을 미르도 조용히 나를 이끌어줄 뿐이었다.
질질 다리를 끌며 겨우 도착한 장소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메……르."
"아, 아란?! 너 모습이 왜 그래?"
"꼴이 말이 아니군."
그곳에 있던 메르세데스 님과 루미너스 씨는 초췌한 아란 누나를 보며 당황했고, 누나는 그들을 본 순간 울컥 눈물을 쏟아내며 두 사람에게 뛰어갔다.
항상 강하고 밝아보였던 아란 누나가 울면서 누군가한테 매달린다는 상상조차 해본적없는 광경이 펼쳐졌지는 것에 이어서 그녀의 입밖으로 쏟아져나오는 울음맺힌 목소리에 그들은 더더욱 굳어버렸다.
"어째서, 어째서어……! 왜, 그가 그런 모습인거야…? 왜……."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일단 진정해라 아란."
그분들은 자세한 설명을 아직 듣지 못한듯 누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또다시 그때 본것이 떠올라 몸이 파삭파삭 굳어가는걸 느꼈다.
어째서 스승님이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걸까. 대체 왜.
"괜찮습니까 에반?"
"데몬, 씨."
"당신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은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나중…… 에요."
차가운 느낌의 청회색 피부가 무색하게 걱정스러운 표정인 데몬 씨가 다가와서 물었지만, 나는 차마 그 사실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때 본 것이 정말 사실인지 의심스러웠고 또 믿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희를 이곳에 와달라고 한 그는 어디 있는건가요? 에레브의 책사말입니다."
"마스터는 곧 오실겁니다. 며칠전에 또 엄청난 사건이 터져서 일이 너무 많아진터라."
[그렇다면 그가 오기전에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왜 저희들을 호출한건가요. 그것도 비공식적으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페어리 퀸 아마란스 님과 자리에 오지못한 대신 화상통신 마법으로 얼굴을 비추고 있던 오르비스의 미네르바 님이 테이아 씨에게 물었다.
"물어보신건 당연히 설명해드릴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하게 말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주고받은 대화는 모두 기밀로 해주십시오."
"어째서 그런 조건을 다는거지."
"그만큼 충격적이고 또 위험한 것에 대해 논할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들이 알려지면 에레브 더 나아가 연합이 크게 흔들릴 것이 자명하기에 미리 말씀드리는겁니다."
무언가 말이 더 오갔고 얼마 안있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들으셨겠지만 방금 전 페어리 퀸께서 말씀하신 '엄청난 사건'때문에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그러고보니 포로로 잡았던 블랙윙 멤버가 탈출했다고 에레브내에 떠들썩하게 퍼졌더군. 대체 어떻게 된거지."
"그 부분은 일차적으로 저희쪽의 관리소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블랙윙 멤버는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고, 또 그 힘의 방향 역시 알고있던 것과 틀렸죠."
"듣자하니 그 블랙윙 멤버는 정령사라고 하던데 아니었습니까."
"정령사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정령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요소, 진짜는 기사단장들을 손쉽게 쓰러뜨리고 아란 님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체술이었습니다."
"무투가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땅을 보았다.
블랙윙 멤버, 은월이란 남자는 스승님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없이 에레브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무리 아랫쪽에 비행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살과도 같은 그 행동을 명령하고 또 그걸 실행하는 둘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비정상이었다.
"더불어 그는 어떻게 한건지 모르겠으나 외부에서 블랙윙 간부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은 그와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다는 뜻인가."
"그렇게 추측됩니다. 거기다 그를 데려가기위해 왔던 블랙윙의 간부는 무려 소드댄서, 현 블랙윙의 실세나 다름없는 이였죠."
"그런 놈이 직접 왔었단 말인가."
"직속부하였으니 그럴수도 있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건─."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테이아 씨의 말을 받았다.
"─소드댄서가, 검호였다는 사실이지요."
결코 떠올리고싶지 않았던 사실을 막 도착한 나인하트 씨가 말로서 되새겨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한건지 찰나지간 이해못했던 이들은 서서히 그 말뜻을 이해하며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변했고, 이내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버려 죽음과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수 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입을 열지않아 공포스러운 정적은 한참 이어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데몬 씨를 시작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책사. 무슨 헛소리를 지껄인거지."
"제가 똑바로 들은게 맞습니까? 누가 누구라고요?"
[최근들어 일이 많다고 듣긴 했지만 오늘 상태를 보니 좀 쉬는게 좋을 것 같군요.]
"딱 보니까 상태 안좋아보이는데 지금 정신 차리고있는거 맞아?"
한 사람씩 거칠때마다 섞여나오던 의심은 나인하트의 건강 걱정으로 주제를 바꿨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확실히 나인하트 씨의 몰골은 시체가 되기 직전이라 조금도 괜찮아 보이지않았다. 곧 과로사해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보여.
"…… 지금 저도 제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건지 의심스럽긴 합니다. 마음같아선 일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 먼곳으로 가고 싶으니까요."
"과로때문에 정신착란이 와서 우리를 부른거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자라."
루미너스 씨의 말에 나인하트 씨는 땅이 꺼지도록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간신히 의자까지 왔다.
"정말 간절하게 그러고 싶지만 제가 해야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중에 도와줄테니까 지금은 돌아가라. 그런 질나쁜 헛소리까지 하는걸 보니 상태가 심각해보이는군."
"유감스럽게도 헛소리가 아닙니다."
젖은 손수건을 나인하트 씨의 이마에 올려주던 테이아 씨의 말에 미네르바 님이 반문했다.
[무슨 뜻이죠 그건?]
"단어 그대로의 뜻입니다. 설마 마스터가 심심풀이로 여러분께 한시바삐 와달라고 연락을 했을거라 생각했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람을 불러다놓고 현실성이 전혀 없는 말을 하니 그러는거 아닙니까."
페어리 퀸은 그 아름다운 얼굴로 은은히 불쾌감이 스며든 표정을 지었다.
"요 몇 년간 행적이 묘연하긴 하지만 그분이 블랙윙같은 곳에 간부가 되었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농담으로라도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블랙윙 멤버가 탈출한 충격이 큰 모양인데 그렇다고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세 사람은 테이아 씨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고, 말하진않았지만 루미너스 씨와 메르세데스 님도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나무라듯이 눈빛을 던졌다.
이에 나인하트 씨가 뭐라고 말하려 할때, 동료들의 다독임에 어느정도 진정된 아란 누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이야."
"뭐?"
"믿을 수 없지만, 책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누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필사적으로 쥐어짜내며 계속 말했다.
"그때 그 블랙윙 놈을 데리러 오고, 그놈을 지키기 위해 나랑 싸운 소드댄서는, 검호 그였단 말이야……!"
"잘못 본게 아닙니까?"
"그럴리가, 없잖아!"
부정하고 싶다. 그날 본 것을.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너무도 명확한 증거가 있었으니까.
"이 시대에 나를 한손으로 가지고 놀면서 싸우는게 가능한 전사가, 검호 외에 또 누가 있겠냐고!!"
악을 쓰며 외치는 말에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외모쯤이야 어떻게든 바꾸면 된다지만 실력만큼은 속이는게 불가능하다.
청문회때 스우가 했던 말 역시 서서히 떠오르며 하나 둘 끼워맞춰졌다. 소드댄서(Sword Dancer)와 검호(劍豪) 둘 다 검에 연관된 호칭이었다. 또 블랙윙 내부에서 스우와 대립했던건 과거 그들과 싸우는 입장이었기 때문일테고, 거기다 나인하트 씨가 추측했던대로 정체가 밝혀지면 파문이 일어날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조건까지 완벽하게 충족한다.
쩍쩍 굳어가는 이들을 보며 나인하트 씨는 느리게 어떤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건?"
"그가 떨어뜨리고 간 물건입니다."
블랙윙의 멤버들이라면 대부분 쓰고다니는 검은 모자. 하지만 그의 정체를 감추는데 쓰인 이 물건은 역시 보통의 모자와 달랐다.
"혹시나해서 조사해본 결과 이 모자에는 고도의 마법이 걸려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마법은 보는 사람의 인식에 장애를 일으키는 종류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안면인식, 그러니까 이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번 시험해보시죠."
모자와 가까이에 있던 데몬 씨는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모자를 집어들어 써보았다.
"어떻습니까."
그가 눈썹 부근까지 모자를 눌러썼을때 챙 아래로 그의 독특한 피부색과 이목구비가 대략적인 윤곽만 남긴채 뿌옇게 흐려졌다.
"…… 보이지 않아."
"놈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군."
[이건, 놀랍군요.]
"그 정도입니까?"
모자를 벗자 다시 데몬 씨의 얼굴이 보였다.
"보신바와 같이 마법의 효과는 간단하면서 강력합니다. 착용자의 얼굴을 감추는건 물론, 누가 썼는지 이미 알고있음에도 그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도록 인식능력을 비틀어버리죠."
"이 물건때문에 저희 역시 처음에는 소드댄서가 그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연히 모자가 벗겨진 순간 저희 모두 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아란님과 저, 테이아, 에반과 미르까지. 한 사람이면 모를까 저희 모두 똑같은 것으로 잘못 보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모자와 같은 환영마법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아란 님과 맞먹는 수준의 전사는 현 시점에서 검호, 그분 외에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다……."
"아스카 씨도, 있었어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기에.
"용의 후예들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요."
다른 생물종과는 비교자체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마력과 오닉스 드래곤 특유의 황금색 뿔과 눈은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 없었다.
"그때 그분을 쫓으려는 아란 누나를 공격했던건 아스카 씨였어요."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에반?"
"…… 네."
입밖으로 나오는 긍정의 대답이 싫었다.
"제네시스 마법을 그렇게 많이 쓸 수 있는건 드래곤 외에는 불가능한걸요."
"잠깐만, 방금 제네시스라고 했나?"
"그거 그의 오닉스 드래곤이 폭격용으로 자주 쓰던 마법으로 기억합니다만."
데몬 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옛날에 그거에 엄청 당했었다고 중얼거렸다.
"이것 외에 증거는 없습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당신들밖에 보지 못한 것이잖습니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당신들밖에 없었나요?"
"블랙윙 멤버를 잡기 위해 기사들에게 포위망을 구축하라고 지시하긴 했었으나, 그가 정령의 힘으로 모두 쓰러뜨려서 저희 5명 외에는 그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속 듣고있으니 답답한데 그냥 기억을 구현시키는 마법을 써서 너희가 보았다는 그걸 보여줄 수 없나. 나인하트 그대라면 충분히 사용가능할텐데."
루미너스 씨의 말에 나인하트 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무리입니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 제 상태는 보시는바와 같이 굉장히 안좋아서…… 거기다 다른 네 사람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충격을 받은건 똑같아 그 기억의 구현은 힘듭니다."
[확실히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여러분이 쇼크를 받는건 이상하지 않겠군요.]
"다른 물리적인 증거는 없어?"
"안타깝게도……."
"─하지만 증인은 있지."
다소 갈라지긴 했지만 아는 이의 목소리가 복도쪽에서 들려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그곳엔 환자복에 가까운 잠옷을 입고있는 창백한 안색의 남자 - 팬텀이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
"이제서야 깨어난거냐 좀도둑."
"막 일어났거든. 아직도 머리가 멍하고 온 몸이 뻐근해서 움직이기 힘들어."
그를 보고 놀랐던 메르세데스 님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팬텀 씨를 부축해서 데려왔고, 그녀가 앉았던 의자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보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이 증인이라고요?"
"나는 약 한 달 전에, 에반과 함께 에델슈타인의 블랙윙 기지에 잠입했다가 그곳에서 그를 봤어."
처음듣는 이야기다. 그 뒤로 팬텀 씨를 만나지 못해 혼자서 어떻게든 빠져나왔을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었나.
"그 무렵에 나는 블랙윙의 배후에 군단장이 있을거라 추측했고, 실제로 거기서 간부의 방을 뒤지다 윙마스터 오르카의 사진을 찾아냈지. 블랙윙 - 윙마스터라니, 왜 몰랐나 어이없을만큼 간단하게 이어지더라고."
"설명은 그쯤하고 본론을 꺼내주시죠. 거기서 그분을 보았다고요?"
"의외로 성격이 급하시네 페어리 퀸께서는. 하나씩 말해줄테니까 진정해주겠어?"
환자복 차림인데도 특유의 여유로운 행동거지는 변함이 없어 실소가 나왔다. 내 옆에 있던 미르도 '저 사람 진짜 한결같네'라고 중얼거렸다.
"무모하군. 혼자서 적진 한복판에 간거냐."
"하필 그 두놈이 있다는걸 알아서 좀 흥분한 상태였거든. 어쨌든 윙마스터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게되자마자 나는 놈들을 찾기위해 기지를 돌아다녔고, 그러다 우연히 어느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되어있는 스우의 육체를 발견했지."
'좀'이 아니었을텐데. 그때 팬텀 씨는 윙마스터중 한 명이라는 오르카로 추측되는 소녀의 사진을 보고 바로 옆에서 하는 내 말을 못 들었을만큼 이성을 거의 놓았었다.
"검은 마법사를 봉인했던 그날 나는 분명 스우를 시간의 신전에서 죽였어. 그런데 어째선지 놈의 몸은 조금도 썩지않은채 기계들을 주렁주렁 달고 수조에 담겨 있더라고. 대충 생명유지 장치였을거야. 아마 그놈 쌍둥이인 오르카가 놈을 살리려고 8백년간 계속 발버둥친 결과물이겠지."
"오르카가 죽은 스우를 부활시키려 했다는 말입니까."
"그 쌍둥이의 눈물나는 우애를 생각하면 그러지 않는게 이상하잖아?"
팬텀 씨는 비꼼 가득한 어조로 말했고, 데몬 씨는 '하긴'이라고 긍정했다. 생각해보니 청문회 사건때 스우는 어떻게든 오르카를 살리기 위해 선대 여제님과 거래를 하려고 했었다. 군단장이라도 자기 가족은 소중하다는 걸까.
"심지어 스우 그놈은 죽었는데도 유령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었지. 그래서 이 기회에 확실하게 저놈을 죽이려고 했어. 거기 보안 시스템이 거치적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고, 거의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뒤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예상된건 기분탓일까.
"…… 검호가 나타나서 날 막았어."
"터무니없는!!"
"이제부터 당신이 해달라고 한 본론이니까 잠자코 들어줘."
팬텀 씨는 한 차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나도 그가 검호인줄 몰랐어. 모자를 눌러쓴데다 거기있던 기기들을 빼면 조명도 희미해서 꽤 어두웠거든. 그냥 거기를 지키는 블랙윙인가보다~ 했지."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같은 블랙윙임에도 스우와 날을 세우며 말을 주고받았고, 또 자신에게 수 차례 얌전히 물러가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물러날리가 없잖아? 눈앞에 무방비한 놈의 몸이 있고 또 스우 그자식이 유령 상태로 조롱하고 있는데 순순히 물러나면 그쪽이 바본데."
"결국 싸웠다는 말이군."
"그래─ 싸웠어. 별다른 원한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봐줄 이유도 없어서 곧바로 공격했고, 놈은 그걸 또 다 피하면서 나한테 달려들었지."
"직접 싸웠는데도 그인줄 몰랐다는 말이야?"
"전법이 완전히 달랐다고? 내가 아는 그는 날아다니는 검같은건 전혀 쓰지 않았으니까."
그 날 그의 어깨 위에는 수 자루의 검들이 날개처럼 늘어져 부유하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알아낸게 있습니다. 당시 아란 님에 의해 부서진 검의 파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 조사해본 결과, 고도의 염동계통 마법이 새겨져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용자로 지정된 사람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특별한 검이었던거죠."
"파편만으로 그 정도를 알아낸건가."
"죄송하지만…… 해당 마법이 저희 리엔의 마법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건?]
무언가 떠오를락말락한다. 언제였지? 저것에 대한 대화를 들은건?
"저도 알아낸 뒤에 당황했습니다. 설마 블랙윙에 리엔의 사람이 협력하고 있는건가 의심도 해보았지만 리에나 해협 사건을 호되게 겪어서 그런 일은 없을테고, 그렇다면 대체 왜 저희 마법을 저쪽이 쓰고있는건가 알아봤는데─."
"회수기능."
생각났다.
"리에나 해협에서, 그때, 리린에게…… 던진 검을 회수할 수 있는 마법을 걸어달라고 했었어요."
그리고 리린은 무려 영웅이 직접 한 부탁에 한껏 힘을 발휘해 단순한 회수 마법이 아닌 손대지 않고도 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 기능덕에 오르비스 아래로 추락했을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예, 그랬던거죠. 혹시나해서 리린에게 물어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마법을 분석해낸다음 베껴서 다른 검들에 새겨 사용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가 정체를 숨기기위해 전법까지 바꾸었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제가 블랙윙에 잠입해있던 기간동안 그곳의 멤버들은 말단부터 간부까지 모두 소드댄서가 날아다니는 검만을 무기로 쓴다고 생각했었으니, 굉장히 철저했다고 볼 수 있죠."
테이아 씨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무튼 그와 싸우다 내가 날린 스킬과 그의 검기가 부딪히며 폭발이 일어났고, 흙먼지가 막 걷힐 무렵에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어."
팬텀 씨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두통이 밀려오는지 관자놀이를 눌렀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고."
손으로 절반정도 가려졌지만 그의 표정은 아마 우리와 비슷할 것이다.
"거기다 그걸 본 순간 넋이 반쯤 나간 사이에 스우 그 자식이 나한테 빙의해버렸고, 그대로 나는 청문회 직전까지 블랙윙 기지에 감금되어 있었어."
"하, 무모한 짓 벌이더니 그 지경까지 간거였나."
"모습을 안드러낸 이유가 그거였어? 안한게 아니라 못한거?"
[잡혀있던것 치고는 꽤 멀쩡해보입니다만, 그가 다른 상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까?]
미네르바 님이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더이상 거짓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걸 깨달으신건가.
"그 '상해'라는게 고문과 같은 종류를 말하는거라면 전혀 없었어. 하지만 그것 외의 것은 좀 있었지."
[어떤 것들이 말이죠?]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스우를 향해서였어. 스우가 빙의한게 내 몸이라 가만히 있던 나한테 피해가 왔다는게 문제였지."
팬텀 씨는 스우가 제 몸에 빙의한걸 보고 몹시 화가 난 그가 제 사지가 박살났었고, 그 뒤엔 감시역을 맡고있던 아스카 씨까지 거하게 도발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 드래곤에게 죽을뻔했다고 말했다.
"특히 그 드래곤은 검호와는 달리 진짜 내가 죽어도 별 상관없다는 자세여서 정말 어떻게 되는줄 알았다고."
"아, 아스카 씨가요?"
"자기 입으로 직접 '팬텀따위, 마스터에게 소중한 사람이지 나한테는 의미없는 놈'이란 말까지 했는데?"
소매 아래로 소름이 돋았다. 아스카 씨가 그런 말을 했다고?
[앞뒤가 안맞는군요. 그 말인즉 그는 당신을 여전히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렇지. 솔직히 좀 헛소리같았지만 일단 완전히…… 아무 의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보였어."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죠."
어쩐지 초조한 기색이 보이는 페어리 퀸께서 재촉했다.
"일단 그가 스우한테 빙의당한 나를 감금했던건 내가 밖으로 나가 거기서 본 사실들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기위한 것도 있었지만 스우가 내 몸으로 자살하는걸 막기위한 것도 있었거든."
청문회때 일이 생각났다. 그때 군단장 스우는 여제님에게 빙의해 자살하려했고, 그걸 팬텀 씨가 겨우 막았었다. 타인의 몸을 빼앗는 능력을 가진 그 군단장이라면 빙의 후 자해라는 간단한 방법만으로 수많은 이들을 처리할 수 있었겠지.
"요컨데 그분은 정보가 퍼지는 것도, 당신이 죽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겁니까."
"응. 빙의당한 직후에 했던 말도 '당장 거기서 나와'였으니까. 그가 그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봤어."
루미너스 씨와 메르세데스 님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기쁨보다 당혹감의 비중이 훨씬 더 많은 그 표정은 굳이 해석하자면 '검호가 그 정도로 저놈을 생각했어?'로 보였다.
"뭐어, 결과적으로 그는 스우가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 메이플 월드의 봉인석을 모두 강탈하겠다는 식으로 노선을 바꿔버렸지만."
[예?]
"알기쉽게 말해줘? 그러니까 빙의당한 내가 스우한테 어떻게 되거나 혹은 내가 도망쳐서 그의 정체를 알리기 전에 대륙의 봉인석을 모두 갈취해 이쪽이 손쓸 틈 없게 만들도록 계획을 수정했다고."
약 5초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뭐라고요 팬텀 씨?
"상황이 이 지경이 된게 니놈때문이였냐─!!"
"팬텀 너어어─!"
이마에 울룩불룩 핏줄이 솟아오른 루미너스 씨가 테이블을 쾅! 내려찍어 모서리를 박살내며 포효하듯이 외쳤고, 메르세데스 님도 분노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블랙윙의 봉인석 강탈이 그렇게 신속했던 이유가 팬텀이 스우한테 빙의당했기 때문이라니. 지금 연합내 남은 봉인석이 에레브의 것 하나밖에 없는데 화가 안나는게 이상하잖아.
"아, 아아……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영웅이 아니라 내부의 적 수준이군요."
[동감입니다.]
"실례지만 저 좀 웃어도 될까요."
[마음껏 비웃어도 돼 여왕님.]
"루미너스! 메르! 나도 때릴거 남겨둬!"
전혀 기쁘지 않은데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사건 전말이 뭐 이따위야.
두 사람은 팬텀 씨가 아직 환자인걸 알면서도 거침없이 주먹을 날렸고, 그 사이 테이아 씨가 다과를 가져왔다. 이걸로 입가심이나 하세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차를 홀짝이며 마른 입을 축일뿐 누구도 두 분을 말리지 않았다. 심지어 아란 누나는 예상치 못한 팬텀 씨의 자폭에 여태껏 우울했던게 한 방에 날아가버렸는지 주먹을 풀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봉인석을 강탈해건 스승님…… 이지만 그분은 지금 이 자리에 없고, 한 바보가 자기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스스로 까발렸으니.
"차 더 마실분?"
"저요."
회의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에게 한껏 두들겨맞은 팬텀 씨는 동료가 아닌 원수 바라보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루미너스 씨를 한참 노려보았고, 테이아 씨가 어디선가 달걀을 가져와서야 그걸 받고 고개를 돌려 멍든 부위에 문질렀다.
"실례지만 거기서 있었던 일을 마법으로 저희에게 보여주실 수 없습니까?"
"그게 제일 확실하긴한데 지금 내 상태도 너희만큼 안좋아서 당장 쓸 수가 없어. 누구때문인지는 말안해도 되지?"
마법사 대신 무투가로 전직해도 될만큼 감정을 팍팍 담아 주먹질을 한 루미너스 씨는 본인도 좀 과했다는걸 깨달았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까 테이블 부수는걸 봤을때도 생각한거지만 저분은 직업을 잘못 선택한게 아닐까.
"사실 나도 그 자식한테 빙의된 이후로 대부분 의식을 잃고 있어서 거기 있었을때의 기억은 거의 없어. 겨우 정신을 차렸을때 한 번 그와 대화를 조금 하긴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별로 길게 말하지는 못했고."
"어떤 상황이었길래?"
"…… 스우가 그에게 '어째선지 지금의 당신은 검은 마법사를 닮았다'고 말한 직후."
영웅분들은 단체로 석상이 되어버렸다.
선대 여제님에게 죽임당하기 직전, 스우는 소드댄서가 검은 마법사와 몹시 닮았다고 말했었던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비슷해보이긴 했어."
"그가 어둠에 물들었다는 뜻인가."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닐거야. 그보다는─."
팬텀 씨는 적당한 표현을 떠올리기위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했다.
"분위기가…… 굉장히 유사했다고 해야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비슷하다는거지."
"왜 있잖아, 검은 마법사를 눈앞에서 직접 보았을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거."
그 말에 영웅들보다 먼저 감을 잡은 데몬 씨가 물었다.
"저 사람이 나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라는 느낌말입니까."
"맞아. 정확하게 그거."
대체 무슨 느낌이지 그게. 어이없는건 저 모호한 설명을 나와 나인하트 씨를 비롯한 현 시대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다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제일 궁금한게 그거야."
그가 왜, 어째서 그렇게 변했는가?
블랙윙 제복을 입고있던 그분을 보았을때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의문을 대신 끄집어내준 팬텀 씨는 두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딱딱 두드렸다.
"짐작가는 바가 없습니까?"
"전혀. 애초에 난 그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고. 거기다 2년 전 오르비스에서 헤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소식조차 없었는데 그런것까지 알리가 없잖아."
"…… 하긴. 그분은 근 2년간 행방불명이었죠."
그 행방불명의 기간동안 그렇게 되어버렸을줄은 팬텀 씨는 물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페어리 퀸께서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2년만에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게 가능하긴 합니까?"
"보통은 불가능하지."
"'보통은'?"
"사람은 어지간해선 잘 바뀌지 않아. 어떤 경우엔 죽었다 살아나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
눈앞의 사람처럼 말인가. 군단장한테 죽을뻔했다가 겨우 살아나고 며칠간 기절해 있다 막 깨어났으면서 예전과 한치의 다름이 없는 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이없는 이유로 손바닥 뒤집히듯 돌변하기도 해."
어떻게 그런게 가능하냐고 묻고싶었지만 이미 눈앞에서 저 말의 예시를 보아버려서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
페어리 퀸은 작게 탄식하며 수심 가득한 얼굴을 푹 숙이셨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말로…… 정말로 변해버린 걸까요 스승님은."
"아까도 말했지만 자세한건 몰라. 그나마 확실해진건 그가 블랙윙의 간부─ 즉 우리의 적이라건데 이건 농담으로라도 좋은 사실이 아니지."
스승님이, 적?
"안좋은 일들만 연달아 터지고 있군요…… 군단장들이 일으킨 청문회 사건부터 그 블랙윙의 영웅님 유품 탈취, 이제는 시조님을 구하신 그분이 블랙윙 간부라니. 아아……."
[유품 탈취?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나인하트.]
"포로로 잡았던 블랙윙 멤버가 가지고 있던 전 영웅, 프리드님의 일기장말입니다. 그가 도망치면서 탈취했습니다."
결코 흘려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잠깐, 잠, 잠깐만요! 프리드의 일기장이라고요?!"
"아. 그러고보니 페어리 퀸께서는 그 자리에 없어서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이번에 포로로 잡았던 블랙윙 멤버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가 소지하고 있던 프리드의 일기장을 입수했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나중에 분석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버렸으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여왕님은 스승님이 소드댄서였다는 사실을 들었을때만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건 제가, 그, 검호님에게 드린 물건…… 인데요?"
…… 방금 뭐라고요?
"왜, 왜 그걸 한낱 블랙윙 멤버가 가지고 있는거죠? 최소한 그분이 가지고 있어야하는게 맞는데."
─중요한건 그게 아니잖아!
""어째서 당신이 그걸 가지고 있었는데──!!""
"꺄아?!"
이구동성으로 외쳐진 고함이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페어리 퀸은 화들짝 놀라며 귀를 막았다.
그런 중요한건 제일 먼저 말하란 말이에요!
========== 작품 후기 ==========
쓰다보니 길어져서 애매한 부분이지만 자릅니다. 근시일내에 이어서 올라올듯.
이번 챕터는 그냥 검호가 죽어라 고통받는 챕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켄사카 - 비공식 회의 파트가 계속 길어져서 잘랐습니다. 추측의 많은 부분이 맞을겁니다.
@산들바람eh - 그런데 다시 영웅들 대면할 틈조차 없이 사건이 또 일어날거라서.
@마도사지망생 - 안그래도 키네시스 다음화 대기.
@익재공 - 일단 확정된건 소드댄서=검호라는거. 자세한 이유는 아직까지 모름.
@2twin - 엄밀히 따지면 라테일의 소드댄서와는 원리가 다릅니다. '검을 띄우는 능력'을 가진게 아니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검'을 얻은거니까요. 특수 아이템을 손에 넣은거죠.
@SAUN - 제논은 나~중에 재출연할겁니다.
@Sisre - 연이은 증언에 일단은 수긍했지만 그래도 여지를 꽤 남겨둔 상태. 적어도 타락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음.
@mmo0522 - 직접 안봐서 좀 괜찮아보이는거지 눈앞에서 봤으면 짤없이 와장창.
@Linener - 칭찬 감사합니다! 솔직히 전투씬은 좀 자신없었지만서도!
@Legendssj2 - 내가 소드댄서다! 라는걸 정말 아무렇지않게 밝힐 수 있는 대사를 한참 고민했었다죠.
@루엔시르온 - 검 자체가 신분증인셈.
@카한Kahan - 진행해야하는 챕터가 3개나 남았는데?
@히핀 - 차원의 도서관까지 가야 확실하게 믿을듯.
@중독중독 -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Ascaron - 망할 전투씬이 생각나지않아 며칠간 고생했었다는.
@대어의예감 - 거기다 본인 존재의 시간을 되찾기위해 검호를 돕지 않을수가 없음.
@찬양천사 - 팬텀이 좀 덜맞아서 기억구현 마법 써서 그때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진짜 누군가 지렸을지도(웃음).
@노란우산s - 아니요. 이데아의 노림수였습니다.
@마라젤로 - 오버시어, 만우절 외전과 후기로만 언급되는 존재입니다.
@마서 - 비유하자면 보통의 초월자는 당연히 능가하고 이론상 륀느를 흡수한 검은 마법사와 뜨는게 가능한정도.
@여행자구름 - 오해가 깊어져서 당장은 힘들겁니다.
@RTS - 어느새 유명 맛집이되었군요. 감사합니다!
@소라루 - 숨까지 안쉬고 있었나요?
@한국사고급 - 사실 아란에게 있어 검호는 '이상적인 무인'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롤모델적인 부분까지 없잖아 있어 진짜 제대로 멘붕당함.
@LittleBiber - 블랙헤븐은 아직 좀 멀었습니다. 그 전에 할게 많음.
@갓타치 - 영영 숨길수 없으니까요.
@리아카에린 - 일반인급은 없죠.
@네임0306 - 키네는 다음화에 또 구를겁니다.
@no현질 - 메로나는 무리고, 대신 다음화는 빨리 올리겠습니다.
@적현월 - 계획적으로 임팩트있게 까발린거였습니다.
@socns - 그 정도를 넘어섰습니다.
@Blake117 - 차원의 도서관가면 또 어디까지 멘붕당할까(깔깔).
@앙스럽네 - 뜻은 다르지만 검마와 똑같이 검자가 들어가서 착각할뻔.
@sanya - 연참이... 힘듭니다...
@루나라피스 - 이번 챕터는 좀 느리게 갈겁니다.
@하늘연꽃 - 저런 충격과 공포스러운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릴 수 없어 일단 검호를 아는 사람들만 모아 비공식 회의 시작.
@오무ris - 검호도 검호지만 나인하트가 진짜 과로사할지도.
@sjdjabqh - ??? 무슨 의미죠?
@차가운도시의낙타 - 에브리바디 멘붕!
@cosy - 아란이라서 저정도로 멘붕하는 장면이 표현된거지 다른 영웅이었으면 저것보다 좀 덜했을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감정이 적으니까요.
@책벌레씨 - 다음화에는 사이킥 콤비가 나올텐데 그걸 영웅들이 보면...
@Dulcet - 같은 동료들이 인증하니 일단은 믿지만 속으로 '아 이게 무슨'같은 생각중.
@Fwnd - 사실 아란보다 팬텀이 먼저 녹아있었죠.
@육합 - 초월자와 봉인석은 다릅니다. 초월자의 경우 에너지가 자아를 가진 경우이기때문에 통째로 흡수되는거고, 봉인석은 매개체가 쐐기가 되어 만들어진거라 힘만 흡수되고 매개체는 그대로 남음.
@MADreadman - 저도 올린뒤에 매번 오타와 문맥 확인을...
@슈엘리안 - 자세한 정황을 아는 우리는 그저 짠내만.
@레시코 - 봉인석 주는건 문제없는데, 깨어난 오버시어가 과연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까요?
@르틴 - 루시드는 의외로 아군이 되기 힘든 유형입니다. 레헬른을 만든것도 배신이 아니라 충성하기 때문이었고, 충성하는 이유도 검은 마법사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줬기 때문이죠. 요컨데 저쪽이 쳐내지 않는이상 배신을 안하는 타입이란 말입니다.
@Yoontlemin - 정체같은 중요한 반전은 이미 다 까발려진 상태이니 임팩트쪽에 집중하기만 하면 됬으니까요.
@칼크래프트 - 서로를 믿는거죠.
@Ratios - 실제로 사용한 스킬은 블레이징 익스팅션이었습니다.
@th환사비우산 - 유감스럽게도 안됩니다.
@인리연찬 - 슬쩍 말씀드리자면 영웅+트립퍼 남성진 중에서 동정은 검호랑 루미밖에 없어요.
@키하라스티카 - 죄송합니다. 본편이라도 그때 올리려고 했는데 일이 바빠서 한참 늦춰졌습니다.
@Eluines - 아직 할게 많이 남았습니다.
@ReFrante - 응? 둘이 멋있었나요?
@x흑란x - 그것도 나중에 언급될겁니다. 지금 나인하트 상태가 메롱해서.
@케르닉 - 아리아는 멘탈붕괴, 검호는 정신붕괴?
@신령각 - 120보다는 더 높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200미만.
@떡꾹 - 없어지지는 않았어요. 아직 있는데 앞서 도난당할뻔 했으니 다른 곳에 숨겼습니다.
@에누마엘리시 - 멘탈저격.
@리화앨리스 - 소장본 만드는 법을 몰라서...
@크리잔 - 최대한 충격적이게 보이도록 표현을 쥐어짜내야 했다는 후문.
@sadgfdfh - 저는 힘(물리)쓰는 남캐 활약하는게 좋습니다. 상상만해도 시원시원하잖아요?
@제레프 - 여기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