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반side.
키네시스 형을 잡으러 간 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안하다. 우리의 실책으로 둘을 놓쳤다.]
루미너스님의 믿을 수 없는 보고에 나인하트 씨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나는 급히 그의 등을 두드리며 대신 그들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거에요? 형이 초능력자이긴해도 여러분이 제압 못할리 없잖아요."
[그 소년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놈과 함께 있던 사람이 최악의 변수였지.]
[말로 전하는거라 핑계로밖에 안들리겠지만 마지막에 난입한 남자도 보통이 아니었어.]
아무래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 같다.
[소년은 둘째치고 소년과 함께 있던 소녀가 문제였습니다. 무려 사이키커였으니까요.]
"사이키커?"
"그게 누굽니까?"
나인하트 씨 대신 테이아 씨가 물었다.
[리엔 출신이면서 모르는건가.]
"죄송하지만 처음듣는 이름입니다."
[이미 옛저녁에 죽은 사람이니 기록이 안남았던 모양이군요. 사이키커는 과거 8백년 전에 검호에게 죽은 군단장입니다.]
대륙 회의때 저런 군단장의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옛날에 죽어서 알려줄 필요가 없었던건가. 아니 그전에 잠깐만, 스승님이 사이키커란 군단장을 죽였었다고?
"지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을 하는겁니까?"
[정황상 그렇게 보인다. 당시 사이키커는 검호에게 확실하게 죽었고, 우리도 검은 마법사측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방금전 그 죽은 사이키커가 우리 눈앞에 멀쩡히…… 는 아니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모습으로 이계의 소년과 함께 있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건 불가능합니다. 리저렉션(Resurrection)이 성공한 사례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고요."
[허나 그녀는 사이키커가 맞았습니다.]
세 사람을 비추던 화면은 상이 잠깐 흐려지더니 다른 풍경으로 변했다.
벼락이라도 떨어졌는지 새카맣게 그을리고 헤집어져 상처투성이가 된 땅과 톱밥 그 비슷한 무언가로 갈려나간 나무파편들, 여기저기에 흩날리는 잿가루까지. 살풍경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았다.
[보시죠. 그녀의 힘이 휩쓸고 간 페어리족의 영역상태입니다.]
처참하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중에 구와르님께 부탁하면 복구될테지만 그때까진 이 상태일거에요. 공기부터 땅까지 그녀의 힘이 많이 스며들어서 당장 흙이 살아나는건 힘들것 같습니다.]
[자세한 정황은 나중에 직접 얘기하겠지만 간략히 말하면 정신병자인 사이키커가 우리때문에 뭔가 자극받아 크게 날뛰었었고, 그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
화면에 비춰지진 않았지만 들려오는 여왕님의 목소리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찌어찌 정신을 차린 나인하트 씨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 사이키커라는 군단장때문에 키네시스군을 놓쳤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마지막에 난입한 남자가 그 두 사람을 데리고 도망쳤어.]
그러고보니 난입한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었지?
"그게 누굽니까?"
[당신도 알겁니다. 오르비스 탑 반파 사건 때 프라이쉬츠와 싸웠던 남자입니다.]
"롯뜨 씨가요?"
[이름은 모르겠고 흰 머리에 청록색 눈을 가진 갈색 피부의 남자였다.]
[몸이고 행동이고 모두 가벼웠는데 정작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어.]
"본인 맞네요. 그 사람이 확실해요."
200% 롯뜨 씨가 분명하다.
"그런데 롯뜨 씨가 왜 난입해서 키네시스 형이랑 그 사이키커란 군단장을 데리고 도망친거죠?"
[스스로 자기가 블랙윙이라 말하더군.]
[그 사람이?]
옆에 있던 미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골드비치에서 봤을때부터 이래저래 수상해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블랙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스승님이 소드댄서라는 사실이 '절대 그럴리 없어!' 라면 롯뜨 씨가 블랙윙인건…… '번지수 잘못 찾은거 아니야?'라고 해야하나.
"이상하군요. 어찌됐든 오르비스 탑 반파 사건때 군단장 프라이쉬츠와 싸웠던 남자가 블랙윙이라니."
[우리도 마찬가지다. 검호에게 죽은 군단장이 살아난것부터 머리아픈데 놈이 끼어들어 둘을 데리고 도망치기 전에 그 소년이 부탁해서 페어리퀸이 만들어두었던 해독제까지 훔쳐가버렸어.]
[과장스럽고 경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만큼 강한 남자였습니다. 사실 그게 다 연기가 아니었나 싶을만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몬 씨가 저렇게 말할정도면 실제로도 강한 사람이란 뜻이다. 생각해보니 롯뜨 씨는 예전에 헤네시스에서 만났을때도 엘리니아까지 엄청 빨리 도망쳤었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사람은 사람대로 놓치고 물건도 뺏겼다는 뜻이지?]
그들의 긴긴 설명을 미르가 깔끔하게 한줄로 요약했다.
[아…… 예. 그렇죠 뭐.]
[셋씩이나 갔으면서 겨우 두 사람을 상대못했어?]
"미르 그만해."
[변명으로밖에 안들리는거 안다. 사이키커는 갑작스럽게 폭주해서 페어리족의 영역을 갈아엎어대서 그걸 막는데 급급했었고, 마지막에 난입한 롯뜨인지 뭔지 하는 놈은 사이키커와 그 소년을 챙긴 상태로 여기 이 마족과 술래잡기만 하다 도망쳤으니까.]
"다른 분들은 그걸 구경하고 있었습니까?"
정신을 차린건지 아닌지 나인하트씨는 혼이 나간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놈이랑 그 흰머리자식이 움직이는 속도를 봤으면 그런 말 안나올거다.]
[저희라고 구경꾼이 되고싶지 않았습니다. 마법을 써도 뭐가 보여야 말이죠.]
[8백년 전에도 무투파 군단장이랑 전사계 영웅이 싸울땐 타이밍이 어지간히 좋지않은이상 손놓고 있어야했어. 최상급 전사들의 싸움엔 같은 급이 아닌이상 끼어들기 힘들다고.]
"롯뜨 씨가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어요?"
[프라이쉬츠와 싸운 시점부터 약한 이일리 없잖습니까.]
그렇긴한데 영 믿을수가 있어야지. 그 어딘가 2% 모자라보이는 사람이.
"하아아…… 겨우 생긴 기회가 이렇게 날아가버리다니."
나인하트 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롯뜨 씨가 어디로 갔는지 보신 분 있으세요?"
[그는 귀환서를 써서 도망쳤습니다. 아예 흔적을 안남기려고 미리 가져온 것일테죠.]
[혹시나해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엘리니아에 가보았지만 목격자조차 없었다. 마을 귀환서가 아닌 지정 장소 귀환서였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잔류 마력을 추적하는건 불가능했습니까?"
[사이키커가 휘두른 염동력의 파편과 페어리족 영역에 고여있던 마력때문에 아예 불가능했다.]
어째 암울한 소식밖에 없냐. 텔레포트였다면 그래도 잔류 마력이 좀 더 오래 남았을텐데 하필 귀환서였다니. 생각해보니 오르비스 탑 반파 사건때도 롯뜨 씨는 귀환서를 써서 도망쳤다고 했…….
"아."
[뭐야 마스터?]
"저기 여러분, 롯뜨 씨가 페어리족의 영역에서 귀환서를 써서 도망친게 분명하죠?"
[확실하다. 두 눈 뻔히 뜬 채로 놓쳐서 아직도 이가 갈리니까.]
"그럼 한가지만은 확실하겠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에델슈타인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롯뜨 씨가 도망친, 귀환서의 도착 장소로 지정된 곳은 빅토리아 아일랜드 어딘가라는 사실이요."
[……?!]
"그렇잖아요. 지정 장소 귀환서는 장소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거나 마력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에서는 쓰지 못하는 물건인데, 페어리족의 영역에서 그게 멀쩡히 사용되었다는건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는 뜻 아닌가요?"
마법사 협회에서 양산되어 팔리는 귀환서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오시리아 대륙까지 갈 수 없다. 리엔에서 만든 특제 귀환서쯤 되야 겨우 가능한 그것을 롯뜨 씨가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하기는 힘들고, 만약 그런 물건이라 해도 요정족의 영역에서 사용하면 그 일대에 고여있는 마력때문에 이동에 방해를 받아 제 효과를 못 낸다.
여기까지 봤을때 나오는 결론은 롯뜨 씨가 도망친 곳은 빅토리아 아일랜드 어딘가라는 것이다.
"예전에 저랑 아란 누나가 빅토리아 아일랜드에서 블랙윙 아지트를 몇 개 찾아서 없앴었는데, 그때 저희가 미처 다 찾지 못한 아지트가 있거나 그새 어딘가에 몰래 아지트가 세워졌을지도 몰라요."
[확실, 히…….]
[굉장히 유력한 가설, 아니 사실이군.]
데몬 씨는 물론 루미너스 씨까지 내 말에 고개를 주억이셔서 좀 놀랐다. 옆에 있던 나인하트 씨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에반."
"네?"
"계속 말해보세요. 추측이든 뭐든 좋으니까요."
"그, 그래도 되나요?"
"지금은 당신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지말아주세요! 책사는 나인하트 씨잖아요!
[다른 단서는 뭐가 있을것 같습니까?]
"거기 상황에 대해 더 아는게 없는데…… 아, 좀 전에 엘리니아에 가보셨다고 했죠?"
[예. 그 남자가 거기로 이동한게 아닐까하고 찾아가봤습니다. 없었지만요.]
"마법사 협회에 가서 키네시스 형과 안면이 있는 마법사들을 찾아보세요. 형이 블랙윙과 손을 잡은건 꽤 최근일텐데, 바로 일전의 대륙 회의까지만 해도 용의 후예나 블랙윙이 뭔지도 몰랐던 형이 대뜸 그들과 손을 잡았다는건 그에 따른 이유가 있을거에요."
형은 마법사 협회에 구조된 이후 대부분 거기서 머물렀고, 이데아라는 용의 후예 소속의 여자도 거기서 만났다고 했다. 증거가 완전히 인멸되지 않았다면 무엇이든 단서가 나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추가로 각 마을의 전직관들에게 인근에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있는지 물어봐야겠군요.]
[빅토리아 아일랜드라니, 등잔 밑이 어두웠네.]
[당장 마법사 협회장 하인즈와 면담이 가능한가?]
"사안이 사안인만큼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겁니다. 다만 차원의 벽이 아직도 보수가 안되었다니 시간은 많이 나지 않을거에요."
[알겠다. 여기서 있었던 구체적인 일은 나중에 올려보내지.]
루미너스 씨의 말을 끝으로 통신 마법이 끊겼다. 화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긴장이 탁 풀려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아아……."
"수고했습니다 에반."
"아무리 힘드셔도 저한테 이런 일을 시키면 안되잖아요 나인하트 씨이─."
나인하트 씨는 테이아 씨가 건네준 깨끗하게 닦인 안경을 다시 쓰며 말했다.
"이번의 것은 제가 힘든 이유도 있지만 당신의 역량을 재차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역량이요?"
"예전부터 조금씩 보였지만 이번 걸로 확실해졌습니다."
[뭐가 확실해졌다는거야?]
"별거 아닙니다. 어쨌든 앞으로도 많이 수고해주세요."
무엇을 수고하라는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앞으로도 이런식으로 많이 부려먹혀질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안경너머로 웃는 눈이 기뻐보이는 이유가 뭘까.
"뭐 할말 있습니까?"
"음…… 아, 좀 전에 그분들이 말한 사이키커란 군단장에 대해 아는거 있으세요?"
다른건 모르겠고 스승님이 죽였다고 하는 군단장이 부활해서 나타났다니, 어떻게 봐도 보통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매정했다.
"아뇨 모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리엔에는 그런 군단장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가 없으니까요."
[아까 말한거 까먹었어 마스터?]
"그, 그랬지 참……."
"하지만 그분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죽었거나 실종된 군단장이 정말로 사라진게 맞은지를 의심해봐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하나가 재앙인 그들이 사실 멀쩡히 남아있거나 한다면 상황은 심각해지니까요."
나인하트 씨는 종이에다 세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사이키커, 파픈스타, 매그너스.
"8백년전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군단장은 이 셋입니다. 이중 사이키커라는 군단장이 검호님에게 죽었다하고, 파픈스타라는 군단장은 검은 마법사를 배신 후 실종, 매그너스라는 군단장은 영웅들이 검은 마법사를 봉인한 결전의 날 아군이었던 구와르를 배신한뒤 실종되었습니다."
[배신자만 몇 명인거야 군단장이란 놈들은.]
미르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은게 이 뒤로 데몬 씨랑 구와르 씨가 배신했으니까 과반수 가까이 검은 마법사를 통수친 격이다. 직속 부하들이 줄줄이 배신하다니 인망이 어떻게 된거지.
"이러니 저러니해도 검은 마법사와의 싸움에 있어서 저쪽의 주역은 군단장입니다. 한 명 한 명이 저희가 상대하기 힘들만큼 강한 이들이거든요."
"그정도에요?"
"8백년전 영웅분들이 주로 싸운 이들이 바로 군단장과 휘하의 군단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수장인 검은 마법사와는 직접적으로 부딪힌적이 거의 없다고 하죠."
청문회때 보았던 두 군단장을 떠올려보았다. 힐라와 스우. 둘 다 힘을 제대로 쓰지도 않고 연합을 크게 흔든 이들이다. 그런 자들이 몇 명이나 더 있다니……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군단장이 그정도면 검은 마법사는 얼마나 강한거죠?"
"글쎄요. 문헌에도 그의 구체적인 강함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단 아까도 말했다시피 직접 나서서 힘을 쓴 경우가 드문 이유가 크겠죠."
"리엔의 기록중에 검은 마법사가 직접 힘을 썼다고 확실시되는 사건은 단 두 개뿐입니다."
[두 개? 고작 그게 전부라고?]
"직접 들으면 고작이라는 말같은거 안나올텐데요."
테이아 씨는 방의 벽 한쪽에 걸려있는 지도를 떼와 책상에 펼쳤다.
"하나는 처음으로 영웅들과 직접 싸웠을때입니다. 이때의 여파로 리프레 북서쪽에 붙어있던 빅토리아 '반도'가 빅토리아 '아일랜드'가 되었다고 하죠."
시작부터 뭘 들은거지 나.
"시조 아리에스님의 자서전에 따르면 8백년전 빅토리아 아일랜드는 오시리아 대륙에 붙어있는 반도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었고, 님프를 제외한 요정족들의 주요 거주지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검은 마법사는 엘프의 왕 메르세데스님의 백성인 엘프들을 없애기위해 직접 나섰고, 그것을 막기위해 영웅들은 그와 싸웠습니다. 그 결과 빅토리아 반도는 완전히 대륙에서 떨어져나갔죠."
"지형을…… 바꾼건가요."
"사실 책을 봤을때 이게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과장인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메이플 아일랜드가 반으로 쪼개진걸 보고 기록이 사실임을 깨달았죠. 영웅중 한 분이 - 물론 가장 강한 검호님이니까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영웅의 힘으로 지형을 바꿀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강할 검은 마법사라면 그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을거라고."
뭔가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스승님같은 영웅들이 전부 나서서야 간신히 봉인할 수 있었던 그 존재를 우리가 쓰러뜨리는게 가능할까?
[그래서 다른 하나는 뭐야?]
"아. 두 번째는 여기 미나르 숲과 니할 사막 사이에 존재했던 어떤 왕국을 통째로 없애버린 일입니다."
테이아 씨의 손가락이 두 지역의 사이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예전에 여기엔 '크리티아스'라는 꽤 강성한 왕국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검은 마법사에 의해 사라져버렸다고 해요."
"지금도 이 지역 일대엔 자욱한 흑안개가 끼어있어 자세한 조사가 힘든 상황입니다."
[왕국이 사라졌다는건 거기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야?]
"모릅니다. 단어 그대로 왕국이 통째로 사라졌으니까요."
지반도 사람도, 단 하룻만에 모든게 없어졌다고.
"……."
"그렇기때문에 지금 저들의 침묵이 이상한겁니다. 청문회 사건을 일으켜 연합을 흔들긴했지만 정작 과거와 같은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고, 막상 봉인에서 풀려난 검은 마법사도 검호님과 싸운이후 잠잠하니 무슨 꿍꿍이 속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거죠."
[일단 블랙윙은 봉인석들을 긁어모았으니까 마지막 하나남은 여기걸 노리는것만은 확실하지 않아?]
"그것조차 이젠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블랙윙의 실질적인 수장인 소드댄서가…… 그분이라는게 확실시 되버렸으니, 봉인석을 제작하는데 힘을 썼던 이들 중 한 명인 그분이 왜 그것을 모으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는건지 이유를 모르니까요."
"목표는 아는데 목적은 모르는셈이죠."
무엇을 노리는지 알지만 그것을 왜 노리는지는 모른다, 라는 뜻이다.
블랙윙이 봉인석을 모으던 이유는 그것이 향후 활동에 있어서 심각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파괴된 지역을 완벽하게 복원시킬 수 있는 '보험'. 그것이 봉인석이라고 영웅분들은 말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봉인석을 사전에 몰래 강탈해갔을거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봉인석 강탈을 주도하던 사람은 사실 스승님이었다.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그분이 봉인석을 노렸다는건 그것을 어떻게든 쓰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왜 봉인석을 쓰려고 하는거지?
"아으으으……."
[머리에서 김나오고 있어 마스터.]
"어? 진짜?"
[당연히 농담이지.]
윽. 진짠줄 알았잖아. 그사이 어느정도 안색이 좋아진 나인하트 씨가 일어나며 말했다.
"생각은 그쯤하고 돌아갈 준비하세요 에반."
"숙소에요?"
"아니요. 이제 집에 가보란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이 시국에 집에 가보라니.
"기사단원도, 에레브 사람도 아닌 당신의 손을 빌리는건 여기까지로 충분합니다. 한참 뒤숭숭한 시기라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실테니 집에 가보세요."
"하지만 저는─"
"더 돕고싶은 마음은 알지만 당신의 도움을 계속 받고 있는 저희의 입장도 생각해보시죠."
기특하다는 생각도 적잖아 있으나 이쪽도 에레브의 책사라는 자존심이란게 있다. 나인하트 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자존심 세우지말고 도와달라 말하는게 그렇게 힘드냐고 말하지 못했다. 저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걸 직감했으니까.
이 이상의 일은 연합에 소속된 수많은 마법사들중 한 명에 불과한 나한테 허락된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까지 손을 댈 수 있었던건 나인하트 씨와 다른 영웅분들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어서였다.
"…… 여러분한테 저는 그저 지켜야하는 대상일뿐이에요?"
"물론 저도 다른 사람들도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반 당신은 아직 어린아이에요."
어린아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가슴에 푹 꽂혔다.
"당신이 검호님을 찾고싶다는 마음은 예전에 말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그분을 다시 만나서 묻고싶은거겠죠."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은 안됩니다."
선이 그어졌다.
"당신은 그 또래의 마법사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과 머리를 가지고 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앞으로 해야하는 일은 너무 위험해요."
"어떻게보면 블랙윙의 핵심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직접 들어가야 하니까요."
"블랙윙 아지트를 토벌하는 일은 예전에도 해본적 있어요!"
"아란 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말입니다?"
겨우 소리를 낸 입이 다물어졌다. 차가운 색임에도 달아오른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같은 어린 아이가 전투의 최전선에 서지 않도록 노력해야하는게 저희 어른들의 일입니다. 당신은 무시받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신용받지 못하는거라고요."
어린아이니까 안된다.
어른들을 믿을 수 없다.
"…… 그런 뜻은."
"예. 아니었겠죠. 저도 에반이 그랬을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당신의 행동이 저희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알아줬으면 합니다."
"당신 못지않게 저희도 노력하고 있으니 초조해하지말고 조금 더 기다려주세요."
어깨를 감싸 두드리는 양 손은 학자의 것임에도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거의 항상 기이한 빛을 띄고 있던 테이아 씨의 눈도 이번만큼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나는 나인하트 씨의 집무실에서 나와 정거장을 향했다.
[어떻게 할거야 마스터?]
"무엇을?"
나인하트 씨가 말할때 어째 조용히 있던 미르가 갑자기 물었다.
[어디서부터 조사할거냐고.]
"내가 나인하트 씨랑 다른분들이 잔뜩 걱정할게 분명한데 혼자 막 나설거라 생각해?"
[당연한거 아니야?]
누구 마스턴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미르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니가 제일 말려야하는데 오히려 방조 내지 도움이라니.
[마스터의 뜻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거 잘 아는걸. 절대 안꺾을거잖아.]
"그야 물론이지."
[그렇다면 마스터. 각오는 되어있어?]
각오. 블랙윙 아지트에 찾아내 직접 쳐들어갈 용기같은걸 묻는게 아니다. 그건 이미 되어있다. 되어있으니까 나도 가겠다고 나인하트 씨 앞에서 소리쳤던거다.
미르가 물어본건 거기서 생길지도 모르는 수많은 일들을 마주할 각오다. 블랙윙 기지중 하나이니 당연히 멤버들도 모여있을거고, 귀환서로 그분들 앞에서 유유히 도망친 상상외의 실력자라는 롯뜨 씨와 키네시스 형, 사이키커란 군단장까지 거기있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블랙윙이라는 - 적이라는 이유로 죽이기위해 마법을 퍼부울 수 있나?
사람을…… 죽일 수 있나.
[그들이 마스터에게 더이상 일에 깊게 파고들지 말라고 한건, 마스터가 어리기 때문이야.]
몸이든, 마음이든.
거기다 방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의 가능성─ 만약 그 아지트에 스승님이 있을경우, 그분과 싸워야 한다면 나는 그것을 할 수 있을까. 긍정의 대답은커녕 생각한것만으로 목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싸우고싶지 않아.
"스승님이랑 대화하고싶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어째서 그렇게 되버렸는지, 다시 돌아올 순 없는지.
"설득하기위해 최선을 다할거야."
그분과 죽고 죽이는 싸움같은건 하기 싫으니까.
"이걸로는 부족해?"
[응. 엄청.]
제발 망설임이라는걸 0.1초라도 하고 대답해주라. 고심끝에 말한 나는 뭐가 되냐고. 미르는 머리를 쭉 내밀어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강한 마음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엄청 무책임한 말을 하며 미르는 앞서 걸어갔다. 어느새 우리는 비행선이 대기하고있는 정거장에 거의 다 온 상태였다.
[그래서 아지트가 어디있는지 어떻게 알아낼거야 마스터?]
"빅토리아 아일랜드 서너곳을 조사해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거야."
[고작 서너군데?]
"유력한 장소를 추리는데엔 그정도면 충분하잖아."
당장은 이상해보이지 않도록 잠시 집에 들렀다가 철저히 준비한 다음 조사하러 가야겠다.
***
키네시스side.
흰머리 남자에게 구해져 겨우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심신이 완전히 지친 나는 루타비스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때 루타비스의 병실 침대에 눕혀져있었고, 땅을 구르며 여기저기에 생겼던 찰과상은 모두 치료된 상태였다.
"어머, 이제 눈뜬거니?"
푸근한 인상의 중년 노바족 여성이 깨어난 나를 보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아…… 머리가 좀."
"무리하게 염동력을 써서 그럴거야. 이거 좀 마시렴."
아주머니는 달달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코코아를 주셨다. 아, 코코아라니. 이거 너무 달아서 안마신지 꽤 오래됐는데. 그래도 받은거니 먹긴 먹어야해서 머그잔을 홀짝일때 아주머니께선 병동 한쪽에 있는 냉장고를 열며 물었다.
"과일은 뭘로 줄까? 사과? 딸기?"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과가 좋겠구나."
안먹겠다는 선택지는 없는겁니까. 결국 줄거면서 굳이 물어보는게 우리 엄마랑 똑같잖아. 흥얼거리며 사과를 능숙하게 깎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그냥 먹고 기운이나 내자고 생각했다. 그녀를 다시 흝어보니 걸치고있는 흰 겉옷에 명찰이 달려있어 그녀의 이름이 셀렌임을 알 수 있었다.
"셀렌 아주머니."
"응? 왜 그러니?"
"저와 같이 온 사람은 어디있습니까?"
"성투사님 말이니?"
성투사는 또 누구지. 설마 그 흰머리 남자를 말하는건가.
"그분은 임무때문에 나갔단다. 강한 분이라 할 일이 많거든."
진짜 않어울리는 칭호네. 대체 누가 붙인거야? 강하다는건 인정하지만 행동하는거랑 그 힘의 괴리감이 엄청나다고. 그런 남자한테 심지어 성스러운 투사라니.
"아니요. 그 사람말고 사이…… 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사이? 아아, 그 불쌍한 소녀를 말하는구나. 그애는 지금 저쪽 병동에 있단다."
무사하구나.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다 멈칫했다. 페어리족의 영역에서 그들에게 들은 것들이 빠르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이는 군단장이었다. 그냥 군단장도 아니고 같은 군단장조차 손속이 잔인한 이였으며, 루디브리엄에서 학살을 벌이다 검호에게 참수당해 죽었다. 그 뒤 어째선지 내가 사는 세계에서 살아났고 지금은 정신병자가 되었다.
"…… 후."
다시 생각해봐도 뭐가뭔지 모르겠네. 결국 풀리지 않는 의문은 2개였다. 사이를 죽였었다는 검호는 왜 지금 그녀를 거둔거지? 사이는 무엇때문에 그 지경이 된거고?
"아주머니. 검호는 지금 어디있나요?"
"그분은 아까 니가 물어본 소녀가 있는 병동에 있을거다. 이데아 님과 함께 뭔가 의논하면서 거기를 가더구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잘됐네. 당장 가서 물어봐야겠어.
"얘야! 갑자기 어딜 가니!"
"금방 갔다오겠습니다. 사과는 나중에 먹을게요."
벌써 일어나면 안된다며 만류하는 아주머니의 손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해 아까 그녀가 가르쳐준 병동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현기증이 핑 돌았지만 그보다 빨리 알아야할 것들이 있다.
몇 개의 문을 넘어 나아갈수록 병동의 풍경이 변했다.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비롯한 약품 냄새는 여전했지만 비릿한 피냄새가 섞여진다싶더니 보이는 병실마다 뭔가에 두들겨 맞은것처럼 엉망이 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복도까지 울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이내 도착한 방은, 병실이라기보단 완전히 밀폐된 격리실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보시다시피 효과는 확실합니다. 심박수와 정신파 모두 정상수치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안된다고만 하시는데, 이걸 대체할 다른 방법 있습니까?"
두 사람이 서있는곳 바로 앞에 산소호흡기를 쓴 사이가 있었다. 보통의 침대가 아닌 구속용 벨트들이 달린 침대에 튼튼하게 묶이다시피 눕혀진 상태로.
"당장 대책이 없다고 이런 방법을 써도 되는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법만은 안되니까 하루라도 빨리 다른 수단을 찾아야한다."
"그럼 그 대안이란 것을 찾기 전까지 이거라도 쓰게 해주세요. 아니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그녀 하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몇이나 되는 사람을 투입시켜야하는지 당신도─"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마약류는 안돼."
마…… 뭐?
"마약이라고 해서 굉장히 안좋은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실제로도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전문의의 처방아래 소량으로 쓰면 안전합니다."
"그딴걸 옹호하는거냐."
"사실을 말하는것 뿐입니다. 당신이 살던 세계에서는 마약과 같은 성분이 포함된 의약품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까?"
검호는 미간에 굵은 주름을 잡으며 이데아를 노려보았다.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런 물건이 있기때문이겠지. 당장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대여섯 개는 되는데다 지금 상황으로 볼때 저들이 사이한테 줬다는 약은 흔히 마약하면 떠오르는 각성, 환각이 아닌 진정제 종류인것 같으니까.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사이한테 그런걸 준거야?"
"이제 일어난건가요 키네시스 군."
"방금 알았다는 투로 말하지마."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분탓이겠죠."
그제야 몸을 돌리며 나를 보면서 다 알고 있었다는듯 전혀 당황하지않는 그녀의 무덤덤한 모습에 질릴 수 밖에 없었다. 진짜 인간미따위 보이지않는 얼음마녀 그 자체잖아.
"저 소녀한테 처방한 약에 대한 설명은 아까 다 들은 것 같고, 납득할만한 이유를 원합니까?"
"환자의 동의가 있긴 했어?"
"대화가 성립되지도 않는 상태였는데 동의를 구할 수 있었을리 없잖습니까. 여기까지 오면서 다친 사람들을 보지 못했나요."
여기 오면서 봤던 환자들이 죄다 사이한테 쳐맞고 나가떨어진 사람들이었나. 죽은 사람은 없겠지?
"몸이 지랄맞게 튼튼하긴해도 본바탕은 인간이다보니 이런 편법으로 겨우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마저 실패했으면 사람 여럿 죽었을걸요."
"어떻게 사이를 제압한거야?"
"검호가 그녀의 관절을 꺾어 붙잡는사이 수면가스를 대량 살포해서요."
신체내구뿐 아니라 약물내성까지 높아 그마저도 힘들었다고 이데아는 짜증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보니 항상 단정하던 그녀의 모습 역시 꽤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몇 번이나 땅을 구른것처럼.
"키네시스 군도 이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야……."
"미리 말하는데, 이 방법이 불만이고 다른걸 원한다면 이것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져오십시오. 기껏 내놓은 방안을 안된다안된다 지적만 하지말고요."
나를 보며 한 말인데 그녀의 옆에 있던 검호가 흠칫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도 저건 안된다고 말하고있었지.
"당신들은 마약 성분이 들어간거라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중인 모양인데, 그런 방법을 써야할만큼 저 소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걸 부디! 알아줬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저희가 한 처방이 마음에 안들고 또 안전성이 의심된다면 나중에 처방전과 진단서, 첨부자료를 받아 모두 읽어보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데아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넘기며 발소리가 다 울리도록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격리실에서 나갔다. 항상 냉철했던 저 여자가 저렇게까지 화가 난걸보면 지금 상황이 어지간히 빡친 모양이다.
그녀가 나간 이후 방에는 나와 검호만 덩그라니 남았고, 사이가 쓰고있는 산소호흡기 돌아가는 소리만 작게 웅웅 울렸다.
"…… 너는 왜 여기 온거냐."
"사이에 관해 묻고싶은게 있어서."
내 대답에 그는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라고 작게 말한다음 내 팔을 잡아끌고 격리실 바로 바깥의 복도로 나왔다. 혹시라도 우리의 대화가 그녀에게 들리지 않길 바라는건가.
"구체적으로 뭐가 궁금한거지."
"페어리족의 영역에서, 그들에게 니가 옛날에 군단장 사이키커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말을 들었어."
"──."
그의 붉은 눈에 파문이 일며 서서히 부릅떠졌다.
"넌 사이가 너와 같은 트립퍼이고, 둘 다 어쩌다가 죽어서 내가 살던 세계로 왔다고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때문에 죽었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았어. 궁금하긴했지만 그 뒤에 알게된게 너무 충격적이라서 묻지도 못했는데, 오늘 거기서 그 사람들이 알려주더라고."
그녀를 죽인 장본인이 검호였다. 그냥 죽인것도 아니고 목을 잘라내 생존 가능성따위 아예 없이 확실하게 죽였다.
어렴풋한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당시의 그녀는 군단장이었다. 같은 군단장조차 손속이 잔인했다고 말하는 정도로, 심지어 학살을 저지른 직후 혹은 그 과정에서 죽였다하니 그의 행위가 악하다고 욕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는 박수쳐 마땅할 그런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말이야.
"그때는 사이를 죽였으면서 왜 이제는 그녀를 거둔거야?"
그녀가 일으킨 루디브리엄 학살이라는 참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래서 그녀를 죽였을 검호가 왜 지금은 사이를 받아주었는지 모르겠다. 기억을 잃은동안 우리 세계에서 남매사이여서? 단지 그것만으로 수시때때로 문제를 일으키는 폭탄같은 사이를 계속 데리고 있다기엔 이유가 한참 부족하다.
내 말에 검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가에 잘게 경련이 일었고, 뭔가 말하려는듯 입을 열었다 다시 다무는걸 몇 번 반복하다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왜…… 그녀를 거뒀냐고?"
"그래."
"간단하다. 내가 그녀를 죽인 사람이기 때문이지."
겨우 말을 꺼낸 그는 작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설마설마했는데 직접 시인해주니 뭔가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진짜로 사이를 참수해서 죽인게 그였다니.
"죽인 사람이니까 거뒀다는게 무슨 뜻이야? 8백년전에 그녀는 너의 적 아니었어? 군단장인것도 모자라 학살자, 같은 군단장도 잔인하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죽였을거 아니야."
상황이 꼬여서 블랙윙에 들어오긴 했지만 어쨌든 과거의 그는 영웅이었다. 그냥 영웅도 아니고 같이 영웅이라 불리던 이들중에서 유일하게 검은 마법사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람. 사이를 참수해서 죽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학살을 행한 군단장을 처리한 그의 행동은 옳은걸 넘어 박수쳐 마땅할 그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럴텐데, 왜 그런 영웅적인 행동을 한 장본인은 저렇게 죄스럽다는 얼굴인걸까. 검호는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죽이고 싶어서 죽인게 아니었다."
"뭐?"
"내가 죽기싫어서 죽인거지."
한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그가 작게 말을 이었다.
"거기다 니말대로 사이키커는 잔인한 군단장이었지만, 정작 그런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나 역시 그녀와 다를바 없는 살인자에 불과하거든."
…… 이 인간 설마.
"넌 내가 했던 일이 옳았다고 생각하나?"
"그, 건."
사이키커를 죽인 것. 적어도 상황상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어째선지 그가 원하는 답은 그 반대일거라는 감이 울렸다.
"예전처럼 미치광이 군단장이었거나, 기억을 못 찾고 여동생이었을 때처럼 행동했다면 좀 달랐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자기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두 깨닫고 죄책감에 미쳐버린 그녀한테 내가 뭘 어떻게 하는게 정답이었을까."
지금도 모르겠어. 손을 쓸어내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그의 눈은 황망하기만 했다.
"가능한한 그녀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제어불능이라는 이유로, 나말고 가능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또 사람을 죽이고싶지 않아."
그는 느리게 몸을 돌렸다.
"잠…… 깐만! 그럼 사이를 거둔 이유는!"
"죄책감에 미친 그녀는 다른 누군가를 구하는 식으로라도 속죄하길 원했으니까. 적어도 그것만은 방해해선 안된다고 생각해서 도와준거다."
변명하듯이 답한 그는 지친 발걸음을 옮기며 빠르게 복도 저편으로 가버렸다.
속죄를 원하는 사람은 사이 한 명 뿐만이 아닌걸로 보이는건 절대 내 기분탓이 아닐거다. 어쩌면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죄책감에 병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척 많았는데, 잔뜩 처져있는 어깨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
side out.
설산을 두른 마을, 엘나스.
오르비스 탑 반파사건 이후 군단장들이 준동하며 해일처럼 몰려든 몬스터 떼에 풍전등화의 지경까지 갔었으나, 연합이 결성되며 파견된 시그너스 기사단과 모험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숨통이 트였고 지금에 와서는 산맥의 몬스터를 많이 처리해 어느정도 습격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리고 엘나스를 지금까지 지킨 이들중 하나인 용병대 - 의 형태로 파견된 노바족 지휘관 카탈리온은 거처에서 상부에 올릴 업무보고서를 한참 작성중이었다.
똑똑!
"누굽니까?"
"대장님. 현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알케스터 님이? 그는 재빨리 쓰고있던 업무 보고서를 서랍안에 넣어 숨긴다음 아무렇지않은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의 허락과 함께 문이 열렸고, 눈처럼 새하얀 눈썹과 수염을 기른 푸른 로브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예고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네 카탈리온."
"아닙니다. 금방 차를 내올테니 거기 자리에 앉아계시죠."
"괜찮네. 그보다 자네 부하 좀 물려둘 수 있는가."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어째선지 평소보다 더 딱딱한 분위기에 카탈리온은 그의 용건이 뭔가 진지한 것임을 알았고, 부하에게 잠시 나가있으라고 지시한 뒤 노인 - 알케스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부하가 나가며 문이 제대로 닫히는걸 확인한 알케스터가 지팡이를 휘둘러 실내에 방음 마법을 펼치는 모습에 카탈리온은 당황했다.
"알케스터 님?"
"내 나이가 너무 많아 자네와 그까지 상대하는건 힘들어서 말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카탈리온. 자네 인간이 아니지?"
순식간에 명치를 훅 치고들어온 말에 카탈리온은 벙찐 상태로 굳어버렸다.
"뭐라…… 고요?"
"항상 자네의 온 몸에 어떤 마력이 둘러져 있는게 이상했는데 계속 보다보니 감이 잡히더군. 변신 마법과 환영 마법을 그런 식으로 쓰고있을 줄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내 눈을 속일 생각 말게. 마법에 있어선 엘리니아의 마법사 협회장인 하인즈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게 날세."
수 백년을 살아온 노마법사의 확신이 실린 목소리에 카탈리온은 그가 단순히 넘겨짚은게 아님을 깨달았다.
"처음엔 자네들이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으니 마력이 느껴져도 그러려니 했네. 용병이니 그런 옷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몸을 지키기 위한 마법 물품들을 가지고 있어도 납득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성성한 눈썹 아래에 자리잡은 고드름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이 그를 직시했다.
"보면 볼수록 몬스터의 마력이라기엔 너무 이질적이었거든."
"하……! 고작 그런걸로 저희를 인간이 아니라고 매도하시다니,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매도?"
알케스터는 눈을 희번뜩하게 빛내며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려찍었다. 지팡이를 찍은 자리에서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순식간에 터져나와 카탈리온을 덮쳤고, 그는 즉시 마법을 써서 막아내려 했으나 채 펼쳐지기도 전에 파동에 부숴졌다.
그와 함께, 그가 쓰고 있던 마법 역시.
"카탈리온. 나는 자네와 자네의 부하들을 믿고 싶었네."
카탈리온의 짧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오른 고동색의 뿔 한 쌍과 등 뒤로 나타난 튼튼한 용의 날개와 비늘덮힌 꼬리에 알케스터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가 쓴 마법이 디스펠 - 마법을 해제하는 마법임을 알아챈 카탈리온은 그대로 알케스터에게 달려들어야하나 찰나지간 고민해야했다가 그만뒀다. 현자의 반열에 드는 알케스터라 하더라도 이 거리에서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그 뒤가 문제였으니까.
정체가 발각되었으니 마법으로 기억을 조작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니 부하들과 함께 철수해야한다. 하지만 당장 한꺼번에 철수하는건 무리인데다, 겨우 숨통이 트인 엘나스를 떠나면 빠져나간 병력만큼 이곳 주민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다.
"저희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카탈리온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이 노마법사는 홀로 찾아왔다. 만약 자신들을 잡거나 죽이려 했다면 절대 혼자오지 않았을거다.
여차하면 대검을 뽑을 준비를 끝낸 그의 앞에서 알케스터는 조용히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도운겐가?"
등을 맡기고 싸운 이들이 블랙윙이었다. 그것도 블랙윙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인 '용의 후예'의 일원. 지팡이를 잡고있는 알케스터의 마른 손이 차오르는 배신감에 점점 크게 떨렸다.
"자네들을 진실로 아군이라 믿고있는 우리가 아주 우습게 보였겠어! 가장 믿는 순간에 뒷통수를 치고 단숨에 군단장에게 팔아넘길 생각으로 그렇게 열심히 사람들을 구했나?!"
"그런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그딴 임무였으면 수행은 커녕 아예 무시했을겁니다! 저희는 그저 당신들이 죽지않게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
홧김에 외치던 카탈리온은 한 발 늦게 아차하며 입을 닫았다. 망했다. 주름진 눈이 휘둥그레 떠져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아니, 잠깐만요. 방금전에 한 말은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바로 기절시키고 튀어야 하나? 카탈리온은 대검의 검병을 잡고있는 손을 움찔거리며 짧은 시간동안 온갖 생각을 하다 복도에서 쿵쿵거리며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와 재빨리 환영 마법으로 용의 신체부위들을 감췄다.
"카탈리온 대장님! 몬스터 웨이브가 몰려옵니다!"
"무, 뭔가?! 이번엔 어떤 몬스터들이지?"
타이밍 좋게 뛰어들어온 부하의 다급한 외침에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하는 상관의 당황한 표정을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좀비입니다!"
부하의 말에 카탈리온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좀비. 그는 물론이고 노바족 모두에게 악몽으로 각인된 몬스터였다.
엘나스 일대에 사는 몬스터는 추운 기후에 적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딱 한 종류 예외가 있었다. 죽은 나무의 숲에 있는 좀비들. 엘나스 일대가 워낙 추운 곳이라 제대로 썩지 못한 시체들과 산에 들어갔다가 객사한 사람들이 그곳에 자리잡은 리치에 의해 좀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둘이 아닌 몬스터 웨이브라 부를만큼 좀비가 몰려왔다는건 하나의 이유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알케스터님. 아까 말씀하신 건은 이번 일이 끝나는대로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자네……!"
카탈리온은 걸려있던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갔다.
"좀비들은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거지?"
"못해도 1시간 안에 엘나스에 도착할 거리입니다. 현재 사역마의 눈으로 계속 관찰하며 자세한 규모를 분석중입니다."
"마을에 있는 마법사들은 모두 모았나?"
"이미 로베이라 님에게 보고했습니다. 좀비에게 치명적인 신성, 빛, 화염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전투에 나설겁니다."
"좀비가 적이라고 프리스트를 모두 전투에 보내지 마. 그들중 전투력이 높지 않은 이들은 나중에 발생할 부상자들을 치료를 위해 대기하고 또 후방에서 성수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리고 아까 말한 세 마법 외에 다른 마법을 주력으로 쓰는 마법사들은 뒤로 빠지지 말고 포박 마법같은걸로 좀비들의 이동을 막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의 명령을 받은 부하는 다른 곳으로 뛰어갔고, 카탈리온은 사람들과 함께 관저 지하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르고 있는 엘나스의 전직관중 한 명인 타일러스에게 다가갔다.
"전부 성수입니까."
"관저에서 보관하고 있던건 모두 꺼내고 있네. 마법으로 1차 저지 후 2차로 일제 투창을 할테니 미리 창날에 적셔둬야하거든."
"성수만 꺼내지 마시고 해독제도 준비하세요. 오래된 좀비의 시독(尸毒)은 매우 위험합니다."
"알겠네."
그러는 와중에 타일러스 외의 전직관들은 빠르게 민간인들을 대피시켰고 마을의 사냥꾼과 모험가들은 제 무기에 성수를 흠뻑 적신 뒤 좀비가 몰려오는 쪽으로 뛰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좀비들이 오기까지 1시간은 걸린다고 했지만 이 모든 준비를 하는데 1시간은 너무 짧았으며, 오히려 이 짧은 시간안에 좀비들을 상대할 준비를 대부분 끝낸 엘나스가 대단한거였다. 군단장들의 귀환 이후 지긋지긋하게 몬스터에게 시달려 평상시에도 일정이상의 전투준비를 해둔 결과였다.
마을의 외곽, 마법사들을 동원해 세운 흙벽을 쭉 흝어본 카탈리온은 설원 너머로 서서히 몰려오는 좀비들을 확인했다.
========== 작품 후기 ==========
"모두 준비해라."
웅웅거리는 바람소리를 짓누르며 울리는 카탈리온의 저음에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꽉 쥐었다. 몇 번을 싸워도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근육을 팽팽히 당기는 긴장감은 항상 똑같았고, 이 순간만큼은 엘나스의 혹한마저 잊을만큼 심장이 쿵쾅거리며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카탈리온은 당장이라도 마법을 쏘아낼 준비를 끝낸 마법사들의 앞에 서서 한 손을 들어올린채 좀비들의 거리를 쟀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지금!"
그의 손을 내려쳐짐과 동시에 수많은 마법이 일제히 쏘아졌다. 섬광이, 폭염이, 뇌격이 공기를 불태우며 몰려오는 시체들의 무리 위로 직격했고, 새하얀 눈이 쌓여있던 설원이 순식간에 수증기로 뒤덮혔다.
당연하지만 전장의 시야가 가려진 것을 그대로 둘리 없었다. 공격을 맡은 마법사들 뒤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마법사들은 돌풍을 일으켜 안개를 날렸고, 검고 붉게 뒤집어진 땅 위로 다 정리되지 않은 좀비들과 그 뒤로 또 몰려오는 시체들이 다리를 끌며 다가오는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보기만해도 역겨운 그 광경에 자세를 잡고 준비하고 있던 타일러스를 위시한 전사들은 투창을 실시했고, 쏟아져내린 창의 비에 조금이라도 맞은 좀비들은 그것이 머금고 있던 성수에 적중당한 신체부위가 부스러졌다.
"티로. 리치는 어디에 있지."
[좀비들이 많아서 아직 잘 않보입니다만…….]
마법과 투창이 번갈아 계속 쏘아지고 있어 좀비는 빠르게 쓸려가고 있었다. 범위내에 들어오면 마법을, 거기서 살아남은 좀비는 투창으로 정리, 또 운좋게 무사하거나 움직이는 좀비는 땅에 빽빽히 꽂힌 투창들에 걸려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거기다 성수가 부족하지 않게 프리스트들이 바로바로 주변의 눈을 녹여 만들들기까지.
하지만 아직까지 이번 습격의 주범이 나타나지 않아 카탈리온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은신한 상태로 하늘 위에서 정찰중이던 티로는 아직도 리치가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프리스트가 타락해 되었다는 엘나스의 리치. 언데드임에도 신성 마법이 잘 듣지않는걸로 악명높은 그것이 군단장의 힘에 반응해 엘나스를 습격한 지금 상황부터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왜 이제서야?
"아무튼 계속 찾아봐라."
[알겠습니─ 어? 대장님 저쪽을 보세요!]
티로의 외침에 카탈리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쪽이라고 말했지 어디라고 설명하지 않았지만 티로가 말한 곳이 어디인지 고개를 돌린 즉시 알 수 있었다.
착실하게 좀비를 정리중이던, 불과 몇 분 전까지 새하얀 설원이었던 검붉은 땅. 시퍼런 살점과 뼈만이 뒹굴고있는 그곳에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식물로 보였다. 하지만 줄기에 금속 조각과 새카만 구체가 박혀있었고, 비정상적인 속도로 자라나 서로 엉키며 잔과 같은 형상이 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불길한 마력의 불꽃이 치솟았다.
"저게 왜……?"
식물과 기계가 합쳐진 기괴한 형태의 구조물. 그것이 무엇인지, 또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카탈리온은 서서히 파악되는 상황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당장 몸을 낮춰 벽 뒤로 숨어라! 마법사들은 전면에 방어막을 펼쳐!!"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조물 - 미스틱 게이트가 예고없이 검녹색 안개를 토해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몰려오는 안개에 닿은 창들이 썩어들어가는 모습에 사람들은 그것이 강한 부식성을 띄고있는걸 알았고, 곧장 흙벽 뒤로 몸을 숨기거나 안개에 닿지않도록 마법사들이 펼치는 방어막 안에 몸을 던졌다.
한편 넘실거리는 부식의 안개의 안쪽에서는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장님. 저 안에서 리치가…….]
"나도 안다."
[지원에 나설까요?]
카탈리온은 상황을 확인했다. 앞서 좀비들을 정리하는데 상당수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많이 써서 지친 상태였고, 전사들은 크게 지치진 않았으나 그들 대부분이 좀비와의 근접전에 대비해 방어구가 가죽옷을 두껍게 입은 것이 전부라 부식의 안개 안쪽에 투입했다간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물론 사람들 사이사이에 있는 노바족들은 별 문제없는 상태이니 그들이 나서면 리치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탈리온이 막 지원해라고 말하려는 순간, 땅에서 작열하는 불의 벽이 솟구치며 부식의 안개를 불살랐다.
"왜 가만히 있는가? 드디어 원흉이 나타났건만."
뒤에서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저 마법을 행사한 자가 누구인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알케스터 님!!"
"왜 이제서야 오신겁니까?!"
"잠깐 일이 생겨서 말이야. 늦어서 미안하네."
푸른 로브자락과 긴 수염을 휘날리며 날아온 알케스터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지팡이를 휘둘렀다. 부식의 안개를 태우던 불의 벽은 허리를 숙여 파도로 그 모습을 바꿨고, 몰려오던 좀비들을 친히 화장(火葬)시켜줬다. 엘나스 최고의 마법사라는 칭호가 허명이 아닌것을 증명하듯 화염의 해일에 쓸려나간 좀비들의 수는 사람들이 처리한 수를 능가했다.
알케스터는 열기의 파도를 조종하며 그의 옆에 선 카탈리온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 건을 끝내는대로 일을 벌인 댓가를 받겠다고 했던가 카탈리온."
"…… 예."
"그렇다면 빨리 끝내게."
그 말에 카탈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대검을 뽑아들었다. 서서히 잦아드는 불길 속에서 거의 타지않은 미스틱 게이트와 그것에서 분출되는 어둠을 둘러 몸을 지킨 리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탈리온은 자리를 박차 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몇몇 사람들은 붙잡으려고 했지만, 노바족들은 금방 상황을 파악해 그가 직접 리치를 쓰러뜨리려 하는걸 알고 재빨리 포박계 마법을 리치에게 날렸다.
언데드임에도 살아생전에 프리스트였던 저것은 이례적으로 신성 마법이 잘 통하지 않아 다른 마법으로 대미지를 내야했고, 현재 미스틱 게이트에서 공급받는 어둠으로 알케스터의 마법까지 막아내는 리치를 확실히 없애려면 물리적인 수단을 써야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전사들 중 가장 뛰어난 전사는 카탈리온이었다.
"키기기긱……!"
"이제 사라져라 언데드!"
달려오는 속도까지 실린 대검이 리치를 힘껏 내려쳤다. 그것은 두개골을 일격에 양단해버릴만큼 위력적이었으나, 어째선지 뼈가 아닌 돌에 부딪힌 것 같은 까앙─! 하는 단단한 소리와 함께 약간의 흠집밖에 나지 않았다.
미스틱 게이트에서 나오는 진득한 어둠이 대검에 바른 성수마저 집어삼키며 스멀스멀 검신을 타고 올라왔다. 그 익숙한 불쾌감에 카탈리온은 리치의 명치를 걷어차 거리를 벌렸다.
"거참, 이상하게 강화되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공중에 부유한 채로 그를 쫓아온 알케스터가 쯧쯧 혀를 찼다. 어둠때문에 다른건 모르겠고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전이었으면 방금의 카탈리온이 가한 일격에 부서지고도 남았을텐데. 저것부터 처리해야한다고 판단한 알케스터는 미스틱 게이트를 향해 빛기둥을 내려꽂아 보았지만, 잠깐 작동이 멈출뿐 다시 계속해서 어둠을 내뱉었다.
그 사이 카탈리온은 리치가 다시 부식의 안개를 쓰려는걸 보고 몇 종류의 방어 마법을 옷처럼 둘러 달려들었다.
리치는 상급 언데드였으나 어쨌든 근본은 스켈레톤과 같은 뼈로만 이루어진 놈이다. 좀비처럼 살점이 남아있지도, 듀라한같이 갑옷을 입지도 않았다. 저 막대한 어둠으로 이전보다 더 단단해진게 전부라면 공략법은 쉽다.
"─마법사가 단단해져서 뭐하나!"
카탈리온은 리치의 관절부위에 대검의 날을 푹 쑤셔넣어 손목을 비틀었다. 파캉! 한쪽 팔꿈치 뼈가 끊어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그는 리치를 부위별로 해체했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몸통이 떨어져나가 리치는 피부따위 없었음에도 턱뼈를 달각거리며 당황했다. 부식의 안개로 그를 썩히려고 했지만 막 피어오른 안개는 그가 두르고 있던 방어 마법에 막히는 사이 알케스터가 쏘아낸 열섬에 소멸당했다.
이내 양 어깨까지 부서져 마법을 못 쓰게 된 리치의 턱 아래로 카탈리온은 대검을 후벼파넣어 이번엔 확실하게 두개골을 쪼갰다.
[리치. 완전히 침묵했습니다.]
"내가 더 잘 보고있으니까 확인 안해줘도 된다."
"누구랑 대화중인건가 자네?"
"…… 제 부하와 얘기중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위에 정찰병이 있다고 말하면 곤란해지니 대충 대꾸했다. 대검을 털어내 칼집에 넣는동안 리치가 죽으며 작동을 멈춘 미스틱 게이트에 다가가 살펴보던 알케스터가 물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자네."
"아니요."
거짓말은 안했다. 카탈리온은 그것이 포탈로 쓸 수 있다는것만 알았지 이런 해괴한 기능이 있는 물건이라고는 1g도 몰랐으니까.
알케스터가 미스틱 게이트를 조사하는 사이 그는 좀비와의 전투로 시커멓게 물든 땅을 눈에 담았다. 전투 전과 후가 아주 대조적이다. 그나마 좀비와 부식의 안개를 알케스터가 불로 싹 태워버린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적어도 언데드로 오염된 땅을 정화하기 위해 성수를 들이붓는 작업은 안해도 될테니.
"철수해라 티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작전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철수할 준비를 해라고 전해라."
[예?]
"알케스터가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챘,"
푸슉! 날카로운 피륙음에 카탈리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인 것은 땅에서 뱀처럼 솟구친 검은 사슬에 꿰뚫려 피흘리는 알케스터.
"알케스터 님!!"
그는 방금 집어넣은 대검을 빛살처럼 빠르게 뽑으며 사슬을 끊어내려 했다. 허나 금속음만 울리고 사슬이 끊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