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68화 (168/208)

<--  -->  에반side.

내려쬐는 햇살과 황금빛 모래사장, 잔잔하게 일렁이는 푸른 바다. 황금색으로 칠해진 높은 리조트까지.

[여긴 한결같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멀쩡해보이는데?"

나는 창문밖으로 2년전 원인불명의 슬라임 러쉬때문에 개장도 못하고 망할뻔했던 골드비치를 둘러보았다. 그때 많이 박살났던 야자수들은 전부 새로 심어져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걸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모를만큼 감쪽같았다.

"그야 개장기간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 했으니까요."

골드비치 리조트의 매니저 케리 아저씨가 말했다.

[그런데 기껏 개장했는데 세상이 요지경이 되서 곤란하지 않아?]

"뭘 모르시는군요. 장사는 매우 잘되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이런 때에 대체 왜 리조트가 잘되는거야? 아저씨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셨다.

"이곳은 빅토리아 아일랜드와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사건에 휩쓸리지 않고 있거든요. 안전하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퍼져서 모험가부터 상인까지 잠시 몸을 피하러 오고 있습니다. 온김에 피서도 즐기고요."

[어째 시기가 이런데도 사람들이 꽤 보이더니…….]

"위험하지는 않나요?"

"피서온 사람들중엔 아까 말했든 모험가도 있고, 상인을 호위하는 사람들도 있고, 시그너스 기사단도 있습니다."

잠깐만 마지막은 왜. 기사단이 여기서 피서같은걸 즐겨도 되는건가.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났는지 아저씨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기사단원들도 사람이니까요. 일단 명목상으로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여기에 머물고 있는 상인들과 리조트의 보호입니다."

['명목상'으로는 말이지.]

"뭐든 명분이 중요한 법이죠."

어른의 사정이라는걸 들은 기분인데. 내가 애써 생각을 털어내는사이 케리 아저씨가 물었다.

"그래서 에반 군은 무슨 일로 이렇게 저를 만나러 찾아오신겁니까."

"아…… 아저씨에게 묻고싶은게 있어서 왔어요. 제가 할 질문들에 답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됩니다."

나는 2년 전에 보았던 아저씨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용건을 거냈다.

"예전에 저와 스승님이 여기 왔을때 같이 슬라임을 처리했던 흰머리 남자, 그, 롯뜨 씨를 기억하고 있으세요?"

"아 물론이죠. 꽤 유쾌하면서 예의바른 청년으로 기억합니다. 무투가면서 서비스업에 대한 이해도가 의외로 상당히 높아 대화하는데 즐거웠던 남자였죠."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내린 롯뜨 씨에 대한 평가중에서 제일 호의적인 평가다.

[그 사람이랑 언제 대화를 했어?]

"미르. 존댓말 써."

"괜찮습니다. 저녁식사 이후 잠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때 리조트의 향후 전망에 대해 말하다 그가 이쪽 사업의 견문이 넓어 조언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롯뜨 씨는. 영웅분들과 싸울 수 있을만큼 뛰어난 무투가면서 케리 아저씨와 사업에 관한 대화를 할 수 있을만큼 그쪽 지식이 풍부하다니. 언밸런스한걸 넘어 내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지만 당장은 알길이 없었다.

"에반 군은 롯뜨라는 남자에 대해 알기 위해 제게 찾아온거였습니까?"

"네. 혹시 요 최근에 골드비치 근처에서 롯뜨 씨를 보신적 있으세요?"

"아니요. 적어도 저는 본적 없습니다. 제가 보지 못했더라도 만약 근처를 지나다가 직원들이 봤다면 바로 보고를 했을테니 그런 일도 없었던걸 보면 확실하게 그는 이 근처에 온적이 없습니다."

1차적인 목격자는 없음, 인가.

"그렇다면 근래들어 골드비치 주변에 마을 귀환서 귀환 마법진이 설치된적은 있어요?"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그런 게 설치되면 소식이 없더라도 저희쪽에서 먼저 알게되겠죠."

어느 마을 귀환서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근방에 귀환지점으로 설정된 마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해당 마을을 귀환지점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진은 그 범위와 거리를 다른 마을의 것과 부딪히지 않게 설치하도록 마법사 협회가 규정해놓았으며, 당연하지만 골드비치 리조트에도 귀환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근방에 롯뜨 씨가 도망친 블랙윙 아지트가 있다면 모를 수가 없다. 가까운 두 마법진이 부딪혀서 귀환서를 사용하는데 문제가 생길테니까.

어쨌든 한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골드비치 근방에 리조트의 귀환 마법진을 제외한 다른 귀환 마법진은 없으며, 이 말인즉 롯뜨 씨가 도망쳤을 블랙윙 아지트도 근처에 없다.

"그렇죠…… 저기, 케리 아저씨. 실례지만 여기 지도에 리조트의 귀환 마법진 범위를 그려주실 수 있나요?"

"예. 그정도야 간단하죠."

아저씨는 내가 내민 빅토리아 아일랜드 지도의 골드비치를 중앙으로 작은 원을 그려주셨고, 그 작은 원은 내가 그려둔 큰 원 안과 약간 겹쳐졌다. 이제 2군데만 더 가보면 되는건가.

"그런데 에반 군은 무엇때문에 그런 질문들을 한겁니까?"

"찾고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찾는 사람이 아까 물어본 흰머리 남자입니까?"

"네."

적어도 당장은. 내 대답에 케리 아저씨는 갑자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에반 군은 그의 애칭까지 알정도로 친하면서 지금 그가 어디있는지 몰라 수 년 전에 한 번 만났던 저에게 찾아온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애칭이라뇨?"

"모르고 쓰지는 않았을거잖습니까. 롯뜨는 그의 이름인 세피로트의 애칭일텐데."

세피로트……? 생소한 이름에 절로 머리 위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당신이 그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

"저도 우연히 알았습니다. 에반 군도 기억하겠지만 그때 몬스터가 호텔 안까지 칩입했었잖습니까? 그래서 한참 객실 상태를 점검 중이었는데, 여러분이 머물고 있던 객실 바로 옆방을 확인하다 발코니에서 당신의 스승인 붉은 검사와 그가 이야기하는걸 들었거든요. 그때 그는 당신의 스승에게 스스로를 세피로트라고 소개했습니다."

정확히는 이름이 아니라 전직명이었지만 그런 직업은 들어본바 없으니 아마도 별칭일거라고 아저씨는 말했다.

어쨌든 여태껏 알고있던 롯뜨라는 이름은 가명이란 말이네. 본래 이름은 세피로트, 혹은 세피로트라는 호칭을 주로 쓰는 모양이다. 가명도 거기서 따온 것 같고. 꽤나 중요한 정보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얻었다.

[2년전 일인데 잘도 기억하고있네.]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건 매니저의 기본이니까요. 하물며 리조트를 구해주신 은인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아저씨의 투철한 직업정신에 감탄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전 처음 소개받을때부터 롯뜨라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몰랐어요."

"그랬습니까? 애칭을 먼저 알려준걸 보니 당신이랑 친해지고 싶었던 모양이군요."

글쎄. 오히려 처음부터 가명을 알려준걸로 보아 본명을 말해줄 생각이, 나아가서 나를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았던것 같은데. 이건 너무 앞선 추측인가.

"그때 두 분이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하고 계신가요?"

"기억하고는 있지만 손님의 사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막 알리는건 프라이버시 침해입니다. 궁금하시면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시는게……."

"그분들을 당장 만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묻는거에요. 스승님이 그때 여기를 다녀간 후 얼마 지나지않아 실종되셨고, 그 분이 어디있는지 롯뜨 씨는 아시는듯한데 그 사람도 지금 행방을 알 수 없어서 하나라도 단서를 찾는 중이거든요."

거짓말은 아니야 거짓말은. 내 말에 정황을 대충 파악한 아저씨가 물었다.

"에반 군은 그들을 찾는 중이었습니까?"

"네."

[마스터가 어디가서 막 퍼뜨릴만큼 가벼운 사람도 아니고, 그들하고 아예 관련이 없지도 않으니까 그냥 알려주는게 어때? 우린 급하다고.]

케리 아저씨는 침음을 흘리며 잠시 생각하시더니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음…… 좋습니다. 알려드리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많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저도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정말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서 아저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예상을 완벽하게 빗껴나갔다.

"일단 세피로트 씨는 에반 군의 스승에게 그의 동료의 말을 전해주기 위해 메이플 월드에 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영웅분들을 말하는건가? 하지만 그분들중에서 롯뜨 씨를 아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 동료가 누구인지도 말했나요?"

"예. 파픈스타, 라는 여성이라고 들었습니다."

…… 뭐?

[그, 그게 사실이야? 잘못 들은거 아니야?]

"제대로 들었습니다. 특이한 이름이라 아직도 기억하는걸요. 거기다 '그녀'라고 지칭했으니 여자인것도 확실합니다."

아저씨의 장담에 내 머리속은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파픈스타라면 바로 얼마 전에 들어본적 있는 이름이다. 8백년 전 검은 마법사 휘하의 군단장 중 한 명이자 물과 소리 마법을 매우 강력하게 구사하며 동시에 엄청난 실력의 힐러였다는 여성. 하지만 그녀는 영웅들과 검은 마법사가 처음으로 싸웠던 그 날 배신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했다.

일단 8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거야 다른 군단장들도 마찬가지니 이해할 수 있다. 넘길 수 없는 부분은 '동료'라는 단어다. 나중에 배신했다고는 하나 군단장이었던 여자와 스승님은 언제부터 접점이 있었던거지? 무려 동료라고 칭할정도로 가까워진건 또 언제고?

"저, 롯뜨 씨가 스승님께 전해줬다는 말은 무엇이었죠?"

"'그란디스에 오지마'였습니다. 어째선지 그 말을 들은 당신의 스승은 바로 욕을 내뱉더군요."

[그란디스는 또 어디야?]

"저도 모릅니다. 제가 관광업에 몸담으며 메이플 월드의 여러 지명과 장소를 들어봤지만 그런 곳은 처음 들었으니까요."

쉽게 넘길 수 없는 대답이다. 케리 아저씨가 세상 모든 지역을 알리는 없지만 어지간한 곳은 다 알것 같은데 - 2년 전의 짧은 대화도 기억하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아저씨라면 그러고도 남아보인다 - 들어본 적이 없는 지명이 나온다면 그건 정말 어디 오지거나, 비밀스러운 장소이거나 둘 중 하나일거다.

"또 그가 뭐라고 했어요?"

"제가 들은건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 뒤로는 둘의 분위기가 좀 험악해지는 것 같았고, 계속 거기있는건 엿듣는거라 매우 실례가 되므로 바로 나왔습니다. 이후에 그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이정도만 해도 무지막지한데.]

미르의 말대로다. 원래 알려고 했던 것 이상으로 굉장한 사실들을 알았다. 나는 수첩을 꺼내 들은 내용들을 모두 적은 뒤 아저씨에게 깊이 고개숙여 인사했다.

"여태까지 대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케리 아저씨."

"별거 아닙니다. 제 대답이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에반 군의 스승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큰 도움이 될거에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시죠. 나중에 일이 끝난뒤에 가족과 함께 저희 리조트에 오신다면 최상의 서비스를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할게요. 나는 아저씨와 인사를 주고받은 뒤 호텔에서 나와 느리게 해변을 걸었다. 미르가 물었다.

[뭔가 알 것 같아 마스터?]

"새로운 걸 많이 알았는데 '이거다!' 싶은 것은 아직 모르겠어. 뭐랄까, 아까 들은 것들을 하나로 이어줄 결정적인 뭔가가 없다고 해야하나."

본래 알려고 한 블랙윙 아지트의 위치 건은 이 주변에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지만 케리 아저씨에게서 들은 새로운 정보들이 많았다. 롯뜨 씨의 본명과 그가 스승님을 만난게 우연이 아니며, 어떤 용건이 있어서 왔다는 것. 그리고 그 용건이 무려 파픈스타라는 전 군단장의 말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까지.

가장 중요한건 스승님과 파픈스타란 여자와의 접점이다. 언제부터 그 접점이 있었는지 아직까지 알 수 없으나 내 생각엔 현 시대가 아니라 8백년 전이 아닐까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스승님이 봉인에서 깨어난 후 나를 만나기 전에 어찌어찌 그녀를 만나서 초고속으로 동료가 되었다기 보다, 그 이전에 이미 서로 어떤 신뢰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다는게 더 말이 되잖아."

스승님이 구체적으로 현 시대의 언제쯤에 깨어났는지 모르지만 나를 만났을때에서 그렇게 옛날은 아닐 것이다. 스승님도 아스카 씨도 워낙 눈에 띄는 사람들이니 소문이 안날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쪽은 또 문제인게, 이 말인 즉 스승님은 8백년 전부터 군단장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 군단장이 검은 마법사를 배신한 사람이라 해도, 손을 잡은 시기가 배신 전이든 후든 문제가 적잖아 있다.

"거기다 롯뜨 씨에 대한 것도 궁금점만 늘어났지 해결된게 없어……."

[확실하게 알아낸게 고작 본명 비슷한 세피로트란 이름 하나뿐이니까.]

"그뿐만이 아니야. 이름은 둘째치고 롯뜨 씨가 파픈스타의 말을 스승님에게 전해주러 왔다는 말은, 여기 오기 전엔 그가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뜻이잖아?"

[그가 말했다는 '그란디스'란 곳에 말이지?]

"아마도."

'오다'는 누군가가 말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때 쓰는 표현이니까 90% 이상 맞을거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그란디스가 어디에 있는 장소인지 또 모르겠단 말이지. 손안의 수첩엔 케리 아저씨에게 들은 말들이 모두 적혀있지만 내 머릿속처럼 정리되지 않아 이것들을 이어주는 빠진 조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받아적은 3개의 문장을 중얼거렸다.

"'전직명은 세피로트', '당신의 동료 파픈스타의 말을 전해주기 위해 메이플 월드에 왔다', '그란디스에 오지마'라니…… 뭐야 이게?"

아, 이 뒤에 했다는 대화까지 알면 뭔가 더 알 수 있을텐데!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는 날 보던 미르가 작게 혀를 차며 물었다.

[머리아픈건 일단 치워두고, 그보다 마스터는 파픈스타란 여자가 그 사람이랑 어떤 관계인것 같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해보라고. 영웅중 한 명인 그 사람이 군단장과 손을 잡았었다는건 최소한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거야. 무엇때문이었을까? 왜 하필 그녀였고? 8백년 전에는 군단장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흐음……."

그것도 그렇네. 세피로트 씨가 그녀를 스승님의 동료라 칭했다는 대목에 걸려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배신한 군단장이라서?"

[배신하기 전부터 접점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그것 외에는 생각하기 힘들걸."

영웅들의 군단장에 대한 하늘을 찌르는 적개심은 당장 그분들이 데몬 씨와 구와르 씨를 어떻게 대하는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아무 말 없이 눈에 띄는 곳에 있기만 해도 여차하면 공격할 준비를 하고있을정도인데 그런 그들과 손을 잡아? 연합에 두 사람과 페어리 퀸께서 들어온다는 사실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그분들이?

석상에 봉인된 미네르바 여신님을 구하기 위해 동행했던 잠깐의 시간동안 데몬 씨에게 종일 시비를 걸던 팬텀 씨까지 떠올렸을때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지. 애초에 그분들이 배신했다 해도 군단장과 손을 잡는것부터 말이 안되네."

[내 말이. 배신 전이든 후든 수년동안 죽도록 치고박고 싸운 관계인데 대체 어떻게 동료가 돼?]

"롯뜨 씨가 착각한걸까?"

그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말인데 마스터, 내가 해본 추측 좀 들어봐봐!]

"뭐 좋은 생각났어?"

얘가 분위기 파악 안하고 막 독설을 내뱉긴하지만 꽤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니 뭔가 그럴싸한 가정이 떠오른건가~하고 기대하며 들으려 했는데─

[사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던거야! 영웅과 군단장이라는, 정 반대편에 서있음에도 눈이 맞아서 금단의 사랑을 한거지!]

"─그건 아니지!!"

[왜애~?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영웅이랑 군단장이 한 편이 돼?]

"소설을 너무 많이 봤어 너!"

리엔에서 내가 마법 배울때 혼자있으면 심심하다고 칭얼거려서 도서관에 밀어넣는게 아니었어. 좀 상식을 키우라고 한거였는데 쓸데없는 책들만 왕창 봐서는…… 그런 막장 이야기가 더 재밌는건 맞지만 현실은 B급 소설이 아니다.

"거기다 연인관계면 애초에 롯뜨 씨가 그녀를 스승님의 동료라 칭할리가 없잖아. 애인이나 기타등등 다른 호칭으로 불렀겠지."

[둘이 커플질하는게 눈꼴시려워서 그랬을지도? 아니면 자기도 그 파픈스타란 여자를 좋아하는데 애인이라는 남자한테 말 전해주러 골드비치까지 갔던게 짜증나서 그랬을려나?]

"그쯤되면 상상이 아니라 망상이야 미르."

[…… 나도 반쯤은 농담이었으니까 너무 정색하지마 마스터. 솔직히 그 사람이랑 연애라는 단어만큼 않어울리는 것도 없다는것쯤은 나도 잘 안다고.]

농담이었냐. 다행이네. 어쨌든 미르의 웃긴 말 덕에 두통이 좀 가셨다.

[그래서 다음에 갈 곳은 어디야?]

"페리온의 유적 발굴지. 그런데 거긴 유적이랑 몬스터때문에 들어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던데."

[시간 걸리는 일이면 빨리빨리 해야지. 출발하자.]

"알았어─."

나는 미르의 등에 올라탔고, 검은 동체는 큰 날개짓을 하며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다음 장소에서는 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기를.

***

루미너스side.

기껏 헤네시스에 왔지만 정작 마을 대표인 헬레나는 일때문에 만날 수 없는 상황이고, 블랙윙 아지트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 해도 과거 골렘의 사원에 인형사가 아지트로 만드려다 실패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없었다.

군단장의 준동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몬스터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헤네시스는 어느정도 재건되어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수많은 사람들이 헤네시스에 몰려들고 있어서 바깥에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저긴가."

"예. 저기가 엘윈의 연구실이 있던 곳입니다."

옆에서 안내를 위해 따라온 궁수가 가리킨 곳엔 보이지않는 벽이 깨진듯 허공에 굉장히 큰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저 균열이 현재 차원의 벽이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지금은 연구소를 철거하고 마법사 협회와 리엔의 마법사들이 이 이상의 붕괴를 막기 위해 여러 조치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구조된 이계인들도 돌려보내고 말이지."

"예."

마법사 협회장 하인즈의 수제자 중 한 명인 결계의 마법사 엘윈이 하던 소환 마법 실험에 의해 차원의 벽에 구멍이 뚫린건 대륙 회의때 참석했던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직접 와서 눈으로 보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게 아니라는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 조치를 취한게 맞긴 한가."

"그런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조차 안했으면 지금 이상으로 붕괴가 가속되었을거라고 하더군요."

균열이 있는 곳을 향해 계속 가니 주변에 차원의 벽 붕괴를 막기위해 여러 구조물들을 세워놓은게 보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황이 너무 나쁘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저택을 가느다란 기둥 몇 개로 떠받든 것 같다고 해야하나. 아니, 그보다 더 안좋군.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면 옆의 궁수가 아니라 관계자가 필요하다. 다행히 균열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여러 천막들이 쳐져있었고, 마침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는 가장 큰 천막에 들어가보았다.

"한줄로 서세요 한줄로!"

"새치기하지 마시고, 시끄럽게 떠드시면 배식 없습니다!"

거의 똑같은 목소리가 한 문장처럼 이어지며 울렸다. 배식원으로 보이는 쌍둥이 형제의 외침에 사람들은 긴 줄을 서기 시작했고, 그들과 비슷한 생김새의 좀 더 어린 소녀가 줄을 선 사람들의 이름을 묻고 차트에 쭉 써나갔다.

"○○○ 씨, □□□ 씨, ★★★ 씨…… 같이 다니시던 ◇◇◇ 씨는 왜 안오셨죠?"

"다른 곳에서 점심거리를 좀 얻어먹어서 안오겠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받았죠?"

"여기 마법사 분들 짐 옮기는걸 돕고 빵을 좀……."

"알겠습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이 세계의 음식은 다른 세계에서 온 여러분에게 맞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 선의로 받은 것이라 하더라도 주의해주세요. 나중에 신체검사 해야하니 잠깐 오라고 전해주세요."

소녀의 말에 여기 모여든 이들이 누구인지, 무얼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구조된 이세계인들의 배식을 하는 곳. 거기다 지금은 때마침 점심 시간으로 보이고.

"협회의 마법사들이 머무르는 곳은 저쪽이랍니다 루미너스 님."

"알겠다."

저들에게 묻고싶은게 있었지만 지금은 한참 바빠보이는게 말을 걸때가 아닌것 같다. 나중에 와야겠어. 나는 점점 더 붐비기 시작하는 급식소에서 나온 뒤 궁수를 따라 마법사들이 머무는 대형 막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균열과 꽤 가까운 곳에 세워진 겉으로 보이는것 이상으로 훨씬 넓은 천막 내부엔 꽤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협회장인 하인즈가 보여 잠깐 멈칫했다. 저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 협회에 그 소년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간 메르세데스는 허탕친게 되는데. 하지만 저 자 외에 그 소년에 대해 아는 이가 협회에 얼마든지 있을테고 아니라면 알아서 이쪽에 오겠지.

"실례합니다 하인즈님! 손님 왔습니다!"

"누가 왔다고 이리 큰 소란……! 흠? 자네는?"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급하게 온거라 미리 예고를 하지 못했습니다."

괜히 크게 소리친 궁수에게 한소리하려던 그는 나를 보고 고깔모자 챙을 올려 저가 똑바로 본건지 재차 확인했다.

"자네가 무슨 일로 여기 온겐가? 한손 거들려고?"

"죄송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꽤 심각해보여 설명을 좀 듣고자 하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흐음…… 알겠네."

"잠깐만요 협회장님! 그럼 저희는요?!"

"예끼! 노인공경 모르나! "

이참에 설명 겸 휴식 시간을 갖겠다는 그의 말에 다른 마법사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반발했지만 누구도 그의 연륜이란 방패를 뚫지 못했다. 1명이 빠졌을 뿐인데 각자 1.5배 이상 일하게 된 마법사들의 절규를 태연하게 뒤로 넘긴 하인즈 협회장은 어느정도 자재들이 정리된 곳에 준비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차원의 벽 현황에 대해 궁금한가?"

"예. 그리고 가능하다면 바깥에 모여있던 구조된 이계인들에 대한 것 역시 아시는대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다소 길어지겠군."

그의 중얼거림에 저편에서 마법진과 구조물을 가동시키던 마법사들의 절규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미안하다. 하지만 알건 알아야 한다.

"먼저 차원의 벽 현황에 대해 말하자면…… 겨우겨우 현상유지 중이라고 할 수 있네."

"오면서 그 균열을 보았습니다. 꽤 심각해보이던데 정말 괜찮은게 맞습니까?"

"일단은 그렇네. 다행히 추가적인 타격이 없어서 갑자기 붕괴가 가속화되고있진 않지만, 앞서 있었던 충격이 너무 커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와르르 무너질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최악이군. 앞서 있었던 충격이라면 분명 그 소년의 염동력일텐데 그게 대체 얼마나 강력했던거지? 전투감각이 상당히 떨어져서 제 능력을 거의 활용 못하는건 알고 있었지만 잠재력은 무지막지했던 모양이다.

"벽이 무너지며 생긴 균열은 여기뿐만이 아닐세. 가장 큰게 여기 차원의 벽 구멍이 뚫렸던 여기일뿐, 벽이 불안정해지며 생긴 균열은 메이플 월드 이곳저곳에 나타났지."

"그럼 그 균열들은─"

"우리쪽에서 어떻게든 틀어막거나 더 커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네. 사람이 가기 곤란한 곳에 있는것까지는 아직 손을 쓰지 못했지만 거기도 머지않아 수습할 예정이고."

"그건 다행이군요."

안그래도 혼란스러운 시국이다. 이런 때에 차원의 벽이 무너져서 메이플 월드와 이계가 완전히 이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표현 그대로 '차원의 다른' 일이므로.

"다만 한가지 걸리는건 지금 차원의 벽의 상태네."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문제지만 하인즈 그가 직접 걸린다고 말할정도면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는 긴 수염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뒤쪽을 흘깃 본다음 방음결계를 펼쳤다.

"자네, 이번 차원의 벽 사건에서 이상한 점을 못 느꼈나?"

"…… 벽을 무너뜨린 기폭제인 그 소년의 능력을 폭주시킨 이가 저와 닮았다는게 이상하긴 했습니다만."

나는 막 들었을땐 홧김에 샤이닝로드를 휘두를뻔한 소년의 말을 떠올렸다. 머리가 어느정도 식은 지금 생각해도 마력이 끓어오르는 개소리였다.

"흠,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내가 말하고싶은 의문점은 이 사건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 부분이네."

"당신의 제자가 뚫은 차원의 벽 구멍에 그 소년의 폭주된 초능력이 가해져서 벌어진 일 아닙니까."

"그것은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은 벽이 무너진 배경이야."

벽이 무너진 배경? 그 소년의 능력을 폭주시킨 남자가 그런 일을 한 이유를 말하는가 생각할때 하인즈 협회장은 이어 말했다.

"생각해보게. 차원의 벽이라는게, '고작' 한 사람의 능력으로 무너질만큼 약한 것인가?"

"그……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단 한 명의 능력에 의해 지금처럼 위태롭게 될만큼 차원의 벽이 약한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다. 그럴리가.

애초에 차원의 벽이라는건 한 사람의 힘으로 절대 부술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엔 나도 생각하지 못했었네. 이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어떻게 일을 벌였는지 금방 밝혀졌고, 그 뒤로는 수습에 바빠서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저 균열이 더 커지지않도록 계속 달라붙어서 손을 쓰다보니 무너진 벽이 이상하게 느껴지더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이상했던겁니까."

"벽을 무너뜨린 기폭제는 단 한 명, 키네시스 군 뿐이네. 그 한 명에 의해 차원의 벽이 이렇게 걸레짝이 되버렸다는 말은 두 개의 가능성을 의미하지."

하나는 그의 초능력이 경이로울만큼 강하다는 것. 이는 저쪽 세계에 나타났다는 엄청난 크기의 싱크홀로 충분히 증명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현재 차원의 벽이, 고작 한 명에 의해 붕괴되기 직전이 될만큼 약했다는 것이네."

"당신은 후자라고 생각합니까."

"아니. 나는 둘 다라고 보고 있네. 이번 사건은 그 소년의 무시할수 없는 능력과 모종의 이유로 약해진 차원의 벽. 이 두 개가 결합되어 생긴 참사야."

"허면 차원의 벽이 왜 약해졌을 것 같습니까. 그것이 약하게 만들겠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임의로 벽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 차원의 벽은 물리적 실체가 있는게 아니라 일종의 어떤 법칙,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에 충격은 고사하고 거기까지 닿을수도 없으며, 이번에 벽을 부순 기폭제였던 소년의 힘이 염동력이었던건 달리 말하면 마법도 정령도 없는 그 세계에서 그나마 차원의 벽까지 도달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어쨌든 물리적인게 아닌 개념의 영역에 있는 차원의 벽이 약해졌다─는 건 하인즈 협회장의 추측이라고는 하지만 상당부분 사실일걸로 판단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네. 나는 균열이 더 커지는걸 막다가 벽의 상태가 이상하다는걸 깨달았고, 그에 따라 사실 벽 자체가 모종의 이유로 현저히 약해진 상태였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

"어떤부분이 이상했습니까."

"차원의 벽 자체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개념적인 무언가인만큼, 이번처럼 구멍이 뚫렸다면 스스로 수복되어야 정상이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실제 벽은 손상이 가면 누군가 보수할때까지 그대로 있지만 일종의 개념에 해당하는 차원의 벽은 어딘가 손상이 생기면 저절로 고쳐져야 맞다. 그렇지 않다면 메이플 월드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고에 의해 옛저녁에 무너졌을테니까.

"충격이 너무 커서 수복이 느린가? 아니네. 수복자체가 '아예' 안되고 있어."

"이번 사건을 일으킨 이가 꾸민 짓이 아닐까요."

"그건 아니라고 보네. 안그래도 슬쩍 조사를 해봤는데, 무언가에 영향을 받은 흔적은 없었어. 그런 엄청난 짓을 사람이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하인즈 협회장은 하얀 고깔모자 챙의 끝을 조금 잡아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느낌이지만 지금의 차원의 벽은…… 썩어 문드러진 것 같아."

"예……?"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무너뜨리기 쉽게 약화시키거나 수복되지 않도록 조작을 가했다기보다, 벽 자체가 썩어서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네."

"그게, 무슨말입니까."

개념에 해당하는 벽이 썩었다고? 그런 게 가능하긴 한건가?

"나도 당황했지만 지금 벽의 상태는 '썩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네. 누가 건드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어. 이번 사건은 그 속도를 가속시켰을뿐, 만약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일어났을걸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인즉 차원의 벽을 고칠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정확하네."

최악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을 뛰어넘는 최악의 결론이 나왔다. 블랙윙과 '그', 막 부활한 검은 마법사에 신경쓰느라 이쪽까지 살필 여력이 없었는데 여기서 뒷통수를 쳐맞을줄은.

"그래도 우리는 할 수 있는걸 다 해보고 있다네. 그러니 현상유지나마 하고있는거지. 벽이 자체적인 보수가 되지 않더라도 이쪽에서 구멍에다 천을 덧대거나 하는 식의 임시방편은 취할 수 있으니 당장은 걱정말게."

"하지만 그런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허나 지금 자네의 도움을 받지는 않겠네."

이 시국에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상황이 얼마나 안좋은지 제일 먼저, 그리고 잘 알고 있을 협회장 그가 처음부터 도움을 거절하다니? 따지려는 순간 그가 먼저 말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영웅 중 한 명인 자네는 안그래도 할 일이 많지 않나. 이번에 여기 온것도 사실 다른 일 하다가 균열이 신경쓰여서 들른거 아닌가?"

"…… 맞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들은만큼 넘어갈 수 없습니다."

"괜찮네. 이 건은 우리에게 맡기게."

"허나─"

"루미너스 군."

수 백년의 연륜이 새겨진 눈이 나를 담았다. 영웅이라 불리는 나라 하더라도 존중할 수 밖에 없는, 존중해야하는게 당연한 노현자는 느리게 말했다.

"자네가 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오만이네. 그런건 불가능해."

"사안의 심각성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않을 수 없잖습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자네가 해야할 일은 여기서 이 위태로운 벽에 매달려 균열을 틀어막는게 아니지않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는 말이었다.

"자네는 군단장과, 더 나아가 검은 마법사와 맞서싸웠던 '영웅'이지. 그건 수 백년 전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오직 자네와 자네의 동료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고, 또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일이었네."

"…… 저희는."

"현 시대에 깨어난 자네들이 여전히 그때와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중인걸 알고 있네. 그런 자네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하면 안되지 않나. 나로서는 이렇게 하나라도 짐을 지워주지 않도록 하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네."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야하는 이에게 또 무언가를 부탁할 수 없다. 하인즈 협회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는 안심하고 우리에게 맡기게. 정 돕고싶다면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어도 되네."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안된다한다면 방법을 만들어서라도 버텨보겠네. 우리도 놀고있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협회장의 모습에 여태껏 폐에 고여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우……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들을 믿고 해야할 일을 계속 하도록 하죠."

"그러게나."

"허나 이 사실을 당신만 알고있지마시고 조속히 리엔과 에레브에 알려서 도움을 요청하길 바랍니다. 나중에 일이 터지고 나서야 알리면 돌이킬 수 없을테니까요."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네. 그리고 저쪽 세계의 대표격인 키네시스 군에게도 말해줘야 하는데 지금 그 아이가 어디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어서 곤란하단 말이지……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대신 알려줄 수 있는가?"

나는 지금 그 소년이 블랙윙과 손을 잡고 부활한 군단장과 함께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막 벌어진 사건인데다 아직 자세한 진상을 모르는이상 불분명한 정보를 사실인 양 알릴 수 없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나한테 하려던 두 번째 질문이 뭐였던가?"

아 참, 다른 물어볼 것도 있었지. 앞서 들은 사실들이 너무 심각해서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균열 근처에 상당수의 이계인들이 모여있었는데 이들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아, 그 질문이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그들은 메이플 월드 각지에서 구조되어 여기로 보내진 이들이네. 모두 얼마 않있어서 저쪽 세계로 돌려보내질 예정이지."

"바로 보내지는게 아닙니까?"

"그건 아니네. 메이플 월드 이곳저곳으로 강제이동당해 다치거나 병을 얻은 사람들은 치료를 해야하고, 위험한 물건이 저쪽 세계로 흘러들어가면 안되니 소지품도 검사해야하고, 거기다 정말 저쪽 세계의 사람이 맞는지도 확인해야 하네."

앞서 둘은 그렇다치더라도 마지막은 왜……?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빈민처럼 보이는 이들을 모아다 공짜로 먹여주고 고쳐주니 자기도 이계인이라고 속이려드는 사람들이 있더군. 어처구니 없게도 말이야."

"속아넘어갔었습니까?"

"지금 바깥의 봉사자들이 하는 일을 보게. 속았을 것 같나?"

여기 오기 전에 사람들의 이름을 모조리 체크하고 있던 소녀를 떠올렸다. 호락호락하게 속아넘어갈리가 없군.

"그 봉사단체가 빡빡하게 관리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반대로 신경이 곤두서거나 난폭해진 이계인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해서 그들도 여러모로 우리 못지않게 고생중이지."

"듣다보니 신경쓰이는 부분입니다만, 구조된 이계인은 협회측이 관리하는게 아닙니까?"

"응? 아니네. 우리는 벽이 더 무너지지않도록 지탱하는데도 많이 버거워서 말이야. 그래서 여기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만든 봉사단체랑 시그너스 기사단이랑 손을 잡고 구조된 이계인들을 관리하고 있는거네. 우리측에선 한시름 덜은거지."

그렇게 된건가. 현재 협회는 차원의 벽을 틀어막는데 사력을 다하는중이라 이계인 관리라는 또다른 일까지 하기엔 많이 바쁠테니 다른쪽에 그 역할을 넘기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관리라는게 어떤것들인지, 어떤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아십니까."

"당연히 그렇네만 거기까지 다 말하는건 자네가 말한 '간략히'가 아니지. 자세한게 궁금하면 나보다 당사자들에게 묻는게 더 빠르고 상세할거네."

완곡한 축객령이었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마법사들의 '협회장님! 언제 끝납니까!'를 필두로한 갖가지 불만들에 그는 호통을 치며 곧 가겠다고 답한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에게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한 뒤 천막에서 나왔다.

그와의 대화가 꽤 길었던걸까. 좀 전에 배식을 하던 천막은 닫혀있었고, 아까 보았던 자원봉사자로 추측되는 쌍둥이 형제와 소녀도 다른 곳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곤란하군. 다른 봉사자들이 어디있는지 누구한테 물어봐야하나.

"왜 그러고 계시죠?"

닫힌 천막 앞에 서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한 여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당신은 이계인인가."

"네? 아아, 네. 그러는 남자분은 마법사신가봐요?"

여자는 꽤나 화려한, 마치 인형의 옷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저런 옷을 어디서 구한거지.

"무슨 일로 거기 계시는거에요?"

"아까 여기서 배식을 하고있던 쌍둥이 자원봉사자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하룬과 마룬님이요? 그분들은 뿔버섯갓을 잘못 먹었다가 중독된 사람들을 한참 치료중이에요. 지금은 만나실 수 없어요."

이계인들은 고작 버섯갓을 먹고 중독되는건가. 분명 버섯몬스터의 갓엔 미량의 독성이 있긴 하다만 치료라는 말이 나올만큼 위험할 정도는 아닌데.

"그분들을 찾으러 오신건가요?"

"정확히는 여기서 일한다는 자원봉사자를 찾으러 온거다. 그러니 굳이 아까 그 쌍둥이가 아니어도 되지만 당신과 같은 구조된 이계인의 관리에 대해 알고자하니 관련자여야 하지."

"으음…… 제가 대신 말해드릴까요? 그분들은 모두 바쁘신데."

여자의 말에 잠깐 고민했다. 구조된 사람들에게 하는 관리라는게 무엇인지, 그 방법이 어떤건지 알려는거니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말도 들어볼만 하다.

"그럼 잠시 이야기 좀 해줬으면 한다."

"네."

가까운 곳에다 어디선가 가져온 빈 박스를 깔아 자리를 만든 그녀는 - 굉장히 자연스러워 뭔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채지 못했다 - 치마의 풍성한 레이스에 흙이 뭍지않도록 조심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아까 관리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궁금하신거죠?"

"일단 당신이 메이플 월드의 어디에서, 언제 구조되어 여기에 왔는지부터 말해줄 수 있나."

"아……."

여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런, 실수한건가. 이 여자는 누군가에게 구조되기 전까지 괴로운 시간을 보냈을수도 있다. 몬스터에게 쫓겼다던가.

"그러니까, 저는……."

"미안하다. 떠올리기 힘든거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괜찮, 괜찮아요. 저는 루디브리엄이라 불리는 곳에서 구조되었어요. 그, 장난감들이 엄청 많은 마을말이에요. 이 옷도 거기서 받은거에요."

어쩐지 인간이 입는 옷같지 않더니 인형족 옷이었나.

"제가 왜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생각나는건 그때 큰 소리가 나면서 땅이 무너졌고, 밑으로 떨어졌던건데…… 정신을 차려보니 빛나는 유령이랑 블럭 기둥들이 세워진 곳에 있는거에요."

루디브리엄의 시계탑 최하층? 어떻게 민간인이 거기 떨어지고 살아남은거지?

"그곳의 유령들한테 정신없이 쫓겨다녔는데 갑자기 그놈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거에요. 왜그런가 싶어서 보니까 제 앞으로 뭔가 공간이 소용돌이치는? 아무튼 그런 게 생겨서 휩쓸렸고…… 정신을 차렸을때 전 사람들한테 구조되어 있었어요."

시간의 여신 륀느에 의해 시간이 멈춘 루디브리엄이기에 가끔씩 시계탑 최하층에서 발생한다는 시간의 뒤틀림이다. 그런것에 휩쓸리고도 무사하다니, 기적이라 해야하나. 잘못하면 영영 현실의 시간과 유리(遊離)되어버리는 것인데 오히려 그래서 몬스터들의 공격조차 받지않고 시계탑 최하층에서 구조될때까지 살아남은 모양이다.

"절 구해준 사람이 저희 세계의 사람이어서 악몽을 꾼건가 싶었는데…… 장난감 마을을 보니까 그게 아니란것만 알았죠."

"누가 당신을 구한거지."

"고등학생 정도의, 10대 후반의 남자애가요. 사립영재학교 교복을 입는걸 보니까 거기 학생인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남자애가 올백머리에 굉장히 잘생겼었다고 덧붙였다. 그놈이군. 생각해보니 거기까지 갈 수 있는 이계인은 그놈정도밖에 없다. 전투센스는 허접하지만 어쨌든 능력은 좋으니.

"그애가 유령때문에 다 찢어진 제 옷도 새로 사주고, 여기로 가는 비행선 티켓도 구해다줬어요."

"언제 그노, 아니 그애한게 구조를 받았지."

"■일 전에요."

'그'가 에레브에서 블랙윙 멤버를 데려가기 불과 하루 전이다. 그때 놈은 루디브리엄에 있었던건가.

"나중에 알고보니까 저처럼 그애한테 구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라고요. 그날 그애한테 구조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더 있었는데 그 뭐더라? 엘나스? 거기서 걔한테서 겨우 구해진 사람도 있고 아무튼 그래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데도 여기 남아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려는 모습에 걔보다 나이가 더 많은 전 좀 창피하더라고요. 저는 초능력이 없으니 위험한 곳에 가지도 못하지만요. 이어진 여자의 자조에 그놈이 오늘 저지른 짓을 말하는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다.

일단 '그'가 일을 벌이기 전날 그놈은 루디브리엄에서 이 여자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을 구하고 또 엘나스에서도 이계인들을 구한……?

"잠깐만, 방금 뭐라고?"

"네? 뭐가요?"

"■일 전에 당신말고 엘나스에서 그놈에게 구해진 사람이 있는게 사실인가?"

"네. 그런데요?"

"그 사람을 당장 만나볼 수 있나."

"아아, 알겠어요."

여자는 깔고앉았던 박스를 정리하고 그 소년에게 구해졌다는 또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엘나스에서 그 소년을 본게 맞냐고요? 네. 확실합니다. ■일 전 늑대에게 쫓기던 저를 구해준게 올백머리에 잘생긴, 초능력을 쓰는 소년이 맞습니다!"

당사자의 확실한 증언에 의문점은 더욱 커졌다. 그들이 생명의 은인을 착각할리 없으니 사람을 잘못보진 않았을테고, 또 착각하기엔 놈의 특징이 너무 뚜렷하다.

문제는, 그놈이 대체 어떻게 루디브리엄과 엘나스를 1시간만에 오갔냐는 것이다.

'여자가 구해진 시간과 남자가 구해진 시간의 차는 약 1시간정도. 하지만 그 안에 두 지역을 오가는건 불가능하다.'

엘나스가 오르비스와 이어져있으니 비행선을 탄거 아니냐? 같은 가정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현재 두 지역을 잇던 오르비스 탑은 군단장들의 준동이 시작됨과 함께 반파된 상태. 일반인은 출입금지다. 그렇다면 염동력을 이용해 초고속으로 날아서? 아니, 그런 일을 하기엔 놈의 염동력 다루는 실력이 너무 허접하다.

애시당초 엘나스가 아닌 오르비스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루디브리엄까진 못해도 하루가 걸린다. 그런데 1시간정도만에 간다는건 그냥 불가능이라 봐도 좋다.

'그런데 놈은 그걸 했단말이지…….'

가능성은 하나로 좁혀진다. 내가 아는한 그 거리를 그렇게 짧게 오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놈은 우리가 모르는 포탈을 써서 두 지역을 오갔다.

========== 작품 후기 ==========

검호side.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알기위해 황급히 에델슈타인 기지에 간 나를 반긴 것은─ 집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였다.

"이, 이제 오셨나요 소드댄서 님?"

"…… 르티에."

"그때 부, 부탁하셨던 보고서는 모두 올려두었습니다."

내가 그때 뭐라고 했더라. 아 맞다, 협력에 대한 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건지 모두 적어서 올려두라고 했지.

'아주 미쳤었구나 내가.'

보기만해도 아찔하게 층층히 쌓여있는 서류들은 그 순간적인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여실히 뽐내고 있었다. 한 장 한 장에 간부들이 무슨 짓을 했고, 누가 이 협력을 요청했고, 무엇을 위해 이런 방법을 채택했는지까지 상세하게도 적혀있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여나 붙잡을까봐 빠르게 몸을 빼는 르티에였지만 나는 이 정신나간 내용의 서류들에 머리가 멍해져서 그대로 한참을 못박힌듯 서있다가 겨우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책상 앞까지 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편안하게 꺼지는 푹신함이 불쾌감이 되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가장 위에 올려진 서류를 집어보았다. 쓰여진 내용은 지금 하고있는 일의 진행 현황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대체…… 뭘 한거야."

협력을 요청한 이는 프라이쉬츠였다. 또한 그가 요청한 협력이 메이플 월드 곳곳에 있는 큰 마을과 도시 인근 혹은 내부에 미스틱 게이트를 설치해 친위대를 날뛰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를 보조하기 위해 블랙윙 간부들이 파견되었음을 서류는 정확히 명시하고 있었다.

무릉, 루디브리엄, 마가티아, 니할, 엘나스, 리프레…… 어느 지역하나 빠짐없이 미스틱 게이트가 설치되었고, 무슨 몬스터를 어둠으로 강화시켜 넣었으며, 그 뒤 어떤 친위대가 나타났는지까지 활자들이 알렸다. 그 활자들은 단검이 되어 내 속을 난자했다.

내가, 블랙윙에 들어온건, 간부까지 된건, 봉인석을 모두 손에 넣고 군단장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내 좀 더 수월히 막기 위해서였는데.

"막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일을 벌여선 안되잖아……!"

단지 정보를 얻기위해, 뒤쪽에서나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얻은 블랙윙 최고 간부라는 지위에 딸린 권력은 이 순간 최악의 힘으로 바뀌었다. 자각하고싶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 생각없이 한 말만으로 메이플 월드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놈이 되어있었다.

…… 마치 군단장처럼.

아니. 지금은 오르카도 스우도 없으니 내가 블랙윙 최고 실세고, 윙마스터니까 군단장이나 다름없는건가?

눈앞에 번져가는 붉은색에 입벽을 잘근잘근 씹어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은 뒤 찝찔한 피맛을 삼키며 서류를 넘겼다. 상황이 시급하지만 그런만큼 이것들을 봐야한다. 어찌되었든 내가 한 판단이고, 내 결정에 벌어진 일들이 어떤건지 똑똑히 알아야 하며 또 모두 내가 해결해야 했다.

'책임을.'

일을 벌였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하는게 당연하니까.

물론 서류는 너무 많아서 지금 당장 전부 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들만 흝어보았고, 어떤식으로 사건이 일어나고 또 진행중인지 파악했다.

현재 메이플 월드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있는 미스틱 게이트를 설치한 이가 블랙윙 간부들인건 말해봤자 입만 아픈 사실이고, 그들이 일을 어떻게 하고있는지가 중요하다.

'간부들은 각자 게이트를 설치할 지역을 분담해서 진행중.'

마을 내부에 게이트를 설치하는 것이므로 먼저 그 마을에 대해 잠입을 해야하는데, 간부들은 각자의 능력과 지식을 살려 자기들이 가장 깊숙히 잠입할 수 있는 마을을 하나씩 맡았다. 예를 들어 엘나스는 엘레오노르, 루디브리엄은 프란시스 식으로.

'미스틱 게이트는 한 지역에 하나로 끝이 아니라 여러 군데에 나눠서 설치한다.'

이건 이미 어느정도 되었다고 보고가 올라왔다. 미스틱 게이트라는게 식물과 기계를 어떻게 합쳐서 만든 물건이라 특정 지점에 직접 가지 않아도 거기에 자라 활성화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진짜 뭘 만든거야 겔리메르 그 미친 영감은.

거기다 필요할때마다 설치하는게 아니라 미리 설치해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활성화되는 - 요컨데 타이머 기능이 있다는데, 비활성 상태의 미스틱 게이트는 잎이 없는 마른 나무로만 보이는지라 위장 효과도 어느정도 있어서 곤란하다.

어느 마을에 어떤 몬스터가 나타났고, 그 뒤에 친위대의 누구가 나타나 어느정도의 피해를 입혔는지까지 꼼꼼히 읽은 나는 보고서의 마지막 줄을 보았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중이며, 간부들은 현재 게이트가 사전에 철거되지 않도록 감시, 관리중.'

슬슬 연합쪽에서 대응할 기미가 보이니 이제부터 다른 행동을 취할거라는 말에 나는 서류를 구겼다.

'순조롭게 진행중'이라는 문장 하나로 압축된 '몬스터와 친위대로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이면을 읽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왜 프라이쉬츠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정보가 보고서에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간부들중 누구라도 알았으면 이에 대해 언급이 있어야하는데 추측조차 없는걸 보니 프라이쉬츠 이자식은 지금 간부들을 협력이라 쓰고 하청이라고 읽는, 시다바리로만 부려먹고만 있지 진짜 목적에 대해선 아예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전화를 들었다.

"르티에."

[네. 무슨 일이시죠?]

"겔리메르는 지금 어디에 있나."

[겔리메르 님이라면…… ■동 연구실에 계십니다.]

이번 일에 한 축을 맡은 사람이라면 일부분이나마 알고있겠지. 영감의 위치를 알아낸 나는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곳으로 향했다.

르티에가 말한 연구실은 내가 알기로 다른 곳들과 다를바없는 수많은 연구실 중 하나였는데 어째선지 가는 길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벽에 늘어진 크고작은 수많은 파이프 다발을 타고 에너지가 흘렀고, 벽과 바닥을 타고 규칙적으로 미묘한 진동이 울려 마치…… 생물의 심장같잖아.

위잉, 자동문이 열리며 불쾌할정도로 깨끗하고 차가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응? 자네 왔는가?"

겔리메르는 그 갖가지 기기들이 깔린 방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유리통 앞에 서있었다. 복도에서부터 보였던 다양한 파이프들이 보내는 에너지들의 종착점이라 생각되는 그 통 안에는, 당연하게도 스우의 몸이 들어있었다.

"지금 여기 간부들이 협력하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있는게 있나?"

"그 일말인가? 어떤 부분이 궁금해서 나한테…… 아니지, 그놈들이 아니라 이 늙은이에게 직접 왔다는건 미스틱 게이트 관련이로군?"

반은 맞다.

"그것도 있고, 이번에 협력을 요청했던 프라이쉬츠가 무엇때문에 지금 이 일을 하고있는지 알고있나."

"모르고 있는겐가?"

"언급조차 없어. 설명도 없이 그냥 부려먹고있단 말이야."

"흐음…… 확실히 하나하나 설명해줄만큼 성격좋은 이는 아니었지."

성격이 좋기는커녕 희대의 인성킹인데 그놈은. 겔리메르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네. 그는 오르카 년이 멀쩡했을때에 여기 왔다가 나한테 이러이러한 기능의 물건을 만들어서 내놓아라~고 멋대로 요구했고, 꽤 번거로운 부탁이라 거절하려했는데 그랬다간 그 총에 바로 머리 뚫릴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을뿐이니까."

법보다 주먹, 아니 총이 더 가까운게 현실이었다.

"결국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대충 추측은 가능하더군."

불행인지 다행인지 눈앞의 영감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남자는 그저 혼란이 필요할뿐이네."

"…… 뭐?"

"위대한 그분의 친위대니 어둠에 변질된 몬스터니 다 의미없네. 그런건 그 남자에게 소모품일뿐이야. 중요한건 그것들을 소모해서 무엇을 벌이느냐지."

"내가 묻고싶은게 그─"

"이미 벌어졌지 않나. 메이플 월드 전체에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답을 들었음에도 이해하는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굉장히 정신나간 내용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분이 깨어났음에도 굳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이유야 뭐 간단하지. 그 남자는 사람들을 무언가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고, 적당한 피해를 입히기 위한 혼란이 필요했을뿐이야. 혼란 자체가 목적이란 말일세."

"그 무언가라는건……"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그건 모르네."

썩을. 알아야 막든가 초를 치든가 할 수 있는데. 표정관리를 실패했는지 겔리메르가 의아한듯 물었다.

"왜 그러는가? 결국 다 알게될것을."

"그놈이 친절하게 설명해주러 올것같지는 않다만."

"설명도 필요없지. 중요한건 결과네. 과정따위 아무래도 좋아. 친위대란 뭔가 있어보이는 이름과 어둠에 변질된 몬스터가 출현하는 등 뭔가 큰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에 한눈팔지 않고 철저히 그로 인한 결과들만 보면 큰 그림을 알 수 있게 될거네."

그 결과들이 그려내는 것이 곧 그 남자, 프라이쉬츠가 원하는 바이니까. 지독하게 냉철하면서 매우 겔리메르다운 말에 헛웃음조차 안나왔다. 혀를 차려던걸 참으며 나는 다른 용건을 말했다.

"지금 쓰이고 있는 미스틱 게이트의 설계도를 가져올 수 있나."

"흐음? 일단 알겠네."

영감은 연구실 한쪽에 잔뜩 쌓여있는 둘둘 말려있는 종이뭉치들을 뒤져 그중 하나를 가져왔다. 설계도 보관을 저따위로 하고 있었던거냐. 그 기가막힌 물건도 이 영감한테는 별거 아니었던건가.

"그런데 이건 왜 달라는겐가?"

"좀 확인할게 있으니 잠시 가져가겠다."

"사본이 있으니 상관없네만…… 자네 설계도 볼줄은 아나?"

…… 내가 그 망할년 때문에 이곳에 트립당하면서 대학도 못 간, 그 이전에 수능조차 못 쳐서 최종 학력이 중졸이 되버렸지만 그래도 명색에 이과였던데다 노바족들에게 빡세게 다시 교육받아서 설계도 보는 것쯤은 할 수 있다고. 애초에 내가 볼게 아니라 베리타스에 주려고 받은건데 대놓고 '뇌근육 전사가 이 설계도를 보겠다고?'란 뉘앙스는 대체 뭐야.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 걱정따위 하지마라."

"아, 음, 알겠네."

나는 이제 여기서 나가기위해 몸을 돌리려다 하나 더 확인할 것이 있다는걸 떠올렸다.

"제네로이드 개조 현황은 어떻지?"

"매─우 순조롭네."

대답은 기다렸다는듯 들뜬 어조로 돌아왔다.

"구체적으로."

"오르카 년의 힘을 뽑아 정제, 스우에게 다시 주입하는 일은 절반정도 끝났네. 에너지를 안정시키고 추가적인 개조를 하는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 그대로 시간문제일뿐, 육신에 돌아오길 반항하는 영체를 제압하는 문제는 어째선지 얼마전부터 영체 자체가 감지되지 않아서 간단히 해결되었네."

그야 스우놈의 영혼은 아리아 여제한테 죽임당했으니까 당연하지. 스우가 죽은건 호재지만 이쪽에서는 꼭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어졌다.

"오히려 오르카 그년이 죽지않을정도로 아슬아슬하게 힘을 뽑아내는게 가장 곤란했네. 마음같아선 한 방울도 남기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안경너머의 눈이 희번뜩한 빛을 띄었다. 지금이라도 해도 된다고 하면 진짜 망설임없이 하겠지. 그때 내가 왜 오르카를 살리라고 했더라? 아, 미끼용으로 쓰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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