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69화 (169/208)

<-- 크리스마스 외전 --> (본편과 무관한 외전입니다)

검호side.

크리스마스. 지구도 아닌 메이플 월드에 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성탄절이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신경쓰지말고 그냥 넘기자. 이런거 하나하나 신경쓰면 머리아프다.

"선물은 마음에 드나?"

"네!"

다행이네. 애들 취향은, 아니 그 이전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 자체가 영 어색해서 고르는데 한참 애먹었다. 들뜬 얼굴로 흰색과 노란색의 줄무늬 목도리를 돌돌 감는 에반의 모습에 그래도 몇 시간동안 고민했던게 의미없지 않았다고 안도했다.

"저쪽에서 거대 트리를 장식한다던데 같이 가요 스승님!"

또 어딜 같이 가자는거야 얘는. 오늘 점심때부터 크리스마스 축제라며 거리 구경하자고 계속 끌려다닌지라 장난아니게 피곤하다고. 예전이었으면 모를까, 깨어난지 얼마 안되는 지금은 체력이 바닥을 기어서 더이상 움직이는건 진짜 무리다.

"그건 좀 무,"

"네에에~? 제발요오오~"

내 손을 꼭 쥐며 간절함을 담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에반의 모습에 예전에 엘리넬에서 보았던 실프들이 떠올랐다. 여기서 단호하게 안된다고 하면 엄청 좌절하겠지.

"…… 같이 장식하는 건 무리지만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어주마."

"알겠습니다아~!"

굳이 날 꼭 끌고가야 속이 시원하겠냐. 거대 트리가 있다는 곳까지 에반에게 끌려가는 느낌이 마치 도살장에 가는 것 같았다. 트리 장식을 다 한 뒤에 나까지 거기 걸려도 반항 못할거야 하하.

[마스터는 애들한테 너무 약한 것 같아.]

"저렇게 들떠있는데 실망시킬 수는 없잖아……."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일부러 한 거 같은데.]

애가 엄청 영악하다고 덧붙이는 아스카의 말에 나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할 기운도 없다.

그렇게 에반의 손에 이끌려 거대 트리가 있다는 광장에 도착하니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해온건지 의문일정도로 큰 - 거의 3층 높이의 - 트리가 떡하니 서있었다. 오가는 여러 사람들이 장식을 달았는지 트리는 아랫쪽 위주로 풍성했다.

[우린 윗쪽을 장식하자!]

"응!"

[너희 장식할 소품은 있는 거야?]

"아까 스승님이 주신 용돈으로 잔뜩 샀어요!"

내가 준 돈으로 그런 걸 산거냐. 그놈의 트리가 뭐라고, 차라리 먹을 걸 사. 호빵이라던가.

에반은 종이라던가 빨간 공이라던가 양말, 리본같은게 잔뜩 담긴 상자를 열며 마법으로 트리 윗쪽을 장식하려고 했으나, 생각외의 복병에 부딪혔다. 트리를 관리하는 경비병이 뛰어와서 트리를 장식해주는건 좋은데 마법을 써서 하지는 말라고 말한 것이다. 예전에 그렇게 해도 마법을 허가했다가 트리가 불탄 사례가 있었다나. 뭘 어떻게 썼길래 그렇게 된거냐.

"어쩔 수 없구나. 그냥 아랫쪽에 하거라."

"우으…… 아랫쪽엔 이미 장식이 꽉 찼는걸요."

[하지만 마법은 안된다잖아. 마법없이는 위에 장식을 달 수가 없고.]

"전 윗쪽에 장식을 달고싶은데……."

침울한 얼굴로 아랫쪽에 비해 꽤 널널해보이는 트리 윗쪽을 올려다보던 에반은 갑자기 아! 하고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갑자기 왜 날보는거야?

그리고 몇 분 후,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스승님! 왼쪽, 조금만 더 왼쪽요!"

"알았, 다."

"너무 많이 가셨어요. 오른쪽으로 반걸음만요!"

이리저리 들썩이며 어깨를 누르는 무게에 무릎이 후들거렸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에반이 생각해낸 해답은 실로 심플했다. 마법이 안되니 물리적으로 높이를 올리는, 그러니까 내 위에 무등을 탄 것이다. 마법없이 트리 위도 장식해야한다는 문제를 멋지게 해결한 셈이지만 졸지에 무등을 태워줘야하는 입장이 되버린 나로서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십대의, 그것도 여자에 비해 체중이 더 나가는 남자애를 피로에 찌든 몸으로 어깨 위에 올리고 중간중간 까치발도 하며 트리 주변을 빙빙 돌다니. 신종 고문이냐.

"조금만, 조금만 더 높이……!"

마음같아선 검을 빼어다 이 쓸데없이 높기만 한 트리를 장작더미로 만들고 싶었으나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지금 내 어깨 위엔 에반이 있어.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야.

내가 머릿속으로 참을 인을 몇 번이나 새기는 사이 에반은 끝내 한 상자 가득한 장식을 전부 트리에 달았고, 1시간 남짓이 지나서야 내 어깨에서 내려왔다.

[수고했어 마스터.]

"…… 트리따윌 대체 왜 세우는걸까."

[모르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풍습이니까.]

이런 풍습 없어져버렸으면. 진짜 더 서있기도 힘들어서 나는 간신히 다리를 질질 끌어다 근처의 벤치까지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내 옆에 에반이 총총 다가와 앉았다.

"혹시 힘드셨나요 스승님?"

"됐다. 그보나 장식하는건 즐거웠니."

"네!"

그래. 애가 재밌었다는데 아무렴 어때. 다만 또 하라고 하면 그냥 도망쳐버릴거다.

트리에 주변을 돌땐 몰랐는데 좀 떨어져서 보니 장식이 한가득 달린게 제법 멋져보이기도 했다. 특히 윗쪽의 장식 상당수가 에반이 한거라 더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장식들을 감상하던중 새하얀 무언가가 춤추듯이 나풀나풀 떨어지는게 눈에 들어온건 그쯤이었다. 저것이 무엇인가 떠올리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에반이 먼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눈이다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는 말이다.

에반은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하는 눈을 잡기위해 벤치에서 일어나 파닥파닥 손을 뻗었다. 저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인가 싶었지만 나도 어릴때 저랬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무지하게 좋아하네.]

"어린애랑 개는 눈오는걸 좋아한다잖아."

[애는 그렇다쳐도 개뿐만 아니라 어린 용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에반과 덩달아 눈을 잡으려, 아니 먹으려고 입을 벌리는 미르를 보며 아스카는 헛웃음을 흘렸다. 크기조절을 해서 겉보기엔 아스카가 미르보다 더 작아보이나 실제로는 나이차가 상당하다보니 아스카 입장에선 미르의 행동이 귀여울지도 모르겠다.

[마스터는 눈 안좋아하지?]

"그렇지 뭐."

눈에 관해서 뭔가 좋은 기억이 있어야 말이지. 그런데 내가 한 말이 저쪽까지 들렸는지 한참 빙글빙글 돌고있던 에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스승님은 눈 싫어하세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것 뿐이다."

"왜요?"

왜냐니.

눈이 내리면 일단 시야가 상당부분 가려져서 상대의 공격과 거리를 파악하는게 힘들어진다. 또한 체온이 내려가 몸이 둔해지며, 어느 정도 지면에 쌓일경우 미끄러지기 쉬워지거나 발이 푹푹 꺼져서 균형을 잡고 회피하는데 힘들어진다. 내리는 중이든 내린 후든 눈이라는 것 자체가 전투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장애물이라는─

"……."

[결국 전투에 방해가 되서구나.]

내 긴긴 설명에 에반과 미르는 낭만이 깨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젠장 말하고나니 진짜 그렇네. 내가 어쩌다 눈을 이렇게 보게 되었을까.

[마스터. 눈을 그런 이유로 싫어했구나.]

"그, 그 이전에 눈에 좋은 기억이 없다고!"

"눈에 대해 무슨 안좋은 일 있으셨어요?"

에반의 질문에 두 장소가 떠올랐다. 메이플 월드에서 사시사철 눈을 볼 수 있는 곳들. 엘나스와 리엔. 전자의 경우 타락하기 전에 그저 가난한 소국의 왕이었던 반 레온의 성에 머물다 갔었던 적이 있었다. 이 기억자체가 나쁜건 아닌데 그 뒤에 반 레온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생각하면…….

후자인 리엔의 경우 처음으로 거기 갔었던 이유가 문제였지. 군단장에 의해 오닉스 드래곤이란 종이 멸종한 날 겨우 구했던 소녀 아리에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오시리아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혹한의 땅 리엔에 보냈었다. 그 뒤에 잘 살아서 망정이지 만약 불행하게 살았으면 평생 죄책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니 또 다른 눈을 맞았던 곳이 하나 더 있었는데, 검은 마법사에게 심장 구멍이 뚫린 이후 다시 메이플 월드에서 살아났던 곳이 북극이었지.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눈에 대해 좋은 기억이 정말 없구나…… 할때 뭔가가 생각났다.

"아. 그러고보니 괜찮은 적도 있었지."

"진짜요? 어떤 일이었는데요?"

[전투에 이점이 되었다던가 그런거야?]

"그런건 아니고……."

진짜 눈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이라는게 꽤 괜찮게 보였던 때가 딱 한 번 있었지.

생명의 오버시어를 봉인에서 풀었던 그 날, 심해에서 보았던 마린스노우. 밤하늘처럼 검은 심해속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작은 알갱이들이 눈처럼 떨어지는 광경은 실제 눈이 아님에도 환상적이었다.

'정말 아름답죠?'

응. 그것만은 아름다웠지.

내 말에 에반은 호기심으로 격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바다 속에서도 눈이 내려요?"

[진짜 눈은 아니고, 눈처럼 보이는 마린스노우란 현상이야.]

[보고싶다!]

"언제 한 번 같이 보러가요!"

그게 무작정 간다고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만 나는 에반의 간절한 눈빛에 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래. 바다든 하늘이든 다 가자.

[마스터 바다 싫어하지 않았어?]

"몰라. 될대로 되라지."

바다는 또 왜 싫어한다고 물어볼줄 알았던 에반은 바다에서 내리는 눈을 구경할 수 있겠다며 미르와 이야기하기 바빠 다행히 듣지 못헀다.

"아참 스승님, 저녁쯤에 저희 집에 가도 되나요?"

"응?"

"여행중이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집에 잠깐 가볼까 하는데, 저녁 먹으러 들렀다고하면 한소리 듣겠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성찬은 먹고싶으니까……."

[마스터네 엄마가 만드는 칠면조 구이는 굉장히 맛있어!]

[진짜?!]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굉장히 끌렸다. 길거리 음식으로 배채우기보단 제대로 된 밥쪽이 더 좋은게 당연하고, 거기다 크리스마스 성찬이란게 어떤건지도 궁금했다.

아니, 다 떠나서 그냥 오랜만에 괜찮은 밥 좀 먹고싶어.

"니가 그렇게 원한다니 그렇게 하자구나."

"앗싸!"

[오랜만에 집밥먹는다!]

아주 좋아 죽는구나. 영악해졌다느니 뭐니 해도 애는 애였다.

[그런데 빈손으로 가도 돼? 밥 얻어먹으러 돌아왔다고 하면 한소리 듣는거 아니야?]

[마스터 집인데 아무렴 어때요?]

"아아, 잠깐만. 아스카 씨 말도 틀린 것 같지 않아. 생각해보니까 뭔가를 들고가야 엄마 잔소리를 조금 피할 수 있을것 같은데."

선물이라…… 이쪽도 예고없이 하는 방문이니 성의쯤은 필요할 것이다.

"그럼 사와라."

"네?"

"돈은 내가 줄테니까 거리에 가서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라."

"그, 그래도 되나요?"

"간만에 찾아가는거니 그정도는 준비해가는게 예의니까."

나는 말을 하며 적당히 부족하지 않을정도로 돈을 꺼내 에반에게 쥐어주었다.

"거기다 크리스마스인데 겸사겸사 부모님께 선물정도는 드리는게 좋잖아."

"…… 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다녀와라."

[당신은 같이 안가는거야?]

어이, 지금 난 피곤해 죽겠거든. 다시 선물 사려고 이 넓은 거리를 쏘다니는건 진짜 못한다고.

[너희끼리 갔다와. 우린 여기서─]

"아니. 아스카 너도 같이 가."

[엑?! 나는 왜!]

"쟤들한테만 선물 고르게하면 뭘 고를지 모르니까 안전빵으로 좀 지켜보고 와."

[우우…….]

아스카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어서 애들을 지켜달라는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세 사람이 선물을 사러가고 혼자 벤치에 남은 나는 멍하니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푹 고개를 숙였다.

잠시, 눈 좀 붙여야겠어.

***

에반side.

아스카 씨랑 미르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닌 끝에 나는 겨우 엄마 아빠의 선물을 고를 수 있었다.

"누군가한테 줄 좋은 물건을 찾는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내가 아니라 남이 쓸걸 고르는거니까.]

"하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걸렸고."

한 두시간이면 끝날줄 알았는데 뭔가 팍! 하고 오는게 없어서 그 이상으로 시간이 지나버렸다.

"스승님이 한소리 하시겠지?"

[그 사람이라면 정말 우직하게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아스카 씨라도 옆에 있었으면 늦을거라고 미리 전했겠지만 지금 아스카 씨는 미리 우리 집에 저녁쯤에 방문하겠다고 전하러 가버렸다.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입안에 곱씹으며 거대 트리가 있는 광장에 들어선 나는 스승님이 있는 곳을 찾았다. 스승님은 정말 눈에 띄는 차림을 하고 있는데다 어째선지 광장엔 사람도 거의 없어서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승……!"

크게 스승님을 부르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벤치에 앉아 검은 털망토를 적당히 여민채 작게 고개숙여 별다른 미동없이 눈을 감고 있는 그 모습은 분명─

[저 사람 자고있는데?]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거 맞아?"

기다리다 지루해서 그냥 잠드셨나? 말이 안되지만 눈앞에 그런 모습이 현실로 펼쳐지니 당혹스럽다.

"우리가 너무 오래 돌아다닌 모양이야."

[일단 깨워야겠네.]

"그럴까?"

나는 주무시고 있는 스승님을 깨우기 위해 조용한 발걸음으로 벤치에 다가갔다.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전사처럼 일정 거리에 접근하면 퍼뜩 깨어나서 검을 휘두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 말 그대로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일이지만 스승님은 실제로 그런 전설 속의 영웅이시니까 불안했다 -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겨우 벤치 앞까지 온 나는 조심조심 손을 뻗어 어깨를 흔드려다 그대로 멈췄다.

[마스터?]

"쉿. 조용히 해봐 미르."

문득, 푹 자고있는 스승님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안 순간 그대로 깨우기보단 관찰하고 싶었다. 항상 나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스승님이 자는 모습이라는게 어떤건지 궁금했으니까.

가끔씩 날카롭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가 완전히 내려온 눈꺼풀에 가려진걸 확인했을 때 일말의 무서움마저 멀리멀리 달아났다. 유타 형처럼 이를 갈거나 아빠처럼 코를 고는 고약한 잠버릇도 없었고, 그저 얕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뿐이었다. 입은 다물려 있었지만 평상시에 꾹 다문 것하고는 달리 자연스러웠고, 미간에 잡힌 주름도 펴져있어 온순한 인상이었다.

뭔가…… 평온해보였다.

"이런 스승님 처음 봐."

[그러게.]

깨우기 미안할정도로 편한 얼굴이라 손을 댈 수 없었다.

"아스카 씨가 올때까지 기다릴까?"

[이 눈내리는 곳에 계속 있긴 좀 그렇지 않아?]

"그, 그것도 그렇네."

너무 편해보여서 무심코 넘겨버렸는데 지금은 눈이 내리고 있다. 이 추운 곳에서 계속 주무시게 둘 수 없는 것이다. 역시 깨워야하나 생각할때,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껏 찾아왔는데, 하필 자고있는건가."

굉장한 미성이었지만 어째선지 소름이 올라오는 그 목소리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지? 누가 온거야? 뻣뻣해진 목을 간신히 돌려 뒤를 보았다.

전신을 검은 로브로 감춘 남자였다. 금장이 둘러진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선명한 붉은 눈과 마주친 순간 온 몸의 혈액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뭐지? 저 남자는 대체 누구야?

"이래서야 기껏 온 보람이 없지않나."

발소리 없이 스르륵 벤치 앞까지 온 그 남자는 내 옆에, 스승님의 앞에서 멈춰섰다.

"당, 신은…… 누구죠?"

뭐하는 사람이길래 저런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거지.

몸을 낮춰 스승님을 살펴보던 검은 로브의 남자는 귀찮다는듯 조금 고개를 돌려 나를 슬쩍 보았다. 작게 '그 나이에 내 앞에서 말을 할 수 있는건가'같은 말을 중얼거렸는데, 말 그대로 혼잣말이었을 뿐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 내 얼굴을 힐끗 보았을때 조금 놀라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용의 마법사……?"

"프리드 아니거든요?!"

"흠?"

젠장 또 착각당했어! 망할 프리드!

"아아, 확실히 아니군."

"아셨으면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그 사람이랑 전 다른 사람이에요!"

[마스터. 좀 진정해.]

어떻게 매번 스승님과 관련된 사람을 만날때마다 착각당하냐고. 이젠 조건반사가 되버린 외침에 검은 로브의 남자는 그제서야 조금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살펴보았다. 어째서 그의 붉은 시선이 닿은 순간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몸으로 벗겨져 샅샅히 간파되는듯한 느낌이 드는걸까.

"비슷해. 하지만 분명하게 다르구나."

"당연, 하잖아요."

생판 남인데.

"그보다 당신은 누구죠? 또 8백년 전 사람인가요?"

"…… 말하지 않았는데도 잘 아는군."

"스승님과 관련된 사람은 대체로 과거의 사람이더라고요."

[생존 방법도 다양한 형태로 만나서 이젠 놀랍지도 않고.]

저주에 걸려 얼음속에 갇혀있다 깨어난 부류, 알 속에서 깨어났다는 부류, 8백년을 그냥 살아온 부류, 수 백년 살다가 봉인되고 다시 깨어난 부류…… 이외 기타등등. 8백년 전의 사람이란게 흔할리가 없는데 온갖 방법들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니 신기하지가 않다.

내 설명에 검은 로브의 남자는 엣, 같은 반응을 보였다. 뭔가 공포심이 줄어들었어.

"그리고 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절 프리드로 착각했고요."

"그랬나?"

[아까 마스터의 반응만 보면 알 수 있잖아.]

반쯤 히스테릭 레벨인거. 비슷하니까 어쩔 수 없다만. 용의 마법사와 생긴거나 오닉스 드래곤 마스터인거나 공통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것도 정도껏이지 만나는 사람마다 그러면 질려.

미르가 오닉스 드래곤인걸 한 번에 알아본 것까지 보니 확실히 이 남자는 스승님과 관련된 8백년전 사람이 맞는거같다. 나는 애써 용기를 내 물었다.

"그보다 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당신은 누구에요?"

"내가 누구냐…… 라니, 그런 질문을 받을줄이야."

[중2 스러운 말은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줘. 처음보는 사람을 우리가 알리 없잖아.]

야 미르 너 이자식. 기껏 좀 풀린 분위기가 급속 냉각됨과 동시에 불편한 표정을 짓는 그의 발아래로 그림자가 요동치다 뭔가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감지한듯 작게 신음하는 스승님의 소리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와 오래된 인연이라 해두지."

"…… 죄송하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부족한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스승님과 관련된 인연은 대부분 8백년 전이라서 오래되지 않은게 드물다고요."

"하."

마스터나 오닉스 드래곤이나 아주 그냥 똑같군.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한 남자는 다시 스승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정정하지. 그와 '가장' 오래된 인연이다. 그가 영웅이라 불리기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으니까."

"그게 정말인가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스승님과 관련된 인연들은 대부분 영웅이라 불릴때 만들어진 것들이고, 그 이전에 대한건 단편적으로 데몬 씨와 페어리 퀸에게 들은게 전부였으니까. 이 사람은 또 어떤 방식으로 8백년을 살아온걸까?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런 상태라니, 온 보람이 없어졌어."

"깨우실 생각 아니었나요?"

"그다지. 그냥 오늘이 날이 아니었던 것이겠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몸을 돌리고는 점차 어둠속에 녹아들어갔다.

"저, 저기! 잠깐만요!"

"…… 무어냐."

나 무슨 생각으로 저 사람을 붙잡은걸까. 스스로도 의아한 행동에 답을 찾기도 전에 진짜로 멈춰선 검은 로브의 남자가 나를 보았다.

"그게, 그러니까, 잠깐만 그─"

"아무 이유도 없이 불렀나."

"아니아니, 그건 아니고……!"

뭔가 괜찮은 핑곗거리를 대야 화를 안낼텐데! 저 사람이 진짜 화를 내면 엄청난 일이 생길거라고 직감이 요란하게 울렸다. 뭘 말해야 하나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가 시야에 들어온 것을 파악한 순간, 내 입이 멋대로 내뱉어버렸다.

"─스승님을 옮기는걸 도와주세요!"

"…… 응?"

[마스터…….]

죄송합니다 스승님. 저런 무서운 친구(?)를 두고 저만 방치해둔 스승님 잘못이에요.

"눈이 내리는데 여기 계속 둘 수 없고, 이제 저녁먹으러 집에 가야하는데 간만에 편하게 주무시는 중이라 깨우기도 뭐해서, 그, 도와주실 수 있나요?"

검은 로브의 남자는 벙찐 얼굴로 한참을 침묵했다. 얘가 뭐라는걸까, 라는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 그 표정에 나는 제발 거절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어린애 헛소리로 취급하고 그냥 가주세요.

몇 시간 같았던 몇 분이 흐른 뒤 남자의 입이 열렸다.

"알았다."

"네. 역시 안되는─?"

"도와주지."

누군가의 도움이 이렇게 싫었던적이 있을까.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에, 그게……."

[깨지않게 살살 들면 돼.]

미르의 말에 검은 로브의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며 스승님을 업으려고 했다. '그러고보니 예전엔 이 반대였는데'같은 말을 중얼거린 남자가 그대로 일어나려는 순간─

철푸덕!

[당신 뭐하는 거야?]

"…… 갑자기 뭐하시는거에요?"

"잊, 고 있었, 다."

스승님을 업고 한 걸음을 떼기는 커녕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거하게 앞으로 넘어진 남자는 그대로 스승님에게 깔린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 인간, 100킬로가 넘었어……!"

아.

그건 어쩌면 굉장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스승님의 키는 180이 넘는 상당한 장신에 속했고, 그 정도 키의 성인 남성은 꽤 무겁다. 거기다 전사들은 단련시킨 근육때문에 같은 키의 일반인보다 무거운데 내가 아는한 최고 수준의 전사이자 골드비치에서 보았듯이 꽉꽉 압축된 근육을 가지고 있는 스승님은 100킬로를 거뜬히 넘기는 것이다.

고로 분위기가 어떻든 마법사로 보이는 - 그러니까 평균적으로 허약한 - 저 남자가 혼자서 스승님을 드는건,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다.

"도와드릴까요?"

"……."

"알겠습니다. 등 좀 내줘 미르."

[저 사람 무거워서 짊어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어떻게 들어? 스승님은 항마력이 높아서 마법도 잘 안먹힌다고."

미르는 투덜거리다 결국 몸을 낮춰주었고, 나는 그 위에 스승님을 올리는 일을 꽤 시간을 들여서 해야했다. 그러는사이 검은 로브의 남자는 비틀비틀 일어났으며 그동안 스승님은 기적적으로 깨어나지 않았다. 저 남자가 쿠션 역할을 아주 잘해주었던 모양이다.

[켁. 역시 무거워 이 사람.]

"참아 미르. 집에 가는대로 돼지 3마리 줄게."

[그 말 꼭 약속하는거다 마스터!]

"약속할테니까 떨어뜨리지않게 조심해."

마법의 밧줄로 어찌어찌 미르의 등에 고정시키는동안 검은 로브의 남자는 툭툭 흙을 털어낸뒤 몸을 돌리고 있었다.

"가시게요?"

"그래."

"스승님께는 당신이 왔다갔다고 전해드릴게요."

"그럴필요 없다."

"왜요? 나중에 다시 오시게요?"

"아니."

후드를 고쳐 쓴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오늘 만나지 못했으니 다음은 없어."

"그럼……! 영영 못 만나는거면 이대로 가선 안되는거잖아요?!"

"아니. 분명 반드시 다시 만날거다."

단지 오늘과 같은 형태는 아닐뿐. 남자의 알 수 없는 말에서 한 가닥 유감스러운 기색이 읽힌건 내 착각일까. 저 사람이 바란 것은 단순히 스승님을 다시 만나는게 아니라 만난 뒤에 할 무언가였던 것 같다.

"저기 그러면, 그…… 오늘 못한걸 다음에 만났을때 하면 되잖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다음은 없다. 그런 기회따위 절대 오지 않아."

"왜 절대라는 말까지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안된다면 그 기회가 생기도록 기도라도 해보세요. 이대로 가는건 당신도 싫은거 아닌가요?"

"─기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생뚱맞은걸 넘어 기가찬다는 그 표정에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싶었다.

"그,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신께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을까해서."

"이 세계의 신이란 놈들은 그런걸 해줄만큼 성격좋은 놈들이 아닌─ 아, 하나는 아닌가."

[당신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래도 한 명은 신답게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긴 하니까……."

마침 얼음이랑 관련이 있긴 하고. 영문 모를 말들을 중얼중얼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어쩌면 저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기도할래요?"

"…… 아니 됐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나는 그런걸 할 자격도 뭣도 없으니까."

신앙심같은건 옛저녁에 증발해버린지 오래거든. 그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농담인가 싶었는데 어딘가 퍼석퍼석한 눈이 진짜같았다.

"그럼 제가 대신 해드릴까요?"

"하아…… 마음대로 해라."

[이젠 다른 사람 기도까지 대신 해주는거야 마스터?]

"뭐 어때."

그렇게 나쁜 바램도 아닌것 같은데. 나는 손을 모으고, 트리 꼭대기에 장식된 금빛 별을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이 오늘 여기 온 목적이 다음에라도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자! 이제 기도했으니까 이루질거에─요?"

[마스터. 그 사람 벌써 갔어.]

무어야 이게에~? 말 좀 하고 가란 말이야! 눈 감았던 잠깐 사이에 휙 가버리다니.

[빨리 집이나 가자. 나 배고파.]

"엄청 허무하네. 결국 그 사람은 뭐였던거야."

[모르지. 나중에 이 사람 깨어나면 그때 물어볼까?]

"그럴…… 아니지. 왔다는거 말하지 말라고 했고, 어차피 반드시 다시 만난다니까 그때 물어보자."

오래된 인연이라니까 스승님의 친구가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정작 올린건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지만 아무렴 어때.

오타나 개연성은 집어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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