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ide out.
리프레. 먼 옛날에는 메이플 월드 최대의 도시였으나, 현재는 드래곤과 친분이 있어 혼테일과 용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하프링만이 사는 이 마을은 군단장의 준동 이후부터 크게 몸살을 앓고 있었다.
"피타스 님!!"
"뭔가? 이번엔 어느 몬스터의 습격이지?"
"몬스터가 아니라 그게 나타났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애매모호한 대명사였지만 피타스는 부하가 말한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는 빠르게 대검을 챙겨듬과 동시에 대책본부 밖으로 뛰쳐나와 뒤따르는 부하와 대화를 이었다.
"위치는?"
"리프레에서 조금 벗어난 남서쪽, 혼테일 영역 방향입니다."
"곤란하게 됐군."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스틱 게이트 출몰 사건에서 여러 지역들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을 말하자면 단연 리프레라 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본래 미나르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용족으로 뭉뚱그려 불리는 몬스터들의 강함은 오시리아 대륙 평균을 크게 웃돌고 있으니.
최초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다른 마을들은 당황하긴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상대는 할 수 있는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리프레의 경우 변이된 마뇽과 그리폰이 동시에 나타나 큰 피해를 입었고, 연합의 지원으로 바로 복구 작업에 들어갔지만 그 뒤로 나타나는 몬스터들마저 하나같이 강력하기 짝에 없어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 친위대가 좀 약하게 나올수 있는 신속 처리도 힘든 상황이었다.
때문에 피타스를 포함해 리프레에 파견된 노바족들과 시그너스 기사단은 미스틱 게이트의 출현을 놓치지 않기 위해 24시간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이는 조금씩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혼테일의 영역에 남은 용족중 가장 강력한 놈이 누구지?"
"레비아탄입니다."
"그럼 이번엔 그놈일 확률이 높겠군. 시그너스 기사단에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출동해라고 전했나?"
"예. 지금쯤이면 거기도 출발했을겁니다."
"이번엔 늦지 않아야 하는데……."
마뇽과 그리폰 이후 출몰한 변이 몬스터, 켄타우로스 킹과 호브 라이더의 경우 앞서 출몰한 것들에 비하면 약했지만 동족 몬스터를 떼로 조종해서 습격해와 제때 드래곤이 지원해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리프레가 쓸려갈 뻔 했으며, 그 뒤에 나타난 변이된 하프가 하늘에서 공격을 쏟아부을땐 많은 노바족들이 변신 마법을 풀고 제 날개를 펼쳐 망할 새를 잡아족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야 했다.
하다못해 대포라도 있었으면 상황이 괜찮았을텐데 그마저도 없으니. 피타스가 그란디스와는 달리 한참 뒤쳐진 메이플 월드의 과학 기술에 한탄하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미스틱 게이트가 나타난 혼테일의 경계 부근에 다다랐다. 먼저 도착한 시그너스 기사단원들은 게이트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성중이었고, 사이사이에 섞인 노바족들도 빠르게 구속진을 짜올리고 있었다.
"대장님! 피타스 님이 오셨습니다!"
"게이트는 어떤 상태지."
"곧 활동을 시작할겁니다."
기사들을 지휘중이던 리프레에 파견된 플레임 위자드의 대장은 피타스를 발견하고 빠르게 상황보고를 해주었다.
"이곳에 출현한지는 얼마나 됐는가."
"20분 가량 됐습니다."
"근방의 몬스터는?"
"현재 300m까지 정리 완료했습니다."
"좀 아슬아슬하군."
레비아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이될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 습격들을 비추어볼때 확실한건 이전보다 강해질거라는 것. 그리고 기존에 없던 힘이 생겼을거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능력들 중 가장 성가신게 동족 몬스터 다수를 지배하는 힘이기에 눈앞의 플레임 위자드 대장도 주위의 몬스터를 미리 토벌해라는 지시를 내렸을테지만 이번엔 또 어떨지 모른다.
그렇게 피타스는 기사들과 모험자들에게 포위망을 좀 더 촘촘하게 만들라고 지시하던 중 여기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섞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 당신이 왜?"
"쉿, 쉿! 아는 척 하지마."
폭이 넓은 붉은 목도리를 요령껏 감아 후드처럼 만들어 얼굴의 반이상을 가렸지만 피타스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자신의 종족을 구원해준 세 인간들 중 한 명을.
군단장 프라이쉬츠의 동향을 추적해야하는 당신이 왜 여기 있냐고 물으려던 피타스는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면 안된다는 걸 떠올리며 어느정도 거리를 벌리고 텔레파시 마법을 썼다.
[뭣때문에 당신이 여기 있는겁니까.]
"휘말렸어. 놈이 갑자기 신전에서 내려와 어딘가로 이동해서 쫓고 있었는데, 포위망 짜던 연합 애들이 날 리프레 모험가로 착각해서 여기 세우더라고."
[중간에 도망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려던 중에 널 만난거거든."
목도리에 가려졌지만 그는 세피로트가 몹시 난감한 표정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후…… 곧 전투가 벌어질테니 도중에 슬쩍 빠져나가시죠.]
"그래야겠어."
냐하, 미안해 피타스. 혼자 중얼거리는 그를 이상하게 보지않을까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사람들은 전투태세를 점검하는데 바빠 신경쓰지 않았다.
"구조물이 가동합니다!"
플레임 위자드 대장의 외침에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마침내 구조물에서 녹색 불꽃이 치솟으며 짙은 어둠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들과 모험가, 크로스 헌터들까지 모두 무기를 들었고, 노바족들은 섬멸 마법을 준비했다. 레비아탄은 책에도 나오는 네임드 몬스터. 유명한만큼 공략법도 확실하다. 만약 레비아탄이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인원이면 화력으로 밀어버릴 수도 있다.
마법사들은 앞서 준비했던 구속진을 펼쳤다. 땅에서 솟구친 빛의 사슬이 어둠의 안개를 찢으며 점차 잡혀가는 형체를 휘감았고, 기사들은 각자의 무기에 마력을 불어넣어 스킬을 일점사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 순간.
쿠우웅─.
'발소리?'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묵직한 울림에 피타스는 무의식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레비아탄은 서펜트 드래곤. 발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나오고 있는건.
"뭐야 저거……?"
누군가 벙찐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때였으면 넋놓고 있지 말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이번만큼은 오히려 칭찬해주고 싶었다. 저것을 보고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바위가 연상되는 거친 흑갈색 비늘에 뒤덮힌 거체, 길고 굵은 꼬리, 음산한 느낌의 피막의 날개 한 쌍이 흑안개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협적인 뿔들을 자랑하는 세 개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도망,"
[KRARARARARARA──!!]
피타스의 다급한 외침은 직후 세 머리가 동시에 내지르는 포효에 바람 앞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소리의 영역을 넘어 충격파로 화한 용의 포효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뼛속까지 파고들어 몸을 마비시켰고, 그들의 비명마저 잡아먹고 구속은 커녕 장식만도 못한 빛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냈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혼테일의 영역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는 당연히 영역의 주인인 혼테일인 것을. 미스틱 게이트로 나타나는 변이 몬스터에 드래곤은 예외일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결과가 눈앞에 나타났다.
흉흉하게 빛나는 세 쌍의 핏빛 눈이 발 아래의 이들을 벌레보듯 흘끗 내려다보더니 바윗덩이같은 거체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름드리나무가 연상될만큼 굵고 그보다 더 단단할 혼테일의 꼬리가 거치적거리는 벌레들을 쓸어내기위해 철퇴처럼 휘둘러졌다.
당장 도망치라던가 막아내라는 명령을 내려야하는 피타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의 포효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공황상태가 된 이들에게 명령이 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정신을 추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테일의 일격에 허무하게 쓸려갈 것 같았던 이들의 앞에─ 한 사람이 뛰어들며 사람의 몸과 용의 꼬리가 부딪혔다고 믿기지 않을만큼 큰 타격음이 울렸다.
"아…… 더럽게 아프네."
검녹색 기류에 휘감긴 팔로 용의 꼬리를 막아낸 남자는 붉은 머플러 자락을 부들부들 떨며 힘빠진 목소리로 신음했다. 난 물리 방어는 좀 구리단 말이지. 차라리 브레스를 날려. 그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데. 가슴 속에서 피어난 경이를 빠르게 증발시키는 그의 중얼거림에 피타스는 상황이 눈을 몇 번 끔뻑이다 정신을 차렸다.
"잠깐, 당신이 왜,"
"정신 차렸으면 주위를 둘러봐. 지금 상황이 굉장히 안좋거든."
어째선지 작게 속삭이듯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피타스는 일단 주위를 흝어보았다가 크게 소리칠뻔했다.
동족들의 환영, 변신 마법이 대부분 풀려있는게 있잖아?!
'뭐, 뭐가 어떻게 된거지?'
이어지는 세피로트와 혼테일의 격돌에 그는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용의 포효는 주변 생명체의 심신에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마나 브레이크(Mana brake)를 일으켜 마법 자체를 부숴버린다. 인위적인 마력 흐름을 다 끊어버리는 터라 디스펠과는 달리 도구에 걸린 마법에까지 영향을 줘서 만약 드래곤을 마주친다면 주의요망하라고 신신당부 받았건만……!
그나마 다행인건 용의 포효에서 정신을 차린 이가 아직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혼테일과 싸우기 시작한 세피로트에게 시선이 모조리 쏠려 눈치챈 이들은 당장 없어보인다는 거지만…… 시간을 더 끌면 위험하다.
[모두 정신차려라! 변신 마법이 풀려버렸으니 다시 사용하고!]
[대장님, 아직 마나 브레이크가 남아있어서 마법 발동이 힘듭니다!]
[그럼 하다못해 투구나 후드라도 꽉 써!!]
다행히 모두들 장비는 빠짐없이 챙겨입은 상태니 어떻게든 감출수는 있다.
"뒤로 물러난다! 혼테일의 주변에서 최소 50m이상 떨어져라!"
"피타스님?!"
"아직 정신 못 차린 놈들은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짊어져라! 저자가 싸우는데 우리가 방해되면 안된다!"
앞서 포위망을 만드느라 주변에 산개한 이들때문에 세피로트는 괜히 혼테일에게 맞아가며 사람들에게 갈 피해를 막아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맞는 것도 아니고 주먹으로 맞받아치는 것이지만 불필요한 대미지가 누적되고 있는건 사실이다.
공황 상태에서 빠져나온 이들의 대부분이 노바족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의 명령에 병사들은 아직도 공황 상태인 다른 이들을 붙잡아 질서정연하게 싸움이 일어나는 범위에서 빠지기 시작했고, 세피로트는 힐끗힐끗 뒤를 보며 사람들이 물러가며 서서히 생기는 빈 공간을 확인했다.
[어딜 한눈파는 거냐!]
"냐하, 일단은 거리를 파악해둬야 해서 말이지."
[의미없는 짓을.]
그는 혼테일이 어둠에 변질되었음에도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사람들도 어느정도 떨어졌고, 더 이상 받아치는 것도 슬슬 짜증난다. 저를 짓밟으려는 혼테일의 발을 유연하게 피한 세피로트는 낮게 한숨울 내쉬며 양 팔에 휘감은 검녹색 기류가 없앴다. 대신 백금빛 안개가 그의 사지에 서렸다.
"야 있잖아…… 니놈때문에 나 또 한소리 듣게 생겼거든?"
프라이쉬츠 추적이 완전히 물건너 가버렸다. 시간의 신전에 내내 틀어박혀있던 놈이 또다시 움직인건 분명 무언가 일을 벌이기 위함일텐데, 막기는 커녕 알지도 못하게 되버렸으니.
"그러니까 이제 죽어주라."
웃음기따위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청록색 눈이 세 머리의 용을 담았다.
그렇게 느닷없이 리프레에 닥친 재앙은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세피로트에 의해 어떻게든 정리되어 갔으나, 이러한 일이 발생한 곳은 유감스럽게도 리프레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설산의 마을 엘나스에서도.
"뭐가 어떻게 된거야?!"
미스틱 게이트를 철거하기 위해 출동한 크로스 헌터들과 사냥꾼들은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오는 몬스터의 물결에 질겁했다.
"진형을 유지해라! 마법사들은 화력을 올려 골렘들을 격파, 전사들은 짐승형 몬스터를 노려라!"
"카탈리온 대장님, 지금 갑자기 땅에서 괴식물들이…… 흐억!"
"폭스!!"
재빨리 대검을 휘둘러 땅에서 솟구친 식물줄기를 잘라내 폭스 병장을 구해낸 카탈리온은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이어서 검을 휘둘러야 했다.
지금까지 하나의 강력한 변이 몬스터만을 내뱉던 미스틱 게이트가 이전과 다른 활동을 보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다른 활동이 아니라 본래 있던 기능중 하나가 사용된 것 뿐이지만 그 규모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도를 뛰어넘었다.
'사자왕의 성과 이어지다니!'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검호의 경험담을 들어봤기에 군단장 사자왕의 군단에 대해 그럭저럭 알고 있었다. 성벽의 돌로 이루어진 골렘과 정예화 된 짐승형 몬스터. 거기다 언급되지 않았던 식물형 몬스터 다수는 어디서 나타난건지.
미스틱 게이트의 본래 기능은 게이트란 이름 그대로 간이 포탈이다. 에레브에서 노바족들이 빠져나올때도 간이 포탈로 사용했고, 변이 몬스터와 어둠을 방출시키는 것도 포탈로서의 기능을 조금 변형시킨거라고 카탈리온은 일찍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포탈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역시.
"왜 이제서야……!"
포탈이란 것이 발명된 이래 그것의 전통적인 사용법은 적의 본진에 우리의 병력을 이동시켜 기습 공격하는거였고, 지금 저들이 쓰는 방식도 딱 그랬다. 아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본진과 이쪽의 본진을 잇는 직통 문을 열어버렸다!
아직 군단장 사자왕까지 나타나진 않았지만 계속 포탈이 열려있으면 언제든 넘어올 수 있기에 빨리 미스틱 게이트를 멈춰야 한다.
"티로! 지휘 개체는 어디있는거냐?!"
[지금 찾고 있지만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잘 안보입니다! 심지어 하늘에까지 몬스터가, (끼엑!)습격 중입니다!]
정찰병의 암울한 대답에 카탈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몬스터가 다양하고 많다면 - 심지어 군단의 형태로 정예화되어 있다면 당연히 지휘관에 해당하는 개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처리하면 어떻게든 상황이 나아질텐데 그게 안되고 있으니. 돌진해오는 시뻘건 순록을 무기째로 두동강내며 그는 외쳤다.
"로베이라, 페드로! 화력을 올려서 주변 공간을 확보해라! 레네 너는 둘을 지원하고!"
""알겠습니다!""
마법사, 해적 전직관은 그의 지시에 따라 각자 지팡이와 총에 마력을 끌어올려 달려드는 수많은 몬스터에게 불벼락과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그 속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몬스터도 직후 날아오는 화살에 머리를 꿰뚫렸고, 그렇게 어느정도 확보된 시야를 카탈리온은 빠르게 살펴보았다.
바위덩어리같은 같은 등딱지를 가진 메이스를 든 몬스터가 눈에 들어온건 그때였다. 다른 놈들에 비해 확연하게 큰 덩치와 힘. 지휘 개체 중 하나라는 판단이 내려짐과 동시에 그는 땅을 박차고 도약해 거북이형 몬스터의 등딱지와 투구 사이의 틈에 대검을 깊숙히 찔러넣었다.
우드득! 목뼈 부서지는 소리가 검을 타고 올라왔다.
"크워어어억!!"
"반항하지 말고, 좀 죽으란 말이다!"
어떻게 되먹은 생명력인지 목에 칼이 박혔는데도 괴성을 지르며 날뛰는 지휘관 몬스터의 머리를 힘껏 걷어찬 카탈리온은 그대로 양팔에 힘을 줘 뜯어내다시피 목을 잘랐다.
뒤로 넘어가는 시체에서 뛰어내린 그는 약간 휘청이며 땅에 착지하자마자 대검을 휘둘러 몬스터의 피와 살점을 털어냈다.
"카, 카탈리온 대장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다른 지휘 개체를 찾아! 이놈들은 군단장의 병사들이다. 여태까지 상대했던 놈들과 차원이 다르니 방심하지 마라!"
그렇게 말한 카탈리온은 바로 다음 지휘 개체를 찾기위해 바삐 눈을 굴렸다. 순식간에 지휘관이 처치되는걸 본 몬스터들은 그가 상당한 강자라는 사실을 알고 주춤주춤 몸을 뒤로 빼려는 모양새를 취했고, 그 사이 카탈리온은 숨을 고르다가 어떤 강렬한 냄새를 맡았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짙은 장미향. 피와 쇠, 시체의 악취때문에 코가 마비되는 지경까지 간 적은 질리게 많았지만 장미향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건 처음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냄새가 정상일리 없다.
향기의 근원지를 찾는 건 금방이었다. 전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금갈색 머리카락이 길게 굽어치는 현숙한 인상의 미부인이 장미넝쿨에 휘감긴 골렘들을 이끌고 우아하게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향기때문에 자꾸 흐려지려는 시야를 폐부 깊숙히 찬공기를 들이마셔서 어떻게든 다잡은 그는 검을 겨누었다.
"인간일리는 없겠지. 몬스터."
미부인은 대답 대신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다 생긋 웃으며 손을 뻗었고, 그 순간 여인의 등 뒤에서 수많은 가시줄기들이 솟구치며 그를 찢어버릴 기세로 쏘아졌다.
[대장님! 그 여자가 식물형 몬스터의 지휘 개체입니다!]
"나도 보면 알아!"
대검에 불꽃을 둘러 줄기들을 태워 끊은 카탈리온은 장미꽃과 함께 미부인을 재로 만들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막의 도시국가 아리안트─ 에서 꽤 멀리 떨어진 어느 상공에선.
"…… 흠."
"자, 어때? 저 정도면 충분하지?"
자신만만한 표정의 힐라를 뒤로 하고 프라이쉬츠는 에임이 떠오른 연홍색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이번에도 변이 몬스터가 나올거라 예상하고 준비하던 아리안트 병사들과 시그너스 기사단, 모험가들은 미스틱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스켈레톤에 크게 우왕좌왕하다 휩쓸리는 광경이 그의 망막에 맺혔다.
"대충은 되겠네."
"거봐. 내가 군단까지 안써도 된다 했잖아."
"숫자 모으기 힘들어서 근처 피라미드 턴거 아니었나."
시력향상 버프를 해제한 프라이쉬츠가 콧웃음치자 힐라는 팔짱을 꼈다.
"그럼 내 병사들을 저 태양의 결계에 꼴아박으라고? 그건 무의미한 낭비야."
"어차피 뼈다귀 인형에 불과한 것을 뭘 아끼는거냐."
"언데드를 부리는데 필요한건 내 마력이야. 거기다 저 결계에 불타면 다시 일으키기도 힘들다고."
"그건 니가 나이를 먹어서 그렇겠지."
"뭐야─!?"
직설을 넘어 독설에 가까운 막말에 힐라의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확 솟구쳤지만 프라이쉬츠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결계가 거치적거리면 그냥 부술 것이지, 그게 뭐 어렵다고."
"내가 당신처럼 무식한 화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아!? 그렇게 답답하면 대신 부숴주든가!"
"내가 왜. 이쪽 일이 더 중요한데 거기에 힘을 써야하는 이유따위 없다."
"그럼 불평하지 말라고!"
한 번 더 나이 어쩌고 운운하면 108개의 저주로 그 몸뚱아리를 완전히 썩혀버리겠다고 씩씩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프라이쉬츠는 느리게 허리춤의 쌍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만 투덜거리고 보호막이나 펼쳐라."
"…… 시작하는거야?"
"그러려고 왔잖아."
오시리아 대륙을 가장 넓게 차지하는 세 지역을 당분간 외부 일에 신경도 못 쓸만큼 난장판으로 만들어놨으니 이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8백여년 전, 마지막까지 검은 마법사에게 대항했으나 결국 그의 손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멸망한 왕국의 터. 아무것도 남지않고 불길한 흑안개만이 떠도는 죽음의 땅이 그들의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힐라가 보호막을 펼치는 걸 본 프라이쉬츠는 지상을 향해 불의 비를 뿌렸다.
***
검호side.
갑자기 미친듯이 쏟아지는 전언과 긴급 보고의 불협화음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벽에다 내 머리를 박아 깨고 싶은걸지도.
"성투사님과 변이된 혼테일이 리프레 남서쪽에서 교전중! 마을까지 피해가 안가도록 노력하고 계시지만 드래곤이 너무 거대해서 소용없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옮기도록 유도할 수 없습니까?"
"혼테일이 하늘로 도망치려는걸 성투사님이 강제로 땅에 붙들고 있는거라 빈틈을 보였다간 그대로 폭격으로 이어집니다! 거기다 성투사님은 공중전에 취약해요!"
정말, 이게 대체.
"티로의 긴급 보고입니다! 엘나스 마을 초입에서 사자왕의 군대 출현! 현재 카탈리온과 엘나스 전직관, 모험가들이 교전중이지만 위태롭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직까지 군단장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정예병들이라 고전하고 있으며, 티로 본인은 하늘에서 그레이 벌처와 교전중이라고 합니다."
"지금 카탈리온은 사자왕의 군단의 한 지휘 개체와 싸우는 중이라는데 그 몬스터의 모습을 보냈습니다."
마법의 빛이 그려내는 몬스터는 언젠가 지나가듯이 보았던 사람과 몹시 비슷했다. 새빨간 장미를 드레스처럼 휘감아 굉장히 화려했지만 반대로 핏기따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의 여인은…… 이피아 왕비님?
"급보입니다! 미스틱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온 스켈레톤에 의해 아리안트가……!"
"언데드가 태양의 결계를 뚫었다는 겁니까?"
"물량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당장 저지는 어찌어찌 하고 있다지만 굉장히 불안한 상태이고, 거기다 계속 알아보고 있지만 아리안트를 헤집고 있는 스켈레톤이 힐라의 군단이 아닌 것 같답니다!"
"그 마녀의 군단이 아니고서야 어디서 그 많은 언데드를─"
군단장들은 스스로의 군단뿐만 아니라 주위의 몬스터를 부릴 수 있었다. 아리안트 - 니할 사막에서 저들이 말한만큼의 언데드가 있는 곳은?
'네트의 피라미드.'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답에 헛웃음도 안나왔다. 이 예고없는 참사에 각 마을들이 어떻게 부서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화면들이 온 사방에 띄워져서, 어디를 봐도 심장이 쥐어짜이듯이 울렁거렸다.
"…… 이데아."
"뭡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중요한게 아니면 그냥 조용히 있으세요."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이나."
다급함으로 일그러져 있던 그녀의 표정이 내 말을 이해함과 동시에 서서히 경악의 색으로 차올랐다.
"잠, 깐만요, 당신 지금,"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기다리세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되면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번 일에 오버시어의 힘을 빌리는 건!"
"─그럼 언제 나설건데."
나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 곧장 날 붙잡을 것 같았던 그녀는 그 자리에 움찔, 멈춰섰다.
"얼마나 더 피해자가 생겨야 나설거냐 너는."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떨리는 눈과 더듬거리는 목소리. 또 그 버프가 멋대로 써진건지 아닌지 이젠 잘 모르겠다.
"내가 이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은 건 지금같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막거나, 그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못해 큰 피해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그 아이에게 약속을 받아낸거였고."
"허나……!"
"이걸로 해결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이마저도 안될 때 나서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고!!"
참상을 비추는 화면들로 가득한 통신실에 더 있을 수 없어 나는 곧장 몸을 돌려 그곳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다. 뒤에서 그녀가 무어라고 외치는 것도 같았지만 다급히 발을 뻗어 복도를 가로질렀고,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뛰고 있었다.
그때의 참사가 재현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설령 완벽하게 막지 못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사태를 줄이고 싶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던 하프링을 아직도 잊지 못한 이유는, 무릉에서 막 나오자마자 직접 싸우는 것만은 가능한 한 피하자고 생각했던 군단장과의 전투를 아무 망설임없이 했던 이유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스러져가선 안되었다고 가슴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이렇게 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으면서 되려 일으킨 축이 되버리다니.
일이 이 지경이 된 원흉 중 하나는 분명 나였다. 물론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프라이쉬츠가 독단적으로 나섰겠지만, 이번 일에 내가 내린 명령이 한 몫 거들었음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따위 없을 것이다.
생각이 끝에 다다르며 발이 멈춰선 곳은 몇 번 오지도 않았음에도 이 몸이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소 - 증오스러운 그년의 본체가 봉인된 곳의 입구였다.
"왔냐."
그 앞에 어린 아이의 형상을 한 생명의 오버시어가 있었다.
"…… 부탁이."
"말 안해도 안다."
슬슬 올거라고 예상했지만 진짜로 와버리다니. 작게 혀차는 소리가 따끔따끔하게 가슴을 찔렀다.
"놈들에게 피해를 입고있는 지역과 사람들을 복구시키는 것. 그게 니놈이 바라는거겠지."
"맞아."
"결국 넌 나한테 비는구나."
한심함으로 가득찬 아이의 눈에 내가 비쳤다.
"약속은 약속이니 들어주겠지만, 대가는 당연히 따를거다."
"대가는 저번에 약속했을 때─."
"그때 널 밟은건 감히 그딴 약속을 해달라고 지껄이는 니놈이 기분나빠서였어."
잠깐만, 그럼 저 애가 지금 말하고 있는 대가라는건?
"나는 니놈한테 뭔가를 받아가지 않을거다. 그냥 니가 치룰 뿐이야."
자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끝내 기적에 기대어야만 겨우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벌인 대가를.
"그래도 마지막까지 내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가망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자기 할 말만 하다 매몰차게 몸을 돌려 사라진 아이의 뒷모습에, 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껴야했다.
무언가…… 사건이 해결되기는 커녕 어딘가 악화될거라는 싸한 예감이 드는 이유는 왤까.
***
은월side.
마족 무리를 추적해 시계탑에 따라들어온지 며칠째. 나와 오닉스 드래곤은 시계탑 최하층까지 내려와 그들이 하고을 감시중이었다. 본래는 적당한 때에 저들을 붙잡아 무슨 꿍꿍이로 여기 기어들어온거냐고 추궁할 생각이었지만 저 무리에 루디브리엄을 간간히 습격중인 마족 군단의 군단장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알고 전투를 뒤로 미뤄야했다.
검은 마법사를 배신하고 새로이 들어온 마족 군단장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모른다는 이유도 있거니와, 대략적으로 측정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의 힘이 상상이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군단장을 포함한 마족 군단의 참모진에 해당할 마족들이 전부 여기 있는 셈이라 바깥의 마족들이 그 사이 루디브리엄을 공격할 일은 없다는건데 이게 정말 다행인지는 애매하다.
"저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나."
"이곳에 고여있는 시간의 힘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알겠는데 구체적으론 모르겠어."
뒤틀린 시간의 힘이 떠다니는 이곳에서 며칠째 은폐 마법을 쓰고 있으면서 지친 기색조차 안보이는 오닉스 드래곤은 황금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마족들을 주시했다.
"지금 저놈들은 여기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몬스터를 잡아 얻은 부산물을 이용해서 이 일대의 시간의 힘을 모으고 있는데…… 저걸 어디다 쓰려는건지."
"예상가는 바는 있나?"
"딱히. 저걸로 뭘 하려해도 파괴적인 쪽 외엔 불가능할텐데."
"그럼 그런 용도로 쓰려는거겠지."
드래곤은 다소 인상을 썼다.
"그렇게 안보이니까 하는 말이야. 저런 식으로 계속 시간의 힘을 모았다간 어디에 쓰기도 전에 더 못 버티고 부서질……."
째앵──!
말끝나기 무섭게 유리가 깨지는 듯한 맑은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족들도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고,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뒤로 피해!"
황급히 날개를 펼친 드래곤이 나를 제 등 뒤로 밀쳐냄과 동시에 부서진 시간의 힘이 일으킨 돌풍이 일대를 크게 할퀴었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블럭 바닥은 순식간에 썩은 것처럼 변색되었고, 사방에 널려있던 금고와 시계 더미들은 세월에 직격당한 양 풍화되어 모래처럼 흩날려 뒷목이 서늘해졌다. 만약 저것에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어떤 보호 마법을 썼는지 나와 드래곤이 있는 곳만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혹시 몰라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나?"
"난 문제없는데……."
어쩐지 불안하게 늘어진 말꼬리와 드래곤의 얼굴이 굉장히 굳어있어 역시 어디 다친건가 싶었으나 그게 아님을 금방 알았다.
시간의 힘이 일으킨 파괴에서 이곳만 멀쩡한 걸 저들이 못 볼 리 없었다.
"니놈들은 누구냐!!"
우리와는 달리 시간의 돌풍에 직격당해 꽤 부상을 입은 마족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무기를 빼들었다.
"미안해. 급하게 방어막을 치느라 은폐 마법은 아까 그 돌풍에 부서졌어."
"됐다. 그보다 여기서 도망치는건 가능하나?"
"시계탑 중층이면 몰라도 최하층에선 텔레포트를 사실상 못 써."
"곤란하게 됐군."
어차피 싸우게 될거였지만 깔끔하게 끝나긴 그른 것 같다. 부상이 심함에도 마족들은 전투 태세를 갖추고 서서히 다가왔고, 유일하게 멀쩡한 마족 군단장은 우리를 보고도 팔짱을 낀 채 뒤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건방지네. 대장이란 놈이 혼자 뒷구경이나 하고."
드래곤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족 군단장을 쓱 보더니 눈부신 빛의 마법진을 펼쳤다.
군단장의 등 뒤에.
"……?!"
후드를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소 당황한 군단장은 투쾅─! 포격음과 함께 마법진에서 발사된 빛기둥을 재빨리 몸을 던져 피했고, 이어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줄줄이 생성된 빛의 포문을 향해 자흑색 검격을 날렸다.
"늦어!"
그러나 부서진 마법진보다 새로 만들어지는 마법진이 더 많았다. 사방(四方)을 넘어 팔방(八方)에서 그를 향해 조준된 마법진만 물경 수십.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와 위력의 마법에 우리를 조여오던 마족들은 드래곤을 처치하기 위해 급히 달려들었으나, 나는 저 군단장처럼 손놓고 구경할 마음따위 없었다.
저들이 모두 전사였으면 좀 곤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군단장이 시간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 데려온 마족들의 구성원 대부분 마법사였으며, 심지어 지금은 부상자였다. 그래도 마족이라고 마법사답지않게 신체능력은 좋았지만 이 정도쯤은 가뿐했다.
내려쳐지는 무기를 철조로 낚아채 빼앗고, 정령들을 이용해 포박, 제압하는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쪽은 끝났다. 당신은 어떻─"
"야 멍청아!"
갑자기 드래곤의 꼬리가 내 허리를 휘감더니 날 멀찍히 집어던졌다. 느닷없이 붕 뜬 몸의 균형을 잡으려는 찰나에 좀 전에 내가 있던 자리로 무언가가 유성처럼 날아와 쾅! 내리꽂혔다.
탁한 자줏빛이 일렁이는 톱같은 날을 가진 불길한 형상의 대검.
"─감히 누구 부하를 건드리는거냐."
그 많은 빛기둥의 포격속에서 마족 군단장이 제 무기를 집어던져 정확히 나를 노렸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얼마나 강한거지 저놈은. 잘 보니 그 많은 마법이 저놈을 노렸었는데 별다른 상처도 없었다. 옷이 좀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실질적인 데미지는…….
"잠깐만, 너는?"
싸우다가 후드가 벗겨져 마족 군단장의 얼굴을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놀라운 회피 능력을 보인 저자가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애꾸라는 사실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놀란건 그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거였다.
진한 와인색 머리와 눈,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타인을 압박하는 군단을 이끄는 자 특유의 카리스마가 둘러진 무표정.
"데미안?"
드래곤의 목소리가 황망하게 울렸다. 저자가 누군지, 아니 이름을 알고 있었나? 어떻게? 설명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드래곤은 공세를 뚝 멈추고 굉장히 당혹스러운 얼굴로 재차 물었다.
"데미안 너 맞아?"
"……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거지."
손을 뻗어 검을 회수한 마족 군단장, 데미안이라 불린 청년이 드래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왜 니가 군단장이 되어있는거야?"
"니놈은 누구냐."
"마, 마스터가 어쩌면 마족 군단장은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그게 너라서 그런 말을 한거였어? 하지만 넌……!"
"헛소리 하지말고 대답해라 드래곤!"
참다못한 그가 검을 휘둘러 참격을 날렸다. 그러나 그 일격은 내가 황급히 정령들을 소환해 막아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드래곤이 친 푸른 방어막에 막혔다.
순간적으로 펼친거라 엉성했는지 그 한 방에 방어막은 바로 깨져 파편으로 흩어졌지만 어쨌든 드래곤은 무사했다.
"니가 어째서 이런 힘을……."
"꽤 강한 놈인가. 뭐, 상관없다."
이참에 드래곤 하나 지배해서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에 동요의 빛만을 띄고 있던 드래곤의 황금안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크게 숨을 들이키는게 보였다. 잠깐만 이거 설마.
"너, 니가 군단장이 되면 안되잖아─!!"
폭발하듯이 터져나온 용의 포효에 바람의 정령으로 상당부분 막았음에도 온 몸이 저려왔다. 거기다 드래곤이 포효와 함께 본체로 되돌아가버려 시야가 온통 그의 새카만 거체로 들어차버렸다.
[어떻게 군단장이 될 수 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곳에 간거냐고!]
마비된 몸을 어찌어찌 움직여 드래곤의 머리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대체 이 오닉스 드래곤이랑 새로 영입되었다는 데미안이라는 마족 군단장은 무슨 사이인거지? 거기다 이 데미안이란 놈은 왜 그 자를 닮은거고?
"오닉스 드래곤……? 혹시, 니놈은 그때 그?"
[왜 니 어머니를 죽인 것들과 같은 족속이 되어 있는거야?! 그래서는 안되잖아!]
포효에 직격당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쩍 굳어버린 마족 청년을 매섭게 노려본 드래곤은 '설명은 나중에 천천히 들어주겠다'며 상당히 복잡해보이는 마법진을 펼쳐 그를 붙잡으려 했다.
갑자기 저 위에서 밀어닥친 청록빛의 물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보기만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청록의 빛이 갑작스럽게,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위해를 끼치지 않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의 파도가 지나가자 아까 전까지 드래곤의 마법 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최하층 일대는 모조리 복구되었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전투로 쌓인 약간의 피로가 싹 사라졌다.
이 힘은, 아니 그보다 이런게 가능한 존재는 설마.
[마스터? 어째서 지금 이걸?]
"…… 생명의 힘?"
젠장. 청록빛의 물결이 회복시킨건 우리뿐만이 아닌건가. 아까 제압했던 마족들이 신음하며 하나 둘 일어나는게 보였다. 마족 군단장도 재빨리 저를 묶으려는 마법진을 부수고 제 부하들에게 뛰어갔다.
"당장 여기서 철수한다!"
"아, 알겠습니다!"
[거기서! 어딜 도망치는거야!]
급한 마음에 드래곤이 마법을 구상하지도 않고 흉기와 같은 팔을 뻗은 순간, 마족 무리들의 사이로 기괴한 식물같은 것이 자라나 그들을 집어삼켰다.
썩을 미스틱 게이트.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노잼이네요. 기다리신 분들, 죄송합니다.
사실 설 연휴쯤에 올리려고 했는데 장학금을 포함해 이런저런 문제가 좀 길게 이어져서 늦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편엔 에반이 잠깐 나오려나.
@제라나 - 이렇게 떡밥을 뿌려야 다음 편을 기다리며 선삭 안하죠.
@친치쿠리 - 검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라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나 시간을 기점으로 변했는가를 묻는 건가요? 제대로 알려주시면 추가 수정으로 답해드리겠습니다.
@육합 - 메이플 월드요. 버서커 스킬의 로망은 2차 창작에만 있습니다.
@socool2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리연찬 - 사실 이데아는 딱히 생각을 안했는데 쓰다보니 비중이 커진 케이스입니다. 히로인 가능성 처음부터 없어요. 여자사람친구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늪코아 - 다시 하세요!
@류동지 - 자주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번 챕터는 반드시 잘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Sisre - 프라이쉬츠가 마을 한복판에서 쌍권총 난사해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것도 생각했지만 이놈 성격에 그런 낭비스러운 짓을 할 것 같지 않은고로.
@패러디좋아 - 간단해요. 노바족의 역량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태.
@찍뉴 - 전쟁 트라우마가 들쑤셔진거죠. 옛날에 군단장들에게 사람들이 허무하게 쓸려갔던 때가 오버랩된거.
@익설트 - 네. 데미안입니다.
@루엔시르온 - 지금껏 잘 참았지만 앞으로는... 글쎄?
@신서시티 - 이번 챕터 지나면 좀 나아질거임.
@레볼레이션 - 히오메? 루타비스? 뭘까요.
@x흑란x - 힌트를 드리자면, 아직 군단장의 대부분은 알리샤가 없다는걸 몰라요.
@찬양천사 - 그 사고를 칠 수 없었던게 알리샤의 힘을 흡수해서였죠. 그런데 이 글에서 알리샤는 현재 없음.
@ReFrante - 사실 시오버의 근본상 문제를 일으킬 수 없지만...
@서희대감 - 이번 패치로 라테일 검호도 날아오를 수 있었는데!
@핼리핼리 - 매번 늦어서 죄송합니다.
@sadgfdfh - 이번엔 검호쪽 감정이 격해질거임.
@Legendssj2 - 아리아 여제님보다는 덜하겠죠ㅋ
@Dt월 - 분명 강한데 강해보이지 않는 매직!
@Mese - 정신 장애에게 감정 관련 스킬을 던져주면 저렇게 바꿔버립니다.
@Eluines - 곧 검호의 죄책감이 더 깊어질거임.
@랑패키지 - 셰릴 말투 어렵습니다. 인게임에서 플레이어 상대할땐 반말처럼 하는데, 작중에선 같은 여단원+연장자에게 말하니 좀 존댓말을 쓰게 한거.
@대어의예감 - 처음 크게 날뛴 이후 무의식적으로 이제부터 정신을 놓아선 안된다고 단단히 결심했고, 이후 온갖 일을 겪으며 멘탈까지 강화되고 인내심이 강해져 화를 잘 참을 수 있게 된건데 그 결과가...
@이시싯 - 프라이쉬츠에게 누구한테, 어떻게 죽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갓타치 - 간단합니다. 검호와 전투라는게 성립되는 이들이 누구누구 있는지 살펴보면 되요.
@루호스 - 흑화로 끝나면 다행이죠. 진짜 자살할 가능성이 높음.
@Ratios - 마법소녀 하니까 티나 암광이...큭!
@루서스 - 무↑시야로!!
@책벌레씨 - ... 이거 좀 끌리네.
@네임0306 - 루타비스 4보스따위 검호와 상대가 안되는데.
@Blake117 - 슬슬 감이 잡힐거라고 생각합니다.
@칼크래프트 - 빡돈 검호와 전투가 가능한 사람은 작중내 몇없습니다.
@인생따위야 - 얼마 안남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