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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디스에서 건너온 생명의 오버시어는 루타비스에서 나와 복구 작업이 꽤 진전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 헤네시스의 공원에 발을 디뎠다.
"우와…… 아, 너는 누구니?"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만화경처럼 수많은 푸른색을 만들어내는 아이의 황홀한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녀, 카밀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나타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마법사인가 싶었지만 너무 어리고, 그냥 지나가던 아이라고 생각하기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머리색보다 더 옅은 청색 눈이 소녀를 힐끗 보았다.
"너도 그 놈때문에 피해를 입었구나."
"응?"
"됐다. 일단 나는 그것들을 모두 고치기 위해 왔으니까."
그 놈과의 약속을 지키긴 해야하니 말이지. 카밀라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한 아이는 온 몸에 둘둘 감고 있는 흰 천 아래의 맨발을 살짝 들고, 땅을 굴렀다.
들판을 일으켜 세운듯한 착각이 들만큼 드높은 녹빛의 장벽이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저 하늘까지 닿은 것 같은 장벽을 입을 쩍 벌린채 올려다보던 카밀라는 이어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빛이, 쏟아지고 있어?!
녹빛의 장벽은 허리를 굽힌걸 넘어 아예 땅에 드러누울 기세로 쓰러졌고, 어어 하는 사이에 완전히 무너져 거대한 파도로 화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아이는 욕조물 온도를 재듯 휘휘 손을 저으며 빛의 파도를 메이플 월드 전역으로 번지게 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놓치는 곳 하나 없이 가서 상처들을 고쳐라. 그 어리석은 놈이 원한대로.
"대충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풀어헤쳐져있던 푸른 머리카락이 스르륵 땋아지며 아이의 목에 목도리처럼 돌돌 감겼다.
"아, 너, 넌……!"
터무니없는 광경에 땅에 주저앉아버린 카밀라는 말을 더듬으며 경악한 표정으로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푸른 시선이 저를 향하자 본능적으로 흠칫 어깨를 떨며 뒤로 몸을 빼려 했다.
두려움에 질린 카밀라의 앞에 선 아이는 조막만한 손을 들었다. 눈앞의 존재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눈을 질끈 감는 모습에 비웃지도, 실망하지도 않고 그저 그녀의 한쪽 뺨을 감쌌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 좀 전의 것과 똑같은 아름다운 녹빛이 새어들어왔다.
"그 놈이 이걸 봤으면 자기가 얼마나 큰 바보 짓을 했는지 깨달았을텐데 말이지."
아이의 손이 떨어진 뺨을 매만지자 보드라운 살이 닿았다. 분명, 화상을 입은 부분인데.
"이젠 싫어도 깨달을 때가 됐지만."
카밀라에게서 등을 돌린 아이는 다시 발을 옮겼다.
이런 종류의 일은 벌이는 것보다 그 뒤에 일어날 일들에 더 신경써야 함을 굳이 알려주는 수고따위 하지 않았다. 그는 친절한 이가 아니었으므로.
***
에반side.
페리온 유적발굴지. 골드비치 다음으로 목적지 삼은 이곳은 한참 고대 왕국의 유적을 발굴 중인 지역이라 들어가 절차가 꽤 까다로워 애먹을거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 설마 유적에 들끓는 언데드때문에 나같은 어린애라도 중간은 가는 마법사니까 무조건 오케이할 줄은 몰랐지. 출입도 조사도 허가해줄테니 언데드 좀 정리해달라고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을 줄이야. 협회에 안가고 뭐했던 걸까.
[예산이 없다잖아.]
"진짜 뭐야 그 슬픈 이유는."
[세상은 예산이 지배한다는 명언이 왜 있겠어.]
어쨌든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발굴지에 들어온 나와 미르는 발굴단의 부탁대로 며칠동안 유적을 돌아다니며 언데드를 토벌했다. 초반엔 처음 상대하는 몬스터라 꽤 긴장해서 실수도 했는데, 지금은 그냥 기계적으로 보이는 족족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 녹빛은 뭐였던걸까 미르?"
[나야 모르지.]
마력 잔량을 계산하지 못하고 마구 마법을 쓰다 언데드 한복판에서 지쳤던 때가 있었다. 그때 미르는 다른 곳의 언데드를 정리하러 간 상황이라서 이제 죽었구나, 내가 저놈들 중 하나가 되버리겠구나 하며 절망하던 순간 저 멀리서 거대한 녹빛 물결이 밀려와 나를 완벽하게 회복시켜주었다.
"방향으로 봤을때 대충 헤네시스쪽이었는데."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자고. 지금은 할 일이 있잖아.]
"이곳에 블랙윙 아지트가 없다는건 이미 아는데 굳이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아주 가능성이 없지도 않잖아.]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언데드 처리하느라 며칠동안 유적을 돌아다녀서 조사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이곳에 블랙윙 아지트가 존재할 확률이 0%에 수렴하는걸 알아버렸다. 여기가 페어리족의 영역과 마찬가지인 마력 밀집 지역일 줄은 오기전까지 몰랐다고.
[난 저분 캠프에 모셔다드릴테니까 먼저 조사하고 있어 마스터.]
"알았어─."
며칠동안 우리에게 유적을 안내해주셨던 윈스턴 할아버지를 호위하며 캠프로 향하는 미르의 뒷모습을 보다 나는 몸을 돌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허탕도 몇 번 칠거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힘이 쭉 빠졌다. 나 왜 여기서 모래바람 맞아가며 해골들과 싸운걸까. 미르 말대로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으니 안 할 수도 없고.
나는 보급품으로 받은 마나 포션을 입에 문 채로 발걸음을 옮기며 수첩을 다시 펼쳐보았다. 일단 알고있는 단서들부터 정리하자.
'전 군단장 파픈스타와 롯뜨 씨가 왔다는 그란디스라는 장소는 대체 어떤 곳일까.'
몇 번이고 동그라미 친 '그란디스'란 단어를 다시 한 번 곱씹으며 단서들을 떠올려 보았다. 메이플 월드 유명지는 거의 꿰고 있을 케리 아저씨도 들어본 적 없다는 이름. 혹시 옛 지명인가 싶어서 발굴단 캠프릐 고고학자 몇 분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모두 모른다하고. 정식 이름이 아니라 어떤 별칭같은 건가?
"내가 뭘 놓치고 있는거지……."
연결고리, 연결고리. 단서 조각들을 잇는 것.
스승님의 동료 파픈스타, 말을 전하기 위해 메이플 월드에 온 세피로트, 그란디스에 오지마…… 하아. 후반부 이야기가 있었으면 정말 확실하게 뭔가를 알 수 있었을텐데. 이래서는 세피로트 - 롯뜨 씨가 스승님이 그란디스란 곳에 가는 걸 막으려 했다는 것 밖에 모르겠잖─
"아?"
방금 나 뭘 생각한거지?
롯뜨 씨는 스승님이 그란디스에 오려는 걸 막으러 왔어. 사정은 모르지만 적어도 하는 말만을 놓고 볼 때 이것만은 확실해.
이 말은 뒤집어서, 스승님은 원래 그란디스에 갈 계획이 있었다는거야. 거기가 어딘지,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알고 있었고.
왜 거기 가려고 했을까?
'그란디스에 오지 마.'
파픈스타란 여자는 스승님이 그란디스로 올 것을 알고, 롯뜨 씨에게 부탁해 오지 말아달라고 전했다. 그녀가 스승님이 자신이 있는 곳 - 그란디스에 올거란 걸 알고 또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쪽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여섯 갈래의 길에 생겨난 정체불명의 포탈에 들어가기 직전에 스승님이 했던 말.
"파픈스타를…… 만나러 간거였어."
간단한 결론이었다. 여태껏 눈치 못 챈게 이상할정도로 간단한 결론에 손에 힘이 풀려 수첩을 놓칠 뻔 했다.
그 날 스승님이 포탈을 통해 간 곳이 그란디스였던거야. 거기에 있는 파픈스타를, 동료를 만나기 위해서 갔던 거고!
'하지만 어째서 오지 말라고 한거지?'
동료를 만나는거다. 어떻게 되었는가는 둘째치고, 아마 꽤 오래전부터 동료였을 이가 수 백년 만에 직접 찾아오는건데 먼저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그래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는 뭐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는 2년 전의 것임에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위험하니까 안된다.'
위험해. 위험해서였어. 그래서 나를 두고 스승님만 가셨지. 골드비치에서 롯뜨 씨에게 같이 전해들은건지 스승님은 그란디스란 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웅이, 그것도 가장 강한 영웅이라는 분이 위험하다고 할 정도면 뭔지는 몰라고 장난 아닐텐데 그럼에도 파픈스타를 만나기 위해 끝내 가셨다.
그리고 지금 그분은.
"……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확신했다. 그란디스에서, 명색의 전 군단장이었다는 그 여자와 스승님까지 위험하다고 칭했던 그곳에서 어떤 일이 터졌다. 그것때문에 스승님이 지금같은 모습이 되었다. 아직 군데군데 구멍은 많지만 대략적인 줄기의 형태는 이러리라.
2년 전 당시 위험한 지역이 어디 있었지? 그때는 군단장들의 준동은 고사하고 블랙윙들이 밑밥만 깔던 시기였다.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지금에 비하면 굉장히 평화로웠던 때라서, 영웅과 군단장이 위험하다고 부를만큼 난리였던 지역이 있었다면 들어보지 못했을리 없는데.
"에델슈타인? 아니아니 거긴 아닌 것 같고."
리프레? 아리안트? 알고있는 지역들을 닥치는대로 떠올려봤지만 하나같이 '위험'과는 거리가 멀어 급격히 뻗쳐오는 열에 왁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대체 어디야?! 메이플 월드에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다고! 뭔 딴 세상이기라도 한─ 으악!!"
우당탕탕! 앞을 안보며 걸은 대가인지, 나는 무언가에 걸려 화려하게 땅을 한 바퀴 굴렀다.
"아, 아으으……."
아파라. 손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나보니 무릎이랑 종아리 부분이 돌에 쓸려 벌건 살갛을 보이고 있었다. 하필 또 다리를 다치다니. 모래과 돌가루가 덕지덕지 붙은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흐르는 모습에 영 안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일단 마법으로 물을 모아 지저분한 상처 부위를 씻어냈다. 살이 많이 까지긴 했지만 심하진 않아. 포션까진 쓸 필요 없어보여 치유의 빛을 쬐어 찢어진 피부를 천천히 아물게 했다.
'나 대체 뭐에 걸려 넘어진거지?'
넘어지면서 놓친 수첩을 주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돌더미 사이로 길게 자라난 어떤 기괴한 식물이 하나 보였다. 저거에 걸려 넘어진건가.
"이상하게 생겼네."
잔에 가까운 형태로 얽힌 가지엔 위협적인 가시들이 잔뜩 돋아나 있어 몬스터도 안먹을 것 같았고, 물없는 페리온에서 자란거라 그런지 비쩍 말라있었다. 어차피 이 근방엔 뭘 먹는 몬스터가 없지만.
어느정도 상처가 아문 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그 기괴한 생김새의 식물을 괜히 툭툭 찼다. 왜 여기 이런게 자라있어서. 어쨌든 조사를 마저 해야해서 기분나쁜 식물에서 몸을 돌렸고,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녹색 불꽃이 치솟았다.
"어?"
갑자기 뭐지?
기괴한 식물의 잔같은 부분에서 녹색의 빛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마법? 아니야. 마력은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어떤 힘이 급격히 모여들고 있, 뭐가 튀어나오고 있어?!
새카만 어둠과 함께 살점하나 없는 창백한 손아귀가 나를 낚아채려는듯 확 뻗어나왔다.
"히끅!?"
아직도 통증이 올라오는 다리로 후다닥 뒷걸음질치며 다급히 지팡이를 겨누는 사이, 뼈다귀 손의 주인은 어둠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몹시 위용있는 붉은 코트를 걸친 스켈레톤이었다. 잔금이 갔지만 낡았다는 느낌은 전혀 안드는 술달린 투구를 쓰고, 한 손에는 지휘봉같은 막대를 든 그것은 내게 뻗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오만하게 팔짱을 끼는 모습이 흡사 장군을 넘어 지휘관처럼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식물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왔어? 소환? 하지만 소환이라 보기엔 이상한게 한 둘이 아닌데.'
생각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뻥 뚫린 눈구멍으로 빨간 안광을 빛내던 놈이 들고있던 지휘봉을 휘두르자 주변에 널려있던 뼈 파편들이 뒤엉켜 덫처럼 솟구쳤고, 재빨리 방어막을 펼쳐 막아내야 했다.
방어막 안쪽에서 무사한 나를 본 스켈레톤이 재차 지휘봉을 내려치자 이번엔 사방에서 솟구쳤던 뼈의 덫들이 펑! 퍼펑! 일제히 폭발하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비산했다. 쉴드를 갈기갈기 찢을 기세로 날아드는 파편에 마른 침을 삼켰지만, 이 정도로 부서지지 않아.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구를 여럿 만들어 스켈레톤에게 날려서 견제를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기괴한 식물에서 계속 쏟아지는 어둠을 두른 놈에겐 검댕조차 묻지 않았다.
'굉장히 안좋은 상황인데.'
도망쳐야 하나? 일단 이 주변은 조금 전에 내가 몬스터들을 정리해둬서 몸을 빼는데 어려움은 없어. 아까 포션을 마셔서 마력도 넉넉하고. 결정적으로 당장 내가 쓸 수 있는 마법 중에 저 어둠을 단번에 뚫고 타격을 줄 수 있는게 없어.
'미르가 있다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얘는. 지금쯤이면 할아버지를 캠프에 바래다 드리고도 남았을텐데. 영혼을 이은 계약자면서 내 위기도 감지 못하는─
'아니, 아니야.'
짜악! 짝! 양 뺨을 쳐서 정신을 깨웠다.
스승님도, 나인하트도, 리린도…… 먼 옛날의 프리드도. 내가 아는 모든 오닉스 드래곤 마스터들은 자신과 계약한 오닉스 드래곤과 함께했지만 그들에게 무조건 의지하지 않았어. 그 사람들 모두 드래곤 마스터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도 충분히 강했으니까.
그리고, 나도 약하지 않아.
난 미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하아아압!!"
크게 지팡이를 휘둘러 마력탄을 대거 쏘아내 폭발하려는 뼈의 덫들을 먼저 부쉈다. 흩뿌려지는 파편 너머로 스켈레톤이 또다시 지휘봉을 들었으나 이번엔 구경만 할 생각 없었다.
저 어둠의 장막을 뚫으려면 화염구로는 부족하다. 더 강력한 것. 일격에 어둠을 찢어 저놈의 뼈까지 태울 파괴력이 필요하다. 그런 마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습기가 거의 없는 페리온에서는 쓰기 힘들다.
'그러니까─'
연달아 마력탄을 만들어 날렸다. 스켈레톤의 몸에 둘러진 어둠때문에 별다른 위력은 못 주었지만 깔짝깔짝 두들겨맞은 놈은 지휘봉을 휘둘렀고, 이번엔 뼈의 덫이 아닌 불기둥이 쾅쾅 내려꽂혔다.
방어막을 쳤음에도 훅 밀려오는 살이 익는듯한 열기에 이번엔 바람을 일으켜 연이은 폭발로 주변에 뭉게구름처럼 일어난 뼛가루와 먼지를 저 위로 날려보냈다.
"달그락달그락달그락!"
"시끄러워 해골!"
준비는 끝났다.
마력탄을 마구 날리는 척 하며 상공에 설치한 마력 잔해들과 놈이 직접 달궈준 뜨거운 공기. 거기다 적절한 매질까지.
나는 허리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며 뚜껑을 따서 스켈레톤의 머리 위로 집어 던졌다. 병에서 포션이 쏟아지는 광경이 매우 느리게 망막에 맺히는 것 같았지만, 지팡이를 타고 흐르는 마력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하늘에 새겨진 마법진은 빛의 창을 쏟아냈다.
***
눈부신 뇌광과 천둥소리가 멎은 뒤, 나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해치웠…… 나?"
스켈레톤이 있던 자리에는 놈이 입고 있던 붉은 코트 자락조차 남지 않았다. 놈을 소환? 했던 식물과 그 식물이 뿜어댔던 기분나쁜 어둠만이 사라지지 않고 떠다닐 뿐.
'진짜 뭐야 저건?'
좀 전에 스켈레톤을 소환한 것도 그렇지만 번개의 비에서까지 무사하다니. 더이상 식물이라 볼 수도 없는 저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일단 뜯어다가 연합이든 리엔이든 어딘가에 부탁해서 저게 어떤 물건인지 알아봐달라고 해야겠어.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마른 가시나무는 의외로 튼튼해서 뽑아내기 힘들었다. 몇 번을 잡아당겨봐도 꿈쩍도 안해 결국 마법으로 식물이 뿌리박힌 땅 자체를 들어올렸다.
"으엑. 징그러."
뿌리가 뿌리같지 않아. 무슨 전선? 그것처럼 보여. 식물이라기보단 마치 기계같은 그 단면에 이게 뭔지에 대한 의문은 더 커졌다. 이 식물이 자연스러운 무언가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빨리 캠프로 돌아가자. 아직 조사는 다 못했지만 이쪽이 더 급,
[목표 발견. 제거 행동에 들어간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쉴드를 펼쳤다. 째앵! 단검이 꽂히며 금이 쩍쩍 간 쉴드 너머로 새카만 인영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등 뒤로 망토와 함께 불길한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는 무언가. 복면과 두건을 써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왠지 저것에게 얼굴따위 없을 것 같았다.
괴상한 식물에, 스켈레톤에, 이젠 저것까지.
"아 진짜!"
텔레포트를 연달아 사용해 검은 인영으로부터 멀찍히 떨어졌다. 아까 던진게 마나 포션이라 회복도 더 못하고, 대충 봐도 저건 장난아니게 강해보인다. 좀 먼 곳에서 요격하는 식으로 처리를 해야…….
[추적 개시.]
"뭐?"
거리를 벌린게 무색하게 검은 인영은 단거리 순간이동을 사용한 것처럼 코앞까지 다가왔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허둥지둥 실드를 펼쳤지만 보라빛이 흐르는 단검은 방어막을 통째로 베어가르며 조금의 가감없이 목을 노려왔다.
나 여기서…… 죽는 거?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비명이 올라오기도 전에, 단검은 내 목을 잘라내려했다.
한 줄기 섬광이 검은 인영을 꿰뚫었다.
[심, 각한, 손상.]
고장난 기계처럼 지직거리는 목소리를 쉬게 할 수 없다는 듯, 빛줄기는 어디선가 연이어 쏘아졌다. 순식간에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검은 인영은 - 그 와중에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 삐걱삐걱 빛이 쏘아진 곳으로 목을 돌리려 했다.
"타입:어새신. 이번 개체는 질기다."
"변이 몬스터를 늦게 잡은 모양이야."
그래도 어린애 혼자서 그걸 처리했다니 굉장하네.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목소리에 이게 꿈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확실한 처리를 위해 근접전을 수행하겠다."
"조심해 제논!"
갑자기 뚝 떨어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었다.
[목표 변경, 섬멸.]
"에너지 소드 가동."
어째 저 검은 인영과 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억양. 그렇게 놈이 정체불명의 소년에게로 타겟을 옮기고 싸우는 광경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헐떡였다. 살았어. 살았다고. 죽지 않았어……! 벅차오르는 안도감에 눈물이 차올랐다.
"갑자기 왜 우는거야? 혹시 어디 다쳤어?"
"그게, 그러니까 그."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바구니 비스무리한 것에 탄 개? 고양이? 같은게 조금 전에 들었던 귀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너희는…… 누구야."
"우리?"
그 동물은 이질적일 정도로 부드러워 보이는 분홍색 꼬리를 흔들며 답해주었다.
"내 이름은 루티! 저기 저 애는 제논이야. 우리는 변이 몬스터와 미스틱 게이트의 처리하기 위해 메이플 월드를 탐색하고 있어."
변이 몬스터? 미스틱 게이트? 처음 듣는 용어들에 물어보려는 찰나, 저쪽에서 충돌음이 크게 울렸다.
[특수행동 개시.]
"소용없습니다."
어둠이 덧칠된 단검과 소년이 들고있는 검이 부딪힐때마다 스파크가 튀었다. 기습적으로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사슬들을 간단히 끊어낸 소년은 그대로 검을 휘둘러 검날을 채찍처럼 쭉 늘렸고, 검은 인영이 갑작스러운 리치 변화에 대응하기도 전에 그의 전신을 난자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어둠은 이내 재처럼 흩어졌다.
"타입:어새신 처리 완료."
"수고했어 제논."
"다음 지역으로 이동해야하니 프로멧사를 불러줘 루티."
"잠깐만!!"
나는 다급히 소년을 불러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그, 구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저 애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거다. 채 닿지도 않았지만 목을 노리던 단검은 잊을 수가 없어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눈물을 닦은 뒤 내가 내민 손을 뚱하게 보던 제논은 루티가 옆에서 툭툭 쳐서야 겨우 맞잡아주며 그대로 날 일으켜 세워줬다. 아, 이 뜻이 아니었는데.
"별 거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정말 대단했는걸! 진짜 강한 놈이었는데 칼 쉭쉭 몇 번 휘둘러서 없애고. 너 내 또래로 보이는데 어떻게 그렇게 강한거야?"
또래의 마법사중에서 실력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들어서 쑥스러운 한 편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던 자만심이 이번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래. 또래중에서 그럴 뿐이지. 지금 눈앞의 애는 마법사가 아닌 전사였지만 나보다 훨씬 강해보이고.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응?"
어째 얼굴이 어두워보이는데. 내가 뭘 잘못 물었나. 황급히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아참, 아까전에 너희가 얘기한 변이 몬스터랑 미스틱 게이트, 그리고 그 검은 인영은 뭐였어? 타입이 어쩌고 부르는걸 보니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설명해줄 수 있어?"
"그건─"
"대화 중에 미안한데 제논, 어째선지 프로멧사를 불러올 수 없어."
한쪽에서 스크린같은걸 띄우며 뭔가를 하던 루티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루티."
"갑자기 통신 장애가 일어나고 있어."
"여긴 이상 자기장같은건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통신 장애? 그러고보니 아까 프로멧사라는 걸 불러온다고 했었지.
"혹시 뭘 소환하려고 했었어?"
"아, 대충 비슷해."
"그럼 여기 마력때문일지도 몰라. 이곳은 언데드를 일으킬만큼 마력이 많이 모인 지역이거든."
내 말에 조금 고개를 기울이던 루티가 바구니에 달린 수많은 단추들을 삑삑 눌러댔다.
"어때 루티."
"정말이네. 측정해보니 여기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안개화되어 떠다닐만큼 밀집되어 있어. 당장 여기서 프로멧사를 불러오는건 불가능하겠는데."
"그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겠네."
"그럴 필요는 없을거야. 캠프까지만 가면 괜찮다고 들었거든."
협회에서 만들어준 안전 지대는 언데드도 접근하지 못한다. 그 말인 즉 이들이 말하는 음(陰)속성 마력도 없다는 뜻.
"내가 안내해줄게!"
"…… 알겠습니다. 그럼 동행하도록 하죠 소년."
"내 이름은 소년이 아니라 에반이야."
그렇게 나는 제논, 루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캠프로 향했다.
"미스틱 게이트는 식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 일종의 간이 포탈입니다. 작동하기 시작하면 어둠에 변이된 몬스터와 특수한 성질의 어둠을 방출하죠."
"대부분 사람들이 사는 마을 주변에서 나타나서 엄청 피해를 입혀서, 우리는 메이플 월드 이곳저곳을 다니며 미스틱 게이트를 찾는대로 철거하는 중이야."
"이 이상한 식물이 포탈이었구나……."
나는 제논이 들고있는 그 물건을 지긋이 보았다. 그런데 포탈같은 물건이 왜 여기 나타난거지?
"아마 오작동이 난 걸 겁니다."
"엑."
"아까 에반이 말했듯이 이곳은 마이너스 에너지가 밀집된 곳. 좌표가 꼬였거나 그랬겠죠."
헛웃음도 안나오는데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이런게 메이플 월드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니. 어떤 마법사가 그런 물건을 만든거야?"
"마법사가 아닙니다."
"뭐?"
"이것은 과학의 산물. 이 터무니없는 포탈을 만든 사람은 미친 과학자입니다."
과학? 익숙하지 않은 단어에 어떻게 그런걸 다 알고있냐고 물으려는 순간, 하늘 저편에서 소리가 몰려왔다.
"생명 반응 다수 감지."
"루티?"
"레이더에 뭔가가 접근해오고 있어! 관측해봐 제논!"
"알았어."
갑자기 귀를 파닥이는 루티의 말에 제논은 저 멀리서 몰려오는 것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비행형 몬스터와 그에 탑승한 이들이 수십, 탑승자들의 대략적인 형태는 인간. 하지만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잠깐만."
저 먼 거리가 어떻게 보이는거야? 버프라도 쓰는건가 싶어서 제논의 눈을 유심히 보았는데, 미세한 소리와 동공이 열리며 빛조각이 떠오르는게 어째 생물이라기보단 인형에 더 가까워보였다.
"데이터 베이스 확인. 탑승자 전원 마족으로 판명."
마족? 설마 군단장의 군단인가?
"경로 추적…… 행렬의 머리 방향과 비행체의 속도, 고도로 볼때 유력한 목적지로 추정되는 곳은─ 슬리피우드."
"당장 쫓아가자!"
군단이 이곳을 습격하게 내버려 둘 수 없어!
***
이데아side.
삶이라는게 항상 제 뜻대로 될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변수라는 단어를 들 필요도 없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완벽하게 제 예상대로 굴러가는건 없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쩌실겁니까 이데아 님."
"…… 어쩌긴 뭘 어쩌겠어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어린 종족의 수호자가 불안한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걱정마세요. 화내기엔 너무 지쳤거든요.
그가 멋대로 판테온에 건너간지 얼마 되지않아 이쪽으로 넘어온 생명의 오버시어가 힘을 쓴 게 며칠 전. 아이의 성격을 알면서도 눈으로 본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올만큼 아름다운 녹빛 물결이 메이플 월드 전역으로 뻗어나갔고, 실시간으로 각 마을들을 위협하던 몬스터들을 지우는건 물론 군단장들의 준동 이후부터 조금씩 누적되며 쌓인 피해들을 단번에 복원시켰다.
이는 말 그대로 '기적' 그 자체였지만…….
'엘나스는 아란이, 아리안트는 루미너스가 나섰다지.'
영웅이란 존재가 놀고 있을리가 없었다. 크로스 헌터의 발족과 함께 큰 마을이나 도시에는 포탈이 설치되었고, 이를 통해 공습을 전해들은 두 사람이 가장 급한 전장에 뛰어들어 속전속결로 정리에 나섰다는 보고서를 팔랑였다.
'이래서야 본전도 못 건진 격이군.'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그 기적을 아낄 수 있었을텐데. 그러나 한 번 뿐인 기회는 이미 써버렸고, 이제와서 미련같은걸 가져봤자 의미따윈 없다만, 그래도 뭉클뭉클 생기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언제 온답니까."
"저쪽에서 보고를 다 받은 후에 올 것 같습니다."
"시간 흐름이 다르다는건 이럴 때 참 불편하군요."
기적이 행해진지 이미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란디스는 아직 반나절, 아니 몇 시간도 안 지났을 것이다. 돌아오려면 하루는 더 걸리려나.
"그가 돌아오면 즉시 뺨을 날려주고 싶은데 말이죠."
"이, 이데아 님?"
"농담입니다. 제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1:1 독대중이면 모를까.
"기적 이후 군단장과 휘하 군단들의 동태는 대부분 큰 변화가 없다지만 주의요망하고, 연합 쪽의 반응도 계속 살펴본 뒤 신중하게 행동에 들어가도록 하죠. 계획의 큰 틀은 바꾸지 않되 그들의 행동에 따라 바꿔가는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보다 루디브리엄에서 벗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마족 군단 일부에 대한 추적은 어디까지 되었는─?"
콰르르릉……! 큰 소리와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설마 지진인가 싶었으나 이 가설은 1초도 채 가지않아 폐기되었다. 진동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폭음이 연달아 울렸고, 명백하게 인위적인 종류의 폭발의 빛이 저 너머로 보여 균형을 잡기 힘듦에도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밖에 나온 순간 보인 것.
산산조각 깨어져 비처럼 떨어지는 결계의 파편들과.
"쥐새끼들 소굴이 쓸데없이 튼튼하게도 감춰져있군."
폭발로 일어난 자욱한 매연을 해치며 진군해오는 무리의 선두에 선 청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자주색 머리, 청회색 피부, 한쪽 눈에 한 안대와 등에 짊어진 대검까지.
'어째서 저자가?'
은월의 보고로 수 차례 전해받았던 새로 영입되었다는 마족 군단장이 왜 여기에.
저가 당황하는 사이 다른 동족들은 무례한 침입자를 향해 재빨리 무기를 빼어들고 달려드려 했다. 모두들 베테랑답게 능숙한 움직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때가 안 좋았다.
[버러지들 따위가 감히 누구를……!]
분노로 끓어오르는 목소리와 함께 땅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설마 아까 그 지진은?
"모두 멈추십시오─!!"
마법으로 증폭시킨 필사적인 외침에 당장 저들을 공격하려했던 동족들은 물론 진군해오던 마족 무리들까지 멈춰서서 나를 보았다.
위험해, 위험했어.
"여러분은 뒤로 물러나세요."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이데아 님!!"
"제가 물러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최악의 경우 루타비스를 버리고 판테온으로 도망쳐야 한다. 제 눈빛을 다행히 알아먹은 카이저가 사람들을 잡아끌어 뒤로 물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쉬며 성큼성큼 걸어가 군단장의 앞에 섰다.
"마족 군단장께서, 무슨 용건으로 여기 오신 겁니까."
"호오?"
하나밖에 없는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너는 누구지, 여자."
"…… 노바의 수호자 중 한 명, 이데아입니다. 어서 대답해주시죠 군단장."
[킥킥, 무례한 계집이로구나.]
마족 무리들의 뒤로 붉게 물든 나뭇가지같은 것이 쫙 뻗어져나왔다.
"가만히 있어라 블러디 퀸."
[하오나 데미안 님.]
[아하─! 데미안 님께서 가만히 있으라잖아 여왕님? 저 당찬 여자가 뭐라고 할지 궁금한데 그 손 내리지 그래?]
[시끄럽다 광대. 그리고 여자, 괜히 시간 끌지 말고 꺼져라.]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울리는 목소리로 보았을때 최소 4명의 강력한 존재들이 이곳에 있다. 옷 아래로 돋는 소름과 떨리는 손을 참으며 최대한 덤덤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무슨 용건으로 여기 오셨습니까. 마족 군단장."
숨어있는 존재들에게 데미안이라고 불린 청년은 오만하게 저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생명의 초월자는 어디 있지."
…… 뭐?
"잠깐, 잠깐만요. 생명의 초월자를 왜 여기서─"
"시치미 떼려 해도 소용없다. 이미 알고 왔으니까."
아니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 겨우 유지하고 있던 제 포커페이스가 깨진 걸 정곡을 찔렀다고 착각한건지 그는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메이플 월드 전역에 퍼졌던 생명의 파도.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모를리가. 방금 전까지 그 기적이 벌써 사용된 것을 아까워하고 있었는데.
"파도의 근원지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생명의 기운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이 여기더군. 이곳에 그 주인이 있겠지. 내 말이 틀렸나."
아아 젠장. 생명의 오버시어가 힘을 회복하기 위해 만들었던 장소가 이곳 루타비스다. 빅토리아 아일랜드 중심에 거대 나무를 자라게 해 섬의 지력을 조금씩 끌어모은게 약 8백 년이고, 생명의 기운은 차고 넘치도록 많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건 힘의 주인이 초월자가 아니라 오버시어잖아!!
"당신은 초월자를 찾아온겁니까."
"알면 대답해라. 생명의 초월자는 어디있지."
"초월자를 넘겨드리면 물러나주실 겁니까."
그 성질머리 더러운 아이, 아니 생명의 초월자를 왜 찾는지 모르겠지만 순순히 안내해주는척 하고 그 아이한테 당해버리라는 생각을 한 순간 마족 청년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당연히 그럴 예정─이었다만."
'이었다'?
"여기 꽤 쓸만한 아지트로 보이는군."
이 잡초대가리가, 무슨 망발을.
"생명의 초월자와 함께 넘겨주면 고맙겠어."
눈앞이 띵하다. 겨우 억눌렀던 손의 떨림도 다시 일어났고, 목구멍에서 쏟아지려는 말들을 참아내는 것이 힘들었다. 심장박동과 함께 분노가 번지며 공포를 태웠다.
고개를 숙여 차가운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화가 난다고 달려들어봤자 승산따위 없어. 지금은 참아야 해.
이럴 때, 이런 일이 터졌는데 그 인간은 왜 여기 없는건지.
"…… 알겠습니다."
"흐응?"
뒷편에서 저를 부르는 외침들이 들렸지만 반응하지 않으려 애썼다.
"당신의 요구조건은 생명의 초월자와 이곳 루타비스의 양도, 맞습니까."
"잘 알아들었군."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선조시여, 부디 저희의 앞날이 평탄해지길. 이 세계의 신은 믿을게 못 돼서 당신들말고 기도할게 없습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응?"
쳐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오만한 자세였던 마족 군단장이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런 걸로 제대로 시간을 끌 수 있을까.
1초라도 빨리 달려오세요 검호. 그러면 뺨 날리기로 한건 물러드릴테니.
***
검호side.
불길한 말을 남기고 가버린 아이를 뒤쫓아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몹시 심기불편해 보이는 그 아이를 감히 잡았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를뿐더러, 오랜만에 판테온에 온만큼 밀린 보고도 들어야 했다.
아니…… 사실 보고는 핑계고 진짜 이유는 이대로 돌아갔다간 루타비스에서 살기등등한 눈으로 기다리고 있을 이데아한테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서 그랬겠지. 헝클어졌던 머릿속이 진정된 뒤에야 내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을 충동에 가깝게 저질렀는지 서서히 깨달으며 피가 싸하게 식었고, 나중에 아이가 행한 기적으로 메이플 월드가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음에도 몇 시간동안 가는걸 망설였다.
그란디스는 메이플 월드에 비해 시간 흐름이 늦어서 더 지체했다간 저쪽에서 먼저 쳐들어와 멱살잡이해서 끌고 갈 것 같아 어떤 사과를 해야 좋을까 생각하며 돌아갈 준비를 슬슬 할 무렵, 한 노바족이 헐래벌떡 뛰어왔다.
"여기 있었습니까?!"
"너는……?"
클리앙이었던가. 항상 이데아 근처에 있던 노바족 청년이 어째선지 숨 넘어갈 것처럼 뛰어오더니 그대로 멈추지않고 나를 잡아 끌었다.
"잠, 갑자기 뭐하는 거냐?"
"한시가 급합니다! 질문은 나중에 받을테니 빨리 움직이세요!"
"이데아가 날 끌고오라고 했나? 얼마나 화가 난,"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신관 청년은 피토하듯이 외쳤다. 그럼 어째서?
"군단장이 루타비스에 습격했다고요!!"
내 귀가 잘못됐나. 그러나 클리앙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이, 하, 기적을 보고, 허억, 생명의 힘을 추적해왔다고, 이데아 님이 시간을 끌다, 쿨럭!"
말이 계속해서 끊겼다. 지쳤다고 보기엔 이상할정도로 헐떡여대는 클리앙을 잘 살펴보니, 그의 흰 신관복이 굉장히 더러워졌다는걸 그때서야 알았다.
흙과 먼지. 그리고 피로.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나갔다.
왜 나란 자식은 이렇게 생각이 짧은거야! 생명의 오버시어가 기적을 쓰면 연합이든 군단장이든 그 기적을 일으킨 힘의 근원지를 찾아나서는게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루타비스를 발견하는데엔 시간이 걸릴거라 예상했다. 노바족들의 마법으로 겹겹히 쌓여있어 찾는 것부터 힘들고, 그 결계를 부수는데엔 더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리 빨리 들통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생명의 오버시어를 찾으러 왔던 때보다 더 빨리 달려 대성당 안의 디멘션 게이트에 돌진하다시피 뛰어들었다.
어떻게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역한 탄내과 피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건물인지 시설인지 하여튼 보이는 것들은 죄다 부서져 있었다. 착지와 함께 발에 밟혀 깨진 유리 파편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노바족들은 무엇에 당했는지 심한 부상을 입은채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망령같은 신음을 흘려댔고, 그나마 무사한 사람들도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떨며 어딘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일을 벌인 원흉을.
"시건방진 계집이."
"커…… 흑."
루디브리엄에서의 악몽이 오버랩되었다. 한 여자를 죽이려는 군단장이라는 상황까지 왜 이렇게 똑같은건지.
놈의 손아귀에 목이 잡혀 꺼져가는 숨을 간신히 내뱉는 이데아를 보았을 때, 나의 행동 역시 그때와 같았다.
"그만두란 말이야!!"
팔을 노려 휘두른 검을 재빨리 피하는 놈에게서 이데아를 빼앗았다. 다시 손을 뻗는 놈에게 발길질을 날려 떨어뜨리고 그녀를 확인했다.
손에 잡혀있던 목에 멍이 든 건 괜찮다. 고작 멍따위, 금방 나으니까. 그러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본 순간, 이전에는 없던 붉은 문신같은게 그녀의 흰 뺨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핏줄이 올라왔거나 상처가 난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항상 지적인 빛을 띄던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게 풀렸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당신이란 존재는, 정말이지…… 더럽게 늦는군요."
"이데아, 이데아?"
"이런 한심한 사람이 어쩌다가 우리의, 큭!"
뭐야. 뭐에 당한거야. 일단 이 문신때문인 것 같은데 어떤 영향을 일으키는지 모르겠어. 마법? 마법이면 내가 할 수 있는게 전혀 없잖아!
그녀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손을 놓고 싶었다.
"어떤 새끼가 감히……!"
자주색 머리, 한쪽 눈의 안대, 푸른 피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 비하면 많이 자랐지만 원형이 꽤 남아있어 알아보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놈과 굉장히 비슷했다.
비슷한게 당연하잖아! 형제인데!
"…… 데미안."
왜 하필 여기를 습격해온 군단장이 저놈일까. 빌어먹을 원작의 억지력? 그딴거 작살난지 오래 아니었나?
그대로 등의 대검을 뽑아들어 달려들 것 같았던 놈이 그제서야 나를 제대로 보았다. 하나밖에 남지않은 눈이 찡그려지고, 느리게 떠지다, 다시 인상을 썼다.
"하! 이젠 당신이야?"
저 마족 청년이 정말 내가 알던 그 데미안이 맞을까.
"루디브리엄에서 그 오닉스 드래곤을 만났을 때부터 설마했는데 살아있다니."
아스카를 만났어?
"아니, 당신도 잘난 영웅 나부랭이니 이 시대에 살아있는건 당연하겠군."
그의 입에 담긴 영웅이란 단어의 울림은 어째선지 몹시 적대적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쥐새끼들의 수호자를 감싸는건지 모르겠지만…… 잠깐 당신 지금 뭘 입고 있는거야."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것. 블랙윙 제복.
"언제부터 이쪽으로 전향한거지?"
"웃기지마! 전향따위 한 적 없어!"
"그럼 왜 그 여자를 감싼건데."
왜 구했냐고? 사람 구하는데 이유따위가─ 그러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블랙윙의 비밀기지에서, 블랙윙의 참모를 감싸는데 고작 그런 이유를 핑계라고 대다니. 결국 당신이란 사람도 변한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샐쭉하게 떠진 외눈은 경멸의 빛을 띄고 있었다.
"거기다 과거엔 그 증오스러운 악사 여자에 이제는 블랙윙 참모라니. 거참 능력도 좋군. 차암─ 영웅다워."
고막을 통해 들어온 말은 뇌로 가지 못하고 달팽이관을 빙빙 돌았다.
지금 데미안이 하고있는 지대한 오해보다 더 걸리는 말때문에 이해가 따라가지 못했다. '증오스러운' 악사 여자라니. 호칭에서 보았을 때 일단 파픈스타인 걸로 추측되는데 데미안이 그녀를 증오할만한 일은…… 그의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것 때문인가. 하지만 그때 그분을 죽인 건 프라이쉬츠인걸로 아는데. 심지어 데미안은 놈이 그분을 죽인걸 눈앞에서 봤잖아.
"말 나온김에 묻지. 그 악사 여자, 파픈스타란 년은 어디 있지?"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디선가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듯한 환청이 들렸다.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그 여자가 검은 마법사를 배신하면서까지 달라붙었던 당신이라면 잘 알거 아니야?"
여기를 쳐들어온 이유일 생명의 초월자나 제 형에 대한 것도 아니고 왜 그녀에 대한 걸,
저딴 식으로 묻는거지.
잔뜩 억눌러진 목소리는 내 것이라 믿을 수 없을만큼 탁했다.
"…… 왜냐."
"몰라서 묻는건가."
번들거리는 눈빛은 어딘가 익숙했다.
아아, 그래.
"그 여자를 찾아 끔찍하게 죽이기 위해서지."
시간의 오버시어를 만난 직후, 그녀가 사라진 대야에 비친 내 눈과 비슷해.
"당신한테 홀려 군단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면 그걸로 끝낼 것이지, 자기를 추적하던 형의 가족이란 이유로 나와 어머니를 노린 망할 여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어."
프라이쉬츠와 아카이럼이 그 년과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사람이 당신이라고 알려줬으니 발뺌할 생각따위 하지마. 이어지는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가 뇌리를 난도질했다.
"설마 지금은 이 여자로 갈아타서 그년의 행방은 모른다, 뭐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어."
데미안의 손에 붉은 빛이 서림과 동시에 품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렸다.
"아아, 아, 아아아아─!"
"이데아!!"
"수호자랑 칭호를 장식으로 달고있는건 아닌지 좀 질긴 여자였어. 그래봤자 지금은 내가 조금만 손짓하면 노예가 될 신세지만."
그녀의 뺨에 새겨진 붉은 문양을 중심으로 핏줄들이 마구 올라왔다.
저 자식을 처리하면 나아질까하는 생각에 고개를 든 순간, 쓰러진 노바족들 주위로 어둠 속에서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시간 끌면 저 쥐새끼들부터 하나씩 죽여주지."
그 말에 연이은 충격에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 뇌가 마침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 자식은.
있지도 않은 생명의 초월자를 찾으러 여기까지 쳐들어와 루타비스를 유린하고.
자기와 어머니를 구하려다 죽기 직전까지 갔던 그녀에게 복수를 한답시고 지껄이며.
노바족들을 인질로 날 위협중이다 이거지?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던 머릿속의 무언가가 무참히 끊어졌다.
***
시야를 물들이는 붉은색이 무엇인지 모른다.
가끔씩 이것이 나올때마다 눈앞이 시뻘겋게 점철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기에 구체적인 기억따위 남지 않았고, 그나마 후일 알게 된 건 이것에 완전히 잠겼을 때의 내가 사이 - 사이키커를 죽였다는 것이다.
…… 생애 처음으로 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살인.
그 뒤로 다시는 이 붉은색에 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분명 이것에 빠지면 강해지지만, 동시에 또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죽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니까.
가장 강하지만 가장 쓸모가 없어 짐에 불과한 힘.
"아아~ 진짜."
하지만.
"더 이상 못 들어주겠네."
이번만큼은 정말 어찌되든 상관없어.
"다른 자식은 몰라도, 니가 그딴 소릴 하면 안되잖아아아아아──!!"
시야도 머릿속도, 피보다 선명한 분노의 색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데미안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복선은 1부에서 있었습니다. 당시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군단장이 되었을리 절대 없죠.
다음 화에는 이 글이 170화가 넘어서야 드디어 검호의 전력이 나오는데... 개강 크리 터졌음(웃음).
루디브리엄에서 사이키커를 죽였을때와 똑같이 보이지만 다릅니다. 그때는 충격을 못이겨 정줄을 놓은거라면 지금은 참다참다 정줄이 끊어진거.
+)표지보고 이번에도 죽냐고 우려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번 표지는 검호의 멘탈이 나간걸 보여드린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내용을 다소 수정했습니다.
@류동지 - 데미안은 되는 일이 없어요.
@Dulcet - 넵! 엔딩만은 해피입니다.
@루엔시르온 - 해피엔딩 맞으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나가던해덕 - 멘탈은 둘째치고 정신줄이 끊어졌음.
@찍뉴 - 생오버가 가지고 있습니다!!
@Ratios -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AbViaLectea - 아스카가 아니었지만 이쪽도...
@칼크래프트 - 피눈물나는 상황.
@레인D레이븐 - 사이다가 과연 터질까요옷~!
@갓타치 - 이번 챕터 중요 사건이 이제 막 시작된 격이라서.
@ㅇㅇ군 - 왜 모두 죽일거라고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찬양천사 - X를 눌러 joy를 표해주세요!
@Legendssj2 - 이제 시작인데.
@Eluines - 오버시어들의 힘은 그 힘의 규격에 맞는 일에 안쓰면 그에 따른 반작용이 꼭 생깁니다.
@ReFrante - 한 번쯤은 표지로 모습을 보이는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리화앨리스 - 아스카 뿐일까?
@darkniszero - 절단마공!
@x흑란x - 당연히 혹독하죠.
@레볼레이션 - 모두 검호가 선택한 것들이란게 함정.
@마도사지망생 - 그건 확실하게 장담해드릴게요.
@Blake117 - 부수는건 쉬워도 고치는건 어렵다나요.
@에누마엘리시 - 나중에 천천히 나올겁니다.
@socns - 이번 챕터가 지나면 서서히 힐링될겁니다.
@인생따위야 - 다음편부터 펑펑 터질 예정...! 인데 개강 크리.
@다람쥥 - 따지고보면 인간이 아니라 전투인형 취급.
@Sisre - 해피엔딩 꼭 할거에요.
@대어의예감 - 왜 꼭 죽는게 가장 큰 불행이라 생각하는거죠?
@MidRed - 그보다 섣부른 판단은 재앙을 부른다, 쪽이 맞음.
@luckandboy - 다 어떻게 될지 생각해뒀습니다.
@wltns920 - 그건 절대 아니에요.
@사리성 -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때가 올...〈
@레인D레이븐 - 드디어 뭔가가 터졌는데 영 안좋은데 터진 느낌.
@SourcesMoon - 한달 2회 연재...
@책벌레씨 - 간만에 출연하셨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