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우절 외전:기억나지 않는 밤 --> 이것은 두 사람은 기억 못하는 그 날 밤의 이야기.
"그러니까아, 뭐만 일어나면 저한테만 부탁하지 말라고요오─. 제가 무슨 해결사인 줄 압니까? 자기들의 문제는 자기들이 해결해야지 왜 그냥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아 해결해달라고 매달리냐고요!"
"음음."
"팔이 없어 다리가 없어, 제 바짓가랑이는 그만 좀 잡으라고요!"
"그래그래."
한껏 과일주를 들이켜 만취한 하얀 마법사는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던 불평불만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유일한 술상대인 검호는 술을 들이키며 건성건성 맞장구를 쳐줬다.
"귀족부터 양민들까지 제가 왔다하면 뭘 부탁하기 바쁘니 여길 나가기도 싫고……."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긴한데 그래도 여긴 바깥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낫습니다. 적어도 잠자리에 여자가 숨어들어오진 않으니까요."
"…… 뭐?"
뜬금없이 여자 얘기가 왜 나와? 하얀 마법사는 술때문인지 아니면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서인지 열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가끔 귀족가 같은 곳에 머물면, 저한테 반한 그곳의 영애나 부인이 제 방에 숨어들어오는 일이 있거든요."
"잘난 척 하는거냐."
"경험담일 뿐입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나중엔 마법으로 최면을 걸어 돌려보내는 식으로 해결했다고.
"마법 참 편리하게 쓰네."
"현자 칭호는 도박으로 딴 게 아니니까요."
"근데 여자들이 반하는게 그렇게 귀찮으면 그 잘하는 마법으로 얼굴 바꿀 생각은 없나?"
"그건 곤란합니다. 제 얼굴은 이 흰 옷차림이랑 함께 신분증같은거라."
그리고 잘생긴 건 편리하기도 하고요. 검호는 저놈이 미소 한 방에 에피네아 여왕을 격침시킨 전적을 떠올렸다. 그래. 참 편리하게 써먹고 있네.
"뭐어─ 그래도 가끔은 너무 잘생긴게 불편할 때도 있었습니다."
"뭔데."
"아까 전에 말한 저한테 반한 여자가 침실에 난입하는 경우의 발전형인데……."
가끔 흉기나 독같은 걸 들고 와서 자기를 받아주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하는 여자도 있었거든요.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는지 그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 나이스 보트?"
"갑자기 배 얘기를 왜 합니까?"
"아니, 아무것도. 잘못 말했다."
저런 극성 얀데레가 진짜 있었구나. 픽션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생길때면 '죽을거면 당신만 죽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민폐도 보통 민폐가 아니라고요. 특히 상대가 귀부인같은 경우엔."
"니가 하는 말이 그냥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데."
"검호 당신은 안 겪어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거에요. 아무튼 그런 일이 종종 생길때면 성형 마법을 진지하게 고려해보곤 합니다."
나중에 검은 마법사가 되면 저런 일을 겪을 가능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텐데. 그 후드 속 얼굴이 어떤지 인게임에선 안 나왔지만 지금처럼 짜증날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분명 아닐테니까.
"넌 여자가 싫나?"
"예?"
"아니면 직접 들이대는 타입이 싫은건가."
"아, 취향에 대해 물어본거였습니까?"
잔에 남은 술을 마저 털어넣은 하얀 마법사는 다시 잔을 채우기 위해 병에 손을 뻗었다가 비어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 모습에 검호는 제 근처에 있던 술병의 병목을 손날치기로 깨끗하게 날린 뒤 그에게 내밀어 주었다. 여기. 하하, 고맙습니다.
태클을 걸어야 하는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었건만 알코올이 잔뜩 오른 두 사람은 좀 전의 과정에서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내 생각에 넌 눈이 꽤 높을 것 같은데."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이게 아니면 안된다~ 정도까진 아니고 기왕이면 하고 바라는 기호 몇 개가 있을 뿐이니까요."
"예를 들면?"
"으음…… 일단 좀 지적이었으면 좋겠고,"
시작부터 망한 것 같은데. 당대에 이름높은 현자를 기준으로 지적이라는건 대체 어느정도야?
"성격은 활발하든 얌전하든 별로 상관없으니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러니까 허들이 너무 높다고 임마.
"외적인 기준은 없나?"
"얼굴요? 앞서 말한 2개만 충족된다면야 얼굴쯤은 평균만 되도 좋습니다. 아니, 평균보다 조금 아래라도 괜찮아요."
제가 두 사람 분으로 잘생겼으니까요. 뿌듯하게 웃어보이는 그에게 검호는 두 사람이 아니라 수 십 어쩌면 100명 분의 미모를 빨아들인 것 같다고 말하려다 참았다.
"그러는 당신은 어떤가요?"
"응?"
"당신 여성 취향은 어떠냐고요."
그의 질문에 검호는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했다. 연애따윈 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바라는 여성이라는게 없진 않으니까.
"일단 긴 머리."
"흐음?"
"왜 있잖아, 긴 머리가 바람 불 때 샤랄라~하게 날리는거. 그거 엄청 예쁘잖아."
"더럽게 불편한데요. 특히 검호 당신이 말한 바람같은게 불면 머리카락이 목이랑 얼굴 근처에 치덕치덕 붙고 겨우 정리한게 엉켜서 처치 곤란입니다. 특히 머리 감아야할땐 감는게 아니라 거의 빨래하는 수준으로─"
"아 아무튼!"
여자는 아니지만 상당한 장발인 하얀 마법사의 경험담을 흘러넘기며 그는 술병을 기울인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술계통이면 좋겠어."
"예술계통이라면 구체적으로?"
"악기나 그림같은 걸 다루는 사람 말이야."
"아하."
하얀 마법사는 의외로 자세한 그의 취향에 눈을 빛내며 말을 계속 들었다. 자고로 이성에 대한 남의 이야기는 동서고금 흥미로운 주제다.
"난 그쪽에는 완전히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걸 잘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대단해 보이거든."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죠?"
"일종의 로망같은거야. 내가 못하는 분야에 대한."
거기 종사자들에겐 별거 아닌거라도 문외한이 보기엔 다 굉장해 보이잖아? 나도 그래. 특히 예술쪽은 더. 그 말에 하얀 마법사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당신은 예술같은 걸 잘 할 것처럼 보이지 않죠."
"뭐 임마?"
"이크, 검 뽑진 말아주세요."
어맛 뜨거라 과장스럽게 몸을 사리는 그의 모습에 검호는 인상을 쓰며 막 뽑으려던 검을 집어넣었다.
"또 없나요?"
"…… 자상했으면 좋겠어. 평범하게."
츤데레니 얀데레니 하는 건 라노벨에서나 인기있지, 현실에선 엄청 별로니까. 소박하다면 꽤 소박한 기호에 하얀 마법사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복잡한 것 같으면서 평범하네요. 검호 당신의 취향도."
"나부터 뛰어난 사람이 아닌데 무슨 눈이 높겠냐."
"전 당신부터 굉장한 전사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는 여전사 쪽이 취향일 줄 알았는거든요."
"뭐라는 거냐 너."
누가 굉장한 전사래. 검 휘두른지 이제 한 달 좀 넘는 사람한테.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취향이면서 여태껏 괜찮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나요?"
"……."
"한 번쯤은 있을 것 같은데. 찾고자 하면 어렵지도 않잖습니까."
검호는 침묵했다. 뭔가 생각하는건가 싶어서 기다리던 하얀 마법사는 주구장창 술만 들이키는 그의 모습에 땀을 삐질, 흘렸다.
"설마 한 번도 없는건가요?"
"……."
"잠깐, 진짜 단 한 번도 연인같은게 있었던 적이 없는 거였어요?"
"닥쳐! 내가 여자한테 인기없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살아온 인생 = 애인없는 인생이었지만 아직 고교생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던 걸 푹 쑤셔버렸다.
"나중에 대학가면 나도 여친 만들거거든?! 미팅도 하고 알바해서 돈도 번 다음에 데이트도 실컷 해볼거야!"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잘 되길 바랄게요…… 하하, 하."
술병을 호쾌하게 들이키는 검호의 모습에 하얀 마법사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거였다고는 하지만 병 하나를 통째로 비운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졌다.
"푸우…… 참, 원하는 거 하나 더 있었지."
"네? 뭔가요?"
"이거. 이거 컸으면 좋겠어."
검호는 말하지 않고 가슴 앞쪽에서 양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 노골적인 제스처가 무슨 뜻인지 하얀 마법사는 - 슬프게도 - 본능적으로 알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아…… 아, 네."
"뭘 이상한 놈 보듯 하는 거야. 넌 아니야?"
"개인적으로 그 부분 크기는 신경쓰지 않아서."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냐."
술에 풀린 눈이 별 이상한걸 본다는 시선을 하얀 마법사에게 던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에 척 손을 올리고 삿대질을 했다.
"야 잘 들어! 자고로 큰 쪽 좋아하는 남자는 평범한 변태고 작은 쪽 좋아하는 남자는 이상한 변태야!"
"그거 어느 쪽이든 변태라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당연하지. 남자는 결국 변태잖아?"
"…… 예외는 있습니다. 그쪽 기호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변태로 매도하진 말아주세요."
"그러고보니 너 여자가 잠자리에 난입해도 귀찮게 여긴다고 했지?"
하얀 마법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검호는 팔짱을 끼며 툭 말을 내뱉었다.
"너 혹시 고X냐?"
"──."
앞 뒤 잘라먹고 밑도 끝도없이 고X냐는 말을 들은 하얀 마법사는 대리석상처럼 굳었다가 끓어오르는 주전자처럼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왁 들고 일어났다.
"갑자기 뭡니까 그게─?!"
"아닌가?"
"아니 대체 왜 무슨 과정을 거쳐서 제가 고X라는 결과가 나온건가요!!"
"질릴 정도로 많은 여자가 들이대는데 전부 귀찮다고 여긴다면 그 이유는 제 취향이 아니거나 고X거나 둘 중 하나일거 아니야. 아까 들어보니까 전자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니가 큰 쪽도 작은 쪽도 관심없다니 후자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절대 아니에요!"
하얀 마법사는 샐쭉한 눈으로 '거짓말 같은데'라는 표정을 짓고있는 검호에게 외쳤다.
"연인은 없었지만 그쪽 경험은 많다고요!!"
"…… 엑?"
"뭡니까 그 표정!"
마치 세상의 법칙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경악한 그가 물었다.
"너 동정 마법사 아니었냐?"
"세상에 그런 불쾌한 마법사 군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빛의 마법사에요!"
그는 답답한 제 가슴을 두들기는걸로 모자라는지 힘껏 쥐어뜯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제가 여자한테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한 번도 안해봤다는 쪽이 더 이상하잖아요!"
"어어…… 어?"
"눈이 있으면 잘 보라고요!"
그리고 검호는 보았다. 자신만만하게 훗, 웃음을 짓는 하얀 마법사의 뒤로 비치는 후광을. 술때문에 붉어진 홍조마저 잘생김으로 소화시키는 경이로운 미모를. 아아 저 빛에 수많은 여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구나.
…… 저 자식 못해도 두 자리 수로 해봤다. 근거따위 없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거기다 수상한 걸로 따지면 검호 당신이 더 수상하거든요?"
"뭐?"
"저 만큼은 아니지만 당신 얼굴도 꽤 괜찮은데 여태까지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닙니까."
사실 하얀 마법사가 너무 미남이라 상대적으로 처져보일뿐이지 검호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그것도 잘생겼다기 보단 예쁘다 쪽의, 얼핏 여성으로 착각할만큼 곱고 가녀린 타입의 꽃미남. 단지 분위기가 굉장히 날카롭고 무거워서 그 얼굴이 전혀 효과를 발휘 못할 뿐, 이마저도 잘 하면 매력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검호는 들고있던 술병을 파삭 부쉈다.
"─ 뭐 이 짜샤!!"
"아하하, 왜 화내는거에요?"
"야 거기 서! 서라고!"
"싫습니다! 당신 주먹에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린다고요."
그리고 아까 당신 말 들었을때 제 기분이 그랬으니 반성해주세요. 할테니까 내려와 임마!
한 바탕 추격전을 치룬 둘은 잠시 후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술을 들이켰다. 특히 검호의 경우 달달한 맛과는 달리 독하기론 과일주 중에서 가장 독하다고 이름 높은 페어리 족의 과일주를 십 수병이나 해치웠고, 안주랍시고 술에 쩐 과일까지 많이 집어먹어 경이로운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의 몸은 끝내 항복을 선언했다.
"─했는데, 듣고 있어요 검호?"
"……."
"전혀 안 들은거에요? 딸꾹, 너무하네요. 기껏 말하는데 좀 들어달─"
"야."
검호는 차양막처럼 눈가를 덮고있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흉흉하게 치켜떠진 삼백안(三白眼)과 새빨갛게 물든 눈이 당장이라도 하얀 마법사를 찢어버릴듯이 노려보았다.
"셋 셀동안 닥치지 않으면 니놈 대갈통 쪼개버린다."
만취한 검호는 유감스러울 정도로 성격이 더러워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하얀 마법사:(´・ω・`)뇨롱
만우절 기념으로 써보는 외전. 엘린 숲에서 검호랑 하마가 부린 술주정의 일부분입니다. 둘 다 정신이 메롱하니 말도 막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