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손 안에 있는 것 --> side out.
땅을 가르며 터져나온 붉은색에 에반이 직격당하며 그대로 지하로 떨어지는 광경에, 제논과 미르는 더 볼 것도 없이 그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운 사태라 당황해서 움직이는게 한 발 늦어버렸고, 그들의 행위는 헛손질이 되었다.
[마스터─!!]
그대로 끝모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지하로 뛰어들려는 미르를 제논은 황급히 붙잡았다. 멈추세요!
[닥쳐 이거 놔! 마스터가, 마스터를 당장!]
"왜 그러는지 알겠지만 지금 내려가면 저희까지 당합니다!"
[뭐야?!]
부리부리하게 빛나는 황금안에도 제논은 조금의 물러섬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 공격이 방금 걸로 끝일거라는 보장이 없다고요!"
[그딴 거 알 바 아니야! 마스터를 구하는데 방해하지 마!!]
"무턱대고 내려갔다가 후속타가 날아오면 어쩔겁니까? 거기다 운좋게 무사히 내려간다 해도, 이 아래에는 이곳 일대에 지진을 일으킨 장본인이 있다고요! 그와 맞닥뜨렸다간 에반을 구하는 건 고사하고 누구도 살아나오지도 못합니다!"
제논은 미르의 꼬리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기세는 여전했지만 그의 말에 드래곤은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긴 했는지 뜨거운 콧김을 내뱉었다.
[…… 군단장을 말하는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닐겁니다."
[그럼 뭔데!?]
"일단 진정하고, 조금 전에 여기 오면서 에반이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일개 전사가 슬리피우드 일대에 지진을 일으킨거냐고. 몇 분 되지도 않았기에 당연히 기억하고 있는 미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깐 아니라며.]
"네. 그런데 방금 붉은색을 코앞에서 보고 제 예상이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붉은색은 검기였습니다.
[검기?]
"틀림없습니다. 범위도 위력도 터무니없었지만 그건 사람이 날린 검기였어요."
"잠깐만 제논, 그걸 어떻게……."
"예전에 거기서 본 적 있어."
단 한 번 밖에 못 봤지만 그 한 번이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져버렸다. 제논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눈치챈 루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그 사람이 이 아래에 있다고?"
"십중팔구 그럴거야."
"어째서 그가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지금 물러나야한다고 말할 거면 이 손 놔.]
죽어도 마스터를 구하러 갈거니까. 점점 일어나는 드래곤의 거체에 제논은 침을 삼켰다.
"도망치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 아래에 말도 안될정도로 강한 전사와 저희가 쫓아온 다른 마족 군단까지 진을 치고 있을 걸로 강하게 예상되는데, 아무런 준비없이 갔다간 에반을 구하는 건 고사하고 가자마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겁니다."
[그럼 어쩌라고!! 다시 말하지만 마스터를 포기하는 건 절대! 절대로 못─ 윽!]
콰직. 손아귀에 잡힌 꼬리 비늘들에 금이 갔다.
"……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희로는 안된다고요."
올라오는 통증에 인상을 쓰며 제논을 막 노려보려던 미르는, 소년의 눈이 생물의 것과는 거리가 먼 인광(燐光)으로 차갑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에반이 그 검기에 스쳐 절단된 부위는 양 다리의 종아리 아래와 팔 한쪽. 한 걸음만 더 나섰다면 상하반신이 분리되었겠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죠. 출혈과다가 우려되지만 당신의 마스터는 마법사입니다. 거기다, 틈 자체는 반듯하게 갈라졌지만 진동으로 많이 뒤틀렸고요. 바닥까지 수직으로 떨어져 처박히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더없이 침착하게, 감정을 배제해가며 기계처럼 돌아간 두뇌는 차분히 상황을 분석해 최선의 답을 내놓았다.
[하고싶은 말이, 뭐야.]
"도움을 요청하러 갑시다."
[누구 한테.]
"에반이 소속되어있다던 연합이든, 협회든, 누구라도 좋습니다."
블랙윙과 마족 군단이 득시글거리는 지하 던전에 함께 가줄 수 있는 이라면 누구든.
한편 루타비스에서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지시에 따라 이데아가 곧장 뒷정리를 시작했다.
"외부와 내부를 모두 정리해야하니 둘로 나눕니다! 바깥은 마법사 위주로 15명 4조를 만들어 각각 결계 수리, 위장 복구, 주위 환경 수복 그리고 이번 사건이 슬리피우드 일대에 어떤 여파가 퍼졌는지 빠르게 탐색해옵니다. 그들을 제외하고 여기에 남을 사람들은 크게 방해물 제거, 인명구조, 응급처치 세 역할로 나누어 움직이십시오!"
""알겠습니다!""
지시하는 이데아도 그 말에 따르는 노바족도 모두 더없이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무너진 폐허 속을 뒤지는 것도,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 구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그닥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후처리 작업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데아님. 그럼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한 노바족이 쓰러진 마족들과 데미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문신을 새겨졌던 뺨을 느리게 내려쓸며 생각하다 그대로 팔짱을 꼈다.
"…… 마찬가지로 치료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나중에 저들에게서 알아내야 하는게 많으니까요. 그리고 치료도 거창하게 할 것 없이 죽지않을 정도로 응급처치만 해두고, 예외적으로 저 군단장만은 직접 데려가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이들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개중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몇몇 마족은 자신들의 주군을 들것에 실어나르려는 노바족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숫적으로 우위에 있던 건 노바 측이었기에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안정을 빙자한 기절을 당해야했다.
이데아는 진행되고 있는 구조작업 상황과 의약품 재고 상태, 당장 쓸 수 있는 인원 등을 실시간으로 계속 보고받으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하나 생각했고, 그러던 중 어떤 수단을 떠올려 조심스럽게 아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흙봉분에 파묻힌 세피로트를 보고 흠칫 멈췄다가 지나쳤고, 아이의 뒤에 조용히 섰다.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오버시어시여."
"조금 힘써줬다고 나를 아주 만물상자로 보는거냐."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슨 용건인지 읽어낸 아이는 섬뜩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배짱이 두둑해졌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버려서인지 눈빛만으로 심장이 수 십번은 꿰뚫리는듯한 압박감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이곳 중앙동 위에 층을 하나 더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발버둥도 그쯤되면 예술이구나."
"살기위해선 뭐든 해야하니까요."
그리고 상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삶을 향한 의지만은 폄하하지 않는 '생명'의 오버시어다. 그녀가 거기까지 계산하고 말하는 중이란 걸 훤히 들여다 본 아이는 기가찬다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망념에 사로잡혀 끌려다니는 주제에 어딜 감히 생존의지를 들먹이는 거냐?"
"예?"
"됐다. 귀찮지만 여기서 무시하면 저 사랑에 눈 먼 여자가 뛰쳐나와 내 배를 갈라버리겠지."
내가 어쩌다가 고양이 로봇 꼴이 됐는지. 작게 투덜거린 아이는 쩍쩍 갈라진 천장을 슬쩍 올려다보았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소한 행동에 이데아는 자신이 말한게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 죽을 때 곱게 못 죽을거다."
"예전부터 그럴거라 생각했습니다."
살벌한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받아넘긴 그녀는 차분히 노바족들에게 다음 일을 지시했다.
"어느정도 정리가 되는대로 마족들과 저기 쓰러진 네 마리의 괴물들을 만들어진 윗층으로 옮길 겁니다. 나중에 이곳을 찾아올 이들에게 던져줄 '그럴싸한 것들'이니까요."
"그럼 응급처치는……?"
"강한 진통제 듬뿍 써주세요. 어쨌든 부상자이지 않습니까."
노바족들이 사용하는 진통제 중엔 마약류도 포함되어 있다.
마족들의 처우를 결정한 그녀는 부하를 시켜 다른 동에 머물고 있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당황하던 키네시스를 불러냈다. 큰 지진과 폭음에 루타비스에 뭔가 큰 일이 생겼다는 건 알았지만, 이 지경이 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소년은 폐허가 다 된 중앙동의 상태에 채 놀라기도 전에 파편 정리 작업에 동원되었고, 정리가 어느정도 끝낸 뒤에는 또다른 지시를 받았다.
"잠깐 뭐? 저것들을 어떻게 하라고?"
"못 들었습니까? 염동력으로 들어서 위에 옮겨두라고요."
이리저리 부서지고 꺾였지만 어쨌든 흉악한 생김새인 루타비스 4인방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키네시스는 질겁할 수 밖에 없었다. 몬스터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아도 저것들이 강할거라는 건 대충 보고도 모르는게 이상했으니까.
"그걸 왜 내가, 아니 여기 마법사들 많잖아?!"
"그 마법사들이 전부 바쁘니까 키네시스 군을 부른거잖습니까. 군소리 하지말고 빨리 움직이세요. 시간 없습니다."
"아니 옮기는 중에 만약 깨어나기라도 하면……."
"그건 걱정마세요."
조금 전에 그가 다져놓아서 이미 죽었거나 죽기 직전의 상태거든요. 응? 누가 뭘 했다고? 닥치고 빨리 옮기기나 하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 이데아는 마음같아선 저기 봉분에 파묻힌 세피로트도 끄집어내고 싶었으나 그래도 싸운 공이 있으니 당장은 넘어가주어야 했다. 그 대신 전투에 끼어들지 않아 멀쩡한 상태인 은월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고.
그녀는 전투가 벌어졌던 중심에 덩그라니 남겨진 아스카의 손까지 빌려볼까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냥 내버려두는 쪽이 좋겠지. 그보다 디멘션 게이트로 넘어간 검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했기에 다른 부하를 시켜 판테온쪽에 목격자가 있는지 찾았다.
그렇게 루타비스가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 미르와 제논은 막 엘리니아에 도착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제논은 마을에 도착함과 동시에 연합의 엘리니아 지부를 찾아내 문을 박살내며 쳐들어갔다. 지부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보았지만 제논은 이곳 사람들 중 가장 강한 이가 누구인가 분석하기 위해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하기 바빴다.
시간이 없어. 드래곤에게 무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당장 진정시키기 위해 했던 말에 가까웠고, 실제로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중상에 빈사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지진을 일으킨 이로 유력한 사람이 '그'만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미르와 함께 끈없는 번지점프를 했겠지.
"이봐, 용건이 뭐길래 갑자기 문을 부수며 들어온거야?"
입구 근처에 있던 시그너스 기사단원 한 명이 인상을 쓰며 물었지만 제논은 대꾸하지않고 눈을 굴리기 바빴다. 어디를 봐도 강한 사람이 없다. 차라리 드래곤과 함께 마법사 협회쪽으로 가야했나? 하지만 거긴 지금 사람이 많이 없다고 들었는데.
"야! 내 말 무시하는거냐?! 그리고 너 이 문 어쩔거야?"
잘 생각해보니 연합 본부도 아니고 일개 지부에 홀로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사람과 싸울 수 있는 강자가 대기하고 있을 리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족 무리들과 용의 후예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메이플 월드에 흔하지도 않고.
요란하게 들어왔으면서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서서 눈만 굴리고 있는 제논을 보다못한 한 시그너스 기사단원은 소년의 어깨를 잡아 흔들려고 했으나, 뒤이은 방문객에 그러지 못했다.
"무슨 일이길래 문이 부서져 있는거지."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 거야?"
"아, 저, 죄송합니다.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방문객이 대체 누구인지 갑자기 당황하며 저를 잡아끄려는 기사단원의 손에 제논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경악했다.
"조사대는 준비됐어?"
"예. 거의 다 됐습니다."
"아직도 안된 부분이 있나."
"슬리피우드 주민들 중에서 적당한 안내인을 구해야 하는데, 급히 도망쳐나온 걸로 보이는 주민들이 하나같이 거절해서……."
"곤란하네."
한 남자와 두 여자로 구성된 그 일행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 중 '그'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힘이 느껴졌기에.
"─당신들!!"
"응?"
"…… 뭐지."
제논은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마법사인지 긴 지팡이를 들고있던 남자는 소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오드아이를 찡그렸고, 제논을 잡아끌었던 시그너스 기사단원은 소년의 돌발행동에 기겁하며 남자에게서 떨어뜨리려 했다.
"야야, 야 빨리 그 손 놔! 이분이 누군줄 알고……!"
"잠시 저와 함께 가주세요! 한시가 급한 일이라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야?"
"그보다 넌 누구지?"
"설명은 가면서 해드릴테니 지금은 따라와주─"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우지끈!! 나무 기둥 허리가 분질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비늘에 덮힌 앞다리가 천장을 뚫고 내리찍혔다.
[늦어!! 뭘 하고 있길래 이렇게 늦는 거야?!]
뻥 뚫린 천장 구멍으로도 전신이 다 안 보이는 거체의 드래곤이 희번뜩하게 빛나는 황금안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졸지에 용의 포효를 뒤집어쓴 사람들 중 몇몇은 풀썩 쓰러져버렸고, 제논의 얼굴엔 낭패의 기색이 잔뜩 떠올랐다.
"지금 막 찾았으니 진정하세요!"
"이건 또 무슨…… 너 그 꼬맹이의 오닉스 드래곤이잖아?"
"뭐? 저놈이 미르라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새 이렇게 큰거야?"
아는 사이였나?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현재 상황에서 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될리는 없는 사실이다. 반쯤 눈이 돌아가있던 미르도 뒤늦게 그들을 알아보았다.
[너희들 여기 있었어?]
"마스터는 어디 내버려두고 이러고 있는 거지. 이런 짓을 하면 너의 마스터인 그 꼬맹이가 매우 곤란해지는 걸 모르나."
"우린 지금 급히 갈 곳도 있어서 도와줄 시간도 없다고."
[그딴 건 알 바 아니야! 마스터를 구하는데 너희가 필요하다고!!]
"에반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다. 제논은 붙들고 있던 남자의 팔과 또다른 여자의 팔까지 잡아당기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가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를 구하려면 최소한 군단장을 상대할 수 있는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 쭉 의아한 표정이던 그들의 얼굴이 한 순간에 싹 바뀌었다.
"어디로 가면 되지?"
"당장 안내해."
"아, 알겠습니다."
이중인격인가 생각될정도로 급격한 변화에 제논은 잠깐 당황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일단 미르의 등에 타달라고 부탁했다.
"자자, 잠깐만요 영웅님들. 그러면 슬리피우드 조사는……!"
"나중에 갈테니 조사대가 준비되는대로 먼저 출발시켜라."
"군단장 얘기가 나온만큼 이쪽이 더 급해."
오가는 대화에 그제서야 이쪽의 상황을 파악한 루티가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연합이 마족 무리의 습격, 슬리피우드의 이변 등을 이제 파악한 것 같은데."
"그러게."
페리온에서 목격하자마자 바로 뒤쫓아갔던 그들에 비해선 늦은 편이었지만 벌써 조사대가 꾸려졌다는 걸 보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가려는 곳도 슬리피우드니까요."
"뭐?"
[출발할테니까 꽉 잡아!]
용의 날개가 크게 펄럭이며 일으킨 돌풍이 끝내 구멍뚫린 연합 지부의 천장을 반파시켰다. 저거 뒷수습 우리가 해야하는거 아니지? 루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제논은 그러면 도망치자고 대꾸했다.
슬리피우드로 가는 동안 그들은 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에반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거야?"
"슬리피우드로 간다고 했는데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건가?"
"굳이 군단장을 언급한 이유는 그들과 연관이 있어서로 추측되는데 확실한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쏟아지는 질문에 하나씩 물어봐달라고 부탁했겠지만 제논은 슬리피우드까지의 남은 거리를 재며 간결하게 답했다.
"세 분의 질문을 모두 답해드리자면 지금 저희는 슬리피우드 일대에 군단장이 일으켰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건에 휩쓸린 에반을 구하러 가는 겁니다."
"그 사건이란게 페리온에서 목격되었다는 마족 무리와 관련되어 있나."
"예. 거기다 추가적으로 블랙윙도 엮여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블랙윙까지?"
[그러고보니 너 아까 블랙윙도 거기 있을거라고 확신했었는데 무슨 근거로 했던 말이야?]
미르의 물음까지 더해지며 제논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유일하게 염려어린 눈으로 보고있는 루티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준 제논은 작게 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제가 블랙윙도 관계되어 있다고 확신한 이유는, 지진을 일으키며 튀어나왔던 붉은 검기를 블랙윙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붉은…… 검기?"
"예."
어째선지 세 사람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당혹감과 의구심, 설마하는 가정 등이 섞여있는 그 표정에서 유일하게 빠진 것은 제논이 말한 붉은 검기가 가리킨 대상이 누군가하는 의문뿐이었다.
[블랙윙에서 보았다고? 니가 어떻게?]
"저는 비교적 최근까지…… 블랙윙에 있었으니까요."
"뭐라고?!"
"무슨 뜻인지 똑바로 설명해라. 대답여하에 따라 너의 처우가 결정된다."
말끝나기 무섭게 그들에게서 일어난 거친 기세와 마력에 제논은 자신의 안목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하게 되었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줄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을 꺼내려는 순간 그들이 타고 있던 용의 거체가 쿠웅─! 땅에 착지했다.
[들어가면서 계속 얘기해봐.]
"…… 알겠습니다."
작게 크기를 줄인 미르를 머리에 얹은 제논은 이어서 루티를 안아들며 머릿속 한 쪽에 입력해두었던 조금 전에 갔던 안개 습지까지의 루트를 떠올렸다.
"너는 블랙윙 소속이었나?"
"엄밀히 따지면 그랬습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고?"
"제논은 블랙윙에서 탈출했어."
루티의 말에 세 사람 - 루미너스, 아란, 메르세데스의 기세가 누그러지며 동시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저는 그곳에서 만들어진 전투 병기입니다."
[병기? 넌 사람이잖아.]
"정확히는 인간을 소체로 만들어진 병기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과 다를바 없지만 내부를 보게 되면 저 말은 절대 안나오겠지. '인간을 소체로~'라는 대목에서 루미너스가 인상을 썼다.
"설마 키메라같은 건가?"
"제가 만들어질 때 연금술이 쓰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블랙윙에서 만들어졌다는 병기가 왜 탈출했고, 또 그곳에서 보았다는 붉은 검기라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말해보아라."
메르세데스의 명령에 가까운 말을 반쯤 흘려넘기며 제논은 미르에게 아직 에반의 목숨이 붙어있냐고 물어보았다. 계약은 끊어지지 않았어. 다행이군요. 야 내 말 무시하는거야?!
"저는 제 인간일 때의 기억을 찾고 싶어서 그곳을 탈출했습니다."
"난 그때 제논과 함께 나왔어!"
"그리고 붉은 검기에 대한 것이라면, 저는 블랙윙 연구소에 있는 동안 전투데이터 축적을 위해 다양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 1:1 대련을 해주던 한 남자가 있었고, 그가 붉은 검기를 썼었죠."
"그 사람이 누구지?"
"여러분이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드댄서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블랙윙의 최고위 간부죠.
뒤따라오던 발소리들이 뚝 멈췄다. 무슨 일인가싶어 고개를 돌려본 제논은 세 사람 모두 정수리부터 액체질소라도 끼얹어진 양 얼어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왜 저러지?
"…… 말해."
"예?"
"그에 대해 아는대로 다 말하라고!!"
"자, 잠깐만요 갑자기 무슨?!"
양 어깨를 콱 움켜쥐는 아란의 손아귀에 제논은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상식 밖이다! 여자는 같은 나이의 남자보다 근력이 약하다는 기초 상식을 실시간으로 박살내주고 있는 아란의 악력에 일단 손부터 놓아달라고 앓는 부탁을 했지만, 어째선지 눈이 돌아간 그녀는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며 제논을 마구 흔드는 지경까지 가버렸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얻게 될 줄은……."
"거기다 아까 미스틱 게이트가 어쩌고 한 건 요즘 나타나고 있는 그 이상한 포탈인 것 같은데 맞지?"
"십중팔구 맞을거다."
[딴짓 그만하고 지금 마스터를 구하러 가야한다고 했잖아!!]
제논의 머리 위에 있던 미르가 꼬리를 휘둘러 아란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윽! 떨어져! 이게 뭐하는 짓이야!
"오닉스 드래곤. 너의 마스터인 그 꼬맹이는 아마 무사할거다."
[뭐?]
"당장 들은 것들만 정리해볼때, 이번에 슬리피우드를 습격했다는 마족 무리와 그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고 거기에 그 꼬맹이가 휩쓸린 것 같은데 맞나?"
"맞습니다."
"만약 그가 있는 곳에 그 꼬맹이가 있다면 의외로 꽤 높은 확률로 무사할 수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자였으니까. 누가봐도 마법사인 에반이 자신이 아는 한 최고 수준의 전사였던 그와 어떻게 사제관계가 성립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제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미르는 꽥 소리쳤다.
[하지만 마스터는 그놈이 날린 검기때문에 다쳐서 지하로 떨어졌다고!]
"……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잠깐, 아까 마족들이랑 그가 슬리피우드에서 어떤 사건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그게 뭐야? 마을 습격이 끝이 아니었어?"
"그건 곧 보게 될겁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들은 마침내 안개 습지에 다다랐고, 제논의 말에 따라 희뿌연한 안개 너머를 보기 위해 시력을 돋웠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당황했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고요하기만 한 습지의 풍경에.
***
마족들의 습격 이후 숨가쁘게 뒷수습을 하던 루타비스는 며칠이 지나며 넘쳐나던 부상자와 사실상 완파된 시설을 정리하며 겨우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한때 포션 사업을 하며 쌓아두었던 재고 포션들과 재료용 약초들을 아낌없이 쓰고, 부서진 시설도 처음부터 오래 쓸 예정으로 만든 것들이 아니었는데다 중요한 의료, 군사 시설은 다른 동에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데아는 이런 결과를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슬슬 저쪽이 이곳을 찾아낼겁니다."
"역시 그렇겠지."
마족 무리들이 원체 화려하게 습격해준 덕에 현재 연합의 조사대는 핀포인트로 슬리피우드를 찍어 습지 곳곳을 들쑤시며 그들의 흔적을 찾고있는 상황이었다.
당일 어느정도 복구해낸 결계와 위장이 효과를 발휘해주고 있었지만 그게 오래갈 리 없다. 오히려 그 큰 사건이 일어난 근원지가 멀쩡하다는게 더없이 수상하지 않은가? 당장의 침입은 막았지만, 근시일 내에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요 며칠동안 연합의 조사대를 정령을 통해 감시한 은월이 물었다.
"그들에게 언제 마족을 넘겨줄거지?"
"자력으로 이곳을 찾아낼쯤에요. 조력같은 걸 할 필요도 없이, 못해도 일주일 안에 찾아낼 것으로 보이니까요."
결국 들킬거면 피해는 최소한으로. 어차피 저들은 루타비스의 구조도 모르고, 찾고있던 것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면 그 이후는 딱히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곤란한 건 지금 조사에 참여하고 있는 영웅들입니다."
"무려 3명이나 있던데. 심지어 그 전직 군단장도 합류할 기색이고."
"조사대의 어중이떠중이들보다 그들이 더 거치적거리는게 사실이죠."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경험이란 것의 힘을 이데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은 마력 밀집지대임과 동시에 오버시어가 모았던 생명의 힘이 풍부하다는 겁니다. 마법적인 탐색은 사실상 막힌거나 다름없죠."
"그건 그렇지만 육감은 어떻게 할거지?"
전사든 마법사든 영웅쯤 되는 이의 감이라는건 절대 경시해서는 안된다. 은월 스스로부터 자신의 감을 꽤 믿고있고, 또 잘 맞는 축에 속하기에 저들 중 누군가가 마족들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걸 눈치챌 경우 그냥 넘어갈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누가 이 속임수를 눈치챌 것 같나요?"
"일단 아란이랑 루미너스는 확실히 간파할거다. 전 마족 군단장도 무시할 수 없고."
"요주의는 3명이군요…… 그 정도면 방법이 있으니 걱정안해도 됩니다."
직감으로 무언가가 숨겨져있는걸 알아낸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구체적으로 모를테니 이 역시 또다른 그럴싸한 것을 끼워넣음으로 속여넘길 수 있다.
그 그럴싸한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얼음마녀가 준비한거면 어련히 잘할거라 생각한 세피로트는 한쪽 팔로 턱을 괴었다.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슬슬 형씨한테 가봐야하는거 아니야? 최소한 의견정도는 들어봐야 하잖아."
"그렇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어디있는지 알아냈나?"
"물론이죠. 당일 바로 알아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찾아가지 못했을 뿐, 디멘션 게이트로 넘어간 그를 본 목격자는 꽤 많아서 현 위치정도는 알아낸지 오래다. 그가 가버린 이후부터 쭉 파리한 안색인 아스카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계약의 끈을 더듬었다.
"…… 마스터의 상태가 안 좋아."
"그 정도입니까?"
"그렇게 날뛰었는데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쪽이 이상하다만…… 어떤 상태인지는 몰라도 슬슬 데리고 오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쪽도 어느정도 정리되었으니까 빨리 갔다오면 괜찮다고 보는데 난."
은월과 세피로트의 말에 이데아는 잠시 생각했다. 디멘션 게이트로 이어졌다해도 그란디스와 메이플 월드는 여전히 다른 차원이었고, 두 차원의 시간 흐름은 아직도 차이가 많이 나는 상황이다. 이쪽은 며칠이 지났지만 저쪽은 하루도 지나지 않았을 터. 지금쯤 폭주의 반동으로 그란디스 어딘가에 쓰러져있을 그를 아직까지 찾아가지 않은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이제 더이상 늦추면 안되겠지. 결정을 내린 그녀는 엔젤릭 버스터와 카이저를 불러 잠시 판테온에 갔다오는 동안 루타비스를 지키라고 지시를 내린 뒤 구급키트를 챙겨들었다.
"그럼 이제 갑시다."
한 치의 시간낭비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네 사람은 게이트를 넘어 대성당에 도착하자마자 시간의 오버시어가 봉인되어있는 곳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야 했다.
"그런데 그는 왜 하필 거기에 간거지?"
"나야 모르지. 그곳에 아무도 없어서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거기 도착해버린 것일 수도 있고 뭐.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
그가 대답해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세피로트가 입밖으로 내뱉지않은 말까지 알아들은 은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상태일지는 모르지만 몸이든 정신이든 둘 중 하나라도 정상이면 좋을텐데.
"제 추측으로는 당신들, 트립퍼란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오버시어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지 않나요? 처음 이곳을 발견해낸 파픈스타 님도 그러했지만, 누가 가르쳐주거나 등떠밀지 않아도 당신들은 시간의 오버시어가 있는 곳을 결국 찾아가잖습니까. 트립퍼라는게 만들어진 목적을 생각하면 본능이나 무의식의 영역에 그런 세팅이 되어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회귀 본능같은거라고 보는 건가?"
"그런 셈이죠."
"하, 썩을. 사실이면 진짜 기분 엿같은데."
세피로트는 답지않게 거친 욕설을 내뱉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곧 바닥에 도착합니다. 혹시 모르니 준비를 하십시오."
수정과 얼음 사이의 무언가로 구성된 기나긴 계단이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오버시어의 봉인지에 도착했다.
찰팍!
"…… 응?"
"뭐야?"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뭔가가 그들의 신발을 적셨다. 몇몇은 순간 물인가 싶었지만, 차갑게 깔린 옅은 비린내에 불길한 예감이 든 이데아가 황급히 밝은 광원을 띄움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투명한 붉은 색의 액체가 뿌리처럼 온 사방에 번져있었다.
"끄, 흐으… 후욱……."
그 근원지인 거대한 얼음 문 앞에 한 사람이 잔뜩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조금만 숨을 쉬고 신음할때마다 마른 나무껍질처럼 갈라진 피부에서 핏물이 떨어져내렸고, 수정질의 바닥은 그 액체를 조금도 흡수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흘려보냈다. 얼핏 봐도 출혈과다로 죽지않은게 용한 양이었다.
상상이상으로 끔찍한 그의 상태와 일대의 풍경에 네 사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그 경악어린 침묵을 한 사람이 깨뜨렸다.
"죽으면 안돼 마스터──!"
돌진하다시피 뛰쳐나간 아스카는 그대로 그를 와락 껴안았다.
"크, 잠, 커억!!"
"미미, 미안해 마스터! 당장 치료를!"
이 무슨 참사인지. 아스카의 손이 닿을때마다 연이어 울리는 근육과 뼈의 비명소리에 이데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당신, 당장 메이플 월드로 돌아가세요."
"뭘 준비하면 되는거지?"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반문따위 없이 이데아의 목적을 파악한 은월은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내 뛰어나갈 자세를 취했다.
"집중치료실에 곧 환자를 보낼테니 대기하라고 전하세요."
"알았다."
"나는?"
말끝나자마자 내려온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바람처럼 올라가버린 은월의 뒷모습을 본 세피로트가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마세요."
"…… 뭐?"
"농담입니다. 당신의 시간의 힘으로 그의 고통을 덜어주시죠."
진짜 농담맞나. 왠지 날 어디 써야할지 바로 생각나지 않다가 즉석으로 떠올린 것 같은데.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따윌 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의심이 갔다.
"빨리 움직이지않고 뭐합니까?"
"아, 알았어."
하지만 더이상 물어볼 틈같은 건 없었기에 세피로트는 재빨리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 한 손에 백금의 안개를 일으켰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그의 고통을 자신에게 옮겨주면 조금이나마 상태가 나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먼저 팔의 고통을 전이했다.
"─히끄으으읍?!"
"뭐하는 겁니까?"
"이이, 이, 이게 뭐, 무슨, 뭐야! 큽, 어떻게 이런 걸……!"
세포 하나하나를 바늘로 찢어내는듯한 격통에 청록색 동공이 확 쪼그라들었다. 고통을 전이받은 팔을 감싸쥔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기세인 그의 모습에 이데아는 현재 검호의 상태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고, 일단 출혈부터 막기위해 구급키트에서 붕대를 꺼냈다.
"회복 마법은 어떻습니까?"
"거의 안 통해! 스킬 반동으로 돌아온 거라 마법으로 치료되지 않아!"
"이거 참,"
곤란하기 짝에 없군요. 그녀는 서슬푸른 눈으로 덜덜 떨며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세피로트를 끄잡아당겼다.
"빨리 힘쓰지 않고 뭐합니까?"
"야 잠깐, 잠깐만. 나 조금만 쉬고……."
"쉴 틈따위 없습니다! 목숨 간당한 건 이쪽이지 당신이 아니니 배부른 소리따위 집어치우세요!"
결국 세피로트는 이데아에게 머리채를 잡힌 끝에 울며 겨자먹기로 또 고통 전이를 써야했다. 그 결과 검호의 상태가 어느정도 호전되자 아스카와 이데아는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는 세피로트를 뒤로하고 디멘션 게이트로 건너갔다.
***
검호side.
빛이 여러 번 점멸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렸고, 뭔가가 피부에 여러 번 닿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픈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만신창이의 몸과 정신은 끝모를 물속에 잠기듯 흐리게 녹아들어갔다.
나는 왜……?
왜 이렇게…….
머릿속을 떠다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그 질문의 답은 또 뭐였는지 알 수 없어졌고.
…… 피곤해. 쉬고싶어.
이윽고 생각하는 것마저 지쳐버려 이젠 그냥 다 놓고싶다는 중얼거림만 남았다.
─그래도 상관없는거냐.
삐죽한 질문이 암초처럼 불쑥 나타나 쿡 찔러왔다.
─정말로, 다 내려놓아도 상관없나.
지쳤어. 힘들다고. 전부 다 꼬여서 이 지경이 됐는데 뭘 더 하고싶겠어.
─…… 납득이 가는 이유이긴 하지만 한심하군.
어쩔 수 없잖아. 누구라도 이런 일 겪으면 같은 생각 할거라고.
─만약 그것들을 다 내려놓는다면 정말 편해질거라 생각하나?
그렇겠지. 더이상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을테니까.
─그럼 왜 그 일들을 해온거냐.
뭐?
─옛저녁에 그것들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울거라는 걸 다 알았으면서 왜 지금까지 뿌득뿌득 버텨왔냔 말이다.
그 질문의 답을 떠올리려는 순간, 의식이 끌어올려졌다.
표백했다고 생각될만큼 깨끗한 천장과 근처에서 들려오는 낯선 기계의 엔진음, 삐삐거리는 전자음에 이곳이 어딘지 여럼풋이 알았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팔을 움직이자 뭔가가 팽팽히 당겨졌고, 눈을 굴려보니 굵은 관들이 꽂혀있는게 보였다.
"이제 일어난건가요."
차가운, 그러나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이는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걸로 보이는 이데아였다.
"정말 경이로운 치유력이네요. 응급처치랑 수술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회복되버릴 줄은……."
"…… 뭐가… 어떻게."
"스킬을 쓴 반동으로 죽어가고 있던 당신을 데리고 와서 살려냈습니다. 마법으로 고칠 수 없는 고통과 상처 일부를 세피로트가 전이시키고, 물리적으로 상처를 틀어막아 악화만은 면하게 했죠. 나머지는 포션과 당신의 자가치유력에 기댔고요."
어쩐지 꿰멘 자국이 많이 보이는 건 그것때문인가. 그 사이 이데아는 한쪽에 걸린 전화를 들어 내가 깨어났다고 어딘가에 알렸다.
"나중에 회복기를 써보고, 사용된다면 남은 상처들을 재생시키세요. 돌아가는 상황이 급해서 설명할 시간도 없으니 곧 올 사람한테 자세한 걸 묻고─"
"마스터!!"
"방금 검호가 정신을 깨어났다는게 사실인가?!"
전화 내려놓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들이닥치는 거야? 아스카는 그렇다치더라도 옆구리에 세피로트를 끼고 뛰어들어온 유에까지 보니 기분이 묘했다. 왜 하나같이 다행이라는 표정인거냐고. 루타비스 한복판에서 그 대참사를 일으켰는데 어째서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거야?
아, 루타비스는 어떻게 됐지. 일단 여긴 의료동인 걸로 보이는데 피해가 여기까지 미치진 않은 건가. 하지만 다른 노바족들이랑 마족들은…… 데미안은 또 어떻게 됐지? 설마 죽은 건가? 드문드문 끊긴 기억들과 의문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머릿속을 한가득 채워버렸다.
"상황은…… 어떻지."
"솔직하게 말해드릴까요?"
달라붙으려는 두 사람을 제지하던 그녀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을 섞을 생각이었나."
"당장 다 말하기엔 시간이 없어서 간추릴 생각은 있었습니다."
"그냥 전부 말해라."
"예."
그들에게 잠시 떨어지라고 말한 이데아는 의자에 앉으며 한차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현 상황만 말하자면, 마족 무리들이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오는 걸 본 목격자들과 당신이 힘을 쓰며 슬리피우드 일대에 퍼진 여파때문에 지금 루타비스 윗쪽에선 연합의 조사대와 영웅들이 군단이 이곳 어딘가에 있을거라 확신하고 찾는 중입니다."
완전히 망했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상황만 놓고볼 때 루타비스를 버리고 판테온으로 가는게 현명하겠지만, 이곳엔 그란디스와 이어진 디멘션 게이트가 있어서 버릴 수도 없거든요. 그래서 위장 마법이랑 인식 교란 마법으로 시간을 버는 중입니다."
"큰 걱정은 마라. 조만간 그들이 이곳을 발견하면 사전에 잡아둔 마족들을 미끼로 던져줄테니까."
"처음엔 좀 반항하던데 데미안을 인질로 협박했더니 고분고분 듣더라고."
아니 그게 아니잖아. 왜 그런 방법들은 태연하게 입에 담는거야. 너희 그런 성격 아니었잖아.
"표정이 왜 그렇지? 아직 거동이 불편한가?"
"방금 깨어난 사람인데 걸어다닐 수 있을리 없잖습니까. 아무리 그라도 일단 사람입니다."
"휠체어, 가져올까?"
"그냥 침대째로 이동시키도록 하죠."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이런 수단을 쓰는데 거부감이나 망설임은 있었던 사람들인데 왜 지금은 그런게 거의 사라졌고, 또 일을 이지경으로 만든 원흉 중 하나인 나를 나무라지 않는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데미안의 망발에 이성을 잃어버렸을 때?
조급한 마음에 생명의 오버시어에게 메이플 월드를 복원시켜 달라고 부탁했을 때?
블랙윙에 소속되면 군단장들이 날뛰는 걸 제어할 수 있을거라고 감히 장담했을 때?
이 문제의 답은, 일찍히 알고 있었다.
"…… 아아."
기절하고 싶을만큼 고통스럽지만, 기절할 수도 없을정도로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할 수 있었던 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밖에 없었기에, 대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일의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갔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 근원이 무엇이지.
"나는, 내가."
결국 답은 간단했다.
"내가…… 틀렸어."
잘못된 건 나였다.
========== 작품 후기 ==========
시오버의 예언인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 근데 왜 저렇게 표현했냐고요? 오버시어의 표현력에 뭘 바라는거에요?
독자분들은 제 글의 전투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항상 전투를 묘사할때마다 오래 걸리고, 몇 번을 써도 썩 잘 써지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죠. 이번 데미안과의 전투도 쳐낸게 꽤 되기도 하고... 앞으로도 써야할 전투씬이 많은데 이대로 계속 써도 괜찮을까요?
설정편 리코멘은 #입니다.
@레볼레이션 - 에/반 아니에요!
@Ratios - 제이 특요가 이번에 굉장히 잘 나왔다던데...
@은하수같이 - 은혼의 타카스기 신스케와 비슷합니다. 저음의 미성인데 무섭다? 오싹하다? 는 면에서. 나루토의 마다라도 생각해봤는데 이쪽은 고풍스러운 느낌이라 좀 다름.
@소망eh - 어떻게 되긴요? 루타비스에 다이렉트로 입장! 입니다.
@건전한독자 - 솔직히 지금까지 구른걸 보면 공간정도는 자를 수 있게 해줘야 함.
@류동지 - (흠칫!)스, 스포하지 마세요.
@stellarion - 트립퍼 무기가 파괴불가인 이유는 무기의 시간이 멈춰서 입니다. 내구도가 무한이라는 개념. 그래서 내구도에 상관없이 다 베어버리는 공간절단을 맞으면 잘리긴 합니다. 그런데 잘려도 자가수복 기능이 있어서...
@에니네 - 멘붕과 멘붕의 연속.
@밤일 - 헛수고는 아니었습니다. 시간 벌어줘서 데미안이 살았음.
@서월마을 - 예전에 사이키커가 처음 학살 벌였을때 나서서 고친 적이 있었죠. 지금은 약해져서 이정도 밖에 못하지만, 시오버는 가능한한 트립퍼가 메이플 월드의 생명체들을 헤치는 막고자 합니다.
@SoranoRu - 전통적인 해결책이죠~
@AbViaLectea - 진심 어머니 덕입니다.
@알사탕은데구르르 - 조별과제로 바빠서 빠른 시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왔습니다.
@Legendssj2 - 세피로트의 캐릭터 의의는 검호와는 다른 의미로 안습이니까요.
@Yoontlemin - 조금만 삐끗했으면 진짜 이렇게 됐겠지...
@월하만향 - 불꽃길이 레알 인페르노가 되었는데요?
@좀비라스 - 떨어진 에반은 다음이나 다다음에 나올듯.
@네임0306 - 틈틈이 활약하는데 보상을 못 받는듯한.
@책벌레씨 - 발견하는게 늦었으면 진짜 죽었을겁니다 이번 검호.
@루엔시르온 - 이번 챕터에서 찾을 수 있길 기원해봅시다.
@ReFrante - 제논은 하는 행동에 비해 묘하게 상식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갓타치 - 제가 저 기술 쓰게 하는걸 얼마나 기다렸는지!
@Linener - 아직 살아있습니다.
@륑씨 - 예 정확합니다! 레전드1스킬이에요. 추가로 말하자면 그 뒤에 불기둥? 비슷한 거 솟구치는 것도 쓸까 했는데 마구 쓰다보니 생략됨.
@Blake117 - 어허! 에반을 이런데서 죽일리 없잖아요!
@Sisre - 에반은 연합쪽의 주인공 포지션이라 이런 식으로 죽일마음 없습니다.
@kaizeth - 세 번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순서대로 이루어진다고 안했어요~
@오무ris - 묘사의 차이죠. 검호는 처절하다는 느낌으로, 세피로트는 설렁설렁? 은 아니지만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해야할까요.
@찬양천사 - 상성의 문제입니다.
@육합 - 지구로 돌아가면 세피로트도 제대로 된 애인이 생길... 까요?
@대어의예감 - 일어나기 무섭게 남은 멘탈도 깨짐.
@레시코 - 그냥 팔다리 썩둑! 입니다.
@마슈멜로 - 진짜 사력을 다했다면 결과적으로 지더라도 좀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에누마엘리시 - 어째 쓸 수 있는 곳이 많음.
#socool2 - 히이이익?! 정주행을 이렇게 많이 하신 분이 있다니!
#CNF - 솔직히 완결까지 별 가망 없어요.
#wltns920 - 님의 코멘 보고 시간의 힘 상성 부분도 추가로 올렸습니다.
#Legendssj2 - 중요하니 2번 말합니다!
#발푸르기스의밤 - 그때 이긴 건 맞지만 만약 그때 검호가 제대로 싸웠다면 팔 다칠 일자체가 없었을겁니다. 상대가 파픈이라 제 힘 못 발휘한거에요.
#끝의유무 - 아니오. 라테일 안한지 엄청 오래 됐습니다(쓴웃음).
#루엔시르온 - 그렇게 되면 이길 수 있겠죠.
#찬양천사 - 오버시어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고로...
#Blake117 - 당연한 결과 맞습니다!
#Ratios - 딱 한 번 싸웠을 때 굉장히 수월하게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판정승을 겨우 따낼만큼 밀렸었죠.
#ReFrante - 말 그대로 아스카가 최대 변수입니다. 검호만 공략하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아스카가 더해지면 약점이 없어져요.
#책벌레씨 - 개그에 가까운 표현이지만 사실이라는 거.
#천궁사월 - 아직 데이트 한 번도 안해본 사이인데!
#레시코 - 심리적인 요소를 제외하고도 파픈은 검호를 상대로 꽤 선전할 수 있습니다. 실체를 가진 물 마법이 주력이라 항마력을 뚫고 어느정도 타격을 가할 수 있고, 시간의 힘도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 있죠. 그래도 가장 큰 승리 요인은 심리적인 부분이겠지만.
#육합 - 마나통 순위는 검호(아스카 계약)>파픈스타>사이키커>프라이쉬츠>세피로트≥하이랜더 입니다. 마나 활용률을 매기면 또 달라지겠지만.
#Cooler - 굉장히 정확한 평가입니다. 덧붙여 숙련도는 경험에 비례하기때문에 세월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경험이 풍부할테니까요. 하지만 세월이 길어도 쓸만한 전투 경험을 안 쌓았다면 시간 낭비만 했다는 거.
#서월마을 - 저 둘은 애초에 싸울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네임0306 - 검호는 파픈한테 손 못 들어올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