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80화 (180/208)

<--  -->  검호side.

무엇이 옳았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틀린 것이었지만 매 순간마다 했던 선택 하나하나에 이유가 있었고, 상황과 여건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설령 답이 안 나온다 해도 그 의문을 놓아선 안되었지만, 끝없이 파고드는 것에 지친 마음은 이제 그만두라고 유혹했다.

그래서 놓으려고 했는데, 또다른 의문이 발목을 잡았다.

이제 뭘 해야하지?

보이지 않는 손이 콱 목을 졸라와 숨이 막혔다.

그 손아귀의 정체는 여태까지 해온 일이 모두 틀린 거였는데, 다음에 하는 일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있냐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터무니없는 규모의 사고를 쳐버리고, 이걸 수습할 수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또 다른 일을 하겠다고? 그것도 사고를 친 장본인이? 상황 악화시키려고 작정했냐!! 누가 외치는 건지 모르는 비난이 거칠게 가슴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하는게 차라리 나아! 적어도 니놈때문에 악화되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니놈이 뭘 해서 해결한 게 있긴 했어?! 사람들을 지키는 것도,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는 것도, 가장 중요한 그녀를 구하는 것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잖아!! 의지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걸 한참 전에 알았으면서 왜 부득부득 매달려 추하게 실패하냐고!

계속해서 날아드는 비난이 난도질 된 상처를 헤집었다. 그게 너무 아파서 울고싶었다.

그렇게 되버렸지만,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변명 작작해! 넌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엇나갈 것은 몰랐다 치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것은 알았잖아! 그랬으면서 뭔 되먹지도 않는 말을 지껄여?!

왜 제대로 보지 않은거야! 아무리 아파도, 괴로워도, 눈앞에 있는게 무엇인지 정도는 똑바로 봐야할 거 아니야! 지금 니꼴이 어떤지 알아? 정확하게 아는 것도 없고 사실을 눈앞에 들이밀어져도 상황파악 못하고 일을 마구 밀어붙혀 결국 총체적 난국으로 만든, 그 빌어먹을 년이랑 같은 짓을 했다고 넌!!

…… 젠장.

하고많은 것들 중에서 그년같다는 소리를 면전에서 들었는데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내 기분은 더더욱 처참해졌다. 논리 대신 입안에 고인 건 형용할 수 없는 욕설들이었고, 그딴 건 전혀 도움이 안되서 꾸역꾸역 참아야 했다.

시작부터 틀려먹은 선택이었기에 반박의 근거는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그 빈약함만 드러낼 뿐이었고, 이내 할 수 있는 말들은 다 떨어져 쏟아지는 비난을 묵묵히 들어야했다.

그 년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 그럼 묻자. 넌 상황 이전에 니 주위의 사람들을 제대로 본 적 있어? 세피로트, 유에, 이데아, 카이저, 엔젤릭버스터. 이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보고 진지하게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있기라도 하냐고!?

그런, 일은.

당연히 없었겠지!! 망할, 넌 메이플 월드에 트립된 이래에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 세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관계따위 만들어봤자 어차피 떠날 세계고 결국 끊어질 인연인데 부질없는 짓일거라 멋대로 생각해서였지! 그런 주제에 무능해빠져서 혼자선 제대로 일을 못해 결국 그 '어떤 관계도 아닌' 사람들한테 손을 뻗치고, 뭐하는 짓이야?!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했던 생각이 그랬었다. 어디를 봐도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뿐이라, 애써 벽을 둘러 스스로를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가가길 거부하고, 애써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들을 선 밖으로 밀어내며, 무리하게 혼자서 전부 다 하려다 죽을만큼 아픈 상처를 입고 고통에 주저앉아버린 - 꼴사나운 모습 그 자체.

넌 그 년과 똑같아. 아니라고 변명해도 똑같은 짓을 했어. 하다못해 그 년은 감정도 공감능력도 없어서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최소한의 여건조차 없었다고 납득할 수나 있는데 넌 그렇지도 않잖아! 너는 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그들을 보지 않은 이유는 다 달랐지만 결국 하나로 모아졌다.

난 이렇게 아프다고. 저들까지 보는 건 힘들어.

참으로 한심한 이유였다.

그 사람들도 결국 다 나처럼 아픈 사람들인데. 잘만 했다면 그녀처럼 서로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었을 사람들인데.

내손으로 그 기회들을 다 버렸구나.

하얀 마법사 때와 마찬가지로.

쭉 이어지던 비난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게 정말 비난이 멈춰서인지, 귀가 더이상 듣는 걸 그만둬서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싶지도 않았다. 정말로 지쳐버렸으니까.

그 년이 상황을 개판으로 만든 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감정도, 공감능력도 없는 하늘 밖의 우주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존재가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면 그쪽이 이상한 거겠지. 근본적으로 오버시어는 사람과 완전히 다른 존재고, 그 차이는 개미와 인간이라는 비유조차 부족할 정도다. 그 아득한 걸 넘어 끔찍할정도로 다른 시야가 지금의 비극을 만들었다.

내가 상황을 이 꼬라지로 만든 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였다. 생긴 것은 같은 인간이었지만 게임 속 등장인물이라는 착각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했고, 그 착각을 벗은 뒤에도 평화로웠던 원래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격한 전쟁터들을 나뒹굴어 이 세계에 대한 거부감만 더 심해졌다. 내려가긴 커녕 나날히 두터워지는 벽을 넘어온 건 내 모든 걸 받아들여주는 아스카와 같은 트립퍼로서 공감대를 형성한 그녀뿐이었다. 그게 벽 밖의 사람들과의 거리를 더 벌려버렸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내가 그년과 같은 짓을 했다는 사실을 죽고싶은 심정으로 인정해야했다.

사랑하는 창조물들의 소멸을 막기위해 우리들을 불러놓고 백안시한 그년과, 세상을 구하겠다고 하면서 함께해주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노력하지않은 나. 이유야 어쨌든 그 결과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정도로 악화되었다.

이런 사실따위 알고싶지 않았는데.

정말 죽어버리고 싶을만큼, 걸레짝이라는 표현조차 양호할정도로 처참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들이쉬는지 내쉬는지 모르는 가느다란 호흡을 이었다. 아니, 이어지는게 맞을까. 사실 이미 끊어진게 아닐까.

그때 이제 멈췄나 싶었던 비난이 뚝뚝 떨어졌다.

─…… 왜 그런거에요?

아까 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격정적인 목소리였다.

─어째서 그런거냐구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거야. 얼마나 더 헤집어야 속이 시원하냐고. 남아있는 것도 없는데.

─뭐라고 대답 좀 해줘요!!

밑도 끝도없이 왜, 어째서라니. 뭘 묻는 거냐고 반문하려다 한 가지 짐작가는게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 일들을 벌인 이유. 그것인 모양이다.

내가 이 일을 한 이유야 당연히 세계를 위해서…… 였나?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 그건 필요한 과정이었지 그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어. 그것보다 더 중요한게─ 세계 멸망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을 수 있어? 상식적으로 그런게 있을 리 없지만 나에게는 분명한 소망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내려던 것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이런 옳지않은 일들을 했다. 당시의 시점으로 보아도 어딘가 잘못된 이 방법을 택한 건 그 바램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바램이 뭐였지? 연이은 충격으로 산산조각나고 지친 사고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시원치못해 생각이 뚝뚝 끊겼다. 겨우 숨을 헐떡이는 의식으로는 뇌 주름 사이사이에 낀 안개를 걷어내기조차 역부족인 것이다.

차오르는 답답함과 조바심에 손톱이라도 깨물려던 찰나, 기억을 더듬어가던 손이 차가운 겨울바다 같았던 목소리와의 문답을 건져냈다.

〈그럼 왜 그 일들을 해온거냐.〉

파도처럼 밀려온 목소리가 물었었다.

〈옛저녁에 그것들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울거라는 걸 다 알았으면서 왜 지금까지 뿌득뿌득 버텨왔냔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내놓은 대답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

이 세계에 온 이래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목표와,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

새롭게 생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간절한 바램이 이 모든 일의 원동력이었다. 왜 바로 못 떠올린건지 스스로가 한심해질만큼 중요하고 또 중요한 이유들이 다시 화인(火印)처럼 선명히 새겨지며 동시에 머리속에 낀 뿌연 안개가 순식간에 걷혔다.

〈허면, 너는 이제 지쳤으니 그것들을 포기할테냐.〉

그때는 듣지 못했지만 분명 이어서했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럴리가 없잖아."

나는 그 목표를, 바램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것들을 놓는 순간 정말로 끝나버릴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다고 지금까지 해온 일을 계속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된다. 틀렸다는 걸 알았는데 그것을 계속하는 건 또다른 잘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하지? 의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떠올렸다. 편법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걸 썼다가 이꼴이 되었으니 결국 정론밖에 답이 없다. 애초에 제대로 아는 것이 정론뿐이다.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해야할 일은 그들을 향한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 다시는 같은 잘못을 하지않도록 주의하는 것. 초등학생이나 내놓을 답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어린애도 아는 상식이라는 뜻이었다. 그걸 여태까지 잊고 있었다. 일부러 해를 끼쳐놓고 나중에 고쳐주는 걸로 퉁치는게 아니라 부숴서 미안하다고 고개숙여 사과해야했다.

내가 그때 해야했던 바른 답은…… 이어지려는 생각을 끊었다.

깨진 찻잔은 되돌릴 수 없다. 과거의 잘못을 백날 후회해도 그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찻잔은 왜 깨졌는가.

당시의 나는 왜 이런 방법을 선택했지? 잔뜩 배어들어있는 격한 감정을 걷어내고 최대한 차분히 상황과 기억만을 떠올렸다. 나 한 사람의 소망을 이루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였어. 그래서 그들이 죽지않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떠올렸고, 실행했다. 그 결과 죽지만 않을 뿐 다른 심한 일들을 마구 저질러버렸다.

지금 내가 해야하는, 할 수 있는 옳은 일은 무엇을까 생각하다 이 고민 자체에 기시감이 들었다. 아. 예전에도 이거랑 비슷한 고민을 했었구나.

"파픈스타."

그녀와 노바족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했던 그 날, 나는 하고싶은 일이 아닌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한 명의 사람과 한 차원의 종족 전원 중 후자를 구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는 오늘의 상황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내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갈림길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엔 양자택일이 아니다.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해야하는 일이 있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걸 봐라, 올바른 것을 해야한다…… 갈림길의 표지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혔다.

과거, 나는 갈림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당시의 시점으로 옳았지만 그 선택으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을 구하는 바른 일을 해도 단 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피눈물을 흘릴 수 있음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다 쳐내버리면 정작 중요한 것까지 놓쳐버릴 수 있다는 걸.

…… 또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건 너무 괴로워.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걸렸다.

이번엔, 하고싶은 일을 할래.

***

side out.

루미너스와 이후 추가로 온 마법사들이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 밤낮으로 지식을 쥐어짜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간간히 주변을 정찰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너 지금 시간 좀 돼?"

"예? 갑자기 왜……."

"할 말이 있으니까 잠깐 따라와줘."

사람들을 도우며 물건을 옮기고 있던 제논은 아란의 갑작스런 부름에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를 뒤따라 도착한 곳은 영웅들 전용 막사였다.

"빨리 왔네?"

"설마 과격하게 물리적으로 끌고 온 건 아니겠죠."

"하! 내가 넌 줄 알아?"

"둘 다 그쯤해라. 계속 으르렁거려 봤자 앞으로 할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말은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를 돌려까는듯한 뉘앙스에 데몬는 루미너스를 보며 미미하게 인상을 썼지만 크게 목소리를 높히진 않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다같이 있는 겁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제논은 그들이 모인 이유를 반쯤 짐작했다. 한참 바쁜 이 시국에 영웅들과 사이나쁜 저 마족이 한 자리에 모일만한 이유는 많지 않으니까. 거기다 그뿐만 아니라 루티까지 와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본론을 꺼내지. 일전에 니가 에델슈타인 블랙윙 기지에서 보았다는 소드댄서에 대해 아는대로 말해줄 수 있나."

역시나. 당시 그에 대해 듣자마자 굉장히 격한 - 특히 아란 - 반응을 보였음에도 이후 거기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아 언제 부르나했다. 사실 모두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는게 정답이겠지만.

"대답해드릴 순 있지만 솔직히 저는 그에 대해 아는게 없습니다. 그때도 말했지만 그가 저를 찾아오는 이유는 오직 저의 전투 데이터 축적을 위해서였고, 그와 했던 건 실전에 가까운 대련뿐이었으니까요."

"대화같은 건 해본 적 없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사적인 대화는 사실상 없었습니다."

"끄응…… 하다못해 다른 사람들한테 주워들은 거나 유추되는 정보같은 건?"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대련 장소는 전투의 여파를 고려해 사람이 없는 곳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말을 꺼낸 경우는 대부분 제논이 아닌 겔리메르 박사 사이의 일때문이었다.

"애초에 그가 저와 대련을 해준 이유가 박사의 부탁때문이었고, 그나마 있던 대화도 대련 일정이나 난이도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완전히 사무적인 관계였다는 거군요."

"예."

그와 대화해서 얻은 정보보다 사전에 박사와 베릴이 말해줘서 알게 된 사실이 더 많을 정도니까.

"그 정보라는 것들은 어떤거야?"

"별거 아닙니다. 그가 소드댄서라 불리는 블랙윙 간부 중 한 명이고, 굉장히 강한 전사이며, 용의 후예들을 이끌고 있다는 여러분도 아마 다 아시는 것들이었습니다."

"다른 건 없나."

"음…… 굳이 꼽자면 꽤 바쁜 사람인데 저와의 대련 요청을 한 번에 들어줬다는 것 정도일 겁니다."

"박사가 저 부탁을 한 시기가 용의 후예들이 한참 봉인석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중이었거든."

루티의 첨언에 영웅들은 제각기 인상을 썼다. 현재 에레브의 것을 제외한 모든 봉인석이 블랙윙에 빼앗긴 상태였으니.

"지하에서 일만 하는게 지루해서 가끔 몸풀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들어줬을거라 보지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제논은 대련에서 항상 그에게 졌어. 처음부터 탈출 직전까지 쭉."

졌다는 걸 강조하는 루티의 말에 제논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지만 그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아 뭐, 상대가 그였으니 그럴만하네."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습니까."

"무릉에서 수련할때 그와 밥먹듯이 대련했었거든."

그리고 전부 졌어. 털털하게 웃어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해보이는 아란의 얼굴에 제논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어딘가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려던 중 데몬이 물었다.

"붉은 검기는 그와의 대련중에 본 겁니까."

"아, 정확히는 처음 대련했을 때 한 번 봤습니다."

"여러 번 싸웠으면서 고작 한 번?"

"자세히 말하자면 그는 처음 싸웠을 때 이후로 검 자체를 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뒤론 검기를 볼 수 없었죠."

"잠깐만. 그가 검을 들지 않았다면 대체 어떻게 싸웠다는거야?"

다른 것보다 검호라는 두 글자가 그의 힘을 모두 보여준다. 검의 정점. 과거에도 현재에도 검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는 전사라는 사실은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인정하지만, 그 검을 들지도 않고 눈앞의 소년에게 연승했다는 말은 믿기 힘들었다. 하다못해 에레브에서도 위장을 위해 바꾼 전법조차 검을 썼는데.

제논은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겨우 입을 열었다.

"…… 격투기로."

"응?"

"뭐?"

"그걸 왜, 아 이상한 건 아니지만 뭔가 좀."

"처음 대련을 제외하면 그는 쭉 발차기 위주의 격투기로 싸웠어."

루티의 설명에 그들은 저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냐. 알고있는 사실과의 괴리감에 그들은 가장 그럴싸한 가정들을 떠올렸다.

"많이 봐주려고 그랬겠군."

"그러게."

"처음 싸울 때 손대중해보고 검까지 들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거겠지."

"그가 격투기을 익혔다는 건 좀 의외지만 아주 이상한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왜 익혔는지는 궁금해지는군요. 혹시 거기까지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알 리 없었기에 제논은 고개를 저었다. 메르세데스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역시 위장용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존의 전법을 바꾸는 것 만으로 정체를 상당부분 숨길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속아넘어 갔었고."

얼굴을 보기 전까지 검을 보고도 그라는 사실을 몰랐던 - 그리고 알고나선 현실을 부정했었던 - 아란의 목소리가 유독 가라앉았다. 분위기가 더 가라앉기 전에 메르세데스가 결론을 내렸다.

"결국 너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거로군."

"예."

"하아……."

"이럴 때 써야하는 말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맞아 제논."

루티에게 확답을 들은 제논은 꾸벅 고개를 숙였고, 네 사람은 애써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 겨우 시간내서 불렀는데 소득이 전혀 없으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미간에 골을 파인 루미너스가 시간을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니가 보기에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개인적인 감상을 말해줄 수 있나."

"감상 말입니까."

"그에 대한 인상이나 너의 생각 말이다. 아까전에 말했던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같은 거."

"그가 어떤 사람이었냐를 묻는 거군요."

객관적인 정보가 없으니 주관적인 정보라도 조금이나마 얻고자 물어본 것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조금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상……?"

"저의 판단 기준이 여러분과 달라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았을때 그는 이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을 이상하다고 느꼈습니까."

데몬은 뭔가 좀 알아낼 수 있을까 싶어 신중히 물었다.

"대련중에는 무자비하게 저를 밟았으면서, 끝난 뒤에는 묘한 눈으로 볼 때가 많았거든요. 부상을 많이 입었을 땐 특히 그랬습니다."

"어떤 눈으로 당신을 보았길래 묘하다고 하는 겁니까."

"그건 모릅니다. 저는 감정을 잘 모르니까요."

오랜 시간 사람과 교류하지 못하고 전투만 반복한 소년은 자신의 감정도, 타인의 감정도 알 수 없었다. 종종 받았던 그의 시선도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몰랐고, 단지 그 시선을 받을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 기분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몰랐다.

제논이 블랙윙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대략적이나마 들었기에 그들은 더이상 캐물을 수도 없었다. 또다시 찾아온 불편한 침묵에 루미너스가 슬슬 자리를 해산할까 고민하는 사이, 지금까지 테이블 위에 가만히 있던 루티가 일어났다.

"잠시 말해줄게 있는데 괜찮아 제논?"

"뭔데 그래?"

"아까 말한 그의 묘한 시선이란 거, 어쩌면 동정심이었을지도 몰라."

"…… 응?"

시종일관 기계적이었던 제논의 얼굴이 처음으로 사람답게 변했다. 참으로 얼빠진 표정이었다. 영웅들과 데몬의 표정 역시 경악하는 건지 현실부정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이 되었다.

"루티.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동정심을 말하는 거 맞아? 사전적으로 사람을 딱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그거."

"그거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곤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제논을 보던 데몬이 루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보니 당신은 블랙윙 연구소에서부터 계속 소년과 함께 있었다고 했었죠. 당신도 그를 만났겠군요."

"네. 그리고 앞으로 말할 건…… 사실 좀 더 일찍 알려줬어야 했는데 많이 망설였거든요. 여러모로 위험하, 지는 않은데 좀 그래서."

"대체 어떤거길래 그러는 거야?"

루티는 총총 제논의 앞에 갔다.

"제논. 연구소에서 탈출하기 바로 전에 그와 했던 대련 기억하고 있지?"

"당연하지."

"대련이 끝나고 얼마 뒤에 그가 찾아왔던 것도 기억해?"

"응."

항상 대련만을 위해 왔었던 그가 그 날은 대화를 하기 위해 왔다고 해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했던 말과 달라 루미너스가 따졌다.

"그런 적이 있었으면서 왜 말하지 않은거냐."

"실제로 대화를 하진 않았으니까요. 그 날은 앞서 그와 대련하며 입은 부상때문에 대대적인 수리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루티 너도 알고 있잖아."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제논, 니가 수리되는 동안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나와 대화했어."

"그가 뭐라고 했어?"

루티는 대답대신 눈에 노란 안광을 띄웠다. 다른 이들은 저게 뭔가 의아해했지만 제논은 저것이 로딩 상태임을 파악했다.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들려주는게 빠를거라 생각해. 갑작스러웠던 대화라 영상 녹화는 못했고, 메모리를 바탕으로 만든 녹음 파일을 재생할게. 모두 조용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크고 부드러운 귀가 반쯤 펴지며 스피커 기능을 켰고, 노란 안광은 몇 번 더 깜빡이더니 초록색으로 변했다. 재생 시작. 귀여운 목소리가 딱딱한 전자음으로 변하며 작동을 알렸다.

[제논. 준비 끝났으니까 이제 들어가]

[알았어.]

입이 아닌 양 귀에서 흘러나오는 루티와 제논의 목소리에 이건 대체 뭔가하는 눈으로 루티를 보는 메르세데스와 아란을 루미너스가 지적하려는 찰나, 이어지는 말에 당황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소드댄서님?]

[나랑 싸운 뒤에 제논은 항상 저렇게 됐나.]

그의 목소리였다. 특유의 낮게 내리깔리는 미성이면서 어딘가 오싹한 분위기의 것이. 뭐라 말하려는 아란의 입을 틀어막은 데몬은 한 손가락을 들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예전엔 저거보다 더 심했어요. 그때 제논은 지금보다 약했고, 당신은 지금처럼 봐주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공격했었잖아요.]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루티의 대답이 당황스러웠던 건지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아까보다 더 낮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티.]

[예?]

[넌 겔리메르와 제논, 누구의 편이지.]

덜컹! 자리에 앉아있던 제논이 벌떡 일어나며 의자가 쓰러지려는 것을 옆에 있던 메르세데스가 잡았다. 이어서 저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제논을 애써 잡아 다시 앉혔다. 다 듣고나서 물어봐.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대답해봐라.]

하는 말과는 달리 그의 어조는 의외로 강압적이지 않았다.

[전…… 제논의 편이에요.]

[그래.]

오히려 어딘가 안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째서?

[애초에 저는 제논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지금은 저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약속을 했었어요.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되찾아주겠다고,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겠다고요.]

제논의 눈이 잘게 떨렸다. 루티가 큰 전력이 안됨에도 무리하게 위험한 곳까지 함께하려는 이유를 몰랐는데 그 답이 지금 나오고 있었다.

말은 계속해서 오갔다. 저를 폐기처분하실 건 가요? 저 작은 것이 자신의 죽음을 태연히 입에 담았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돌아온 그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그럼 너는 계속 저놈 편을 들어줘라.]

[대체 무슨 말을─]

[나중에 외부인들이 이곳 연구소를 습격할거다. 그들과 함께 나가라.]

"…… 잠깐만요. 재생을 잠시 멈춰주실 수 있습니까."

데몬의 요청에 루티의 눈에 떠오른 초록색 안광이 보라색으로 전환되었다.

"일시 정지. 무슨 이유이죠."

"방금 말은 넘길 수 없습니다. 단순히 말만 놓고봐도 그는 당신들이 탈출할 걸 알고 있던 것 같은데, 제 말 틀렸습니까."

"동감이다. 아무리 봐도 그는 너희의 탈출을 도왔거나 최소한 방조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루티?"

쏟아지는 질문에 루티는 꼬리를 말았다.

"나도 답은 몰라. 하지만 그 말과 이후의 상황을 볼 때 소드댄서는 우리가 도망칠 걸 다 알면서 내버려뒀어."

생각해보면 수상하기 짝에 없었다. 연구소에서 탈출했다 하더라도 바로 에델슈타인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얼마든지 부하들을 동원해 제논을 찾아낼 수 있었던 그 사람이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당장 겔리메르만 해도 안드로이드들을 동원해 이잡듯이 에델슈타인을 뒤졌었는데 정작 그는 가만히 있었다. 둘이 에델슈타인을 빠져나간 뒤라 해도 메이플 월드 전역에 퍼져있는 부하들에게 지시만 내리면 간단히 제논을 추적할 수 있었을텐데 이 역시 하지않았다.

"거기다 어떤 형태로 탈출하게 될 건지까지 알고 있던 것 같은데, 당신들은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까."

"레지스탕스가 저희들이 있던 연구소를 습격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연구소를 습격했던 이유는?"

만약 배후에 그가 있었다면 심히 곤란해진다. 연합의 일원인 레지스탕스마저 그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니까. 제논은 탈출 이후 그들에게 들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블랙윙이 에델슈타인의 전력을 빼돌려 사용하는 곳들 중 유독 많은 전력을 쓰는 곳을 습격한 거라고 했습니다. 그게 제가 있던 연구소였고요."

"그 정보의 출처가 어떻게 되지."

"지그문트에게 들었습니다만……."

나중에 만나는대로 자세히 물어봐야겠군. 혹시 모르니 나인하트에게도 알릴 생각을 하며 루미너스는 루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저 재생해라."

"네. 이 뒤는 얼마 안되지만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가 제논이 탈출하게 내버려둔 이유거든요."

"흠?"

누가 뭐라하기도 전에 보라색 안광이 다시 초록색으로 변했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해주는 거죠? 무슨 꿍꿍이인 겁니까 당신은?]

[별거 없다…… 그냥 저놈이 불쌍해서 말이지.]

경악. 일찍히 그가 제논을 동정어린 눈으로 보았다는 말을 들었을때보다 더한 충격에 자리의 이들은 모두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게 맞나 제 귀를 의심했다. 그때의 루티도 그 말에 놀랐는지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제논을 동정하는 건가요? 당신이?]

[그래.]

거기까지 말한 그는 노이즈라 생각될만큼 알아듣기 힘들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저 말이 욕설일 것으로 추측했다. 꽤 험악한 어조였기 때문이다.

[우리같아서 말이야.]

여러 감정들이 뒤섞인 채 툭 내뱉어진 그 말을 끝으로, 초록색 안광은 완전히 꺼졌다.

천막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지막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말한 우리가 누구인지, 그와 제논 그리고 우리라는 사람들끼리의 무엇을 공통점으로 보고 동정심을 가졌는지 등등.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뱉어야하는 긴장감이 감돌며 각자의 머릿속엔 혼란스러운 상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적을 박살낸 이는 그들이 아니었다.

촤악─!

"실례하겠습니다!!"

입구에 드리워진 천막을 거칠게 젖혀지며 시그너스 기사단원이 헐래벌떡 뛰어들어왔다.

"무무, 무슨 일이야?"

"회의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조금 전, 슬리피우드 외곽에서 실종되었던 사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급히 전해드리고자 왔습니다."

"실종된 사람이라면─"

"마족들에게 끌려갔다던 크리슈라마 수도승입니다."

쿵! 루미너스가 반사적으로 테이블을 치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그 박력에 기사단원은 움찔, 한 발짝 뒷걸음질쳤다.

"확실한가?"

"아, 예. 주민을 불러 물어보니 그분이 맞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드래곤이 찾던 마법사 역시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그들은 단순히 놀란 것을 넘어 뒷통수를 쳐맞은듯한 충격을 느꼈다. 왜 에반이 거기서 발견된 건데?

그들은 에반이 캠프로 이송될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발견된 곳으로 향했지만, 소년에게서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아직까지는 몰랐다.

***

검호side.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눈을 뜨며 보인 병실은 일전과는 달리 텅 비어있어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링거바늘을 뽑고 회복기를 써서 아직도 채 낫지않은 부위들을 재생시켰다. 그동안 고치기 힘들었던 팔도 쉽게 나았다.

찾으려 했던 사람은, 문을 연 순간 만날 수 있었다.

"아스카?"

하나뿐인 동반자가 처량한 모양새로 맞은 편 복도벽에 기대어 망부석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왜 이러고 있는, 아, 나 때문이구나. 병실에서 상념에 빠져있던게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말을 하고 내내 칩거했으니 당연히 아스카도 영향을 받았을 거다.

스스로가 해온 일을 부정하고 자괴하고 있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아스카에게 다가가 몸을 숙이고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아스카."

내가 생각해도 나란 사람은 참 한심한 것 같아. 이 세계에 온 뒤로 나 한 명 건사하기 바쁘다고 주위를 도통 보지 못했어. 아니, 보고싶지 않았어.

"많이 걱정시켜서 미안해."

보통의 다른 사람들은 물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너조차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어. 분명 많은 걸 알고 싶었을텐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텐데 다 참고 곁에 있어준 니가 너무 고마워. 고마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 당연하게 여겨버렸나봐. 그래서 이런 지경이 될정도로 날 걱정할 걸 알면서 스스로의 상처만 보기 바빴어.

괴로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데.

"걱정해줘서, 계속 기다리고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해야할 말이 많은데 언어로 만들어지는 건 너무나도 짧았다. 내 어휘능력은 왜 이렇게 빈약할까. 부족한 어휘력을 메꾸기 위해 아스카를 더 품안으로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이 잘게 떨려왔다.

"…… 마스터."

"응."

"이제, 괜찮은 거야?"

"그래."

사실 상처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를 잃으며 뻥 뚫린 가슴의 구멍도, 여태껏 해온 일이 틀린 거라는 걸 알며 부서진 머릿속의 일부분도.

그럼에도 괜찮다고 대답한 건, 이제 그런 상처를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정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 나의 대답에 아스카는 내 어깨에 머리를 파묻으며 울먹였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괜찮아. 괜찮아. 나는 주문을 외듯이 아스카가 눈물을 그칠때까지 괜찮다고 반복해야 했다. 꽤 시간이 지나 겨우 진정되었을때 옷이 많이 축축해진 걸 알았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다.

아스카는 눈물을 그친 것과는 별개로 눈가는 퉁퉁 부었고 얼굴을 빨갛게 물든게 금방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인다. 나중에 가라앉겠지?

"쿨쩍,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마스터?"

"일단 사람들에게 찾아가 볼 거야."

소식을 전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틀렸다는 말을 했다는 게 퍼졌다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할테니 진정시켜야 하고, 아직 말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일의 방향을 바꾸라고 지시를 내린 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내가 그 말을 한 뒤 이데아랑 세피로트, 유에는 어떤 반응이었어?"

"잘 기억 안 나. 큼, 그 여자가 두 사람에게 뭐라뭐라 했던 것 같은데 거의 못 들었어."

"아……."

생각해보니 내 상황이 그 꼴이 났는데 아스카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썼을 리 없구나.

"직접 가서 물어봐야겠네. 어디 있는지 알아?"

"찾아볼게."

아스카는 곧장 탐색 마법을 써서 이데아와 세피로트, 유에의 위치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셋은 뭉쳐 있었다.

"다 찾아가볼 수고가 덜어졌네. 바로 가자."

"응!"

내밀어진 아스카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텔레포트가 발동되며 나와 아스카는 세 사람이 있는 장소로 이동되었다. 무슨 일로 셋이 모여있는지 모르지만 그 셋인만큼 중요한 일일테고, 끼어들어서 미안하다 사과하고 바로 말을 꺼내야─

"형씨가 일어나기 전에 아주 갈때까지 가려는 모양인데 난 그 꼴 못 봐. 지금 내가 당신 머리통 날리지 않는 건 당신이 그래도 망할 전장을 함께 구른 전우이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옛저녁에 후려치고 나갔어!"

"아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차피 당신은 사람을 진심으로 때릴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날리는 주먹 맞아보고 싶어? 당신이 마조히스트인 건 오늘 처음 알았는데."

"그보다 카이저 놈이 저지른 일에 대해 설명해봐라. 그 애한테 한 조치는 무엇을 위한 거였지?"

"당연히 저희를 위해서 한 일이죠. 나이는 어려도 그 정도 실력의, 많은 걸 알아버린 애를 그냥 내보냈다간 결코 작은 여파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그 '저희'라는 건 노바족인가 우리인가. 대답여하에 따라 어떻게 할지 정하겠다."

…… 무슨 일이야 이거.

도착한 이데아의 집무실에서는 각자의 고성과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이데아는 물론이고 유들유들하고 조용하던 세피로트와 유에까지 험악한 얼굴인게 여간 심상치않아 보였다.

"그새 뭔 일이 생긴거지."

한참 치고박고 싸우듯이 대화(?)을 이어가던 세 사람은 그제서야 나를 보았다.

"형씨?"

"당신 어떻게?"

"정말 검호인가?"

어째 반응이 시체가 일어난 걸 보는 사람들 같은데.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확실히 그쯤 되었다 나왔으니 틀린 비유는 아닌데 저런 시선을 받으니까 기분이 묘하다.

"어떻게……?"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니 정신이 들었다."

허허, 말 한 번 쉽게 하네. 세피로트는 기가찬다는 투의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잔뜩 흐트러진 분위기의 이데아가 나를 노려보듯이 응시했다.

"왜 온겁니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뭡니까."

평소에도 싸늘한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거기에 더해 뾰족뾰족한 가시가 돋은 것 같았다. 역시 내가 그 꼴이 되고 난 뒤에 여러 문제들이 터졌나보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또 다른 문제를 끼얹을 거고.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계획을 중지해줬으면 한다."

"…… 뭐라고요?"

"깨닫는 게 늦었지만 이 방법은, 내가 생각해낸 이 계획은 틀렸다. 그러니 늦었더라도 그만둬야 해."

멍청하게 풀린 황록색 눈이 굉장히 낯설었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고싶지 않았다. 나 한 명의 바램을 이루겠다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는 죽지만 않게 할 뿐 이미 많은 피해를 끼쳐버렸어. 그래서는 안 됐는데."

그럴 권한따위 없는데.

"이제와서 무슨 말을……!"

"돌이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방법은 잘못됐어. 늦었어도, 늦었기때문에 지금이라도 멈춰야 하는 거다. 완전히 끝으로 치닫기 전에."

잘못된 채로 매듭지어지기 전에 끊어서라도 더 꼬이는 걸 막아야 한다.

"무리한 요구로밖에 안 들리겠지만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데아의 얼굴이 푸스스 가루가 떨어지는게 아닐까 생각될정도로 쩍 굳었다.

"…… 그럼 형씨는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생각해온 게 있다. 그런데 또 내 생각대로만 밀어붙이면 이번처럼 될 수 있으니까 의견을 구하고 싶다."

"우리한테 말인가."

"너희.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능하다면."

하고싶은 걸 하자는 결정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것만 추구하고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거나 무시하면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니 최대한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볼 생각이다.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나."

나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시선이 얽혀들어가는 황록색 눈은 내내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흔들렸고, 굳은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안색이 변해다는 와중에 입은 뭔가 말하려는 듯 수 차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다 이내 꽉 다물렸다. 너무 어이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 건가 싶을 때, 가느다란 목울대를 타고 뭔가가 올라왔다.

"당, 신은 머저리입니까아아아아─!!"

천둥처럼 터져나온 고함과 함께 콰앙!! 그녀의 주먹이 내리찍힌 책상이 반으로 쪼개졌다. 와 잠깐만. 채 반응하기도 전에 벼락같이 날아든 손이 멱살을 잡아 확 당겼다.

"겨우 정신 차렸나 싶었는데 아주 그냥 미친 겁니까?! 뭘 어떻게 해야 그딴 말을 할 수 있냐고요!"

반응이 격렬할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데아가 이 정도로 흥분한 건 처음 본다.

"미안하다. 그래도 난 이게 맞다고 생각하고, 만약 니가 거부한다면 나 혼자서라도……."

"당신 머릿속은 어디까지 꽃밭에 가있는 겁니까!! 호구같은 것도, 착한 것도 정도껏이지 어떤 사고방식을 거쳐야 이 일마저 자기 잘못이라 생각할 수 있냐고요?!"

"그야 이건 내 잘못이 맞으니까─"

"사람을 찾아와도 한참 잘못 찾아왔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아니면 알아버린 걸 거부하는 지경이 된 겁니까!"

"무, 뭐?"

뭔가 말이 안 맞고 있었다.

잔뜩 망가진 그녀의 얼굴이 자괴감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당신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여전히 내 멱살을 잡은 채 매달리다시피 주저앉아버렸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묻기 위해 세피로트와 유에가 있는 쪽을 보았다가 둘 다 싸늘한 눈인 걸 알았고, 그때서야 이데아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버린 건지.

"이데아."

…… 왜 이렇게 됐긴. 내가 주변에,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서 그렇게 된거지. 나는 아파오는 머리와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멱살을 잡고있던 그녀의 손을 떼어낸 뒤, 그대로 놓는 대신 맞잡았다.

"자세히 얘기해봐라. 전부 들을테니까."

이제는 그러지 않을거다.

========== 작품 후기 ==========

다음 화는 이데아, 데미안과 대화로 갈등을 풀어가겠군요.

이데아가 거하게 멘붕한 이유는 다른게 아닙니다. 검호가 상상이상으로 이상적인 답을 해버렸기 때문이죠. 폐인이 되거나 눈치채고 자기들을 증오하거나 등등 부정적으로 변할 줄 알았는데, 제정신으로 온 것도 모자라 다 자기잘못이었다고 말하며 이제라도 똑바로 하자고하니... 마치 수능에서 부정행위로 탈락했다는 소식에 충격으로 한동안 말이 없던 부모님이 며칠만에 하는 말이 니 잘못이 아니라 이게 다 입시위주 교육때문이다! 수능이 뭐가 중요해?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같은 말을 들은 느낌. 좋은 걸 넘어 공포스러운 답인 겁니다.

이번에 업뎃되는 카데나 출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제와서 끼워넣기 그러니 걍 전쟁이 격화되면서 카데나고 그림자 상단이고 다 죽었다는 설정으로 갈 겁니다(하하).

본편과는 별개로 이번에 조아라가 또 거하게 사고를 쳐서 여러 작가, 독자분들이 이사를 가시던데...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전 그대로 있을겁니다. 다른게 아니라 이사가고 싶어도 전 제 글 텍본이 없어요!(폭소) 쓰는대로 바로바로 올려서. 여기만큼 패러디란 활성화된 곳도 없고.

아, 한 독자분 덕에 알았는데 나무위키에 검호입니DA 항목이 만들어졌더라고요. 어느 분이 해주신 건지 몰라도 나무위키답게 시작부터 중요 스포일러인 걸 보고 웃음. 저도 내용추가하고 싶은데 작가인 제가 직접 나서면 좀 거시기해질까봐 보고만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용추가를...〈퍽

@로퓔렌 - 그 정도로 굴릴 생각은 없어요.

@마늘마느리 - 안 나옵니다.

@노래감상 - 제 닉넴 누르면 작은 창이 뜰건데 거기서 뜰 바로가기 클릭하세요.

@superduswldm -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었지만 다음 편 왔습니다!

@월하만향 - 아, 진짜로 항목이 만들어지다니... 혹시 님이 항목 개설해주신건가요?(도키도키)

@tpfkvldpf - 언급은 없지만 자해하면서 자살중이었습니다.

@렘파드 - 신캐로 설정이 꼬인다고? 그럼 죽었다 치고 출연을 안 시키면 되겠네! 햣하─!

@Ratios - 전쟁터에서 십 년가까이 굴러다니면 인격이 파탄납니다.

@유연옥 - 이제부터?

@kaizeth - 중요한 정보들이 빠진 상태로 추리를 하다보니 그렇게 될 수 밖에요. 맞은 것도 없잖아 있어요?

@로렐라인 - 이번 사건 터진거 보니 텍본보다 종이책이 나은 것 같기도... 근데 어떻게 출판할 수 있는지 몰라!

@밤일 - 거기다 세피로트는 실수로 사람을 죽였던 기억때문에 사람을 상대로 할 땐 힘을 조절해버립니다.

@에니네 - 그리고 두 번째 절단마공! 저도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러비현 - 그러나 마지막을 장식했던 에반은 거짓말처럼 다음 화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사실 잘 보면 에반이 나온 걸 알 수 있지만.

@카즈사야 - 하나하나 답해드리자면

1. 오버시어가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졌다는 것 자체가 우주적인 위기다. 트립퍼가 어떻게 하기 전에 다른 오버시어가 먼저 나설거다.

2. 조금씩 나아질겁니다.

3. 대부분 난죽택 할겁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죄다 트립에 진저리가 나다못해 경기가 들릴만큼 거부감이 뿌리박혀서 또 트립당하면 바로 난죽택은 안할 애들도 상황에 따라서 난죽택 할거임.

4. 협동이 잘 된다는 가정하에 륀느 힘 뺏은 검마를 상대로 승산이 꽤 나옴. 군단장과 영웅? 걔들은 단독으로도 바르고.

@진룡검 - 육체적인 굴림만이 굴림이 아니다!

@l초코빙수 - 이번엔 그래도 6월 내에 올리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늘어지다가...

@소망eh - 깨진 멘탈은 안붙어요. 깨진 틈을 다른 것으로 메꿀 뿐.

@좀비라스 - 아스카 기운 차렸습니다!

@Legendssj2 - 근데 세피로트였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못해요.

@소라루 - 원래부터 의학이 뛰어난 편이었는데 전쟁통에 응급처치라던지 포션이라던지 하는 쪽이 발달해버림.

@yejinor1617 - 그러나 스킵신공 발동!

@칼크래프트 - 이데아, 카이저, 엔젤릭버스터는 결국 메이플 월드가 아닌 그란디스의, 인간이 아닌 노바의 수호자입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리아카에린 - 후쿠쿠쿠쿠!! 압도적, 압도적인 코멘 길이와 후쿠에 필사적으로 썼으나... 또 1달 가량이 걸렸다고 한다.

@루나라피스 - 완결 꼭 할겁니다!

@랴누 - 2~3주 걸려 쓰고 리코멘 1~2시간?

@SoranoRu - 이제부터 조금씩 치료해야죠.

@ReFrante - 그걸 깨닫고 멘붕, 현재에 와선 애써 묻어뒀다가 당사자가 말하니 2차 멘붕.

@적현월 - 근데 스킵ㅋ 나중에 나올겁니다.

@네임0306 - 사실 1부때부터 개판이었어요(소근).

@책벌레씨 - 멘탈 치료는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검호는 트립이래 메이플 월드의 사람 중 누구도(아스카 제외)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맞이한 동료는 파픈스타, 같은 트립퍼였죠. 그래서 그녀가 죽은 이후 멘탈이 전혀 나아지지 못하고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Sisre - 사람들을 위해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 죽인 남자. 초월자때문에 수도 버리고 피난민을 이끌며 10년 가까이 전쟁터를 뒹군 여자. 서로서로 꿀리지 않는 PTSD환자입니다.

@레볼레이션 - 이번엔 노력했는데 또 쿨타임을 채웠다(쿨럭)

@Blake117 - 하나 알려드릴까요? 지금 용의 후예중에 PTSD 아닌 사람을 찾는게 더 힘들어요. 죄다 전쟁에 익숙한 베테랑이라고 했잖아요.

@Yoontlemin - 이제 180화인데 189화 전...? 타임 패러독스다!

@찬양천사 - 세피로트는 트라우마때문에 사람을 상대로 힘을 많이 못 씁니다.

@라모니아 - 갈등, 위기를 벌리는 편이었으니까요! 이제 다음 화는 해결의 편이 되겠군요.

@J스티카 - 매번 오랜만이죠...(월간연재)

@육합 - 붙일 수 있는 건 붙이고, 아닌 건 그냥 도려내고 마법과 포션으로 재생. 아이는 층을 만들어준 걸 끝으로 손을 놓았습니다.

@대어의예감 - 아이러니하게도 이데아를 살린 건 세피로트의 트라우마.

@미카츠키아이코 - 거기다 세피로트는 전심전력을 발휘하면 산에 계곡을 뚫을 수 있는 힘의 소유자라는 걸 생각하면...

@wlgns414 - 이제 좀 쉬게 할거에요! 매일 굴리진 않는다고요!(뻔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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