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81화 (1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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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기지인 루타비스에는 창문이 없다. 때문에 지상에 나가지 않는 이상 하늘과 해, 달을 볼 수 없는 건 물론 날씨조차 알 수 없었고, 이에 노바족들은 정신건강 악화를 예방하고자 마법으로 지상의 하늘을 띄워주는 장소를 몇 곳 만들었다.

내가 이데아와 단 둘이 대화하기 위해 택한 장소는 그렇게 만들어진 쉼터 중 하나였다.

쉼터는 조명이 거의 없어 어둑어둑했지만,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천장에 걸린 둥근 달이 나와 그녀의 모습을 충분히 비춰주었다.

그러나 자리가 마련되었음에도 나나 이데아나 바로 입을 열진 않았다. 나는 서툴렀고, 그녀는…… 어떤 심경인지 몰라도 복잡할 거다. 달빛 아래에서 새하얗게 굳은 대리석상처럼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마침내 말을 내뱉은 건 체감상 30분은 족히 지난 뒤였다.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 첫마디부터 저러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

"그에겐 사감(私感)이 없잖아 있다고 했지만, 예. 잘 생각해보니 당신을 싫어하는 감정이 이번 일의 기반이더군요."

"왜 내가 싫다는 거지?"

"당신이 저희를 구해버렸으니까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 저게 사람을 싫어할 이유가 될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재차 말했다.

"당신이 저희를 구해버린 장본인이기 때문에, 저는 당신을 싫어하게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 반문에 이데아는 인상을 쓰며 씹어버릴 기세로 말을 쏘아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깥에서 온 당신이 저희의 전쟁을 종결시킨 게 싫다고요!"

"…… 그러니까 그게 왜 싫은 이유가 되는 건데?"

전쟁 끝나는 게 싫은 사람은 미친 놈 아니면 사이코 뿐일텐데. 설마 이 여자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상상도 안해봤다. 내 시선이 이상해진 걸 눈치챘는지 그녀의 눈꼬리가 확 올라갔다.

"누가 전쟁 끝나는게 싫답니까?! 오히려 기뻐 죽을 일이죠! 그런데 하필, 저희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전쟁을 끝낸 장본인이 생판 남인데다 완전히 외부인인 당신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내는 이데아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다. 가슴으로는 뭔가 이해를 했는데 머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야할까. 혼란스러운 내 표정을 보다못한 그녀는 치아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까득! 크게 이를 갈고는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제 말 뜻을 모르겠습니까."

"아주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상황을 예로 들어 비유해 드릴까요? 마침 적절한 예시도 있군요. 만약 다른 차원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는 갑자기 검은 마법사를 쓰러뜨린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그 사람이 생전 본 적도 없는 남이고, 쓰러뜨린 뒤로 당신에게 한다는 말이 '만악의 근원을 쓰러졌으니 좋은 거 아니냐'라면요."

와 씨 잠깐만.

"왜 그런 표정이죠? 반드시 처치해야하는 적을 당신 힘 하나 안 들이고 다른 사람이 처리해줬는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건!"

"예에. 만족스러운 결말일 리 없죠. 왜냐하면─"

'당신이 낸 결말'이 아니니까요.

그제서야 나는 이데아가 나를 싫다고 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했다. 동시에 그녀를 포함한 노바족들이 날 어떻게 볼지도.

"당신의 적이고, 당신의 목표이며, 당신이 사력을 다해온 일을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놈이 튀어나와 한 번에 끝내버렸는데! 대체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느껴질 것은 분명 기쁨이 아닌 허탈감과 허무함, 그리고 그 일을 벌인 놈을 향한 분노뿐이겠지.

지금 내 눈앞의 그녀처럼.

"……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다."

"압니다. 그때 당신은 극도로 몰려있었고 또 그렇게 된 원인 중엔 저희 또한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따악! 낮은 구두굽이 바닥을 때리며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늘 차갑게 굳어있던 황록색 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당신을 증오할 수도 원망할 수도, 하다못해 미워하는 것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장치로부터 내려온 신.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 절대적인 존재나 연출 등을 가리키는데 주로 쓰는 단어지만 이 단어가 만들어진 진짜 이유는 개연성을 무너뜨리는 절대적인 존재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이야기에서 어떤 복선도 암시도 없었으면서 마지막에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걸 비꼬기 위해 말이다.

나의 존재는, 나의 행위는 노바족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만약 전쟁을 끝낸 게 그분이었다면, 그 남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파픈스타는 그들의 영웅이었고 세피로트는 전우였으니까. 같은 종족이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함께 전쟁를 이끌어온 이들을 남이라 생각할 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저희는 10여 년 이상 전쟁을 해왔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수 많은 것들을 잃어왔고, 하나라도 더 지키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해왔다고요! 오직 전쟁을 끝내기 위해 수단 방법까지 가리지 않고 온갖 짓을 다 했는데!! 그랬는데, 그래왔는데 당신이─!"

내가 그때 그들에게 한 것은 단순히 구원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해온 희생과 노력이란 발버둥을 모조리 부정하고 강제로 건져올린, 폭력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저희가 해온 건 뭡니까?! 그딴 식으로 끝날거면 그들은 대체 왜 그렇게 죽어나가야 했고, 저는 왜 그들을 사지에 내모는 선택을 해야했던 거냐고요!?"

그녀는 늪에 잠겨 있었다. 그 늪은 어쩔 수 없이 버리고, 잃고, 제 손으로 죽음에 등 떠민 이들의 시체와 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빠져나오고 싶어도 사람들이 죽을수록 무게를 더해간 책임감과 죄책감이란 족쇄가 너무 무거워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늪에서 나오기 위해선 끝이 필요했다. 그 끝이 스펙터 군단에 의한 전멸이든, 최후의 발악으로 제른 다르모어에게 진격하다 몰살당하는 것이든, 초월자와 함께 공멸하든. 제른 다르모어를 없애는데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결말을 만든 것이 자신들이어야 했다. 그래야 지금까지 쌓인 죽음들을 납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 나로 인해서……?

"그렇게 끝내버릴거면 차라리……!"

숨도 고르지 않고 말을 쏟아낸 탓인지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을 헐떡였다. 불규칙적으로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등과 날개가 위태로워 보여 반박을 바로 하기 뭐했다.

"이데아?"

"치워주십시오. 당신의 위로를 받아봤자 더 비참하기만 하니까요."

내밀었던 손을 쳐내며 이데아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감정이 고양될 때 열리는 세로동공은 당연하게도 쭉 찢어져 있었고, 양 뿔에서 일기 시작한 스파크는 모여드는 벌떼처럼 소리를 키워가 금방이라도 벼락을 쏘아버릴 것 같았다. 난 대화하려했지 그녀와 싸울 생각은 없는데. 여차하면 제압해야하나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정도 숨을 고른 그녀는 잔뜩 흐트러진 제 모양새는 여전했지만 적어도 누구 하나 감전시킬 스파크는 사그라들었다.

"후욱, 후우우…… 실례했습니다. 저답지않게 너무 흥분해서 추태를 보였군요."

"아니 그, 괜찮다."

"그런 얼굴로 괜찮다고 말해봤자 신빙성따위 없습니다."

꽤 진정이 됐는지 뱀처럼 가느다랗던 세로동공이 고양이 눈 정도로 풀렸다.

"아무튼 이게 제가 당신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납득하시겠습니까?"

"…… 아니."

대답한 나 자신이 놀랄 정도로 쌀쌀맞은 목소리가 대꾸해버렸다. 하지만 잘못 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생 처음 본 이데아의 격렬한 분노와 여태껏 그들의 입장을 어떨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충격에 재빨리 깨닫지 못했지만, 중후반부터 내가 저 정도로 몰매를 맞을만큼 잘못했는가하는 의문정도는 들었으니까.

"역시…… 그런 겁니까."

"그 반응은 뭐냐?"

"저도 알고는 있으니까요. 이 감정이…… 지극히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부당하다는 사실을."

싫어할만한 이유는 되지만, 이렇게까지 될 정도는 아니죠. 불과 몇 분 전까지 활화산 터지듯이 분노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힘이 쭉 빠진 목소리에 내가 잠시동안 환각을 보았던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저희 전쟁을 끝내는데 일조한 사람일 뿐이지 결코 그 장본인이 아닌 것을…… 진짜는 그 오버시어였죠."

간단한 답이었다. 내가 쓰러뜨린 건 조종당하는 파픈스타였지 전쟁의 원흉이자 노바족들의 원수인 제른 다르모어가 아니다. 고로 복수의 대상을 잃은 저들이 화낼 대상은 내가 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정작 그 오버시어한테는 증오는 고사하고 화조차 들지 않더군요. 머리로는 저 자가 우리의 일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심장은 식어만 갔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왜지?"

"당신은 불어오는 바람에 증오를 품을 수 있나요."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태양이 뜨고 지는 이치를 원망하는 걸,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당연한 것을 적대시 하는 게 당신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 아. 그런 건가.

"당신도 알잖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힘도, 사고방식도 사람이 아닌 것을."

갓 태어난 개미와 천 년을 산 나무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노바족은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이 백날 생명의 오버시어를 원망하고 증오해봤자 그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는 조그마한 미풍조차 되지 못함을. 동시에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대상은 다르지만 나 역시 그년을 증오하기때문에 잘 알고 있다. 감정만큼 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드물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구성하고 돌아가게 하는 무언가. 그런 건 생명체가 아니죠."

개념이나 일종의 법칙같은 거지. 말을 하고 행동도 하지만, 대하면 대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그 정신구조에 괴리감만 커지다 이쪽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져버린 것이다.

"여태까지 해온 것들이 전부 무색하게, 저희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모든 게 끝나버려서 신에게 저주라도 퍼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원흉이 신이 되면 그런 건 애초에 할 수도 없다는 걸 알고 나니…… 정말 이런 끝이 나버린 게 단순히 '운이 없어서'가 되서 정말 돌아버리겠더군요. 죽어간 사람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였거든요 그건."

운이 없어서. 그 짧은 말이 귓가에 박혔다.

"그러다 당신이 보였습니다. 오버시어만큼은 아니지만 저희의 전쟁을 그렇게 끝내는데 일조한 사람. 갈곳을 잃어버린 감정이 화살을 돌려버리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동족들을 장작삼아 피운 불을 꺼뜨릴 수 없어 나한테 튀긴 건가. 썩을.

"그래서 그딴 짓을 저지른 거냐."

"감정이란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돌아갔다면 좀 자제하는게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름 이성적이라 자부했던 저도 그건 못하겠더군요. 저도 그럴진데 다른 이들은 뭐…… 설명할 필요 없겠죠."

애초에 감정은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거 잖아. 될 리가 없는 것을.

"이후 당신이 알려준 새로운 위기와 기회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우리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니, 또다른 전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웃어버려 한 편으론 죽고싶은 심정이란게 어떤 건지 제대로 느꼈었죠."

제가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알아버렸거든요. 그녀의 입이 그린 호선은 부드러웠으나 언젠가 보았던 그년의 웃음처럼 잔뜩 깨져있었다.

"추가로 말하자면,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켰습니다. 어쨌든 당신 덕에 전쟁이 끝난 건 사실이라서 판을 새로 짜면서도 당신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전제를 벗어난 적은 없으니까요."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일단 노바족이 내 부탁을 확실하게 들어주기 위해 움직인 건 맞았다. 너무 확실해서 문제지. 하하, 결국 내가 틀린 건 변함없네. 지금의 결과는 내 말이 그대로 실현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 뿐이니까.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 일을 계획하고 밀어붙인 건 너를 포함한 노바족 전부인가."

다른 것보다 이걸 먼저 알아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저들과 함께하는 건 더 이상 무리인 건 물론이고, 절대 가만히 넘어갈 수 없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모래성처럼 푸스스 무너졌다.

"아니요. 믿기지 않겠지만 제가 아는 한 저를 비롯한 수뇌부 일부정도입니다. 사실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저정도로 격하게 싫어하는 이는 많지 않거든요. 그 중에서 이만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지위의 사람은 더더욱 드물고요. 물론 말을 듣지 못했더라도 은연중에 눈치챈 사람은 있을 겁니다. 티내지 않고 묵인한 사람도 있을 거고,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을 해온 사람 역시 있겠죠."

허무한 결말에 허탈감을 느낀 건 다들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하는 이들도 꽤 많았을 거다. 현실적으로 그런 이들이 과반수 이상이겠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들도 사람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안심과 불쾌감의 공존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저 정도로 꼭지가 돌아버린 사람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어깨와 등이 박살나도록 많은 것을 짊어진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짊어진 게 많은 사람은 그에 따른 이유가…… 잃은 것이, 그런 선택을 많이 해서죠."

타인의 생사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한 권력이 있기 대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거다. 그녀와 동조한 사람들이 수뇌부쪽에 집중된 이유는 그때문이겠지.

"더 물어볼게 있습니까."

"아니. 이제 됐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돌아보지 않은 결과가 어떤지 알았다.

"이제 내가 말해도 되나."

"네. 들어드리죠."

의도하지 않아도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배배꼬인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너희가 싫다."

이데아. 오늘부로 얼음마녀 타이틀 떼라. 그 표정 진짜 멍청해보여.

***

side out.

이데아는 금붕어마냥 휘둥그레 뜬 눈을 꿈뻑이다 몇 번 손으로 비벼 재차 그를 다시 보았다. 삐딱하게 기울어진 고개하며 입가에는 비웃음에 가까운 냉소가 걸렸고, 어느샌가 팔짱도 꼈다.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검호는 진심으로 자신들을 향해 악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잘 못 들었나? 나도, 너희가, 싫다고."

"…… 제 이야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나도 잘 생각해보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너희를 싫어하고 있었다."

이상하잖아. 전쟁이 허무하게 끝난 이후 노바족들이 어떤 심정일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라 칠 수 있지만, 왜 그렇게 관심을 안 주었었지? 그 뒤로 여러가지 일을 해야해서 바빴다해도 오늘 이 자리에 올때까지 조금도 그들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존재했다.

"너흰 그녀를 버렸잖아."

제기랄 저놈들 심정따위 알게 뭐야. 그녀를 버린 놈들인데. 시간의 오버시어를 봉인에서 풀기위해 협력을 하기도 전부터, 처음 그들을 만났던 바로 그 날 당일 그에게 노바족의 인상은 '배은망덕한 놈들'로 찍힌 것이다. 검호 역시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날 뿌리박힌 노바족을 향한 거부감이 오늘 날의 발단이 된 건 마찬가지였다.

"누, 누굴 버렸다는 겁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나? 뭐, 적어도 이데아 너는 아닌 것 같네."

파픈스타를 부를 때마다 꼬박꼬박 ~님이라고 붙이고, 이름이 아닌 대명사로 칭할 때도 그분이라고 존대해서 쓰는 걸 보면 최소한 이데아는 파픈스타를 여전히 영웅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내 옷자락 붙잡고 매달리며 제발 그녀를 죽여 복수해달라고 울고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데."

그녀를 우상시했다는 사람들이, 그녀를 존경했다는 놈이 정작 그녀를 구할 생각을 눈꼽만큼도 안하는 걸 보고 속이 끓다못해 뒤집혔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날 그녀에게 구해진 사람들이 그녀를 구하는데 절대 힘을 보태주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하고 봉인석이 있음에도 쓰지 못하는 걸 깨닫고 얼마나 좌절했는데.

"그래도 상황이나 처지로 봤을 때 저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애써 납득했고, 이대로 몰살당하게 내버려둘 수 없어서 그녀를 포기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그 선택이 엄청 후회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을 구한 행동자체를 후회한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허, 참.

전쟁이 그 따위로 끝난 걸 납득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만든 놈을 증오하고 싶었는데 정작 그놈은 백 날이 아니라 천 년을 증오해도 기스하나 내는 게 불가능한 놈이라 나한테 화살을 돌렸다는 말인 즉─ 씨발 그냥 내가 오버시어보다 만만했다는 소리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구한 사람들에게 그딴 대우를 받아야 해?

"결말이 마음에 안 들면 처음부터 부탁따윌 하지 말았어야지. 애시당초 너희 힘으로 하지 못해서 나한테 부탁했잖아?"

"그, 건 처음부터 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었다고요! 거의 도박하는 심정으로 했던 건데 진짜로 성공할 줄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노바족은 그 날 처음 검호를 봤는데 뭘 알고 그가 특공을 성공시킬 거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세피로트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라 했지만 그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아는 노바족으로서는 '저 사람도 어지간히 지쳤구나. 자기 일을 딴 사람한테 넘기는 걸 보면'이라고 오히려 동정했고, 잘 쳐줘도 엇비슷한 수준일거라 생각하며 그녀를 처치하는 건 기대하지도 않고 헬리시움 전초기지나 되찾으면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던진 거였다. 실패한다 해도 그들에게 손해따위 없을테니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평타를 넘어 우주급 홈런이 나와버렸다. 성공은 커녕 수확이 있으면 그게 기적이라 생각하고 판테온에 틀어박혀 있던 노바족의 입장이 순식간에 닭 쫓던 개가 되었고, 아무 기대없이 자포자기 하듯 던진 돌이 터뜨린 잭팟에 이데아를 비롯한 이들이 자살충동에 가까운 허무함을 느낀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를 처치하는데 성공했다고? 심지어 제른 다르모어까지 없어졌어?

어째서?

"…… 지금 니 그 말을 들은 내 기분이 어떨지 짐작이 가나?"

"대충은…… 가는군요."

"다행히 머리는 아직 잘 돌아가는 모양이네. 만약 모른다고 대답했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나도 모르겠는 걸."

검호의 손등 위로 두드러지는 굵은 힘줄에 이데아의 뒷목에 식은땀이 맺혔다.

"물에 빠져있어서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걸 넘어서 쥐도새도 모르게 지랄난장을 쳐놓은 걸 본 것 같아. 그래놓고 왜 구했냐며 멱살잡이까지 하며 싸대기까지 치니, 기분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내가 아는 단어로는 표현이 안 돼."

검호는 시야 한 쪽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붉은 색에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내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너라는 걸 알았음에도 얘기를 듣기로 한 건, 최소한 이유는 들어야 했고 또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던 태도를 버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계속 벽만 올리고 있다간 안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젠장 벽을 내리자마자 보인 풍경이 너무 가관이라 벌써 회의감이 들고 있어. 팔짱을 꼈지만 조금씩 움찔거리는 손가락이 그가 무의식적이긴 하나 검을 잡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는 걸 눈치챈 이데아는 재빨리 물었다.

"저희를 어쩌실 거죠?"

"마음같아선 당장 손절하고 싶다."

"그런데 그 말을 바로 안하는 걸 보니 저희와 계속 손을 잡아야하는, 최소한 당장은 손을 놔서는 안 될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요."

주로 당신이 이제부터라도 바꾸겠다는 방법에 대해서. 흉흉한 기색마저 내비치는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넌 이 상황에서까지 뭐든 이용할 생각만 가득한 건가."

"직업병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니까 더더욱 무엇이든 이용해야죠."

"그런 모습이 꼴보기 싫어서 더 배제시킬거라는 생각은 못 하나."

"물론 가능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벌써 말하고도 남았겠죠. 당신 성격에 그런 결정은 돌려 말하기따위 할 리 없고, 처음부터 말하거나 마지막에 말하거나 둘 중 하나 아닙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검호를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하고있는 생각을 어떤 형태로 은근히 내비치는지 정도는 대부분 꿰고 있었다.

"너……."

진짜 기분 나쁘네.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잘 알면서 그딴 짓을 벌이다니. 욕설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짙은 환멸감이 배인 목소리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와 눈을 마주보았다.

살기까지 그리 멀지않은 분노가 서린 눈동자는 감히 오래 볼 것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무조건 보아야 했다. 두려움을 마취시키는 방법은 옛저녁에 터득한지 오래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저희가 필요하다. 그것은 앞으로 바꾸겠다는 방법에도 동일한 사항입니까."

"그렇긴 한데 여차하면 나 혼자서도 해볼 생각이 있거든."

"하지만 저희가 있는 편이 더 수월하고 도움이 된다고 당신은 이미 판단을 내렸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손을 놓겠다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고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너희를 믿을 수 없어."

"뿐만 아니라 저희 역시 여전히 당신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판테온 아래에 봉인되어 있는 시간의 오버시어를 안전하게 해방시키기 위해선 그의 힘이 절실하다. 그래서 다소 비틀었을지언정 그가 내놓은 계획의 주요 뼈대를 바꾸지 않았다. 전제까지 손대지 않은데엔 그를 향한 나름의 존중뿐만 아니라 이대로 진행되어야 우리가 산다는 판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검호는 그걸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생각따위 없었다. 그러기엔 그 역시 감정이 만만치않게 끓고 있었으니까.

"서로 필요하니까 계속 손을 잡자고? 그 결과물이 이건데 그런 말이 나오나?"

"…… 물론 아닙니다. 최소한 이전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어떤 것이 하나 필요하죠."

"그 필요하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이데아 너도 잘 알텐데."

이데아는 여태까지 혀를 굴렸던 것이 무색하게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연히 안다. 현재 상황에서 그들이 계속 손을 잡는데, 이전과 같은 결과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노바족이 더이상 자신들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그가 계획도중 감정에 휘둘려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이데아가 계획이 끝나는 그 날까지 검호를 배신하지 않을 것을

검호가 계획이 끝나는 그 날까지 노바족을 버리지 않을 것을

무엇보다도 굳건하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신뢰가─ 그들에게 필요했다.

"반쯤 돌아버릴 것 같은 내 머리로도 그런 건 갑자기 뿅하고 생겨나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잘 아는데 말이야."

"그…… 렇죠."

작금의 상황에선 더더욱. 대화의 결과로 알게 된 사실이 서로를 향한 감정이 시작부터 제로(0)를 넘어 마이너스였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생겼다는 건데, 이런 상태에서 신뢰를 찾느니 그게 생겨나지 않는 이유를 세는 게 훨씬 빠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당신은 저희가 무엇을 하면 저희를 신뢰해줄 겁니까."

"글쎄."

최소한 주동자들이 직접 내게 사과를 해야 한다. 나는 물론 그들이 비튼 계획으로 인해 피해를 본 메이플 월드의 사람들 전원에게. 더불어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애매모호한 무언가가 아닌 눈에 보이는 유형의 증거를 보여야겠고. 나아가선 자신이 아닌 노바족이 직접 이 일을 벌인 주동자들에게 그에 따른 합당한 처벌을 해야한다.

이상의 말을 다 들은 이데아는 괴상하면서 기묘한 표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수뇌부들의 목을 대부분 날리고 동조자들의 반 이상을 숙청한다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겨우 저런……?

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대꾸했다.

"그건 화풀이잖아."

"화풀이하고 싶은 거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하고 싶지. 하고 싶은데, 거기에 휘둘려선 안되는 걸 아니까 참는 것 뿐이다."

당장 이 화를 그대로 휘두르면 루타비스 내 노바족이 최소 3분의 1은 쓸려나간다. 때문에 바로 얼마 전에 분노에 눈이 돌아가 대참상을 일으킨 걸 후회하고 있는 검호로선 일단은 참자는 결론을 내리는 게 당연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

"…… 정정하죠. 당신의 그 분노는 지극히 정당합니다. 그런데 고작 그걸로 만족하고, 또 저희를 신뢰하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만을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이번처럼 꾹꾹 쌓인 분노가 뒤늦게 대폭발하면 심히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검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웃는 듯 우는 듯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어쩔 건데? 열이 머리 끝까지 올라 진짜로 죽이면 그걸로 끝이 날 것 같아? 그럴리가 없지. 잠시 동안은 화를 풀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 뒤엔? 분명, 후회할 텐데."

난 나란 놈을 잘 알아. 내가 왜 살인을 꺼리는데. 단순히 사람을 죽일만한 담력이 없어서? 그런 이유가 아니야. 나는 죽이는 순간보다 죽인 이후가 더 무서워. 한 사람의 생명을 끝내버린 죄책감에 허덕일게 분명한 내 미래가 두려워. 그 사람이 끔찍한 학살자면 괜찮지 않냐고? 그럴리가! 그놈을 죽인 시점부터 나는 그 학살자와 한 발짝 가까워지는데!

거기다 한 명을 죽이면 그걸로 끝날까? 그 다음은? 다음에 또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 없을 거란 보장이 어디있지? 일은 처음 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두 번째, 세 번째도 똑같이 어려울까? 여전히 죄책감에 괴로워 할까? 뭐든 숫자가 늘어나면 익숙해지고 무뎌지잖아.

그럼 죽지 않을정도로 패는 건 괜찮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이번에 한 짓을 개인단위로 줄인 것 밖에 더 돼?! 거기다 사람을 빈사지경으로 만드는데 익숙해지면 다음 한 발짝을 내딛는 건 더 쉬워지는 걸 왜 몰라!

하아…… 젠장. 결론은 그거다.

나는 누군가를 해치는데, 죽이는데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서, 지금은 조금이라도 할 때마다 괴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무덤덤하게 해버리는 그런 모습으론 변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변해버리면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그래서 니놈들이 이런 개짓거리를 벌인 걸 뻔히 아는데도, 니 말대로 정당한 분노인데도 화를 못 내는 거다."

분노에 눈이 멀었다가 이번처럼 선을 넘겨버리면 감당 못하니까. 그리고 그는 안타깝게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가장 확실한 예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본의아니게 말이 빙 돌아갔지만 이데아는 그가 왜 그런 솜방망이 조건을 내놓았는지, 또 그가 앓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았다. 분노를 기반으로 발동하는 제어불능의 스킬로 발생하는 피해와 스스로가 그은 절대 넘어서는 안될 선이 안 좋은 의미로 시너지를 일으켰다.

"지금 당신이 저희에게 바라는 건 폭력적이지도 잔인하지도 않으면서, 그 잘못에 걸맞은 - 당신의 화가 풀릴만큼 확실한 처벌이군요."

"그렇, 지."

"그게 뭔지는 스스로도 모르지만 몹시 까다롭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 조건부터 빡센 건 내가 봐도 아니까."

이데아는 반쯤 눈을 내리까는 그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신뢰를 얻는 방법은 풀어놓고보면 복잡했지만 결국 간단했다. 너희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뤄라.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조차 하지 않으면 신뢰는 꿈도 꿀 수 없으니.'

조건자체도 까다로운데 책사로서 반평생 갖은 편법을 써오고, 편법이 없으면 만들기까지 해온 그녀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요구였다. 이 상황에서마저 그녀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구슬릴 만한 단어와 몇몇 수들을 떠올려대고 있었는데, 이쯤되면 직업병을 넘어 강박증의 영역에 들어간지 오래된 것 같다.

모략이 풀려나오는 머릿속을 털어내기 위해 그녀는 몇 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끌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편법을 써선 안된다. 극도로 인내하고 있는 그가 노바족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를 망쳐선 안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방법은 있었다.

"검호."

붉은 시선이 닿았다.

"어떻게 할지 정했나."

"예."

결정을 내린 그녀의 황록안이 결연하게 빛났다.

"잠시 왼손을 빌려줄 수 있습니까."

"응?"

"당신의 오른손엔 그 드래곤과의 계약의 인장이 있어서 마법을 걸기 까다롭거든요. 그러니 왼손을 써야겠습니다."

"무슨 마법을 쓰겠다는 거냐."

"일종의 계약 마법입니다."

이데아가 쓰기로 한 건 '기아스(Geas)'라는 이름의 마법으로, 계약 계통 마법 중에선 최상위에 드는 막강한 구속력을 발휘해 마법사들 사이에서 혼까지 저당잡히는 족쇄라고 비유되는 것이었다.

"잠깐만 그런 위험한 걸 왜……?!"

"우문이군요. 그 정도로 위험하기때문에 쓰는 겁니다."

마법을 쓰는 당사자인 그녀가 제 손으로 이 족쇄를 채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최소한 이 정도가 아니면 처벌의 의미가 없으니까.

"당신은 당신의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이 목줄을 쥐고 흔들기만 하면 저를 부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강제로 시키는 건 물론 상처하나 내지않고 고문에 가까운 통증을 줄 수도 있으며, 자살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런 거면 더더욱 안 써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나한테 이딴 걸 줘봤자 쓸 것 같냐!?"

"안 쓸 걸 아니까 주는 겁니다."

"무, 뭐?"

그녀의 대답에 검호가 당황하는 사이, 이데아는 그의 왼손을 잡아챘다.

"저는 당신이 싫고 또 별로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편견과 사감이 들어간 평가지만, 계획을 진행하는 내내 당신이 감정에 휘둘려 저지른 돌발행동들을 보면 아주 일리없는 것도 아니죠."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리고 이 손 놔라."

"─하지만 그럼에도 딱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의 손등을 덮은 이데아의 손안에 마력이 응집되었다.

"방금 당신이 말했죠? 누군가를 헤치고 죽이는 게 싫고, 그것에 익숙해져서 선을 넘고싶지 않다고."

이용이라 해도 좋았고, 도박이라 칭해도 좋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 당신이 해온 행동을 떠올렸습니다. 소중한 사람마저 버리고 저희를 구한 건 한 명이라도 더 구하는데 맞다고 생각해서였고, 잘못된 선택을 한 이유가 당신의 선택때문에 사람들이 휩쓸려 죽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으며, 번거롭게 블랙윙에 들어갔던 것도 군단의 준동으로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걸 사전에 알고 방비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지금.

"저희들의 만행을 알았음에도 끝끝내 기회를 주는 것까지 보았을 때…… 저는 당신의 그 바보같은 착함만큼은 믿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검호가 스스로의 선함을 유지하고 또 선을 넘지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상, 그에게 자신들의 목줄을 넘겨도 절대 그것을 당겨 자신들의 목을 자르지 않을 것이다.

이데아의 말에 그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 사이, 어느새 검호의 손등을 덮었던 날카롭운 빛은 서서히 사그라들며 화상같은 문신을 남겼다.

"…… 그거 그냥 내 호구성을 믿는다는 뜻이잖아?"

"아, 그렇게도 들리겠군요."

이 여자가?!

"그래도 당신에게서 '신뢰할만한 것'을 꼽자면 그것밖에 없는 걸요."

욕이라도 하려던 검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신뢰라는 건 그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믿고[信] 의지하는[賴] 것이죠. 한 사람을 의지할 수 있을만큼 믿는데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그에게 의지할 수 있을만큼 믿은 사람은 아스카와 파픈스타다. 영혼의 동반자이자 언제까지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이와 유일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동료. 그들만큼은 신뢰할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들을 의지할 수 있을만한 믿음을 갖게 했을까.

"정답은 '한결같음'입니다."

한결같음. 또는 일관성이라고도 불리는 것.

"일관적이고 반복적이며 변치않기에─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거죠."

아스카는 처음 계약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나를 마스터라 생각하고 위해줬다. 초창기의 민폐에 가까운 행동부터 얼마 전의 가슴 쓰릴만큼 괴로운 일까지. 그 꾸준한 행동을 보고 나는 아스카를 이 세계에 와서 믿을 수 있는 첫 존재로 각인시켰다.

파픈스타는 늘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성공 가능성도 희박한 날 돕기 위해 군단장일 때엔다른 군단장들의 동태를 꾸준히 내게 알려줬고, 끝내는 검은 마법사를 배신하며 나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것을 본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처지의 동지이자 이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 한결같음이라는 건 말로만 떠들어서는 보일 수 없습니다. 오직 행동으로만 드러나니까요."

그 사람이 늘 반복적으로 보이는 행위.

내가 반복해온 것.

"제가 알고 보아온 당신의 한결같음은 '선함'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만을 앞세우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변을 살피며 그들의 처지와 상황을 고려하는 것. 심지어 엇나간 길을 걸을 때에도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말로 힘든 일인데 말이죠."

"…… 그들을 위해서 한 게 아니야. 나를 위해서였지."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결과니까요."

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과론을 말하는 거냐?"

"그런 것도 압니까? 뭐 중요하지 않으니 넘기고, 제 말 뜻은 그게 아닙니다."

그녀가 말한 중요한 결과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말하는 거였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했든, 당신의 행동과 선택은 많은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던가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칭호로 불렀다.

"영웅이라고…… 했지."

"그렇게 불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나는 그런 칭호로 불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냥 날 위해서…… 그 사람들이 죽도록 내버려두면 내가 견딜 수 없어서 나섰던 거였으니까. 다른 영웅들처럼 세상을 구하네 마네 그런 생각으로 했던 게 아닌데, 나 자신이 영웅이라는 칭호가 얼마나 나와 어울리지 않는지 너무 잘 알았거든."

"하지만 어쨌든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죠."

그리고 지금은 세상의 멸망을 막기위해 움직이고 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였든, 구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영웅이었을 겁니다. 그게 계속, 계속 반복된다면 - 군단장과 싸우고, 검은 마법사와 싸우고, 이내 스스로를 희생해 세상에 평화를 되찾아오는 것까지 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짐작은 갔지만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는 검호의 얼굴을 감상하던 이데아는 어쩐지 근질근질해지는 입가를 억누르며 대신 답해주었다.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선량한 진짜 영웅'이겠죠. 당연히."

"그,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라."

달빛 아래라 그런지 애써 손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붉어진 피부가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푸,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당신의 행동들은 당신이 아니라고 해도 '저 사람은 터무니없이 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것이 제 스스로 목줄을 채우고 그걸 넘겨도 괜찮을만큼 신뢰할만 하다는 것도요."

"무모하다. 내가 변심이라도 하면 어쩔거지?"

"그렇게 안되도록 이번엔 제대로 노력할 겁니다.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말이죠."

검호를 신뢰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의 선함이 유지하는 동안에 한할 뿐이다. 그것이 변하면 그 순간부터 신뢰의 대상이 아닌 잠재적인 적이다.

"근데…… 넌 내 '바보같은 착함'을 신뢰한다면 나는 너의 뭘 믿어야 하는 거냐. 설마 이 기어 뭐시기를 믿으란 건 아니겠지?"

"그럴리가요. 다만 제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당신이 직접 생각하고 찾으세요."

"만약 없으면?"

"음……."

이데아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저 사람에게 신뢰를 살 수 있을만한 게 있는 사람인가? 검호 역시 마찬가지의 고민을 했다.

신뢰란 한결같음에서 비롯되는 것. 그의 한결같음이 선함이었다면, 그녀의 한결같음은─.

"…… 있긴 있네."

"벌써 찾아냈나요?"

"의외로 간단했어."

"대체 무엇이길래 간단했다는 겁니까?"

그녀는 자신의 행동 중 일관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냉정함? 책략? 아니면 권모술수? 어쩐지 묘한 기색이 서린 붉은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그 '또라이같은 민족주의'를 믿도록 하지."

"잠, 뭐, 뭐라고요?!"

예상치못한 대답에 이데아가 당황하는 사이 그는 말을 이었다.

"노바족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언제든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는데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노바족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사고방식. 스스로의 권력을 자신이 아닌 종족을 향해서만 휘두르는 그 민족 정신이야말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노바족이 죽는 터무니없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사라지지도 변하지도 않겠지."

그야말로 이데아가 앞서 했던 말에 꿀리지 않는 폭언이었다.

"나는 니가 그 미친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는 한 너희 종족 하나뿐인 구원줄인 날 버릴 일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너는 날 그렇게 싫으면서도 내 계획에 손을 보태줬고, 너희 종족에게 피해 안 가게 하려고 요령 쓰면서도 계획의 틀만큼은 안 바꿨고 또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도 내가 준 기회를 어떻게든 잡으려 했지."

그리고 그녀가 그 모든 일을 한 이유는 딱 하나, '노바족을 위해서'였다. 어떤 의미로는 그녀 자신이 말한대로 참으로 일관성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뭔가 이상하게 들렸지만 의외로 상당한 근거가 있어서 내린 답이란 걸 깨달은 이데아는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을 진정시켰다.

"…… 그 말엔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지 않나요? '당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줄일 것'이라는 조건이."

"너는 나 말고 다른 트립퍼가 이 일을 끝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현재 그를 제외한 다른 트립퍼는 세피로트, 사이키커, 프라이쉬츠가 있다.

"먼저 세피로트는─"

"그 사람이 자의로 일어설 수 있었으면 저희가 그 지경까지 안 갔겠죠."

"잘 아네. 그리고 사이."

"그애가 정신차려서 일을 성공할 확률보다 기억 리셋하고 새로 가르쳤을 때의 성공 확률이 더 높을 걸요."

"마지막으로 프라이쉬츠는 뭐,"

"하! 그 인간이 갱생할 확률따위를 믿느니 사이키커가 제정신이 될 가능성을 믿겠습니다."

결론은 현존하는 트립퍼중에서 오직 그만이 안전하게 시간의 오버시어를 깨워 세계의 멸명을 무사히 마무리지을 수 있다.

"더 말 안해도 되겠네. 다 알고 있으니."

"…… 예. 인정하죠."

그녀는 검호를 싫어하고 또 그가 엇나가도록 방치하며 노바족의 이득을 꾀했지만, 동시에 노바족을 위해선 그를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노바족을 생각하고 위하는 수호자인 이상 이는 변치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다.

"쯧, 생각해보니 웃기지도 않는 결과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건덕지가 나올 수 있다니."

"이런 상황이니까 나오는 거죠. 다른 때였으면 오늘처럼 험악하고 노골적인 얘기따위 할 리 없으니까요."

그건 그랬다. 검호는 이데아의 말을 납득하면서도 미간에 파인 골을 더 늘렸다.

"그래도 말해두는데, 나는 이제부터 널 믿지만 여전히 니가 싫다. 앞으로도 어지간한 일이 없다면 쭉 싫어할 거다. 너뿐만 아니라 다른 노바족들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뢰하는 것과 감정은 별개의 것이죠."

변한 것은 '그렇게 싫음에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된 것'. 그뿐이지만 그게 가장 중요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하던 둘 중, 이데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호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느리게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맞잡았다.

***

========== 작품 후기 ==========

"그런데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뭐가 말입니까?"

"이 기아 뭐시기. 실수로라도 사용되면 안되잖아."

검호는 흡사 저주라도 보는 눈으로 제 왼 손등을 보았다. 어째 목줄에 묶인 건 그녀뿐만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괜찮습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날 너무 믿는 거 아니─."

"그거 애초에 가짜라서."

"……?!?!?"

그가 경악하며 목을 꺾다시피 홱 돌리든 말든 그녀는 태연하기 짝에 없는 얼굴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약식으로 틀만 짜놓은 겁니다."

"어째서?!"

"그야 당신은 항마력이 더럽게 높으니까요. 정말, 살다살다 당신처럼 항마력 높은 인간은 처음 봅니다. 그 한심한 남자(세피로트)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당신은 자연재해 규모의 마법이나 도시 하나를 집어삼킬 마법도 큰 상처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급이라고요."

진짜 그런 적 있는데. 전자는 직격은 아니었지만 프리드의 번개 마법에 스쳤는데도 빛때문에 잠시 장님이 된 것 외엔 문제가 없었고 - 장님이 된 것 자체가 문제였지 - 후자는 언젠가 힐라와 싸우다 그 마녀가 작정하고 쓴 도시를 통째로 녹여낼 수 있다는 저주덩어리에 맞고도 무사했던 거.

내 항마력이 그렇게 대단했구나. 예전엔 반쯤 운빨이라 생각했는데. 뒤늦게 자신의 굉장함을 깨달은 검호였다.

"그런 항마력을 가진 당신에게 어떻게 아무 준비없이 기아스같은 고급 마법을 새길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새기기 전에 틀을 미리 짜두는 정도밖에 못하죠."

"진짜 쓰긴 쓸 건가보지?"

"그게 합당한 처벌이니까요."

나중에 준비가 되는대로 그녀뿐만 아니라 이번 일에 동참한 수뇌부 전부가 그에게 기아스를 새겨서 넘겨줄 것이다. 애초에 쓸 생각도 없지만, 사람 목숨을 언제든 원하는대로 끊을 수 있는 물건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 들어온다는 사실에 그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만약 실수로라도 써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런 사태에 대비한 방비정도는 당연히 해둘 겁니다. 걱정마세요."

"…… 그렇게 장담을 하니 믿어보지."

약식이라고는 하지만 전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구불구불한 하얀 문신은 오른손의 계약의 인장과 대조되었다. 이제 여기에 다른 문신도 여럿 추가된다니.

"나중에 장갑 껴야겠네."

하나도 아니고 양 손에 문신만 몇 종류를 새기는 거야. 엄청 눈에 띄겠네. 기아스를 '눈에 띄는 문신'따위로 여기는 그의 모습에 이데아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계약 마법의 정점을 보기 흉한 문신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맡기는 거지만.

누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버튼이 있다면 누구에게 맡기는 게 현명할까? 신중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 정답은 - 그 버튼이 진짜든 가짜든 절대 누르지 않을 사람이다.

"그런데 이건 약식이니까 사용 못하는 건가?"

"아니요. 형식은 갖췄으니 아주 간단한 명령정도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을 가져오라든가, 춤을 춰라 같은."

"'춤 춰라'?"

반쯤 호기심으로 내린 명령에 하얀 문신이 빛나며 그녀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자, 잠, 잠, 잠깐만요! 갑자기 무슨?!"

"엉? 이거 진짜 되는 건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트너도 없으면서 그녀는 허공에 팔을 뻗고 스탭을 밟을 준비를 했다.

"취소하세요! 당장 취소하세요!"

"야 근데 이거 어떻게 취소하는 거야?"

"빨리 멈춰달라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아무 생각없이 한 명령에 혼자 달빛 아래에서 혼자 춤을 추며 제발 멈춰달라고 처절하게 외쳤지만, 마법의 ㅁ도 모르는 그가 까다로운 계약 마법, 그중에서 최상위권의 기아스의 명령권을 자유롭게 쓸 줄 알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춤을 멈춘 것은 마법을 유지시는 마력이 바닥난 후였으며, 그나마 다행인 건 애초에 약식으로 쓴 거라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는 거였다.

마력이 바닥남과 동시에 이데아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지려다 간발의 차로 땅에 손을 짚었다. 그 자세가 흡사 몹시 좌절한 사람을 형상화한 이모티콘을 보는 듯 했다.

"어, 음…… 이데아?"

괜찮냐는 물음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이니까. 검호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는데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갑자기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양 손으로 그의 멱살을 확 뜯다시피 잡아당겼다.

"이이, 이, 이 사람이……!!"

"미안. 미안해.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다음부턴 절대로 이딴 명령 내리지 마세요! 이번엔 그나마 이 꼴을 본 게 당신 한 명뿐이라 낫지만, 만약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딴 명령을 내리면─!"

검호는 이데아의 눈에서 아까와는 다른의미로 활활 타오르는 살기에 가까운 무언가를 보았다. 자살이나 고문같은 것보다 이게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건 기분탓인가.

"알았어, 안 할게. 안 할테니까 이 손 놔줘."

"정말이지 당신은……!"

앞섶이 다 구겨지도록 움켜쥐던 두 손이 툭 놓아지자 그는 옷주름을 폈다. 보기보다 악력이 장난아니네. 그 사이 이데아는 숨을 고르며 이마를 짚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손이나 주시죠. 다시 새겨야 하니까요."

"으, 응."

"생각이 있는 겁니까? 이딴 명령에 겨우 만든 걸 써버리다니."

아직도 화가 다 안 가라앉았는지 그녀는 씨근덕거리며 그의 왼 손등에 기아스의 틀을 다시 만들었다. 그런데 아까 전과는 달리 바늘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마력이 닿는 피부가 따끔따끔하게 자극해 그는 어지간히 춤추는게 싫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따가운 정도가 아니었지만.

무식한 항마력을 뚫고 겨우 틀을 다시 새긴 이데아는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다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았고, 품을 뒤적여 어떤 물건을 꺼냈다. 그 물건을 본 검호는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

"너 흡연가였나?"

"자주 피우진 않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피울 뿐이죠."

주로 지칠 때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담배를 피우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드니까.

"진짜 정리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기분이라도 느끼고 싶은 거에요. 피우고 있는 동안만큼은 온갖 고민들이 내뱉는 연기랑 같이 빠져나가는 것 같거든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광전사 스킬이 멋대로 써졌다 풀린 뒤, 그 반동때문에 허덕일 때 전혀 고통을 덜어주지 않지만 치료받고 있다는 기분이라도 느끼고 싶어 아스카에게 힐링을 몇 번이나 부탁했었지.

"개인적으로 메이플 월드의 담배는 다양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란디스에서는 물자가 부족해 담배도 몇 종류 없었거든요."

그 상황에서 몇 종류나 있는 게 더 놀라운데. 그녀는 능숙하게 담배 하나를 뽑아 물고 라이터 없이 간단히 손가락을 튕겨 끝에 불을 붙혔다. 마법을 그런데 쓰냐.

흰 담배 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녀가 느리게 빨아들이자 막대 끝의 연기가 조금 사그라들었고, 약간의 텀을 두고 폐부 깊숙히 빨아들였던 연기를 후- 내뱉었다. 메이플 월드의 것이었지만 지구의 것과 별로 다르지않는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뿌연 연기를 바라보는 이데아의 눈이 반쯤 풀려있는 걸 보고 놀랐다.

저 연기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 생각같은 건 안하겠군. 연기랑 같이 잡다한 생각들을 다 내뱉아서 저런 눈인 거겠지. 어느새 거의 다 흩어졌다고 생각한 연기는 다음 한숨과 함께 허공을 덧칠했다.

"…… 이데아."

"음? 뭡니까."

"그거 하나만 줄 수 있나."

"혹시 이거요?"

이데아는 설마하는 눈으로 담배갑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그 설마가 맞았는지 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왜요? 당신은 담배피는 사람으론 절대 안 보이는데."

"그냥 해보고 싶어서."

어쩐지 한심한 대답에 그녀는 짜식은 눈으로 그를 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 개비를 주었다.

"피우는 법은 당연히 모르죠?"

"가르쳐 줄 건가?"

"하아, 알려줄게요."

애초에 하지 않는게 좋지만 한 번 해보고 싶다니 이데아는 대층 빨아들이고 내뱉는 요령을 알려준 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여주었다.

흔들흔들 피어오르던 연기가 잠시 가늘어졌다. 본인이 하고싶다 해놓고 담배를 물고있는게 어색한지 게슴츠레 눈을 반쯤 감았다. 그럼에도 붉은 색은 선명하게 존재감을 자랑했고, 다소 인상을 쓴 표정마저도 지금만큼은 놀라울정도로 잘 어울려 보이는─

"큽! 콜록! 콜록! 아 젠장! 매워!!"

"…… 3초 정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환상을 박살내주네요."

가 싶더니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기를 마구 토해냈다.

"속이! 속이 타는 것 같다고! 완전 폐를 생으로 훈제하는 느낌인데 어떻게 이런 걸 피우는 거야?!"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거죠."

"그보다 물! 물 좀 줘!"

"연기는 폐로 갔었고 물은 식도로 갈텐데 의미 있나요?"

"그냥 좀 줘!!"

"예, 예."

겨우 한 모금 빨고 버리게 되다니. 아까워라. 이데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쉼터 한쪽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왔다. 가져다준 물을 바로 원샷하는 검호의 모습에 그녀는 저러다 사레라도 들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런 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콜록, 콜록, 흐…… 앞으로 담배따위 절대 안 피운다."

"그런 말 할거면 왜 피우고 싶다고 한 거에요?"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큽, 다시는 안 해."

어쩐지 얼버무리는듯한 대답에 이데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하필 지금 갑자기 해보고 싶었을까. 설마 이 인간.

"설마 어른이 담배피우는게 멋있어 보여서 한 번 피워보고 싶다는 심리로 해본 건 아니죠?"

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슬슬 기침도 멎었을텐데 어색하게 크게 몇 번 더 기침을 하는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맙소사.

"아 몰라. 아무튼 담배는 다신 안 펴. 이런 거 절대 익숙해지지 않아."

"지금까지는 왜 안 피웠나요? 당신이 겪어온 일들을 생각하면 언제부터 시작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담배라는 물건의 해악성을 잘 앎에도 그것을 피우는 이유는 그녀처럼 상념을 떨치는 용도, 더 정확히는 스트레스를 푸는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호는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가 강을 이루고도 남는다.

어느정도 타는듯한 속을 가라앉힌 그는 찔끔 나왔던 눈물을 닦으며 대꾸했다.

"그야 피우면 안된다고 배웠으니까."

"배웠다고요? 누구한테요?"

"학교에서. 초중고 내내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 미성년자는 절대 피우면 안된다고 가르쳤거든."

그래도 피우는 놈은 어떻게든 구해서 피웠지만 난 그러고싶지 않았어. 이데아는 너무나 정직한 대답에 정말 그답다고 생각하면서, 하나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신은 미성년자가 아니잖아요."

"…… 뭐?"

"적어도 지금은 확실하게 아니잖습니까. 한참 전부터 미성년자가 아닌 당신이 거기에 굳이 얽매일 필요 있나요? 하고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죠."

이데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검호에게 어떤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뒷통수를 세게 맞은 사람처럼 멍청하게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보다 더듬더듬 말했다.

"아, 어, 어…… 그렇, 지? 아니지 이제는. 그런…… 거지."

"제가 잘못 말했나요?"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다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인데, 그."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목소리는 작아졌고 고개는 푹 숙여졌다. 진짜 뭔가 잘못 말했나? 어쩐지 불안한 느낌에 어째야하나 그녀는 고민했고, 다른 얘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같이 술이나 마시면서 마저 얘기할래요?"

"뭐…… 뭐?"

"술 말입니다. 이제 당신이 바꾸겠다는 계획도 들어봐야 하는데 대화의 윤활제를 곁들이면 좋지않습니까."

우연히 좋은 물건도 얻었고. 검호는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니, 술은 좀."

"또 미성년자 어쩌고가 문제입니까?"

"그게 아니라─"

꽤 옛날에 독한 술을 엄청 마셨다가 취해서 주위에 민폐를 마구 끼친 적이 있었어. 그래서 그 뒤로 다시는 술을 안 마시기로 결심해서.

"…… 됐고, 빨리 갑시다."

"하지만 만약 취했다가 주정같은 걸 부리면 어떡해? 내가 취하면 누가 말릴 수 있냐고?"

"그렇게 되기 전에 말릴테니 걱정마시죠. 그리고 당신이 취할만큼 독한 술이 세상에 얼마나 있다고요?"

"으음."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의 몸은 단순히 힘이 강할뿐만 아니라 해독작용을 비롯한 종합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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