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호side.
진흙속을 느리게 헤엄치던 의식에 무언가가 다가와 쿡쿡 쑤셨다.
"윽……!"
젠장, 머리 깨지겠네. 뭔 흥부 부부가 머릿속에 들어와 박 대신 내 두개골을 톱질하고 있나.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과 머리를 깨고싶은 수준의 두통의 환상적인 하모니에 나는 눈을 떴음에도 당장 일어나지 못하고 몇 분동안 끙끙거렸다.
한동안 그러다 어느정도 두통이 익숙해졌을때 겨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자고있던 곳이 휴게실이라는 걸 알았다. 왜 여기서 자고 있었던 거지? 천천히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잠깐만요, 그렇게 한 번에 마시지 마세요!'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안 취할텐데.'
'이건 보통 술이 아니란 말입니다!'
'괜찮다 괜찮아.'
응. 기억나는 건 딱 여기까지. 이 뒤는 싹 공백이다.
이래서야 그때 그놈이랑 술먹고 필름 끊겼던 때랑 다른 게 없잖아!? 밀려오는 자괴감에 다시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제부터 해야하는 일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일단 휴게실에 배치된 정수기 물을 여러 잔 마셔서 어떻게든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혔다. 진짜 어제 먹은 술 뭐였던 거야? 얼마나 독한 술이었길래 또 필름이 끊긴거냐고. 나중에 이데아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약간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줘 세우며 복도에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복도를 걷는 내내 나는 사람과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잤었던 휴게실은 식당 가까이에 있었는데다 시간 상 점심 시간에 가까웠는데도. 왜지? 심지어 인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이 구역엔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몇 분 후 루타비스 중앙동으로 가는 복도에 드러서서야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형씨?"
"…… 세피로트."
"이제 일어난 거야? 아, 지금 제정신인 거 맞지?"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왜 그거냐. 세피로트는 다가오려고 한 걸음 내디디려다 어째선지 날 보고 도로 몸을 뒤로 빼더니, 고개만 쭉 내밀어 내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눈이 멀쩡한 걸 보니 제정신 맞구나. 하아, 다행이다."
"계속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아니 어제 형씨가 술에 취한 상태로 좀 요란하게 날뛰었는데…… 하, 하하, 이래저래 굉장한 일들이 벌였거든. 아직도 정신줄을 놓은 상태면 난 상대할 수도 없고 말이야."
요란하게 날뛰어? 곤란한 일? 야 잠깐 내가 어제 뭔 일을 벌였던 건데?! 세피로트는 자세한 대답대신 내 눈을 피하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얘기는 걸어가면서 계속됐다.
"뭐랄까 그, 근처에서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용자짓을 저질렀다고 해야할까. 어떻게 이데아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뭐 술에 취해서 가능했겠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
"자세한 건 그녀한테 물어봐. 그 용자짓을 당한 당사자니까."
아마 형씨를 보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걸. 어째 말을 들을수록 더 불안해진다. 진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어제의 나. 필사적으로 뇌주름을 뒤적였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혹시 정신줄 놓아서 그 스킬이 켜진 건가? 주변에 파괴 흔적같은 건 보이지 않았는데.
"이데아를 만나는대로 열심히 고개숙여 사과해야 할 거야 형씨. 어제 사람들 앞에서 그런 꼴이 되서 엄청 수치스러운 표정이었으니까."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쏘아붙이려던 찰나, 놈이 나불거린 말들을 하나씩 조합시켰다. 용자짓, 술에 취해야(이성이 날아가야) 할 법한 일, 엄청 수치스러운 표정이었다…… 잠깐 설마.
나 그, 그 이데아한테 한 일이라는게 설마 그,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믿을 수 없지만 정신줄을 놓았었다니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아, 빨리 오셨네요? 그런데 그분은……."
"괜찮아. 제정신이야."
"정말 다행이네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엔젤릭버스터의 모습에 불안감은 더 커졌다. 여기 올때까지 주변을 지나가던 노바족들이 날 볼때마다 수근거렸고, 이데아의 집무실까지 얼마 안 남았다. 만약 이 생각이 사실이면 난 대체 어떻게 그녀를 봐야하는 거야.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형씨?"
"세피로트.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어제 내가 그녀에게 했다는 짓이 설마 그,"
마음이 초조해서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제대로 나와. 근데 그걸 또 내 입으로 물어봐야 돼.
"서서, 성적인 그, 희롱이라던가 성추행같은 건 아니, 아니겠, 지?"
제발 아니라고 해라 만약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제의 나를 죽이고 싶어지니까. 세피로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엉?' 바보같은 반문만 했다. 얌마 빨리 대답이나 하라고!
"갑자기 뭔 소리를─ 아아, 큭, 형씨 잠깐만, 풉! 어제 술주정이 그런 건가 싶어서 걱정하는 거야?"
"웃지말고 빨리 대답이나 해라!"
"아, 하하……! 걱정마 걱정마, 그런 거 아니야. 아니 한 번 생각해보라고."
아무리 취했어도 형씨 눈에 그 여자가 성적 매력이 있는 대상으로 보일 것 같아? 그 얼음 마녀가? 나는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눈이 멀지 않고서야 그런게 가능할 리가 없어보이거든. 침묵하는 내 모습을 보며 계속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던 세피로트는 마저 말을 이었다.
"오히려 좀 어린애같은 유치한 짓이었어. 난 형씨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그건 또 뭔 소리야.
"그러니까 어제 형씨가 이데아한테 뭘 했냐하면─ 푸얽?!"
갑자기 문이 터지듯이 세게 쾅! 열리며 세피로트의 안면을 강타했다.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은 세피로트에게 신경쓸 틈도 없이, 문 안에서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이데아가 느리게 걸어나왔다.
"문 앞까지 왔으면서 왜 바로 들어오지 않고 남자 둘이서 수다를 떨어대는 겁니까."
언제부터 여기가 집무실이 아닌 던전이 된 거지. 나 어느 틈에 보스 대기열 끊은 거야. 참, 내 발로 걸어왔구나.
이데아는 발로 세피로트를 걷어차 문에서 떨어뜨려놓더니 - 명백히 아까 한 말의 보복으로 보였다 -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았다. 당연하게도 황록색 눈은 세로동공이 쭉 찢어져 있었다.
"당신!"
뭐라 저항할 틈도 없이 어제에 이어서 흰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콱 잡아당긴 그녀가 외쳤다.
"대체 그놈의 피카츄가 뭡니까?!"
…… 어?
"뜬금없이 무슨……."
"어제 절 더러 피카츄를 닮았다느니, 그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제 뺨을 뺠간색으로 낙서해대고 '피카'하고 울어보라 시켰잖습니까!"
야 잠깐 뭐야 그게.
"심지어 그거 유성펜이라 지우는데 애먹었다고요!"
잘 보니까 이데아의 양 뺨이 다소 붉어져 있었다. 내가 그렸다는 낙서의 흔적인지, 박박 지우느라 힘을 써서 부은건지 아니면 빡쳐서 달아오른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제 모습에 허파에 바람들린 사람마냥 테이블을 두들기며 웃어제끼는 당신 모습을 보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압니까!?"
"미, 미안한다. 내가 어제 술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
"당연히 제정신이 아니었어야죠! 만약 멀쩡한 정신으로 그랬으면 저는 그 자리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당신을 지져버렸을 겁니다!"
맨정신이든 아니든 어차피 항마력때문에 백 날 번개쏘아도 의미없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표정에 드러났는지 이데아의 뿔 주변에 새하얀 전류가 휘감겼다. 야야야 진정해!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하도록 하죠."
그녀는 멱살을 놓지않고 그대로 나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잠깐만 세피로트는?"
"알 게 뭡니까. 술 취한 남자에게도 매력적으로 안 보이는 얼음덩어리라 바보한테 동정심따위 못 느끼겠네요."
뒤끝이냐! 뭐 그런 말을 들었는데 저 여자가 참고 넘어가는게 이상하지만. 과격하게 발로 차서 문을 닫은 그녀는 반쯤 팽개치다시피 소파에 날 놓으며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먼저 묻겠는데, 어제 일 어디까지 기억합니까?"
"제대로 들이키기 직전까지만 기억한다."
"그럼 말해봤자 의미가 없겠군요."
쯧! 크게 혀를 찬 이데아는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검호. 당신은 앞으로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마세요."
"…… 난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한 건 너로 기억한다만."
"제 오판이었습니다. 당신은 잘 취하지 않을 뿐이지 알코올 완전 면역은 아니었어요."
보통 술은 괜찮았을지 몰라도 페어리제 독주는 당신 몸으로도 무리였습니다. 잠깐만 페어리제 독주? 어제 마신게 그거였어?
"그걸 왜 니가 가지고 있었던 거냐?"
"일전에 사이킥 콤비에게 페어리 퀸을 만나 레티옥신 해독제를 받아오라고 시켰었는데, 그때 둘이 갔다오면서 페어리 퀸에게 술을 받아왔더군요. 그래서 계속 가지고 있다 어제 딴 겁니다."
내가 금주를 결심했던 이유가 그 술 먹고 필름 끊겨서였는데 이번에도냐. 내 말에 이데아는 머리가 아파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저야 한 모금 먹은 순간 도수가 장난아닌 걸 알고 그 뒤로 거의 안 마셨지만 당신은…… 하아, 대체 페어리족은 무슨 비법을 쓰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호 당신을 고주망태 지경이 되게하는 술을 만든 건지 모르겠군요."
"그건 나도 궁금하다."
"진짜 술 빚을 때 독이라도 타는 건지. 아무튼 이 얘기는 이쯤하고, 당신이 자는 동안 제가 뭘 했는지 간략하게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이데아는 테이블에 널려있던 서류들을 정리했다.
"먼저 이번 일을 벌이는데 저와 동조한 이들에게 연락을 보내 어젯밤 대화의 결과를 알렸습니다.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저희가 치뤄야하는 대가를 받는데엔 일단 모두 동의했습니다."
"동의했다고?"
격렬하게 거부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기아스라는 방식을 직접 생각하고 택한 이데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까지 그걸 받아들였다는 건 내 상식 상 이해가 안 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에게 기아스를 넘겨도 그걸 악용할 리 없다'는 사실에 동의한 겁니다."
"……."
야 그거 결국 놈들도 내 호구성만은 인정한다는 말이잖아.
"그들중에는 여기 있는 사람도 있지만 외부에 나가있는 이들도 있어 다 모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하루에서 이틀정도. 그때까지는 당신에게 저희 모두의 기아스를 드리는 것은 미뤄질 겁니다."
"그들 외에 다른 노바족들은 어떻지."
동조하지 않은 혹은 묵인한 노바족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알려줬는가, 그 반응은 어떤가, 이렇게 마무리지어질 거라는 사실에 동의하는가.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 아직까지 알리진 않았습니다."
이유라 한다면 여러가지일 것이다. 마족들로 인한 루타비스의 피해, 연합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바깥의 상황들로 어려운 와중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더 혼란스러워질 거라는 현실적이고 납득이 가는 이유정도는 나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다 알면서 핑계라고 치부하는 내 속은 얼마나 배배 꼬인 걸까. 이데아는 그런 내 의심을 서류와 함께 정리시켰다.
"당신이 어떻게 하고싶은지 몰라서 당장 결정하지 않은 겁니다. 어떻게 하길 원합니까."
"알려라."
"당신을 더욱 싫어하는 자가 나올 겁니다."
"그래서?"
애초에 싫어하는 이유부터 말이 안되는 거잖아. 거기다,
"수뇌부라는 이들이 왜 직접 제 목에 목줄을 달아 나한테 바쳐야하는지, 자기들이 모르는 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도는 알고 난 뒤에 싫어하라 그래."
아무것도 모르고있다 뒤늦게 진실을 알고 뒷통수 쳐맞을 때 기분은 정말 엿같거든. 그 전에 안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지만 충격은 조금 덜해진다.
"다 알고난 뒤에도 날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차후에 이래저래 소란이 일겠지만 심각한 일이라고 덮어두면 나중에 까발려졌을 때 더 큰 난리가 날 거야. 이게 맞는 일이야."
내 대답에 이데아는 정리하던 서류를 그대로 든 채 나를 지긋이 보았다.
"당신은 의외로 상냥하면서, 그에 비례해 엄격하군요."
"뭐가 말이지."
그녀는 정리한 서류를 테이블 한 켠에 내려두었다.
"어젯밤엔 마냥 '당신은 터무니없이 선하다'고 말했지만, 그런 행동을 나오게 하는 근본이 무엇인지 방금 알았습니다."
검호. 당신은 스스로 올바르다[正]고 여기는 도리[義]를 믿으며[信] 그것을 언제나 생각하고[捻]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군요. 익숙한 목소리인데 어째선지 저 말만큼은 기묘하게 귓가에 울렸다. 내가 저거랑 비슷한 말을 어디서 들어봤나?
"하기사, 정의와 신념이 그런 것이니 자기가 손해볼 선택도 망설임없이 하는 거겠죠."
"나한테 그런 무거운 건 딱히……."
"그 말을 정정시키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당장 당신이 해줘야하는 일은 이겁니다."
"뭐냐."
눈앞에 서류 하나가 내밀어졌다.
"구금시킨 데미안의 처후를 결정해주시죠."
나는 손안의 편한 답과 번거롭고 힘든 답을 매만졌다. 이번에는 어쩔까.
***
side out.
노바족이 데미안을 치료시킨다는 명목으로 끌고 간 곳은 루타비스의 비밀통로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격리실이었다. 최초 이 격리실의 건설목적은 제네로이드로 개조중인 스우에게 무슨 일이 생겨 에델슈타인에 큰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차후 검호의 지시에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제압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술식들이 추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청문회 사건에서 스우가 아리아 여제에게 영혼째 소멸당해서 격리실은 제 용도로 한 번도 못 쓰이고 폐쇄될 뻔 했으나, 엉뚱하게도 데미안이 구금을 목적으로 그 안에 넣어지게 되었다.
"정말 안 들고가도 괜찮아 마스터?"
"괜찮아. 그러니까 내가 나올때까지 그건 아스카 니가 가지고 있어."
검호의 말에도 아스카는 여전히 염려스러운 눈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그가 저에게 넘긴 물건이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노을빛 쌍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만약 안에 들어갔다가 데미안이 마스터를 공격하기라도 하면……!"
"지금 데미안의 상태는 썩 좋지않아. 그런 상태론 공격한다 해도 무리없이 받아낼 수 있어."
"그렇게 방심했다가 한 방이라도 잘못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만약 놈이 또 파픈스타에 대해 뭐라고 지껄인다면 그는 저번처럼 꼭지가 돌아버지도 모른다.
"놈은 마스터의 역린을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된다는 거야 아스카."
"무슨 말이야?"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 만약 검을 들고 가면 위험해질 수 있거든."
"위험하니까 검을 들고 가라고!"
"아니 그 뜻이 아니라."
나 말고 데미안이 위험해진다고.
"뭐?"
"만약 놈이 또 저번처럼 헛소리를 해대면 확실히 니 말대로 머리에 피가 쏠릴지도 모르지. 근데 그 상황에 내 손에 검이 들려있어봐."
한 칼에 놈을 썰어버릴 거야. 그 다음에 놈의 장기로 Let's (R-18G)Party를 벌일테고.
"검을 들고 가면 내 목숨이 아니라 데미안 목숨이 위험해."
"……."
"그래도 주먹질은 한 방은…… 한 방은 버티겠지?"
"아, 아마도."
아스카는 확답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검호의 힘이 어지간히 세야지. 검을 안 든다 해도 순수 완력으로 사람 머리 으깨는게 물풍선 터뜨리는 거랑 다를 게 없는데.
"만약 내가 날뛴다 싶으면 니가 바로 뛰어와서 제압해줘. 알았지? 이걸 부탁할게 너밖에 없어."
"응!"
그의 말에 아스카는 쌍검을 꼭 껴안으며 사명감에 불타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검호는 안심하며 격문을 열었다.
격리실로 향하는 곳까지 지나야 하는 문은 많았다. 하나하나 두꺼울뿐만 아니라 노바족들이 예산과 노력을 팍팍 투입하며 마법까지 새긴터라, 몇 개는 저걸 어떻게 부숴야하나 진지하게 토론을 해야할 정도로 굉장한 내구도를 자랑했다.
그런 물건인데 스우의 영혼이 소실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때 격문 제작에 참여했던 몇몇 마법사들은 피토하듯이 비명을 지르거나 머리를 쥐어뜯었다는 말이 들려왔던 거겠지. 그 뒤로 한 번도 안 쓰이고 폐기될 뻔 했다가 데미안이 구금됨으로 제 용도와는 좀 다르지만 어쨌든 쓰이게 됐으니 이번엔 기뻐하고 있으려나.
검호는 마지막 문을 열며 격리실에 들어섰다.
"…… 뭐야. 당신이야?"
마법적 가공을 한 금속으로 벽과 천장, 바닥을 뒤덮은 차가운 그 방 안에 의료기기들이 연결되어 있는 데미안이 덩그라니 있었다.
"그 여자는 어디가고 왜 당신이 온 거지."
"몸 상태는 어떻지."
"알아서 뭐하려고? 조롱이라도 하게?"
데미안의 안색은 척 봐도 안 좋았다. 마족 특유의 푸른 피부색때문에 혈색은 제쳐두더라도 피부가 꽤나 거칠어져 있는데다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그림자처럼 맺혀 있었다. 오기 전에 이데아에게서 데미안을 치료하긴 하되 일정 이상에서 나아지지 않도록 유지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직접 그 모습을 눈으로 보니 기분이 좀 착잡해졌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또 뭘 해주길 바라는데?! 날 인질로 잡아 내 부하들을 연합에 팔아넘기는 걸로 부족했던 거냐고!?"
데미안의 외침이 날카롭게 공기를 찢었다. 저 결정을 끌어내기 위해 이데아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저놈을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짧은 사이에 어지간히 시달렸던게 분명했다.
검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나마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을 느리게 꺼냈다.
"니 처후를 어떻게 할 지 정했다."
"뭐?"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걸 실제로 하기 위해선 너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래서 직접 온 거다."
"뭘 더 알고 자시고 할 게 있는데? 당신이 한 판단이란 건 또 뭐고? 그 여자가 나랑 내 부하들을 연합에 넘기는 걸로 이미 결정했잖아."
"그건 이데아의 결정이지 내 결정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위상 용의 후예들의 수장이라 말이지."
이데아의 명령보다 검호의 명령이 더 우선시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데미안은 삐딱한 자세를 조금 바로잡았다. 실제로는 좀 다르지만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 알아야 한다는 게 뭔데."
"먼저, 왜 이곳을 습격한 거지."
"그건 이미 대답했던 질문이잖아. 보고 안 받았어?"
당연히 오면서 심문 내용 요약본을 받아봤다. 사실 확인을 위해 재차 묻는 거다.
"대답이나 해라."
"귀찮게…… 쳇, 여기 있을거라고 생각한 생명의 초월자를 데려가기 위해서였어."
이런 아지트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 당신이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알았으면 습격하는데 훨씬 더 신중에 신중을 가했을 것이다.
"생명의 초월자를 노린 이유는 뭐, 너의 어머니를 부활시키기 위해서였겠지."
"알면서 왜 물어."
빛의 초월자인 검은 마법사는 제쳐두고, 시간의 초월자인 륀느는 일찍히 힘을 뺏기고 봉인된 상태니까 데미안이 노릴 수 있는 건 생명의 초월자밖에 없었다.
"왜 이곳에 생명의 초월자가 있을거라 생각했고, 또 어떻게 여길 발견한 거냐."
"첫 번째 답은 여기에 생명의 기운이 제일 많이 모여 있어서, 두 번째는 생명의 기운을 잘 감지하는 부하들이 있어서였어."
"부하들?"
"당신도 봤잖아. 사천왕."
순간 떠오른 건 루타비스 4인방이었다. 생각해보니 놈들을 지칭하는 루타비스 4인방이라는 것도 게임을 하던 유저들이나 쓰는 말이니 실제론 다르게 불리는게 당연했다.
"놈들이 생명의 기운을 잘 감지한다는 건 어째서지."
"일일이 설명하는 건 나한테 안 맞는데…… 당신, 마족의 세계 마스테리아가 메이플 월드하고는 다른 차원인 건 알고 있어?"
"들어는 봤다."
마족들의 고향 마스테리아는 본래 메이플 월드, 그란디스처럼 별개의 차원이었다고 오버시어에게서 흘러가듯이 들었었다. 왜 과거형이냐하면,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초월자라는 존재가 각 차원에 셋씩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 대충 말해도 알아먹겠네. 마스테리아의 초월자는 전멸상태야. 그래서 메이플 월드와 합쳐졌고."
초월자는 차원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차원을 유지시키는 기둥. 반대로 말하면 이것들이 사라지면 그 차원은 붕괴하고, 가까운 차원과 합쳐짐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려 든다.
"그래서 꽤 옛날부터 마스테리아의 마족들은 초월자의 힘을 다시 손에 넣으려 했어. 차원의 붕괴 위기니 뭐니 하지만 그냥 자기들이 최강이 되기 위해서였지. 아무튼 그렇게 사라진 초월자의 잔재를 붙들어매고 온갖 짓을 벌이다 실패작들이 쏟아져나왔는데, 사천왕이 그 중 하나야."
그들이 분명 마족임에도 생물체라 보기 힘든 기괴한 외양으로 변한 이유이며, 또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유였다. 실제 초월자만큼은 아니지만 그들의 힘을 재현시키기 위한 의식의 부산물이었기에 초월자의 힘에 상당히 민감할 수 밖에.
"그 초월자의 부산물이라는게 생명의 초월자의 것이었나."
"그렇다고 알고 있어."
운이 무척 나빴다. 하다못다 빛이나 시간이었다면 이렇게 단번에 발각되지 않았을 텐데.
"루디브리엄에서 그 생명의 파도를 봤을 때 바로 이 현상을 일으킨 자가 초월자라는 걸 파악했고, 늦기 전에 파도의 근원지를 유추해내 생명의 기운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을 찾았지. 멍청한 연합 놈들에겐 몰라도 우리한테는 쉬운 일이었어."
당연히 그렇겠지. 초월자의 기운을 누구보다 잘 감지하는 레이더가 4개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검호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다 이어지는 말에 침묵을 유지했다.
"결과는 뭐, 이따위지만."
노바족의 보전을 위해 대신 연합에 팔아넘길 희생양들. 현재 루타비스 내 마족들의 위치였다.
"더 할 말 있어?"
생기가 없다기엔 뜨겁고, 빛난다기엔 음습한 자주색 눈이 검호를 향했다.
그는 가라앉아가는 붉은 눈으로 데미안을 마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 파픈스타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하, 이번엔 그거야? 대답이야 하겠는데 듣고나서 또 저번처럼 날뛰는 건 아니지?"
"그건 니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있다."
시덥지않게 그녀를 비꼬거나 폄하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직접 알게 될 거다. 그래도 검은 들고있지 않으니 한 방만은 어떻게든 잘 버텨봐라. 농담이라면 피식 웃기라도 할텐데 진지하기 짝에 없는 그의 표정에 데미안의 얼굴은 파스스 굳었다.
"기억이라고 해봤자, 이젠 부분적으로 밖에 안 떠올라."
생각해보면 1, 2년도 아니고 무려 8백 년 전이다.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부터 굉장할정도로 까마득한 과거인데, 그 이유가 결코 좋지않은 걸 알기에 비웃을 수도 없었다.
"그 날 무엇때문인지 집에 갑자기 불이 났고, 어머니와 함께 빠져나오려 했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쳐들어와 가로막았어. 그리고 나와 어머니를 구하러 온 형의 동료들을 공격했지."
시작부터 태클 걸 부분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그는 일단 참고 끝까지 듣기로 했다.
직후 벌어진 그들의 싸움은 무지막지했다. 누가 쓴 건지 모를 공격에 집은 순식간에 날아갔고, 숲을 태우던 불길은 그녀의 손짓에 일어난 파도에 집어삼켜졌으며, 뒤이어 일어난 얼음폭풍이 그와 어머니를 가두었다. 프라이쉬츠는 황금의 빛줄기를 쏘아 그녀의 마법을 어떻게든 부수려고 했었다.
"야 잠깐만."
"뭔데."
"계속 듣고 있으니 빡치네. 너 그때 대체 뭘 근거로 그녀를 적이라고 봤던 거냐?"
"갑자기 집이 불에 나서 빠져나가려는데 그걸 가로막으며 마법으로 가둬 끌고가려는 낯선 여자를 어떻게 아군으로 보지?"
"놈들은 언제 나타났었는데."
"그야 그 여자가 나와 어머니를 끌고가려 할 때─."
데미안은 말을 멈췄다. 자신의 말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파픈스타의 목적이 데몬 가족의 사살이라면, 왜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굳이 끌고가려 했던 거지?
"그야 그녀는 처음부터 너희 가족을 노리지 않았으니까."
데몬 가족을 노린 건 파픈스타가 아닌 두 군단장 쪽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불리한 상황임에도 그들과 싸운 것이다.
"잠깐, 뭐야 그거……!"
"하나 더 말하자면 그녀와 놈들의 조우자체도 우연이었다. 정확히는 아카이럼까진 예상했는데 프라이쉬츠는 예상하지 못했지."
만약 놈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았다면 검호는 절대 그녀를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씁쓸함을 머금은 목소리였지만 데미안은 그의 감정보다 그가 한 말이 훨씬 더 걸렸다.
"뱀 영감을 예상했다고? 당신이 그걸 어떻,"
"그녀를 너와 너희 어머니에게 보냈던게 나였다."
검호는 퍼뜩 들고 일어나려는 데미안의 어깨를 잡아눌러 강제로 앉혔다.
"이거 놔!"
"너희 형제의 어머니는 좋은 분이었다. 진심으로, 내가 메이플 월드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손에 꼽을만큼 좋은 사람이었어. 직접 만난 적은 5번도 안 됐고,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 몇 안되는 만남에서 모두 날 정말 다정하게 대해주셔서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인 데몬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파픈스타를 욕한 데미안을 이렇게 살려두고 있다.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구하고자 다짐했던 사람을 끝내 구하지 못했기에, 검호는 한참 늦었지만 그녀의 자식에게 고개숙여 사과했다.
눈앞에 푹 숙여진 그의 머리를 망연히 바라보다 한 발 늦게 그가 한 말들을 이해한 데미안의 표정은 서서히 일그러졌다.
"뭐야…… 뭐냐고 이게─!! 젠장 이딴, 이딴 말을 다 믿으라고?! 당신 말을 어떻게!"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해야하지."
"그럼 그놈들은 뭐야!? 뱀 새끼랑 그 망할 총잡이는 대체 왜 그 여자를 공격하고 우리 어머니를 죽였던 거냐고!!"
가끔 현실은 받아들이기 싫을만큼 잔인하고 말이 안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종종 현실이 판타지를 뛰어넘었다고들 말한다.
사실 이 표현은 사실이 될 수 밖에 없다. 판타지는 자신의 상상범위라는 한계가 있지만, 현실은 자기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일들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아카이럼은 데몬과 끔찍하게 사이가 나쁜 군단장이다. 당시의 너희 형은 검은 마법사의 총애를 받는 오른팔이었고, 아카이럼은 어떻게든 검은 마법사에게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놈은 틈만 나면 데몬을 노렸었고, 그러는 중에 너희 가족이 눈에 들어온 거지."
원래라면 리프레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데미안과 형제들의 어머니를 미리 빼두거나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아카이럼은 데몬에게 공습의 사실자체를 숨겼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을 끝낸 뒤에 그들 가족을 노렸다.
"그럼 그 총잡이는!"
"놈은 아카이럼의 그런 행동을 예상하고 막기 위해 갔던 거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상황이 좀 달랐지."
파픈스타가 데몬의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녀는 군단장의 배신자였지만 보통 배신자는 아니었어. 메이플 월드에서 가장 뛰어난 힐러거든."
"힐러……? 그 여자가?"
"그때 검은 마법사는 나와 싸우며 입은 상처때문에 상태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그 상처를 고치기 위해선 보통의 방법으론 어림도 없었고, 때문에 그녀가 가진 힘이 필요했지."
시간회귀의 힘이.
"그래서 놈은 물론이고 군단장들 전원이 보이기만 하면 그녀를 잡으려 했었지. 놈의 머릿속에서 너희 가족들을 아카이럼에게서 구하는 건 바로 순위에서 밀려났고, 그녀는 놈에게 잡혀가지 않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 그녀에게 가장 쉬운 방법은 도주였다. 텔레포트를 쓸 줄 아는 뛰어난 마법사인 그녀가 작정하고 도주한다면 리프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으나, 파픈스타는 그 쉬운 방법을 마지막의 마지막에야 겨우 썼다.
"너와 너희 어머니를 지켜야 했으니까."
검호가 부탁했기에.
"원래 그녀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 싫어했었다. 군단장의 가족을 지키는 게 누구 좋은 일이라고, 같은 편에게 당한다해도 인과응보아니냐며 동정심따위 가지지 말라 했었지. 그런 그녀에게 나는 꼭 좀 해달라고 고집을 부렸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녀뿐이었고, 난 너희 어머니만은 구하고 싶었었거든."
"하, 하."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바람빠지는 소리가 흘러내렸다.
"너희 어머니는 프라이쉬츠에 의해 죽었다. 그때 놈도 의도적으로 죽인 건 아니었다는데, 그녀에게서 어떻게든 틈을 만들기 위해 너와 어머니를 노리다 정말 맞춰버린 거라더군."
"그 새끼가─!!"
"이후 아카이럼까지 가세해 패색이 짙여졌을 때, 그녀는 천운으로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
어머니를 잃은 데미안이 끝내 폭주함으로.
"니가 폭주하면서 놈들이 당황하는 사이 그녀는 그 틈에 겨우 도망쳤다. 그리고 나는 가까스로 그녀가 죽기 전에 만나 치료시킨 뒤 안전한 곳에 옮겼지. 이게 당시의 전모다."
파픈스타는 끝내 버려두고 올 수 밖에 없었던 데미안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며 한참을 울었었다. 미래의 군단장이지만 그녀가 본 건 영문도 모른채 눈앞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였고, 또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럼 뭐야? 나는 그 새끼랑 그 영감탱이한테……! 왜 나는!!"
"정신줄 놓고 했던 말이지만 다시 말해주지."
그놈들은 자기들이 이용해먹을 수만 있다면 어린애 정신 주무르는 것따위 주저하지 않아.
"이데아가 말해줬다. 너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몇 차례 기억을 뒤졌다고 말이야."
"그 마녀가 진짜……."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억 조작 마법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노바족은 정신 관련 마법에도 능통하다. 정확히는 어쩔 수 없이 능통해졌다. 긴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망가진 정신을 어떻게든 치료하기 위해 정신계 마법이든 약물이든 다 사용해본 결과였다.
'이 군단장은 꽤 옛날에 기억이 조작되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억이 조작되었지?'
'겪은 사건을 이것저것 손봐서 사실관계를 오인하게 만드는 식이더라고요. 흔한 목적이지만 방법이 세련됐습니다.'
'뭐가 세련됐다는 거냐.'
'기억 조작이라는 건 단순히 A를 B로 조작하는 걸로 끝이 아니거든요.'
그녀가 말하길, 기억에 간섭하는 마법은 정확한 사용뿐만 아니라 그걸 유지하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조잡한 기억 조작은 오히려 들키기 쉽습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조작한 걸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거죠. 유지되는 시간이 길 수록 스스로 그걸 진실로 믿어버릴 테니까. 실제 마법은 이미 풀렸지만 그걸 진실이라고 오랫동안 믿어버린 결과 이젠 자신의 기억에 의심조차 못할 걸요. 지금은 조작된 흔적만 남았고, 너무 오래되서 저희도 손볼 수 없습니다.'
'하!'
'이 마법을 쓴 사람은 머리가 꽤 좋은 이일 것 같네요.'
그래. 머리가 좋은 놈이지. 군단장의 책사인데 이런 것도 못 할까.
"못 믿겠다면 생각해봐라. 너는 그때의 기억을 한 번이라도 의심해본 적이 있나? 아무리 전후 상황을 몰랐다 해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낯선 이들이었을 군단장들의 말을 왜 곧이 곧대로 믿었지? 거기다 8백 년이라는 그 긴 시간동안 아무리 원수였다 하더라도 사건의 과정까지 다 기억하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나?"
또박또박 나오는 그의 말들에 데미안의 표정은 더 구겨질 수 없을만큼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난 어머니를 죽인 새끼들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데미안의 몸 위로 짙은 자줏색의 포스가 휘몰아쳤다. 손을 짚고있던 침대의 이불은 포스의 거친 기세에 끄트머리부터 바스라졌고,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의료기기들은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내 말을 다 믿어주는 건가."
"적어도 그 빌어먹을 것들보단 당신이 더 신뢰할만 한 인간이니까."
설령 적이라도 아카이럼과 프라이쉬츠 따위보다 검호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는 거군. 약간 엉뚱한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데미안은 조금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거기다 그때의 기억도…… 약간이나마 떠올랐으니까."
"뭐?"
"당신 드래곤이 날 지켰을 때, 누군가가 겹쳐보였어."
전면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주다 되려 부상을 입은 긴 검은 머리의 누군가. 눈꽃처럼 부서져내리는 방어막의 파편 속에서 오연히 서서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강인한 등을 보여주던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정말 그 여자가 나와 어머니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그런 등같은 건 보여주지 않았겠지."
"…… 그래."
그런 모습은 정말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지킬 때만 나타나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침묵했다.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검호는 데미안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이제 놈들에게 복수할 생각인가."
"당연한 말을 왜 물어?"
"그렇다면 제안 하나 하지."
데미안의 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우리와 협력하지 않겠나."
***
뜬금없는 검호의 제의에 데미안은 미간을 좁혔다.
"뭔 미친 소리야?"
"농담하는 거 아니다. 진지하게 우리와 손을 잡아보자고 제안하는 거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건데."
불과 얼마 전에 노바족의 기지인 루타비스를 습격했고, 그의 이성이 날아갈정도로 분노하게 만든 원인제공자에게 손을 내밀다니, 설마 아직도 미쳐있나?
"니가 보기에 우리가 누구의 편인 걸로 보이나."
"그야……."
블랙윙 제복을 입고 있었던 그의 모습에 당연히 검은 마법사 측이라고 답하려다 말을 멈췄다. 그런데 그는 영웅이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검은 마법사에게 붙었다면 당연히 다른 군단장에게서 소식을 들어봤어야 하는데 그런 소식은 코빼기도 안 들렸고. 하지만 연합측이라 하기엔 이런 곳에 비밀스러운 기지를 만들 이유가 없다.
"대체 뭐야 당신?"
"모르는게 당연하지. 양쪽 다 아니니까."
"하아?"
검호는 바로 답하지 않고 데미안의 옆에 털썩 앉았다.
"잠깐 앉는다. 여긴 의자가 없어서 이거말고는 앉을 게 없거든."
"으, 응. 상관없으니까."
"고맙다."
다리가 아픈 건 아니지만 내리 서서 주절대는 건 불편해서.
"아무튼 연합과 검은 마법사의 편 둘 다 아니라는 건 그 말 그대로다. 우리는 어느 쪽의 편도 아니다."
"그럼 내가 본 건 뭐야? 일전에 당신 블랙윙 제복을 입고 있었잖아."
"그건 위장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숨기기 위해 블랙윙에 잠입한 상태니까."
검호나 노바족이나 너무 눈에 띄여서 어느정도 힘을 되찾을 때까지 몸을 감출 필요도 있었고.
"당신들의 목표라는게 뭔데."
"세계 멸망."
"……."
진지했던 데미안의 얼굴이 바로 나사가 우수수 빠진 기계처럼 망가졌다. 그는 무표정한 검호의 얼굴을 몇 번 보다가 자신이 똑바로 들은게 맞나 한 차례 귀를 후비적거리더니 이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역시 당신 지금도 미쳐있는 거지?"
"아니라고 했다."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친 걸 모른다던데 설마 당신이 이 지경이 될 줄은……."
"그러니까 아니라고."
"이래선 차라리 이전 모습이 더 낫, 윽!"
더 깊어지는 오해를 멈추기 위해 검호는 수도로 가볍게 데미안의 뒷통수를 탁, 쳤다.
"끝까지 들어라. 우리의 목표가 세계 멸망인 건 맞지만 보통 세계 멸망은 아니니까."
"보통 멸망이 아닌 건 또 뭔데?! 뭐 '파괴는 곧 창조다!'면서 다 박살내고 새로 만들기라도 하게?"
"응? 어떻게 알았냐."
"……."
데미안의 표정은 이젠 흡사 19세기 인상파 그림처럼 변했다.
"젠장 미친 거 맞잖아!!"
"진정하고 마저 들어라. 우리가 하려는 건─"
"아 됐어! 멀쩡한 얼굴로 뭔 또라이같은 소리만 해대고, 이래선 당신이 아까 했던 말도 진짠지 의심되잖아!"
검호는 제 손을 쳐내고 거칠게 머리를 헤집는 데미안을 보다 이번엔 주먹을 쥐어 정수리를 빡! 내려쳤다.
"끕……!"
"머리 좀 식혀라."
식히는 걸 넘어 뇌가 마비되는 듯한 통증에 데미안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 머리를 부여잡으며 끙끙대야 했다. 힘을 너무 실었나?
"당, 신…… 진짜, 뭔."
"확실하게 말해두겠는데, 우리가 하고자 하는 세계 멸망은 검은 마법사가 하려는 것과 다르다. 다르니까 그놈과 싸웠고 놈에게 가지 않은 거지."
"결국, 다 망하게 하는 건, 똑같잖아."
"다르다. 그놈의 방식과 내 방식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거든."
난 세계를 멸망시킬지언정 사람을 죽게 하진 않을 거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 세계가 멸망하는데 사람이 안 죽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
"말 된다. 이 세계가 원체 미치광이라서 이런 엉터리같은 말도 말이 돼."
정말 유감스럽게도 말이지. 사실 이딴 게 말이 된다는 시점에서 세계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수 있다.
"이게 왜 말이 되는지는 나중에 이데아한테 물어봐라. 나도 너처럼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하는데에 재주따위 없으니까."
"난 아직 당신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지 않았어. 하물며 그딴 계획에 협력할 것 같아?"
데미안이 아무리 군단장인데다 메이플 월드에 피해를 끼쳤다지만,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부활과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 그리고 혼혈 마족들이 가슴펴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들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 마찬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검은 마법사의 아래에 들어간 건 어디까지나 어머니를 부활시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검호는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미안을 응시했다. 슬슬 당근을 꺼낼 때인가.
"우리와 손을 잡는다면 너에게 두 가지를 줄 수 있다."
"그러니까 안 한다고─"
"하나는 너의 복수를 도와주는 것."
아카이럼과 프라이쉬츠를 처치하는데 도와주겠다.
"하! 당신들 도움따위 필요없어. 복수는 내 힘으로 할 거야."
"무리일텐데. 아카이럼은 몰라도 프라이쉬츠를 상대하긴 힘들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나."
데미안은 팍 인상을 썼지만 아니라고 우기지 못했다. 그의 힘이 무지막지하다는 건 인정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저 성격에 지금까지 비교적 순순히 말을 들었지.
"놈을 죽이기 위해선 최소한 놈보다 강한 전사가 둘 이상 필요하다. 이것도 이론상 그런거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필요하겠지. 너한테 그 정도 되는 전력이 있나?"
"그건……."
"덧붙이지만 이쪽엔 그만한 전사가 셋 정도 있다."
한 명은 당연히 눈앞의 검호일테고 나머지 둘은 대체 누구야?
"뭐, 그 중 하나는 놈보다 강하다기엔 애매하지만 적어도 짐은 안될 수준이니까…… 아무튼 우린 만반의 준비만 갖춰진다면 프라이쉬츠를 처치할 수 있다.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고"
애초에 데미안과의 협력 이전에 기회가 되는대로 어떻게든 반드시 처치해야하는 놈이다. 그게 어려워서 지금까지 제대로 손을 못 썼지만 데미안이 협력한다면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
"…… 다른 하나는 뭔데."
"너희 어머니를 부활시킬 수 있는 이를 알려주겠다."
우지직! 침대 가장자리가 푹 꺼졌다.
"너, 너 그게 사실인 거야!? 저번엔 불가능하다고─!"
"초월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 다른 존재도 불가능하다고는 안 했는데."
돌아버린 상태로 마구 쏟아냈지만 딱히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검호는 데미안의 악력에 침대가 반파되어 졸지에 바닥에 주저앉게 되었지만 그보다 굉장히 당황한 그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당신'에서 '너'로 바뀐 것이 더 신경쓰였다. 이런 것까지 제 형 닮았냐.
"나는 지금까지 검은 마법사에 의해 2번 죽었다."
"2번이나……?"
"그리고 그 두 번 모두 그 존재 덕에 살아났지. 나같은 까다로운 몸도 부활시킬 정도니 부활 능력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없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성격쪽이지.
"니가 여길 찾기위해 추적했던 생명의 파도를 일으키고 또 이곳 루타비스에 가득한 생명의 기운도 그 존재의 것이다."
"잠깐 그러면 그 존재라는게 생명의 초월자─"
"아니다. 생명의 초월자는 8백 년 전에 죽었어."
나 때문에. 뒷말은 생략한 검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이 화법을 쓰게 되다니.
"그 존재는 초월자보다 더 높은 존재다. 일종의 신같은 거지."
메이플 월드의 생명의 신.
"그리고 미리 알려주는 건데, 그 존재는 부활이 가능할 뿐 듣는 부탁을 곧이곧대로 이뤄주는 램프의 요정따위가 '절대' 아니란 거다. 오히려 그런 부탁을 해봤자 매우 높은 확률로 거절할테니 기대는 하지 마라."
"됐어. 아예 불가능한 놈의 말 듣느니 그래도 가능한 쪽에게 매달리는게 나아."
"니가 그걸로 좋다면 상관없다만…… 그에게 매달리는 건 웬만해선 자제해라. 진득하게 달라붙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내가 한 번 그랬다가 죽도록 밟혔어. 진짜로? 진짜로. 옷자락 붙잡고 매달리는 놈일수록 더 싫어해.
"아무튼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거라 보면 되겠나."
"…… 그래."
데미안은 검호의 협력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어서 그는 언제까지 바닥에 앉아있을 거라며 검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협력은 한다 치더라도 당신 부하들이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당장 루타비스를 습격한게 얼마 전이다. 그럴진데 노바족이 마족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당신도 그 계획이라는 것 때문에 나한테 제안했을 뿐이지 속으로는 그런 말들을 했던 나를 썩 좋게 보진 않잖아?"
"그건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흐응? 부하들 불만을 찍어누를 수 있어? 하기사 당신이라면 딱히 어렵진 않겠,"
"그 이유가 아니다. 그보다는─"
니가 나한테 너무 처참하게 밟히는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봐서 증오하기 애매해졌달까. 데미안의 표정이 벙쪘다.
"확실히 니가 한 그 말들은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좀 돌 것 같은 개소리들이었는데, 그런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방금 다 알았고 거기다 난 이미 널 죽기 직전까지 밟았지 않나. 그랬는데 이제 와서 또 검을 들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때 내 손이 너무 과한 감이 있고."
분노해 마땅한 일이었는데 그 분노가 많이 과했다. 한 편으론 사과해야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약간이나마 들 만큼.
"이데아한테 물어보니까 노바족 내 여론도 '괘씸한 놈들이긴 한데 위고 아래고 당신한테 이미 불쌍할정도로 쳐발린 놈들을 또 치기엔 좀'이라고 하더라."
"허어……?"
"아 물론 그렇다고 호의적인 건 절대 아니고,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악감정이 심하지 않다는 것 뿐이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놀랍거든?"
"그러니 니가 저들에게 제대로 사과하기만 한다면 적어도 협력하는 동안 표면적으로 큰 마찰은 없을 거다."
대신 제대로 해라. 안하면 협력이고 뭐고 없다.
"어떤 식으로 사과하면 되는데."
"이걸로 하면 된다."
검호는 오기 전에 미리 챙겼던 물건을 데미안한테 건냈다.
========== 작품 후기 ==========
바리깡이었다.
"…… 뭔데?"
"밀어."
불안감이 엄습했다.
"뭐를?
"니 머리위에 수북한 잡초."
"──?!?!"
데미안은 괴기스러운 환청을 들은 얼굴로 검호를 보았다가 한없이 진지한 그의 표정에 절망했다. 진짜냐!!
"노바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걸로 삭발하며 '정말로 죄송합니다'라고 3번 고개숙여 사과하면 된다."
"그딴 걸 할 것 같냐?!"
"싫으면 연합에 팔려나가든가."
잠시 까먹은 모양인데 지금 니 위치는 '인질'이다. 우린 언제든 너랑 니 부하들을 연합에 넘길 수 있어. 그러기위한 준비도 다 돼있고. 데미안은 뒤늦게 현실을 자각했다. 자신이나 부하들이나 그와 노바족에게 목숨이 저당잡혀 있음을.
"다, 다른 방법은 없어?"
"지금 이것도 엄청 봐준거다만. 솔직히 고작 머리 미는 걸로 그 참사를 저지른 걸 용서해준다는게 얼마나 터무니없이 가벼운 대가인지 너도 잘 알지 않나."
"그렇, 지만 이건!"
"너는 니 부하와 어머니를 살리는 것보다 니놈 머리털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군."
데미안은 다른 의미로 아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갸아아악 머리를 쥐어싸맸다. 왜 하필 이런 식인 건데! 그러다 얕은 콧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알았어! 까짓 거 하면 되잖아 하면!!"
"호오?"
"대신 나중에 가발이나 발모제는 좀 줘! 그거마저 안된다고 하지 마!"
처절한 결정을 내리는 그의 모습에 검호는 푸흡,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비웃지 말라고!"
"프, 하하, 아하하……!"
"좀 그만해! 난 진지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더 웃긴, 프흐, 설마 진짜 하겠다고 할 줄은, 하하!"
"작작 웃으라고오!"
다른 사람이라면 검호가 웃는 모습이라는 것 자체에 턱이 떨어질정도로 경악했겠지만 데미안은 마냥 빡칠 뿐이었다. 몇 분을 그렇게 낄낄거린 그는 많이 진정됐지만 입가의 웃음을 다 지우지 못하고 계속 피식거리다 말했다.
"농담이었다만?"
"…… 어?"
"진짜로 그걸 믿다니, 아니 상식적으로 좀 이상하다는, 풉, 생각정도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한 박자 늦게 말을 이해하며 멍청하게 풀려있던 데미안의 얼굴은 푸른 피부가 무색하게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농담을 하는구나. 그래도 한 번쯤은 의심할 줄 알았는데 엄청 진지하게 고뇌하는 모습이 아주 그냥……."
"재밌었냐."
"몇 년만에 이렇게 웃어봤는지 모르겠다."
"그럼 싸우자 인간아!"
자리를 박차며 달려드는 데미안의 모습에 검호는 잠깐 당황했다가 - 달려드는 건 예상했는데 저 몸상태로 저래도 되나 싶어서 - 그 자신의 몸에 덕지덕지 붙은 의료기기들 때문에 거의 다가오지 못하는 모습에 기뻐해야할지 안타까워 해야할지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일단 진정해라."
"젠장! 날 놀려먹으니까 재밌냐?!"
"솔직하게 말하면 그랬다."
"왜 또 순순히 인정하는 건데!?"
"그렇게 웃었는데 아니라고 말해봤자 설득력 없으니까."
거기다 아주 거짓말도 아니었고.
"어? 뭐?"
"여기 오기 전에 이데아와 니가 어떻게 사과하면 용서할 건지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장난삼아 셀프 삭발하면서 '나는 빡빡입니다'라고 20번 외친 뒤 죄송했다고 빌면 봐줄거냐 물어보니 그녀는 '그것도 나쁘진 않다'고 했거든. 꽤 진지하게 고려하는 눈치였다."
"……."
"근데 역시 그건 아니다 싶었는지 다른 걸로 바꿨지."
"뭐, 뭘로 바꿨는데."
"노바족들이랑 니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이데아한테 맞기."
데미안은 잠시 천장을 보았다. 삭발보다는 나은…… 거지? 그래도 그 여자 마법사인데다 책사니까 완력은 별로일테니까.
"니가 저지른 일로 보면 정예 전사들만 뽑아다 집단린치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앞으로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없어서 그냥 이데아 혼자서 2~3대로 끝낸다더라. 너한테 이상한 문신 새겨져서 고문당한게 어지간히 빡쳤던 모양이야."
"아 그래, 그래. 어쨌든 삭발보다는 낫네."
부하들의 사기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건 본인이 수습할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안 된다.
"나중에 우리와 협력하는 걸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해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꽤 자신만만하구나."
"어차피 우린 지금도 놈들 무시하고 다니고 놈들도 우리한테서 거의 손 놨으니까."
야.
"반항적이고 같은 진영에게도 적대심 품는거야 평소에도 하는 거니까 달라져도 눈치 못 챌 거야."
"그런 걸 뭐 자랑스럽게…… 이러니까 검은 마법사도 너와 니 군단을 욕하지."
"필요한 게 있어서 들어갔을 뿐이고 그놈들도 하나같이 성격 개판인데 충성이니 의리니 하는 게 있을 리 없잖아. 그보다 검은 마법사가 나랑 내 부하들을 욕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생각해보니 저 인간 정신줄 놓았을때 검은 마법사에게 직접 초월자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고 들었었다 했는데, 분명 둘이 적일텐데 뭔 얘기같은 걸 할 틈이 있을 수 있나? 눈앞의 남자와 그 자가 사이좋게 대화하는 광경따위 상상이 안 되는데. 검호는 기묘한 눈으로 저를 보는 데미안에게 대답해주었다.
"일전에 그가 봉인에서 풀려난지 얼마 안되 나를 불렀고, 외딴 곳에서 잠시 만났었다. 그때 싸우기 전에 잠시 얘기를 했었는데, 너에 대해 불만을 굉장히 쏟아냈었지."
"뭘 어떻게 말했길래?"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검은 마법사가 남 뒷담을 깠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아. 솔직히 초월자씩이나 되는데 그런 인간적인 구석이 있을리가─
"'그 잡초대가리를 버리고 데몬을 다시 영입하고 싶다'던가, '마스테리아에서 자기 광신도나 팬클럽을 끌고 왔다'고 했었지. 표현이 정말 인상적이었어. 아 그리고 '말 안듣는 늑대무리들'이라고도 비유했었고 '다 쳐내면 남는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거'라고도 했지. 너 대체 얼마나 멋대로 행동한 거냐?"
존나 인간적인 양반이네. 본능 한 켠에 남아있던 초월자로서의 신비감과 공포감이 단숨에 날아갔다. 그야말로 신랄하기 짝에 없는 평가들에 데미안은 어깨를 들썩이며 반쯤 실성한듯한 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하. 어차피 충성심따위 없었지만 이제부터 무슨 수를 써서든 엿먹여줄 의지가 마구 샘솟았다. 군단장의 유구한 전통을 반드시 실천할 것을 다짐한 데미안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검호를 보았다.
"그자와 그런 얘기도 하고, 당신 그자랑 친했던 거야?"
"뭔 소리냐?!"
경기라도 들린듯한 검호의 반응에 데미안의 잡초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니 그런 얘기까지 할 정도면 아무 관계가 아닐 리 없잖아. 보통 적이라면 싸우기 전에 수다따위 떨지 않아. 무답무용으로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지."
"그냥 알아낼 게 있어서 이리저리 찔러보다 그렇게 된 거다."
"그런 것 치고는 그자가 한 말들이 뭐랄까…… 술집에서 아는 친구 만나 신세한탄 한 듯한 뉘앙스인데."
"틀려."
술집이 아니라 단풍나무 아래였다고 답하려다 관뒀다. 오해가 부추겨질 것이다.
"거기다 당신도 두 번이나 죽임당했다면서 의외로 적대심같은 건 보이지 않고. 진짜 뭔 관계야?"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무슨 수를 써서든 죽일 상대일 뿐이지."
그것말고는 그 어느것도 되지 못한 관계. 어떻게 보이든 검호와 검은 마법사의 관계는 그뿐이었다.
"괜한 소리는 이제 그만해라. 니 처후도 잘 결정되었다고 이데아한테 알려줘야해서 슬슬 나갈거니까."
"가는 김에 그 마녀한테 내 부하들 치료 좀 빨리 해달라고 전해줘. 이제부터 협력하는 거니까 해줄 수 있지?"
"해줄 수 있다만, 니 몸에 대한 건 좀 늦어질거다."
"까짓거 내몸은 당장 나아지진 않아도 더 악화되지도 않으니까 상관없어."
부하들을 참 많이도 아끼네. 하긴 그러니까 검은 마법사도 광신도나 팬클럽에 비유할만큼 충성을 받는 거겠지. 검호는 손을 뻗어 데미안은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부하 걱정도 좋지만 니 몸도 걱정해라. 힘은 몰라도 신체적으로는 허약하잖아."
검호로서는 데미안이 사실 허약체질이었는데다 폭주로 포스를 각성해 힘을 쓸 때마다 몸이 축나는 걸 다 알고 한 말이었지만, 그게 데미안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약자 취급 받는 걸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하니까 신경 꺼. 언제부터 친했다고 꼰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꼰…… 뭐?"
"난 당신 걱정 받을만큼 어리지도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검호는 다른 부분에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꼰대라니, 꼰대라니!
"대체 누구더러 꼰대라는 거냐!!"
"당신말고 더 있어? 강해서 육체적으론 젊어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나이 먹었─"
"난 아직 30살도 안 됐다고오오오!!"
"엑?!"
잠깐 그게 뭐야!
"내가 당신 처음 만났을때도 당신은 검호였잖아! 못해도 30대에 근접했을!"
"그때 내 나이는 20도 안 됐었다!"
"야 그게 말이 돼!? 어떻게 그 나이에 검호가 돼!"
"나한테 그 호칭 붙인 건 검은 마법사 그놈이니까 그놈한테 따져 임마!"
"그건 또 뭔 소리야?!"
연이은 나이와 호칭 충격에 데미안은 경악했지만 검호로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아니 거기다.
"심지어 니놈은 나보다 더 나이 많잖아! 두 세배도 아니고 무려 8백 살이나 먹은 놈이 대체 누구한테 꼰대라는 거야!!"
"으, 그건……!"
사실 이쪽이 훨씬 연장자인데 내가 대체 왜 꼰대소릴 들어야 해. 검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이 막힌듯한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아 그래 이참에 나도 호칭을 똑바로 불러야겠네. 데미안 '할아버지'."
"@#$%^%[email protected]!"
"내가 틀린 말 했냐? 8백이면 어지간한 왕국 역사보다 더 나이가 많잖아?"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