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호side.
데미안과의 협력을 약속한 이후 내가 한 일은 일차적인 약속 이행을 위해 데미안을 생명의 오버시어를 대면하게 해줬다.
솔직히, 오버시어는 죽은 자의 부활이 가능해도 그걸 막 해주는 존재가 절대 아니라서 불안했다. 그중에서 생명의 오버시어는 상대적으로 말이 좀 통하는 편이지만 동시에 나름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부활을 해주지 않는 이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데미안의 부탁을 절대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네 어머니 부활? 되는데."
"어째서?!"
왜 그리 쉽게 고개 끄덕이는 거야! 당신 그런 사람, 아니 그런 오버시어 아니잖아! 옆에서 데미안이 뭔 소리냐며 째려보는게 느껴졌지만 신경쓸 수 없었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절했다고 순순히 해주겠다는 거야!"
"불만있냐. 해주지 말까."
"이 사람 헛소리는 무시해. 아무튼 어머니를 부활시켜준다는 그 말, 확실한 거지?"
"내가 니놈들에게 이런 거짓말 할 이유따위 없어."
심드렁하게 대꾸한 아이는 데미안이 아닌 나를 보았다. 뭘 물어볼지 다 꿰뚫어본 눈이었다.
"내가 죽은 것을 부활 시켜주지 않는 건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다. 반대로 그 이유들에 해당되지 않으면 부활시켜줄 수 있어."
"그 분은 그 이유라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공교롭게도."
아이는 무슨 심경인지 평소와는 달리 풀어헤쳐 늘어뜨려놓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 빗어내렸다. 푸른 물결 속을 헤엄쳐나온 흰 손이 무언가를 잡고 있는 양 움켜쥐어져 있었다.
"이게 나한테 있어서 말이야."
그대로 아이가 손을 펼치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창백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반투명한 인영. 에델슈타인 기지에서 봤던 스우와 같은 유령 - 영혼의 특징이라 놀랄 것도 없었지만 나는 턱이 빠져라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야, 야, 야 너, 그……!"
"엄마─!?"
얼마나 당황했으면 데미안은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고 불러버렸다. 근데 아니 진짜 왜 저 분 영혼이 쟤 손에 있는 거야?!
"예전에 그 여자한테 받아서 갖고 있던 거다. 무슨 부탁도 같이 하긴 했는데 들어주기 귀찮아서 그냥 갖고만 있었지."
"그 여자가 누구야! 아니, 엄마, 엄마! 괜찮으세요? 예?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못 해. 이거 내가 붙잡아놓기 위해 동결시켜둔 상태거든."
"누, 누가 너한테 이 분의 영혼을 준 거야?"
"너희도 이미 알지않나. 이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텐데."
뭔 소린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답은 쉬웠다. 저 분의 영혼을 가져다 생명의 오버시어에게 건내줄만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한 명 밖에 없으니까.
"…… 파픈스타?"
"귀찮게. 왜 그 여자는 매번 올 때마다 나한테 사람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건지."
내가 무슨 부활 포인트도 아니고. 인상을 쓰는 아이의 짜증스러운 중얼거림이 유독 선명하게 울렸다.
"참고로 이거 동결 풀면 흐름에 따라 환생의 궤에 오르니까 풀어달라 하지마라."
"윽."
"대체 언제, 어떻게 그녀가 이분의 영혼을 갖다준 거지?"
"그놈이 봉인된 직후 거기로 넘어가기 전에."
제발 대명사말고 보통명사 좀 써줬으면. 어떻게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조차 말이 안 통하는 건지. 맥락으로 보아 봉인된 놈은 검은 마법사, 넘어갔다는 건 메이플 월드에서 그란디스로 차원을 건너갔던 걸 말하는 것 같다. 즉 ,파픈스타는 모종의 방법으로 저 분의 영혼을 챙겼고, 검은 마법사가 봉인된 직후 그란디스로 넘어가기 전에 생명의 오버시어에게 넘겼다는 말이다.
"구구절절 더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때 그 여자가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지."
그러고는 반쯤 드러눕고 있던 몸을 세워 자세를 바로 한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 분을 꼭 살려줘〉."
그녀의 목소리였다.
"〈부탁이야. 내 실수로 죽은 사람이야〉."
비록 아이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었지만, 꿈에서라도 다시 듣고 싶었던 생생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내가 예전에 한 말 뭘로 들었냐?!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건─〉"
"〈아직 환생 안 했어. 그러니까 부탁해〉."
언뜻 조곤조곤 부탁하는 것 같지만 거의 밀어붙이다시피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게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때 나는 봉인중이던 검은 마법사의 반격에 당해 만신창이가 되버렸고, 이제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믿었던 그녀는 홀로 남겨져 그란디스에 가야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앞서 어찌어찌 구해낸 데몬 어머니의 영혼을 잊지않고 생명의 오버시어에게 맡기고 간 것이다.
"그녀는 니놈의 일로 이 세계의 환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았지. 동시에 이 세계에서 제대로 된 부활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누군지도 잘 알았고.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 이 영혼을 떠넘긴 건 당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말을 끝맺고 다시 몸을 반쯤 누이는 아이를 보며 나와 데미안은 잠시 침묵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도움을 주고 간 그녀에 대한 고마움과 또다른 울렁이는 감정때문에 입을 떼지 못했다.
"…… 야 있잖아, 하나만 물어보자."
"뭐냐."
"그 파픈스타라는 여자, 어떻게하면 다시 볼 수 있어?"
"내가 그녀를 만나려면 우리가 하는 일을 무사히 끝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 뒤에야 겨우…… 가능하다. 그녀는 먼저 가버렸으니까."
"그래…… 그럼 난 만날 수 없겠네."
무엇을 생각하는지 데미안은 반쯤 감긴 외눈으로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그분의 영혼과 아이, 나를 쭉 보더니 한 차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양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당신이 그 여자를 다시 만난다면, 나 대신 말 좀 전해줘."
어머니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그 말에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표정이 무너질뻔 했다. 나는 무어라 올라오는 말을 참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내 대답에 어깨에서 손을 뗀 데미안은 다시 아이와 그 분의 영혼을 보다 물었다.
"그런데 당신, 들어보니까 그 여자한테 우리 어머니 부활을 부탁받았으면서 왜 그건 안 해준 거야? 조건에 해당 안 된다며?"
"해당 안 되지만 딱히 해주고 싶지도 않아서."
"야 임마─!"
"참아! 참아 데미안!"
저 애는 부탁한다 해서 막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이 아니야! 도라에몽은 더더욱 아니고! 지금처럼 본인 힘이 충분하고 거절의 기준에 해당되지 않아도 본인이 안 꼴리면 다 거부하는 신이라고! 그러나 이마에 핏대가 올라온 데미안따위 보이지 않다는 듯 아이는 말을 내뱉었다.
"부활 이전에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나 감사하지 그래. 나 아니었으면 옛저녁에 다른 존재로 환생해서 부활이고 나발이고 할 기회따위 없어졌을테니까."
"이이……!"
"그리고 부활을 해주는데 영혼만으론 부족하다."
"뭐가 부족하다는 거지?"
나는 아이에게 달려들려는 데미안을 붙들며 물었다.
"뭐긴 뭐겠어. 이 여자의 육체지."
"육체? 몸 말인가?"
"몸까지 만들어달라 하지 마라. 그때 널 수리해준 건 니 몸이 특제품이라 그랬던 것 뿐이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저 분 돌아가신지 8백 년이나 됐잖아. 그 시간이면 백골이 진토되고도 남는다. 겔리메르한테 특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려는 찰나, 데미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겨우 그런 거였냐는 투로 말했다.
"어머니의 몸이라면야 간단하지. 지금까지 잘 보존해왔으니까."
야 잠깐 어떻게? 데미안은 뭘 그리 놀라냐는 얼굴로 답해주었다.
"뱀 영감이랑 총잡이 놈이 어머니의 시신을 보존하고 있어. 그때 지들이 날 구해줬다며 덤으로 특별히 해준다고 했었거든."
"그 새끼들이 뭔 바람이 불었다고…… 아 협박용이겠네."
"그래애─ 처음엔 자기들이 잘 지켜주겠다더니 군단장이 되고나선 날 휘두르는데 열심히 써먹고 있지. 쳐죽일 것들."
이를 득득 가는 모양새가 당장 눈앞에 놈들이 있었으면 아주 씹어먹을 기세였다. 아, 더러워서 먹진 않겠네. 꼭꼭 씹은 뒤 뱉을 거야.
"확실하게 보존되고 있는 거 맞나? 눈속임같은 건 아니겠지?"
"나도 혹시나싶어서 다 확인해봤어. 환영따위가 아니라 진짜 어머니의 시신 맞아."
"아카이럼이냐."
"그래."
썩어도 시간의 대신관이라고, 최소한 시간의 힘을 다루는 센스에 있어서 트립퍼인 우리보다 뛰어난 그 영감이라면 시신을 8백년 동안 조금도 썩지않고 유지시키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건 뱀영감의 손에서 어떻게 그 분의 시신을 빼앗아 여기까지 가져오느냐 겠지. 데미안을 마음껏 부릴 수 있을 유일한 수단일텐데 허투루로 보관할 리 없으니.
그 방법을 골몰히 생각하는 걸로 보이던 데미안의 얼굴이 뭘 떠올렸는지 살짝 변했다.
"…… 아 잠깐만. 내가 이대로 시간의 신전 가서 뱀영감 털고 어머니 시신 가져오면 바로 부활 가능한 거지?"
"그래."
"그럼 당신들이랑 협력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이놈이?!
"내가, 말, 했잖아. 저 분이 부활해서 지금 니 꼬라지 보면 참 잘~도 웃으시겠다 그치이~?"
"야 표정, 표정!"
"적어도 우리 도와 군단장들 정리하고 다크 히어로 이미지라도 좀 만들어라. 니네 형 처럼. 그래야 나중에 뭐라 고개라도 들 수 있을 거 아니야!"
"알았으니까 얼굴 좀 치워!"
확답을 받은 뒤에야 나는 데미안에게서 떨어졌다. 아, 이래서 뭔가 계약을 체결하면 바로바로 문서화를 해야하는 거구나. 이데아 불러서 빨리 협력 계약서 작성하라 해야지.
나는 툴툴거리는 데미안을 먼저 보내고 아이가 그 분의 영혼을 갈무리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뭐냐."
"아, 저기─"
"싫다."
아직 말도 안 했어! 그러거나 말거나 독심술을 패시브로 장착하고 있는 아이는 내 생각을 읽고 콧웃음을 쳤다.
"난 성대모사꾼이 아니다."
"그래도 한 번만 다시 해주면,"
"안 돼."
그녀의 목소리 한 번 다시 듣는게 왜 이렇게 힘들까. 실제로 말하는 이는 저 아이였고, 내용도 몇 마디 안 되지만 그래도. 아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발을 까딱였다.
"그 여자가 니가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버린게 차라리 다행으로 보이는군."
"…… 왜."
"만약 기다리거나 노력해서 닿을 수 있는 곳에 갔다면 넌 일따위 내팽개치고 거기에 매달렸을 테니까."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이참에 다시 말해주는데, 내가 널 부활시켜준 건 너도 그 조건들에 해당사항이 없는 외부인이였기 때문이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고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알고 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고, 그래서 미련을 간신히 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한테 매달리지 말고 노력이나 더 해."
"그래…… 그래야지."
결국 원하는 걸 이루려면 뭐 빠지도록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나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부활시켜주는 것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아이에게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다음 장소로 갔다.
***
데미안과의 대화가 잘 되었으니 이제 다음 일도 잘 풀릴거다─는 생각은 경기도 오산시였고, 데미안의 다음 대화상대는 이데아였다. 그래, 이데아가 데미안이랑 대면한다고.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데 실물은 더했다.
"의외로 쌩쌩하군요."
"'누구들' 덕분에 말이지."
첫마디부터 살벌하다. 데미안의 말에 이데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지만 올라간 입꼬리가 시리도록 날카로웠다.
"하긴, 그 '누구들'은 몹시 유능하죠. 정말 자랑스럽다니까요."
"손속이 어찌나 거침없던지, 분명 날 고치려 하는 걸 아는데도 부러뜨릴 뻔 했다니까."
"호오…… 반쯤 고기반죽이 되었었으면서 사람 손을 부러뜨릴 힘이 남아있었습니까? 신기해라."
어째 둘 사이에 스파크를 넘어 번개가 치는 것 같은데. 평소에도 이데아가 전기를 뿜어대서 저게 진짠지 가짠지 헷갈려.
저들이 대면하는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근데 그때도 절대 좋은 분위기가 아니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지. 이전까지 데미안과 이데아의 만남은 침략자와 피해자, 인질과 그 인질을 잡은 협박범의 입장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두 입장의 낙차가 장난 아니거든.
비유하자면 서로가 서로의 명치를 존나 쎄게 한 번씩 갈겨봐서 누가 더 아프고 잘못했다는 걸 가리기 힘들다고.
"혹시 모르니 재차 말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저희는 저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신들과 잠시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당신들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하지만 바로 앞서 사건으로 인해 생긴 앙금이 협력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판단되며, 때문에 본격적인 협력에 앞서 그것을 해소할 필요가 있어 이 자리를 만든 겁니다."
"협력의 필요하단 건 인정하는데 그 전에 한 대라도 패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다는 말을 그렇게 빙빙 돌려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군."
데미안의 빈정거림에도 이데아의 서리 낀 웃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본래 이 앙금을 완전히 털어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상황과 시간이 여의치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간략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혀가 길어. 니년 얼굴 계속 보기도 싫으니까 빨리 하고 끝내."
훗, 그녀의 입가에 파인 골이 한층 더 깊어졌다. 뭐야 저거 무서워. 화약 짊어지고 불판 위에서 탭댄스 추는 놈 보는 것 같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희는 상황도 시간도 좋지 않습니다. 고로 질질 끄는 것 없이 딱 두 대로 끝낼 겁니다."
"말이나 질질 끌지마."
"그리고 저 역시 처리해야할 서류가 많으므로, 손에 무리가 가면 안되기에 주먹을 쓰지 않고 손바닥만 쓸 겁니다."
"뭐?"
잠깐 저런 말은 못 들었는데. 손바닥만 쓴다는 말인 즉 싸대기를 날린다는 거잖아? 계속 심드렁한 얼굴이던 데미안도 저 말엔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진짜 뭔 생각이지. 이데아가 쟤 좋으라고 손바닥으로 살살 칠 리가 없고, 굴욕감을 주기 위해선가?
"그러니 얼굴 대십시오."
"…… 이런 얕은 수따윌 쓰다니, 보기보다 형편없군."
"시간 끌지말고 빨리요."
"이렇게 한다고 나나 내 부하들의 기를 죽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혹시 겁먹은 건 아니죠?"
"뭐야?"
노골적으로 심기를 건드리는 도발에 데미안은 확 인상을 썼다. 쟤는 나이를 산처럼 먹었는데도 저 부분만은 어째 변하질 않냐. 아니, 더 심해졌나.
"아니면 빨리 대라고요. 시간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드는 겁니까."
"하……! 좋아. 하지만 이걸로 앞으로 있을 협력에 마찰이 생기지 않을거라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그런 팔자좋은 망상따윌 하기엔 제 뇌는 너무 고성능입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가 당신들에게 보일 표면적인 마찰을 줄이기위한 방책일 뿐이란 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마족들이 노바족에게 내비칠 적개심을 줄이는 건 데미안의 일이다. 그리고 데미안이라면 싫은 감정이 있어도 자신의 목표 - 어머니의 부활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참아주겠지. 군단장과 검은 마법사에게 했던 것처럼.
"거기다 저희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아주 나쁘기만한 일이 아니죠. 약간의 불쾌감만 감수하면 저희가 당신들에게 향할 적의가 다소나마 줄어드는 효과를 얻는 것이니."
"알고 있으니까 지금 여기 서있는 거잖아."
"그건 다행이네요. 아무튼 이제 얼굴 대시죠."
"빨리 끝내기나 해. 너 말하는 것처럼 짜증나게 늘리지 말고."
"걱정 마시길."
이데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느리게 손을 들었다. 늘 서류와 펜만 잡고사는 이 답게 그녀의 손은 정말 새하얘 마치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이…… 잠깐 진짜 빛나고 있어?!
"딱 두 방으로 끝날 겁니다."
예리한 전류의 실이 휘감긴 손을 들어올린 그녀는 한쪽 발을 뻗어 진각을 구르듯 세게 내디디며 크게 팔을 휘둘렀다. 그 무지막지한 기세에 멈추라고 외칠 뻔 했지만, 입이 다 열리기도 전에 그 강렬한 일격이 데미안을 후려갈겼다.
짜아아아악─!!
"…… 웁쓰."
"오우, 어째 보는 내가 다 아프냐."
세피로트의 말대로 나뿐만 아니라 저걸 본 사람들 대부분이 하얗게 질리며 반사적으로 데미안이 싸대기를 맞은 쪽 뺨을 감쌌다. 저 데미안의 목이 좀 돌아가는 걸 넘어 몸을 휘청이게 만들다니 뭐여 저거. 이데아가 저렇게 힘이 쎘나. 그 와중에 데미안이 쓰러지지않게 재빨리 멱살을 잡은 건…… 어, 음, 절대로 배려가 아니다.
"빨리 정신 차리십시오."
"너, 너 이……!"
"군단장씩이나 했으면서 겨우 이거 가지고 넋이 나갑니까."
"마법사면서, 무슨 힘이."
"아직 한 방 더 남아있는 걸요."
"뭐?"
이데아는 아까 싸대기를 날린 쪽의 반대쪽 손을 들었다. 좀 전의 손보다 더 빽빽하게 새하얀 전류가 휘감겨 있었다. 그 눈부신 빛과는 반대로 그걸 본 데미안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푸르죽죽하게 죽어갔다.
그녀가 단 두 대만, 주먹도 아닌 손바닥으로만 때리겠다고 한 건 모욕을 주기 위해서니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느니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제 화를 풀 수 있을만큼의 공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데미안. 차마 두 번째 싸대기가 작렬하는 걸 볼 수 없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
"모두 모였으니 이제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해 브리핑을 하겠습니다."
앞서 있었던 충격적인 일들이 거짓말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데아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저렇게 무덤덤할 얼굴일 수 있지. 저게 정상이 아닌 증거란 걸 알았지만 그래도 정말 질릴정도로 변함없는 무표정이다.
"마족들과 협력을 하기로 했기때문에 기존의 계획은 폐기되었고, 대신 새로 세운 다른 계획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위에 몰려온 연합에 대한 대책을 말하는 거야?"
"그것도 있고, 향후 해야할 일들의 순서와 방법을 많이 바꿨거든요."
누구 씨 덕에. 이데아의 시선을 따라온 눈빛들이 내게 꽂혔다.
"그녀 말대로, 나는 이제까지 해온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왜지? 이 상황에서 그래야할 필요가 있나?"
"있다. 지금이나마 바꿀 수 있을 때 바꿔야 해."
늦었다 하더라도 기회가 있을 때 바꿔야지 정말로 늦은 뒤엔 바꾸려 해도 못할테니까. 이데아를 제외하면 의아한 얼굴인 그들의 면면을 한 차례 흝어보고 나는 이미 인정했음에도 다시 끄집어내기 괴로운 말을 꺼냈다.
"대부분 이미 들었겠지만…… 나는 내가 해온 일이 틀렸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그 모습을 마주보기 힘들었지만 피하지 말아야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게 틀렸다. 거기서 비롯된 선택들도 잘못된 거였고, 그로인해 굳이 할 필요도 없었던 고생과 피해를 일으켰지. 그리고 난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서…… 지금이라도 계획을 바꾸려는 거다."
왜 이제서야. 몇몇은 그런 눈으로 날 보았다.
"나는 내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애꿎은 사람들이 휩쓸려 죽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 한 사람의 목적때문에 다른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는 건 잘못됐다고……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그게 이전까지 했던 일이었지."
목적과 상태를 들키기 않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블랙윙에 들어와 차근차근 조직을 장악하며 봉인석을 모아 빼돌릴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군단장들의 정보를 모아 사전에 대비하거나 그들의 계획에 훼방을 놓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구하면서 목적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피해를 완벽하게 막을 순 없지만, 어쨌든 죽지는 않고 다치는 걸로 끝나니까 다행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틀렸다.
"멍청하게…… 얼마나 피해를 입히든 살릴 수만은 있다고, 결과만은 좋다는 이유로 그래서는 안됐는데."
과정이 어쨌든 결과는 좋으니 상관없다? 그게 맞으면 인과관계라는 단어가 왜 생겼겠는가. 오버시어가 아닌바에야 사람이 하는 일은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 내가 한 선택들과 과정의 옳고 그름은 그 상황 당시의 운을 재쳐두고라도 한숨밖에 안 나오는 지금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얼음주머니로 뺨을 문지르고 있던 데미안이 손을 멈췄다.
"내가 들은 게 맞다면 당신의 목표는 이 세계를 구하는 거잖아.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애초에 검은 마법사의 군단을 완벽하게 막아내면서 사람들을 구해낸다는 것부터 허무맹랑한 잠꼬대인데 왜 그런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그럴바엔 더 효율적으로 빨리 일을 끝낼 방법을 찾는 게 맞지 않나. 비정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만약 내가 군단장들이 일으키는 사건을 막을 생각 없이,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든말든 내 할 일만 했다면 일은 옛저녁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아예 손을 놓아버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열을 구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아홉이나마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버려서는 안된다. 데미안의 말대로 완벽한 성공따윈 꿈에서나 나오는 이상이지만, 도달하는게 무리라도 추구하는 것까지 포기해야 할까.
이번 경우엔 그걸 무리해서 이루려다 왜곡해서 이 지경이 되었지만.
"…… 오지랖이 아주 그냥 구 만 리네. 그렇게 여유있는 상황도 아닐텐데."
"그 오지랖 덕에 산 놈이 뭐래?"
아스카가 쏘아붙이자 데미안은 팍 인상을 썼다. 신경전을 벌일 낌새라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상황이 변해도 최악보다 조금 나은 차악만 반복해버렸지."
상처가 너무 아파서, 거기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변하지 않았다.
"내가 그때 그런 방법을 떠올리고, 선택들을 한 건 원하는 걸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었다는 이유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는 게 있었다."
힘은 형편없이 약해졌고, 노바족과 손을 잡았지만 당시 그들은 패잔병과 난민 집합이었을 뿐이다. 그런 상태였는데 어떻게 군단장과 검은 마법사를 상대하고 오버시어를 안전하게 부활시킬 수 있겠는가.
"근데 지금은 아니지."
상황은 변했다. 내 힘은 꾸준히 회복되었고, 노바족도 서서히 나아졌으며 이후 군단장들의 발호를 어느정도 막아내기도 했다.
"바뀌면 바뀌는대로 진로를 수정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어."
서로가 서로에게 묵혀져 있는 감정, 품고있는 아픔, 돌려지지 않은 시야. 기회는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인 가운데 유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니가 틀렸고, 또 이제와서 바꾼다는 말은…… 지금까지 해온 일은 무의미한 짓이었단 뜻인가."
"그건 아니다."
틀린 방법이었지만, 그런 방법이라서 얻은 것도 분명히 있었기에 마냥 무의미했다고 취급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난 직후 난민이나 다름없었던 노바족들이 이 정도로 세력을 회복해 메이플 월드 전역에 정보망을 깔고, 전방위적으로 군단장의 발호를 어느정도 막아내며 결정적으로 봉인석의 대부분을 손에 넣는데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 방법이었기에 가능했다.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무의미하지 않았어. 어쨌든 세계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으니까. 계속 계획을 진행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거지."
절대 다수를 구한다는 명목아래 소수에게 가는 피해를 묵인하거나 유도해내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일으켰다. 그 모든 것이 잘못이었다.
"내 말에, 선택에 따라준 이들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겐 핑계로밖에 안 들리겠지. 이제와서 바꾸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도 할 테고."
그럼에도 바꾸겠다고 한 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그걸 계속 반복하는 게 또다른 잘못이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다고 욕할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 잘못들을 저질렀으면서, 이제와서 바로 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냐고 비아냥거리는 이도 있겠지. 그 말들에 나는 답해야 했다.
"잘못을 알고, 그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늦었더라도 잘못을 고치려는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말을 다 들은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이었다. 세피로트는 가늘게 뜬 - 마치 심사하는 듯한 눈으로 날 지긋이 보았고, 유에는 복잡하게 얽인 시선으로 나를 보다 턱을 짚고 살짝 고개를 숙였으며, 키네시스는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턱을 괴었다. 이데아와 데미안은 언뜻 담담해보였지만 머릿속으론 여러 생각들이 오갈 거다. 마지막으로 사이는─ 어째선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한시라도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몰랐다. 그러다 결국 저들까지 같이 떨어져버렸다. 여전히 다소 거리가 있고, 동료라 칭하기 애매하지만 그럼에도 한참 부족한 나를 따라와주고 도와준 이들을.
간신히 말을 다 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저들은 어떻게 할까. 비난을 할까, 욕을 할까 아니면 무답무용으로 힘을 쓸까. 어떤 것이든 묵묵히 받아낼 각오가 되어있지만 저들이 그런다면 꽤나 속이 쓰릴 것 같다.
그러나 기다리던 비난은 날아오지 않았다.
"…… 검호 너만 사과할 일이 아니다."
"따지고보면 우리도 형씨와 공범이니까."
돌아온 것은 어째서인지 씁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들이었다.
"지금의 방식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야 형씨는 뒤에서 명령을 주로 했지만 우린 직접 여기저기서 뛰고 있었는 걸? 체감되는게 완전 달랐다고."
분명 목적은 사람들을 위해서인데, 하는 일은 사람들을 헤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때문에 다치고 잃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고쳐줘서,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받았을 때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걸 느꼈다고 한다.
"아, 알았다면 왜─"
"믿고 있었으니까."
검호 너라면 분명 이 모순을 깨닫고 스스로 고칠 거라 생각했다. 이데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유였으나 숨이 막히는 대답인 건 마찬가지였다. 유에는 이마를 짚던 손을 느리게 내렸다.
"유적에서 프리드의 사념과 만났을 때, 그는 너를 믿는다고 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니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봉인석을 모두 가져갈거라는 걸 알았는데도 대비하지 않았고, 오히려 돕기 위해 프리드는 그 수 백 년 전 니할의 봉인석과 비행 유적을 안배하기까지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그의 선택과, 내가 보아온 너라는 사람을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었기때문에 제대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알아서 잘 할 거라 생각하기만 했을 뿐.
"아무리 대단해도 너도 한 명의 사람이고, 그러니 실수도 하고, 틀릴 수도 있고, 헤멜 수도 있다는 걸─ 그걸 고치려면 누군가 도와줘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유에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문득 떠오른 그 의문에 나는 답하지 못했다. 그런 거 모르니까. 정말 갈 길이 멀다는 것만 다시 깨달았을 뿐.
"또 다른 이유라 한다면…… 그래, 나 역시 몰려있던 탓도 있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대신 아스카가 한 질문에 유에는 지친 얼굴을 들었다.
"존재의 시간을 되찾는 과정에서 동료들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고 각오했는데, 생각한 거하고 실제로 하는 건 역시 달랐어."
아. 이런.
나에게 있어 영웅들이 중요한 정도하고, 유에에게 있어 영웅들이 중요한 정도가 같을 리가 없는데.
그는 나 때문에 소중한 이들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그 기억을 되찾게 하고 싶은 소중한 이들과 싸우는 모순에 빠져버린 것이다.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건 알지만 그들에게 적대시당하고, 살기까지 받으며 싸웠던 게 정말 괴로워서…… 너한테까지 신경쓰지 못했다."
그를 거기까지 밀어넣은게 나라서 무어라 더 말이 안 나왔다. 심지어 그렇게 해놓고 지금 그가 말 꺼낼 때까지 관심도 딱히 안 가졌지.
…… 내색 안 하니까, 그래도 영웅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 추스를 거라고 지레 짐작하며.
목구멍에서 올라오려는 사과를 내뱉으려다 참았다. 그에게는 그런 말보다 다른 안심할 수 있는 확신이 필요했다.
"더 이상 그들과 싸울 일은 없을 거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
이제부터 방법을 바꿀테니까. 나는 이데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나 대신 브리핑을 이었다.
"바꾼 계획에 대해 알려드리자면, 일단 봉인석을 모으는 것 자체는 중지하지 않을 겁니다. 뇌로 죽을 쒀도 이거 말고는 다른 대체품이 존재하지 않거든요. 현 시점에서 초월자정도 되는 힘의 대체품은 메이플 월드고 그란디스고 봉인석을 빼면 없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새로 만들 수도 없고요."
"무슨 표현이…… 아 그런데 봉인석을 계속 모은다면 바뀌는 건 없는 거 아니야?"
키네시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변경점은 그 뒤다. 마지막 봉인석을 손에 넣는 대로 우리는 즉시 다른 중요한 일을 할 거다."
"어떤…… 거를?"
계속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다물고 있던 사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예전에 했어야 했지만, 당시엔 능력이 안 되서 못한 일."
따지고 보면 이 사태를 멈출 수 있는 해결책은 쉬웠다.
"─군단장을 전원 처치한다."
이 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실질적인 주범이자 검은 마법사의 팔다리들을 제거하는 것.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내 말에 의외로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올 게 왔나'던가 '아 이제?'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많이 늦긴 했지.
여태껏 그들을 치지 않은 건 비교적 최근까지 상황과 여건이 안됐기 때문인데 그게 데미안의 합류로 해결되었다. 우려되는 건 검은 마법사와 자신들의 행동을 눈치챈 군단장들이 할 대응뿐. 우리만을 노린다면 상관없지만 걔들이 그럴리가 없거든.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속전속결로 놈들을 처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최소한 둘 이상을 저쪽이 대응하기 전에 연달아서 없애야 합니다."
"조금 빡세네."
"덤으로 이쪽이 처치했다는 흔적도, 우리쪽 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도 남겨선 안됩니다."
사실 처치하는 것보다 이게 더 힘들다.
"그렇게까지 비밀주의를 고집할 필요가 있나?"
"당연히 있죠."
앞서 배경설명만 간략적으로 들어 구체적인 상황까진 모르는 데미안은 몸을 많이 사려야 한다는 말에 어지간히 답답하다는 얼굴이었다.
"저쪽에도 트립퍼라는 이쪽 못지않게, 어쩌면 우리 이상으로 이 세계와 오버시어에 대해 매우 잘 아는 이가 존재하니까요."
프라이쉬츠. 결국 그놈이 제일 큰 걸림돌이다.
"생각해보시죠. 만약 그 자가 이곳에 디멘션 게이트가 열렸고, 시간의 오버시어가 어떤 상황인지 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오버시어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1분 1초라도 더 빨리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선 정말 뭐든지 해버릴 그 자가."
"……."
안 봐도 비디오다. 단숨에 루타비스에 쳐들어와 그란디스로 건너가 그 년, 시간의 오버시어를 봉인에서 풀어버리겠지. '일부러 불완전하게'. 자신마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따위 개의치않고 굶주린 시간의 오버시어를 이용해 그란디스와 메이플 월드를 없애버릴 것이다. 심지어 그놈은 우리와 달리 봉인을 푸는데 필요한 초월자 - 검은 마법사의 힘을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단 한 줌의 정보, 또는 거기까지 유추해낼 수 있는 단서가 조금이라도 놈의 손에 들어가면 그걸로 게임 오버가 되버린다. 아직은 그걸 모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미 미스틱 게이트와 친위대 등을 이용해 연합의 눈을 돌려가며 제 풍부한 지식을 이용해 세계 멸망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저희가 뭐 좋아서 물 밑 공작을 벌여온 게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정말 간단하게 모든 것이 날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거에요. 알겠습니까?"
"아, 응."
"그리고 하나 더. 군단장을 그 년, 아니 시간의 오버시어를 깨우기 전에 처치해야하는 이유가 또 있다."
사실 이건 조금 늦게 깨달은 사실인데,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시간의 오버시어가 봉인에서 풀려나면 자신의 힘을 마저 되찾기 위해 1순위로 검은 마법사를 노릴 거고, 어부지리 격으로 그 자를 처치할 순 있어도 군단장은 아니라는 거죠."
"흐음?"
"최종보스는 치트키로 없앨 수 있는데 정작 그 아래인 사천왕은 안된다는 거야?"
"어…… 대강 그렇습니다."
순간 사이가 쓴 단어를 바로 알아듣지 못해 이데아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저렴한 비유지만 그랬다.
"시간의 오버시어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막아주는 특성이 있습니다. 평소라면 상관없고 오히려 고마운 특성인데, 이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합니다."
"외부라 한다면─"
"단어 그대로 이 세계가 아닌 '바깥'과 그곳 출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자리의 세 분과 프라이쉬츠를 가리키죠."
이건 이번에 데미안이 루타비스를 습격하고 내가 한바탕 날뛴 결과를 보고받다가 이상해서 아이한테 물어보니 확답받은 거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토록 큰 힘들이 날뛰고, 부딪히고, 폭주했는데 부상자들은 산더미지만 사상자는 손가락에 꼽아도 좋을만큼 적다는게."
"그렇긴 하지."
"그 이유가 이겁니다. 디멘션 게이트를 통해 시간의 오버시어가 친히 '외부인에 의해 이 세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아준 거죠."
찰나, 사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잠깐만. 그런 게 가능하면 왜 8백 년 전에 프라이쉬츠가 학살을 벌일 땐 막지 못한 거지?"
"힘이 한참 약해져 있으니까요. 저 보호가 가능했던 것도 루타비스가 디멘션 게이트를 통해 판테온 - 오버시어의 본체가 있는 곳과 이어져 있어서입니다. 다른 곳이었으면 보호고 나발이고 없었어요. 솔직히 이번 것도 굉장히 무리해서 한 거라네요."
"그래서 그 외부인의 공격을 막는다는 게 뭐가 문젠데?"
"아─주 문제죠."
시간의 오버시어는 외부인의 공격을 무조건 막기 때문에,봉인에서 풀려난 이후 검호와 세피로트, 사이키커가 군단장을 공격한다면 그것도 막을 게 분명하거든요.
"아니 그걸 왜 막아?!"
"외부인에 의해 이 세계의 생명이 죽는 걸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그놈들은 어떻게 뒈져도 상관없는데."
"그건 저희의 시점이고, 오버시어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어찌됐든 트립퍼는 외부인, 프라이쉬츠를 제외한 군단장은 이 세계의 생명들이니까.
"대체 오버시어는 그놈들때문에 죽은 사람 숫자가 몇인 줄 알고 그걸 감싸는 거지? 이 세계의 생명들이 죽지 않길 바란다면 그들을 없애거나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아야하는 거 아닌가?"
"뭐랄까…… 그 아이의 말로는 군단장에 의해 죽는 건 결국 세계가 굴러가면서 '늘 있는 일'인 거고, 외부의 존재에 의해 죽는 건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라네요."
뭔 소린지 모르겠다면 당연한 거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혹은 기계에 가까운 관점이니까.
"조금 와닿게 말하자면 타국의 용병에 의해 살해당한 것과 자국의 깡패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의 차이점같은 겁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거죠."
"최악이다……."
"고로 우리는 오버시어를 깨우기 전에, 반드시 군단장을 모두 처치해야 한다."
못하면 놈들을 없앨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테니까. 연합과 영웅들이 있긴 하지만 큰 피해없이 끝내려면 우리가 나서는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데미안. 당신은 나중에 현 군단장들의 상황에 대해 아는대로 다 말해주세요."
"쯧, 알았어."
아웃사이더라도 현직 군단장인(우리말고는 아직 배신 사실을 아무도 모르니까) 데미안은 우리보다 지금의 군단장들을 잘 알 것이다. 이데아는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뒤 다시 말을 꺼냈다.
"이제 마지막─이긴 한데 가장 빨리 해야하는 저기 위에 몰려온 연합에 대한 대처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아 그거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야? 쟤가 전향했으니 이제 이전 방식 못 쓰잖아."
"그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전 계획을 효과를 못 볼 거였습니다. 조사해보니 저들이 알아낸 저희의 정보가 의외로 자세하더라고요."
유에의 정령과 초소형 도청기 등을 이용해 캠프 상황을 탐색한 이데아는 영웅들의 저력이 생각했던 것 이상임을 인정했다. 아니 영웅은 둘째치고 제논까지 있을 줄은 몰랐어 진짜. 걔가 알고 있는 거랑 자기들이 추측한 것들을 이래저래 끼워맞추더니 꽤 많이 알아냈더라고.
"그래서 아예 다른 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하?"
그게 뭐냐는 물음이 다른 이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저 해결책을 3시간도 안되서 생각해낸 이데아는 그 면면들은 쭉 흝어보고는 답해주었다.
"저희가 가져와야 하는 봉인석이 이제 하나뿐이잖아요?"
"어, 엉?"
"그런…… 건가."
"에레브에 괜스레 미안해지네."
내 말이. 사이와 데미안은 표정이 이상해졌으며 키네시스는 다소 경악한 눈치였다.
"이번 에레브의 봉인석을 가져올 방법은 이제까지와는 다릅니다. 정정당당하게, 기습도, 뒷공작도 없이 언제 어떻게 찾아갈지 다 알려준다음 최소 인원만 가서, 양측 모두 어떤 피해도 입지않고 봉인석을 받아올 겁니다."
"…… 뭔 잠꼬대냐."
"그게 저 사람의 요구사항이었는 걸요."
이데아의 말에 또다시 시선이 모였다. 뭐, 왜, 뭐.
"당신 그새 또 훼까닥 했어?"
"아니라고 했다."
"아니면 그런게 진심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좀 무리수인 건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는데─."
진짜로 저 조건들을 싹 다 충족시키는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지.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데아는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며 '새로운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저걸 들었을 때도 무슨 약을 했길래 저런 계획을 짰냐는 의문이 들었는데 재차 들어도 마찬가지야. 말 그대로 양측 모두에게 피해가 없으면서 봉인석을 받아올 수 있는 - 저쪽이 우리에게 봉인석을 주게 만드는 계획이라 식은땀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이번 계획의 중요한 역할을 떠맡게 된 키네시스와 사이의 표정은 그야말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유일한 위안은 누구와도 싸울 일이 없다는 거지만 그 이상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니. 반쯤 녹은 얼음 주머니로 아까와는 반대쪽 뺨을 누르던 데미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봐 당신."
"뭐냐."
"가끔 저 여자 무섭다고 생각 들지않아?"
"종종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
"역시."
그런데 왜 계속 저 여자를 쓰는 거야? 난 그녀보다 머리가 좋지 않거든. 현실적인 이유네.
"혹시나해서 묻는 건데, 만약 내가 당신들이랑 협력하기로 안 했으면 나도 같이 처리할 거였어?"
어째 뒤로 갈수록 말이 없더니 그래서였냐. 나는 데미안이 협력하지 않았을 경우를 잠깐 떠올려보았다.
"그래도 넌 몇 번 설득을 시도했겠지만 해도해도 안되면 손을 썼겠지. 너희 어머니에게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군단장은 살려둬서 좋을 일따위 절대 없는 종자라는 걸 8백 년 전에 이미 깨달아서."
"그, 그래?"
"실망했나."
"아니. 덕분에 저 여자한테 싸대기 맞으면서 생긴 후회 몇 점이 다 날아갔어."
군단장의 유구한 전통이 왜 전통인지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야 그런 거 깨닫지 마.
***
side out.
조사대에 의해 발견된 에반은 곧장 막사로 옮겨졌고, 몇 시간에 걸쳐 진찰에 들어갔다.
"애 상태는 어때?"
"양호한 걸 넘어 문제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다행이지만 이상한 일이군요."
당연하지만 양 다리의 무릎 아래와 한쪽 팔이 잘려나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지하에 떨어진 애가 며칠 지나지않아 멀쩡한 모습으로 발견된 게 정상적인 상황일 리 없다.
"이걸로 저 아래에 그가 있을 가능성은 확실해졌군."
"그가 아니면 블랙윙이든 마족 군단이든 에반을 고쳐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쪽은 가정이 사실상 확실시되었을 뿐, 진짜 문제는 다른 거였다.
"아란. 너는 에반이 저 아래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 것 같지."
"그야 놈들에 의해 옮겨졌거나, 도망쳤거나지. 그거말고는 없잖아."
"후자의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고."
"그럼 십중팔구 놈들이 걔를 거기 뒀다는 뜻인데, 그 놈들이 그런 자원봉사자같은 일을 할 이유가 있어?"
메르세데스의 물음에 루미너스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셋 정도 예상가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
공교롭게 동시에 같은 말을 꺼낸 데몬과 루미너스는 흠칫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 하필 저것과 같은 생각을 했어. 망할.
"왜 그러십니까. 마저 말씀해주세요."
아주 무기까지 꺼낼 기세로 눈싸움을 벌이는 걸 전혀 눈치못챈 제논은 왜 말을 하다마냐고 재촉했다.
"…… 니가 해라."
"쯧, 알겠습니다."
그래도 생각했던 가능성만이라도 다르길 바라며 데몬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저는 저들이 에반을 여기 놓아둔 이유를 크게 세 가지 정도 떠올렸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그의 명령'일 가능성."
"소드댄서가 지시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만약 그가 명령했다면 부하들 입장에선 뭐가 어쨌든 따라야 하니까요."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딴 거에 휩쓸릴 인간으로는 안 보이고. 데몬은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두 번째는 에반을 '무해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
"무해하다는 말은……."
"'놓아줘도 우리한테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봤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저들이 에반을 그냥 사건에 휩쓸린 민간인A쯤으로 봤거나 해서 대충 치료해주고 놔줬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 하나는 뭡니까?"
영웅들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에서 활약하며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진 에반을 블랙윙이 못 알아 볼 리는 없다. 그러니 두 번째 가능성은 자연스레 제껴진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 같은 이유지만 좀 다르게 '이미 조치를 취했으므로 놔줘도 상관없다'일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에반은 멀쩡하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외상에 한해서입니다. 정신이나 눈으론 볼 수 없는 어떤 수작이 가해졌을 확률이 없지 않아요. 안 그렇습니까 빛의 수호자."
젠장 역시 같은 예상 했잖아. 차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루미너스는 대꾸해주었다.
"그래. 마법으로 검사도 해봤지만 어디까지나 약식이었고, 저놈들의 마법 자체가 우리가 쓰는 것과 달라 내가 못 찾아낸 걸 수도 있다. 자세한 건 깨어나봐야 알 수 있지만 당장은─"
[마스터!!]
"…… 하아."
루미너스는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머리를 짚을 뻔 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고 생각하며 데몬은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 작품 후기 ==========
"아무래도 깨어난 모양입니다. 어느 쪽인지는 직접 가서 보죠."
"벌써 일어나다니, 걔 의외로 튼튼하네."
"외상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가장 심각했을 부상들이 대부분 고쳐져 있었으니 깨어나는데 필요한 건 적절한 휴식밖에 더 있을까. 그들은 에반이 있는 쪽으로 갔다.
[정신이 들어 마스터?]
"우, 으."
[어디 아픈 곳은 없지? 응?]
"여긴……."
"슬리피우드 조사대 본부 막사다."
막 눈을 뜬 에반은 멍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루미너스와 다른 사람들을 겨우 보았다.
"이미 검사를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몸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곳이 있나."
"딱히 아픈 곳은…… 없어요."
"그럼 일단 괜찮다고 봐도 되겠군."
루미너스는 침상 옆에 간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바로 말을 꺼냈다.
"너는 이곳 조사대 캠프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당시 니가 떨어지며 입은 심각한 부상들은 말끔히 치료된 상태였지.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는게 있나?"
"방금 일어난 애한테 그런 걸 물어봐야 겠습니까?"
"하? 바로 가서 묻자고 한 건 너였잖아."
"전 가서 보자고 했지 묻자고는 안 했습니다."
질리지도 않게 영웅들과 데몬은 또 신경전을 벌였으나 그들에게 신경쓰기엔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인 에반은 붕대가 감겨있는 쪽의 팔로 침상을 짚고 휘청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떨어지고 나서, 저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사람들이, 있었어요."
"뭐?"
"일어났을 때 몸은 이미 치료되어 있었고…… 바깥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어요."
"그게 정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에반은 이상하게 흐린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갔다.
"몸이 멀쩡한 걸 확인한 뒤엔 병실에서 몰래 빠져나왔고……."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겁니까?"
스승님을 찾으려…… 가뜩이나 잠긴 목소리는 날카로운 눈빛들에 쥐구멍에 들어갈 기세로 작아졌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적진 한복판을 활보하다니, 무모한 일에도 정도가 있지."
"나무래야하는 건 맞지만 일단 얘기를 더 들어봐야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 어떤 사람들을 쫓아갔었어요."
"누구를 말이지."
"그건……."
에반은 머리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누구였지? 본 순간 쫓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뒤를 밟았는데 정작 그들이 누구였고 왜 쫓아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두텁게 회칠된 벽화를 만지는 것처럼, 대략적인 윤곽은 떠올랐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을 쫓아갔다가 어떤 엄청난 장면을 봤어. 그들이 했던 말도 엿들었고. 그 중 한 명은 날 봤지만 그냥 가버려서 다시 스승님을 찾으러 돌아다녔어.
그런데 그들이 누구고 어떤 장면을 보았으며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부 기억나지 않아.
"어…… 어?"
"에반?"
그 뒤에 겨우 진짜 스승님을 찾았어. 찾았는데 어째선지 너무 충격적인 모습이었고, 그럼에도 묻고싶은게 있어서 겨우 무언가를 물어봤다. 그리고 그분은 대답을 했다.
뭘 물어봤지?
스승님이 어떤 모습이었길래 놀랐던 거야?
그분은 뭐라고 대답하셨고?
"잠깐, 만. 왜 기억이."
"진정하세요 에반. 일단 침착하게─"
"대답을, 대답을 들었는데……! 겨우 만나서 대답을 들었는데 왜 그게 뭐였는지 떠오르지 않는 거지? 왜, 왜? 어째서?!"
휘이잉─!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갑자기 천막 안에 거센 돌풍이 일었다. 그게 감정의 동요로 에반의 마력이 마구 세어나오며 부는 바람이라는 걸 눈치챈 루미너스는 황급히 에반을 거의 쳐박다시피 침상에 도로 눕혔다.
"진정해라. 이대로 있다간 마력 고갈로 쓰러진다."
"큽……!"
"심호흡 좀 하고, 무리하게 떠올리려 하지마라."
"본인이 캐물었으면서 병주고 약주고 입니까. 제가 할테니 그 손 치우시죠."
"니놈이 뭘 하겠다는 거냐."
"마법사면서 한 손으로 사람 메치는 당신보다 부드러운 수단 한 둘쯤은 할 줄 압니다."
인상을 쓰며 뭐라 소리치려는 루미너스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확 밀어낸 데몬은 진정되기는 커녕 계속 마력을 흘려보내 숨을 헐떡이는 에반을 물끄러미 보다 그대로 몸을 낮추어 끌어안았다.
[엑?!]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등 뒤에서 영웅들과 제논, 미르가 경악하든 말든 데몬은 꽤나 익숙한 손길으로 소년을 토닥였다.
"지쳐서 그런 것 뿐입니다. 너무 무리해서, 여러가지 충격적인 일들을 한꺼번에 겪어서 그런거에요."
"하지만, 하지마안……."
"당장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마저 한 숨 푹 자고,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됩니다."
울먹이는 에반의 등을 쓸어주며 데몬은 소년의 귓가에서 희미한 어떤 냄새를 맡았다. 흙과 물냄새에 섞여 많이 흐려졌지만, 절대 자연물에서 날 수 없는 어떤 냄새를.
"겨우 스승님을 만나서 대답을 들었는데……."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그때 해도 늦지 않아요."
"자고 일어났다가 더 잊어버리면……!"
데몬은 손에 아주 미약한 그림자에 가까운 포스를 손에 둘러 에반의 뒷통수를 감쌌다.
"만약 그러면 어떻게든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자세요."
그의 말이 다 끝맺어지기도 전에 에반은 스위치가 꺼지듯 축 늘어졌다. 소년을 잠재운 데몬은 느리게 팔을 풀고 침상에 눕혀주다 그제서야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했다.
"뭡니까 그 표정은."
하나같이 있을 수 없는 걸 본 얼굴들이다.
[당신 전직 군단장인 거 맞지? 확실하지?]
"뭘 새삼스러운 걸 묻는 겁니까."
"애 달래는 솜씨가 아무리 봐도 한 두 번 해본 게 아니잖아. 뭐야 너?"
왕이지만 나름 엘프 아이들을 본 경험이 있는 메르세데스가 기가 찬다는 투로 물어봤으나 그는 그녀를 무시하듯 홱 고개를 돌려 에반을 마저 내려놓았다.
"뭐긴 뭐겠습니까. 당신들이 죽이고 싶을만큼 싫어하는 전직 군단장이죠."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다만 지금은 넘기도록 하지."
"거 참 눈물나게 고마운 처사군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에반에게 이불까지 덮어준 뒤 데몬은 다른 이들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미르만이 그들을 따라나오지 않고 마스터의 옆자리를 지켰다.
제논은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다소 굳은 얼굴로 에반이 있는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들이 에반을 놓아준 이유는 세 번째였군요."
"하필이면 가장 안 좋은 거야. 젠장."
"현실적으로 세 번째일 확률이 높았습니다. 저들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놓아주는데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하죠."
어쨌든 사실상 에반에게서 지하 기지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게 됐다.
"쟤 기억을 저렇게 만든 건 역시 마법이겠지?"
"아니. 그럴 가능성은 의외로 적다."
"어째서?"
"저 꼬마는 보기보다 꽤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니까."
기억조작 마법은 대상자의 항마력이 높을 수록 잘 안 먹힌다. 그리고 에반은 못해도 중상급에 드는 마법사이자 드래곤 마스터라서 의외로 항마력이 높은 편이다.
"그럼 물리적인 방법일까?"
"그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 일시적인 기억상실이 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기억을 날려버릴만큼 강한 충격이면 흔적이 남아야 합니다. 그런 건 없었죠. 혹 있었더라도, 치료가 완전히 되었잖습니까."
"치료를 다 해준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감추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군."
짐작이었지만 반쯤 사실이었다.
"제 생각이지만 저들이 에반의 기억을 조작한 방식은 약물이 아닐까 합니다."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지."
"아까 그를 진정시키면서 어떤 약품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늪지에서 절대로 날 수 없는 화학약품 특유의 냄새였죠."
"그게 사실이야?!"
소리치며 자리를 박찬 아란이 당장 에반이 있는 곳에 가 직접 코를 박고 확인해볼 기세라 그는 바로 그녀에게 릴렉스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앉으십시오. 지금쯤이면 다 날아갔을 겁니다."
"니가 맡았다는게 화학약품의 냄새인게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에델슈타인에서 레지스탕스를 도우면서 약품의 냄새를 많이 맡아봤거든요. 그래서 여기의 이런저런 냄새에 섞였어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레지스탕스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표면적으로나마 의사라서, 그녀를 돕다보니 의약품 계통 냄새는 질릴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런데 이 정도로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약같은게 있을 수 있나?"
"왜 없겠습니까. 상대는 순수 과학 기술로 포탈도 만드는데."
메르세데스의 당연한 의문에 데몬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그는 블랙윙에서 가끔씩 툭툭 튀어나오는 오버 테크놀러지 중에 그런 게 있다해도 이상하지 않게 여길 자신이 있었다. 레지스탕스에서의 경험은 장식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말을 끝으로 각자 생각에 잠겼다. 메르세데스와 아란은 기억을 지우는 약이 있을 수 있나에 대해 의문을 품는 동안, 루미너스와 데몬은 에반의 말을 통해 기억이 조작된 방식을 분석하고 있었다.
'기억을 지운 방식이 이상하다.'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어.'
일단 에반은 자신이 무엇을 했고 그때의 감정이 어땠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정작 무슨 일을 했고 누구를 봤는지 전혀 떠올리지 못했지. 이는 단순히 기억을 '잊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보는 남아있되 그걸 못 알아보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인 즉 마법약이든 뭐든 써서 어떻게든 다시 알아볼 수 있게 한다면…….
잠시동안 조용해진 장내을 깨운 건 제논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한 건 아니지만 에반과 마족들에게 끌려갔던 민간인까지 모두 멀쩡히 돌아왔는데, 지하 기지 진입을 계속 시도할 겁니까."
"응? 그야 당연히 계속 해야지."
"저 아래에 블랙윙과 마족 무리들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지 않나."
"거기다 그와 군단장이 있을게 분명하다는 걸 생각하면 에반의 구조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진입해야 합니다."
설령 지금쯤 모두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하더라도 그 흔적이나마 얻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지하 기지에 진입해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