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86화 (186/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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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검호와 용의 후예들이 준 5시간의 유예가 모두 지나며 시그너스 여제와 함께 협상 테이블에 앉기로 결정된 사람들은 소 회의장에 들어섰다.

"제 시간에 딱 맞춰 왔네요."

"이런 자리에 늦을 리 없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렇지만 당신들 상황이 상황인지라 또 유예를 달라고 할까봐 걱정했거든요."

기다리다 지루해서 시간을 더 달라고 했으면 테이블 엎었을지도? 싸하게 굳어가는 연합측 사람들의 얼굴에 이데아는 웃으며 농담이라고 손짓했다.

"당신들 측에서 참여할 사람은 일곱 명이 전부입니까?"

"예. 그렇지만 저기 아란 님은 호위를 전담하실 거라 테이블에 앉지는 않습니다."

"후후, 마치 저희가 위협이라도 할 것처럼 말하네요. 앞서 말했지만 오늘 저희는 어디까지나 협상을 하러 온 것 뿐입니다."

"글쎄요. 일단은 믿어드리죠."

"일단이 아니라 제발 그러길 바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시그너스의 눈썹이 확 올라가며 파랗게 날 선 시선이 이데아를 노려보았지만, 이데아는 변함없이 우아한 미소를 유지하며 황록색 눈동자를 기이하게 빛냈다. 갈라진 꽃잎같은 입술 사이로 작게 이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협상을 하러 왔다면서, 언제 시작할 생각입니까."

"이제 해야죠. 아…… 그런데 에레브의 책사가 안 보이네요. 당연히 그도 이 자리에 참여할 줄 알았는데."

"당신들 때문에 잔뜩 지친 사람을 또 혹사시킬 리 없잖습니까."

"그거 참 자상한 대처군요."

용의 후예들이 꺼내든 협상이라는 카드에 크게 얻어맞은데다 이런 상황을 대비 못한 게 사실상 자기 탓이라는 생각에 정신력이 크게 깎인 그를 이 자리에 앉히는 건 악수(惡手)다. 거기다 나인하트는 테이아 공인 이데아와 비슷한 사람인만큼, 그의 사고방식 등이 역으로 읽혀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기에 시그너스는 그를 이 자리에서 뺐다.

"그런데 그 대신에 데려온 사람이 저 어린애라니, 혹시 잘못 따라온 건 아니죠 소년 군?"

[똑바로 온 거거든!]

"미르 니가 대답하면 어떡해?"

"지금이라도 저기 복도로 돌아가주면 실수했다 치고 넘어가줄 수 있습니다."

"실수 아니니 걱정마시길."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두 여자의 기싸움이 불붙으려는 걸 본 검호가 깍지 낀 손을 느리게 풀며 말했다.

"잡담은 그쯤하고 자리에 앉아라."

이제 협상을 시작할테니까.

잠깐의 침묵을 두고 그들은 회의장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차례차례 앉았다. 소 회의장의 테이블은 원탁이라 혹여나 바로 옆에 상대 진영의 사람이 앉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원탁의 크기가 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 측의 가운데에는 당연히 각 진영의 수장인 시그너스 여제와 검호가 앉았으며,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검호가 입을 열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가 원하는 건 에레브의 봉인석이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받아가기 위해 여기에 찾아왔고, 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너희가 이 테이블에 왔다는 건 봉인석을 우리에게 내줄 결심을 내렸다는 뜻이겠지."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결심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은 장본인에게 무슨 말이라도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사이, 시그너스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봉인석은?"

"여기 있죠."

시그너스의 손짓에 아란은 들고있던 상자를 열어 봉인석을 보여주었다.

"그게 에레브의 봉인석이 확실한가."

"건드리지 마세요. 아직 넘겨줄 생각 없습니다."

"호오?"

여제의 말에 이데아는 놀랍다기보단 당돌한 아이를 보는듯한 눈으로 얕게 감탄했다.

"당신들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협상'을 위해 왔다고요."

"그랬지."

"봉인석은 넘겨드릴 수 있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다면 말이죠."

그리고 그 대가가 봉인석을 넘겨줄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저희가 판단할 겁니다.

오만하다던가 주제파악 못 한 어린아이의 오기라기보단, 그것만큼은 절대로 물러서줄 수 없다는 결의로 찬 모습이었기에 이데아는 더 참지못하고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뭐가 우스운 겁니까."

"아니요, 아뇨. 좀 전에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풉, 시그너스 여제께서는 굉장히 재밌는 사람이군요."

"그건 완곡한 거절의 표현입니까."

"그럴리가요. 무엇보다 당신들에 건 조건을 판단하는 건 제가 아닌 걸요."

이데아는 웃음기를 지우고 검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까지 에레브의 봉인석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그는 눈을 떼며 답해주었다. 그러지. 짧지만 분명한 승낙을 한 검호는 이데아에게 턱짓을 하고는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협상의 실질적 진행을 그녀에게 넘긴 것이다.

"봉인석을 맞바꿔도 될만한 대가라…… 어떤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에델슈타인의 지배권 축소? 미스틱 게이트 완전 철거? 다른 군단장들에 대한 근황이나 신 군단장들에 대한 정보는 어떠신지?"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넘겨듣기 힘든 엄청난 것들이었다. 하지만 반응해서는 안됐다. 저것은 고민따위가 아니라 단순히 떠보기 위해 늘어놓는 말에 불과했으며,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아직 언급되지도 않았다. 괜히 다른 것을 탐했다간 그것들을 놓칠 수 있기에, '에델슈타인 지배권 축소'를 내뱉을 때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 지그문트를 옆에 있던 루미너스가 붙잡아 그대로 앉혀야 했다.

걸릴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미끼를 통해 '우리는 이 정도가 기본적으로 가능하다'고 은연중에 알린 이데아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본격적인 떡밥을 던지기로 했다.

"아니면─ 군단장들을 몇 명 처리해드릴까요?"

충격적인 제안에 시그너스와 연합측 사람들의 표정이 드디어 바뀌었다. 지금 자신들이 제대로 들은게 맞는지 제 청각을 의심하는 이들부터 - 하인즈, 지그문트 - 저걸 수락해야하나 고민하는 이들 - 루미너스, 아란 -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하는 이들 - 에반, 시그너스 - 등 반응이 엇갈렸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죠. 봉인석을 주신다면 군단장들을 몇 명 처리해줄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과 같은 편 아니었나."

"끔찍한 착각하지 마라."

놈들때문에 엿먹은 게 몇 번인데 같은 편은 개뿔. 예나 지금이나 군단장은 기회만 생기면 죽여야 할 적이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이제는 계획에 발맞추어 최대한 빨리 없애야 할 적. 언뜻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 바닥 아래에 깔린 뚜렷한 적의에 루미너스와 데몬은 변모한 그와 군단장과의 관계가 어쩌면 예전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너희도 결국 군단이긴한가 봐? 같은 편 죽인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저희는 용의 후예입니다."

언뜻 동문서답같았지만 그 말에 모든 뜻이 담겨 있었다. 동시에 몇몇은 과거 스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드댄서는 블랙윙을 이용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놈'이라 했지. 그 소드댄서였던 이가 지금 취하는 자세까지 볼 때 - 그들은 검은 마법사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

스우 놈의 말대로 그들은 '목적을 위해 블랙윙에 들어왔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아마 봉인석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번 것은 좀 구미가 당기시는지?"

시그너스는 바로 대답하지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연합을 결성한 의의는 검은 마법사의 준동을 막는 것. 그리고 검은 마법사의 수족인 군단장을 이쪽의 힘을 들이지않고 처치할 수 있다면 이득이 맞지만…….

"당신들이 정말로 그 일을 할 지 믿을 수가 없군요."

"의심된다면 계약서를 써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마법적인 보증도 할 거고요."

약식 계약서라도 당장 써 드릴까요? 태연하게 카이저에게 손짓해 서류가방에서 미리 준비한듯한 계약서를 꺼내보이는 이데아의 모습에 시그너스는 침음을 삼켰다. 여기서 아무 이유없이 단칼에 거절하는 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지금 어딘가에서 군단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저 제안을 수락하고 봉인석을 주는게 최선으로 보인다.

이런 좋은 일을 걷어차야 하는데다 타당한 명분까지 대야하다니. 계속 진행되면 원하는 건 얻지도 못하고 저 제안을 수락해야할 낌새에 루미너스와 하인즈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를 놀리는 건 그만해주시면 좋겠군요."

"무슨 말인지?"

"군단장의 처치는 협상이 아니었더라도 당신들이 했을 일 아닌가요. 어차피 할 일을 이번 협상의 패로 겸사겸사 끼워넣지 마시고 저희가 정말로 괜찮다고 볼만한 걸 제시해보시죠."

조금 전의 대화로 용의 후예란 이들이 검은 마법사와 그 무리들과 절대 호의적인 관계가 아님을 알았고, 청문회 사건 때 스우를 감시하기 위해 측근을 붙이는 등의 행동을 고려해볼 때 그는 여차하면 군단장을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는게 확실하다. 협상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거슬리거나 필요하다면 반드시 군단장을 없앨 것이다.

즉, 이번 제안은 어차피 자기들이 할 계획인 일을 협상의 패로 적당히 바꿔 올린 거다.

속내를 들켰음에도 이데아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푸훗, 갈수록 마음에 드네요 시그너스 여제님은."

"딴소리하지 마시죠."

"여제님은 연합의 힘만으로 모든 군단장을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왜 못 한다고 보죠. 바로 얼마 전까지 당신들의 빅토리아 아일랜드 본거지를 칠 예정이었는데."

"아~ 거기요?"

그녀는 끝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뿐만아니라 검호 진영의 사람들도 그를 제외한 모두가 피식피식 한숨같은 웃음을 흘렸다.

"루타비스를 칠 예정이라니…… 하하! 그 말, 꼭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딴 식으로 도발해봤자─"

"도발이 아니다만."

검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거기는 이제 우리의 손에서 벗어났으니까."

"설마 마족들에게 넘겼다는 거냐."

"아니요. 그 야만스러운 퍼런피부 놈들에게 뺏겼다는 뜻입니다."

루미너스의 얼굴에 쩍 금이 갔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다른 이들도 - 특히 블랙윙에게 질리도록 시달린 지그문트 - 당황했다.

"그,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거지? 이 상황에서 당신들이 호락호락하게 당할만큼 약하다고 우길 생각이냐!"

"하지만 사실인 걸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습격해온 터라 제대로 당해버렸답니다."

대신 나중에 돌아온 그가 놈들의 우두머리를 자근자근 밟아줬지만 결국 아지트는 뺏겼죠.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네요 그 퍼런 놈들. 만약 그들이 눈앞에 있었다면 아주 씹어먹고도 남을만큼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데아는 주위의 시선에 금새 화사한 미소로 표정을 고쳤다.

"그런데 연합 분들이 거길 쳐들어가겠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꼭 그놈들을 소탕해주시길 바랍니다. 기왕이면 그 잡초대가리의 머리도 확실히 벌초해주시고, 그놈 따까리들도 완전히 부숴주세요. 아, 필요하다면 놈들의 약점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어째 이번 건 연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말 없이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검호와 세피로트는 정말로 데미안과 마족 군단의 약점을 줄줄이 불어버릴 기세인 이데아를 제지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 아직 세로동공이 열리지 않은 걸 확인하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가 직접 나섰는데도 아지트를 뺏겼다는 말인 즉, 쳐들어온 적이 군단장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이미 알면서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 뭔가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상황이라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습니다. 역시 마족 군단장이 맞았군요."

그리고 그와 비등한 수준의 강자라는 것 역시. 실상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데아는 굳이 데몬의 오해를 정정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열심히 하시길. 설마 빅토리아 아일랜드 한복판에 군단장의 기지를 방치할 리 없고, 방금 스스로의 입으로 아지트를 칠 거라고 공언해주셨으니 머지않아 호재가 들려오겠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졸지에 용의 후예들의 적을 대신 처치해주게 생긴 시그너스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심지어 이번엔 거절할 명분이 없다. 뒤에서 지켜보던 검호는 그녀와 같은 편이라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어떻게 목소리의 미묘한 높낮이부터 어조, 언행 하나하나가 사람 신경을 벅벅 긁는데 특화되어 있는지, 보면 볼 수록 신기하다. 저게 '정치판에 갓 입문했을 당시의 이데아'란 말이지?

애시당초 이 협상에서 전력을 다할 마음이 1도 없었던 그녀는 적당한 포커페이스를 쓰기로 했고, 그게 어릴 적의 자신이라고 했다. 이름있는 가문 출신의 전도유망한 재녀. 막 정치에 발을 들였음에도 타고난 재능으로 원하는 대로 판을 흔들어대는 당돌한 아가씨. 지금 그녀의 모습이었다.

후일 그 아가씨는 마구 활개치다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려 호되게 당하며 철이 들었다지만, 지금의 에레브에 그만한 호랑이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호랑이 새끼는 있었다.

"거짓말은 그 정도로 해주세요."

"응? 뭔가요 소년 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건 이제 그만해달라고요."

협상 내내 조용히 있던 에반이 보기 드물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름 요주의하게 그를 주시하던 이데아는 아무렇지않게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여제님의 시종이 아니었나요? 왜 나서는 거죠."

"시종 아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영웅도 아니고 저런 어린애를 테이블에 앉히다니…… 혼잣말이지만 은근히 다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는 '주제모르는 꼬마'를 보듯 무시하는 기색을 띈 눈으로 에반을 흘겼다.

"일단 대표라니 말은 들어드리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만약 충동적으로 한 말에 불과하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여제님에게 갑니다. 신중하게 답하시길."

무시, 도발, 압박.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심적 부담이 잔뜩 지워진 에반은 여전히 여유롭기만 한 이데아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마스터. 마저 말 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푼 에반은 다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당신들은 저희가 제발 빅토리아 아일랜드 아지트, 방금 루타비스라고 말한 그곳을 하루라도 빨리 마족들에게서 탈환해주길 기도해야하는 상황이잖아요. 여유를 가장하는 건 그만둬 주세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중앙에 있는만큼 쓸만한 아지트였지만 거기 말고도 거점은 많습니다만? 소년 분도 잘 알텐데요."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들에게 그 아지트의 중요성은 가장 높지 않나요."

문이 있으니까.

그 말에 찰나지간 이데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이전까지 짓고있던 미소가 무색할정도로 날카로운 기세에 데몬과 아란은 에반의 그 '문'이란 것을 제대로 언급했다간 심상치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으나 이를 알아채지 못한 에반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건너온 곳, '그란디스'로 가는 문이 거기에 있잖아요."

***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한 사람은 셋이었다. 먼저 이데아의 손이 번개처럼 휘둘러짐을 포착한 아란은 순식간에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폴암을 내리찍어 도끼날로 에반의 앞을 막아섰다. 정작 당사자인 에반은 말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차갑고 오싹한 느낌이 들더니 눈 깜짝할 새에 제 앞에 도끼날이 찍히는 정체불명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아, 아란 누나? 가가, 갑자기 왜?"

"난 분명 저 여자가 책사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어중이떠중이 모험가따위보다 더 손놀림이 좋은 걸까."

"책사라고 싸움을 못할 거란 건 편견이죠. 당장 아카이럼 그 작자를 떠올려보세요."

"그 영감탱이는 그래도 마법이 주력이었어."

똑같이 이데아가 움직이는 걸 포착했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데몬을 날카롭게 째려본 아란은 이데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왜 데몬이 안 움직였는지 알았다.

"큭……!"

"멈춰라."

"하, 지만."

"내가 그만하라고 했다."

이대로 팔을 꺾어버리기 전에 그거 놔라. 그의 손아귀에 꽉 잡힌 이데아의 손에는 언제 꺼내든건지 모를 만년필이 들려 있었고, 이를 본 에반은 그제서야 자신이 방금 전에 굉장히 위험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죽을 뻔 한 거야 나……? 뭘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못 봤는데?

툭, 데구르르. 그녀의 손안에서 떨어진 만년필이 반으로 쪼개지기 직전엔 테이블을 굴렀다. 그제서야 검호는 이데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그녀는 욱씬거리는 손목을 주물렀다. 아란과 데몬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뭘 하려했고 또 그가 갑자기 왜 저랬는지 뒤늦게 깨달으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협상의 자리에서 암살을 시도하다니!"

"그렇게 보였다면 사과하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 부하가 과잉반응하려 해서 제지한 것 뿐이다."

"…… 예. 저도 모르게 좀 오버해버렸네요. 이런 자리에서 감정적으로 움직이려 하다니,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노골적인 발뺌이었지만 뭐가 어떻게 되기도 전에 검호가 그녀를 막아버려 좀 전에 그녀가 하려던 짓이 암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에반을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는데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된 아란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따졌다.

"방금 그렇게 살기를 뿜어놓고 죽일 마음이 없었다고? 지금 그걸 핑계라고─!"

"신경과민이신 모양이네요. 당신보다 강한 전사인 저 전직 군단장은 가만히 있었지 않았습니까."

"제가 가만히 있었던 건 이 여자가 막아서는 것보다 그가 당신을 잡는 게 더 빠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려던게 정말 아무런 위협이 안되는 평범한 행동이었다면 그는 왜 당신을 붙잡았습니까."

데몬의 예리한 지적에 이데아는 스스로 답하는 대신 검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좀 봉합해봐요. 이걸 진짜 내가 해야하냐.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요? 슬쩍 눈썹을 찌푸린 그는 손을 뻗어 부서지기 직전인 테이블을 구르고 있는 만년필을 집었다.

"이렇게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행동이라 제지했던 거다. 아무리 의도가 평범했더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착각당하는 일이 종종 있으니까."

"그게 정말 납득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까?"

"왜 안 되나."

내 경험상 타이밍이 거지같으면 별 뜻 없던 행동으로도 진짜 터무니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게 가능하던데. 물론 그의 처절한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은 '저 인간이 어쩌다 저렇게까지 변해버렸냐'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 사이 이데아는 검호가 주워준 만년필을 받아 정장 주머니에 꽂아넣으며 빙결 마법으로 부서지려는 테이블을 얼려붙였다.

"그의 말대로 전 그저 펜을 꺼내들었을 뿐입니다. 저 소년 분이 한 말이 너무 어이없어서 반사적으로 손이 가버렸네요."

"뭘 할 생각으로 그렇게 암기 뽑듯이 펜을 든 겁니까."

"흠, 그야 당연히 필기죠. 오해를 살만한 행동이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놀랐나요 소년 분?"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여전히 창백하게 질려있는 에반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을테지만 이데아는 언제 자신이 불과 몇 초 전에 만년필로 그의 목을 꿰뚫어버리려 했냐는 양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극과 극을 오가는 변화에 에반은 잠깐이나마 자신이 느낀 그 살기가 착각이 아니었나 생각하기까지 했다.

[당신 이중인격자야?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만 하는 거야?]

"시그너스 여제님. 저 도마뱀도 협상 참가자입니까?"

"…… 에반 군과 항상 함께 행동하니 준 참가자로 봐도 됩니다. 그리고 말 돌리지 말고 좀 전의 짓에 대해 어디 더 변명해보시죠. 충동적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거라면 당신들이 어떤 조건을 내걸든 봉인석을 넘기지 않고 이 자리를 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서글프군요.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으시니. 일단 아까 했던 말을 계속 해보시겠습니까 소년 분? 그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한 근거가 궁금하네요."

이거 다 말하면 협상 끝나자마자 살해당하는 거 아닐까. 현실적인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떠는 에반에게 데몬이 툭툭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지켜줄테니. 조용하지만 든든한 장담에 에반은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봤는지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아요. 분명한 건 치명상을 입은 저를 며칠만에 치료시킬 수 있을만큼 뛰어난 의료시설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죠."

그리고 그것만으로 좀 전에 말한 사실을 뒷받침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상하잖아요. 다른 곳도 아니고 빅토리아 아일랜드 중앙 한복판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않고, 그것도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은 슬리피우드 깊은 곳에 그 정도의 시설을 건설하는게 과연 가능한 걸까."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저흴 무시하는지?"

자신감이라기엔 어딘가 음습한 빛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사람같지가 않아. 에반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마저 말을 이었다.

"가능하더라도……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죠. 당신같은 사람이 괜히 그런 비효율을 저질렀을 것 같지 않아요."

"흐응?"

"여러가지를 볼 때 저는 당신이, 용의 후예라 자칭하고 있는 당신들이 그곳에 기지를 세우고 설비와 사람을 배치한 건 '거기가 아니면 안됐다'. 이 이유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그 외의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지하기지를 세웠다. 그뿐이었다. 입지가 좋아서라던가 은신하기 좋다던가 하는 이유들은 이후 부차적으로 딸려온 이점이지 처음부터 그걸 노리진 않았을 거라고 에반은 생각했다.

"당신들이 메이플 월드에 와서 처음 발을 디딘 곳이 거기였을테니까요."

"그거 꽤 거슬리는 말이네요. 아까 한 말도 그렇고 마치 저희가─"

"'다른 세계'에서 왔죠. 그란디스라는 곳에서 여기로 건너온 '이종족'. 아닌가요?"

또박또박 내뱉어진 에반의 선고에 이데아는 좀 전의 격한 반응이 무색하게 별다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호오?' 얕은 감탄사를 흘릴 뿐이었다. 의연한 걸 넘어 질릴정도로 무덤덤한 그녀의 모습에 연합측의 이들은 협상 시작 전에 이미 정황과 증거를 다 들었으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하고 의심해봤을 정도였다.

이데아는 느리게 손을 들어 에반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대─단한 상상력이네요. 역시 어린애라서 상상력이 그렇게 뛰어난 겁니까?"

"이, 이건 저만의 상상따위가 아니라고요! 애초에 당신들 종족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는 것부터 이상했어요! 그 수 백년의 시간동안, 아무리 군단장들이 역사를 조작했다해도 당신들같이 독자적인 마법 체계와 문화, 사회를 이룩한 종족이 역사에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되요! 그나마 비슷한 존재라고는 지금은 없는 군단장 매그너스 정도 뿐이고!"

"잠깐 진정하세요 에반. 너무 흥분했습니다."

"정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은 이상'이런 경우는 일어날 수 없다고요!!"

점점 말에 감정이 섞이는 모습에 데몬이 말려봤지만 에반은 기어코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이건 안 좋은데. 페이스가 말려드는 느낌에 루미너스와 하인즈는 인상을 썼다.

반면 박수를 치며 에반을 부채질하던 이데아는 매그너스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손을 멈췄다. 그 썩을 배신자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도움이 안되네. 물론 이는 아주 잠깐이었기 때문에 검호를 빼면 본 사람은 없었다.

"스승님의 일도 그래요! 메이플 월드 어디에도 '그란디스'란 곳은 없었어요! 하지만 스승님은 그날 동료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건너 갔었고, 거기서 모종의 사건을 겪어 지금 모습이 된 거잖아요! 그런데 당시 메이플 월드에선 그런 변화가 일어날법한, 큰 규모의 사건이 단 하나도 없었어요! 무엇보다─!"

이미 메이플 월드와 다른 세계가 이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헤네시스엔 키네시스의 세계와 이어진 거대한 균열이 생겼고, 키네시스의 세계에는 특대 싱크홀이라는 문이 뚫린 상황이다. 그런데 그것만큼 거대하진 않더라도, 용의 후예들이 사는 세계와 오갈 수 있을만한 통로 - 접점이 메이플 월드에 이미 생겼다면?

한 번 일어났는데 두 번째도 가능성이 없을까?

실제론 싱크홀쪽이 두 번째였지만 여기에 태클거는 바보는 검호 진영에 없었다.

짝-짝-짝- 아까보다 더 큰 박수 소리가 울렸다.

"굉장한 추측이네요."

"그러니까 저만의 추측이 아니라고……!"

"소년 분에게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그래봤자 어린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려도 오닉스 드래곤의 계약자로군요. 이 테이블에 앉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칭찬임과 동시에 에반이 폭풍처럼 쏟아낸 말들에 대한 대답이었다. 조금 전까지 어린애의 상상력따위로 치부하던 것과는 또 다른 너무나 깔끔한 인정에 에반은 물론이고 진지하게 듣던 연합측의 몇몇 이들 - 지그문트와 아란 등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오닉스 드래곤의 계약자는 뭐든 간에 특출난 부분이 하나는 있다고 하던데 정말 특출나긴 하네요. 그 나이에 여기까지 스스로 알아내다니."

"아, 저, 그건 저 혼자서 알아낸 건 아닌데."

"그렇게 어리면서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 자체가 당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있죠. 누군가 도와줬더라도 그 도움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역량.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대단합니다 소년 분."

뿔뿔이 흩어진 파편들을 그러모아 하나로 잇고, 결과의 단면만 보고 과정을 유추해내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낸 것은 전적으로 에반이 한 일이었다. 이데아의 가감없는 칭찬에 소년은 그녀가 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애써 식혀야 했다.

다음 순간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제 저희는 당신에 대한 대우를 다르게 하겠습니다."

"…… 예?"

"자신이 귀찮고, 성가시고, 위협적이기까지 한 존재라는 걸 이렇게 온 몸으로 외쳐대고 있는데 어찌 이전과 똑같이 대하겠습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게 마땅하죠."

자, 잠깐 이게 아닌데.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심상치않게 변해가는 기세에 에반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이데아가 더 빨랐다.

"─이 순간부터 저희는 당신을 영웅과 동급으로 대하겠습니다."

"네, 네?!"

"무력적인 면에서는 한참 떨어지지만 적어도 변수를 창출해내는 능력만큼은 절대 떨어지지않는 걸 방금의 일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도 어린애라 특별히 몸 성하게 고쳐줘서 풀어줬는데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쳐버릴 줄이야…… 정말 이런 기분은 오랜만에 드는군요."

으지직! 테이블의 가장자리가 그녀의 하얀 손에 한 움큼 뜯겨나가더니 다시 손을 펼쳤을 때 까만 재가 후두둑 떨어졌다. 아 잠깐, 잠깐만 뭐야 저거. 여전히 얼굴은 미소짓고 있지만 휘어진 눈매 안쪽으로 찢어진 황록색 동공이 뱀의 그것처럼 가느다랗다. 시선에 후벼파인다는 게 이런 걸까. 인정을 받긴 했는데 그 뭐시냐, 이런 식으로 인정받고 싶진 않았는데.

서서히 상황파악이 되며 자신이 얼마나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급속도로 타들어가는 마스터의 속도 모르는 드래곤은 마구 지껄여댔다.

[축하해 마스터! 적들이 마스터와 영웅이 동급이래! 드디어 영웅으로 인정받은 거야!]

"이런 건 축하해 하지마아……!! 축하할 일이 전혀 아니야!"

아주 (여러가지 의미의)눈물을 쏟을 기세인 에반을 흘깃 본 루미너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을 밝혀낸 건 좋은데 한 번에 너무 많은 사실들을 까발려버렸다. 저 사실들을 알아낸 에반에게 영웅급 견제를 한다는 것도 문제다. 좋든 싫든 계속 지켜줘야하게 생겼으니까.

'뭣보다 너무 덤덤하군.'

손안의 재를 마저 털어내며 다시 희게 미소짓는 이데아의 모습은 사람이 맞긴 한 건지 진심으로 의문이 들만큼 기괴했다. 물론 이번에 들통난 사실이 본인들에게 그리 치명적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결국 들통났으니 상황은 그닥 맞지 않지만, 공식적인 자리인만큼 정식으로 소개를 하는게 예의겠죠."

이데아는 카이저에게 손짓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뒤, 연합측을 향해 처음보는 형태의 - 그러나 분명 절도와 예가 담긴 인사를 했다.

"위대한 용의 후예 '노바족'의 수호자인 이데아 쿠글블리츠/카이저, 메이플 월드의 황제에게 인사드립니다."

***

"…… 왜 다른 세계에 사는 당신들이 메이플 월드에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지극히 품위넘치는 인사에 되려 심기가 불편해진 시그너스는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래 이번 협상에서 알아내야하는 것 중 하나 - 행위의 이유를 툭 물어보았다. 우아하게 몸을 돌려 자리에 앉은 이데아는 그 직설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질문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아~ 이건 대답해주는게 좋겠지.

저 여제님이 더 움직이기 힘든 형태로.

"여제님의 생각엔 어째서일 것 같습니까?"

"글쎄요. 당신들은 타 차원의 종족이니 메이플 월드를 침공하거나 아니면 무슨 악의가 있지 않고선 이런─."

"침공…… 하하! 책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것 같네요 여제님은……!"

빵 터지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모양새에 시그너스의 고운 얼굴이 찌푸려졌다. 평정심을 잃게 만드려는 도발인 걸 알지만 정말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을 긁는다. 그럼 대체 뭐내고 쏘아붙이려는 입술이 열리기도 전에 뱀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후훗, 겨우 그딴 이유로 이 일을 벌일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 대체 왜─!"

블랙윙만 해도 이가 갈리는데 이젠 어디 듣도보도 못한 다른 차원의 종족에게 마을을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아주 달려드려는 지그문트를 루미너스가 붙잡았다. 좀 진정해라. 이거 놔요! 적개심이 차오르며 터지기 직전인 장내의 분위기를 본 이데아는 깔끔히 구멍을 뚫었다.

"당신들과, 다를 바 없답니다."

"…… 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저희와 마주 대하고, 그 이전에 왜 연합을 만들어 행동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떠올려보시죠. 특히 시그너스 여제님이라면 더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사람마다 이유는 달랐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메이플 월드를 위해, 이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위협하는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에게 대항하고, 나아가 평화를 되찾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 한 순간도 그것을 잊은 적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의 의미를 서서히 깨달은 시그너스는 숨이 턱턱 막혀옴을 느꼈다.

"저희 역시, 저희의 세계 그란디스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비인간적으로만 보였던 그녀의 눈이 그 순간 너무나 익숙하게 보였다. 어떤 일에도 꺾이지도, 흠집나지도 않을만큼 견고한 빛을 자랑하며 인간성을 완전히 뒤덮어버린 그것은 - 광기에 가까운 신념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평화를 되찾기 위해─ 차원을 넘어 이곳 메이플 월드까지 왔답니다."

그들은 악이 아니었다.

그저 손 안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또다른 정의일 뿐이다.

충격에 휩싸인 회의장을 한 차례 둘러본 이데아는 그들이 더 정신을 못 차리도록 다른 폭탄들을 꺼내들었다.

"저희의 세계 그란디스는 멸망을 목전에 둔 상황이랍니다. 거지같은 귀쟁이 놈들이 벌인 전쟁때문에 수많은 종족들이 사라졌고, 저희 노바족 역시 피해를 입어 수가 많이 줄어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은 불과 몇 년 전. 꺼질 기지가 보이지 않던 전화(戰火)가 막 꺼지며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또다른 위험이 있음을 알았다.

"귀쟁이 놈들에게 죽은 종족이 너무 많았습니다. 거기다 어이없게 귀쟁이 본인들도 둘로 찢어져 전쟁 전후로 내전을 벌이다 자멸해서, 결과적으로 저희 세계에 살아남은 지성체는 정말 적은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그게 왜……?"

"왜 이게 문제냐고요? 그야 세계를 지탱하는 건 그 세계를 살아가는 지성체들이니까요!"

물론 세계를 지탱하는 또다른 기둥인 초월자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사실 이쪽도 멀쩡하지 않은 건 똑같으니까. 크로니카는 제른 다르모어에게 힘을 뺏겨 지금은 풀려났어도 정상은 아니고, 제른 다르모어는 생략, 멀쩡한 건 아이오나뿐인데 이쪽은 행방불명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세계가 더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지는 중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란디스와 메이플 월드는 합쳐지고 있었다. 단순히 초월자의 빈자리가 생겼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란디스가 더 유지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생명의 오버시어가 손을 써서 두 세계의 융합이 더 진행되지는 않지만, 그 힘이 무한하지는 않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시간의 오버시어를 깨워 이를 해결해야 한다.

"예전에 이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텐데요? 거대한 전쟁이 일어나 한 번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으며 세계의 존속마저 위태로워진 적이."

"─그래, 검은 마법사 놈이 벌인 짓이 그랬지."

그녀의 말에 답해준 루미너스는 작게 이를 갈았다. 과거 검은 마법사가 벌인 무분별한 살생이 이런 이유로 한 짓이었다니.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지성체)이 죽으면 확실히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숫자가 죽은 그란디스가 무너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보면.

"이미 저희 세계와 이곳과의 경계는 꽤 부서져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저희를 배신하고 도망친 놈이 손쉽게 여기에 왔었고, 아까 전에 소년 분이 말한 루타비스의 차원의 문도 그런 이유로 생긴 거죠."

디멘션 게이트는 제른 다르모어가 크로니카의 힘을 흡수하며 차원의 균형이 무너져서 생긴 거다. 하지만 어차피 섞어서 구라쳐도 눈치 못채니까 그녀는 여기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실제로 자연스러운 흐름에 누구도 의심가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이 일에 모든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저희의 세계 그란디스, 살아남은 종족, 겨우 전쟁이 끝나며 찾아온 평화까지 모두─ 지키기 위해서."

그러니 물러날 거라는 생각따위 뇌에서 한 조각도 남김없이 지워버리는게 좋을 겁니다. 저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나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거니까요.

이건 그런 싸움이에요.

각자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이 전부 걸린, 놓아서도 안 되고 놓을 수도 없는.

***

마침내 이데아의 말이 끝맺어지며 회의장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의 머릿속이 형언할 수 없을만큼 복잡해졌다는 것만은 동일했다.

'이건,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 다른 차원의 종족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이유로 메이플 월드에 왔다니.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니 이 정도로 절박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종족 단위로, 다른 지역이나 나라도 아닌 차원을 건너올 리 없었다. 자신들의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에 자리잡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해야하지? 이제 그만해달라던가 하는 말은 완전히 의미없다. 그녀의 말대로 이 일엔 그들의 '모든 것'이 걸려있으니까. 타협이나 회유따위 될 리가 없고 되서도 안되는 일이란 말이다.

'거기다 저 여자.'

노바족의 수호자라고 했다. 그 직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 대표로 나서도 될만큼 높으면서 단어로 추측컨데 뭔가를 지키는 자리겠지. 아마도 높은 확률도 그녀의 종족 노바족을.

전쟁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종족을 지키고, 전후에는 또다른 위험에 해결하기 위해 다른 세계에까지 가서 필사적으로 고군분투할 정도로 굳은 신념을 가진 그녀에게 설득의 여지가 있을까?

에반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보석같은 황록안을 힐끔 보았다. 없어. 전혀 없어.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내려던 에반은 아차하며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판단을 내리고 연합이 어떤 자세를 취할지 결정할 이는 그가 아니라 시그너스 여제였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여제가 있는 쪽을 보았다.

'…… 아. 저런.'

그녀 역시 엄청난 고뇌에 찬 얼굴이었다. 마침내 이유를 알았음에도 해결된 건 전혀 없고 - 정확히는 의문만 해결됐다 - 오히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알 수 없는 일거리만 한가득 풀어졌으니 그럴만 했다.

심지어 그녀는 딱히 짊어진 것도 없는 에반 자신과는 달리 무려 메이플 월드의 황제다. 그녀의 결정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리고 여파가 뒤따를텐데 당장 이 일에 대해 뭘 어떻게 정하는 건 무리다.

거기까지 생각한 에반이 '난 나중에 우두머리따위 절대 안되야 겠다'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무렵, 그래도 지금까지 좀 가만히 있던 미르가 예고없이 침묵을 깼다.

[근데 당신은 왜 거기 있어?]

"뭐가 말이냐."

"야 잠깐만 미르!"

[당신도 노바족이야? 아니면 그란디스의 다른 종족? 저들이 이러는 이유는 알겠는데 당신은 왜 그러는지 여전히 모르겠잖아.]

그것은 언뜻 뜬금없어 보였지만 굉장히 예리한 지적이었다. 용의 후예 - 노바족이 메이플 월드에까지 와서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충분히 설명되었다. 하지만 검호가 그들과 손을 잡고 일의 주축이 된 이유는 조금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 그렇네요! 당신은, 영웅이라고까지 불렸던 당신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제님 방금 삑사리,]

"조용히 해 미르."

분명 자신이 물어본 것이지만 상상을 초월한 무게의 대답에 기절하고 싶을만큼 고뇌해야했던 시그너스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저것 역시 반드시 알아야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고.

이대로 어영부영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검호는 속으로 실망하며 미르를 보았다.

"니 말대로 나는 노바족이 아니다."

[그럼 그란디스의 다른 종족?]

"난 인간이다…… 인간 사양이지."

[인간이면 그냥 인간이지 인간 사양은 또 뭐야? 좀 정확히 말할 수 없어?]

"아 미르 좀!"

진짜 쟤는 말을 너무 막 하는데. 아직 어려서 개념이 없는 건가. 잘 생각해보니 미르 나이가 알에서 깨어난 걸 기준으로 5살이 안 됐다. 미르가 막말하는 이유:어려서 개념이 없음으로 결론내린 검호는 팔짱을 꼈다.

"그란디스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메이플 월드의 사람도 아니란 거다."

"뭣……?!"

"그게 무슨 말이야 검호!?"

예상치 못한 사실에 크게 당황하는 아란과 루미너스의 모습에 검호는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같은 영웅이면서 저 사실을 몰랐다는 것에 되려 당황했다.

[뭐야 당신들 저거 몰랐어?]

"알았을 리가 없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왜? 같은 동료잖아?]

"동료……? 내 동료는 한 명 뿐이었다만."

그리고 그건 저들이 아니야. 영웅과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었음에도 아란과 루미너스 둘 다 따지지 못했다. 그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방금 안 입장에서 계속 동료라고 하는 건 웃기지도 않는다. 거기다 검호가 유독 영웅중에서 겉돌았던 것도 사실이고. 반면 지금은 그나마 그의 동료라고 칭할 수 있게 된 은월은 두 사람의 처참한 표정에 씁쓸함을 느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알려하지 않았고, 그 역시 우리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거리를 벌렸다. 그 결과가 이리 된 것은 둘 모두의 잘못이지 어느 한 쪽만의 잘못이 아니다.

한편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명뿐인 동료라는 말에 에반이 조심스레 물었다.

"자, 잠깐만요 스승님. 스승님의 한 명뿐인 동료라는 사람이 혹시 파픈스타인가요?"

"……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역시 맞았군요!"

이전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군단장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대놓고 시인하는 그의 모습에 다시 불처럼 들고 일어나려는 아란과 루미너스를 본 이데아는 더 이어지면 곤란하다고 판단하며 여기서 끊기로 했다.

"잠시만요 소년 분. 파픈스타 님과 그에 대한 관계에 대해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건 역사서 따위에서 절대 나올 리 없는데."

"그─건 롯뜨 씨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예전에 그를 만났던 곳에 갔다가 들었어요. 파픈스타라는 사람이 롯뜨 씨를 시켜 스승님에게 '그란디스에 오지마'라는 말을 전했었다고, 그때 우연히 두 분의 대화를 들은 분께서 알려주셨죠."

당사자인 두 사람은 저 말을 했던 때를 떠올리며 약간씩 인상을 썼다. 검호는 '그때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주변에 있었나?' 라는 생각을, 세피로트는 '주변에 누가 있는 건 알았지만 그 사소한 대화를 어떻게 지금까지 다 기억하냐…….' 는 푸념을 했다.

그리고 정보가 새어나간 곳을 알아낸 이데아의 눈이 희번뜩하게 빛났다.

"아하~ '롯뜨한테서' 말이죠?"

"야 잠깐만 이데아 이건,"

"변명하지 마세요. 결국 당신때문에 꼬리 밟혔다는 뜻인데 뭘 잘했다고 입을 나불대는 겁니까."

"아니 그때 내가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

파지지직─! 그녀의 양 뿔에 스파크가 거칠게 튀었다. 하얀 미소 위로 선명하게 음영이 졌다.

"나중에, 돌아가서 마저 얘기합시다."

"…… 네."

그 광경에 연합측 이들은 저쪽의 서열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실제 무력은 둘째치고 일단 저놈이 제일 아래라는 건 확실하군. 초반에 보였던 위협적인 모습따위 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시그너스는 더 말이 샛길로 빠지기 전에 본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서 당신이 용의 후예 - 노바족과 함께하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당신의 세계도 멸망의 위기입니까?"

"그건 아니다."

생명의 오버시어가 말하길, 지구를 담당하고 있는 오버시어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게 방치할만큼 허술한 놈이 아니란다. 지구에도 오버시어가 있다는 걸 알고 좌절했지만 그놈까지 만날 일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렇다면 어째서입니까. 제대로 대답해보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예?"

검호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딱히 대답해야할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그러니 묻지 마라."

어찌됐든 지금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에 있는 건 검호 측이다. 저들에게 시시콜콜 다 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대로 해결되는 것 없이 끝나버릴 낌새에 시그너스는 초조함을 못 참고 왈칵 외쳐버렸다.

"그, 대답해주시지 않으면 봉인석은 내주지 않을 겁니다!"

"어머 그건 대답만 하면 봉인석을 준다는 건가요? 그럼 바로 알려줄 수 있는데."

"이데아."

"왜요? 겨우 그거 알려주고 에레브의 봉인석을 얻는 거면 엄청 싸게 먹히는 거잖아요."

여기서 끝나면 저희로서도 베스트고. 뒤늦게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시그너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리고 아까까지 대답해주지 않는다면서 봉인석이 걸려있다는 말에 답하려는 검호의 모습에 데몬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 작품 후기 ==========

"잠시, 멈춰주십시오."

"뭡니까."

"저희가 봉인석을 당신들에게 내주는 대신, 당신들은 저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주기로 했고 또 그 가치는 저희가 판단할 거라고 한 걸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야 물론이죠. 협상을 시작하자마자 여제님이 자신있게 말했잖습니까."

"저희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보입니다."

"야 너─!!"

격분하며 달려드는 아란을 막은 데몬은 마저 말을 이었다.

"보통의 정보가 아닌, 가치있는 정보죠."

"알고 있습니다. 현 연합의 상황상 저희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유용하게 쓸 수 있는게 중요 정보일테니까요."

"당신들이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 역시 중요 정보였습니다."

이유를 알게 되면 설득이든 회유든 뭘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알고나니 그런 걸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또다른 중요 정보, 검호 당신이 이 일을 하는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앞서 얻은 정보가 쓸모없어졌으니까요."

"기껏 알려줬는데 못 써먹는게 아니라요?"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빛 좋은 개살구인 게 사실이죠. 그러니 그건 반품하고 먹을 수 있는 살구를 원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럴싸한 궤변을 잘도 늘어놓는 데몬의 모습에 이데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큭큭 웃음을 흘렸다. 아, 이 사람도 꽤 재밌네.

"또 하나 더, 아까 여제님이 여러분에게 물었던 건 '당신들이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였습니다. 여기에 '당신들'에는 당연히 용의 후예 - 노바족뿐만 아니라 검호 당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래 한 세트로 대답해야하는 질문이었단 말이죠. 둘을 따로 분리하지 마십시오."

"푸훕! 아, 진짜 웃기네요 이거! 하하하!"

"그만 좀 웃어라 이데아."

"저 마족, 풉, 너무 재밌어요! 정치판에서 만났으면 진짜 괜찮은 싸움 했을텐데!"

"전 지휘관이지 정치인이 아니라 만약 같은 종족이었더라도 만날 일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아하하하……!"

기어코 테이블을 두들기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카이저만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이데아님 진정하세요.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요. 후흐, 냅둬줘요 카이저. 간만에 좀 웃게.

다행히 데몬의 딴죽이 더 들어가지 않아 금방 진정한 이데아는 눈꼬리에 찔끔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원래 함께 해야했던 대답이라니 좀 전의 것과 합쳐서 해드리죠."

정말이냐? 저렇게 원하는데 해주죠 뭐. 까짓것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고. 너무 시원스러운 승낙에 검호는 미간을 좁혔고, 이에 이데아는 짓궃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저쪽이 웃기게 우겼으니까 이쪽도 그에 걸맞게 똑같이 답변해주면 되요. 아, 그러면 되겠군.

눈빛만으로 오간 무언의 대화를 모르는 시그너스는 간신히 수습됐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래. 내가 이들과 협력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를 대답해주면 되는 건가."

"예. 오직 사실만을 말해주세요."

사실, 사실만 말이지.

그는 말을 썩 잘하지 않는다. 이데아처럼 무슨 어조에 미묘한 악센트를 줘서 상대방 감정까지 들었다 놓았다 하는 신박한 재주따위 없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상대방의 속을 터뜨릴 수 있는지는 잘 안다.

워낙 많이 당해봐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저놈이 알고 있으니까 저놈한테 물어봐라."

검호는 손가락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뜬금없이 손가락질과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이 - 데몬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제가 뭘 안다는 겁니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

"그걸 제가 어떻게 알죠."

"옛날에 너랑 대화하다 말해준 적 있다."

데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와 만난 횟수부터 한 두 번이 아닌데다 그런 뉘앙스의 대화가 있던 적은 없는데?

"그게, 언젭니까."

"8백년 전인데 구체적인 날은 니가 기억해내야지."

"!?!?!?"

의미불명으로 망가지는 데몬의 얼굴을 보며 검호는 피식피식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 진짜 이데아말대로 재밌네. 데미안 때도 그렇고 이런 거에 맛들이면 안되는데.

"그, 그게 뭡니까!? 전 분명 사실만 말해달라고……!"

"사실이지. 내가 저놈한테 그 이유를 말해줬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러니 저놈이 그걸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단지 너무 오래되서 기억 못할 수도 있어. 그 대화했던 게 8백 년 전이니까. 거기다 대화 주제도 이런 일따위가 아니라 딴 말하다가 튀어나온 거라서.

[아니 저 사람이 8백년 전 대화따윌 기억할 리가 없잖아!]

"왜 못합니까? 2년 전 우연히 지나가다 들은 대화를 죄다 기억하는 사람도 있는 판에."

그건 케리 아저씨의 기억력이 독보적인 거였다. 데몬의 머리도 절대 나쁜 편은 아니지만, 8백년 전 검호와의 대화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만큼 뛰어나진 않다. 그게 됐으면 마법사 했지.

점점 카오스가 되어가는 상황에 루미너스는 붉은 왼쪽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데몬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이 인간은 또 왜?

"나중에 두개골 열테니 준비나 해라."

"잠깐만요. 무슨 뜻입니까."

"니놈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거란 기대따위 안 하니 직접 뇌를 휘저어야지. 8백 년 전이라니 꽤 많이 해야겠어. 각오하도록."

"누가 당신한테 기억 마법 맞긴답니까? 당신따위에게 맞기느니 차라리 에반 군에게 부탁하고 맙니다."

"죄송해요 데몬 씨. 전 그 정도로 기억 마법에 소양이 있지 않아요."

기억을 비롯한 사람의 정신을 다루는 마법은 고급에 속해있다. 에반으로서는 잘못 썼다간 사람 백치로 만들기 딱 좋은 기억 마법을 미숙한 자신이 써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즉답한 거였지만 데몬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죄송하지만 나중에 협조해주세요 전 군단장 씨."

"…… 예 여제님."

어떻게든 담당 마법사만은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 데몬은 협상이 끝나는대로 하인즈를 붙잡기로 결심했다.

***

더 이어지지만 이 화에선 여기서 끊습니다. 이상한 부분에서 끊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이보다 더 쓰고 끊으려 했는데 이상하게 써도 써도 원하는 지점까지 진행되지않고 용량이 마구 늘어나고(…) 독자분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여기서 컷하고 올립니다.

이번에 유독 늦은 이유는 그 뭐시냐…… 장학금 관련 일로 이래저래 바빴던 것도 있고…… 사실 간만에 라테일 복귀했는데 흑영 키우는게 너무 재밌어서 글을 거의 안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글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글에서 보석에 비유되는 눈은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보통은 그만큼 아름다운 눈이라서 보석에 비유하곤 하는데, 제 글에서 사람 눈이 보석에 비유된다는 건 그 사람이 보석처럼 '온기가 없고', '무기질적이다'는 걸 말하거든요. 대표적으로 페리도트같은 눈이라고 묘사된 이데아가 그 경우죠. 여러차례 이데아의 황록색 눈이 보석같다고 표현된 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신념을 위해 인간성을 많이 버린 사람이거든요.

@ERUDITO - 다음편 왔습니다!

@레볼레이션 - 전 파픈 했습니다! 그리고 표지로 쓴 팬아트들은 모두 제 뜰에 있습니다.

@검은짱돌 - 일리움과 아크는 살아있긴한데 출연은 안 할 거고, 윌은 군단장이니까 죽을 겁니다.

@리화앨리스 - 완결 낸 뒤에 생각해보겠습니다.

@카르옌 - 프라이쉬츠는 다른 곳에서 또 음모 진행중.

@뱅갈고양이 - 제른 다르모어가 생오버한테 씹뜯맛즐 당한 뒤 스펙터들+스펙터 시술 받은 하이레프들이 싹 다 사라져서 숫자가 팍 준 터라 우든 레프들은 이때가 기회다! 며 뛰쳐나와 남은 하이레프들과 2차 내전중입니다. 그리고 노바족은 뒤에서 둘을 부채질하며 꿀빠는 중.

@by상담사 - 그리고 온 다음화.

@emitenVan - 상상이상의 고퀄인데다 은근히 여성스러운 얼굴이라는 설정까지 멋지게 살려진 팬아트입니다! 현재 폰에 소장중!

@로퓔랜 - 저도 처음 이데아 쓸 때 이렇게까지 입체적인 캐릭터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ldh0720 - 언젠가 시간나면 써보죠. 예전에 투표로 올렸던 검호 이데아 데이트 외전이 이번에 검호와 다른 사람들이 입고나온 정장 사러 백화점가는 외전이거든요.

@디자울 - 세피로트는 기사직이라 튼튼합니다.

@Sisre - 해─탈.

@서월마을 - 나이먹고 겪은 것도 많으니까요.

@니벨샤니 - 초창기 퀄리티가 좀 거시기했는데 그때부터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쓰겠습니다. 코멘트 잘 받았어요!

@로렐라인 - 그리고 다가오는 발렌타인에는...?!

@그냥그렇지뭐 - 공개되려는 걸 이데아가 막았습니다.

@KnightDream - 집에 가즈아아아아!

@Ruzaki - 일단 이데아의 정치경력이 시그너스의 최소 2~3배 이상인데다 실무 능력은 더...

@빨간배관공 - 다음 화는 진짜 빨리 써볼게요...!

@Legendssj2 - 그리고 새해에도 연참은 없었다고 한다.

@얼음표정 - 영웅즈:슬슬 현실인정을 해가고 있는데 그러면서 하는 행동은 어째선지 과거와 비슷해 헷갈린다.

@미카츠키아이코 - 그렇게 잘 표현하는 건 아닙니다. 각 캐릭터들의 특정한 요소를 조금씩 부각시키며 오리지널 설정들을 덧붙여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요.

@랴누 - 새해 선물은 늦었지만! 잘 받으시길!

@mmo0522 - 이어진 새해 선물. 해피 뉴이어!(2월)

@개문 - 안 들켰습니다. 부서진 건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증거인멸.

@안재형 - 그러나 오폭 가능성 농후(...)

@sick한짜객군 - 그건 본인들이 거절할 걸요.

@wltns920 - 세피로트:난 저런 여자 전혀 취향이 아니야. 이데아:저런 바보따위와 엮지 말아주세요.

@sanarone -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단 낫겠죠.

@이름일껄 - 그래서 이데아가 칼같이 끊은 거. 그 부분은 진행됐다간 상처만 쑤셔지고 질질 끌려갈 가능성이 높아서.

@찬양천사 - (뜨끔!)

@Gaonnarrae - 슬슬 개학이라...(회피)

@리아카에린 - 장문의 코멘...! 압도적 감사...!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데아는 이 정도로 지분이 커질거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쓰면서 캐릭터의 분량이 늘었고, 그만큼 설정을 덧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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