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앎의 고통 --> 에반side.
협상을 가장한 폭풍이 지나간 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각자 바쁘게 움직였다.
먼저 여제님은 스승님과 용의 후예들에게 들은 사실들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합에 알릴지 나인하트 씨와 의논한 다음 발표했다. 그 중에 용의 후예의 정체가 다른 차원에서 온 노바족이란 종족이며, 자신들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메이플 월드에 왔다는 것이 있었는데 파란이 굉장히 일었다.
다만 그들에게 싸우고자 하는 마음, 적의는 없다는 부분은 좀 애매하게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미 저지른 일이 많아서 설득력이 없는데다 마지막에 엄청 화려하게 저지르고 가버려서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아 그런 거 같다. 대신 각 지역의 지휘부에 비밀리로 사실을 전달해 충돌자체를 줄이는 방식으로 갈 계획인 모양이다.
이 뒤로 아란 누나와 루미너스 씨는 다른 영웅분들과 함께 슬리피우드 아지트를 공략해 스승님이 말한 무언가를 가지러 갔다. 하인즈 님은 카이저 씨가 말한 메이플 월드의 상태에 대해 좀 알아보시려는 것 같았고…… 지그문트 씨는 레지스탕스 동료분들과 뭘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와 데몬 씨는─
"혹시나 싶어서 다시 묻습니다만, 다른 사람이랑 교체할 생각 없습니까?"
"없어요."
[마스터는 엄청 고집 세니까 그만하고 포기해.]
"하아아……."
데몬 씨는 4번째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스승님이 '검은 마법사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이유'를 알려면 슬리피우드 아지트에 있는 무언가를 가져오고, 또 페어리 퀸 아마란스 님께 물어보라고 하셨다. 아까도 말했듯 슬리피우드 아지트 쪽은 영웅분들이 조사하러 갔지만, 페어리 퀸께서는 소식을 들으신 후 '무엇을 알려드려야 하는지 알겠지만 지금은 저희 종족의 영역이 엉망이라 구와르 님이 마저 복구를 끝내시는 대로 돕겠습니다'고 하셔서 잠시 미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초월자에 대한 설명 역시 영웅분들이 바빠져서 나중에 조사가 끝나는 대로 알려주신단다.
그래서 그때까지 나와 데몬 씨는 잠시 다른 일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앞서 협상 중에 스승님이 언급하셨던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데몬 씨의 기억을 뒤지는 일이었다.
"에반. 당신 말고 유능한 모험가는 많지 않습니까. 왜 굳이 본인이 하겠다는 겁니까."
"저보다 강한 사람은 많지만, 저만큼 스승님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저라면 다른 사람이 놓칠 수 있는 것을 알아낼지도 모르잖아요?"
"예전에도 말했지만 과거 저와 그는 적이었습니다. 만남과 동시에 싸웠고, 그런 걸 봐봤자 딱히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하지만 스승님은 데몬 씨에게 말해줬다고 하셨는 걸요."
지나치기 쉽지만 스승님은 데몬 씨에게 과거 자신의 목적을 알려줬던 걸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말인 즉 스승님에게 있어 그 사실을 전달했던 순간이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는 뜻이며, 뒤집어 말하면 데몬 씨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적어도 흔히 있던 전투 중 하나는 아닐 거다.
"당신은 아직도 그를 믿는 겁니까."
"…… 네."
"왜죠? 그는 당신과 만났을 때는 물론, 당신에게 한 짓조차 기억 못하고 있었는데."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그게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지금은 그럭저럭 납득했다. 뭣보다 스승님도 뒤늦게 알고나서 굉장히 미안해 하셨고. 내 대답에 데몬 씨는 눈을 내리깔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그처럼 계속 믿어준다면 좋겠습니다만…… 무리겠지요."
"뭐가요?"
"알다시피 저는 과거 군단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8백여 년 전 기억을 본다는 건, 당연히 제가 군단장이었던 시절에 한 일들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 스승님의 목적을 들을 수 있는 기회라고만 생각해서 거기까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 당신이 저에게 호의적일 수 있는 건 제가 과거에 무슨 짓들을 했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게 되면 당신도 영웅들과 똑같이 저를 경멸하겠죠."
"그,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어립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그나마 그에 대해 아는 이라도 어린아이인 이상 제 기억은 정서상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냥 마스터한테 미움받기 싫다고 하지? 뭘 빙빙 돌려 말하는 거야?]
계속 듣던 미르가 톡 쏘아붙였다. 야 너 진짜! 나중에 집에 돌아가는 대로 엄마한테 부탁해서 예절교육 좀 받게 해야 하나, 협상때도 그렇고 얘는 막말이 너무 심하다. 그런데 데몬 씨는 되려 긍정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네?"
"과거에는 물론 지금 시대에도 제게 호의적인 이는 거의 없으니까요. 그래서 몇 안되게 저를 좋게 대해주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연합에서 데몬 씨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떠올랐다. 유용한 전력. 그러나 진정으로 신뢰한다고 묻는다면, 글쎄? 힘도, 지식도, 그 외의 능력들도 굉장히 뛰어나지만 전 군단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때문에 과거의 전력을 자세히 모르는 이들도 데몬 씨에게 일정이상 접근하지 않는다. 반대로 연합에서 가장 신뢰받는 영웅분들은 대놓고 데몬 씨를 경멸하고 혐오해 다른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그런 분위기가 옮아가고 있고.
"절대로 안 그럴 거에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 에반."
데몬 씨가 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덮었다.
"'절대'같은 말은 하지 마십시오."
대놓고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 바로 손을 떼어내려고 했는데, 머리위로 떨어지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럴 리 없다', '후회하지 않는다', '각오했다'같은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미래는,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요. 충고라기 보단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듯한 뉘앙스라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냐고 묻지도 못하고 천천히 손이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문득, 나는 아직도 데몬 씨가 검은 마법사를 배신한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전……!"
"마음같아선 여제님께 부탁해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 요청하고 싶지만, 이미 추가인원이 온 데다 당신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이가 없으니 안되겠죠."
영웅은 제 쪽에서 사절이고. 실제로 데몬 씨의 기억을 탐색하는데 영웅분들이 하는게 어떻냐는 말이 나왔었지만, 당사자의 격렬한 반대로 제외되고 - 그분들도 다른 할 일이 생겨 못하게 됐고 - 그 다음으로 적합한 사람이 나라서 이렇게 된 거다. 그리고 추가로 들어온 인원은 또 누구냐 하면─
"이제 준비 끝나셨습니까."
"예 끝났습니다."
지금까지 방 한 켠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제논이 조용히 물었다. 데몬 씨는 이불과 헤드부분에 마법진이 그려진 침대에 누웠다.
"수면제는 여기─"
"필요 없습니다. 졸리지 않아도 바로 잠드는 기술정도는 익히고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협상 이후 데몬 씨가 제 두개골을 따겠다며 벼르던 루미너스 씨를 극구 거부하며 대신 선택한 사람은 하인즈 님이었다. 다만 그분은 무너진 차원의 벽 수습과 기타 등등 여러 할 일들이 많으셔서 직접 오시진 않으셨고, 그 대신 주신 게 지금 데몬 씨가 누운 침대와 큰 전신 거울이었다. 이 침대 위에서 잠든 사람의 기억을 채집해 거울 속의 아공간에 형상화시키는 마법이라나. 하인즈님 굉장해.
"가능하다면 빨리 찾고 나오길 바랍니다. 제 기억은 오래 볼 게 못 되니 말입니다."
"열심히 노력할 거에요."
"당신은 에반을 잘 도와주세요."
데몬 씨는 먹에 물든 것처럼 새까맣게 변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진짜 빠르네. 누운 사람이 잠든 걸 감지했는지 침대와 이불에 그려진 마법진이 은은히 빛남과 동시에 거울 속에서 탁한 기류가 서서히 회오리쳤다.
[이제 들어가자!]
"아직 아니야. 채집된 기억이 정리되고 형상화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하셨어."
우리는 불규칙적으로 일렁이는 기류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인즈 님이 이 도구들을 주시면서 말씀하시길, 채집된 기억이 많고 격렬할수록 형상화 하는데 오래 걸린다고 한다. 데몬 씨는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니 오래 걸리는 이유는 기억이 격렬해서일 텐데…… 정말 과거에 무슨 일들을 겪었던 걸까.
수 십분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거울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
거울 안은 깜깜했다. 들어온 입구는 뒷편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내부는 굉장히 어두워 설마 아직도 안정이 덜 된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뭘 찾으란 거야.]
"아공간 속에 기억들이 제대로 형상화되면 그걸 찾는 걸 도와줄 안내자도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일단 그거부터 찾아볼까?"
[그 이전에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혹시 모릅니다. 어디 밀실같은 곳에 있었을 때의 기억일지─"
제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간이 요동치며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푸른색의 거대한 초승달이 떠올랐고, 물컹거리던 땅에는 단단한 석재 타일이 깔렸으며, 사방에는 뾰족하고 위압적인 느낌의 첨탑들이 솟구쳤다.
"여긴……?"
[어느 도시야?]
"제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도시들 중 이 풍경과 유사한 곳은 없습니다. 과거라는 특성상 현 시대엔 없어진 곳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보다는 마치……."
〈데미안? 어디 간 거야?〉
근처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긴 붉은색 머리카락에 박쥐날개를 가진 - 내가 알던 모습에서 10살 이상 어려보이는 데몬 씨가 거기 있었다.
"아, 데몬 씨!"
〈데미안!〉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자 어린 데몬 씨가 나를 통과하며 빠르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뭐야 이게?!
[여긴 그 사람의 기억 속이잖아. 저건 실체가 있는 게 아니야.]
"그, 그랬지 참."
"그보다 쫓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기억의 주체를 따라가야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는데."
"빨리 가자!"
나는 미르를 머리에 얹고 제논과 함께 어린 데몬 씨가 뛰어간 방향으로 달렸다. 첨탑이 가득한 거리를 가로지르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온갖 말들이 떨어졌다.
〈저거 그 반마족 아니야?〉
〈반쪽짜리 주제에 아직도 마스테리아에 살고 있었나?〉
〈저놈 아비도 미쳤지. 그렇게 강하면서 인간따위와 결혼해 애까지 만들다니.〉
〈피가 더러워 졌어.〉
떨어지는 말들 가운데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단어도 있었다. 마스테리아. 리엔에서 읽은 책 중 하나에서 봤던 마족들의 고향이라는 곳. 여기가 거기라니, 그럼 데몬 씨는 어릴 적에 여기서 살았다는 건가? 일단 저 말들을 한 이들이 누군지 확인해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어째선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첨탑에 난 창문 안쪽에서 조명을 등진 검은 실루엣들이 전부였다.
"사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풍경 전체를 사진 찍듯이 기억하기보단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기억하죠. 이 마도구로 형상화되는 기억도 마찬가지라고 하인즈 님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저들이 누군지 보다, 저들이 했던 말들을 더 가슴깊이 담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언뜻 무언가를 찾으며 거리를 달리는 걸로만 보이는 어린 데몬 씨는, 실제론 저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하나하나 듣고있었다는 거다. 그러는 사이에도 말들은 계속 이어졌다.
〈왜 반마족따위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건지.〉
〈저거 동생 놈은 인간이랑 다를 바도 없던데.〉
〈그래서 아까 하급 마족놈들에게 형편없이 끌려 가더만?〉
앞서 뛰어가던 어린 데몬 씨가 우뚝 멈추더니 잠깐 그러다 어딘가로 방향을 홱 틀었다. 첨탑들 사이로 난 은밀한 골목길을, 안 그래도 어두운데 너무 높은 탑들이 만들어낸 그림자때문에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그곳을 어린 데몬 씨는 아주 능숙하게 가로질러갔다. 어찌나 잘 뛰던지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무슨, 애가 이렇게 빨라……!"
[벌써 지친 거야 마스터?]
"너, 내 머리위에서 내려오고 그런 말 해!"
"그래도 이제 거의 도착한 걸로 보입니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다음은 니 엄마 차례야, 알아?!〉
〈인간 주제에 마스테리아에서 살 생각을 하다니.〉
〈분수를 알아야지!!〉
소리가 난 곳에는 푸른 피부의 여러 마족들과, 그 마족들에게 한 어린 아이가 맞고 있었다.
아이는 데몬 씨와 마찬가지로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그 광경을 눈에 담은 어린 데몬 씨가 이를 악다뭄과 동시에─ 전신이 검붉은 어둠에 뒤덮이며 살기와 분노에 물든 포효를 내질렀고, 그제서야 마족들은 어린 데몬 씨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너무 늦었다. 악마가 그들을 덮쳤다.
마족들이 끌려간 어둠 속에서 붉은색과 비명이 벽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온 사방에 마구 흩뿌려졌다.
"우웁……!"
"보기 안 좋으면 눈 가리세요."
[이미 늦었어 임마.]
어린 데몬 씨가 마족들을 골목길 안쪽으로 끌고 가 자세한 상황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을 타고 흐르는 피와 살을 헤집는 소리, 살려 달라는 비명이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 했다.
생명이 죽는 걸 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애초에 돼지 농장 출신인데 도축같은 걸 한 번도 본 적 없을 리 있나. 그러나 이건…… 돼지의 신음과 저들의 비명, 아프지 않도록 단번에 목을 치던 칼과 악의적으로 몸을 찢어가르는 손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람이 살해당하는 순간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데몬 씨의 과거가 좋지 않다는 건 짐작했지만 이런, 이럴 줄은! 그렇게 한참 눈과 귀를 막고 있던 중 어느 순간 소리가 멎었다.
〈데미안.〉
〈…… 형.〉
〈집에 가자.〉
다시 고개를 들자 찰팍거리는 젖은 발소리를 내며 골목에서 나오는 어린 데몬 씨가 보였다. 흰 윗옷은 시뻘겋게 물든 상태였고, 붉은 머리카락에서도 같은 색의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런 모습의 형에게 데몬 씨의 동생 - 데미안이라고 불린 아이는 스스럼없이 손을 잡았다.
〈응.〉
피투성이인 두 형제가 손을 맞잡고 가는 뒷모습을 끝으로 도시의 풍경이 무너져 내렸다. 공간은 다시 암흑천지로 변했다.
[엄청 살벌한 유년기를 보냈었구만 그 사람.]
"마스테리아에 대해선 그 존재나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거기다 같은 마족 혼혈이면서 형제끼리 능력차가 그 정도로 극단적이라니."
"…… 두 사람 다 아무렇지 않아?"
그런 걸 봤는데도 미르와 제논 둘 다 크게 충격받은 것 같지가 않다. 거의 패닉 상태가 됐던 내가 이상한 건가. 언제 줄줄 흘러내렸는지 모를 눈물콧물을 닦는 나를 두 사람은 조용히 보았다.
"저는 블랙윙에서 전투 데이터 축적을 위해 수많은 전투를 했었고, 기본 사고회로가 감정을 억누르다 보니 당신이 말한 정신적 충격은 거의 못 받았습니다. 그게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까?"
"쿨쩍, 좀, 조금 그랬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노력해보도록 하죠."
뭘 노력하겠다는 거야. 태클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얼굴을 닦느라 지저분해진 소매를 청결 마법으로 깨끗이 했다.
[으음, 마스터. 난 아주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닌데 뭐랄까, 마스터가 생각하는 그런 거하고는 좀 거리가 있어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에반, 드래곤은 인간과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뭐?"
"드래곤이 지성체인 건 맞지만 그 사고방식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 쪽에 훨씬 가깝습니다. 사자가 표범이 사슴을 잡아먹는 걸 본다 한들 잔인하다 느끼진 않죠."
"그런……."
종족이 다르면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걸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체감해본 건 처음이다. 그것도 항상 옆에 있어서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한 미르에 의해서 느껴볼 줄은 몰랐다.
[실망했어 마스터?]
"그건 아니야. 단지,"
까악! 뜬금없이 뒤쪽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데몬 씨의 기억 중 하나가 나타나는 건가 싶어 뒤를 돌아봤으나, 여전히 사방은 새카맿고 단지 검붉은 까마귀 한 마리만 덩그라니 있었다. 뭔가 싶어 다가갈까 망설일 때 까마귀가 부리를 열었다.
[안내 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주인의 기억을 훔쳐보다니, 무례하군.]
"어, 엉?"
[얼빠진 얼굴로 있지 말고 왜 여기에 왔는지나 말해라. 그래야 너희가 찾는 기억을 보여줄 수 있으니.]
까마귀는 아까 전에 언제 나타나나 투덜거렸던 기억의 안내자였다.
***
side out.
협상이후 영웅들은 시그너스와 함께 연합에 협상 내용을 적절히 걸러 발표한 뒤, 검호가 말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슬리피우드 아지트를 공략하는 역을 자처했다. 협상 이전부터 조사대와 함께 하던 일이었고, 겉으로 보기엔 용의 후예들에게 된통 당해 이참에 제대로 갚아주기 위해 작정하고 나서는 모양새였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아는 이들이 극소수 있었다.
"허, 허참."
"그렇게 된 거야. 그랬는데 연합원들에게 사실대로 다 알려줄 수 있을 리 없잖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사람이 그럴 줄이야."
테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간이 테이블에 쓰러지다시피 엎어졌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쿼터 엘프로 검은 마법사 시대부터 살아온 그는 협상의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었고, 슬리피우드 기지 공략에 배치된 김에 비밀리에 영웅들에게서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되었다.
"당신은 뭐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메이플 아일랜드가 쪼개졌다고 확인하러 갔을 때부터? 검호 그 사람, 거기서 검은 마법사와 싸운 뒤에 중상입은 상태로 거기 촌장한테 엄청 사과했다더라고. 피 철철 흘리면서 '나중에 반드시 복구해주겠습니다'고 꼭꼭 약속까지 한 뒤에 돌아가서 촌장이 엄청 잘 기억하고 있더라."
"…… 아 그거."
"그 뒤로 무슨 관련이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발생했던 녹빛 파도? 기적이 섬을 복원시켜줘서 약속은 지켜진 셈이 됐지."
테스가 말한 녹빛 파도에 대해선 연합 측에서도 당연히 조사를 하려 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마족의 이동과 슬리피우드 기지 발견, 뒤이은 용의 후예와의 협상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단서가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메르세데스가 물었다.
"그가 촌장에게 사과를 해서 이상하게 느꼈다고?"
"아니. 사과는 둘째치고 파괴 범위가 섬의 반 밖에 안되는데다 그마저도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쪼개 놓아 피해가 적었다는 걸 알고 나서였어. 이 사람 처음부터 인명피해 안 나게 하려고 안간힘 다 썼다는 뜻이잖아."
정말로 저쪽으로 전향했다면 그런 거에 신경쓸 리가 없다. 다른 일행들이 섬의 반을 완전히 박살냈다는 사실에 정신팔린 사이, 주민들의 증언과 파괴 흔적들을 대조해가며 전투의 흐름을 대략 유추해낸 뒤부터 그는 검호가 검은 마법사 측에 붙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에레브에서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 말이다.
"쯧, 거기다 초월자라니. 엄청 곤란해졌네."
"당신도 그에 대해 아는게 있나."
"당연히 있지. 몇 년을 살았는데."
영웅들처럼 힘을 길러 활약하진 않았어도 수 백 년씩이나 살아왔는데 보고들은 것들이 당연히 많을 수 밖에 없다.
"빛, 생명, 시간 세 개의 영역에 하나씩 존재하며 그 힘은 자연재해를 넘어 신에 가깝다. 시간의 여신이라 불리는 륀느와 검은 마법사가 초월자인 걸로 아는데 맞지?"
"맞다. 첨언하자면 초월자는 각 영역에 존재함으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
"진짜냐…… 난감하게 됐네. 근데 너 왜 나한테 반말이냐?"
"…… 실례했습니다."
"하하, 머리론 당신이 8백 살 넘은 사람인 걸 아는데 별로 그런 느낌이 안 들어서 그런 걸 거야."
긴 세월을 산 사람 특유의 위엄, 연륜같은 무거운 분위기는 커녕 비슷한 나이의 청년 같기만 해 무의식적으로 테스에게 말을 놓아버려 사과하는 루미너스의 모습에 아란은 낄낄 웃었다.
"굳이 나이를 내세우고 싶진 않으니 별로 상관없긴 한데 애들도 그러더니 이젠 니들도…… 하아."
"애들이라면 당신 일행인 모험가들을 말하는 거지?"
"그래. 이번에 시간의 신전 쪽으로 파견된 애들."
검은 마법사가 봉인에서 풀려났지만 본격적인 활동이 없어 왜 그런지 동태를 알기 위해 시그너스 여제는 크로스 헌터 중 일부와 시그너스 기사단 정예를 차출해 시간의 신전 조사를 지시했다. 그렇게 뽑힌 이들 중에 올리비아와 론도, 슈가도 있었다.
"지금 거기 장난 아니게 위험해졌을 텐데 괜찮을 련가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원래는 저희가 갔어야 했는데."
"아니 됐어. 그래도 제 몸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건사해올 애들이니까. 만약 검은 마법사가 작정하고 움직일 생각이면 시간의 신전은 옛 저녁에 맛이 갔겠지."
아직까지는 신관들이 신전에서 활보하고 있으므로 조사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신전에 이변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감지할 이들이 그곳의 신관들이니.
"그보다 아까 초월자에 대해 말하던 거 마저 해줄래? 나야 오래 살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다지만 너희는 어떻게 그걸 다 안 거야?"
"프리드가 륀느 여신에게 가서 알아 왔어."
"적을 상대하려면 당연히 그 적에 대해 알아야지."
과거 빅토리아 반도에서 검은 마법사와 싸움으로 그의 힘을 뼈저리게 맛보았던 영웅들은 자신들이 더 강해져야 함을 깨달은 동시에 대체 저자는 어째서 저리 강한가 의문을 가졌었고, 이를 해결해준 게 륀느 여신이었다. 당시 프리드는 시간 마법에 대한 단초를 얻기 위해 그녀에게 찾아갔었다가 그녀와 얘기하던 중 검은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역시 알게 되었다.
"륀느 여신님이…… 그분은 아직도 봉인된 상태지?"
"그래."
"미래를 보실 줄 아는 분이 어쩌다 그리 된 건지. 쯧, 상대가 검은 마법사였으니 어쩔 수 없었나."
"그건 아닙니다. 그분은 그저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없었던 것 뿐이니까요."
"허?"
그 옛날의 영웅들이 저 생각을 안 했을 리 없다. 여신이라고 불리며 검은 마법사와 동급의 초월자인 륀느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녀는 1초의 망설임없이 거부했다. 자신의 미래는 태어남과 동시에 확정되었으며 그것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에게 봉인되어 힘을 빼앗기는 것까지 모두 정해진 미래라고 말이다.
"…… 그러면 조사대가 거기서 봉인된 륀느 여신님을 찾아도 의미가 없다는 뜻이네."
"그런 셈이죠."
"그거 여제님께 알려드렸냐?"
침묵. 루미너스는 물론 두 여자까지 나란히 합죽이가 되는 단합력에 테스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초월자에 대한 설명까지 미뤄두고 여기에 급히 내려온 애들이 저런 세세한 얘기를 했을 리가 있나. 나중에 기사단원 하나 불러 전달 해라고 해야지.
타이밍 좋게 한 사람이 그들의 막사 입구를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결계 다 그려왔어─."
"벌, 써 끝난 거냐."
"세계 최고의 괴도인 이몸이 고작 결계 구조 보고 그리는 일따위 오래 걸릴 리 없잖아? 새로운 형태이긴 했지만 어려운 건 없었지."
팬텀은 들고 온 종이들을 루미너스에게 던졌다.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재빨리 낚아챈 루미너스는 팬텀을 노려보았다가 종이에 그려진 결계 구조 해석에 들어갔고, 그림 보는데 바쁜 그 대신 아란이 말했다.
"엄청 빨리 왔네.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보이는 대로 베끼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겹쳐져 있는 부분들 구분하는 게 더 번거로웠지."
그가 이곳에 오자마자 해야했던 일은 슬리피우드 아지트를 감추고 있는 결계의 구조를 보고 정확하게 그리는 거였다. 그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스틸 스킬'은 과거 검호가 '눈에 X-ray 달았냐?'고 놀랐을 만큼 통찰에 극대화된 기술이고, 이를 조금 달리 활용하면 지금처럼 복잡한 마법의 구조를 알아내는데 쓸 수도 있다.
물론 보는 것과 별개로 해석은 본인의 역량이 부족하면 무리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 하면 될 일이다. 뻥뻥 뚫린 지도를 온전하게 메꾸어 준 것만으로 그의 역할은 충분했다.
"그런데 나 오기 전에 무슨 얘기 중이었어? 아까 샌님 목소리가 떨리던데."
"신경 꺼라."
"뭔 일 있었던 모양이네."
'별 거 없었다'로 맞받아치지 않는 걸 보면. 거짓말 못하는 루미너스의 정직한 성격을 잘 아는 팬텀은 무슨 사고를 친 거냐는 뜻으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미간이 구겨진 루미너스보다 테스의 대답이 더 빨랐다.
"너희 급하게 여기로 오느라 여제님께 초월자에 대해 안 알려 드렸잖아. 막 시간의 신전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대가 파견되었는데 봉인된 여신님을 발견해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리지 않아서 나중에 기사 하나 부르려던 참이었어."
"아 그거? 내가 알려줬어."
"엉?"
"지, 진짜? 언제?"
슬리피우드에 오자마자 바로 결계 구조도 그리러 나갔으면서 말 전할 틈이 언제 있었다고. 팬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제님이 시간의 신전에 조사대를 보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봉인된 륀느 여신에 대한 게 생각나서 바로 알려줬지. 지금쯤 조사대에도 전달 됐을 거야."
"…… 그랬나."
"누구씨와는 다르게 말이지. 고맙게 생각하라고 샌님."
팬텀의 웃음이 짙어지는 것에 반비례해 루미너스의 얼굴은 더욱 험하게 구겨졌다. 테스는 분위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여기서 끊어야 겠다 생각하며 중재에 나섰다.
"그쯤 해둬 둘 다. 기싸움은 나중에 하고 당장 중요한 것만 정리하자고. 일단 이거 해석하고 파훼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빠르면 내일, 못해도 3일 안에 가능합니다."
"그렇게 빨라?"
"실제 결계 구조가 이 그림과 같다는 전제하에 얘깁니다."
좀도둑 니놈이 제대로 그렸다면 말이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깔려있는 도발에 웃고있는 팬텀의 얼굴이 살짝 금이 갔다.
"두말할 소릴. 당연히 완벽하게 그렸으니까 늦지나 말라고."
"앞서 왔을 때 일부 해석해 뒀는데 늦을 리가."
둘 몸 위로 마력과 기세가 스산하게 일어나며 허공에 부딪혔다. 아직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정도의 미풍밖에 일지 않았지만 더 심해지면 막사 안에 폭풍이 불지도 모른다. 애써 중재하려 했던 테스가 다시 나서야하나 망설이는 사이 아란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해 둘 다!"
새끼고양이 물어가는 어미고양이마냥 두 남자의 목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올린 그녀는 물리적으로 둘을 떨어뜨렸다. 외부인도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할 일도 많은데 이럴 시간 없다 같은 타박은 덤이다. 그 익숙한 중재(물리)에 테스는 반쯤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메르세데스에게 물었다.
"너희 의외로 사이 나빴던 거냐?"
"저 둘만 유독 안 좋은 거야. 그래서 옛날엔 프리드가 주로 말렸어."
"리더 말은 또 잘 들었나 보네."
"프리드가 평소엔 웃으며 말리긴 했는데, 수틀리면 지팡이로 벼락을 뿌렸거든."
화내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프리드였지. 테스는 프리드가 리더를 맡은 이유가 한 명 한 명 개성넘치는 이 영웅 집단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검호 그 양반은 강하긴 한데 저 둘이 싸워도 말리긴 커녕 방치해두고 쓰러질 때까지 구경만 할 것 같아.
"어떻게 알았어?"
"응?"
"검호 그는 저 둘이 싸우든 말든 신경 끄고 언제 끝나나 기다리기만 했거든. 그것도 어느새 싸움 범위 밖으로 슥 빠져나가서."
"하, 하."
"말리다 지친 프리드가 도와달라고 해야 겨우 움직였지."
"다른 사람은 안 도와주든?"
"아란도 본격적으로 싸운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냅두자는 주의라서."
마냥 호탕한 여전사처럼 보이는 그녀지만 한 편으론 굉장히 냉정해서 저런 소소한 신경전이나 말싸움따윈 직접 나서면서까지 말릴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말려봤자 시간 지나면 또 으르렁거릴게 뻔하니까. 일일이 나서는 건 기력소모일 뿐이니 좀 위험하다 싶은 것만 막고 나머지는 방치하자고 결론내린 것이다.
테스는 새삼 프리드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군단장만 콩가루인 줄 알았는데 영웅도 콩가루였다니. 사실 콩가루까진 아니지만 이렇게 단합 안되는 이들일 줄 몰랐다. 용케 그 멤버로 세상을 구했구나. 그리고 제대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이놈들을 중재하고 이끌며 검은 마법사까지 봉인한 프리드에게 경의을 표했다. 어린 나이에 진짜 용썼다.
"아무도 안 도와준 건 아니거든?!"
"니가 걔 도왔었어?"
"나도 있었고, 다른 사람도─ 어?"
"다른 사람? 누구?"
소리치던 메르세데스의 눈이 흐려졌다. 누구였지? 프리드와 함께 사이 나쁜 둘을 묵묵히 말려주던 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아프리엔 말이야!"
"드래곤이랑 마스터가 쌍으로 고생했던 거냐……."
참 아프리엔이었지. 왜 바로 못 떠올린 거지. 짜게 식은 테스의 눈을 애써 피하며 메르세데스는 괜히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그런데 당신은 왠지 검호, 그에 대해 좀 아는 것 같은데 안면이라도 있어?"
"안면은 있지만 옛날에 몇 번 구해졌던 게 전부야."
그 사람은 나와 만났다는 것도 모를 걸.
테스가 처음 검호를 만났던 계기는 당시 그가 살던 마을을 군단장 구와르가 습격해서였다. 수많은 타락한 정령들로 만들어진 산만한 크기의 -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산만한 - 숲거인을 홀로 무찔렀던 검호는 직후 쉬지도 않고 전투의 여파로 무너진 건물에 깔려버린 그를 구해주었고, 그 뒤로도 복구 작업을 돕다 급히 떠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떠나야했던 이유는 그 무렵 아리아 여제가 군단장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때 산만큼 거대한 숲거인을 썰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했었기 때문에 테스는 메이플 아일랜드를 반토막낸 이로 검호를 유력하게 떠올렸다. 산도 베었었는데 섬이라고 못할까.
"왜? 몇 번이나 구해졌다며?"
"그가 구했던 사람이 몇인데 그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겠냐. 너흰 그때 직접 구했던 사람 다 기억해?"
"…… 아니."
"그럼 영웅 중에서 제일 사람을 많이 구한 그는 그 사람들을 반이라도 기억하고 있겠냐."
"무리지."
옛날엔 몇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영웅이 제 얼굴조차 기억 못하는 모습에 좀 실망하기도 했었다. 원체 평범한 인상이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그는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괜히 구해준 사람 기억했다가 언젠가 시체가 되어있는 걸 보면 충격받을 테니까. 오늘 살아도 내일 죽을 수 있는 때였고.'
실제론 좀 다른 이유였지만 당시 검호가 타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다는 건 맞았다. 테스는 초월자나 검호에 대해 더 듣고 싶었지만 셋이 아웅다웅 하느라 메르세데스 외엔 그와 대화할만한 이가 없어 막사를 나가야 했고, 아란은 팬텀에게 루미너스가 결계 구조도를 완전히 해석할 때까지 그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라는 당부(를 가장한 협박)하는 것으로 둘의 기싸움을 끝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루미너스는 조사단의 마법사들과 함께 슬리피우드 결계 해제에 들어갔다.
"하루면 된다더니……?"
"닥쳐라. 니놈이 잘못 그린 부분만 아니었으면 어제 끝났다."
"하아? 난 제대로 그렸거든?"
"내 앞에서 마법을 논할거면 최소한 대마법사는 되고 말해라."
루미너스는 밤샘으로 충혈되어 시뻘건 빛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팬텀을 노려보았다. 살의에 가까운 짜증이 여력한 그 눈빛에 팬텀은 여느 때처럼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최소한, 마법에 있어서 그보다 루미너스가 윗줄에 있는 건 사실이며 무엇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종족의, 심지어 다른 차원의 마법이니 몰라서 실수할 수 있는 건 충분히 이해하니까 괜히 실수 안 했다고 뻗대지 마라. 하루가 더 걸린 이유가 니놈이 틀리게 그린 부분 때문이니까."
…… 그리고 완곡하게 표현할 줄도 모른다. 팬텀의 이마에 혈관이 빠직, 솟아오르는 걸 루미너스보다 더 빨리 캐치해낸 아란은 재빨리 그를 붙잡아 사람들 뒤쪽으로 끌고 갔다. 이거 놔!! 안돼. 이제 본격적으로 저 기지에 들어갈 건데 쌈박질하게 냅둘 것 같아? 소리치려는 입까지 막은 아란은 이제 됐다고 루미너스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녀의 싸인에 루미너스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결계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일대에 실처럼 가느다란 형태의 마력이 퍼졌다. 무수히 뽑아져 나온 마력의 실 다발은 천이 직조되듯 서로 엮이며 보이지 않는 평범한 늪지로 보이는 이곳을 반구 형태로 감쌌고, 그대로 파고들어 무언가를 분리했다.
후우웅─ 엔진이 꺼져가는 소리가 울리며 일대에 끼어 있던 안개가 사라졌고, 늪지 한복판에 큰 고목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성공…… 한 거야?"
"후우, 그래."
"저거 하나밖에 안 나타났는데?"
"아마 저게 기지로 들어가는 입구일 거다."
루미너스는 숨을 몇 번 고른 뒤 마법으로 감춰져 있던 고목에 다가갔다. 육안으론 그저 죽은 나무로 밖에 안 보였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옷 아래로 소름이 돋을 만큼 농밀한 힘이 느껴졌다. 고목의 안쪽, 지하에서부터 미증유의 힘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건 마력이라기 보단 마치…… 하지만 내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르다. 뭔가에 의해 변질된 것 같은데.'
결계의 역할은 기지를 감추는 것 뿐만 아니라 이 힘을 숨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며 루미너스는 빛을 밝힌 샤이닝로드를 들고 고목 밑둥에 난 큼직한 구멍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 그를 메르세데스와 테스, 조사대원들이 뒤따라 가려 했는데 다음 순간 루미너스의 신형이 훅 사라졌다.
"루미너스!!"
"젠장 함정인가?!"
테스가 조사대원들에게 더 오지 말라고 제지하는 사이 메르세데스는 재빨리 정령들을 불러내 몸에 두르며 고목나무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법으로 몸을 띄워 밖으로 나오던 루미너스와 부딪혔다. 크헉!
한 편의 시트콤에 가까운 참사에 테스는 물론이고 아란까지 벙찐 상태로 굳었고, 입이 막혀 있던 팬텀만 숨죽여 웃었다. 달려오던 메르세데스의 무릎에 이마를 가격당한 루미너스는 그녀의 어깨를 꽈아악 잡았다.
"메르, 세데스……!"
"미, 미안! 갑자기 사라져서 함정에 당한 줄 알았어!"
"구멍 안쪽이 바닥없이 뻥 뚫려 있어서 그대로 추락했던 거다."
"그게 함정 아니야?"
"아닐 거다. 놈들은 날개를 가진 종족이니까."
날개가 있는 입장에서 계단도 뭣도 없이 수직으로 뻥 뚫린 구멍은 장애물이 아니라 좋은 통로일테니. 거기다 루미너스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그 통로가 의외로 상당히 넓고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도 없는 걸 알았다.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인원이 무사히 바닥까지 내려가려면 마법이나 정령을 쓰거나 로프 사다리같은 걸 설치해야 할 거다."
"로프 사다리는 없습니다만……."
"가장 가까운 연합지부에 가서 받아오든가 근방의 마을에서 구해와라. 그래도 부족하면 만들어야 할 거다."
조사대의 마법사들은 방금 루미너스와 함께 결계를 해제하는데 마력을 대부분 써서 이들을 전부 아래까지 옮길 수 없다. 포션으로 회복한다 해도 바닥까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만큼 무턱대고 사람을 옮길 수 없기에 조사대 대장은 알겠다고 답하며 발이 빠른 대원들을 차출해 마을에 보냈다.
"우리는 미리 내려가서 살펴보고 오도록 하지."
"안 쉬고 바로 움직여도 됩니까?"
"이 정도쯤은 괜찮다. 남은 시간동안 가만히 있느니 아래쪽이 어떤지 보고 오는 게 낫지."
포션 하나를 입에 털어 넣은 루미너스는 치유 마법으로 부은 이마를 가라앉혔다.
"메르세데스. 비상시 지상으로 보낼 연락책으로 사용하게 정령 하나를 빌려줄 수 있나."
"알았어."
그녀는 소환해두었던 정령 중 하나를 루미너스에게 붙여주었다. 바람의 정령이 그의 옷장식에 매달렸다.
"그리고 아란이랑 좀도둑. 너희는 나와 함께 바닥까지 내려간다."
"메르는?"
"한 명쯤은 지상에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남아야지. 특히 그녀는 마법없이 비행이 가능하니 나중에 조사대가 사다리로 내려올 때 만약의 상황이 발생할 시 구조하는 담당으로도 적격이다."
혹여나 방금 전의 자신처럼 누군가 떨어질 경우 재빨리 낚아챌 역이란 말이다. 이유를 납득한 두 사람은 고목 안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 밑에 노바족 놈들이 있단 말이지?"
"그럴 거다. 다만……."
"다만?"
"…… 아니다. 그놈이 여기 있다면 확인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모르겠군."
팬텀은 루미너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짐작했지만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걸 말해버리면 시그너스 여제가 대외적으로 발표한 협상 결과 여럿이 거짓말인 게 들통난다. 대신 익숙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샌님, 본인은 물론이고 아란까지 들고 옮겨야 하는데 지친 상태로 괜찮겠어?"
"내가 왜 하냐. 니놈이 해라."
"뭐?"
"그림 잘못 그려 귀한 시간을 하루나 날려버렸으면 이런 일이라도 해서 만회해야지. 대마법사가 아니라고 이것마저 못한다고 할 거냐."
기껏 말머리 돌려주니까 이게. 시끄럽게 누가 해달라 했나. 살벌한 눈빛으로 오가는 대화까지 파악 못한 아란은 본인을 옮기는 역할을 전투적으로 미루려는 행태로 보고 맹수처럼 씨익 웃었다.
"다 됐고 그냥 둘 다 내 어깨에 들쳐 메고 그대로 뛰어내리면 안될까? 바닥까지 진짜 빠르게 내려갈 수 있을 거 같은데."
"…… 그건 거절."
"너 혼자면 몰라도 우린 그렇게 튼튼하지 않다."
"왜? 루미너스 너 꽤 힘 좋잖아."
"마법사치고 좋은 거지 전사만 할 것 같나."
그의 신체능력은 잘 쳐줘봤자 3차 전직 전사밖에 안된다. 물론 전사가 아닌 마법사가 이정도인 건 굉장하지만 전사 영웅인 아란에 비할 수는 없다.
페르소나를 고쳐쓰는 걸 끝으로 준비를 마친 팬텀은 케인을 스태프 형태로 바꾼 뒤 자신과 아란에게 부유 마법을 사용했다. 루미너스 역시 발 밑에 빛무리를 모아 몸을 띄우고 다시 고목나무 안쪽으로 들어갔다.
"금방 갔다 올 게 메르~!"
"모두 무사히 돌아와!"
"걱정 마 걱정 마~"
메르세데스에게 걱정어린 배웅을 받으며 세 사람은 바닥없는 구멍 아래로 뛰어들었다. 앞서 한 번 들어갔던 루미너스의 말대로 팬텀과 아란은 이 수직통로가 꽤나 깊다는 걸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이쯤 왔으니 저 위에는 들리지 않을 테고, 아까 샌님 니가 말하려던 거 혹시─"
"니 생각대로다. 아마 우리가 이 밑에서 상대할 적은 노바족이 아닐 거다."
"응? 무슨 소리야 그게?"
"협상에서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마족 군단이 이 기지를 습격하고 점령을 시도한 건 사실이다. 허나 왜 그랬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지."
그들은 많을 걸 알려줬지만 동시에 그것들로 많은 부분을 감췄다.
"추측컨데 그들은 왜 마족들이 하고많은 블랙윙 기지중 이곳을 습격했는지 알았을 거다."
"그렇다면……?"
"습격의 이유를 안다면 구슬릴 방법도 만들 수 있겠지."
이 아래에서 우리가 싸울 대상은 노바족과 손을 잡은 마족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팬텀과 아란은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미증유의 힘에 신경을 집중했고, 상당히 다르지만 저 힘이 과거 데몬과 마족 군단이 휘두르던 포스와 유사한 부분이 있음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검호side.
에레브의 봉인석까지 회수함으로 드디어 모든 봉인석이 손에 들어왔다. 이제 이걸 초월석을 이용해 하나로 만들 차례였는데 그러지 못했다.
"야! 인간적으로 그 짓까지 해가며 활약해줬는데 바로 다음 일 시키지 말지!?"
라고 키네시스가 격렬히 항의하며 휴식을 주장해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쉬게 해줘야 했다. 솔직히 키네시스의 명연기가 진짜 제대로 활약한 건 사실이었고, 사이키커도 별로 한 건 없었지만 트라우마가 들쑤셔져 정신이 안정될 때까지 움직일 수 없게 됐고. 초월석 가져오는데 가장 중요한 둘이 쉬게 되니 봉인석을 하나로 만드는 것 역시 늦춰졌다.
다만 쉬는 건 어디까지나 이 둘이지 나는 쉴 수 없었다.
"소드댄서 님…… 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마음대로 해라."
르티에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우리의 협상을 가장한 습격은 여제가 어느정도 사실을 걸러냈지만 중요한 부분은 발표했고, 그 중에 내 정체가 과거 검은 마법사를 봉인했던 영웅 중의 한 명인 검호라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데 오랜만에 온 것 같은 레벤 광산 기지에는 르티에는 물론이고 예전에 내가 철수시켰던 다른 블랙윙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온다는 소식에 다 나온 것 같다.
"당신이 범상치 않은 사람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설마 영웅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알고나니 또 그렇게 놀랍지도 않더군요."
"그랬나."
"영웅이라 하니 오히려 지금까지 의문이었던 것들이 모두 납득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당신이 힘도, 지식도, 강대한 세력까지 가지고 있는 이유로 충분했습니다."
"하고싶은 말은 그걸로 전부인가."
"아니요. 가장 묻고 싶은 건 다른 겁니다."
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르티에가 정색하며 물었다.
"검은 마법사를 봉인한 영웅인 당신이, 왜 검은 마법사를 부활시키려는 블랙윙에 들어온 겁니까."
저들은 내 대답에 따라 날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반대라는 걸 알까. 그것도 단지 앞으로 진행할 계획들이 빡빡하니 블랙윙은 좀 있다 하자는, 숙제가 많으니 심부름은 나중에 하겠다는 어린애같은 이유로 말이다.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너희는 왜 검은 마법사를 부활시키려 했지?"
"질문으로 답하지 마시고─"
"오르카가 그를 부활시키는데 기여하면 나중에 그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식으로 말해줬나."
그 계집이 검은 마법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라 해 봤자 램프의 요정 정도밖에 안된다. 자신과 쌍둥이에게 육체를 주고, 장난감(인간) 실컷 가지고 놀 기회도 준 존재. 그게 오르카가 인식하는 검은 마법사의 전부다.
"그런 이유로……!"
"아니면 그가 만든다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었나. 지금의 세계보다 빛이 존재하는 완전한 신의 세계란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이쪽이 정답이었는지 르티에는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새삼 깨달은 거지만 이 세계에 와서 여자의 사나운 눈빛을 꽤 여러 번 받는 거 같다. 참 죄 많은 남자가 됐어 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지금 세상이 싫어서 8백 년 전 봉인된 존재를 깨우는데 열렬히 동참한 너희도 나 못지않게 이상하게 보이는데."
"글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분을 봉인한 당사자면서 이제 와서 다시 깨우려 했던 당신만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이베흐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이상하게 되긴 했지. 검은 마법사와 싸우기 직전 현재의 문 앞에서 필사적으로 결전의 의지를 다졌던 과거의 나한테 미래에 그 놈과 누가누가 먼저 세계를 멸망시키나 경쟁하게 될 거라고 말하면 죽어도 안 믿을 거다.
"옛날에 그놈이 나한테 자기와 함께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지."
""……?!""
"이 세상은 썩어빠졌고, 세상이 그 모양인 걸 나 덕에 알았으니 완전한 세계를 만드는데 동참하지 않겠냐…… 대충 그런 식으로 말했지."
당시엔 아는 게 없어서 마냥 개소리라고 여겼는데 후일 여러가지를 알고 나니 그때 검은 마법사가 한 말은 진짜, 정말 거짓말 하나 없이 사실 뿐이었다는 걸 알았다.
"아까 영웅이면서 왜 제 손으로 봉인한 그를 풀어주려 했냐고 물었나 르티에."
"그, 그렇습니다."
"간단하다. 나도 그놈이랑 똑같은 걸 하려 하거든."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말은. 간부들의 표정은 에레브와의 협상에서 노바족의 정체와 목적을 들은 직후의 연합측 이들 만큼이나 가관이 되었다.
"당신…… 영웅이잖아요?"
"그래서?"
"아니 한 때 세계를 구했던 당신이 왜 이제 와서 세계를 멸망시키려 합니까?"
"반대로 생각해봐라. 그랬던 내가 직접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세계가 썩어빠졌다고 말이다."
만약 제의를 받았을 때 지금만큼 많은 걸 알았다면 대답이 달랐을지도 모르지. 일부러 들으라고 흘린 말에 감전된 물고기 마냥 파들거리는 간부들 모양새가 굉장히 웃기다. 근데 사실인 걸.
"엘레오노르."
"예, 예!?"
"시간의 신전에서 그놈이 앞으로 뭘 하겠다고 흘린 말같은 거 없었나?"
"그놈이라면 혹시, 프라이쉬츠 말입니까."
"그래 그놈."
하필 그녀를 콕 찝은 건 그녀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에반 급 재능은 아니지만 한 때 엘나스 전직관이기도 했던 그녀라면 뭔가 사소한 거라도 그놈이 하려는 일을 주워듣고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갑자기 나 한테 지목받아 당황하던 그녀는 빠르게 기억을 되짚고 있는지 상념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런 엘레오노르를 냅두고 나는 다시 르티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영웅이라는 사실에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의심스러워져 이렇게 모인 것 같은데, 그래도 모이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은 건 잘했다. 현명한 선택이었어."
"무슨 말입니까."
"만약 멋모르고 기습따윌 했다면─"
콰지지직……!! 내 발아래를 중심으로 바닥과 벽이 거미줄처럼 쫙쫙 갈라졌다. 금이 가진 않았지만 천장도 흔들리며 흙먼지가 파스스 떨어졌다.
"팔다리를 모조리 비틀어버렸을 거니까."
"……."
"그래도 내가 의심스럽고, 불만이면 다른 군단장한테 가도 좋다."
간다 해서 좋은 꼴을 보긴 힘들겠지만. 돌거인 다고쓰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협박, 하는, 건가."
"아니. 사실만 말하는 거다."
옛날부터 군단장 중에 제 부하 아끼던 놈은 한 명도 없었거든. 어둠의 힘에 물든 몬스터 군단을 이끌던 이들은 물론이고 자신만의 군단을 이끌던 이들도 말이다. 애초에 부하들이 죄다 언데드인 힐라는 물론 군단이 몬스터로 화한 백성들이던 반 레온도 복수에 눈이 멀었었고, 구와르는 검은 마법사의 이상에 따랐을 만큼 미쳐있어 타락한 정령들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다. 아카이럼은 자기 부하를 미끼로 써먹던 놈이고.
데몬은 어땠냐고? 생각해봐라. 그때 그놈 군단은 날개가 있는 상급 마족들이었는데 정작 그놈은 반마족이다. 아무리 약육강식을 외치는 마족이지라만 그렇게 천대시 했던 반마족을 우두머리로 따르는데 거부감이 없었을까? 거기다 당시 메이플 월드엔 이주한 마족들이 있긴 했어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상급 마족을 구해왔지?
답은 간단하다. 데몬은 엄청나게 강해진 뒤 검은 마법사 아래에 들어가고, 그의 뜻을 펼치는데 강력한 군단이 필요해지니까 마스테리아에 쳐들어가 상급 마족들을 아주 밟아버리고 부하로 끌고 온 거다. 유용한 전력인 건 맞지만 옛날에 자기를 차별했던 마족 놈들을 잘 대해줬을 리가. 진심으로 따르는 마스테마같은 애들을 빼면 진짜 막 굴렸다.
"특히 프라이쉬츠에겐 가지 말라고 조언해주지."
"그자는 또 왜……."
"그놈은 메이플 월드의, 아니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을 싫어하거든."
당장 필요하면 살려서 써먹지만 쓸모를 다하면 아무 망설임없이 죽인다. 토사구팽 그 자체를 몸소 실천하는 놈인데 그래도 가겠다면 말리지 않을 거다.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겠다는데 뭐.
"그그, 그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었어……?"
"그래도 무서운 놈이라는 건 알았구나."
이들이 시간의 신전에서 프라이쉬츠와 대면했을 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만 했다. 덜덜 떠는 프란시스를 보니 조금 안쓰러운 느낌도 들었다. 쟤가 간부들 중에서 유일하게 미성년자였지. 나중에 에델슈타인 기지 버릴 때 오르카랑 같이 버릴까.
"겔리메르. 프로젝트는 어디까지 진행됐지."
"미스틱 게이트 건때문에 늦춰졌지. 하지만 자네의 명령과 연합의 대처로 그걸 더 만들지는 않고, 다시 속도를 높이려고 하네."
"그럼 됐어. 이제 이놈들도 어디 안 가고 에델슈타인에 있을 거니까 유용하게 써먹어도 좋아."
"고맙네. 허나 반드시 알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주겠나?"
"뭐지."
안경 너머로 노안의 기색따위 조금도 끼지 않은 형형한 눈이 나를 보았다.
"자네는 그 분과 똑같은 걸 하겠다면서 왜 그렇게 행동한 겐가."
'그렇게'라는 말에 이전까지 정체를 숨겼던 것, 메이플 아일랜드에서 검은 마법사와 싸웠던 것, 그들과 합류하는 않는 것 등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같은 걸 해도 세세한 건 다르니까. 그놈은 완벽한 세계를 만들려고 하지만, 그 세계에 지금 이 세계의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거든."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 한다는 거지. 아마 그곳엔 검은 마법사 자신도 없을 거다."
있을 수가 없지. 그놈의 역할은 이 썩은 세계의 멸망, 그걸로 끝이니까. 그 뒤는 없다.
"나는 그거에 반대한다. 최소한 지금 세계의 것 일부는 남겨두고 싶어. 썩어 문드러지고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서도 진주는 있으니까."
"그걸 새로운 세계에 가져가고 싶기 때문에 그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 건가."
"그래."
겔리메르는 3분의 1정도 납득한 모양새였다.
"헌데 그분의 목적이 그렇다면 왜 군단장들이 그리 따르고 있나. 자신들도 사라질 텐데."
"거기까지 다 알고 있는 놈은 없으니까. 유일하게 아는 이는 프라이쉬츠뿐일 거다. 그런데 그놈이 바라는 건 이 세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라서 알면서도 따르고 있지."
"…… 완전 미친 놈이잖아."
"옛날에도 미쳤었지만 이 시대에 와서는 더 미쳤지."
아직 직접 만나진 못 했지만 왠지 조만간 만날 것 같다. 이런 류의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
"아무튼 겔리메르, 프로젝트를 완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여라. 나는 지금 세계의 것 일부를 남겨두고 싶지만,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치울 거라서 그러는 데엔 당신이 프로젝트를 완성시켜야 해."
"─알겠네."
"너희는 에델슈타인에서 우리의 중요 시설 등을 방어해라. 이번같은 일이 안 생기도록."
"하아…… 알겠습니다."
바쁘니까 당장 처리하진 않는데 그렇다고 전력으로 써먹자니 애매하고, 놀려두자니 또 뭔가 아까운 계륵같은 블랙윙 간부들의 처후를 이데아는 협상에서 시그너스가 썼던 수에 놀아났던 일을 봉쇄하는데 잠시 쓰자고 했다. 어차피 레지스탕스들도 실상을 알았으니 또 습격해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놈들을 방치해두는 것보다 적당한 일을 하게 하는 편이 안전하므로.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아 슬슬 돌아갈까 했는데 좀 전에 엘레오노르에게 물었던 게 떠올랐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네.
"이제 뭔가 생각난 거 있나 엘레오노르."
"그게, 하나 있긴 있습니다만."
"뭐지?"
진짜 있어? 마법사들 기억력 굉장하네. 그 프라이쉬츠를 앞에 두고 패닉 상태에서 들은 말을 정확히 기억하다니. 그녀는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긴가민가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뭔가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그건 모릅니다만, 뉘앙스를 볼 때 그 가져온다는 - 어쩌면 불러온다는 무언가가 대단히 중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무사히 가져오기 위해 이 일을 한다는 식으로 말해서……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에 인상이 써졌다. 그놈에게 중요하다고 할 만한 것은 세계 멸망에 도움이 되는 것 일텐데 이제 와서 새로운 조력자나 도구같은 게 추가되어 봤자 의미없다. 세피로트가 리프레에서 행방을 놓친 뒤 다시 나침반을 썼지만 어떻게 된 게 추적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마치 어디에도 없다는 것처럼.'
일단 돌아가서 이데아랑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걸 알려줘야 겠다. 머리를 맞대면 뭔가 답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
프라이쉬츠가 불러오겠다는 게 뭘까요? 가장 최근에 프라이쉬츠가 나타난 곳이 어디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반은 데몬의 기억을 뒤지고 있습니다만... 꽤 험한 꼴을 많이 볼 것 같습니다. 본편에서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은 데몬의 군단장 시절 각종 만행들을 볼 예정이라.(데미안 웹툰 참조)
검호는 최근들어 사실만 말하며 뻥까치는 실력이 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옮은 모양이에요. 누군한테 옮았을까요(웃음).
여담으로, 저 자격증 시험에 둘 다 합격했습니다! 이제 이력서에 쓸 게 늘었어요!
@서월마을 - 앞서 말했듯이 이번 챕터는 에반이 주입니다. 물론 주인공은 검호이므로 계속 나오겠지만요.
@킴마령 - 제가 하는 건 어디까지나 재구성이라 완전 창조는 무리쟝!
@레볼레이션 - 아주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완전히 읽을 수 없었다면 프리드가 검호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알 리 없겠죠.
@로퓔랜 - 사실 이데아는 젊었을때 저렇게 활개치다 호랑이(유렌스)에게 당해서 참교육을 받았습니다.
@SoranoRu - 제대로 물고기를 낚으려면 낚시대가 아니라 그물이 필요하죠!
@Sisre - 사실을 알고 키네시스가 검호한테 하는 불평을 보면 느낌이 다를 겁니다.
@AbViaLectea - 아 뭐, 크게 보이는 도구들은 많으니까요(웃음)
@이루카이저 - 메이플은 의외로 스토리에 구멍이 많아 글로 쓸 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