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91화 (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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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스와 아란, 팬텀은 수 십 분 동안 수직 통로를 내려간 끝에 겨우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통로라면서 뭐 이렇게 긴 거야? 내려오면서 졸 뻔 했잖아."

"실제로 날개로 날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마법까지 같이 쓰면 더 짧을테고."

"설명은 됐고, 그보다 아까 샌님이 한 추측이 맞는 것 같은데?"

마법으로 빛을 띄운 팬텀은 스틸 스킬을 쓰고 일대를 쭉 흝어보았다. 내려오면서 포스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던 미증유의 힘은 스킬을 통해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 보이고 있지."

"일단 우리가 막연하게 거대한 힘이라고 느꼈던 것은 하나가 아니라 4종류의 힘이 섞여 있는 거야. 그런데 이 힘들은 근본적인 부분에 포스와 유사한 패턴이 있고, 4종류로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만큼 다르긴 한데 또 비슷해."

"…… 뭔 소리야?"

"무기 종류는 다른데 디자인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아하!"

덧붙여 포스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말은 뭔가와 합쳐져 합금이 되긴 했지만 철이 베이스라는 건 똑같다는 뜻이다. 그럼 그런 식으로 말하지 왜 못 알아먹게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거야? 팬텀 너도 마법사는 마법사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매도당하는 느낌이라 팬텀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난 있는 그대로 말한 건데."

"마법사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들이었다만."

"그래그래, 근데 중요한 건 난 마법사가 아니잖아."

아란의 파란 눈 안에 흰 문양이 떠올랐다. 전사들이 사용하는 시력 관련 버프는 동체시력과 밤눈을 강화시켜준다.

"저것들이 그 포스와 비슷한 힘이란 것과 연관있어 보이네."

팬텀이 띄운 조명은 반경 10m 남짓만을 밝혀줬지만 버프로 강화된 그녀의 눈은 어둠 너머로 문 또는 마개와 흡사한 구조물 4개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무인으로서의 기감이 저 구조물 너머에서 미증유의 힘이 새어나오고 있음을 알렸다. 다른 두 사람도 버프를 써서 아란이 말한 것을 찾았다.

"봉인…… 으로 보이는군."

"저 안쪽에 뭔가가 봉인되어 있다고?"

"아니. 저것들은 무언가의 봉인을 지탱하고 있는 축이다. 규모가 보통 큰 게 아닌─"

루미너스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 전에 그들의 발 아래에서 새하얀 빛의 원이 떠올랐다.

"무슨 마법을 쓰는 거야 루미너스?"

"내가 쓴 게 아니다! 이건 강제 소환 마법이야!"

단번에 마법의 종류를 해석한 그는 즉시 마법진을 부수려 했지만, 원 너머로 자신들을 부르는 이의 목소리가 거친 마력의 흐름을 타고 올라왔다.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오라. 니놈들에게 알릴 것이 있으니.]

분화구의 용암이 끓는듯한, 명백하게 인간의 것으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세 사람의 몸이 굳었다. 단순히 이질적인 목소리여서가 아니라 엄청난 힘이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못해도 군단장 급의.

그러는 사이 마법진이 완성되며 그들을 집어삼켰다.

세 사람이 소환당한 곳은 천장과 바닥 위아래로 위협적인 형태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공동이었다. 근처에 마그마가 지나는지 일부 돌기둥 틈으로 용암이 흘렀고, 그 열기에 아란은 인상을 썼다.

"여긴 또 어디야?"

"아까 전에 봤던 문들 중 하나의 안쪽같다."

느껴지는 힘이 슬리피우드 아지트 심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포스가 섞인 미증유의 힘과 거대한 봉인의 마력. 그 비율이 1:1에서 1:2로 변해 봉인의 문 안쪽이라 짐작한 거다.

"납치하듯이 불렀으면서 정작 당사자는 보이지도 않네."

팬텀은 스태프 형태의 케인을 활로 바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불이 밝혀져 있어 앞을 보는데엔 지장이 없었지만 주의를 낮출 순 없었다. 뭣보다 이곳은 노바족과 마족이 함께 있는 적들의 기지다.

"샌님. 여기 펼쳐진 봉인이 어떤 건지 알 수 있겠어?"

"대충은. 하지만 규모가 너무 크다. 나 혼자로는 구조를 다 알아도 해제할 수 없어."

"흐응? 왠일로 불가능하다고 시인하네."

"누구처럼 불가능한 걸 가능하다고 우기다 실수하느니 역량을 똑바로 파악하는게 현명하니까."

며칠 전의 팬텀을 돌려깐 루미너스는 또다시 그와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아란은 그런 두 남자를 깔끔히 무시하며 언제든 폴암을 내려칠 자세를 잡고 공동을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단연 불꽃들에 둘러쌓인 거대한 석상이었다.

"그놈들도…… 이런 걸 세우나."

크고 위협적인 한 쌍의 뿔이 난 뱀같은 석상.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그 석상은 어딘가 기분나빠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살아있는 것 같잖아. 당장이라도 저 머리를 박살내야 할 것 같은 경고에 가까운 예감에 그녀는 폴암을 움켜쥔 손을 쥐락펴락했다.

그렇게 험악하게 뱀 석상과 눈싸움을 벌이던 중, 석상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니놈들이 영웅 나부랭이인가.]

"무슨?!"

"당황하지 말고 둘 다 방어 마법 펼쳐!"

석상에 붙어있던 돌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땅이 뒤흔들렸다. 뱀 석상이 쭉 늘어나, 아니 땅에 파묻혀있던 몸이 빠져나와 세 사람이 서있는 곳 주변을 한바퀴 휘감았다. 마치 장벽이 빙 둘러진 것 같은 형세에 팬텀은 방어 마법을, 루미너스는 둘을 붙잡고 텔레포트를 사용해 자리에서 몸을 빼려 했으나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캬하하! 놀라는 얼굴 좀 보게!]

[그 자와 같은 영웅이라는 것들이 참 별 거 아니네요.]

[같은 칭호로 불렸다고 다 그 자만한 괴물이면 우리가 곤란해지지.]

어둠 속에서 우아하게 걸어나온 거대한 여왕의 형상을 한 괴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우산을 든 삐에로, 정장을 입고 톱니바퀴 장식의 지팡이를 든 닭…… 뒤로 갈수록 어째 위엄이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하나하나 범상치않은 힘이 느껴지는 건 똑같았다. 그중 가장 먼저 나타났던 거대한 돌뱀의 목소리가 소환진 너머에서 울렸던 용암이 끓는듯한 목소리와 동일하다는 걸 깨닫는데엔 1초 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각자 다른 쪽으로 상대의 전력 파악에 들어갔다.

"봉인의 기둥이 니놈들이었나?"

[호오, 눈이 좋군.]

"지금 사방에 퍼진 포스 비스무리한 힘도 너희들 것이고."

[시시해 시시해! 너무 쉽게 맞췄잖아!]

"거기다 앞서 그를 상대했다가 대판 깨졌던 모양이네."

[계집주제에 참으로 천박한 어조군요.]

세 괴물과 한 번씩 주고받은 그들은 상대쪽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선공하지 않아 의아해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잔뜩 날을 세운 영웅들에게 괴물측의 정장을 입은 닭이 먼저 손, 아니 날개를 들었다.

[아, 겁 먹지마라.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너희를 부른 이유는 작업에 앞서 전해야하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겁 먹었다는 거야……!"

[아니었나? 하여튼 시작에 앞서 하나만 대답해주길 바란다. 위에 있는 너희의 부하들은 언제 여기 내려오지?]

팬텀과 루미너스는 저걸 놈들에게 알려줘야하나 눈빛을 교환하며 의논했고, 금방 결정을 내렸다. 일단 저쪽에서 적의는 드러내지 않는데다 검호와의 접점이 보이는 이상 여기서 가져가라는 무언가는 저들과 연관있을 가능성이 높다.

"준비가 갖춰지고 전원 여기까지 안전히 내려오는데 넉넉잡아 5시간 이상 걸린다."

[그거 다행이군.]

"뭐가 말이지?"

[우리가 너희에게 알려줄게 많으니까. 너무 빨리 내려오면 미처 다 전할 수 없으니.]

"그 전해야하는 말이란게 뭐야?"

[너희가 여기서 해야하는 일들이다.]

닭이 들고있던 톱니바퀴 장식 지팡이로 바닥을 딱딱! 찍자 허공에 환상이 떠올랐다. 하나의 공동과 이어진 4개의 공간이 그려진 지도. 다름아닌 그들이 있는 슬리피우드 아지트의 지도였다.

[너희는 부하들이 모두 내려오는대로 힘을 합쳐 우리를 하나씩 격파해야 한다.]

"하? 자살하고 싶으면 다른 곳 찾지?"

"그게 아니다. 아무래도 여기에 펼쳐진 봉인을 풀라는 뜻인 것 같은데."

[그렇다. 우리는 봉인의 파수꾼. 우리를 하나씩 처치할 때마다 봉인이 약해지고, 이윽고 이곳에 봉인되어 있는 존재가 풀려난다. 그 남자는 너희에게 그 존재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러면 궁금한 것들을 모두 알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캬하! 완전 전지(全知)한 양반이거든!]

"그 존재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디 봉인되어 있는데?"

막 여기로 소환당해 제대로 다 둘러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4개의 문을 제외하면 뭔가 봉인의 흔적 비슷한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후후, 저희가 있는 곳과 이어진 문들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한 모양이네요. 광장의 중앙에 큰 물웅덩이가 있지 않던가요?]

"웅덩이?"

"그런 게…… 있었나."

"위에서 떨어진 빗물같은게 고인 거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단순한 웅덩이가 아니라 생명의 샘이다. 그 샘의 바닥에 우리가 봉인하고 있는 존재가 가라앉아있지.]

"그래서 그 존재라는 게 누군데?"

[이 세계에서, 아니 세 차원 모두 통틀어 유일하게 생명의 좌에 앉아있는 이.]

뭐? 화려한 표현들때문에 바로 알아듣지 못해 '저게 뭔 소리야?'란 표정이 된 아란과 달리 루미너스와 팬텀은 단번에 말뜻을 파악하고 경악했다.

"생명의 초월자가 여기 있다고?!"

"그 말이 사실이냐!?"

[불쾌하지만 우리는 니놈들에게 거짓된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주군께 명 받았다.]

거대한 돌 뱀은 영웅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기도 싫다는 양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 노골적인 무시에 아란의 심사가 뒤틀렸다.

"야, 너희 주군이라는 놈이 혹시 여길 습격한 마족 군단장이냐."

[그 입 다물라! 그분은 니년의 입에 막 불려질 분이 아니다!]

"시끄럽고 대답이나 해 지렁이."

뱀보다 더 하찮은 표현에 그의 거대한 몸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들이받을듯이 요동쳤고, 집도 씹어먹을 거대한 턱에는 유황냄새와 함께 주홍색 불길이 머금어졌다. 다른 세 괴물이 잽싸게 붙잡아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로 아란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진정하게 벨룸! 시작 전까지 먼저 공격하면 안 되네!]

[그래 그래, 이것도 주군의 명이잖아.]

[괜히 지금 힘 뺄 필요없죠. 어차피 나중에 싸우게 될 텐데.]

[크으으……!! 네 이년! 나중에 내 영역에 다시 오면 그 입을 제일 먼저 태워주마!]

"지랄한다. 내가 지렁이 새끼 불같은 거에 당할 거 같아?"

아란은 콧웃음치며 냉기를 휘감은 폴암을 가볍게 돌렸다. 대놓고 속을 긁으며 도발하는 행위에 진짜로 불을 뿜을 기세인 벨룸을 보다못한 루미너스가 재빨리 나섰다.

"그보다 아까 물었던 것에 마저 답해주길 바란다. 여기에 봉인된 이가 생명의 초월자가 맞는가?"

[앞서 말했듯이 그 존재는 현재 세 차원 통틀어서 유일하게 생명의 좌에 앉아 관위를 쓰고 있는 자가 확실하다. 이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겠지.]

"…… 그렇군."

그들이 사실과 좀 다르게 이해했겠지만 정장을 입은 닭, 반반은 자세한 설명따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명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거지 모든 진실을 까발리라는 게 아니니까.

"생명의 초월자가 전지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진정한 의미로 전지하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내에선 사실상 전지한 수준이란 말이다.]

[그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심원(深遠)한 지식의 소유자. 니놈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들에 가장 완벽한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이다.]

[키히! 아는 것과 별개로 곱게 알려줄 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또 뭔 소리야?"

킬킬거리며 웃기만 하고 대답은 안 하는 피에로 대신 거대한 여왕이 고개를 숙여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가 부탁해놓았으니 당신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건 알려주겠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예 입을 다물 거란 말이죠.]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생명의 초월자 씩이나 되는 놈이 고작 질문 대답따윌 안 하겠다는 거야!?"

거기다 생각해보니 륀느 여신은 봉인당했다 해도 그 전에 프리드한테 시간 마법에 대한 단초도 주고 초월자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는데 생명의 초월자는 8백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다!

[말조심 해라! 그 자가 지금 니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도 모를 것 같나!]

"여기 없는데 당연히 못 듣는, 아 초월자쯤 되면 상관없으려나."

"그런 이유라면 이 얘긴 이쯤하는게 좋겠군."

자세한 건 나중에 봉인을 풀고나서 생명의 초월자를 직접 만난 뒤에 해결하면 되는 일이다.

[그럼 요약을 하지. 나중에 너희의 부하들이 모두 내려온 뒤, 우리를 하나씩 격파해 봉인을 푼다. 그리고 봉인에서 풀려난 그 존재를 너희의 수장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그 남자나 다른 의문점들에 대해 물어보고 답을 얻는다. 이해했나?]

"잠깐만 질문. 너희를 격파해라는 건 죽이란 뜻이야?"

[킥킥, 우리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니 아가야?]

새로운 목소리에 팬텀과 다른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말하는 이 - 거대한 여왕은 아까와 같았다. 단지 얼굴이 조금 전까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는데 지금은 입꼬리가 쭉 찢어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것뿐인데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비록 생명의 좌에 오르진 못했지만 우리가 가진 힘은 그 좌에 올랐던 이의 파편. 그 남자에게 당해 지금은 좀 약해졌다 하더라도 니놈들 따위에게 죽을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아.]

"…… 그렇군. 포스에 섞인 힘은 초월자의 힘이었나."

[그렇다네. 그러니 우리의 목숨따위 걱정하지 말고 본인들 목숨이나 걱정하도록.]

"그거야말로 제일 할 필요 없는 걱정이지."

아란은 천장을 향해 폴암을 휘둘렀다. 스걱! 얕은 절삭음과 함께 종유석들이 잘렸고, 잘린 종유석은 정확하게 네 괴물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론 네 괴물들은 간단하게 그것을 막아내거나 쳐냈다.

[이 계집이!]

"아까부터 계집, 계집 시끄럽네. 그래도 적 주제에 여자취급 해줘서 기분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다 잡쳤잖아."

"용케 참다 싶더니 그래서였냐……."

"뭐야?"

"아니, 아무것도."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는 루미너스를 한 차례 째려본 아란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네 괴물의 압박감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짐승처럼 씩 웃어보였다. 하얀 송곳니가 도드라졌다.

"생명의 좌니 뭐니 하여튼 더럽게 강하고 더럽게 질기단 뜻이잖아. 그런 거, 8백 년 전에 지긋지긋하게 상대해봤어."

그들이 왜 영웅이라 불리는가. 진정한 적은 검은 마법사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건 그 휘하의 수족들이었으며, 그 수족들 중 독보적으로 강했던 이들이 바로 주된 적이었다. 그 자들과 홀로 맞서 싸울만큼 강했기에 그들은 영웅이라 불렸다.

"종류는 다 달라보이지만 대충 군단장 급. 그러면서 군단이라 할 수 있는 부하는 없는 것 같고, 앞서 검호와 한 차례 싸워 약화된 상태. 군단과 군단장을 한꺼번에 상대했던 우리가 그런 니놈들조차 못 이길 것 같아?"

오래된 얼음처럼 새파란 눈이 타오르는 투지로 무엇보다 뜨겁게 일렁였다.

"부하들 다 내려온 뒤에 하나씩 격파해라고? 까고 있네. 한 마리당 한 명씩으로 충분해."

오만하기 짝에 없는 말이었지만 네 괴물은 아란의 장담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뒤늦게 눈앞의 이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영웅.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초월자와 정면으로 맞붙어 기어코 막아낸, 힘도 정신도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 중 최정점에 서있던 이들이 바로 눈앞의 인간들인 것을.

[시건방진……!]

"특히 돌지렁이. 넌 내가 맡는다."

내가 이기면 앞서 널 밟았던 그에 대해 아는대로 모조리 말해. 시퍼런 기세를 피어올리며 이기는 건 물론 어떻게든 아는 것들을 다 캐내리라는 의지가 충만해보이는 아란의 모습에 루미너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난 저 닭으로 하지."

"흐응? 진짜 겁이라도 먹었어 샌님? 제일 약한 놈을 맡고."

"저놈이 마법사로 보이니까 내가 한다는 거다. 초월자의 힘과 마족의 힘 모두 가지고 있는 이가 무슨 마법을 쓸지 궁금해서 말이지."

"핑계 좋네. 그럼 난─"

"저 다중인격 여왕으로 해라."

"내가 왜 니 말대로,"

"좀도둑 니놈은 여자 전문이지 않나. 그러니 여자를 맡아라."

아니면 겁먹었나. 확실히 저 피에로 놈이 더 약하니 상대하기 쉽겠군. 하도 팬텀과 으르렁거리다 보니 팬텀 도발하는 실력만은 수준급이 된 루미너스의 말에 팬텀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걸려들었다. 그래 샌님 내가 할테니 그보다 더 약한 놈을 맡으면서 늦지나 말라고! 자리에 없던 메르세데스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피에로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도떼기 시장 물건 팔리듯이 누가 누굴 상대할지 정해진 네 괴물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면 분노보다 어처구니 없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우리를 아주 대놓고 무시하는군.]

"누가 할 말을."

"그래서, 너희가 우리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은 그게 전부였나?"

[가장 중요한 것만 따지면 그렇다.]

"그럼 부차적으로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답해줄 수 있나."

[어떤 질문인지에 따라서 다를 거다.]

일단 마족과 노바족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가는 가정은 현재 거의 기정 사실 상태. 돌연변이 마족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생명의 초월자를 봉인하는 파수꾼으로 남겨둔 점에서 단순한 비즈니스적 관계는 아닌 것 같고. 더 깊이 엮인 것 같은데 짧은 시간안에 어떻게 그리 될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건 아마 답하지 않을 것 같다.

"검호, 그와 생명의 초월자는 무슨 관계지."

[모른다.]

[우리도 그 양반 직접 본 건 얼마 전이라서 말이지~]

[그 분과 했던 말을 보면 예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는데 말이죠.]

사실상 전지하다는 생명의 초월자가 검호와 언제부터 접점이 있었고, 무슨 관계길래 이런 거대한 봉인에 일부러 당해주는지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는데 대답들이 시원치 않다. 그나마 건질만한 건 예전부터 알던 것 같다 뿐이라니.

"생명의 초월자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놈이 생명의 초월자에 대해 몰라?"

[그야 우리가 가진 파편들의 주인은 그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입 다물어라 피에르.]

[예이~ 예이~]

이 이상 답하지 않을 낌새에 인상을 쓰고 있던 아란이 다른 걸 물었다.

"검호와 다른 마족들은 모두 어디 갔어?"

[여기엔 없다.]

[모두 다른 곳으로 갔답니다. 그 남자와 주군이 싸운 여파로 아지트가 처참하게 망가졌거든요.]

[우리만 남아 봉인을 지키게 되었지.]

아 젠장. 아란이 홧김에 발을 구르며 땅을 박살냈지만 루미너스와 팬텀 둘 다 나무라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잖아 있었는데 확인사살 당한 꼴이니까.

[이제 더 물어볼 건 없나.]

"물어봤자 대답할 것 같지 않군. 다만 사적인 질문은 있다."

[뭔가.]

"너희중에 누가 리더지? 설마 니가 리더인가?"

제일 약하면서 말은 가장 많이 하고 있어 정말 설마 싶어서 물어본 거였다. 반반은 푸시시, 김빠지는 콧김을 내뿜었다.

[리더라기엔 그렇고 대충 조장쯤 되는 위치라네.]

"뭐?"

뭔가 굉장히 친근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반반은 외알안경을 고쳐쓰며 마저 말했다.

[대충 봐도 알만하지 않나. 우리 중에서 누가 가장 이성적인지.]

루미너스는 반사적으로 네 괴물을 흝어보았다. 제일 강한 것 같지만 주군이라는 마족 군단장 광신도로 보이는 돌 지렁이와 인격이 휙휙 변하는 거대 여왕, 척 봐도 제정신은 아닌 삐에로. 그리고 마법사인 닭.

"…… 고생이 많겠군."

[알아주니 고맙네.]

"샌님. 나중에 상대할 적따위를 동정해서 뭐하게?"

"니놈은 좀 다물어라."

가장 약한 것도 서러울텐데 하나같이 자기보다 강한 이들을 조율해야하는 조장의 애환에 루미너스는 위로를 표해주며 슬슬 대화를 정리할 준비를 했다.

"더 알려줄게 없다면 이만하고 돌려보내주길 바란다. 지금쯤 위쪽에서도 준비가 끝났을테니."

[알겠다. 거기 모여 서도록.]

아까와 마찬가지로 흰빛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말을 한 쪽은 벨룸이라는 돌 뱀이었지만 마법을 시전한 쪽은 저 닭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전에 너희를 무시한 건 사과하지. 너희가 과거 빛의 초월자와 싸워 봉인시킨 이들이라는 걸 잠시 잊었어.]

"이제라도 알았으면 다행이네. 나중에 싸우고 난 뒤에 진다고 허탈해하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는 이번에 너희에게 패배해줘야하는 역이기에 그런 생각따위 안 할 거다. 그리고…….]

반반의 외알 안경이 번뜩였다.

[대신 대충 싸워주지 않고 당장 쓸 수 있는 전력을 다해 예의를 표해주지.]

"그 무슨……!"

톱니바퀴 지팡이 끝에 보라빛 마력이 일렁였고, 영웅들의 머리 위에선 피에로의 것을 몇 배나 확대시킨 듯한 모자가 나타났으며, 우아하게 서있던 여왕은 자벌레같은 기괴한 손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피빛을 휘둘렀고, 거대한 한 쌍의 뿔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한참 발동중인 이동 마법진과 저 공격들이 부딪혔을 시 발생할 후폭풍을 직감한 세 사람은 곧장 무기를 들어 저것들을 쳐내거나 막아낼, 나아가 저들에게 닿을 스킬들을 날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 순간에도 쉬지않고 계속 그려지던 이동 마법진이 공격이 닿기 직전 완성되며 세 사람을 문 바깥쪽으로 보내버렸다.

"하, 하아, 하……."

"이거, 참."

"아아악! 그 개새끼들이이이─!!'

짧은 찰나에 근육이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했던 몸이 뒤늦게 풀리며 찌르르 저려왔다. 어쨌든 안전해졌다고 판단한 루미너스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팬텀은 뒷목을 주무르면서도 케인을 놓지않고 바닥에 앉았다. 아란은 그놈들이 마지막에 자신들을 공갈로 속였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정말로 헤칠 생각이었으면 이동 마법진을 중간에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이동 마법진은 그려졌고, 그 말인 즉 공격이 닿는 순간 마법진이 완성되도록 아슬아슬하게 조절했다는 뜻이다.

"루미너스! 나중에 그 닭모가지 비틀어서 내 앞에 끌고 와줘!"

"최대한 노력해보지."

"이야, 마지막에 그놈들 꽤 오싹하던데."

그놈들을 멀쩡했을 때 모조리 쓰러뜨린 검호는 또 얼마나 괴물인 거야. 심지어 마족 군단장까지 상대했었다는데. 팬텀을 중얼거림에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췄다.

"……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당장 할 일이나 하지."

"좀 쉬었다 하면 안될까?"

"놈들이 말한 생명의 샘이란 걸 찾아야 하지 않나. 봉인된 상태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한지는 확인해야 하니까."

"의욕만발이네."

말은 그러면서 팬텀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간단한 회복마법을 썼다. 갑작스러운 수축에 욱씬거리던 근육의 통증이 완화되었고, 루미너스는 허공에 빛의 구체를 여럿 띄웠다. 앞서 팬텀이 썼던 것보다 배는 더 밝고 큰 구체들은 사방을 환히 밝혀주어 단번에 생명이 샘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다.

이후 그들은 큰 웅덩이 안에 눈이 멀 것처럼 아름다운 푸른빛을 잘게 펼쳐놓은 아이가 나무뿌리같은 것에 휘감겨 바닥에 잠겨있는 것을 보았다.

***

에반side.

[무슨 기억을 찾고 있지.]

"아 그게 그, 데몬 씨가 군단장이었던 시절에…… 스승님과 연관된 인상적인 기억을 찾고 있어요."

[너의 스승이라는 사람이 누구냐.]

좀 전에 어린 데몬 씨가 저지른 것을 본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아 말이 잘 안 나왔다. 그런 나 대신 제논이 설명했다.

"검호라 불리는 남자입니다. 검고 긴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쌍검을 쓰는 전사 말입니다."

[아아……? 그 사람이라면 알지. 주인에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간이니까. 그래서 그 남자와 연관된 인상적인 기억이 한 둘이 아닌데 다 볼 건가?]

"일단 하나씩 둘러봐야죠."

[알겠다. 그럼 비교적 최근 것들부터 보여주지.]

검붉은 까마귀가 날개짓하자 공간이 또다시 바뀌었다. 바닥엔 새하얌에도 불구하고 오싹한 느낌의 대리석 타일이, 양 옆에는 본래 우아하게 조각되었으나 여기저기 부서진 백색 기둥들이 쭉 나열되었고 하늘은 시간대가 밤인지 어두웠지만 별이 한가득 뿌려졌다.

그리고 기둥이 늘어선 통로는 누군가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로 채워졌다.

〈컥, 허억!〉

〈슬슬 질리는군요. 언제까지 도망치는 겁니까.〉

화려한 예복을 입은 데몬 씨가 바닥에 흐르는 피와 시체를 밟으며 한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이건 또 뭔…….]

"건축양식으로 볼 때 여기는 아무래도 시간의 신전인 것 같군요."

〈다른 신관들은 모두 죽고 이제 당신만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도망치는게 의미있다고 생각합니까?〉

과거 검은 마법사는 시간의 신전을 점령해 아지트로 삼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다 결국 그곳에 봉인되었다는 것도.

〈당신들이 섬기는 륀느 여신은 오늘 그분의 손에 봉인당할 것입니다.〉

[주인은 저때 다른 이들과 함께 여신을 무력화시켰었지.]

그런 부가설명 필요없어.

이미 많이 다쳤는지 피투성이의 신관은 숨을 헐떡이다 결국 쓰러졌다.

〈목숨을 헛되이 하지 마시고 순순히 투항하는 건 어떻습니까?〉

〈하…… 하하…….〉

지금 저 신관이 저딴 제안에 응할 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 싶어서 데몬 씨를 보았는데, 데몬 씨는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응할 기대는 커녕 그냥 의례상 하는 말인 것 같다. 신관도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든 신관의 얼굴은 젊다못해 어린 티까지 보였다. 그리고 뒤늦게 알았지만, 이때의 데몬 씨 역시 약간의 앳된 기색이 묻어나오는 젊은 청년이었다. 허나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두 사람의 위치는 완전히 반대였다.

한쪽은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렸고.

다른 한쪽은 그의 모든 걸 앗아갔으니까.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해하다니.〉

피끓는 목소리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당신도…… 당신도 결국 똑같은 처지가 될 겁니다! 군단장─!!〉

찢어지는 외침과 함께 불어닥친 밤바람이 피에 물든 예복과 붉은 머리카락, 찢어진 신관복을 헤집었다. 잠시 말없이 신관을 내려다보던 데몬 씨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웃었다.

웃었단 말이다.

〈그거 유감이네요.〉

그런 일따위 없을테니.

셉터가 내려쳐지며 붉은 색이 비산했다.

"아, 아아……."

[이야. 저때 완전 말종이었구만 저 양반.]

앞서 어린 데몬 씨가 마족들을 죽일 때는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그 동기에 대해선 납득할 수 있었다. 동생이 끌려가 폭행당하고 가족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으니까. 마스테리아의 환경은 지나가듯이 봤을 뿐이지만 반 마족인 데몬 씨와 그 가족들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닌 건 거의 확실해보였고, 그런 과격한 대응을 한 것도 그럭저럭 이해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정말, 정말 이건 아니란 말이다!!

"이 기억이 왜 검호 그와 관련이 있는 건지 설명해주겠습니까.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잖습니까."

[주인은 훗날 마지막 신관이 한 말과 과거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 때를 후회했다.]

이때라도, 아니 이보더 더 늦더라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군단장을 그만뒀어야 했다고 말이지. 까마귀는 부리를 딱딱 부딪혔다.

"그가 했던 말이란 게 뭡니까."

[그건 조금 있다가 보여주지.]

기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신관을 죽인 데몬 씨는 통로를 가로지르며 어딘가를 향해 갔다. 걸어가는 동안 예복에 튄 핏자국은 보라빛 포스의 불길에 사라졌고, 얼마 안 있어 예복은 언제 피칠갑이었냐는 양 더없이 깨끗해졌다.

그렇게 걸어가던 데몬 씨는 어느 순간 발을 멈추더니, 등을 펴 자세를 잡고 한 손을 심장부근에 얹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남은 잔당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돌아가시죠.〉

나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별 생각없이 데몬 씨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온몸이 얼어버리는 충격을 느껴야 했다.

빛 한 점 들지않은 곳에 만들어진 그늘의 그림자를 그대로 가져온듯한 새카만 로브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로브의 안쪽엔 사람의 몸따위 없었다. 화려한 금장이 둘러진 소매 아래로 녹슨 반지들을 낀 죽은 고목같은 손만이 나와 있을 뿐, 심지어 얼굴이 있어야하는 후드 안쪽엔 눈으로 추정되는 붉은 안광만 타오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안광을 본 순간 어둠의 마력을 쓸 때 가끔씩 붉게 타오르던 루미너스 씨의 왼눈이 떠올랐다.

"…… 저 사람 설마."

"사람이, 맞긴 해?"

[생각해보니까 그 양반이 군단장 시절 허리숙일 사람은 하나뿐이잖아.]

검은 마법사.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휘하에 수많은 군단장과 군단들을 거느리고 많은 사람들과 도시, 나라를 없앴으며, 그것을 보다못한 영웅분들과 스승님이 사력을 다해 봉인시킨 이.

이야기만 들었을 때에는 그저 강력한 힘을 가진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데몬 씨의 기억을 통해 그를 본 순간, 스승님과 영웅분들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과 저 어둠의 화신같은 이에 대한 공포심만 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분들은 저런 자와 정면으로 싸웠던 거지? 단순히 산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생김새뿐만이 아니라 몸 주변에 떠다니는 사슬이 내는 얕은 쇳소리와 끊임없이 일렁이는 어둠이 공포를 증폭시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몸이 굳어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데.

〈기다려라.〉

"히끅!"

[우리한테 하는 말 아니야 마스터.]

심장이, 심장이 안 좋아! 목소리까지 망령들의 귀곡성처럼 음산하기 짝에 없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륀느가 봉인되었으니 곧 그 자리를 대신한 시간의 초월자가 나타날 것이다.〉

째깍. 시곗소리와 함께 검은 마법사의 시체같은 손 위로 톱니바퀴와 시계를 합친듯한 기이한 문양이 떠올랐다.

'초월자라면 스승님이 말한 그, 잠깐만 검은 마법사는 빛의 초월자라고 했었는데?'

단순히 이미지일 뿐이지만 저건 빛의 힘이라기보단 시간과 관련된 힘처럼 보인다. 만약 정말 시간의 힘이라면, 검은 마법사가 어떻게 그 힘을 쓰는 거지?

"에반. 저쪽을 보세요."

"응?"

제논이 갑자기 나를 불러 어딘가를 가리켰다. 검은 마법사에게서 좀 떨어져있는 제단같은 것이었는데, 성스러운 느낌의 제단과 어울리지않는 날카로운 얼음 기둥이 솟구쳐있었다.

그 얼음 안에 한 여인이 깊이 잠든 듯 눈을 감은 채 갇혀 있었다.

[저 여자가 륀느 여신인가봐.]

검은 마법사는 시간의 신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신관들을 모두 죽이고, 신전의 주인인 륀느 여신을 봉인했다고 들었던 게 그제야 기억났다.

"여신님을 봉인하는데…… 데몬 씨도 나섰던 걸까."

[그렇지 않을까. 적어도 놀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기 또 사람이 옵니다."

저만치에서부터 뚜벅거리는 딱딱한 구두굽 소리와 찰랑이는 맑은 금속음이 들려오더니 서서히 가까워졌다. 이내 기둥 사이로 끝이 너절한 붉은 코트 차림에 후드를 눌러쓰고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끝나셨습니까.〉

어스름한 달빛으로 겨우 보인 남자의 첫인상은 시체같다는 거였다. 후드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탈색된 양 빛바랜 금발이었고, 피부는 핏기없이 창백했다. 무엇보다 하나밖에 안 보이는 눈은 드문 분홍색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온기와 감정이란 물기가 모조리 빠져나가고 색만 찌꺼지처럼 남은 메마른 꽃잎같은 눈이었다.

〈슬슬 돌아오시죠.〉

〈잠시 기다리십시오. 하실 일이 있으시답니다.〉

〈새로 탄생할 시간의 초월자따위 어차피 의미없지 않습니까. 뭘 어떻게 하든 결국 부질없을텐데.〉

이상했다. 분명 남자는 검은 마법사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긴 한데 그를 존중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런 느낌을 받은 게 나뿐만이 아닌지 데몬 씨도 미간을 찌푸렸다.

〈다 이유가 있어서 하시는 것이겠죠. 먼저 돌아가 있으십시오 프라이쉬츠.〉

프라이쉬츠? 저 남자가? 8백여년 전에는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군단장이자 현재에 와선 오르비스 탑을 반파시킨 장본인이 저 사람이라니, 데몬 씨가 '착실하게 미친 놈'이란 평가를 왜 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군단장인데 상관인 검은 마법사를 반쯤 무시하고 있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당신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손아귀에 들어온 시간의 초월자따윈 변수조차 못 돼죠. 살릴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살려두는 거다.〉

〈하……?〉

검은 마법사의 손 위로 백금색 빛의 결정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기대해도 좋겠지.〉

〈미래가 확정되는 시간의 초월자따위에 기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입니까.〉

〈그러하다.〉

〈…….〉

저 양반 표정 보게 아주 쏴버릴 기세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 프라이쉬츠란 군단장은 검은 마법사를 절대로 상사로 안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거기다 대화가 뭔가 이상한데."

"확실히 그렇군요. 느낌을 표현하긴 힘들지만 대충 정황으로 볼 때 마치 검은 마법사가 고의적으로 미래에 어떤 변수? 같은 것을 창출하기 위해 새로운 시간의 초월자를 일부러 살리려는 것 같습니다."

[프라이쉬츠는 기대할 가치따위 없으니 당장 죽이라 하고 말이지.]

보통 계획을 진행함에 있어서 변수라는 건 가능한 한 줄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반대로 변수를 살리다니? 득이 되는 형태로 작용하면 모를까 프라이쉬츠가 없애는 게 좋다는 걸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고 하시니 당신은 이만 가십시오.〉

〈…… 알겠습니다. 만약 잘못되면 책임은 오롯이 당신의 것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프라이쉬츠!!〉

〈귀 안 먹었으니까 닥쳐!〉

존댓말을 쓰는 대상은 검은 마법사뿐인지 프라이쉬츠는 데몬 씨에게 버럭 소리지르며 진짜 무기라도 빼들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흉흉한 기세에 데몬 씨도 와그작 인상을 구기며 셉터를 잡았다.

[와. 행적만으로도 콩가루라고 느꼈는데 눈앞에서 보니 진짜 어떻게 옛저녁에 분열 안 했나 궁금한 수준인데 군단장들.]

"검은 마법사가 수장으로 있으니 어찌어찌 굴러갔던 모양이지."

"그 검은 마법사, 지금 왠지 지친듯한 얼굴인데요."

애초에 얼굴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걸 알아보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막상 고개를 돌려 그가 있는 쪽을 보니 진짜 그랬다. 붉게 타오르는 안광은 게슴츠레 가늘어져 있었고, 일렁이던 어둠은 촛불이 꺼진 자리의 연기처럼 처량하게 흔들리는 게 마치 '저런 새끼들이 내 부하라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러면 안되는데 아주 약간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어버렸다.

[여기까지 보도록 하지.]

잠시 잊고 있던 까마귀의 목소리와 함께 신전의 풍경이 무너졌다.

[이번에 보여준 것이 너희가 찾던 기억이 맞나.]

"아니…… 요."

[우리가 찾는 건 그 사람과 여기 주인이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순간들 중 하나야.]

[그럼 그렇다고 진작에 말하지 그랬나.]

"죄송합니다. 인상적인 기억이라면 당연히 직접 대면한 것인 줄 알고."

'인상적'이라는 게 전적으로 개인의 기준이라는 걸 간과했다.

"아까 전에 데몬 씨가 이 때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이유가 신관이 했던 말과 예전에 스승님이 했던 말때문이라고 했는데, 스승님이 했다는 말에 대한 기억도 보여주실래요?"

[알았다. 잠깐만 기다려라.]

좀 예전 기억인지 까마귀는 기억을 가지러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언제 올까 생각하던 중 갑자기 다리가 저려와 뭔가 싶었는데, 뒤늦게 여기 오고나서 한 번도 앉거나 쉰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습니까 에반."

"아, 응. 잠깐 앉아서 쉬면 될 거야."

"그게 아니라 아까 전에 본 거 말입니다."

피가 뚝뚝 흐르던 셉터가 생각났다. 마지막이 어이없게 끝나서 잠시 머릿속 한 켠으로 밀려나버린, 아니 밀어낸 광경과 말들.

'그거 유감이네요.'

알게 모르게 곧잘 날 걱정해주던 데몬 씨와 신관을 웃으며 죽이던 데몬 씨. 부정하고 싶었지만 과거의 데몬 씨는 끔찍하고 잔인한 군단장이 맞았다. 그리고 내가 데몬 씨를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는 건 그에 대해 잘 몰라서라는 말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영웅분들은 데몬 씨의 저런 면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분을 그렇게 경멸했던 것이겠지.

"데몬 씨가…… 어째서 하필 군단장이 되었는지 궁금해 졌어."

[갑자기 그건 왜?]

"그리고 검은 마법사를 배신하게 된 이유도."

어지간해선 배신은 커녕 항명도 안 할 것 같은 '충성스러운 군단장'이던 데몬 씨가 신전 점령 이후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대놓고 검은 마법사를 배신하고 영웅분들을 도왔던 걸까.

"계속 여기서 기억을 찾다 보면 알게 될 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직접 그분의 입으로 듣고 싶어. 이런 식으로 보는 건 좀 그, 실례니까."

[여전히 그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거야 마스터?]

"그건 아니지만……."

여기 오기 전에 장담했던 말이 무색하게 나는 밖에 나간 뒤 이전과 똑같이 데몬 씨를 대할 수 있냐는 자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 편으로 '정말로?'라는 의심이 심어져버렸기에. 데몬 씨가 검은 마법사를 배신한 이유를 알게되면 또 모르지만.

"일단 본 것들을 요약정리 할래. 지금은 너무 머리아파."

"굳이 적을 필요 있습니까. 에반 당신쯤 되는 마법사라면 토씨도 거의 틀리지 않고 기억했을 텐데."

"그렇긴 한데 그러면 나중에 일일이 다시 떠올려야 되잖아. 적어놓으면 생각들이 정리되고 나중에 분석하기도 편해져."

미리 챙겨온 수첩과 짧은 연필을 꺼내 좀 전에 본 데몬 씨의 기억을 쭉 적었다. 시간의 신전 점령, 신관이 한 말, 륀느 여신의 봉인, 검은 마법사와 프라이쉬츠의 대화…… 어라, 그러고보니 데몬 씨는 새로운 시간의 초월자에 대해 알면서 왜 여제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지?

[또 멋대로 기억들을 보지 않았겠지.]

"안 그랬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신이 먼저 알았겠죠."

[그건 그렇지. 아무튼 부탁한 기억을 가져왔다. 부디 이게 너희가 찾던 것이길 바란다.]

그새 돌아온 까마귀가 부리에 물고 있던 붉은 연기 덩어리를 뱉으며 날개짓하자 흩어진 연기가 공간을 새로 구성했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번엔 좀 밝은 거면 좋겠는데…… 스승님과 군단장 시절 데몬 씨가 대면하는 건데 그럴 리 없겠지. 미리 심호흡이나 하자.

이번엔 시간대가 낮인지 태양이 떠올랐다. 하늘은 푸르렀고 어느 지역인지는 몰라도 사방이 녹음으로 우거졌다.

"리프레군요."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주변 식생을 보고 알았습니다. 8백 년 전이라 좀 다른 것도 있지만 온난한 기후와 지역 특유의 식물들은 확실히 구분되니까요."

제논은 몇몇 식물들을 가리키며 저것은 리프레 일대, 미나르 숲에서만 자생한다고 알려주었다. 지나가는 배경이 이렇게 디테일하게 구현되는 걸 보면 여기가 데몬 씨에게 꽤 중요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첨언도 함께.

여전히 군단장 때인지 예복을 입은 데몬 씨가 야트막하게 난 길을 따라 갔다. 왠지는 모르지만 뭔가 들뜬듯한 얼굴이었는데, 어디를 가길래 저런 표정인가 불안했다. 설마 누구 죽이는데 설레고 있는 그런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었으면.

"저 집이 목적지인 것 같습니다."

"집? 아, 저거…… 저 분은 또 왜 여기 있는 거야!?"

[무슨 상황이래.]

데몬 씨의 목적지로 추정되는 곳은 소박한 2층 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2층 집의 마당에 거대한 오닉스 드래곤이─ 아스카 씨가 있었다. 저 왕관같은 뿔들은 착각할 수가 없다!

적당히 몸을 웅크려 자고 있던 아스카 씨가 데몬 씨의 인기척에 부스스 눈을 뜨더니 그를 알아보고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에…… 너네 집이었구나.〉

데몬 씨도 아스카 씨의 존재에 귀신 보는듯한 표정이 되더니 헐래벌떡 집으로 뛰어갔다. 저기 뭔가 있나?

〈어머니!! 데미안!!〉

가족들이 사는 집이었어?! 우리도 집 안에 따라 들어가니 요란한 문 소리에 사람들이 나왔다. 곱슬거리는 적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중년의 여성과 첫 번째 기억에서 보았던 데몬 씨와 같은 머리색의, 그러나 시간이 꽤 지나며 청년과 소년 사이로 자란 남자애가 놀란 눈으로 데몬 씨를 보았다.

〈데몬? 데몬이니? 무슨 일 있니?〉

〈형!〉

마당에서 아스카 씨를 보고 뭔 불길한 상상을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완전 멀쩡한 걸 확인한 데몬 씨는 안 그래도 푸른 피부가 한층 더 시퍼렇게 질린 채 문고리를 부여잡고 반쯤 주저앉았다.

〈오늘 정말 좋은 날구나~ 반가운 사람들이 다 오고.〉

〈…… 사람'들'이요?〉

〈설거지 끝났습니다.〉

데몬 씨의 질문에 답해주듯 한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스승님이 데몬 씨 집에 왜 계신 거야! 하는 생각에 정작 그 말의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리고 걸어나온 스승님을 보고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어, 저거 뭔.]

"두건이 의외로 잘 어울리네요."

"…… 왜 앞치마를?"

물이 조금 튄 앞치마와 머리 두건, 거품묻은 고무장갑까지 낀 스승님의 모습은 완벽한 주부의 그것이었다. 그 경악스러운 모습에 데몬 씨의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었다.

〈어머, 고마워요.〉

〈별 거 아닙니다.〉

〈데몬도 왔겠다 오늘 저녁은 힘 좀 써야 겠는데~ 자고 갈 거지 데몬?〉

〈아, 예, 예…….〉

더듬더듬 대답하는 데몬 씨의 동공은 지진 마법에 걸린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저기 데몬, 오랜만에 왔는데 미안하지만 방이 모자라니까 오늘 검호 씨랑 같이 잘 수 있니?〉

푸웁! 야 저거 얼굴 봐라! 기어코 빵 터져버린 미르의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으며 나도 헛웃음을 흘렸다. 이 집 앞마당에 아스카 씨가 있었을 때부터 걸리던 것이 저 말 하나에 확신을 해줬다.

데몬 씨의 가족들은 데몬 씨가 군단장인 것도! 스승님이 영웅인 것도! 둘이 완전 적대 관계인 것도 몰라! 뭐야 이게?!

〈안되니?〉

〈아, 뇨. 괜찮, 습니다.〉

"완전 안 괜찮아보이는 얼굴인데요."

[저러다 손에 피나겠다.]

애써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을 꽈아악 쥐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진짜 더 저러면 피날지도. 데몬 씨의 어머니와 데미안이라는 동생은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고, 두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데몬 씨는 바로 표정을 바꿔 살기어린 눈으로 스승님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승님은 두르고 있던 머리두건과 앞치마, 고무장갑을 벗어 정리하는데 바빴지만.

[잠깐 넘기도록 하지.]

[아 이거 좀 재밌는데 계속 보여주지면 안돼?]

[너희가 원하는 부분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까마귀는 몇 시간을 바로 스킵하고 바로 밤이 된 시점으로 바꿨다. 결국 데몬 씨는 스승님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다. 적과의 동침이란 표현이 그대로 이루어지다니.

〈…… 왜 저희 집에 온 겁니까.〉

〈너희 어머니께 감사드릴 일이 있었다.〉

아까 전에 데몬 씨의 어머니는 데몬 씨와 스승님을 같이 '반가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데몬 씨야 아들이니까 그렇다치고 스승님까지 반갑다고 했다는 즉 오늘 이전에 앞서 만났던 적이 있다는 얘기 아닌가. 어쩌면 스승님과 데몬 씨와의 인연은 꽤 예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 작품 후기 ==========

"저 사람 잠옷이 꽤 특이하군요."

"응? 옷이 왜?"

"옷을 구성하는 섬유가 일반적인 섬유가 아닙니다. 적어도 마법적인 제작과정을 거친 게 확실합니다."

제논의 말에 스승님을 다시 보았다. 이불을 덮고 있어서 입고있는 잠옷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은은히 마력광이 반사되는게 일반적인 섬유가 아닌 건 일단 확실해보였다.

"근데 난 스승님이 저런 옷 가지고 계신 거 못 봤는데."

[8백 년 전이잖아. 그 정도 시간이면 좀 특별한 마도복이라도 다 삭아.]

"역시 그런가."

[그보다 난 저 사람이 잠옷같은 걸 따로 입는 성격이었다는게 더 놀라운데.]

그것도 그렇네. 사실 스승님의 화려한 옷은 안에 여러 겹의 내의를 받쳐 입는 형태라 잘 때에는 겉옷을 벗는 식으로 해서 저런 파자마 차림은 처음 본다. 현재에 와선 없어져서 그렇게 된 걸까.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에도 두 분의 말은 작은 목소리로 계속 이어졌다. 군단장들은 아직 리프레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지만 어둠의 힘에 영향을 받았을 몬스터들이 날뛰어 그걸 아스카 씨가 처리했다고 한다.

〈…… 감사합니다.〉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스승님께 감사인사를 하는 데몬 씨의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몬스터에게 위협을 받는 이들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지만, 군단장의 가족인데? 거기다 앞서 데몬 씨의 격한 반응을 생각해보면 그가 가족을 정말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추측쯤은 당연히 할 수 있을테고, 잘만 하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 알고 있나.〉

낮게 울린 목소리가 뻗어나가던 생각을 잘라냈다.

〈그거 헛소리다.〉

〈예…… 예?〉

〈힘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아. 힘은 그냥 힘일 뿐이야.〉

영웅되신 분이 할 말이 아닌데요!? 예상밖의 말에 당황한 건 데몬 씨도 마찬가지인지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차게 식었다.

〈대신 그 힘으로 저지른 일엔 반드시 책임이 따르지. 너는 네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게 될 거다.〉

경고인지 예언인지 모를 말에 데몬 씨는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이미 각오하고 시작한 일입니다.〉

〈네가?〉

창밖만 보며 등만 보이고 있던 스승님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였다. 꽤나 심기불편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감정 표현을 그렇게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 스승님의 특성 상 저 정도면 정말 노골적으로 감정을 내비치고 있는 거다.

동시에 기억 속에 들어오기 전에 데몬 씨가 해주었던 당부가 떠올랐다. 절대같은 말, 그럴 리 없다, 후회하지 않는다, 각오했다 같은 말들은 함부로 하지 말라고. 미래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고 나에게 - 스스로에게 되새기듯이 말하던 모습과 바로 앞에서 마지막 신관이 피 튀기며 결국 같은 처지가 될 거라며 외치던 장면.

답은 간단히 나왔다.

"…… 데몬 씨는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책임을, 대가를 치룬 모양이네요."

[그렇다.]

"그리고 그 대가는 검은 마법사를 배신한 것과 관련이 있는 거 같고."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아이구나.]

무의식적으로 그 대가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지만 입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운명의 여신은 매우 공정한 이일 것이다.

[그래서 이게 너희가 찾던 기억이 맞나.]

"아니요."

[도대체 너희는 어떤 기억을 찾고있는 거냐?]

"검호 그 남자가 자신의 목적을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걸 언제, 어느 상황에서 말했는지 저희도 전혀 몰라서 일단 알고 있는 조건들을 놓고 여기에 해당되는 기억들을 요구한 겁니다."

[말의 내용과 별 상관없는 상황에서 말했다고 해서 대화주제를 한정시킬 수도 없거든.]

[까다롭군.]

제논과 미르는 답답해하는 까마귀에게 일단 알고 있는 해당 기억의 조건들을 알려주었고, 까마귀는 다시 기억을 가지러 갔다.

'스승님은……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본 기억을 다시 수첩에 요약하며 어디서 뭘 하고 계실지 모르는 스승님이 생각났다. 그분은 8백 여년 전 옛날부터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

검호side.

일을 정리한 대로 레벤 광산 아지트에서 다시 루타비스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와 함성이 몸을 덮쳤다.

[우!윳!빛!깔! 엔─! 버─! 사!랑!해!요! 엔─! 버─!]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어서 다음 곡은 '나의 마음을 담아'~!"

[와아아아아아─!!]

허미 쉽펄 저게 뭐시여. 저놈들 이제 완전 방음된다고 아주 막나가는 거냐. 못 본 척 지나가려 했는데 열광적으로 핑크색 하늘색 응원봉을 흔드는 이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는 사람이 매우 눈에 익었다.

"좀 더 박자를 맞춰서 해라! 함성 소리에 노래 가사가 묻히면 절대로 안되니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단장!""

"…… 뭐하냐 너."

"아.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엔젤릭♡버스터 라는 문구가 쓰인 분홍색 머리띠를 쓰고 다른 응원봉들보다 더 긴 광선검같은 응원봉을 든 카이저가 나를 보았다. 저놈은 또 왜 저 꼬라지야!

"이게 뭔 상황이냐."

"간만에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여기 온 이후로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서 열 기회가 없었는데, 잠시 쉰다고 하니 이 기회에 제대로 콘서트를 개최했죠."

그래, 휴식이 중요하긴 하지.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며 살 수 있어? 가끔씩 스트레스 해소도 좀 해야 숨통 틔이고 그러지…… 근데 이건 숨통 틔우는 걸 넘어 폐를 끄집어 낸 수준이잖아!! 아무리 방음이 잘 된다지만 도가 지나쳐! 경쾌하게 울리는 일렉기타 반주에 아주 메이플 월드 최적화 끝났구먼 싶어 무대쪽을 봤는데, 연주자가 키네시스다. 저 새끼가?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줄 거야~ 메마른 가슴 속을 적셔줄 멜로디~"

거기다 익숙한 가사와 반주, 들어보니 저 노래 옛날에 더빙 잘 된 걸로 유명한 모 애니 오프닝이다! 왜 저 노래를 쟤가 부르고 있는 건데!? 성우가 같아서냐!

"저 노래는 예전에 파픈스타 님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밝고 경쾌해서 티어가 좋아하는 곡이죠."

"어……."

파픈스타가 저 노래를 무대 위에서 춤추며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음, 이런, 젠장 웃음밖에 안 나와.

"그보다 당신도 엔젤릭 버스터 팬클럽에 가입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가입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광선검 사이즈 응원봉과 특별 굿즈 추첨권도 드리는데요."

"…… 누가 그걸 받겠다고 가입하는데."

"마족들이 가입하고 있습니다만."

야!! 너희 주군 싸다귀 날린 여자랑 같은 종족의 아이돌이잖아! 잘 보니까 진짜 응원봉 흔드는 놈들 중에 마족들이 섞여있다! 굿즈가, 굿즈가 그리 갖고 싶더냐!

"대체 특별 굿즈라는게 뭔데?"

"10분의 1 사이즈 피규어요."

누가 가서 경찰 불러와! 아니면 영웅즈라도! 그딴 건 언제 어떻게 만든 거야 니놈들!

"그, 그보다 이데아는 어디 있냐."

"이데아 님은 집무실에 계실테니 거기 가시면 될 겁니다."

"알았다. 열심히 해라."

카이저의 대답도 듣지않고 나는 도망치듯이 콘서트가 열리는 곳을 빠져나와 사무동으로 향했다. 내 살다살다 메이플 월드에서 아이돌 콘서트와 팬클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진짜. 키네시스 그놈은 쉰다더니 왜 기타리스트로 전직한 거야? 아님 그게 그놈한테 쉬는 건가? 먼저 내 방에 가서 지겨운 블랙윙 제복을 대충 벗어던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데아의 집무실로 갔다.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이데아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다른 손님도 한 명 보였다.

"데미안 니가 왜?"

"나도 딱히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

"이제 온 건 가요. 일단 선객부터 처리한 뒤에 당신 말을 듣도록 하죠."

오고싶어서 온 게 아니라면 부하들 관련인가. 당장 떠오르는 건 초월자로 가장한 오버시어의 봉인의 파수꾼으로 발탁된 4인방들이었다. 실제로 걔네들 일때문인 것 같고.

"영웅들과 연합 놈들이 내려오는데 앞으로 길게는 5시간쯤 걸린다더라."

"의외로 늦네요."

"그런데 처리 자체는 빠를 거래. 뭐 어떻게 대화했는지 놈들을 잔뜩 열받게 해서, 연합들 지원도 안 받고 단독으로 격파해주겠다고 선언했다는데."

벌써 온 건가. 예측에서 벗어나진 않았지만 빠른 편이다. 아니 근데 나한테 맞고 이데아한테 부려먹혀서 약화된 놈들이 뭐 믿고 영웅들을 도발한 거야?

"그 선언 아란이 했나."

"어떻게 알았어?"

"지원도 안 받고 일 대 일로 격파해주겠다는 말은 아란이나 할 법한 대사니까."

신중한 성격인 루미너스와 팬텀이 저런 말을 할 리 없다. 보나마나 4인방 놈들이 영웅들을 얕봤거나 했겠지. 그래도 지금쯤이면 영웅들 힘도 거의 다 회복되었을텐데 그런 도발따위 받은 시점에서 안전하게 하나씩 격파하자는 생각따위 날아갔을 거고, 이참에 몸도 풀 겸 전력으로 할 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영웅들한테 내 부하들이 당할 리 없어."

"그건 모른다. 넷 다 약해진 상태고, 걔들도 괜히 영웅이라 불리는게 아니니까."

"영웅따위 나보다 약하거든?"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너 지금은 무기 박살나서 전보다 약해졌잖아."

"시꺼! 무기 부순 당사자가!"

참고로 나중에 알았지만 데미안이 마스테리아에서 가져왔다는 '파멸의 검'이란 마검은 나와 싸우던 중에 박살났단다. 굉장히 강력할뿐만 아니라 단단하기도 했다는데 그래봤자 애초에 시간이 멈춰 부서지지 않는 오버시어 특제 검에 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지금 데미안은 카이저가 쓰던 모조 카이세리움을 빌려쓰고 있다.

"근데 그거 쓸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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