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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스의 지시에 따라 다량의 로프 사다리를 구해온 슬리피우드 조사대와 메르세데스가 수직통로를 내려갈 준비를 거의 끝낼 무렵, 루미너스에게 붙여주었던 바람의 정령이 돌아왔다.
[메르세데스. 정찰 결과를 알려주겠다.]
"모두 무사해? 별 일 없었어?"
[유감스럽게도 이 아래엔 노바족이 없었다. 협상에서 아지트를 버리고 다른 곳에 갔다는 말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지.]
"…… 아 젠장."
쌍방향 통신이 아닌 일방적인 보고였지만 메르세데스의 반응을 예상하고 말을 남겼는지 루미너스의 목소리와 그녀의 반문은 대화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대신 마족들이 있다. 4명밖에 안 되지만 하나하나 굉장히 강력한 놈들이다.]
"어느 정도인데 그래?"
[대충 군단장 정도로 보인다.]
뭐?! 그녀의 당혹성에도 정령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실제 군단장에 비하면 약하다. 군단이 없고, 앞서 검호와 전투를 치뤄 약체화된 상태니까. 우리가 한 마리당 한 명씩 처리할 수 있는 정도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그놈들 뭐하는 놈들이야?"
[개인적인 추측이 섞여있지만 마족 군단이 왜 하필 이곳을 습격하고 또 대부분 자리를 떴으면서 군단장 급의 강력한 마족들을 남겨둔 이유를 알아냈다.]
"어? 진짜?"
[자세한 건 직접 보는 편이 이해하기 편할테니 내려왔을 때 말해주겠다. 그리고 수직통로를 바닥까지 비추는 빛줄기를 만들었으니 시야확보는 문제없을 거다.]
보고는 여기까지였다. 바람의 정령은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흩어졌고, 메르세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가 끝난 연합원에게 수직통로 진입을 지시했다.
"호? 바닥까지 비춰준다는 빛이 저건가?"
"이야…… 장관이구만."
"이걸 쓰다니, 밑은 꽤 안전한 모양이네."
나무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걸로 보이는 빛기둥이 수직통로를 훤히 밝히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내려갈 때 잘 보이겠네. 메르세데스는 바람의 정령들로 몸을 띄워 통로를 내려가며 로프 사다리의 앵커를 벽에 박았다.
루미너스가 예상했듯이 그들이 통로 바닥에 다다른 건 족히 4시간 가량이 지나서였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빛기둥이 루미너스의 오브로 만든 거라는 걸 알 수 있을만큼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메르세데스는 위에서 떨어진 물이 고인 웅덩이같은 것 주변에 모여있는 동료들을 찾았다.
"아, 얘들……!"
"아악!! 이 거지같은 꼬맹이가─!"
그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들떠 부르려는 순간 아란이 괴성을 내지르며 땅을 쿵쿵 밟았다. 작은 지진이 일어난 것 마냥 바닥이 흔들린 건 덤이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진짜!?"
"일단 진정해 아란."
"진정은 개뿔이! 저딴 소릴 들었는데 화 안 나게 생겼어?!"
"계속 화내봐야 대화가 진행되진 않으니까 열 좀 식히라는 거다."
씨근덕거리며 물웅덩이에서 등을 돌리는 아란의 모습에 뭔 일이 있었던 건지 감도 안 잡혀 메르세데스는 바로 묻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제 온 건가."
"일찍 왔네."
하나 둘 바닥에 도착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팬텀과 루미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란은 또 왜 저렇게 화가 났어?"
"마족들한테서 구해줘야하는 대상이 심하게 재수없거든."
"구해줘야하는 대상?"
"보고에서 말한 '마족 군단이 슬리피우드 기지를 노린 이유'와 '기지를 떠났으면서 강력한 마족들을 여기 남긴 이유'가 그 대상때문으로 유력해보여 너희가 올 때까지 그와 어떻게 접촉해 대화를 나눴는데……."
루미너스는 드물게 말꼬리를 흐리며 물웅덩이 쪽을 흘깃 보았다.
"했는데?"
"좀, 아니 꽤 문제가 많은 이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래?"
"……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한참 막사를 펼치고 주변을 살피는 병사들과 모험가들이 있는 쪽을 한 차례 본 뒤 메르세데스의 입을 텁 막았다.
"생명의 초월자다."
"므, 읍!?"
"소리지르지 마라. 어차피 나중에 저들에게 알릴거고, 여제에게도 전해야하는 사실이지만 당장은 여길 시끄럽게 해선 안된다."
그가 불쾌하게 여길테니까. 농담같았지만 루미너스가 이런 농담따윌 하는 성격이 아니란 걸 잘 아는 메르세데스는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메르세데스는 바람의 정령으로 주변에 소리가 퍼지지 않도록 방음벽을 쳤다.
"그 사람─ 이 아니라 그 존재가 왜 이런 곳에 있는데?"
"생명의 초월자는 그 동안 검호와 협력, 못해도 조력 비슷한 관계에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마족들이 어떻게 생명의 초월자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채 습격했고, 검호 측은 이에 대항했지만 결국 여기 두고 떠난 거지."
"그건 이상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생명의 초월자인데 마족들따위에게 잡힐 리가 없고, 마족도 기껏 확보한 생명의 초월자를 여기 놔두고 어딘가로 갔다니."
"내 말은,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했다는 거다."
그는 재차 물웅덩이쪽에 시선을 던졌다. 왜 자꾸 저길 보는 건가 의아함을 느낀 메르세데스는 슬쩍 몸을 틀어 물 속을 보았다가 흡 눈을 떴다. 숨이 멎어버릴만큼 아름다운 푸른색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푸른색의 중심에 있는 나무줄기에 묶인 10살 가량의 아이가 서늘한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
"저 자가 생명의 초월자다. 그러니 말 조심해라."
"하, 하아……."
고작 눈이 마주친 것 뿐인데 숨이 막히는 위압감에 메르세데스는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젠장 검은 마법사 앞에 섰을 때 생각나잖아!
"아까 설명한 건 대외적인 설정이다. 실제로는 검호가 일부러 그를 여기에 남겨둔 거지. 우리가 여기서 가져가야 할 것이 바로 생명의 초월자다."
"그럼, 마족들은."
"뭘 조건으로 거래했는진 모르겠지만 노바족과 협력 관계로 보인다. 결코 중요하지 않을 리 없는 전력인 군단장 급 마족 4명이 저 봉인에 가담한 걸 보면 보통 긴밀한 관계는 아닌 게 확실해."
그들을 응시하던 아이는 어느새 눈을 감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다 물 속의 아이와 좀 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공동 벽쪽에 있는 문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봉인이라면……?"
"저 문 너머에 아까 말한 군단장 급 마족들이 있다. 그들을 쓰러뜨려야 생명의 초월자를 묶고 있는 봉인이 풀린다더군. 자세한 건 나중에 병사들에게 브리핑할 때 얘기할테니 이쯤하지."
계속 말하느라 다소 지친 루미너스는 다시 자리에 앉아 물웅덩이의 물을 한 움큼 떠서 마셨다.
"그, 그거 먹어도 돼?"
"된다더군. 거기다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답게 준 포션급으로 효과가 좋다."
아무리 그래도 저걸 먹는 건 좀. 메르세데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생명의 초월자가 가라앉아 있는 샘을 보았다가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노바족이 자금을 모으는 수단 중 하나가 포션 판매였는데?
잠시 후 어느정도 캠프가 완성됐을 무렵, 루미너스는 병사들에게 메르세데스에게 했던 설명을 재차 했다. 물론 어느 부분은 다소 숨기고, 어느 부분은 세세하게 풀어주는 식으로 변형을 가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봉인된 생명의 초월자를 구하기 위해 봉인의 수호자들을 격파해야 한다. 지휘반과 탐사반, 통신반, 부상자를 제외한 이들은 우리와 함께 봉인의 수호자들과 싸워야하니 무기를 정비하고 몸을 풀도록."
""알겠습니다!""
그 사이 전력 편재를 어떻게 할지 대장과 의논하려고 생각하던 찰나, 브리핑 내내 침묵하던 아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잠깐만, 나는 혼자 갈게."
"예? 잠시만요 영웅님! 아무리 그래도 놈들을 혼자 상대하시는 건 위험……!"
"내가 아니라 너희가 위험해질테니까 하는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방해거든."
냉정한 걸 넘어 무정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자신들을 무시하는듯한 그 말에 한 병사가 외쳤다.
"저희도 놈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 아닙니까!?"
"누가 니들이 그 지렁이랑 못 싸울까봐 그런데? 그건 어떻게든 될 수 있겠지."
문제는 내 공격을 피하진 못할 거란 말이야.
"…… 영웅님의 공격이요?"
"난 이번에 아주 작정하고 싸울 거거든. 그놈은 그 정도로 강해."
"설마 마하를 들 거냐."
"그래. 이제 힘도 거의 다 회복되서 들 수 있거든."
아란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하던 루미너스는 그녀의 대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다. 마하를 든 아란에게 지금 여기있는 연합원 정도의 힘으론 도움은 커녕 방해밖에 안될테니까. 최소한 저 테스쯤 되는 게 아니면 빠지는 편이 낫다.
"하지만 루미너스 님!"
"결정에 불만이 있어보이니 물어보지. 눈보라 속에서 전투를 할 수 있나."
"갑자기 그게 무슨─"
"실시간으로 땅이 얼고 깨지며 눈발이 휘날리는 전장에서 얼마나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지."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병사는 진지한 그의 표정에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잘……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그녀가 제 무기를 들고 싸우면 벌어지는게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차라리 빠지라고 한 거고. 적의 공격이 아니라 아군의 공격, 그것도 직격이 아니라 여파에 쓰러지면 안되니까."
그리고 자신의 공격에 아군을 쓰러뜨리는 기분도 절대 좋지 못하지. 아란은 느슨해진 머리끈을 풀었다가 다시 단단히 묶었다.
"무례하게 들렸으면 사과할게. 하지만 그놈을 확실하게 쓰러뜨리려면 무기를 들어야 하고, 그러면 적뿐만 아니라 너희에게도 여파가 미칠 게 분명해서 오지 말라는 거였어. 우릴 도와주려는 마음이나 투지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8백 년 전 메이플 월드는 각 나라끼리 싸우느라 정작 검은 마법사의 군단과 싸울 때조차 협력을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웅들은 군단과 싸울 때 국가의 지원은 커녕 대개 자신들의 힘만으로, 기껏해야 나름 정의감 넘치는 이들의 보조정도를 받으며 싸워야 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걱정하지마. 이 누님은 강하니까."
아란은 할버드를 어깨에 짊어지며 자신만만하게 씩 웃어보였다.
***
걱정하지 않는다면서도 저에게 하나라도 더 버프를 걸어주려는 동료들의 호의를 끝내 거절하지 못한 아란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늦게 벨룸의 영역에 들어섰다.
[정말로 혼자 왔군.]
"전사가 한 입으로 두말할 리 없잖아."
오면서 베어넘긴 임프들의 피가 묻은 도끼날을 흔들어 털어낸 그녀는 제단 앞에 또아리 튼 벨룸의 앞에 섰다.
[그래. 니년의 배짱 하나는 인정해주마.]
"나도 너의 허세만은 인정해줄게. 넌 내가 여기 올 때까지 어떻게든 체력을 빼놓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될 거야."
군단장들은 우릴 상대할 때 항상 혼자 싸우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녀는 전사임에도 광범위한 피해를 일으키는 스킬들을 더러 만들어내야 했다.
[우린 놈들보다 강하다.]
"그건 대보면 알 일이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와 싸워서 약해졌잖아?"
[…… 그 끔찍한 광전사에 대한 얘기는 지금 하고싶지 않군.]
"광전사? 누가?"
그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생경한 표현에 아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도발하는 건가 화내려던 벨룸은 정말로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아란의 표정에 그녀가 그의 전력을 모른다는 걸 알았다.
[하……! 같은 영웅이면서 동료였던 이의 힘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이냐.]
"입 닥치지 지렁이?"
[그렇군. 그랬던 거였어. 니년은 그와 같은 영웅이라고 불리지만, 그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어. 그래서 이기면 그에 대해 다 말해라고 한 거군.]
"그 입, 다물라고 했다."
새파란 눈이 당장이라고 폭발할듯이 일렁거렸다.
[적에게 동료의 정보를 얻어야 하는 처지라니, 이건 동료라고 부르기도 힘들군. 아니, 지금은 정말 동료조차 아니지 않나?]
"─좋아. 니놈 몸뚱이를 해체해 고인돌을 쌓아주지. 마침 제단도 있겠다 바로 장사지내주마!"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계집!]
고함과 함께 예고없이 쏘아진 화염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딴 걸로 날 어쩌겠다고? 장난치냐!"
아란은 푸른 냉기를 머금은 할버드를 쳐올려 단숨에 화염구를 쪼갰다. 벨룸의 거체가 움직이며 생기는 진동에 떨어지는 파편들따윈 그녀의 몸 위로 휘몰아치는 기파에 순식간에 먼지로 화했고, 아란은 곧바로 냉기로 발 아래에 빙판을 깔아 바닥을 쭉 미끄러지며 벨룸에게 근접했다.
"이게 니놈의 전부라면 얌전히 토막쳐지는 걸 기다리지 그래!"
[기고만장하구나!]
벨룸의 몸에서 녹빛 전격이 뿜어져나왔다. 막을 수 있는 방패수단은 전무, 그렇다면!
휘이이잉─!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얼음의 무구와 냉기의 영수(靈獸)들이 그녀의 주변에 형성되었다. 뒤이어 날아든 녹빛 전격은 이들에 막혔으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냉기의 방벽 사이로 녹색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들어왔다.
"독 번개라니. 이런 조합은 처음인데."
불과 독, 번개와 얼음을 함께 쓰는 마법사들은 봤었지만 독과 번개를 조합하는 건 처음 본다. 하지만 처음보는 것일 뿐, 위력적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애초에 그녀는 한참 약해진 상태에서도 리에나 해협의 독으로 오염된 바다를 헤엄치고도 살아돌아온 몸, 현재 거의 모든 힘을 회복한 그녀가 이런 독따위에 중독될 리 만무했다.
냉기의 방벽을 거둔 그녀는 그새 벨룸이 사라진 걸 알았다. 싱크홀 마냥 뻥 뚫린 구멍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충분히 알게 해 줬다.
"귀찮게……."
그 육중한 몸이 움직이는데 진동이 없을 리 없다. 지금도 그녀는 벨룸이 움직이며 생기는 진동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로 솟구칠지는 지면에 다다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아란은 숨을 가다듬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드레날린으로 달궈진 몸과는 반대로 어느때보다 차가워진 머리는 땅을 통해 올라오는 진동으로 벨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디로 나올지 차분히 계산했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아란은 어떤 움직임도,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벨룸이 지면에 다다랐는지 진동은 점점 심해지며 그녀를 교란시키려는 양 땅과 천장이 모두 흔들어댔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정점을 찍은 순간─
'─저기다!'
그녀는 뭔가가 솟구치려는 한 곳을 향해 최고 속도로 뛰쳐나갔다. 예측한대로 해당 지점을 뚫고 바윗덩이 몸이 솟구쳤으나,
'꼬리?'
속았다! 그 사실을 퍼뜩 눈치챘으나 머리쪽은 이미 저만치에 나와 이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 머금어진 것은 앞서 만났을 때 저에게 쏘려다 끝내 제지당한 유황불의 숨결, 저걸 직격으로 맞았다간 그녀도 무사할 수 없다.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거리. 그렇다고 무턱대고 피하기엔 구체적인 범위조차 모르는 상황.
그러나 아란은 공포에 질리긴 커녕 흉폭하게 웃으며 외쳤다.
"간만에 전투다! 이리 와 마하!"
콰아아앙──!!
천장에 푸른 원이 그려지며 그 안에서 소환된 거의 집채만한 폴암이 벨룸의 머리를 강타했다.
***
에반side.
이후 데몬 씨의 기억들을 계속 찾던 중 나는 말로만 들어봤던 몇몇 군단장들을 볼 수 있었다. 협상 자리에서 이데아가 배신자라고 말했던 폭군 매그너스와 시간의 대신관 아카이럼, 윙 마스터 오르카 등…… 또 데몬 씨처럼 지금은 군단장이 아니지만 과거 군단장이던 시절 미쳐있었던 구와르 씨와 사이키커도 보았다.
그리고, 스승님의 동료라는 파픈스타 역시.
[엄청 예쁜 여자네.]
"그러게."
푸른 빛이 도는 풍성한 흑발을 헐렁하게 양갈래로 묶어내린 바다색 눈의 여성. 메르세데스 님이나 페어리 퀸만큼은 아니지만 꽤 예쁘고 어려보이는 얼굴과는 반대로 입고 있는 옷은 팔다리를 거의 다 내놓은 대담한 차림이라 여러모로 굉장히 눈에 띄었다.
그녀는 스승님과의 싸움으로 부상을 입은 데몬 씨에게 다가왔다.
〈뭔 일로 니가 이렇게까지 다친 거야?〉
〈알 필요 없다 악사. 빨리 치료나 해라.〉
데몬 씨의 부관인 마족 여성은 상대가 군단장임에도 고압적으로 말했다.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조차 풍겨지는 콩가루 냄새가 이젠 놀랍지도 않다. 파픈스타는 크게 표정이 바뀌지 않았지만 미미하게 불쾌감을 내비치며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었다.
〈누구한테 어떤 공격을 당했는지 알아야 적절한 치료를 하지.〉
〈감히 안 하겠다는 것이냐!?〉
〈부탁하는 입장이면 최소한 예의를 갖추라는 거야. 내가 너의 상관과 같은 위치인 거 몰라?〉
〈하! 직접 나서서 싸우지도 않고 후방에서 치료 좀 하고 종이만 만지는 니가 정말 이분과 같은 위치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래도 그녀는 말이 군단장이지 실제로 군단을 이끌거나 전선에 나서는 타입이 아닌 듯 했다. 예전에 나인하트 씨에게서 들었던 그녀에 대한 정보도 '뛰어난 치료사'정도였지 위협적인 존재라는 말은 없었고, 적어도 지금까지 둘러본 데몬 씨의 기억에서도 그녀가 전장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 그래. 내가 딱히 나서서 싸우는 타입은 아니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너의 상관의 생사를 정하는 건 나라는 걸 좀 알아줄래?〉
〈이게……!〉
〈그만하세요 마스테마. 지금 그녀와 싸워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이 여자가 건방지게!〉
〈미안합니다. 제 부관이 제가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걸 처음보는지라 이성을 많이 잃은 모양입니다.〉
〈알면 제때 좀 단속해. 더 입을 놀렸으면 치료 관뒀을 거야.〉
기억들을 보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데몬 씨는 콩가루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군단장들 중에서 그나마 점잖은 편에 속했다는 거다. 농담이 아니라 군단장 측 책사 아카이럼과 프라이쉬츠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단장들과 사이가 완만했다. 그의 사과에 파픈스타는 콧잔등을 찡긋거리다 메고있던 기타를 앞으로 가져와 줄을 튕겼다.
〈라아아아아…….〉
마력이 실린 목소리와 기타소리가 공명하며 회복 마법 특유의 녹빛이 데몬 씨의 상처에 빠르게 모여들었다. 세상에 저건 무슨 마법이래? 노래 가사같은 주문의 마법은 몇 개 알지만 노래와 연주만으로 발동되는 마법은 처음 본다. 효과도 보통의 힐링보다 더 뛰어난 것─
〈뭐냐 악사! 왜 치료가 안 된 거야!?〉
〈어? 왜 이러지?〉
같지가 않네. 본인도 당황했는지 파픈스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처부위를 다시 확인했다. 여전히 피가 흐르는 상처에 손가락이 닿아 데몬 씨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파픈, 스타. 마스테마가 했던 말은 제가 대신 사과할테니 제대로 좀.〉
〈그거 아니야. 다시 해볼게.〉
그녀는 기타줄을 재차 튕기며 다시 노래했다. 조금 전보다 더 짙은 마력이 깃든 목소리와 함께 이번엔 오색찬란한 빛조각들이 상처 위를 덮었다. 이번엔 상처가 좀 아물었지만 환부의 벌건 속이 다 보이는 건 여전했다.
〈치료할 생각이 있긴 한 거냐 악사!〉
〈이거 진짜 왜 이러지? 잠깐만 있어봐.〉
마스테마라 불린 마족은 초조함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고, 데몬 씨도 슬슬 스트레스가 올라오는지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파픈스타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손가락 끝에 우윳빛 마력을 집중시켜 그대로 상처에 푹 쑤셨다.
〈컥……!〉
〈이게 무슨 짓이냐!!〉
〈아 씨, 너 저주에 걸렸으면 걸렸다고 미리 좀 말하란 말이야!〉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마스테마는 손에 포스를 휘감고 휘둘렀지만 파픈스타가 든 기타에 텅! 막혔고, 동시에 그녀는 상처에 넣었던 손을 급히 빼냈다. 손을 뺀 부위에서 붉은 안개가 파스스 새어나왔다.
〈갑자기, 무슨, 저주 타령입니까.〉
〈상처를 악화시키는 저주가 심어져 있었잖아! 어떤 마법사랑 싸운 거야?〉
〈마법사는 고사하고 순수한 전사였습니다만.〉
〈뭐?〉
이 기억은 데몬 씨가 군단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스승님과 재회했던 순간 - 오르비스를 침공했던 날의 기억이다. 스승님께 검은 마법사 휘하에 오지 않겠냐고 제의했다가 면전에서 거부당하고, 직후 한바탕 전투를 벌인 뒤 철수한 시점이다.
〈혹시 그 사람 흑기사 클래스야?〉
〈아닙니다. 잡기따위 쓰지 않는, 순수하게 검을 갈고닦은 이입니다.〉
〈잘 아는 사람인가봐?〉
〈…… 옛 은인이었으니까요.〉
이제는 아니지만. 이날의 싸움을 기점으로 데몬 씨는 스승님을 적대시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보다 저 사람, 역시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군단장이 되기 이전인 게 확실한 것 같은데 만약 그가 자신의 목적을 얘기한 게 저 사람이 군단장이 되기 전이라면 거기까지 봐야하는 거 아닙니까."
"힘들지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사람 지치게 만드네. 이런 사실은 진작에 좀 말해주지.]
"데몬 씨도 본인이 언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모르시잖아. 이해해드리자."
그러는 사이 파픈스타는 또 다른 회복 마법을 사용하려는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몸 위로 끌어올린 마력이 물결처럼 일렁거렸고, 이내 입이 열리며 파도치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의 파동이 데몬 씨의 전신을 골고루 흝었다. 앞서 두 번의 회복 마법에도 거의 치료되지 않던 상처들은 그제서야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후우, 이제 됐네.〉
〈괜찮으십니까 데몬 님!〉
〈괜찮습니다. 그러니 떨어지세요.〉
〈상대가 순수하게 전사였다는 거 진짜야? 이걸 써야 겨우 사라지는 독한 저주를 전사가 어떻게 써.〉
〈내가 어떻게 압니까. 아무튼 당신이 그것도 치유할 수 있으니 문제는 없겠군요.〉
무시받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아니라 최고급 약통 취급에 파픈스타는 인상을 썼다. 물론 데몬 씨와 마스테마는 그런 그녀의 기분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이 기억도 아닌듯하니 이쯤하지.]
까마귀가 날개짓하며 풍경을 지웠다. 아 이건 좀 더 보고싶은데.
[뭔가? 설마 아까 그게 찾는 기억이었나?]
"그건 아니고, 마지막에 나왔던 여자가 스승님과 관련있는 사람이었거든요."
"다만 하는 말로 볼 때 해당 시점의 그녀는 그와 아는 사이조차 아닌 것 같았습니다."
[동료가 된 건 좀 더 뒤의 일인 모양인데.]
그녀가 데몬 씨의 상처에서 끄집어낸 붉은 안개같은 저주는 에레브 협상 때 본 적 있다. 자신을 겨누는 무기들을 순식간에 녹슬어 망가뜨린 붉은 기류. 검 솜씨와 무관하게 스승님이 사용하는 힘? 스킬? 같은 모양인데 만약 이때 그녀가 스승님의 동료였다면 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거기다 마지막에 쓴 마법…….'
푸른 파동이 붉은 저주를 지우며 상처를 치료하는 순간, 어렴풋이 그 마법의 원리를 추측할 수 있는 기가막힌 장면을 보았다. 두 번째 회복 마법을 썼을 때 약간이나마 재생되었던 상처가 푸른 파동이 닿는 순간 도로 벌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마치 시간을 되감아 상처가 아예 없던 순간으로 돌려버린 것처럼.
'참, 그런게 가능할 리 없는데.'
시간을 다루는 건 현재의 마법으로도 거의 불가능할만큼 고난이도의 영역이다. 그나마도 조금 가속시키거나 느리게 하는 정도에 그쳐있고, 아예 시간을 멈추는 일은 과거 대마법사 프리드만이 펼쳤다고 할만큼 대이적의 경지에 있다. 그런데 시간 회귀라니? 그건 정말 시간의 초월자 륀느나 쓸 수 있을 기적이다.
[다른 기억을 가져오겠다. 제발 다음 기억이 너희가 찾는 기억이길 바란다.]
기억 가져온다고 몇 번이나 오락가락한 까마귀의 목소리는 지친 걸 넘어 숫제 간절하기까지 했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 진짜 제발 이제쯤 나와라!
방금 본 기억 이전에 데몬 씨 혼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단독으로 도시를 궤멸시키는 걸 봤을 땐 욕도 안 나왔다. 그때 데몬 씨가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집채만한 마견과 뱀처럼 생긴 독을 뿜는 마룡, 포악한 쌍둥이 악마? 같은 걸 줄줄이 소환해 도시에 풀어 영웅분들을 분산시킨 뒤 본인도 날아다니며 도시를 파괴할 땐 참…… 그쯤되니 저 사람이 전사인지 소환사인지가 더 궁금해지더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에반."
"어 그게, 다음엔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억을 보게 될까 걱정되서."
"확실히…… 그건 우려되는 일이지요."
[그 동안 영웅들이 왜 그 사람을 한시라도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지 잘 알게 되긴 했는데 딱히 더 알고싶진 않네.]
"내 말이."
들어오기 전부터 예상했지만 데몬 씨가 스승님을 만난 기억의 대부분은 전투중이었고, 그 중엔 눈 뜨고 못 볼 짓을 저지르는 장면도 상당히 많아 나는 물론이고 감정 표현이 드문 제논까지 어느새 피폐한 얼굴이 되었다.
"거기다 다른 군단장들도 데몬 씨 못지않게 맛이 간 놈들이란 걸 알았고."
[난 그 사이코 여자애가 진성 미치광이로 보이더라 마스터. 협상 때도 뭔가 정신병자같이 보이긴 했는데 옛날엔 다른 의미로 똘끼 넘치더만.]
"사이코가 아니라 사이키커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다른때라면 똑바로 부르라고 지적했겠지만 미르 말대로 군단장 시절의 사이키커는 정말 제대로 된 미치광이였기에 사이코란 호칭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군단장 중에서 그나마 정상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까 본 파픈스타 한 명 뿐일 수 있냐.
[그야 애초에 정상인이 군단장같은 걸 할 리 없잖아.]
"어 그렇네."
그래서 스승님은 파픈스타랑 동료가 됐나? 근데 미르 말을 듣고보니 군단장인데 정상인처럼 보이는 파픈스타도 뭔가 이상하다. 어떻게 군단장이 정상인처럼 보일 수 있어?
"이제 준비합시다. 저기 안내자가 돌아오네요."
"이번엔 싸우는 기억 아니면…… 좋겠는데 또 싸우는 기억이겠지."
[에이 혹시 모르지. 또 그 사람 집에 찾아갔을 때일지.]
[유감이지만 싸우는 기억이다. 그것도 꽤 거하게.]
아 젠장.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허나 어쩌면 이것이 너희가 찾는 기억일지도 모른다.]
"예, 예 그렇죠. 결국 다 봐야죠."
"힘들면 저희만 보고 알려주는 식으로 하는 건─"
"아니 됐어. 내가 직접 눈으로 봐도 확신이 설까 말까인데 전해듣는 식으론 알 수 없어."
[결정한 것 같으니 이제 보여주지.]
까마귀는 물고 온 연기를 뱉어내며 몇 차례 날개짓해 사방에 퍼뜨렸다. 이것도 몇 번이나 봐서 이젠 만들어지는 주변 풍경만 봐도 기억의 장소가 어디인지 대충 알게 되었다.
"리프레?"
[또 가족들을 만나는 순간인가?]
"아까 안내자가 둘이 거하게 싸우는 기억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 사람은 가족들이 리프레에 살아서 여기선 거의 싸우지 않잖아.]
"이전까지 그래왔다고 앞으로도 그럴거란 보장따위 없죠. 일단 그가 여기서 전투를 했었다는 건 사실이니."
그러는 사이 풍경은 점점 선명해졌다. 어디로 향하는지 하늘을 가로지르는 데몬 씨는 어째서인지 검은 천같은 걸 감아 얼굴을 가렸고, 그 옆에선 붉은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바윗덩어리, 구와르 씨가 주위를 둘러보다 어느 지점을 딱 보았다.
〈저기 있군.〉
〈다른 영웅은 있습니까?〉
〈없다. 계획대로 힐라와 윙마스터, 반 레온쪽으로 간 모양이다.〉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비행을 멈추고 너른 공터가 펼쳐진 곳에 사뿐히 착지했다.
〈또 당신이군요.〉
그들이 내려온 곳에는 스승님이 굳은 얼굴로 서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된다. 물러서지 말도록.〉
〈잘 알고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분의 명을 따르는 게 제 일이니까요.〉
〈어차피 쓰러뜨릴 필요까진 없으니.〉
그 이전에 쓰러뜨릴 능력이 없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군단장 시절 데몬 씨는 주로 스승님 마크 담당이었다. 군단장 중에서 스승님과 상대가 가능한 이가 드물었기 때문인데, 이마저도 대체로 다른 군단장과 합공해야 했다. 그만큼 스승님은 강했다. 그 증거로 군단장이 두 명이나 나타났는데 스승님은 아직 무기도 빼들지 않고 인상을 찡그리며 데몬 씨를 보고만 있다 입을 열었다.
〈…… 왜 가린 거지?〉
[아니 궁금한 게 저거야? 보통 왜 왔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100% 싸우러 온 걸 텐데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까."
[아까 계획 뭐시기 씨부린 걸 보면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잖아.]
"일단 두들겨 패고 나서 들을 생각인가 보죠."
데몬 씨는 당신이 신경쓸 게 아니라고 받아쳤지만 스승님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 천으로 가려진 데몬 씨의 얼굴을 응시하다 뭔가 떠올랐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보이고 싶지 않은 건가.
〈그 입 다무십시오!〉
정곡이 찔린 듯 소리치는 데몬 씨의 모습에 스승님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뽑았다. 저 머저리가. 그런 속마음이 들린 것 같다. 뒤쪽에선 아스카 씨가 당장이라도 날아올라 마법을 쏠 준비를 하며 서로 달려들 것 같은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데몬 씨와 구와르 씨만 긴장했고 스승님은 눈앞의 둘이 아니라 스승님은 혹여나 전투에 말려들지도 모르는 민간인이 주변에 있는지 한 차례 흝어보는 여유까지 부린 뒤에야 그들을 다시 보았다.
〈그러고보니, 전해줄 말이 있었지.〉
〈…… 뭡니까.〉
〈밥 잘 먹고, 잠 제 때 제 때 자고, 몸 깨끗이 하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렴.〉
쿨럭! 잠깐 갑자기 뭐야?! 타이밍과 전달자, 수신자가 모조리 언밸런스한 상황에 나는 물론이고 말을 전해들은 당사자인 데몬 씨까지 '저 사람이 뭐라는 거지'란 얼굴이 되었다. 뒤에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라고, 너희 어머니가 대신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뒷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굉음이 울리며 데몬 씨의 신형이 사라졌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새 십 수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거칠게 무기를 부딪히고 있었다.
〈당신……!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스승님은 대답없이 검을 휘둘러 데몬 씨의 셉터를 캉! 쳐냈고, 직후 비처럼 쏟아지는 무수한 스킬들을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여 모조리 피했다. 좀 스치긴 했는지 옷자락이 그을리고 찢어졌지만, 몸에는 진짜 상처 하나 없이 스킬의 폭풍을 빠져나오는 스승님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진다.
"흐아아……."
[페어리 족의 영역에서 싸우는 모습이 안 보인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네.]
"최상위 전사의 싸움은 보는 것조차 힘들죠."
신체능력만으로 마법보다 빠르게 움직이니까. 전투에 가담은 못했었다지만 데몬 씨와 그에 비견되는 전사라는 롯뜨 씨의 전투를 눈으로나마 쫓았다는 메르세데스 님이 얼마나 굉장한지 새삼 알았다.
〈그래도 당신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어째서!〉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어떻게 검호 당신이 제 어머니를 죽일 수 있는 겁니까?!〉
저 새끼 뭐라는 거야. 내 생각이나 미르의 막말이 아니라 스승님의 표정이 딱 그랬다. 미간에 주름이 팍 잡히며 어처구니 없다는 양 입이 벌어진 게 꽤 당황한 것 같다.
"그, 근데 데몬 씨는 갑자기 왜 스승님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한 거지?"
"좀 전에 한 말이 유언처럼 들려서가 아닐까요."
"유언? 그게…… 어, 그렇네."
[갑자기 어머니의 말이라고 그런 말을 하면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있었다고 생각할만 하긴 하지. 근데 바로 죽었다고 결론내리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만약 그가 저 사람의 가족을 노렸다면 훨씬 더 옛날에 손을 썼을텐데.]
성급한 결론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 상 어쩔 수 없던 것이다. 왜인지 좀 묘한 기류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저 때의 스승님은 영웅이었고, 데몬 씨는 세계의 적인 군단장이었으니까. 오히려 데몬 씨의 약점인 가족을 노리지 않으면 이상한데…….
"…… 스승님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어."
[역시 그렇지 마스터?]
"슬슬 전투가 더 격해지는군요. 저도 보기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미르와 잠시 얘기하는 사이 스승님에게 뭐라고 더 소리친 데몬 씨는 작정하고 버프들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주변 숲을 갈아버린 스킬은 버프도 안 쓰고 날린 공격이었단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당신의 말은 듣고싶지 않습니다.〉
셉터가 바닥을 내려치는 걸 본 스승님이 빛살같이 허공으로 뛰어올랐고, 눈 깜짝한 찰나에 무수한 검붉은색 가시들이 솟구쳤다. 제 공격이 빗나간 것에 당황하지 않고 데몬 씨는 반투명한 발판에 착지한 스승님 아랫쪽을 향해 셉터에 맺힌 포스를 가시나무 숲에 던졌다.
그리고, 포스를 빨아들인 가시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구와르.〉
〈알았다. 다만 나라도 그것을 상대로는 시간벌이 밖에 못한다는 걸 알아라.〉
〈그거라도 부디 잘 부탁합니다.〉
데몬 씨는 시뻘건 불길속에서 푸른 방어막을 두른 스승님이 뛰어나오는 걸 뚫어져라 응시하다 크게 날개짓했다.
이후의 전투는 우리 눈으로 따라잡을 수도 없고, 어떻게 되가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속도로 전개되었다. 뒤쪽에선 아스카 씨와 구와르 씨가 마법vs정령이라는 특급 전투를 벌이고 있어 더 그랬다. 사실 저쪽도 배경따위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데 두 분의 싸움이 너무 굉장해서 뒤로 밀려났다.
〈언제까지 쫄래쫄래 도망만 칠 겁니까!〉
〈…… 왜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럼 다른 사람이 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잠깐 진짜로 죽이신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설마하는 생각은 이어지는 데몬 씨의 말에 뭉개졌다.
〈그들은 제 모든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오직 제 가족을 위해서라고요! 그걸 당신이 없애버렸으니, 당신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저거, 저거…… 내가 똑바로 들은 거 맞나? 귀를 의심할 정도로 황당한 말이었다. 양 옆에선 내가 들은게 환청이 아니라고 미르와 제논이 혀를 찼다.
[적반하장 쩌내 저 양반. 자기 가족 소중하다면서 남 가족은 웃으면서 쳐죽이냐.]
"아니면 안중에 없는 것일 수도 있죠. 본인의 가족 외에 다른 이들은 알 바 아니다, 뭐 그런 식으로요."
스승님도 어처구니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용케도 욕을 안 하시고 있다. 미르가 아니라 나였어도 저 자리에 있었으면 뭐라고 쏘아붙였을 것 같은데.
〈…… 가족을 위해서라고?〉
〈예.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이 일을 할 리가,〉
〈그럼 당장 군단장 때려치워.〉
안 그래도 낮은 스승님의 목소리가 더 낮아져 음산하게 울렸다. 그리고 붉은 신형이 쭉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데몬 씨의 코앞까지 근접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정말로 가족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으면─〉
그 짧은 찰나, 나는 스승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어떤 감정이 선명하게 떠오른 그 표정은 스승님이 지었다고 믿기지 않을만큼 낯설었다.
〈군단장 때려치우고 그렇게 소중하다는 가족한테 가버리란 말이야!〉
달려온 속도를 그대로 실은 검이 휘둘러지며 반사적으로 몸을 막으려는 셉터의 손잡이를 째앵-! 산산히 부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쓰러지는 데몬 씨의 옆에 칼이 푹 박혔다.
〈가서 니 어머니한테 효도나 해! 동생 놀아주기나 하란 말이야! 왜 군단장따위가 되서 애꿎은 사람들을 쳐죽이고 있냐고!〉
면전에서 쏘아내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서 떨어지는 감정은,
〈넌 언제든 집에 돌아갈 수 있잖아!!〉
너무나도 명백하게 질투를 드러내고 있었다.
〈흐으, 흐으으, 흐…….〉
〈…….〉
거친 숨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신음과 함께 스승님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멍청하게 스승님을 올려다보던 데몬 씨의 얼굴 위로 툭툭 떨어졌다.
이건, 무슨, 아니 뭔.
'우우우 울고 있, 왜, 왜? 거기다 아까 표정은 또 어째서?'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충격적인 광경에 머릿속이 완전히 얼어버렸다. 지금 내가 보고있는 게 진짜 맞나? 데몬 씨가 스승님한테 너무 맞아서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제대로 본 거 맞다. 이건 한 치의 왜곡도 없는 당시의 상황이다.]
"…… 말도 안 돼."
스승님이 우는 모습따위 생각해본 적 없다. 아니 스승님도 사람이시긴 하니까 언젠가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저런 식으로 누군가를 향해 격한 질투와 부러움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흘리는 건 만약으로라도 감히 상상해보지 않았다.
당사자인 데몬 씨도 마찬가지인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얼굴로 멍하니 스승님을 올려다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자리에서 몸을 빼 도망쳤다. 꽁지빠지게 날아가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던 그는 어느 순간 날개짓을 천천히 멈췄다.
〈…… 구와르. 먼저 돌아가십시오. 저는 잠시 확인해볼 게 있습니다.〉
〈알았다. 늦지 말도록.〉
데몬 씨가 뭘 확인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는 양 구와르 씨는 별 말하지 않고 먼저 갔다. 그렇게 데몬 씨는 가던 방향을 선회해 리프레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어머? 왠 일이니 데몬?〉
〈이번엔 일찍 왔네 형!〉
그의 가족은 상해는 고사하고 좀 전에 리프레 중심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전혀 모르는 얼굴로 여느때처럼 데몬 씨를 반겼다. 자신이 완전히 착각했음을 깨달은 그의 얼굴은 허탈해졌다.
〈어머니. 혹시 최근에…… 검호 그가 찾아왔었습니까.〉
〈으응. 바로 얼마 전에 왔었는 걸? 혹시 만났니?〉
〈예. 조금 전에…….〉
〈그래서 왔구나~ 대신 말 전해달라고 한 보람이 있는 걸?〉
정말로 말을 전해준 것 뿐이었다. 정말 그것뿐이었단 말이다. 데몬 씨는 가족을 죽이긴 커녕, 그들의 부탁을 들어준 이에게 망언을 한 것이다.
[어째 타이밍이랑 뉘앙스가 기가 막히게 안 좋냐.]
"저 사람 왠지 죄송스러운 얼굴인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에게 사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주인이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지.]
"왜요?"
군단장과 영웅이지만 어째선지 미묘한 기류가 오가는 당시의 두 분이라면 어떻게든 시간이나 장소를 마련해서 말을 전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까마귀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예상에서 까마득히 벗어났다.
[왜냐하면 저 날 이후 검호라는 남자는 죽었기 때문이다.]
"…… 네?"
[저 때 주인이 검호라는 남자와 싸운 건 검은 마법사가 명령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을 영웅들이 알지못하게 하라고 말이지.]
검은 마법사가 직접 나섰다? 그런 일은 8백 년 전에도 단 두 번 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나는 크리티아스를 왕국째로 없앤 것, 다른 하나는 빅토리아 반도를 절단내 빅토리아 아일랜드로 만든 것. 둘 중 하나가 저 날 일어났다는 뜻인데─ 아니 그보다 스승님이 죽었다는 건 뭔 소리야!? 지금 멀쩡히 살아계신데!
온통 정신없어진 머리를 부여잡는 사이 데몬 씨와 그의 동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그래 형? 어디 아파?〉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를 굉장히 화나게 만들어버렸어.〉
〈형이 검호 그 사람을 화나게 했다고? 어쩌다가?〉
〈어머니 말을 전해들은 장소랑 상황이 심하게 안 좋아서 오해했는데…… 거기다 내가 머리에 열이 올라서 한 말들이 좀, 하아! 왠지 그의 아픈 부분을 찌른 것 같아. 어쩐지 어릴 때 들었던 말과 관련이 있는 것도 같다만, 자세히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진짜로 반성의 기미 비슷한게 보이는 건 둘째치고 흘러가듯이 지나간 말들 중에 결코 넘겨들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릴 때 들었던 말……?"
[뭐야? 완전 인상적인 부분 있었잖아?]
"이 시점에선 뭔가 기억하고 있었지만 현재에 와선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죠. 다시 말하지만 사람 기억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으니까요."
"저기, 이건 여기까지 하고 당장 스승님과 데몬 씨가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을 보여주세요!"
[알았다.]
안 그래도 미리 준비해놨었는지 까마귀는 바로 풍경을 지우고 다음 기억을 펼쳤다. 처음, 최초로 스승님과 데몬 씨가 만나는 순간의 기억을.
========== 작품 후기 ==========
***
당연하지만 데몬 씨가 태어나서부터 군단장이었을 리 없고, 스승님도 처음부터 영웅이었을 리 없다. 그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한 편으론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다.
앞서 본 기억들의 대부분이 살의가 부딪히는 전투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옆에서 봐왔던 스승님과 데몬 씨는 항상 정의롭고 은근히 자상한 이이자 친절하면서 한편으론 어두운 면을 가진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모습이 되기 전의 두 분의 옛 시절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나마 데몬 씨는 처음 본 기억에서 대충이나마 유년시절을 봤지만, 영웅이 되기 전 아스카 씨와 계약도 하기 전의 스승님이 어땠는지는 여태껏 전혀 몰랐다.
그랬는데…….
〈리프레로 가는 길을 알고 있나?〉
〈…….〉
어릴 때라 해도 마스테리아에서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던 데몬 씨가 겨우 눈 좀 마주친 걸로 겁먹고 얼어버릴 정도로 흉흉한 기세에,
〈듣고 있나.〉
수틀리면 사람 하나 베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잔뜩 날이 서있을 줄은.
[근데 저 사람 어째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굴이 전혀 바뀌질 않았냐.]
"마법사만큼은 아니지만 전사도 3차 이상 전직하면 노화가 느려지니까요. 그 정도 되면 수 십년 늙지 않는다고 이상할 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처럼 늙는 쪽이 비정상이죠."
"잡담 그만해. 대화가 잘 안 들리잖아."
스승님의 기세에 짓눌려 숨도 못 쉬던 어린 데몬 씨가 뒤늦게 콜록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어느정도 데몬 씨가 진정됐을 무렵 스승님은 재차 물었다. 다시 물어보겠는데 리프레로 가는 길을─
〈그 전에 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당신은 누구죠? 왜 리프레로 가려는 거죠?〉
그래도 용기는 있구나. 저렇게 살벌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젊었을 적……의 스승님이 한 질문을 당돌하게 질문으로 받아치다니. 나라면 쫄아서 입도 못 열었을 것 같은데.
〈일단 나는 검호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리프레로 가려는 이유는 찾는 게 있기 때문이고. 답이 되었나.〉
〈그 찾고 있는 게 뭐죠?〉
어린 데몬씨의 다급하다못해 간절한 표정에 스승님은 별 건방진 걸 본다는 양 게슴츠레 눈을 뜨면서도 느리게 답해주었다.
〈내가 살던 곳…… 고향으로 돌아가는 법.〉
담담하게 흘러내리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울리며 고막을 타고 뇌를 뒤흔들었다.
저거다. 저게 스승님이 이제까지 해온 모든 일의 목표다.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스승님은 저때부터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잖아! 8백 년 전, 영웅이 되기도 전부터 계속. 그런데 지금도 못 돌아간 상태고.
협상에서 스승님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니 아직도 돌아가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란디스나 키네시스 형의 차원이 메이플 월드와 이어진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며, 애초에 차원 이동은 시간 조작과 더불어 거의 불가능한 대이적 중 하나니까.
'스승님은 어떻게…….'
어떻게 메이플 월드에 오게 됐을까. 자의로? 타의로? 사고로? 계획적으로? 영웅이라 불리기 전, 아스카 씨와 계약하기 전부터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왔다는 걸 봤을 때 확실한 건 스승님은 메이플 월드에 계속 있고싶어하지 않다는 거다.
'가족때문에 화를 내신 거였어.'
본인은 그토록 고향에 돌아가려고 노력하는데 정작 가족이 있는 집에 언제든 갈 수 있는 데몬 씨가 하는 짓거리와 망발이 너무 가관이라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리라. 그 정도로 가족을 보기 위해 고향에 돌아가려는 분이,
'왜 영웅이라 불릴 정도로 사람들을 구하고 검은 마법사와 싸운 거지?'
군단장과 검은 마법사와 싸우는 게 스승님께 득이 되는 일이었을 리 없다. 보통의 사람도 못할 일을, 하물며 메이플 월드 출신도 아닌 아예 타 세계 사람인 스승님이 했던 이유가 뭐였을까. 아직도 못 돌아가신 걸 보면 귀환 방법을 찾지 못했거나 찾았어도 시간이 꽤 걸리거나 어려운 게 분명한데, 어째서 그 귀한 시간과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고 그들과 싸웠을까. 혹시 그게 귀환 방법의 일부였─
"…… 반, 에반!"
"어, 어?!"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집중하세요. 그가 전 군단장의 집에 하루 묵겠다고 합니다."
"뭐?"
[잘 좀 들어 마스터. 마스터가 확인해야 하잖아.]
언제 얘기가 그쪽으로 가버린 거지. 나는 고개를 들어 데몬 씨와 함께 길을 가는 스승님을 보았다.
"아니 됐어 미르. 이미 알아냈어."
[진짜? 언제?]
"좀 전에 스승님이 리프레에 가는 이유를 말할 때. 그게 스승님의 목표였던 거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법을 찾기 위해…… 라는 겁니까."
"스승님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잖아. 고향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해."
오히려 여기 오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봤어야 할만큼 쉬운 목표였다.
[정말로 확실해?]
"내 판단을 빼놓고 이때의 상황이나 협상 때 설명만 봐도 그게 맞아."
스승님이 과거 데몬 씨에게 자신의 목표를 말해줬던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를 보면 이해가 된다. 그야 처음 만난 날인데! 훗날 피튀기는 관계로 변해버리는 것에 비해 굉장히 무난했던(?) 첫만남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데몬 씨도 현재에 와선 잊어버렸지만 몇 년 뒤까진 이 날의 대화를 어느정도 기억했고.
[원하는 걸 찾은 모양이니 이제 이건─]
"아니요. 마지막까지 보게 해주세요."
[뭐라?]
눈을 부라리는 까마귀에게 나는 고개숙이며 부탁했다.
"까마귀 씨 말대로 원하는 걸 찾은 이상, 저희가 여기서 데몬 씨의 기억을 볼 일은 앞으로 없을테니 이 기억만 마지막으로 보고 갈게요."
[허어…….]
"제발 부탁드릴게요."
[순해보이는 게 제일 약아빠졌구나.]
이걸로 마지막이다. 혀차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허락에 나는 감사합니다! 를 크게 외치며 진행되는 기억을 보았다.
사실 괜히 이 기억을 끝까지 보겠다고 한 게 아니다. 목표를 찾음으로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기억이니까 한 것도 있지만, 어쩌면 스승님과 데몬 씨가 미묘한 관계인 이유가 이 때 있지 않을까 해서 부탁한 거다.
리프레(중앙)로 가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 몬스터가 어슬렁거리는 길바닥에서 밤을 새느니 데몬 씨의 집에서 하루 묵기로 한 스승님은 데몬 씨의 어머니와 동생 데미안의 환대와 함께 저녁을 대접받았다. 그리고 잠자리를 준비할 무렵 예의 그 신비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저거 저때부터 있었어? 거기다 역시 저 파자마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무려 페어리가 수제작한 옷이라니!
[그럼 저거 현 페어리 퀸하고 어떻게든 관련있겠네.]
"당연히 그렇겠지."
"나중에 페어리 퀸에게도 가야하니 그때 물어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누구도 바로 잠들지 않았다. 호기심 많은 데몬 씨의 동생 데미안은 스승님의 모험담을 듣고싶어 했고, 그를 통해 우리는 스승님이 미나르 숲에 오기 전에 어디서 뭘 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빅토리아 아일랜드, 이때는 빅토리아 반도였으며 메이플 월드에서 요정들이 가장 많이 살았다는 그 숲에서 페어리들과 지냈다고 한다.
〈페어리 말고 다른 요정은 안 만났어요?〉
〈실프는 몇 번 봤지만 엘프는 못 봤다. 님프는 애초에 빅토리아 숲에 안 살지.〉
〈그래도 좋았겠어요. 아저씨 말고 인간은 한 명도 없었을테니, 요정 진짜 많이 봤겠다!〉
〈…… 그건 아니었는데.〉
나 말고 다른 인간도 있었으니까. 스승님은 슬슬 졸리신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누구? 누구요? 아저씨 말고 요정들 도와준 인간이 또 있었어요?〉
〈하, 아…… 뭘 연구하겠다고 찾아온 마법사가 한 명 있었다.〉
그놈이 나보다 일을 잘해서 거길 나왔지. 뭐야 누구지? 누구길래 스승님보다 요정들을 잘 지켰다는 거야. 그 마법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지만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스승님이 본인은 아저씨가 아니라고 강력히 피력하는 걸 끝으로 세 사람은 잠들었다.
[이 부분은 좀 넘기지.]
새카만 밤하늘이 남보라빛으로 변했지만 아직 여전히 어두운 새벽, 어째서인지 어린 데몬 씨와 스승님이 일어나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 최대한 빨리 끝낼테니까, 가족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고.〉
당부같은데 검처럼 일어난 기세때문에 협박처럼 느껴지는 말을 하곤 스승님은 벽에 기대놓은 검을 챙기고 곧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무슨 상황이지? 너무 스킵한 거 아니냐고 까마귀한테 말하려 했는데 부서지다시피 열린 창 밖의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달빛에 반사된 금속광을 두른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저거, 저거……!"
〈도망치세요!!〉
빠가악─! 박터지는 소리에 어린 데몬 씨의 외침이 허무하게 묻혔다.
돌려차기 한 방에 선두의 벌레 몬스터를 으깨 저 멀리 처날린 스승님이 곧바로 자세를 잡으며 진각을 구르며 뛰어올랐고, 벌레 몬스터 떼를 보느라 미처 못 알아챈 와이번을 순식간에 토막냈다.
"어어……."
[대체 누굴 걱정하는 거야 마스터?]
"젊었을 적이라 현재에 비해선 손색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는 이때부터 검호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움직이는게 빠른지 한 손으로 듀얼 비틀의 뿔을 자르고, 다른 손으론 몸을 가르는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동작처럼 보일 지경이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그 동작만으로 폭풍처럼 몬스터 떼를 휩쓰는 스승님의 모습에 어린 데몬 씨와 함께 나까지 멍청하게 입을 헤─ 벌렸다.
아니 스승님이니까 몬스터를 압살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그것도 정도껏이지, 어떻게 스킬도 안 쓰고 완력만으로 저럴 수 있어!? 전사의 기초 스킬인 검기조차 안 일으키고 금속급 강도를 가진 듀얼 비틀의 뿔과 등껍질을 갈라내는 모습이 놀라운 걸 넘어 비현실적일 정도다.
〈─피해!!〉
새벽공기를 가르며 울린 고함에 어린 데몬 씨가 반사적으로 창가에서 뒷걸음질 치기 무섭게 또다른 와이번이 데몬 씨의 집으로 돌진했다. 콰장창! 창가와 주변 벽을 부수며 푸른 와이번이 집 안에 반쯤 들어왔다.
〈우웅…… 혀엉?〉
〈데미안! 안 돼!〉
와이번의 입 안에 푸른 서릿바람이 뭉쳐졌다. 드래곤의 그것에 비할 순 없겠지만 어린애가 저걸 맞고 멀쩡할 수도 없다! 어린 데몬 씨가 급히 주변에 부서진 나무 파편을 집어들 때 브레스를 쏘기 직전인 와이번의 몸이 뒤로 쑥 빠졌다.
〈작작 좀 해 도마뱀!〉
결국 쏘아진 브레스가 천장을 뚫어버렸지만, 그렇게 생긴 구멍을 통해 와이번이 스승님의 검에 4토막나고 남은 비틀이 걷어차여 박살나는 광경이 보였다.
저 멀리에서 날이 밝아왔다.
스승님의 도움으로 몬스터들의 위험을 넘긴 데몬 씨의 가족은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답례하려 했다. 하지만 스승님은 오히려 집을 부숴서 미안하다며 수리비로 쓰라고 돈을 쥐어줬고, 대신 식량을 조금 요구했다. 집을 수리할 때까지 불편하지 않도록 부서진 벽과 천장 파편을 치워고 구멍들에 천과 가죽을 덧대는 걸 도운 그분은 점심무렵에야 떠날 준비를 마쳤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뭐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어요?〉
스승님은 잠깐 데몬 씨를 보았다가 가방을 마저 정리했다.
〈대답해주세요! 이도류를 쓰면 그렇게 강해지나요?〉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요?!〉
그저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아니었다. 어린 데몬 씨는 지난 밤 몬스터들의 습격에 가족들을 지키는데 아무것도 못했다는 사실에 힘의 필요성을 처절하게 느꼈는지 절박하게 보일 정도로 스승님에게 매달렸고, 짐을 다 꾸릴때까지 침묵하던 스승님은 배낭을 매며 일어나 무뚝뚝하게 답해주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런 대답말고 좀 더 제대로 된─〉
크고 단단한 손이 데몬 씨의 머리를 푹 눌렀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력하면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기왕이면 달리기같은 걸 하면 더 좋고.〉
언뜻 장난같은 말을 남기며 스승님은 그렇게 데몬 씨 가족을 뒤로하고 목적지인 리프레로 갔다. 데몬 씨와 가족들은 그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 강해지고 싶어요 엄마.〉
〈응?〉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엄마랑 데미안을 지킬 수 있을만큼…… 저 사람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아, 저거구나. 데몬 씨가 군단장이 된 이유가. 지금은 어린아이일 뿐이지만 훗날 세계에 재앙이 되어버린 이의 꿈은 소박하기 짝에 없었다. 그리고 그토록 소박했기 때문에, 지키고 싶은 범위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한 편으론 궁금했다. 만약 스승님이 눈앞의 반마족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