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ide out.
아이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에 사람들은 무심코 아 그렇구나, 하고 흘려넘길 뻔 했다가 머리속으로 곱씹는 중 어? 뒤늦게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 표정이 변했다.
"그… 무슨……."
"말 그대로다."
"멸망의 위기란 말,"
"위기가 아니라 이미 멸망했다고."
무려 재차 말해주는 친절을 베풀어줬지만 당연히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메이플 월드는, 사람들은……."
"환경이 망가지고 사람이 죽어야만 세계가 멸망한 걸로 보나? 물론 그것도 멸망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우리가 세계 멸망이라 간주하는 범위는 그보다 훨씬 더 넓다."
향후 태어날 생명의 수, 환경, 혼의 순환 시스템 등. 세계가 원활히 굴러가려면 수많은 부품들이 제 역할을 해야하며 이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다른 것에도 해를 끼친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런 오류들을 자체적으로 고칠 수 있는 방법들이 마련되어 있지만, 가끔 그걸로도 고치지 못해 결국 시스템 전체가 삐그덕거리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때가 있다.
"바로 그런 때, 세계에 어떤 문제가 생겨 미래 발전 가능성이 최소치 미만으로 떨어져 '더 나아지지 않고 밑으로 떨어지는 상태'를 멸망이라고 간주한다."
말하자면 미래가 닫힌 것. 그게 오버시어가 세계의 멸망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헤쓱하게 질린 에반이 더듬더듬 물었다.
"즉…… 지금 메이플 월드엔 미래가 없으니까 이미 멸망한 거다…… 는 말씀이죠?"
"그래."
"대체 뭐가 문제인 겁니까!?"
"하나하나 집어내기엔 이미 총체적 난국이다."
나도 해결못한다는 점에서 답 나왔잖아. 이 지경까지 왔으면 머지않아 미래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가 완전히 닫혀서 소멸하는 결말밖에 없어. 한 글자 한 글자 암울하기 짝에 없는 단어를 태연히 입에 담는 아이의 모습에 시그너스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겨우 입을 뗐다.
"그 말을…… 어떻게."
"그나마 알기쉬운 예시를 하나 들자면, 거기 너희 둘."
아이에게 지목당한 데몬과 아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넋을 반쯤 빼놓고 있다 손가락질을 당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예전이랑 지금. 무엇이 다르냐."
"…… 뭐가?"
"8백 년 전과 현 시대의 차이점을 묻는 겁니까."
"너희는 둘 다 살아봤잖아."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안 그래도 푸른 안색이 한층 더 시퍼래진 데몬은 이마를 짚으며 한 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길게 내쉬었다. 일단 말하라고 했으니 말해야지.
"평화로워졌죠. 최근들어선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때문에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진 과거에 비해 확연히 살기 좋았습니다."
"몬스터도 전체적으로 약해졌고……."
"그리고?"
"가장 달라진 점을 꼽자면 그겁니다만."
"그때 불탔던 마을이나 도시가 복구되거나 새로 세워졌어."
"그리고?"
"……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아이는 한심한 것들을 본다는 눈으로 쯧쯧 혀를 찼다.
"사회는 뭐가 바뀌었더냐. 새로운 체제가 나왔나? 아니면 급격한 기술 발전이 있었나?"
"그, 건."
"없지. 전혀, 조금도. 예전과 지금의 지성체들이 만든 사회상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8백년이나 흘렀는데 말이지."
메이플 월드의 주류 지성체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8백년은 굉장히 긴 시간인데 그 시간동안 사회적, 기술적으로 변화가 거의 없다는 건 문제가 있어도 아주 단단히 큰 문제가 있다는 거다.
"그건 군단장들이 일으킨 전쟁때문─"
"전쟁이 모든 걸 부수기만 하는 건 아니다. 불이 휩쓸고 간 잿더미 속에서 잃어버려선 안되는 것들을 찾아내 보존, 발전시킬 수 있지. 불을 지르는데 쓴 도구를 다르게 바꿔 쓸 수도 있어. 그걸 8백 년 동안 어느 집단도 제대로 못했다는게 정상적으로 보이나."
"리엔이나 에델슈타인의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거긴 특정 기술이 편중되서 거기에 특화된 경우고. 그마저도 지금 이상으로 발전 못 한다."
칼같은 반박들에 아란과 데몬은 입을 다물었다. 계속 듣고보니 이상하긴 했다. 10년, 20년도 아니고 무려 8백 년인데 세계 전체를 놓고 보면 그들이 살았던 과거와 지금이 큰 차이가 없다니? 확실히 사회상, 기술, 제도, 문화 등 전반적으로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아 현 시대에 깨어나서도 별다른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상황이 작금의 세계가 기괴하다는 증거였다.
"발전하지 못하고 '더 나은 미래'를 잃은 세계는 서서히 가라앉다 소멸한다. 그게 지금 이 세계의 유일한 미래다."
[멸망이랑 소멸은 뭐가 또 다른데? 그게 그거 아니야?]
"어느 쪽이든 죽는 너희에겐 그게 그거겠지만 우리한테는 다르다."
소멸은 완전히 사라지는 걸 의미한다. 땅, 하늘, 세계를 구성하고 물질과 개념, 그 안에 살아가는 생명들의 육신이 사멸하고 영적 기록이 모두 없어져 무(無)가 되는 것이 소멸이다. 멸망은 그런 미래밖에 남지 않은 상태고.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들에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듣던 시그너스는 겨우 숨을 토해내며 힘겹게 물었다.
"그럼…… 지금 세계는……."
"최대치로 잡으면 2백 년 정도 남았다. 내가 그놈 덕에 세계에게서 벗어났던 땐 대충 1천 년 정도 남았었으니까."
참고로 세계의 수명은 기본적으로 억 단위로 남아야 한다. 점점 미래가 닫혀갈 때에도 최소한 천만 단위로 남아 있는 걸 감안하면 고작 2백 년 밖에 안 남았다는 건 내일 당장 소멸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지.
"그걸 뻔히 알면서!!"
"왜 아무렇지 않냐고? 방금 말했잖아."
나는 이 세계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연결이 끊겼어. 세계가 소멸하든 말든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됐는데 공포에 떨 리가 있나. 애초에 난 그 감정이 희박하긴 하지만, 세계와 무관해진 그 순간부터 내게 있어서 이곳에서의 모든 일은 '구경거리'에 불과한데.
대놓고 나와 상관없어졌으니 전부 구경거리일 뿐이라 말하는 아이의 행태에 아란은 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이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네놈이 그러고도 생명의 초월자야!? 전부 다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놔라."
"도와주지 않더라도 최소한 미리 알려줄 수는 있었잖아! 왜─"
"알았으면 뭔가 좀 더 일찍 바꿀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그건 너의 헛된 바람이다."
아이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쏘아진 나무줄기가 아란을 잡아채 저 뒤로 휙 던졌다. 나인하트는 눈을 부릅떴다가 외알 안경이 떨어진 것도 몰랐다.
"방법이, 정녕 없습니까……?"
"없다.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서 무슨 노력을 해도 의미없고, 그냥 전부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것만이 답이다."
그 말에 데몬은 순간 뭔가를 떠올렸다.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설마 검은 마법사는,"
"다 알고 있다. 그놈 목표가 뭔지 너도 잘 알지 않나."
데몬은 이마를 팍 짚었다. 검은 마법사가 세계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목표와 반 초월자만 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거라는 아이의 말, 전부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게 그나마 답이라는 것들이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정곡이라니. 그렇다면 검은 마법사는 어떤 의미론 진짜 세계를 구하기 위해─
"그럼 스승님은……!"
"그래서 그놈도 어떻게든 발악중이지. 그 꼴이 꽤나 볼만해서 구경하려고 옆에 있었던 거고."
[당신 진짜 성격 나쁘네.]
에반과 미르는 완전히 질린 얼굴로 벙쪘다. 화도 상대가 반응해야 낼만하지, 저쪽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과 달라도 너무 다른, 흡사 다른 별에서 떨어진 외계인 수준인데 괴리감이 너무 심해서 되려 이쪽이 질려버린다. 상대는 곧 끝나는 세계를 구경거리로만 보는 이인데 무슨 말이 통할까.
그 사이 시그너스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지금까지 옳다고 여기며 쌓아온 것들이 무너져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정신을 어렵사리 부여잡으며 협상 말미에 검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정말 세계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확신하나.'
확신할 수 없어졌다. 그리고 이젠 뭘 어째야할지 전혀 모르겠다.
"검은 마법사 그 자식 짓거리가 세계를 구할 방법이라고? 그딴 말을 믿으란 거야?!"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방법 중 하나인 건 맞다. 빛의 대리자가 하려는 건 소멸 이전에 모든 지성체를 죽여 영혼을 수거하고, 새로운 창세를 일으켜 거기에 영혼들을 옮기는 거니까. 그게 그놈 위치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검은 마법사를 막는 게…… 그가 사람들을 구하는 걸 방해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터무니없는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모두를 위한다고 한 행동이 알고보니 제 무덤으로 달려가는 짓이었고, 세계를 구하려던 노력이 사실 세계 멸망에 일조되었다면 믿을 수 있나.'
'사람들을, 세계를 위해 한 일들이 사실 장대한 삽질에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하는 짓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는 건 정말…… 내 빈약한 어휘력으론 다 표현못할만큼 비참하거든.'
과거 영웅으로서 검은 마법사를 봉인시켰던 행동이 세계 멸망을 가속시켰을 뿐이라는 걸 그 사람은 어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저것뿐이라면 난 뭘 해야하지? 지켜야하는 이들에게 편안한 죽음을 권해야 하나? 밀려오는 헛구역질과 극심한 두통에 시그너스의 눈앞이 빙글 돌았다.
"여제님!"
"나인, 하트."
옆으로 고꾸라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은 나인하트는 잠시 휴식한 뒤에 마저 듣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시그너스는 가느다른 팔로 테이블을 짚고 비틀거리며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여제님! 잠시라도 쉰 다음에─"
"그는, 그 사람은…… 검호 그 남자는 이것들을 다 알고 뭘 하는 중이죠?"
자신들보다 일찍 이 사실들을 알았을 그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다. 끔찍한 진실들에 짓눌려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게 자신에게 해가 가는 - 세계가 소멸하는 미래로 달려가는 것일 리 없다.
아이는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거기까지는 내가 전해줄 부분이 아니다."
"뭣……?"
"내가 그놈에게 부탁받아 전해주기로 한 건 이 세계의 상태까지였으니까. 이 정도면 상황파악은 충분히 됐겠지? 안 됐어도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그놈이 말한 여자한테 가서 알아내라."
페어리 퀸 아마란스. 그녀는 8백 년간 사람들이 잃어버린 과거의 조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인계자. 반 초월자가 되면 어차피 이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싫어도 잘 알게 되니까 정말 이미 멸망한 게 맞는지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마라."
"순순히 믿기 어려운 사실이란 건 잘 아실텐데요. 저의 불신이 못마땅하시면 다른 눈에 보이는 증거를 보여주시죠."
"지금은 안된다."
장막 뒤의 세계를 직접 봐도 되는 이는 자격이 있거나 세계와 연결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인계자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 조건에 충족될 수 없으니까. 그 말을 하며 아이는 어째선지 에반을 빤히 보았다.
"어…… 저는 왜?"
"너한테 전해줘야할 게 있다."
"저한테요?"
"이쪽이 내 본래 용건이다. 그놈 말을 전해주는 건 이 용건의 덤이었지. 내가 만든 아이가 억지로 살던 이유였는데 대신 전해주는 걸로 죽을 수 있게 해줬다. 그러니까 받아라."
아이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에반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을 찰싹 때렸다. 미르와의 계약의 문장 위로 푸른 문양이 덧그려졌다.
"이걸로 그 아이와의 약속은 지켰다. 그걸 볼 지 안 볼지는 네 알아서 해라."
[아니 이게 뭔지나 좀,]
"보면 안다."
앉아있던 나무줄기 의자를 없앤 아이는 여전히 충격과 공포로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면면을 쓱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그놈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저 깃털뭉치 안에 있을테니 인계자 넌 반 초월자가 될 준비가 다 되면 나한테 와라."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푸른 아지랑이만 남기고 사라졌다. 자리에는 상갓집보다 더 암울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떠돌았다.
"…… 씨발."
아란은 의자 등을 젖히며 테이블을 쿵! 걷어찼다.
"존나 엿같네."
그들의 심정을 십분 대변하는 말이었다.
***
side out.
아이가 폭탄처럼 쏟아낸 진실들을 시그너스 여제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못했다. 세계가 이미 멸망해버렸다는 것을, 200년도 되지 않아 모든 게 소멸해버릴 미래만 남은 것을, 검은 마법사에게 죽임당하는 것이 영혼이나마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대체 어떻게 알리란 말인가.
그나마 대외적으로 내놓은 건 '생명의 초월자는 오랫동안 검호와 노바족에게 착취당하고 마족들에게 봉인당해 쇠약해진 상태라 신수와 동화되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같은 허울좋은 말뿐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적으로 함구해주길 다른 이들에게 약속받은 그녀는 예외로 다른 영웅들에겐 진실들을 전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슬리피우드 아지트를 마저 조사중이던 루미너스와 메르세데스가 바로 일을 내던지고 에레브로 쳐들어오듯이 튀어왔다.
"그딴 말을 믿으란 거냐!?"
"검은 마법사 그놈이, 그 새끼가 한 짓거리가 사람들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우린 그걸 방해한 입장이고?"
"한 번 말한 거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설명이 필요하면 다른 놈한테서 들어!"
일갈 한 방에 두 사람을 에레브 반대편까지 날려버린 아이는 그렇게 신수의 보석 안에서 잠들었다.
"…… 이게 뭔지 언제 물어볼 수 있을까."
[일단 지금은 안되는 것 같네.]
에반은 아이에게서 진실을 들은 이들 중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그들 중 가장 능력이 없어 진실을 알아도 저것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마법사답게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하고 감정을 쓰는 게 무용함을 직감하고 포기했다.
사건이 커도 정도껏 커야지, 나라도 아니고 차원을 넘어 세계 전체가 걸리니 되려 머리가 눈보라치는 벌판마냥 차갑게 식어버렸다.
"스승님이 변한 건 그란디스에서 그것들을 알아서인 게 확실해보이고."
[그렇겠지. 지금 움직이는 건 이런 상황속에서 어떻게든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일 걸.]
"그게 검은 마법사의 방법보다 나은 거여야 할 텐데……."
스승님이 하는 일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매우 개인적이라 할 수 있는 '집에 돌아가는 것'. 허나 스승님의 옆에는 노바족들이 있다. 그들이 괜히 스승님과 협력중일까. 비밀 회담때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그들도 진상을 알고 어떻게든 살기위해 그분을 돕고 있는 거겠지.
중요한 건 이 부분이다. 스승님이 하는 일은 다가오는 소멸의 미래에서 노바족 - 다른 이들도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그 범위를 어떻게든 넓히는 게 가능하다면 메이플 월드, 더 나아가 다른 차원의 이들까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알아야 할 게 끝이 없네."
[모르는 게 많았던 게 아니라?]
"솔직히 이번 건 차라리 몰랐던 편이 나았을 것 같아."
[계속 그랬으면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겠지만!]
"…… 그래. 그렇지."
저편에서 들려오는 영웅들과 아이의 실랑이를 배경음 삼아 에반은 또다시 몇 번째인지 모르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어느정도 진정된 영웅즈와 에반은 아이와 검호가 말한대로 페어리 퀸 아마란스에게 찾아갈 거라고 연락했고, 그녀는 이제야 준비가 끝났는지 알겠다며 프리드의 옛 집이 있는 곳으로 영웅들을 데려갔다.
"여기가…… 프리드가 살았던 집인가."
"네. 프리드와 그의 가족들이 여기서 살았어요."
비밀 회담에서 그녀가 프리드의 옛 집을 보존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찾아가려 했던 방문이 이제서야 이루어진 거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들은 감상에 젖을 수 없었다.
"그분들이 저를 찾아가라고 한 건 아마 이것들 때문일 겁니다."
아마란스는 마법 연구 기록이 빼곡한 책 수십권 분량의 종이뭉치를 루미너스에게 가리켰다. 그녀는 검호가 연합에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말을 했을 때부터 저것을 넘겨줘야 하는 것을 직감했었다. 그 뒤로 생명의 초월자까지 저를 지목할 줄은 몰랐지만 저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이건……?"
"일단 이 기록에 대해 설명해드릴테니 적당히 보면서 들으세요."
말은 그랬지만 마법 관련 기록이다보니 종이를 보는 건 루미너스 뿐이었고 다른 영웅들은 프리드의 집을 슬쩍슬쩍 둘러보았다.
"과거 프리드는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정착해 가정을 꾸린 뒤에도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검은 마법사가 봉인에서 풀려날 게 분명했고, 그때를 위해 안배를 하고자 했죠."
"그게 이 기록이다?"
검은 마법사가 세계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는 게 미치광이 소리가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발버둥임을 알고나니 반쯤 해탈해버린 메르세데스는 이젠 검은 마법사 소리에도 우린 여태 뭘 한 건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아니요. 끝까지 들어주세요. 먼저 그는 봉인이 풀릴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어느정도인가 알기 위해 검은 마법사를 봉인할 때 쓴 봉인식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던 거에요."
"뭐가 말이지."
그 봉인식을 만든 건 프리드 본인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걸로 봉인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다. 아마란스는 가라앉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바로…… 봉인식을 작동하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뭐?"
"제물?"
"그런 걸 쓴 기억따위 없다. 뭔가 착각한 거 아닌가?"
결전의 날 당일 직접 봉인식을 작동시켰던 루미너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이상했던 거에요. 제물을 바친 - 누군가가 희생한 기억따위 없는데 봉인은 시전됐고, 지금도 작동중이다. 그래서 프리드는 두 가지 가정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기억대로 제물은 없었고 다른 편법같은 걸로 봉인식을 작동시켰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정말로 누군가가 제물이 되었고, 그가 희생된 여파로 모두 그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는 것."
에반은 무심코 영웅들을 보았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튼튼한 정신력을 자랑하는 그들이지만 세계가 이미 멸망했다던가 검은 마법사가 행동이 정말로 세계를 구하는 방법이라는 사실들때문에 알게 모르게 지치셨을텐데 이젠 사실 잊혀진 동료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아니나 다를까 네 사람은 안타까울 정도로 굳어버렸다.
"…… 프리드는 후자라고 생각했나."
"네. 봉인식에 제물이 필요한 이유는 검은 마법사가 륀느 여신님에게서 강탈한 시간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선 이쪽에서도 시간의 힘이 필요한데, 그걸 한 사람이 가진 존재의 시간을 모두 바쳐 봉인식의 연료로 채움으로 해결하거든요."
그리고 스스로를 희생해 존재의 시간을 잃은 이는 그 여파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기록에서마저 그 존재가 사라져버렸다. 프리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존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봉인식은 멀쩡해서 유추나마 할 수 있었던 거죠. 아무튼 프리드는 자신의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증거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사람들 기억에서도, 기록에서도 사라졌다며?"
"바로 그거에요."
부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지워진 흔적들이 되려 증거가 된 것이다.
"일곱 번째 동료가 있었다는 걸 확신하게 된 결정적인 증거는 타임 캡슐에 들어있던 사진이었다고 해요. 누가 넣었는지 모르는 건 물론, 분명 누군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없어서 굉장히 슬펐다고 하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용기있는 희생을 한 동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한 대가로 모두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는 사실을 프리드는 견딜 수 없었다. 아란은 알 수 없는 기호와 글이 가득한 종이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럼 이건 잊혀진 동료를 찾기 위한 연구인 거야?"
"네. 그렇게 존재자체는 확신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중, 오르비스에 갔다가 미네르바 여신님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요."
어딘가에 이 세상 모든 정보들이 모이는 불가사이한 장소가 있다고. 전설일 뿐이지만 그는 이를 흘려넘기지 않았다. 모든 민담과 전설은 어느정도의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니까.
"프리드는 그런 곳이 정말로 있다면 거기에 일곱 번째 동료에 대한 정보도 있을 거라 생각했고, 연구를 시작했어요."
"이건 그 연구 기록이란 말이군."
"저는 그때 그의 연구를 도와줬습니다."
아프리엔이 자신을 대신해 저주를 받고 봉인된 이후, 프리드는 아프리엔에게서 공유받았던 막대한 마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물론 대마법사답게 본신의 마력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시간 마법같이 인간의 한계 이상의 마력을 요구하는 마법들은 못 쓰게 되어 차원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선 아마란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저는 요정족, 페어리퀸이라서 마력만 따지면 그의 몇 배는 됐거든요. 그래서 연구에 필요한 마력을 대주는 대신 몇 가지 도움을 약속받았고, 그렇게 거래가 성립되었죠."
"이 연구자체에 대해선 모르나?"
"프리드는 그 장소가 정말 있다면 메이플 월드가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막대한 정보가 물리적으로 한 장소에 다 모일 수 없다고요. 그래서 타 차원을 관측하고 거기에 직접 가는 마법에 대해 연구했고, 이건 그 기록입니다."
차원 마법. 시간 마법에 이어 인간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영역을 그는 또 하나 개척해낸 것이다.
긴 말을 해서 다소 숨이 찬지 아마란스는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후우…… 결론만 말하자면 프리드는 연구에 성공했어요."
"그게 정말인가?!"
"네. 차원을 건너는 거울을 만들어내고, 그를 통해 마침내 그 장소에 다녀왔죠."
그곳엔 세상 모든 정보들이 책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도서관 같았다고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신나게 얘기했었다.
"그래서 프리드는 그곳을 '차원의 도서관'이라고 불렀지요."
"차원의 도서관……."
"검호 님과 생명의 초월자 님이 제게 가라고 한 건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그곳에 가보라는 뜻일 겁니다."
거기라면 여러분이 원하는 정보가 다 있을테니. 그 말에 영웅들은 각자 생각에 잠기며 침묵했고 한참 조용히 듣고 있던 에반은 조심스레 손을 들며 물었다.
"저기, 여왕님은 차원 마법을 못 쓰나요? 프리드 님의 연구를 도왔다고 했잖아요?"
"저는 못 써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가 도운 건 어디까지나 연구에 필요한 마력을 대주는 정도였고, 이 자료들도 예전에 기록하는 걸 도와줘서 겨우 정리한 걸요."
"아……."
"그래도 이렇게 기록이 있으니 마법사 협회에 갖다줘서 분석하면 아마 프리드가 만들었던 차원을 건너는 거울도 재현해낼 수 있을 겁니다."
"유감이지만 그건 힘들 것 같다."
한참 기록을 보던 루미너스의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네?"
"프리드 이놈, 기초 부분은 그래도 좀 꼼꼼히 기록해놨는데 중간 부분부터 단계를 몇 개씩 건너뛰었어."
[무슨 뜻이야?]
"그놈은 역대 메이플 월드에서 탄생한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대마법사다. 그러니까 시간 마법도 만들고, 차원 마법도 개척해냈겠지."
문제는 너무 천재이다보니 보통 사람들이 차근차근 밟아야 하는 과정을 휙휙 재껴버린다는 거다. 그 흔적이 연구 기록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어 루미너스는 밀려오는 빡침에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아니 타 차원 관측 부분을 한참 적더니 왜 뜬금없이 시공간대 고정 수식으로 바뀌는 거야?!
"이놈이 감각적으로 재낀 중간과정만 복원하는데 몇 년은 걸릴 거다."
"어…… 그러면."
"협회의 상급 마법사들과 리엔의 마법사들을 동원해 정말 대단히, 관대하게, 이상적으로 해석이 진행된다 가정해도 최소 1년 이상이 필요하다."
확인사살 격으로 그 1년도 엄청 짧게 잡은 거라고 덧붙이자 팬텀은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한테 그런 시간 없잖아?"
"그래. 그게 문제다."
이미 모든 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1년이란 시간은 길어도 너무 길다. 에반이 당황하며 물었다.
"루미너스 씨도 바로 해석하실 수 없어요?"
"나도 무리다. 일단 프리드는 마지막까지 내가 따라잡지 못한 유일한 마법사였고, 심지어 몇몇 수식에 수명까지 깎아가며 시도한 흔적이 있는데 이 부분들을 수정하고 빼먹은 중간과정 복원하는데만 몇 년을 잡아야 할 거다."
이 기록대로 차원을 건너는 거울을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차원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건데 그건 주객전도지.
"그, 그치만 스승님이 괜히 페어리 퀸께 가보라고 하신 건 아니실텐데……."
[마스터.]
"왜 미르?"
[그 사람이 차원의 도서관에 대해 알게 된 건 일기장을 통해서였겠지?]
"아마 그렇겠지."
미르는 수북히 쌓여있는 연구 기록들을 힐끗 보았다.
[대충 기록도 다 남아있고 뛰어난 마법사들도 있으니까 후딱 재현해낼 수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던 게 아닐까.]
"…… 설마 그렇게 대충 했을리가."
[그 사람 마법사 아니잖아.]
주변에 차원의 균열을 어찌어찌 조정가능한 노바족들이 수두룩해서 차원 마법이 얼마나 굉장한 마법인지 몰랐을지도. 아니라고 하고싶은데 에레브 협상 때 어딘가 2% 허술했던 스승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완전히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생명의 초월자 님까지 여길 가보라 하신 건 우리가 쓸 수 있는 방법이기때문일 텐데."
"아무튼 이 연구 기록들은 당장 쓰는 건 불가능하다. 일단 하인즈 협회장님에게 가져가 조언을 구해보는 게 최선이라 보는데 괜찮나 페어리 퀸?"
"전 상관없습니다. 그가 이 기록들을 악용할 이도 아니고요."
현재 하인즈 협회장은 협회 마법사들과 함께 차원의 벽에 생긴 구멍을 틀어막으며 차원 마법에 대해 그나마 풍부한 지식이 있는 대마법사다. 그렇기에 이번 일에선 절대적으로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기록들을 챙겨 헤네시스로 향하기로 했다. 종이뭉치를 정리해 상자들에 넣고 이를 아란이 전부 짊어졌다.
"근데 아까 프리드가 수명을 깎아가며 연구를 했다고 했잖아? 그거 진짜야?"
"네. 차원 마법이란 것이 보통 힘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보니 프리드는 몇 번이나 수명을 대가로 연구를 진행했었어요."
"…… 얼마나 살았어?"
혼자 살아남았으면서 그 삶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메르세데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마란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80살 좀 넘게 살았답니다."
"오, 오래 산…… 건가."
"그 당시 인간 기준으로는 오래 산 편이고, 희대의 대마법사치고는 굉장히 단명한 거죠."
하인즈와 알케스터를 보면 알 수 있듯 대마법사쯤 되면 강력한 마력으로 수 백년을 살 수 있다. 하지만 프리드는 검은 마법사를 봉인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시간 마법을 익혔고, 뒤이어 차원 마법에까지 손을 댔다. 하나하나 굉장한 업적이었지만 그 결과 프리드는 희대의 대마법사임에도 1백 년도 못 살고 죽은 것이다.
"정작 그는 수명이 깎여도 개의치않아 했지만요. 중요한 일들에 썼으니까 괜찮다고, 뭣보다 그렇게 오래살고 싶지 않다고 말이죠."
"어째서?"
"'이제 혼자 남겨지는 건 싫어. 이걸로 가족들과 같은 시간을 살 수 있게 됐으니까 오히려 좋은 걸?'이라고 태연하게 말하던데…… 솔직히 그때 한 대 때릴 뻔 했습니다."
우스갯소리 같았지만 그 말에 담긴 감정과 무게에 영웅들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모두 얼음 속에 봉인되고 홀로 남겨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갔을까. 검호가 가져갔다는 일기장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들은 그런 상황이 못 됐다.
그리고 뒤늦게 그들은 눈앞의 여인이 프리드를 가장 오래 보아온 이임을 깨달았다. 그들이 영웅으로서 함께 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지켜보았을 친우가 그녀였다.
"페어리 퀸."
"네 루미너스."
"만약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좀 더 그에 대한 얘기를 해줄 수 있나."
아마란스는 꽃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연히 해드리죠. 꼭 전해주겠다고 약속했는 걸요."
"…… 고맙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가면서 간단히 얘기하죠 뭐. 다른 궁금한 거 있나요?"
"나 있어! 프리드 걔가 대체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까지 한 거야?"
"그건─."
영웅들과 페어리 퀸의 사이가 꽤나 풀릴 무렵, 에반은 그들에게서 동떨어져 무리의 꼬리끝에서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스승님이 실수하실 순 있어. 하지만 생명의 초월자도 여길 가보라고 한 건 역시 저걸 쓰는 게 정답이기 때문일 거야.'
문제는 차원을 건너는 마법과 그걸 이용한 도구를 만드는 게 당장은 절대 무리일만큼 엄청나게 어렵다는 거다. 그나마 프리드의 기록이 있으니 시도나마 할 수 있는 거고, 그마저 없었다면 꿈조차 못 꿀만큼 까마득한 난이도의 일이다.
'일단 가능하니까 두 분 다 페어리 퀸께 가보라고 했을텐데.'
설마 가능만 하고 기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던가 그런 건…… 제발 아니었으면. 스승님이 실수하신 거고 생명의 초월자는 '어쨌든 되긴 되잖아'란 마인드로 여길 알려준 거면 진짜 망했다.
'가장 빠른 방법이 차원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설계도를 보고 만드는 거라고 했지만.'
루미너스 씨가 말한 차원 마법을 쓸 수 있는 정도는 최소한 '차원을 건널 수 있는 수준'일 거다. 그런데 그만한 마법사는 메이플 월드에 없다. 애초에 차원 마법을 제대로 사용한 사람이 해당 마법의 개척자인 프리드뿐이고.
'노바족은 조금 가능하다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든 만나봐야 하나.'
근데 그들이 어디있는지 모른다. 에델슈타인의 레지스탕스들도 여기없다 하고, 슬리피우드 기지도 텅텅 비었다던데.
'초월자님께 물어봐야…….'
스승님께 해준 도움이란 걸 보면 직접적인 도움은 무리라도 궁금한 것에 대답정도는 해주시는 것 같은데.
'거기다 왠지 노바족들도 잘 모를 것 같아. 그들이 그란디스에서 메이플 월드로 올 수 있었던 건 차원을 건너는 마법을 쓸 줄 알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차원이 메이플 월드와 이어져서잖아.'
그렇다면 어떻게 차원의 도서관에 갈 수 있을까. 정말 몇 년동안 저 기록들을 해석해야 하나? 그만한 시간따위 없는데?
"그게 정말인가? 차원 마법 연구의 모태가 그의 할머니였다는 게?"
"네. 프리드의 할머니는 전 리프레 제일의 마법사였다고 해요. 그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는 어느 날 영감을 받아 차원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실험 도중 갑자기 실종됐다더라고요."
"가족이 한 명 있었다곤 들었지만 그런……."
"하여튼 그래서 프리드는 차원 마법을 막 연구할 때 여러모로 꺼림칙해 했지만, 자료를 구하기 위해 리프레에서 할머니의 연구 기록들을 찾아오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할머니를 실종시킨 불완전한 연구를 완성시키자고.
"어쩌면 차원의 도서관을 그토록 찾았던 건 잊혀진 동료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뿐이었던 가족의 행방도 알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죠."
"굉장히 심경이 복잡했겠네."
"다 그렇지요."
차원 마법을 연구하던 중에 사라졌다면 어딘지 모를 차원으로 떨어져버린게 아닐까. 스승님이나 키네시스 형처럼.
'차원을 넘은…… 할머니…… 스승님과 키네시스 형…….'
에반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단어들을 계속 곱씹으며 무의식적으로 단어들 사이의 느슨한 연결고리를 더듬었다.
'마법이라든지, 몬스터라든지 하는 건 게임이나 만화로 많이 보기도 했고.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까.'
'냥? 네가 살던 세계에는 마법도 몬스터도 없는 거 아니었냥?'
'그렇긴 한데 최근 들어서 먼지 괴물같은 게 나오고, 화남 할머니라고 이곳에서 건너왔다는 마법사도 한 분 계시거든.'
키네시스 형이 말한…… 메이플 월드에서 왔다는 마법사 할머니……?
"─있어요!!"
"아,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에반?"
뜬금없이 큰 소리로 외쳐 순간적으로 놀란 팬텀과 아란이 뒤를 돌아 에반을 보았다.
"있어요! 있다고요!"
"뭐가 말이냐?"
"차원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차원을 건널 수 있을만큼 쓸 줄 아는 마법사가 있어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아마란스의 당혹어린 질문에 에반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여러분이 말한 프리드의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실 가능성이 높아요."
***
키높은 나무가 거의 없는 녹색 융단과 그 위로 색색의 꽃들이 수놓아진 평원에 한 쌍의 노부부가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옅은 갈색이 도는 백발을 단정히 정리한 노부인은 회한에 젖은 푸른 눈으로 풍경을 담았다.
"그때로부터 8백 년이나 흘렀다는구려."
"플로우라."
"이미 각오했었어. 시간이 차이날 건 물론, 영영 돌아오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거에 비하면 나은 거지."
노부인과 비슷한 꽤나 주름진 얼굴의, 그러나 흰머리는 커녕 새카만 윤기를 자랑하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른 노신사는 날카로운 금색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노부인의 어깨를 감쌌다.
"검은 마법사란 놈때문에 오닉스 드래곤이 멸종해버렸다고 하네."
"모든 종족은 언젠가 사라지게 돼있다."
"내 손주가 희대의 대마법사이자 영웅이 되었다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아."
"…… 플로우라."
"그들이 그리 될 줄 알았으면 실험따위 관두고 좀 더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말을 이을수록 지팡이를 잡고있던 노부인의 손이 점점 더 크게 떨리며 이내 지팡이를 탁, 놓쳐버렸다.
"슬프기 짝에 없어…… 정말 슬프기 짝에 없어."
주름진 눈가를 타고 가느다른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걸 누가 볼 새라, 아후라는 더욱 깊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돌아온 세계마저 낯설어진 이 상황에서 온전히 기댈 수 있는 건 영혼이 이어진 서로뿐이었다.
========== 작품 후기 ==========
플로우라가 차원 마법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검호와의 대화때문인 걸 감안하면...
조연을 만들 때 중요한 건 그 조연의 역할입니다. 애초에 비중이 적으니 작중 그 사람만의 역할을 꼭 쥐어줘야 하죠. 플로우라의 역할은 현 시점에서 유일한 차원 마법 사용자라는 겁니다. 사실 그녀는 초반에 출현하긴 했지만 제 역할을 진짜 할 때까지 연재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쓰네요.
영웅들의 멘탈은 참으로 튼튼합니다. 세계는 이미 망했어!+ 검마 봉인한 건 사람들 구하는 거 방해한 거야!+ 사실 니들한테 7번째 동료가 있었어! 를 연달아 겪고도 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참... 그러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영웅즈 코인에 투자를...!
이제 고대하던 차원의 도서관 파트군요. 언제 올릴지 모르므로 미리 알려드리자면 볼 책들은 '아리에스', '하얀 마법사', '프리드', '검호', '이데아'입니다.
새벽 삘을 연달아 3번 받고 당과 탄산음료 빠워로 후다닥 써갈겼습니다. 대신 용량이 좀 딸리긴 한데 비정기 연재로 바꾼 의미가...?
@AbViaLectea - 소통장애 플러스 사이코패스를 추가해주세요. 공감 능력 없습니다.
@로퓔랜 - 작중 오버시어가 무지무지 특이한 사례고... 대부분의 오버시어는 창세에만 좀 관여하다 그대로 세계에 동화되어 사념만 모으고 멸망하는 시점까지 직접적으로 간섭 안 합니다.
@KRamiya - 돌아서기엔 아직 검호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모른다는 게 발목을 잡음.
@검은짱돌 - 예! 희망찰 겁니다. 자세히는 스포일러라 말 못하겠네요.
@Legendssj2 - 그리고 다음편이 2주만에 나오는 훼이크를 저지르게 됐네요. 한 번 삘 받은 걸 놓치면 한 달이 지나도 못 써서 어쩔 수 없었어요!
@Lord of Sword - 배려심 그런거 없습니다.
@레시코 - 난죽택 확률이 70%이상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같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얻는데 수 십억 년이 걸리는 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황에 대한 공감 능력'을 두어개 얻는데 수 십억 년이 걸린단 말이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모아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 되는데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천궁사월 - 현실에서, 리얼의 압박에서 탈주하고 싶다...
@제3성신입자체 - 할로윈 버전이니까요!
@드라몬 - 그것도 곧 옵니다.
@인리연찬 - 정답! 아스카!(농담)
@이루카이저 - 편할때 올렸습니다.
@랴누 - 누가 알바자리라도 좋으니 꽂아줬으면(간절)
@Blake117 - 이미 죽은 건 또 죽지 않아요! 부도난 건 또 부도나지 않듯이!
@mmo0522 - 그래서 이번엔 빨리왔다!
@ReFrante - 상황이 적절해서 제가 쓴겁니다.
@생명체는꿈을꾼다 - 철저히 본인 기준에서 말하는 점이 참...
@socns - 인게임에선 뭐. 그래도 마하 쓰는 기술들은 나쁘지 않잖아요?
@카즈사야 - 정답:난죽택이 반.
@역십 - 3~4개 정도의 챕터가 남았네요.
@육합 - 반 초월자라 영역이 없습니다. 제로처럼 하나였던게 쪼개진 것도 아니고.
@가을청월 -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게 사실 답이 아예 없음을 깨달은 순간.
@찬양천사 - 본인이 만든 템입니다. 생오버도 신물을 하나 갖고 있지만 작중 쓸 일이 없어요.
@리아카에린 - 마하와 아란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중요할 땐 척척 맞는 파트너, 에반과 미르는 잘 맞는듯 안 맞는듯 하지만 항상 붙어다니는 친구, 검호와 아스카는 어디든 함께하는 동반자. 대충 이런 느낌입니다. 그리고 설문으로 했던 외전은 어... 죄송합니다. 본편 연재하느라 깜빡했어요. 어딘가에 미완으로 써놓은 게 있을텐데 나중에 완성하겠습니다...
@푸르고큰소나무 - 연중은 안 할겁니다!
@소라노아카시 - 데몬에겐 여러모로 충격과 공포(이유:검호의 행적)겠고 루미너스에게도 뭐... 미리 둘에게 애도를.
@AK독자 - 제가 왔습니다!
@아유헝그리 - 소장본은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네요. 그리고 설령 만들어도 1부는 무조건 리메이크를 해야해서.
@얀데레가넘나좋아 - 안타까운 점은 현재 검호는 지구에서의 친구들을 대부분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ㅡ릿 - 어울리는 영역을 부여한거니까요. 다만 본래는 다른거라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숲속과클로네 - 당과 탄산이 있으면 어떻게든 글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건강은 아직 20대니까 괜찮겠죠!
@책벌레씨 - 잽따위 없다! 바로 스트레이트!
@루니악 - 정답:소멸 확정
@Faceless - 그리고 소멸하든 말든 본인 목숨은 상관없는 고로 팝콘씹으며 구경중인 생오버(인성이...)
@Ratios - 이번엔 빨리왔어요!
@코로미 - 순식간에 늘어나서 저도 놀란. 예전에 제가 올리고 바로 1빠 달려고 했는데 놓쳤었습니다.
@칼크래프트 - 그리고 그래놓고 난 상관없어서 개꿀잼 몰카 보듯 구경중임ㅋ 이라 당당히 말함. 그중에서 검호가 제일 재밌어서 검호 옆에 있던 거고.
@darkniszero - 아직 안가셨다면 이거까지 보겠네요.
@by상담사 - 중간에 여제님 기절 안 하신게 용한겁니다.
@워테루 - 오버시어는 기본적으로 완곡 표현따위 없습니다.
@미카츠키아이코 - 두 번째 파트에서 영웅즈가 프리드 얘기하며 마냥 하하호호 웃는 것 같지만 사실 멘탈이 꽤 위태로워서 저런 얘기나마 해야 정신 제대로 붙잡을 수 있는 지경이란 거...
@혼돈신사 - 코멘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재형 - 이번 편은 보너스?
@제레프 - 파픈스타:난 외전 아니면 에필로그쯤에 나온데.
@갓타치 - 애초에 전해줘야하는 말이 저거였기 때문에...
@레볼레이션 - 문제: 가장 멘탈 갈린 사람은 누구인가? 1. 사람들 영혼이나마 구하려면 검마한테 죽는거란 걸 안 시그너스 2. 자기들이 목숨걸고 한 검마 봉인이 개 삽질인 걸 안 영웅즈 3. 저 상황속에서 자기가 암것도 못하는 걸 알고 현타 온 에반. 정답은?
@마늘마느리 - 그래서 오버시어 화법은 쓰기 좀 어려운 느낌도 있습니다. 직설적이면서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그 속에 알고보면 뭔가가 많이 담긴 그런 느낌.
@이름일껄 - 저게 제일 중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