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호와 아스카가 소수의 노바족을 이끌고 옛 크리티아스 터를 조사하러 간 지 며칠이 지난 현재, 이데아는 손톱을 뜯고싶은 충동을 참으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세게 딱, 따닥 두드렸다.
"아직도 내부 돌입이 안됩니까."
"예……."
"정말이지, 뭔 놈의 결계가 그 따위인 건지."
과거 검은 마법사에 의해 크리티아스는 지반 채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 짙은 흑안개만 음산하게 깔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 그곳에는 수 백년 간 떠돌던 흑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대신 성채 이상의 견고하면서 복잡한 결계가 펼쳐져 검호와 함께 들어간 조사대를 제외하면 추가 병력 투입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인간이야 항마력이 정신나갔으니 자기도 모르는 새 뚫고 들어간 모양인데 지금 저희가 돌입할 수 있는 방법은…… 후."
초월자면서 뛰어난 마법사라는 건 이리도 까다로운 적이다. 처음부터 초월자로 태어난 이라면 연륜이 있다한들 힘을 그저 감각적으로 다룰 뿐이지만, 본래 필멸자였다가 초월자가 된 이는 사람이었을 때의 기술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안다. 하물며 한 때 최고의 대마법사로 칭송받았던 이가 초월적인 힘으로 직접 친 결계라면 말할 것도 없다.
"우리 힘으로도 안되나?"
"그건 모르죠."
"그럼 한 번 해봐야지."
"아니요. 당신들은 할 일이 따로 있잖습니까."
프라이쉬츠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시간의 신전에 갔었던 데미안은 아카이럼과 루시드에게 대략적인 계획을 전해들었다. 지긋지긋한 기다림을 한 번에 날려줄 대규모의 의식을 크리티아스에서 준비중이며, 이걸 위해 그동안 메이플 월드에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의식이 구체적으로 뭔지 물어봤지만 루시드는 본인도 모른다고 했고, 아카이럼은 속에 뱀이 수 백마리 또아리 튼 영감답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 인간이 위험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일을 동시에 진행하겠다고?"
"이쪽도 만만치않게 중요하니까요. 거기다 지금보다 때를 더 늦출 수 없습니다."
데미안이나 다른 강자를 투입해 결계에 구멍을 뚫어보자는 의견이 안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은 군단장과 본격적으로 싸우기에 앞서 초월석을 미리 획득해야하는 상황이고 - 지금 못하면 군단장과 싸우는 중에 강자를 빼서 얻으러 가야하는데 그건 위험하다 - 데미안과 사이, 키네시스가 이 일을 맡기로 이미 정해져있다. 문제는 그들이 현재 노바측에서 가장 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거다.
데미안은 프라이쉬츠라는 화력깡패를 제외하면 현 군단장 중 가장 강하며, 사이와 키네시스는 염동력 빼면 시체 소리를 듣지만 달리 말하면 다른 거 다 없어도 그 능력만 있으면 인정받을만큼 굉장한 초능력자들이다. 폭주 상태로 차원의 벽에 타격을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당신들은 예정대로 초월석을 가지러 가십시오. 그 사이 저희는 계속 결계 안에 들어갈 방법을 찾을 거고, 돌아올 때까지 찾지 못하면 당신들을 투입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슬아슬하지만 될 거라고 봅니다."
혼자 보냈으면 그녀도 꽤 고민했겠지만 그 오닉스 드래곤이 함께다. 둘의 조합은 서로의 단점을 상쇄하고 장점을 극대화해줄만큼 시너지가 좋아 과거 아무것도 모른 채 프라이쉬츠와 교전했을 때 이겼을 정도라 했으니 최소 3일은 더 사지 붙은채로 생존해있으리라. 그 안에 데미안과 사이킥 콤비가 초월석을 가져와 바로 크리티아스 쪽에 가면 된다.
"그냥 그 흰머리 보내는 건 안 되나."
"유감이지만 그는 사전조사를 나간 상태입니다."
현재 용의 후예 내 강자들은 모두 최소 하나 이상 군단장을 맡기로 되어있고, 세피로트는 처치 과정에서 아군 측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마지막 조사 임무를 하러갔다. 반 레온과 아카이럼, 힐라는 이미 그의 시간대에서 죽여봤던만큼 정보가 많지만, 새로운 군단장인 루시드와 또 다른 한 명은 정보가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 부분은 데미안이 알고 있는 정보를 쓰려 했었는데 그가 원체 아싸였던지라 신 군단장들과 교류가 없어서 쓸만한 정보도 너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경험 상 이런 정보 부족은 거의 반드시 돌발상황을 만든다.
특히 마지막 한 명이 시간의 초월자와 엮여있다니 조사에 있어 더더욱 신중을 가해야한다.
"급할 수록 차분하게, 순서에 따라 일을 하는 게 최선입니다. 당신의 일을 하러 가주세요."
"쯧. 알았어."
이후 데미안은 뛰어난 부하들을 대동해 사이킥 콤비와 함께 비행유적을 타고 프렌즈 월드로 넘어갔다.
***
책이 끝나며 그들은 차원의 도서관으로 나왔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검은 마법사. 한 때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재앙의 화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 그와 그의 수하들에 의해 죽은 이들이 시산혈해를 이루었고, 이를 견디다못해 들고 일어난 게 바로 영웅들이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죽이지 못한다면 봉인이라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그런데 그가 벌인 학살이 사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매우 과격한 - 정확히는 검은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생명의 초월자에게 듣고 얼마나 기가찼었는지. 세계가 이미 멸망한 상태고, 검은 마법사의 학살은 하다못해 영혼이라도 건져 새로운 세계에 옮기기 위한 발악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들은 그동안 지켜온 뭔가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걸 느꼈다.
허나 그럼에도 그들은 검은 마법사를 옹호하는 짓만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었다 한들, 세계의 진실이 가혹한들, 마찬가지로 무수한 생명이 그런 식으로 놈의 손에 죽어 마땅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그건 죽은 이들에게 최악의 모욕이다.
그랬는데…… 검은 마법사, 초월자가 되기 전의 그는─.
"아린은, 어떻게……."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낸 이는 에반이었다. 책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용병을 부르짖던 그 소녀는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말없이 바닥을 보던 데몬이 말했다.
"죽었을 겁니다. 꽤나 높은 확률로."
"아……."
"보호자가 없고, 무기라고는 장총밖에 없는 어린애가 그 숲에서 무사히 살아 나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오로라의 단원들도 거의 다 죽어 만약이라도 다른 이가 구해주러 올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생존한 오로라 단원에게 구해졌다 한들 앞서 루미너스가 말했듯 오로라는 이후─.
이름을 안 이상 책을 찾으면 생사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에반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데몬의 말대로 만에 하나의 확률이라도 좋으니 그 소녀가 살아남았다고 믿고 싶었다.
둘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도서관 홀에는 다시금 죽음같은 침묵만 이어졌다. 누군가는 상상도 못했던 진실탓에, 또 누군가는 깊이 생각에 잠겨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초월자가 보기에도 이 세상은 가망이 없다는 뜻인데.'
그 중 팬텀은 명백히 후자인 이였다. 감정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던가, 가볍고 능글맞아보이는 성격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이다. 검은 마법사가 과거엔 사실 세상을 구하려던 선인이었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아니다. 그나마 유의미한 정보라 할 수 있는 건,
1. 하얀 마법사는 궁극의 빛이 없다, 세계가 이미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해(혹은 이를 계기로) 검은 마법사가 되었다.
2. 초월자가 되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힘을 전쟁을 멈추는데 쓰지 않고 학살을 벌였다.
3. 1과 2, 그리고 하얀 마법사로서 마지막 순간에 했던 말까지 고려해볼 때, 세계의 모든 진상을 알고 초월자로서의 힘까지 가진 그가 이 세계를 구제하길 포기했다는 건 사실상…….
'정말 검호 그 밖에 없는 건가.'
희망이라는 거, 어떤 의미로 고문같네. 포기하고싶을만큼 암울한데 포기할 수 없게 만드니.
작게 한숨을 내쉰 팬텀은 다른 이들은 어떤지 슬쩍 둘러보았다. 아란과 메르세데스, 나인하트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데몬은 이젠 복수의 대상일뿐인 이의 과거따위에 관심없었으며, 에반은 진정된 걸 넘어 아예 축 가라앉아버렸다. 테스는 연륜이 장식이 아니었기에 벌써 정신을 차린듯 했다.
그리고 루미너스는…….
"아…… 아아……."
퍼석해진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뚝뚝 떨어졌다. 불길한 예감에 급히 무기를 들기 무섭게 새하얀 케이프 위로 날카로운 빛의 결정들이 맺혔다.
"야 샌님!!"
째앵─!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팬텀이 방어막을 펼쳤지만 급조된 터라 강도가 부족해 튕겨내지 못한 결정들이 송곳처럼 바닥에 푹푹 박혔고, 떨어진 결정들이 뿜어낸 빛에 짙어진 그림자들이 뭉쳐지며 들불처럼 거칠게 일어나는 광경에 아직도 굳어있던 이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루미너스, 일단 진정해!"
"말을 못 듣는 것 같은데 머리를 쳐서 기절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뭘 보자마자 폭력을 쓰자는 거야?!"
전 군단장이란 정말! 그러나 메르세데스 역시 당장 루미너스를 진정시킬만한 마땅한 방법을 못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 마법사의 과거에 충격을 받은 건 모두 똑같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심하게 충격을 받은 이는 당연히 루미너스였다. 나고 자랐던 오로라의 진상과 삶의 이정표였던 빛의 수호자로서의 의무를 최초로 세운 이가 다름아닌 검은 마법사였던 것, 거기다 그 자신이 본래 무엇이었는지 한꺼번에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용병이 검은 마법사를 쫓던 길에 보았던 빛의 결정. 검은 마법사가 궁극의 어둠으로 화하는 과정에서 떼어낸 최후의 빛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가 나의 근원이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아기의 기억을 망각하지만 뛰어난 마법사인 그는 그렇지 않았다. 어렴풋하지만 분명하게, 누군가의 안에 있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밝고 따뜻한 곳에 파묻혀있다 어느 날 갑자기 끄집어져 차디찬 곳에 버려지고, 그대로 숨이 꺼져 사라지기 직전 누군가에게 거두어져 겨우 살게 된 일련의 과정을 똑똑히 기억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태어남과 동시에 버려졌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 역시 조금 전까지 그랬다.
분신이라니! 부모자식을 넘어 그저 성장 과정만 다른 또 하나의 하얀 마법사나 다름없지 않은가!
"반마족 놈 의견은 싫지만 저거 진짜 기절시켜서 제압해야겠는데?"
[슬리피우드에서 마스터가 일으켰던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위력은 완전 딴판이네.]
"영웅이랑 꼬맹이를 어딜 비교하냐."
아란과 데몬은 빛과 어둠의 연무를 막아내며 적절한 틈을 살폈다.
마력 누출 현상. 주로 마법사가 감정적으로 격양되어 자신의 마력을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흘려보낼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제대로된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마력만 방출하는 것인만큼 연비나 지속시간이 상당히 떨어지지만 일으키는 주체가 영웅급 대마법사가 되니 어지간한 4차 마법보다 더 강력해 섣불리 손댈 수 없다.
"그 프리드란 이도 저러더니 이번에도…… 사이좋게 짰습니까?"
"뭐? 프리드도 저랬다고?"
"예. 그러다 책을 몇 권 망가뜨려서 쫓아냈었죠. 저 자도 책을 훼손시키면 쫓아낼테니 빨리 말려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데몬은 망설임없이 허리춤에 걸려있던 셉터를 뽑아들며 포스를 집중시켰다. 빛과 어둠의 마력 폭풍과 그 중심의 루미너스까지 한 방에 날려버리려는 심산이었지만 당연히 다른 이들이 그걸 구경하고 있을 리 없었다.
"야 너! 누가 너보고 해도 된댔어?!"
"위력은 적당히 조절할테니 걱정마시죠."
"네가 하는 걸 어떻게 믿으라고? 우리가 할 거니까 무기 치워!"
아란의 거센 반발에 데몬은 작게 혀를 차며 포스를 거뒀다. 둘의 실랑이에 탈레스 관장은 지친 얼굴로 재촉했다.
"누가 하든 상관없으니 책이 망가지기 전에 빨리─"
"걱정 마. 금방 끝낼 거니까."
눈 위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틸 스킬을 띄운 팬텀은 마력 폭풍의 틈새를 정확히 포착하고 신형을 날렸다.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푸른 빛이 맺힌 케인은 마력의 폭풍을 커튼마냥 찢어발겨 걷어냈고, 남은 잔재도 그의 뒤에 떠오른 텅 빈 거울같은 형상 안에 빨려들어갔다. 눈 깜짝할 새 마력폭풍을 철거한 팬텀은 그대로 케인을 쥐지 않은 반대쪽 손을 꽉 움켜쥐어 있는 힘껏 휘둘렀다.
빠악─! 루미너스의 고개를 홱 돌아갔다.
"충격받은 건 알겠는데 이제 그만하지 샌님?"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 아니면 반쯤 넋이 나갔는지 루미너스가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아 팬텀은 바로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내가, 그놈의……!"
"그래그래, 네가 나고자란 곳이 사실 검은 마법사가 창설한 조직이었다는 건 굉장히 충격이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한텐 시간이 없고, 봐야할 책은 아직도 남아있어. 그러니까 고민거리들은 당장은 미뤄놓고─"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내가 그놈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란 말이다!"
"…… 뭐?"
누군가에게 거둬진 이후 그는 양수같은 액체에 담겨 어느정도 성장할 때까지 관리받았다. 미숙아라 그랬나? 싶었지만 비밀을 알고 난 뒤엔 그 실상을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빛의 결정을 거둔 오로라의 단원들이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온갖 마법과 연금술을 쏟아부어 사람으로 전생시킨 것이다. 마치 호문쿨루스를 만들듯이.
"그러고보니 그 자…… 인간일 때도 결혼같은 건 안 했던 걸로 보였죠."
[듣고보니 그렇네.]
마지막에 너무 엄청난 걸 봐버려 그 전까지 하얀 마법사가 루미너스의 아버지나 최소 혈연지간이 아닐까 생각했던 걸 까먹고 있었다. 어쨌든 하얀 마법사는 인간일 때 자식을 두지 않았던 걸로 보였는데, 그렇다면 그와 놀랍도록 닮은 루미너스는 정상적인 관계로 이어진 게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분신이라니? 몇몇 눈치빠른 이들은 마지막에 용병이 보았던 빛의 결정을 떠올리며 설마했다.
"생존한 오로라의 단원들이, 그가 떼어내버린 나를 발견하고 사람으로 만든 거다."
"너, 그걸 어떻게,"
"나는 그의 능력을 고스란히 갖고 있으니까."
인간이었을 적에도 최고의 빛의 마법사이자 대마법사였던 그의 힘 - 재능은 물론 외모까지 그대로 물려받은 루미너스의 존재는 참사에서 생존한 오로라 단원들에게 있어 애증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이끌었지만 끝내 실망시키고 떠나간 그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그를 무찌를 가능성을 가진 희망이었을 테니까.
생각하면 할 수록 오로라에서 보고 겪었던 모든 것에 의심이 뻗었다. 자신이 빠르게 마법을 익혀갈 때 감탄하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기색을 드러냈던 이들, 사제인 비어완과 루시아에 비해 유독 자신에게만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던 것, 죽어가는 중에도 집착을 넘어 거의 강박적으로 검은 마법사를 처치해달라고 당부했던 스승까지.
"오로라가 그 놈이 창설한 조직이라서 이러는 것 같나?"
차라리 그것뿐이면 나았을 거다.
지금 자신은 태어나서부터 함께했던 이들에게 받았던 수많은 가르침과 애정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야하니까! 이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자신이 검은 마법사의 일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인 즉─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게 온전히 나의 의사였는지, 그의 잔재로서 그 영향에 이끌린 것에 불과했는지 확신할 수 없어졌단 말이다……!"
어깨를 잡아 세우고 있던 제 팔을 꽉 붙잡는 손에 팬텀은 인상을 썼지만 다음 순간 루미너스를 보고 숨을 삼켰다.
그는 울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무찌르겠다고 한 결심이! 마지막까지 빛의 길을 관철하겠다는 각오가! 놈을 봉인하기 위해 택했던 희생이! 모두 그에게서 비롯된 존재였기 때문에 예정되었던 운명일 뿐이라면!"
─대체 나란 존재는 어디에 있냐고!!
기어코 눈물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한 편으론 굉장히 눈에 익었다. 바로 조금 전 검은 마법사로 변모하기 직전의 하얀 마법사와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았으니까. 머리 길이와 눈 색만 빼면 너무 똑같아 다소 기분나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팬텀은 잠깐 놀라다 바로 미간을 찡그렸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거잖아. 겨우 그거갖고 이러는 거야?"
"이……! 네가 뭘 안다고!"
"말이 심했어 팬텀."
메르세데스는 일단 둘을 떨어뜨리고 루미너스를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팬텀의 말이 더 빨랐다.
"사춘기도 아니고 그 나이먹고 이제와서 정체성 혼란이라니. 이런 것까지 샌님같네."
"너 이 자식!!"
"야. 다른 사람은 뭐 다를 줄 알아?"
페르소나 아래의 보라색 눈이 여러 감정들로 얼룩진 푸르고 붉은 눈을 쏘아보았다.
"다른 사람은 부모의 영향을 안 받고 오롯히 자기 스스로의 길을 척척 간다고 생각해?"
그럴 리가 없잖아.
"외모가 닮은 거? 재능이 같은 거? 그런 경우는 쎄고 쎘어! 애시당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정해진 채로 난다고!"
외모, 재능, 성격, 호불호, 노력 등 여러가지가 유전이란 이름으로 정해진다. 환경은 뭐 다른가? 아기는 자기가 어디의 누구 자식으로 태어날지 정하지 못한다. 그게 됐으면 고아따위 없겠지.
"지금까지 해온 선택이 분신으로서 그놈 영향을 안 받은 거라 할 수 없어졌다고? 넌 그 선택들 내릴 때 전부 너 혼자 결정했냐? 주변에서 조언도 안 받고, 도움도 안 구하고, 지적도 안 받았어?"
뭐든지 처음부터 혼자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 이 말인즉 사람은 무언가를 할 때 대체로 다른 누군가와 함께해야 하며, 또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좋든 싫든 늘 받고 있다는 의미다.
"네가 그놈에게서 비롯된 존재일지언정 그놈이 아닌 루미너스란 별개의 사람이라는 건, 너를 채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잖아."
"……."
단호하면서도 명쾌한 대답에 루미너스는 드물게 멍청한 얼굴로 팬텀을 보았다. 무슨 폭언을 할지 몰라 그를 말리려 했던 메르세데스와 아란도 얘가 왠일로? 라는 표정을 지었고, 데몬과 테스는 작게 감탄했다. 어쨌든 루미너스가 진정한 걸 확인한 팬텀은 널브러진 책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추방은 아니지?"
"예, 예. 다행히 모두 무사하군요."
"쉽게 망가지진 않는 것 같네."
"보통 책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조금 전의 마력폭풍 같은 것에 직격하면 어쩔 수 없이 망가진답니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고쳐지지만 그렇다고 막 망가뜨려도 되는 건 아니거든요. 이후 그들은 한동안 마력 폭풍의 여파로 망가지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들과 내용을 필사한 종이들을 정리해야했고, 특히 루미너스는 가장 열심히 움직였다.
"이제 거의 정리됐으니 다음 책을 보는게 어떻습니까."
"난 이번에 빠지겠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이야."
"괜찮으세요 루미너스 씨?"
"걱정마라."
많이 진정되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루미너스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책을 필사한 종이들을 마저 정리했다. 다른 이들도 당장은 그를 쉬도록 하는게 낫다고 의견을 모아 루미너스는 다음 책을 보는 것에서 빠지기로 했다.
"이번엔 이걸로─"
"왜 또 네가 골라?"
"어차피 3권 밖에 없는데다 다 볼 건데 누가 고르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까 전에 네가 골라잡은 게 하필 그거였잖아. 이번엔 좀 무난한 건지 미리 확인하라고."
아란은 데몬이 집어든 책을 내려놓게 하고 다른 책을 들어 대충 내용을 흝어보려 했다.
"이것도 검호가 아닌…… 어, 어어어─!?"
"뭡니까."
"이거 프리드 책이야!!"
"예?"
"그게 정말입니까?!"
프리드의 책이란 말에 다들 너나할 것 없이 놀랐다. 표지를 잘 보니 붉은색과 금색, 보라색을 기조로 용을 형상화한 화려한 문양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프리드가 자기 책도 봤던 거야? 아니, 볼 수 있어?"
"예 가능합니다. 다만 자신의 책은 딱 현재 진행된만큼만 읽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 뒷부분까지 보면 인생을 스포일러 당하지 않습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를 미리 알아선 안 되죠. 탈레스의 대답에 그럭저럭 납득한 그들은 이걸 볼지말지 의견을 나눴다.
"그 사람 책이 아닌데 당장은 제껴놓는게 어때?"
"하지만 프리드인 걸. 검호가 아니더라도 현 상황에 대해 알고 뭔가 대책을 세웠을지도 모르잖아."
"믿음도 그쯤되면 광신…… 이라고 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의 마법사라면 진짜 그럴 것 같아 무섭네."
"우리가 저주로 봉인된 이후 프리드의 행적이 어땠는지 페어리 퀸한테 대강은 들었지만 역시 한 번 봐야겠어."
"사생활 침해아닙니까."
"어차피 걔도 우리 책 봤을텐데 뭐."
일행의 반이 영웅들이었기에 다수결은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프리드라면 현 사태에 대해서 당시라 하더라고 얼추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반, 검은 마법사의 봉인 이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 싶다는 바램이 반이었다.
"근데 샌님 넌 쉰다고 하지 않았어?"
"쉬긴 할 거다. 대신 나중에 따로 보거나 너희한테 얘기를 들을 거니까."
"그 동안 잠시 눈붙이고 계시는 게 어떻습니까 루미너스 님."
"생각해보지."
그렇게 루미너스만 빠진 가운데 그들은 프리드의 책을 펼쳤고, 부드럽게 흘러나온 적금색 빛무리에 휘감겨 안에 들어갔다.
***
용의 마법사, 시간의 마법사, 영웅들의 리더 등 화려한 수식어들의 주인공인 프리드는 수년 간의 싸움 끝에 검은 마법사를 봉인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뒤의 삶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군단장의 역사조작도 있었지만 그 전부터 사람들은 그의 활약상에 집중했을 뿐, 봉인 이후 그가 어떻게 살다 갔는지는 별로 관심을 가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엔──!」
평생을 함께할 거라 믿었던 동반자와
「메르세데스! 아란! 루미너스! 팬텀!」
스스럼없이 목숨을 맡길 수 있었던 동료들을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진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 와중에 검호 그 사람은 안 부르네.]
"뭐랄까, 믿을 수 있는 거랑 별개로 거리감은 좀 있었으니까."
[아직도 이름을 모르면서 '좀'이라고?]
"제발 입 다물어줘 미르."
나무고 건물이고 온통 불에 탄 폐허에서 눈을 뜬 프리드는 동료들을 찾아헤맸다. 안 그래도 전투로 잔뜩 지쳐있었는데 기절하기 전에 아프리엔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무사하구나 프리드…….」
「아프리엔! 어, 어떻게 된 거야? 왜 몸이─」
「…… 검은 마법사는 봉인될 때도 그냥 가지 않았다.」
그러나 행운이라 생각한 희망은 금방 짓밟혔다. 검은 마법사가 봉인 직전 그들에게 내린 저주를 내렸고, 안 그래도 시간 마법과 봉인식을 연이어 사용하며 약해진 프리드가 이를 그대로 받았다간 죽을지도 몰라 아프리엔이 대신 받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들은 프리드는 왜 그런 짓을 했냐며 소리쳤지만, 정말로 원망한다기 보단 그를 잃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이후의 일은 그들이 페어리 퀸에게 들은 것과 같았다. 아프리엔이 수 백년 간 잠들어도 무사할만큼 안전한 곳을 찾아 리엔 섬에 갔다 살아남은 오닉스 드래곤 마스터 아리에스를 만나 제자로 삼고, 아란이 그곳에 있다는 걸 듣게 되며 이를 확인한 뒤 아프리엔을 설귀도라는 섬에 옮기는 일련의 과정까지.
그러나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른 일이었다.
「너마저 잠들고 나면 정말 나 혼자 남겠구나.」
「슬퍼하지 마라. 우리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닐지니.」
영혼으로 이어진 인연은 질기고 질겨, 수 백년의 시간이 지나도 쉬이 끊어지지 않을 테니까. 분명 기쁜 말이었지만 프리드는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걱정이야.」
나는 이제 너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막히는데, 너는 먼 미래에 나 없는 세상에 눈을 떠야하잖아. 그 상황이 걱정되서 견딜 수가 없어. 차라리 같이 저주를 받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말을 이을수록 목이 메이는 그의 모습에 아프리엔은 날개를 펼쳐 그를 감싸고 싶었지만, 제 몸은 이미 예전에 얼어 움직이지 않았다.
「프리드.」
「참, 마지막인데 우는 모습을 보여버렸네. 미안해.」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하는 것보단 낫다.」
「어차피 그래도 다 알잖아.」
오닉스 드래곤은 계약자의 상태를 알 수 있으니까. 프리드는 제 손에 새겨진 계약의 인장과 똑같은 아프리엔의 문양을 메만지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이제 시간이 정말 안 남았다.
「아프리엔. 나는 계속 살 거야.」
죽지 않더라도, 마지막으로 기억될 모습은 어느 때보다 밝게.
「제자가 생겼어. 검호 씨가 구한 오닉스 드래곤 마스터인데, 재능도 있고 착한 아이야. 그 애가 너와 아란이 이곳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줬거든.」
생의 동반자도, 동료들이 모두 저주로 얼음속에 잠들었어도.
「다른 애들도 찾아볼거야. 아란이 그랬듯이 지금쯤이면 걔들도 얼음속에서 쿨쿨 자고 있을텐데, 어디 위험한 곳에 떨어져서 무슨 꼴을 볼지 모르니까 하나하나 찾아서 안전한 곳에 옮겨줘야 하잖아. 나 아니면 누가 해주겠어?」
끝까지 손이 참 많이 간다니까.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목소리엔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리프레 공습으로 피난간 사람들이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대부분 이주했는데, 몬스터랑 환경때문에 정착하는게 힘들다더라. 당연히 도와주러 갈 생각이야.」
「프리드…….」
「너희가 없다고 외로워서 자살같은 건 안 해.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 걸?」
그러기엔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아깝고. 세계 최고의 대마법사가 이렇게 죽으면 모두 욕할 거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걱정말라는 말은……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분명히 알아줘 아프리엔.」
나는 부채감이나 의무감같은 것때문이 아니라, 오롯이 내 의지로 살기로 했어. 물기가 잔뜩 어려 있었지만 단단히 굳어있는 푸른 눈을 본 아프리엔은 겨우 안심했다.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알아줘서 고마워.」
「나중에 깨어났을 때 네가 어떻게 살다갔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밌겠어.」
「하하, 그 말을 들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네.」
수 백의 시간이 흘러,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혼으로 이어진 우리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을 거야.
시간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에게 새겨진 계약의 문장은 끝내 빛을 잃었고, 프리드는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눈이…… 그치질 않네.」
춥다. 뒤늦게 올라오는 냉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펑펑 내리는 눈이 어깨나 머리에 쌓여 털어냈지만 눈발이 그치지 않아 털어내도 의미가 없었다. 눈구름이 가득 낀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자 얼굴에 그대로 떨어진 눈송이가 체온에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눈은 물줄기가 되어 뺨과 눈가를 타고 툭툭 떨어졌다.
설귀도는 리엔보다 더 춥구나. 기분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정말 리엔에 있었을 때보다 더 심한 추위를 느꼈다.
"…… 샌님은 빠진 게 나았네."
"그러게."
"나중에 정말 행복해졌다고 했는데…… 몇 년 뒤지?"
"보다보면 알겠죠."
아프리엔과 대화하던 시점부터 입도 열지않고 조용히 보기만 하던 영웅들은 배를 타고 설귀도를 빠져나가는 프리드의 모습에 겨우 숨을 토해내며 탄식같은 말을 내뱉었다.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도, 같이 있고 싶었어.
이어서 배경은 설귀도에서 빅토리아 아일랜드로 바뀌었다.
「맙소사 프리드 님?!」
「무사하구나 헬레나.」
빅토리아 아일랜드 피난민들을 이끌며 조사대를 만들어 숲을 개척중이던 헬레나는 프리드가 왔다는 소식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않고 뛰어나왔다.
「다른 분들은……?」
「…… 미안.」
「아, 아아.」
「일단 죽은 건 아니야. 검은 마법사가 마지막에 건 저주때문에 나를 빼고 다들 봉인돼버렸거든.」
「그런, 그럴수가.」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잠시,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죽지만 않았을 뿐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태가 되버렸다는 사실에 헬레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렇다면 메르세데스 님과 다른 분들은 대체 어디에.
「나도 아직 몰라. 일단 아란은 찾아서 안전을 확인했고, 다른 애들도 여기 피난민들의 정착이 어느정도 되는대로 찾으러 갈 거야.」
「그렇다면 이쪽에 계시지말고 당장─!」
「헬레나. 지금 내 몸은 하나야.」
아무리 세기의 대마법사라 한들 현재 그는 혼자였다.
「해야할 일도, 하고싶은 일도 많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잖아.」
그 역시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데에 며칠을 심사숙고했다.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동료들이 미친듯이 걱정되었지만,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피난간 사람들 역시 걱정되었기에.
결국 그는 같은 시간 대비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쪽을 택했다.
"…… 섭섭하지 않으세요?"
"글쎄."
우선 순위에서 밀린 영웅들은 복잡한 눈으로 피난민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프리드를 보았다. 섭섭하냐고? 당연히 그런 감정이 없으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한다.
"원망하진 않아."
"우리라고 저거에서 크게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진 않거든."
"오히려 저렇게 되도록 옆에 못 있어준 게 더 아쉽지."
만약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저주에 걸리지 않고 멀쩡했다면 프리드가 저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 명을 피난민을, 한 명은 다른 동료들을 찾으면 그만이었을테니. 그 한 명조차 없어서 혼자 다 처리해야하는 그의 뒷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마을을 만들기 좋은 지대의 몬스터들이 대부분 정리되었을 무렵, 프리드는 슬슬 제가 할 일이 이제 거의 끝났음을 느끼고 오시리아 대륙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때 사건이 터졌다.
「동쪽 숲에 독안개가 끼었다고……?」
「예. 듣기론 독안개가 나오고 있는 곳이 페어리족의 영역이라는데, 자세히 조사를 하려니 독이 너무 강해서 웬만한 전사도 접근하기 힘들답니다.」
피난민들 중 가장 준수한 실력의 마법사라 프리드의 보조 역할을 해주던 페르젠은 해독포션을 제조하는 손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앞서 쳐둔 결계 덕에 당분간 캠프는 무사할 것 같지만, 더 독이 퍼지면 어찌될 지 모르는데다 숲 전체가 오염될 수 있어서…….」
「그럼 독안개에서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전사들 몇 명만 좀 뽑아줘. 가서 알아보고 올게.」
「알겠습니다.」
칸데룬을 포함한 뛰어난 전사들과 다량의 해독 포션, 방독 마법이 걸린 천으로 입과 코를 가리는 등 철저한 준비를 갖춘 그들은 독안개가 퍼져나오는 동쪽 숲 깊숙한 곳 - 페어리족의 영역으로 향했다.
요정족 중에서 가장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가장 독한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페어리 족은 독안개 숲에서 수시때때로 그들을 급습했다.
「이건 뭐, 보통 요정족이 인간 싫어하는 정도를 한참 넘어섰는데요!」
「혐오가 아니라 명백히 적대시하고 있지. 이걸로 저들이 우리의 적인게 확실해졌네.」
프리드는 독안개를 막아내기 위해 재차 불의 보호막을 펼치며 마나 포션을 마셨다. 마법을 얼마나 유지했다고 벌써 마력이 딸리다니, 아프리엔과 계약하며 공유했던 방대한 마력이 그립다. 아니, 그냥 아프리엔이 그립다.
달려드는 페어리들을 처치하며 독안개의 숲 중심, 페어리 족의 영역 최심부에 다다르자 한 여인이 그들을 반겼다.
「하찮은 것들이…… 지금이라도 나간다면 뒤쫓진 않으마. 어차피 네놈들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않을테니, 꺼져라!」
아니, 반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쳐죽이고 싶은 듯 살기등등했지만, 독무를 퍼뜨리는게 더 중요한듯 칼날 벌레들로 위협하며 경고했다.
[아까 전에 봤을 때랑 완전 다르네.]
"저거 완전……."
"그 자의 어둠에 물들었군요."
새순처럼 생기넘치던 연둣빛 날개는 불에 탄 것처럼 군데군데 바스라졌고, 우아하게 틀어올려진 머리카락은 독을 머금은 꽃처럼 붉게 물들었다. 입고있는 드레스마저 낙엽처럼 변색되어 마르고 갈라진 와중에 유일하게 전과 같은 건 독기어린 보랏빛 지팡이뿐이었다.
이어진 싸움의 결과는 너무나 뻔했으나, 그 과정은 처참했다.
「당신의 사정은 대충 알겠어. 인간에게서 동족을 지키기 위해 그와 손을 잡았다, 그런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잡아선 안되는 이야.」
「네가 그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 내가 그를 모를 것 같아?」
시간의 신전에서 검은 마법사와 결전을 벌인지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에 건 저주로 인해 제 목숨만큼 소중한 이들을 다 잃었는데 뭘 아냐고 묻다니. 그나마 에피네아에게 일말의 연민을 가지고 있던 프리드는 눈썹을 매섭게 치켜올렸다.
지팡이에 집중된 마력은 그의 감정을 반영한 매서운 회오리 바람이 되어 독안개와 함께 여왕의 은신처에 빽빽히 드리워진 나뭇가지들을 모조리 부숴 날려버리고, 하늘이 보이는 구멍을 뚫었다.
「여긴 비가 참 많이 내리지.」
「그게 어쨌다고……!」
치켜든 지팡이의 인도에 따라, 비를 뿌리는 구름 안에 숨어있던 황금의 가지들이 한 줄기의 창이 되어 뻥 뚫린 구멍으로 내려꽂혔다.
한때 하얀 마법사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믿으며 사랑했던 요정 여왕의 말로였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과한 마법은 안 썼을텐데.」
「여, 영웅님……?」
「괜찮습니다. 독안개의 원흉을 처치했으니 이제 캠프로 돌아가죠.」
그리고, 아직은 그가 요정 여왕의 말대로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 작품 후기 ==========
더 쓰고 난 뒤에 올리려고 했는데 독자님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 일단 끊어서 올립니다. 다음 편이요? 아마 주말쯤에...?
이번에 늦은 이유가 제가 쓰는 다른 글을 보시는 분은 알겠지만 요 몇 달간 자격증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얼마 전에 3개가 다 끝났고 이제 다음 걸 준비해야해서... 누가 저 취업 안 시켜주나... 어제 생일이 지나 나이만 더 먹어버렸네에에에.
@l감 - 등을 겨우 덮을 정도. 대충 겨드랑이까지?
@시크병장 - if외전에만 나와요 그건.
@프로즌브레이커 - 작품 외적으로 설명하자면 그거 썼을 당시에 제가 8백년 전엔 총이 없다고 생각해서 넣은 문구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린이 총을 들고다녔죠. 넵, 설정오류입니다. 이 오류를 메꾸자면, 당시 총기 기술은 사람을 죽일 순 있지만 몬스터 살상엔 거시기 해서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 휘하 군단들과 싸우던 영웅들은 총기를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나마 본 프라이쉬츠의 쌍권총은 위력이 그들이 알던 총의 위력과 너무 달라 그냥 다른 무기로 여겨진 거.
@갓타치 - 프리드가 보는 걸 구경하겠네요. 물론 필터링이 엄청 되서 내용은 제대로 못 보지만 프리드의 대환장쇼로 간접적이나마 알 수 있을듯.
@KRamiya - 넵. 무진장 재밌을 겁니다.(참고:검호 초반부)
@드라몬 - 결계를 만든 이(하얀 마법사)가 검마라는 사실을 들은 이후 무슨 사건이 터졌는지 생각해보세요. 넵, 검호가 검마랑 싸우다 죽었습니다. 그거땜에 프리드는 뇌 퓨즈가 나가서 앞서 들었던 사실이 머리에서 꽤 오래 나가리됐음. 나중엔 떠올렸지만 동료들에게 알려주는 걸 까먹음(비슷한 사례:검호가 리엔에 오닉스 드래곤 알 3개 있는거 안 알려줌)
@역십 - 정말 상상도 못한 정체였음.
@앵무새얌 - 저도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서 모르겠네여.
@칼크래프트 - 일단 검호 책은 초반부에 한해 다른 의미로 멘탈이 무너질듯.
@wjasjvh - 그건 제대로 나올 겁니다. 그 외에 검호가 팔 다친 이후 2년동안 어떻게 재활했는지 등등도.
@맹효공 - 대신 이번에는 2편을 빨리 올렸으니 그걸로 봐주세요.
@Araneas - 의외로 팬텀이 활약! 많이 진정됐지만 생각할 것들이 꽤 있겠죠.
@mmo0522 - 이번엔 연참은 아니지만 빨리 올렸어요!
@Legendssj2 - 다다음 편은 확실하게 유열.
@J스티카 - 프리드 책을 보면 유에 책이 덤으로!
@디자울 -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누가 저 취업좀!
@Faceless - 프리드 책입니다. 하마 이야기에서 루미 멘탈이 까였다면 검호 이야기에선 데몬 멘탈이 까입니다.
@육합 - 놀랍게도 과장없는 사실.
@crede001 - 사실 둘의 마지막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둘이 어떻게 끝날지는 스포지만, 일단 저는 만족입니다.
@ReFrante - 인게임 차원의 도서관에서 보는 책이 아니니까 낫띵!
@KRamiya - 프리드 책은 영웅들의 눈물샘을 폭발시키죠.
@숲속과클로네 - 예전에 순서 말한적이 있었는데, 하얀 마법사 - 프리드 - 검호 - 이데이 순입니다.
@레볼레이션 - 프리드 책이에요.
@찬양천사 - 아뇨. 그 때의 내가 그 상황에서 이러저러한 건 당연했다로 납득할 겁니다.
@리화앨리스 - 감사합니다!
@sadgfdfh - 루미너스는 본인 출생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원래 인게임 스토리에선 오로라의 유물을 찾으며 알게되지만, 본편에선 현실보정으로 유물들이 다수 소실, 분실되어 알 수 없게 됨.
@wjasjvh - 검호 책은 부분부분 필터링이 있습니다.
@소라노아카시 - 유에 책은 프리드 책을 통해, 검호 책은 이 다음입니다.
@인리연찬 - 괜히 루미너스 모티브가 스타워즈가 아니죠.
@okok5413 - 힘들어요...
@늘근이 - 넵, 그렇습니다.
@쌀벼르 - 위쪽의 리코멘을 참조해주세요.
@stella - 본편에서 묘사됐듯 대부분 충격과 공포. 몇몇은 빠르게 진정했습니다.
@생명체는꿈을꾼다 - 저도 코멘트 감사합니다~
@psyga315 -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엄청 좌절한 거고요.
@리아카에린 - 책을 보는 이들이니 독자들이죠!
@코로미 - 프리드 책을 보고 와장창! 검호 책을 보며 또 와장창! 그나마 마지막 이데아 책이 제일 덜하겠네요.
@MiaLF - 이 글을 올릴쯤엔 6월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