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203화 (203/208)

<--  -->  동료들을 찾으러 오시리아 대륙으로 가는 일은 에피네아가 숲에 마구 뿌렸던 독안개의 정화때문에 잠시 미뤄져야 했다. 물론 캠프 쪽에서도 그에게 정화를 모두 부탁하진 않았지만, 가장 심한 곳들은 어쩔 수 없이 그가 해야했다.

가령 페어리 퀸의 은신처라던가.

「역시 여긴 다 태워야겠네.」

독안개의 근원지였던 터라 독기가 너무 심해 정화하는 것보다 다 태워버리는게 더 쉽고 빠르다는 결론을 내린 프리드는 지팡이를 들었다. 당연히 무작정 불을 지르지 않고 결계를 펼쳐 범위를 제한할 거지만, 그 전에 여왕의 은신처에 뭔가 쓸모있는게 있지 않을까 찾아봤다.

「이건……?」

그리고 그는 식물들로 숨겨진 요람 혹은 둥지같은 것에 만들어진 꽤나 큰 고치를 발견했다. 손을 갖다대자 안에 생명이 맥동하는 게 타고 올라왔다. 뭐가 있는 거지? 일단 그 여왕의 은신처에 있는 것인만큼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것일 가능성은 낮다.

「그것에서 손을 떼주게.」

「……!」

기척을 못 느꼈어!? 거기다 이 기괴한 목소리는 더없이 익숙하다.

「구와르!」

「오랜만이군 용의 마법사여.」

「어째서 네놈이─!」

지팡이의 궤적에 따라 불에 휘감긴 바퀴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풀려난 전마(戰馬)처럼 불의 바퀴들은 땅과 초목을 불사르며 멈추지않고 집요하게 노렸지만, 그가 일으킨 바위와 흙의 견고한 벽에 계속 막혔다.

「공격을 멈추게나. 나는 그대와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말이 되는 소릴!」

「내가 그대와 저쪽의 이들을 노렸다면 옛저녁에 에피네아와 손을 잡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군단장이 아닐세.」

「뭐……?」

그 말에 공세가 멈칫한 사이 구와르는 바위 벽들을 내렸다. 자세히 보니 이끼가 낀 바위같은 몸은 여전했지만 마지막에 보았던, 사람에 의해 파괴되어 일그러진 자연의 화신같았던 그 때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러고보니…… 결전의 날 매그너스에게 당했다고 했지.」

「동료에게 들은 모양이군. 그 말대로 나는 매그너스 그 자의 기습에 당해 정수를 빼앗기고 한 번 죽었네.」

하지만 나는 대정령. 육신없는 자연의 화신이기에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지. 시간이 지나 세상의 힘으로 다시 재구성되었다네.

「그 과정에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욕망들도 사라졌고, 검은 마법사와의 관계도 끊었지.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같은 존재면서 다른 존재일세.」

「…… 믿기 힘들지만 믿어야겠군.」

「역시 대마법사답게 수긍이 빠르도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 있는 거지?」

「재구성된 내가 눈뜬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이지. 이 숲은 자연의 힘이 굉장히 풍부하니까.」

물론 그 이유뿐만은 아닌 것 같지만. 구와르는 빅토리아 아일랜드 중심에 서있는 거대한 나무에 한 번 눈길을 보냈다가 다시 프리드를 보았다. 그는 수긍한 것과 별개로 군단장이었던 구와르가 하루아침에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말에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대가 이곳에 온 건 에피네아가 퍼뜨린 독안개의 정화때문으로 보이는데, 내가 대신 할테니 그대는 돌아가게.」

「네가 그걸…… 하아, 해준다면 고맙긴 한데.」

「그대의 신뢰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 내가 하려했던 일일세. 그들이 도움이 요청했거든.」

「그들?」

「어둠에 물들지 않은 페어리족들 말일세.」

페어리들은 검은 마법사때문에 모두 몬스터로 전락하지 않았나? 오면서 처치했던 페어리들을 쭉 떠올린 프리드는 설마 저가 멀쩡한 페어리들을 죽인 건가 얼굴이 굳었다.

「방금 그대가 없애려했던 고치에는 새로운 페어리 퀸이 잠들어 있지. 어둠에 물들지 않고 동족들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독기에서 버틴 강한 이가.」

「…… 바로 안 부수길 잘했네.」

"저거 아마란스 님이지?"

[당연히 그렇겠지.]

두 분 친구였다고 하지 않았나. 어찌보면 첫인상부터 최악이 될 뻔한 걸 구와르가 막아준 셈이다.

이후 프리드는 구와르와 조금 더 이야기 한 뒤 새로운 페어리 퀸이나 그가 여기 숨어있다는 사실을 묻기로 했다. 그조차 구와르가 더 이상 군단장이 아니라는 걸 납득했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피난민들이 알았다간 한바탕 뒤집어질 것이며, 새로운 페어리 퀸은 페어리족의 대부분이 몬스터로 전락했다고 판단내린 현 시점상 알려져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잘 가게. 부디 그대의 동료들을 무사히 찾길 빌겠네.」

「그쪽도…… 숲의 정화 잘 해줘.」

「물론이지. 자연이 그대를 가호할 걸세.」

대정령은 프리드의 앞길에 가호를 내릴지언정 사과하진 않았다. 별개가 되었다고는 하나 분명 자신이었던 이전의 그가 군단장으로서 저지른 일들은 용서받아선 안될 짓이었고, 그랬던 그와 최전선에서 싸웠던 프리드에게 사과한다는 건 그 자체로 심한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너무 오래 붙잡아서 죄송해요 프리드 님.」

「괜찮아.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이제 3명 남았으니까.」

몬스터들을 정리한 뒤 에우렐의 상태를 보러갔던 프리드는 그곳에 잠들어있던 메르세데스를 발견했다. 그녀가 엘프의 왕인 탓에 저주는 그녀뿐만이 아니라 엘프 전체에 영향을 끼쳤는데, 캠프에서 만난 헬레나만은 저주에서 비껴져 이를 알아채는게 늦었다. 별 수 없이 그는 에우렐에 쳐진 결계 위에 또 하나의 결계를 덧씌워 엘프들의 안전을 강화시켜주는 걸로 끝내야했다.

「정말 이 밤에 가시는 건가요 영웅님?」

「예. 조용히 가려하니 다른 사람들을 부르진 말아주세요.」

「저희의 은인이신데 도둑처럼 빠져나가시다니…… 다들 알면 슬퍼하겠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가는 게 알려지만 다들 배웅하러 올 텐데, 모두에게 인사받느라 또 시간이 지체되면 곤란해서.」

그가 야밤을 틈타 몰라 떠나는 이유였다. 헬레나를 도우며 그런 프리드의 사정을 일찍히 전해들은 여인은 옅게 웃으며 곱게 접힌 뭔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세요.」

「이건?」

「이곳에 피난 오기 전에 어머니와 함께 만들었던 담요에요.」

「그런 귀한 걸……!」

「영웅님께서 저희에게 해주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보기보다 튼튼해서 깔개대신 써도 된답니다.」

「아니 그건 너무,」

자, 받으세요! 어떻게든 거절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뼛속까지 마법사인터라 근력에서 의료반인 여인보다 못했다. 아예 팔을 뒤로 빼며 받지 않으려는 프리드에게 담요를 둘둘 감아 묶어버린 여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요? 따뜻하죠?」

「그렇긴, 한데.」

「영웅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는 것 같아서 꼭 드리고 싶었거든요.」

담요 매듭을 풀려던 프리드는 그 말에 손을 멈췄다.

「마법사는 대체로 몸이 허약하다지만 영웅님은 유독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랬…… 습니까.」

「보온 마법이 있다지만 마법에만 의지하면 몸이 더 허약해지니까 조심하세요.」

누군가에게 상냥한 걱정을 받은 게 얼마만인가. 영웅이라 불리기 시작하며 그에게 의지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를 걱정하는 이는 동료들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었다.

「……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뭘요. 참, 동료분들 찾다가 잠시 쉬고 싶으면 여기 다시 오셔도 되요.」

모두 반겨줄 거에요. 저희가 이곳에 만들 마을은 항상 영웅님을 환영할테니, 언제든 오세요.

프리드는 환하게 웃는 여인의 얼굴이 마치 태양같다고 생각했다. 밤인데 어째선지 그녀의 얼굴만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온기를 머금은 것 같은 병아리색 긴 머리도, 짙은 녹음이 우거진듯한 눈도 처음 보는게 아닌데 이상하리만큼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례지만, 이름이……?」

「슈리에요. 기억하고 계시지 않았나요?」

「아뇨, 알고는 있었는데.」

슈리. 그녀의 얼굴과 그 이상으로 고운 마음씨만큼이나 예쁜 이름이었다. 분명 몇 주 전에 소개받았던 이름임에도 왜 지금와서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세기의 대마법사는 알지 못했다.

[저거 꽂힌 거지 마스터?]

"으, 응. 아마도."

"분명 사진 속에 있던 아내가 저 여자였지."

"참…… 좋은 여자네."

어째서인지 허탈한 얼굴이 된 메르세데스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여인 - 슈리가 나올 때부터 언제부터 프리드가 그녀와 썸을 타나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특히 프리드의 생가에 찾아가봤던 영웅들은 그의 가족 사진들로 저 여인이 후일 프리드의 아내가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야~ 귀가 아주 홍당무마냥 익었네. 밤이 아니라 낮이었으면 다 들켰겠어."

"영웅께서도 사랑에는 어쩔 수 없나봅니다."

"어찌됐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것이죠."

테스와 나인하트, 데몬은 자세히는 몰랐으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두 남녀가 앞으로 어찌될지 알았다. 생각해보니 저 시점의 프리드는 그들보다 어린, 한참 풋풋한 나이였다!

슈리의 배웅을 받으며 오시리아 대륙으로 간 프리드는 동료들을 찾으면서 틈틈히 사람들을 도왔다. 검은 마법사가 봉인되고 군단장들은 잠적했지만 그들이 부렸던 몬스터들은 여전했고, 리프레 공습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지만 미처 못 가거나 가지않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왕국에서 그를 향해 러브콜을 날렸지만 프리드는 이를 모두 거절하며 묵묵히 몬스터들을 정리했다. 어쩌면 동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며칠을 오지에서 헤맨 건 물론 심지어 군단장의 본거지에 숨어들어 가기까지 했다.

"아니 저긴 또 왜 가는 거야?"

"혹시나 봉인된 우리가 군단장에게 발견되어 놈들의 본거지로 옮겨졌을지도 모르니까 저러는 것 같은데……."

"무모하군요."

반 레온의 성에 들어가 탑루들을 돌아보는 프리드의 모습에 영웅들은 혹여나 반 레온과 마주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당연히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아프리엔도 없는데 어쩌려고 저런 짓을! 만약 본인들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같은 일을 했을거란 걸 생각도 안 했다.

거기다 그렇게 많은 지역들을 돌아봤지만 아란과 메르세데스 이후 간신히 팬텀을 발견해 오르비스에 옮겨둔 걸 끝으로 마지막 2명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쉬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된다는 말에 어쩌다 몇 번 찾아갔던 피난민들의 마을, 헤네시스에는 어느새 그의 전용 휴식처가 마련되었고, 슈리는 항상 지쳐서 돌아오는 그를 반겨주었다.

진전없는 상황에 지쳐가는 몸과 정신을 달래주는 이도 그녀뿐이었다.

「…… 지겹지 않습니까? 매번 나 간호하는 거.」

「전혀요.」

「영웅을 돕는 일이라서요?」

「그 이유도 있지만, 제 개인적인 이유가 더 크답니다.」

「개인적인……?」

엘나스와 니할 사막을 돌아다니다 기어코 몸살에 걸려 드러누운 프리드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준 슈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고운 얼굴과 달리 그녀의 손은 의료인답게 거칠었다.

「프리드. 저는 당신에게 구함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아…….」

「기억 안 나죠?」

그들이 구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무리 마법사라도 그걸 일일이 기억하는 건 무리다.

「저희 가족을 구해줬을 때 당신은 정말로 영웅같았어요. 다른 분들도 있었지만 당신이 제일 빛나보였거든요. 저분이라면 분명 이 긴 전쟁을 끝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정말로 성공하셨는데…… 다시 만난 당신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거에요.」

기쁨도 아픔도 함께 나누던 동료들은 모두 사라지고, 홀로 위태롭게 서있는 그를 본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바로 직감했다고 한다.

「그때 당신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어떻게든 붙잡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날 것 같았거든요.」

「그 정도였나요……?」

「저는 그런 이들을 몇 번 보았었답니다.」

스스로 정한 목표에 끌려가는 사람들. 어떤 큰 목표라도 긴 삶에 있어서 어느 한 지점에 불과한데, 그것을 전부라 여기고 몸을 내던져버리는 이들이 있다. 이 경우엔 그렇게 해야할만큼 몰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쉬러오라고 말했던 거고요.」

「하하.」

「오지랖이나 방해같은 걸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랬어요.」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너무 따뜻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열이 나고 있었지만 왜인지 눈가가 더 뜨끈뜨끈해져 이마에 얹혀진 물수건을 조금 내려 눈을 가렸다.

「저를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뭘 그런 걸로.」

며칠 뒤,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리드는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다. 사흘, 일주일, 한 달. 그러나 동료들을 찾는 걸 그만두진 못했다.

허나 이 역시 시간이 지나 점점 생각이 바뀌어갈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엔 리프레에 갔다가 어둠에 물들어 흉폭해진 드래곤들에게 당해 크게 다쳐온 그를 보고 눈물을 쏟으며 어쩌다 이렇게 됐냐며 달려오는 슈리의 모습을 본 이후론 위험에 뛰어드는 걸 주저하게 되었고, 남은 두 사람을 찾는데엔 여전히 진전이 없어 피로만 누적되었다.

이에 결정타를 꽂은 건 크리티아스 옛 터까지 갔다왔을 때 그녀가 정원에 쓰러져있는 걸 목격한 것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모르셨나요? 프리드 님이 오시리아 대륙으로 가시면 언제 어떤 상태로 올 지 몰라서 항상 기다려요. 안 그래도 의사라 일도 많으면서 심심치않게 밤을 새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요.」

무사히 올 때도 있지만 이전처럼 심하게 다쳐서 올 때도 적지 않아 의사이자 연인인 그녀로선 걱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리드……?」

「정신이 들어?!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저는 괜찮아요. 좀 현기증이 심해서, 그보다 당신은─」

제 몸을 살펴야지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에 프리드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이번엔 안 다쳤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의 일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

고심 끝에 그는 슈리에게 청혼을 했다.

***

아란과 테스, 에반은 아리에스의 책을 통해 프리드의 결혼식을 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기에 성대하게 치뤄지는 결혼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앞서 보았던 세 사람도 아리에스의 시점에서 본 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는데, 프리드나 슈리나 화려한 걸 좋아하진 않아 소소하게 치루려던 걸 헬레나와 마을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잔뜩 들떠서 크게 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보니 저 엘프는 당신들에 대해 다 알면서 왜 역사가 조작된 걸 바로잡지 않았답니까?"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닌데 군단장들이 뒤쪽에서 계속 손을 써서 의미가 없어졌다던데."

"아무리 알고있다 해도 혼자 힘만으론 한계가 있으니까."

신랑과 신부의 머리 위로 그들의 미래에 대한 축복이 꽃비처럼 내렸다.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사랑의 맹세와 이어지는 입맞춤에 그들의 이웃, 제자, 친구 등이 너나할 것 없이 박수치며 환호했고, 누군가는 울기까지 했다.

신혼부부의 집은 헤네시스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지어졌다. 개척하지 않은 숲, 미래에 엘리니아라 불릴 곳에 들를 일이 많아 그쪽 방향으로 집을 지은 것이다.

결혼 이후 프리드는 오시리아 대륙에 가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아주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자식까지 생겨 집에 아내와 어린애만 두고 가는 건 주저되었기 때문이다.

[체력때문에 빌빌거리는 사람이 의외로 그쪽 힘은 좋네.]

"…… 미르. 뭐가 놀라운 건지 알겠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지 마."

첫째에 이어 둘째까지 태어난 와중에 어린 애들을 두고 집을 오래 비우는 건 확실히 좋지 않았고, 슈리도 이에 대해 그에게 말했을 정도다. 무엇보다 이 정도로 찾아다녔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단순히 외진 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때문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게 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 중이길래 심각한 표정이에요?」

「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두 사람이 어디쯤에 있을까 가설들을 세우고 있었어.」

「루미너스와 검호 님 말인가요.」

「응. 처음엔 리프레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검은 마법사가 봉인되던 순간 두 사람은 그놈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거든.」

그래서 어쩌면 검은 마법사와 함께 봉인된게 아닐까, 하고 추측중이야. 만약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발견못한 게 말이 되고. 프리드의 추측에 당사자에게 조금 들어보았던 메르세데스가 말했다.

"루미너스는 눈을 떴을 때 이미 현재였다고 했는데."

"어디서 깨어났었답니까?"

"엘리니아 부근."

"그럼 저 가설이 맞는 모양이네."

만약 루미너스가 엘리니아 부근에 봉인되어 있었다면 프리드가 에우렐 주변을 돌아볼 때나 아마란스, 구와르를 만나러 갈 때 발견 못했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 정말 아직도 내가 발견 못한 거면…… 후우, 두 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서 단정짓지 못하고 있어.」

「프리드. 당신이 그들을 찾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어요. 발견못했다 하더라도 당신은 충분히 노력했다고요. 그 두 사람도, 당신을 원망하진 않을 거에요.」

「그럴까……?」

「당신의 동료들이잖아요.」

결국 프리드는 루미너스와 검호를 찾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노력은 거의 다 했고, 제 가설에 대한 증거가 어느정도 나와 이제 손을 놓아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손엔 이제 다른 이의 손이 얽혔다.

「슈리?」

「프리드. 지금 애들은 자고 있어요.」

다른 손으로 묶어올려져 있던 긴 금발을 풀어내린 그녀는 그의 몸 위에 슬금슬금 올라갔다.

「날이 밝을 때까진 아직 한참 남았고, 그동안 저는 완전히 당신의 것이에요.」

「어, 어어……?」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우리 대마법사님이 모르진 않겠죠?」

상념에 잠겨있던 그의 얼굴이 터질듯이 빨개졌다. 아, 알지. 알고말고. 아는데 혹시 그, 애들이 안 깰까? 걱정마세요. 밤에는 한 번 자면 푹 자는 착한 애들이거든요. 프리드는 붉어진 얼굴로 사랑스럽게 웃어보이는 아내를 꽉 껴안았고, 그녀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독자들도 비명을 질렀다.

"야 페이지 넘겨! 빨리 넘기라고!"

"이런 사적인 부분까지 보고싶진 않아!"

"악! 잠깐 저 눈 맞았,"

""어린애는 보지마!!""

[그러고보니 애가 무려 다섯이라 했었지? 이번 일로 하나 만들어지는 걸까.]

"너도 마찬가지야!"

예상치못한 애정행각에 영웅들이 황급히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야단법석을 떠는동안 테스와 데몬은 사랑이 넘치는 부부에게서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무념무상의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행복해보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급하게 페이지를 넘긴 탓에 배경의 시간대는 몇 년 뒤가 되었다. 아기였던 둘째가 마당을 뛰어다녔고, 그 새 쌍둥이가 더 생겨 자식은 넷이 되어있었다.

[진짜 아까 그걸로 생긴 자식인 모양인데?]

"좀 조용히 해줄래 꼬맹이 드래곤아."

아란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부채질로 가라앉히다 아예 냉기를 피워올렸다. 하마터면 프리드에게 석고대죄할 짓을 저지를 뻔 했다.

두 사람을 찾는 걸 포기한 뒤 프리드는 가정에 더 충실해졌다. 함께해왔던 동료들은 분명 소중한 이들이었지만, 그는 한참 젊었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긴 이였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묶여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만약에 대한 준비를 아예 안하는 건 아니었다.

「뭐하고 있는지 몰라도 좀 먹고 해요.」

「아, 고마워.」

「이번엔 무슨 마법을 만드는 거에요?」

「만드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거야.」

그는 제 연구실 바닥에 크고 복잡한 마법진을 양탄자처럼 펼쳐놓고 한참 점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마법인데요?」

「검은 마법사를 봉인했던 봉인식.」

「……!」

프리드는 검은 마법사의 봉인이 언제까지고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봉인,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약해지며 결국 풀려버릴 게 확실하나 그게 언제가 될 진 모르기에 한참 알아보는 중이었다.

「호, 혹시 뭔가 잘못 됐나요?」

「아니. 만약 잘못됐으면 이걸 쓰기 전에 확인했을 거야. 문제있는 마법을 봉인에 쓸 리 없으니까.」

그래. 애초에 봉인식에 문제가 있었으면 그대로 쓸 리가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최후의 수단에 떡하니 결함이 있으면 안되니까.

그럴진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봉인식의 작동 원리는 그 자신이 만든 것인만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검은 마법사가 륀느 여신에게서 빼앗아간 시간의 힘을 역이용한 술식, 유지되는 동안만은 초월자라 하더라도 현세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매우 강력한 봉인이었다.

문제는 이 봉인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시간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데, 단순한 시간 마법이 아니라 한 존재의 시간을 통째로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스스로 주석까지 달아 '한 사람이 제물이 되어 존재의 시간을 모두 바쳐야 함'이라고 굵게 써놓았으니 대체할 것도 못 찾았던 게 확실한데.

「아무도 희생하지 않았잖아.」

다들 저주에 걸려 봉인되긴 했지만, 그의 기억 상 제물이 되어 희생된 이는 없었다. 있었다면 기억 못할 리가…….

「…… 잠깐, 시간을 바쳤다고?」

그는 황급히 봉인식을 다시 흝어보며 시간 마법 지식들을 총동원했다. 제물, 존재의 시간, 시간을 모두 바친 이는 어찌 되는가, 그 날 싸운 사람은─ 몇 명이었지?

「아니 설마, 그럴리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길한 예감에 프리드는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며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하나는 기억대로 제물이 된 이 없이 어떤 편법을 써서 봉인식을 작동시켰거나, 혹은…… 정말로 제물이 있었는데 존재의 시간을 전부 잃은 결과 기억에서 사라졌거나.

"이제 차원의 도서관에 대해 찾겠네요."

"그렇겠지."

[근데말이야, 저 사람이 차원의 도서관에서 뭔가를 본 것에 대한 것도 그대로 나올까?]

"아마도?"

[차원의 도서관에서 책 보는 모습이 다른 책에서 그대로 나오면…… 그럼 누군가 우리 책을 보면 우리가 책으로 본 저 사람이 책으로 보는 것도 나오겠네!]

"어, 어어……."

같은 말을 계속 들으니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그들의 얼굴이 기묘해진 사이 프리드는 잊혀진 동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오랜만에 집에서 나와 오시리아 대륙으로 향해 자신의 추측에 증거가 될만한, 부자연스럽게 어떤 존재가 지워진 흔적들을 찾았다.

영웅은 몇 명이었는가 같은 간단한 사실부터 구체적으로 그들 한 명 한 명이 무엇을 했는가 같은 세세한 것들까지. 목격자들과 구해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모두 취합한다음 물리적인 증거와 대조한 프리드는 최종적으로 '제물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말…… 있었구나.」

그 날 다른 곳에 가 있던 검호를 제외하고 다 함께 찍었던 사진. 모두들 웃고 있건만 어째선지 가운데 부분만 부자연스럽게 비어있었다. 딱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자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진을 누가 타임 캡슐에 넣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것들은 누가 넣었는지 선명히 기억나는데 이 사진만 이랬다.

"별로 상관없는 질문인데, 왜 타임 캡슐을 저런 곳에 묻은 겁니까."

"추워서 보존이 잘 되는데다 뭣보다 누구한테 침략을 받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예전부터 가난한 왕국이라고 알려져서 저기까지 가서 도굴하려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 같았거든."

"허, 참."

프리드가 뭘 보고 잊혀진 동료의 존재를 확신했는지 아무래도 좋았던 데몬은 그저 영웅들이 타임 캡슐을 묻은 위치가 하필 사자왕의 성 부근이라는 것만 신경쓰였다. 이유는 참으로 씁쓸했지만.

존재의 확신을 얻었으나 그것 뿐, 이름은 무엇이고 성별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라 프리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돌아가기 위해 오르비스에 들렀다.

「여신님께선 존재의 시간을 잃은 이를 찾는 방법에 대해 아십니까?」

「글쎄요. 존재의 시간을 얼마나 잃었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전부 잃었다면요?」

「으음…… 그럼 좀 많이 힘들겠군요.」

「역시 그렇습니까.」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이라 불리는 이 답게 존재의 시간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긍정의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당신도 알겠지만 존재의 시간은 수명같은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세계에 기록하기 위한 잉크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존재가 흐려지고, 완전히 잃으면…… 그런 이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이야기로 비유하자면 한 등장인물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가 사라진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거죠. 너무나 적절한 비유에 프리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방법이…… 없겠네요.」

「사실상 그렇죠. 어디 전설에나 나오는 세상 모든 정보가 모이는 불가사이한 장소같은 게 정말로 있지 않는 이상 이야기에서 지워진 이를 찾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들어보지 못했나요? 왜 있지 않습니까, 어느 지역에나 하나씩 있는 '세상의 수많은 정보들이 쌓여있는 곳'에 대한 민담이나 구전설화 말이에요.」

그 말에 프리드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미네르바의 말대로 어느 지역에나 저런 전설이나 이야기가 있었고, 그 역시 어린 시절에 얼핏 들어봤었다.

「그 전설이 언제부터 내려져왔는지 아십니까?」

「그건 저도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꽤 오래전부터 쭉 내려온 이야기니까요.」

「그렇습니까.」

오랜 시간을 살아온 여신조차 기억나지 않을만큼 오래된 전설.

본래 전설과 민담은 과장과 군살이 붙을 지언정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나름의 출처가 있단 말이다.

「먼 옛날부터 큰 틀은 변하지않고 계속 내려져오는 전설의 출처는…….」

그는 '세상 모든 정보가 모여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들을 긁어모았다. 어느 이야기에선 그곳이 도서관이라 하였고, 어느 전설에선 서재라고 했다. 주인공들이 그곳에 갔던 방법들도 의도적인게 아니라 알 수 없는 빛에 휩싸였다던가, 정체불명의 포탈이나 마법진을 통하는 등 다양했지만 일반적인 과정을 거친 것은 없었다.

「장소는 실존한다. 하지만 보통의 방법으론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정말 세상의 모든 정보가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고로 그곳은 메이플 월드가 아닌 다른 차원에 있을 확률이 높다.

결론을 내린 그는 차원 마법 연구에 착수했다.

***

세피로트가 루시드와 또 다른 군단장의 조사를 맡게 된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전자는 그렇다치고 후자의 놈이 있는 곳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 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트립퍼들에겐 기술의 숙련도가 일정 경지에 올라야만 쓸 수 있는 히든 스킬같은 기술이 있다. 일전에 검호가 썼던 공간절단이 이 예시이며, 세피로트의 경우 회피를 위한 몸놀림의 극한인 '차원 도약'을 히든 스킬로 쓸 수 있다.

'슬슬 나서는 게 좋겠네.'

차원과 차원 사이의 틈새, 허차원에 일시적으로 진입해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이 스킬은 잘 응용하면 지금처럼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스킬로 활용할 수 있다. 판테온에 발생한 디멘션 게이트가 안정되기 전, 사람을 메이플 월드 어딘가에 보내버리는 랜덤 포탈과 같았을 때 누구도 이용 못했지만 그만은 자신만만하게 썼던 이유이기도 했다.

노바족에게 받은 은신 아이템과 기척을 숨기는 기술, 간간히 허차원에 숨는 등 갖은 노력을 한 덕에 그는 며칠 째 거울 세계에 있는동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있었다.

"흠? 둘 중 한 명만이 저를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둘이 같이 온 건가요? 의외로군요 알파."

새로운 시간의 초월자를 둘로 갈라 제 힘으로 오염시키고, 각성을 방해한 군단장은 존재감은 적었지만 대단히 영리하고 뛰어났다. 알고있던 내용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살려둬선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알파와 베타, 본래 하나였던 시간의 초월자들은 군단장 윌을 토벌하고 자신들을 오염시킨 힘을 없애 제대로 초월자로 각성하기 위해 놈을 찾았다.

"초월자가 되서는 안 되는 부정한 자가, 초월자가 되려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제부터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세요."

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울 세계의 컨트롤 룸 중심에 봉인되어있던 륀느 여신이 서서히 내려왔다. 이야~ 한참 약해지셨어도 초월자는 초월자, 몸이 절로 긴장되는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여신이……? 어떻게 된 거지?"

"봉인된 여신이……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부정한 자가 초월자가 되려하는 이 상황 앞에서 여신께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부정한 자를 막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초월자가 가진 본능. 물론 의식은 없습니다."

그 말이 거짓임을 세피로트는 바로 알았다. 삐걱이는 톱니바퀴처럼 무리하게 움직이는 여신이 철저히 숨어있는 그를 정확히 보았기 때문이다. 정작 군단장과 알파, 베타는 전혀 몰랐지만.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여주시죠.'

'쯥, 알겠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으로 짤막한 대화가 오갔고, 그는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자, 그럼 준비가 되셨나요? 여신의 벌을 받을 준비 말입니다."

"끝까지 비열하잖아 군단장!"

"후후, 제 손을 더럽히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젠장……! 어떻게 해야하지?"

어머니와 같은 륀느와 싸워야하는 상황에 무기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둘을 군단장은 즐겁게 구경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본능에 끌려가는 것 같았던 여신이 몸을 돌려 윌에게 빛줄기를 내려꽂았다.

"이 무슨…… 본능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

"그대가 말한 것처럼, 봉인된 내가 움직일 수 있던 건 부정한 자를 막기 위한 본능이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손으로 탄생시킨 나의 아이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으려는 것 또한 나의 본능. 초월자로서의 본능을 넘어선, 륀느라는 내 자아가 만들어낸 본능입니다.

"젠장,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싸우기보다 타인의 손을 빌리고, 가까운 이들을 반목시키려 한 당신의 패배입니다. 사라지세요 군단장."

"이걸로 끝이 아니야……! 륀느 당신은 아직도 거울 세계에─"

"그 역시, 이젠 상관없는 일입니다."

"뭣?"

막 도망치려던 윌이 륀느의 말에 잠시 주춤한 찰나를 놓치지 않은 세피로트는 비호와 같이 놈에게 달려들어 무릎차기를 꽂아넣었다.

"커헉……!!"

"어딜 도망가?"

예상치못한 기습에 윌은 물론 알파와 베타도 당황했지만 그는 곧바로 연격을 이었다. 왼손의 녹옥의 염주를 길게 늘어뜨려 올가미처럼 휘둘러 놈을 붙잡고, 황급히 놈이 등에서 꺼내든 거미 다리를 움켜쥐어 그대로 바닥에 쾅! 매다꽂았다.

"이, 무슨."

"원래 목적은 조사였는데, 네놈 하는 꼴 보니 살려둬선 안된다는 답이 나왔거든."

살생을 좋아하진 않지만 군단장을 예외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그냥 죽어라.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살의를 느낀 윌은 제 팔에 휘감긴 녹옥의 염주를 끊어내기 위해 힘을 줬지만, 끊어지긴 커녕 금조차 가지 않았다. 이렇듯 파괴불가 속성의 무기는 어떤 때에는 최고의 방어구가 되기도 했고, 결코 끊을 수 없는 구속이 되기도 했다.

제기랄. 욕지꺼리를 입에 담는 그의 몸 위로 금빛 눈동자같은 형상이 떠올랐다. 이걸로 잠깐이나마 시간벌이를…….

후웅─!

"헤에, 나 빈약해보여서 버프 주는 거야?"

"──?!"

"고맙네."

특별히 일격에 죽여줄게. 시간 전이의 힘 - 백금빛 안개가 공격 반사 마법을 빼앗아 세피로트의 몸에 옮겨주었다. 윌은 제 마법을 빼앗은 힘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한 눈에 알아봤으나, 그래서 더 당황해버린 게 그의 불운이었다. 아예 모른채 공격하는 게 차라리 나았을테니까.

팔을 묶은 염주를 확 당겨 그를 끌고 온 세피로트는 그대로 윌의 명치에 주먹을 박아넣은 다음 턱을 올려치려했으나, 등 뒤에서 마법진이 나타나 그를 집어삼켰다.

펼쳐진 건 색과 주변 사물들의 위치가 모두 반전된, 앞서 그들이 있던 장소를 거울에 비춘듯한 풍경.

"설마 여기서 이 힘을 쓰게 하다니…… 살아서 나갈 생각따위 버리는 게,"

"아 됐고. 일단 여기 현실 아니지?"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군요."

"정말 다행이네."

"뭐라고요?"

여덟 개의 거미다리를 모두 꺼내 전력으로 가려던 군단장은 쭉 입꼬리를 올리는 백발의 무투가에게서 불길함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공간에 갇혀 곤경에 처했다기보단 족쇄가 풀려 기쁜 맹수같은 저 미소는 대체.

"아까 거긴 컨트롤 룸이었는데다 초월자님들이 다 있어서 전력으로 가기 힘들었거든."

근데 여긴 현실이 아니니 얼마나 박살나도 상관없잖아. 당장이라도 땅을 박찰듯이 긴장된 두 다리와 가늠하기 힘들만큼 힘이 깃든 주먹에 백금빛 안개가 서렸다.

잘못 걸렸다. 군단장은 그제서야 상대를 제대로 파악했지만, 이미 늦었다.

"저를 쓰러뜨려도 제 힘이 없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습,"

"야. 내가 어떻게 이 거울 세계에 왔을 것 같냐?"

어디 별도의 공간이나 차원에 가두는 것만큼 나한테 의미없는 것도 없어. 사납게 웃어보인 세피로트는 산을 무너뜨리는 거력이 깃든 주먹을 있는 힘껏 내질렀다.

사람의 몸에 맞아서 나는 거라고 믿을 수 없는 폭음과 함께 흑백의 세계가 무너져내렸다.

========== 작품 후기 ==========

이번 화에서 프리드가 유에 책을 보려는 걸 쓰려 했는데! 주말에 올린다고 했으니 그냥 짤라서 올리기로 했습니다. 다음 화에는 유에 책 다 보고 검호 책 막 보겠네요.

정~말 오랜만에 세피로트가 활약. 사실 윌한테 세피로트만큼 상성 안 좋은 트립퍼도 드물어요. 저놈의 시간 전이가 웬만한 버프를 죄다 뺏는데다 각종 마법들도 방해해서 어떤 의미로 검호만큼이나 마법사들의 천적. 거기다 혼자서 차원 이동을 해대서 거울 차원 이동도 의미가 없음.

@Ratios - 장작이라뇨!

@킴마령 - 둘의 전투에 대한 건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될 겁니다.

@l감 - 글쎄요. 현재의 은월에게 있어 하이랜더는 완전 남이라서 만나봤자...

@무르무릉 - 그것도 있고,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검호 책때문입니다.

@푸르고큰소나무 - 프리드는 온갖 초월적인 마법을 썼지만 적을 상대할땐 번개 마법을 주특기로 썼습니다. 빠르고 강하니까!

@드라몬 - 검호 다음 이데아입니다. 그리고 검호 책 감상은...(검호 초반부를 본다)

@0화락0 - 군단장 책은 죄다 데몬이 봤습니다. 영웅들 책은 당사자들이 봤고요.

@토아루 - 주말이 가기 전에 올렸다!

@칼크래프트 - 프리드 책과 유에 책, 이어지는 검호 책! 과연 마지막까지 멘탈이 남아있을 것인가?!(두둥)

@okok5413 - 이데아 책입니다. 예전에 말했었어요.

@육합 - 좀 미안해할겁니다.

@J스티카 - 누가 저 좀 취업시켜줬으면~!

@생명체는꿈을꾼다 - 다음 화에 검호 책 막 볼겁니다. 시작부터 대박이에요.

@방탄유리심장 - 뭐, 검호 책은 초반부는 무조건 개그라서...

@ERUDITO - 다음화에요 다음화!

@소라노아카시 - 처음부터 하면 너무 긴데다 뭣보다 영웅들은 자기들이 봉인된 이후 프리드가 어찌됐는지 궁금해해서.

@리아카에린 - 나중에 외전으로 자세히 풀거지만, 팬텀이 루미너스의 고민에 바로 대답할 수 있던 이유는 본인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레볼레이션 - 다음화에 프리드와 다른 영웅들 단체 멘붕을 볼 수 있습니다.

@XxCDCxX - 마음껏 가져보세요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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