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204화 (204/208)

<-- 코멘 20000돌파 기념 외전:까마귀의 보석 -->  소년은 졸부 집안 태생이었다. 재산은 어지간한 귀족보다 많지만, 오래된 전통이나 명예, 품위따위가 없어 돈으로 이를 구하려들어 귀족들 사이에선 천박한 취급을 받는 졸부 집안.

그러나 다른 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졸부 집안이라 한들 당시 전쟁과 기아 등에 시달리던 평민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임이 분명했고, 때문에 그는 어릴 때부터 이름있는 귀족가에 데릴사위로 팔려갈 예정인 제 미래에도 크게 반항하지 못했다. 우연히 본 마법서의 마법을 간단히 사용할 줄 아는 제 재능을 깨닫기 전까지.

'언젠가 반드시.'

그때 소년은 자신이 타고난 게 잘빠진 얼굴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고, 닥치는대로 많은 것을 시도해보았다. 어지간한 마법은 책만 봐도 쉽게 쓸 수 있었고, 웬만한 기사들의 몸놀림을 바로 흉내내는 건 물론 처음 활을 잡은 날 간단히 과녁을 맞추었다. 이른바 만능의 천재였다.

이 사실을 깨달은 소년은 심장이 쿵쾅거릴만큼 기뻤지만 최대한 이를 숨기기로 했다. 이 재능을 갈고닦아 어느정도 능력을 기르고, 이 집안에서 나가자. 지금 들키면 재능을 꽃피울 새도 없이 이 망할 집안을 위해 제 삶을 다 바쳐야할 것이다.

다행히 이 집안엔 제 능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될 물건들이 많았다. 있어보이는 척 하려고 잔뜩 사들인 마법서와 고서적, 명검, 각종 보물까지. 이후 소년은 야심한 밤을 틈타 서재와 보물고를 들락거리며 공부와 수련을 반복했다.

그 날 역시, 밤에 몰래 보물고에 들어가있던 날이었다.

"하? 뭐야. 왠 꼬맹이가……."

"누, 누구야?!"

윤기나는 검은 머리에 조류의 것 같은 노란 눈, 까마귀 날개같은 새카만 망토를 두른 남성이 어둠속에서 걸어나왔다. 언제 여기 온 거지? 남자는 소년의 존재에 잠깐 놀랐다가 히죽 웃었다.

"내가 누구냐니. 그야 밤손님이지."

"뭐?"

"도둑이란 말이다."

남자가 들고있던 화려한 지팡이 끝에서 뭔가가 쏘아지는 광경에 소년은 반사적으로 책으로 배운 방어 마법을 썼다. 쨍! 다행히 방어막에 좀 금이 갔지만 무난하게 막아냈고, 예상치못한 흐름에 남자는 조금 인상을 썼다.

"마법사였나. 귀찮네."

"잠깐만! 도둑이라면 당신, 여기 있는 걸 훔치려고 온 거야?"

"당연하지. 보아하니 이 집 자제인 것 같은데 잠시만 기절해있으라고. 금방 끝날테니─"

"아니! 뭘 훔쳐가든 상관없는데 내가 쓰는 건 나중에 가져가!"

"…… 뭐?"

도둑질하러 왔다는 걸 다 들었음에도 말리긴 커녕 냅두겠다는 소년의 말에 남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너 이 집 자식 아니냐?"

"정말 싫지만 맞아."

"그런데 내가 보물 훔쳐가는 걸 보고만 있겠다고?"

"난 여기가 싫어."

부모에 대한 반항이나 어린애의 치기따위가 아닌, 정말로 싫어 죽겠다는 감정이 물씬 배어든 대답에 남자는 소년이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 뭐, 방해하지 않는다면야."

"뭘 훔치려고 온 건데?"

졸부 집안답게 이것저것 진귀한 물건이 많긴 했지만 진짜배기 보물,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물건같은 건 없다. 돈으로 많은 걸 살 수 있지만 돈만으로 살 수 없는 건 구할 수 없으니까. 남자는 대답없이 보물고를 이곳저곳 둘러보다 어느 한 곳을 보며 눈을 빛냈다.

"여기 있었네~"

"…… 겨우 그거?"

남자가 집어든 건 흉악한 몬스터 석상이었다. 오래된 유물이랍시고 경매에 나왔던 걸 소년의 아비가 사들였었는데, 어떤 마법이 걸려 이끼가 끼지 않고 단단한 걸 빼면 그렇게 특이한 건 없는 물건이었다. 그나마 조각된 몬스터가 꽤 정교한 게 장점일까. 실망하는 소년의 모습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뭘 모르는구나 꼬마야."

"뭐가?"

"정말로 중요한 건 대놓고 눈에 보이지 않아."

화려한 지팡이의 끝에 예리한 빛이 맺히더니 그대로 석상을 쩍! 갈랐다. 뭐하는 짓이야?! 소리칠뻔한 소년은 쪼개진 석상에서 쏟아져 나온 것에 멍청히 입을 벌렸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진 푸른 천이 펄럭- 튀어나오더니 그 안에 색색의 큼직한 보석과 장신구들이 한아름 쌓여 있다!

"이 유물이 만들어졌던 왕국은 말이지, 이런 조각상을 금고나 보석함으로 쓰곤 했거든."

"어떻게 그걸……?"

"그야 난 보통 도둑이 아니니까."

괴도 레이븐. 기억해두라고 꼬마. 그 이름에 뒤늦게 소년은 아리안트 쪽에서 악명높은 괴도의 존재를 떠올렸다.

"호오, 천 자체도 꽤 괜찮은 치유 아이템이잖아? 땡 잡았네~"

"…… 그것만 가져갈 거야?"

"뭐 일단은. 나중에 내가 훔쳐갈만한 물건이 여기 들어오면 그때 또 와보지."

목표는 석상 안의 보물이 전부였는지 깔끔히 등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소년은 까마귀 날개같은 망토자락을 잡았다.

"뭐냐?"

"날, 데리고 가줘."

"왜."

"여기 더 있어봤자 난 다른 가문에 팔려나갈 미래밖에 없어."

"그게 어때서?"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소리치고 싶었지만, 레이븐의 노란 눈은 오싹할만큼 무덤덤했다.

"꼬맹아. 지금 네 투정을 바깥에서 굶어 죽어가는 난민들이나 귀족들의 폭정에 시달리는 평민이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냐."

"그건……."

"팔려간다 해봤자 귀족 가문일테고, 평생 손에 물 안 묻히고 살 텐데 그걸 걷어차겠다고?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너 대신 팔려가겠다고 할 사람들이 쎄고 쎘을 거다."

배부른 소리도 정도껏 해. 그 말에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졸부 가문이라 해도 대부분의 이들보다 잘 살고 있고, 데릴사위로 팔려갈 가문은 이보다 더 좋을 거다. 그 돈에 미친 아버지라 하기도 싫은 남자가 질낮은 가문따위에 저를 싸게 팔 리 없지. 큰 일이 없으면 괴도의 말대로 평생 고생할 일 없이, 물질적으로 부족함없는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불행하다고 지금 내 불행이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어……."

"그래,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 불만따위 투정으로밖에 안 들리겠지! 하지만 내가 가장 싫은 건 이 집안이 천박한 졸부라서도, 팔려가야할 집안이 싫어서도 아니야! 내 삶인데, 내 미래인데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라고!"

가난하고 힘들어서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이나, 잘 먹고 잘 살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택할 수 없는 이나 뭐가 다른가.

"이 망할 집안! 날 팔아넘기려는 것도 짜증나는데 내가 팔려서 이 집안이 잘 될 거라는게 제일 짜증나! 그래서 반항 좀 하겠다는데 그게 어때서?! 내 삶이잖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게 왜!"

"하, 이놈 봐라."

"내가 틀린 말 했어? 잘 먹고 잘 살면 뭐해? 평생 위험겪을 리 없고 고생도 안 한다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박제된 것 마냥 장식품 남편이 되는 미래가 뭐가 좋아!! 남이 나보다 못하니까 지금 나는 행복한 거다, 그런 저열한 자기위안따위 하면서 평생 살고 싶지 않아!"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토해낸 소년은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잠시 침묵하던 레이븐은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소년을 보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아까 말은 내가 잘못했네."

"뭐?"

"네 말이 맞아. 남이 나보다 더 불행하다고 내 불행이 사라지진 않지. 방금 했던 말은 취소하마. 실언해서 미안하다."

"그, 그럼."

"아 그렇다고 널 데려가진 않고."

"왜!?"

몰라서 묻냐? 난 괴도라고. 애같은 거 딸려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싹수 보니까 알아서 잘 할 거 같네. 네 인생이니 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내 도움따위 기대지 말고 네 힘으로 그 집에서 나와. 행운을 빌어줄게."

레이븐은 제 망토를 잡고있는 소년의 손을 떨어뜨리며 유유히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밤손님의 퇴장을 원치않는 소년은 주변에 있던 보물 하나를 집어들어 냅따 사용했다.

콰득!

"윽……?! 이 꼬맹이가, 뭘."

"석화 저주 아이템이야. 그 인간이 강력한 마법이 담긴 보물이라고 샀는데 하필 이런 저주라 그냥 창고에 박아뒀거든. 드디어 써먹어보네."

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머리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든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뱀들에게 붙잡혀 물린 레이븐은 물린 부위를 시작으로 굳어가는 감각에 얼굴을 구겼다. 이건 진짜다. 그리고 소년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손끝에 불을 피워 보물고 바깥 복도에 쏘아냈다. 불은 바닥에 깔린 카펫을 잡아먹으며 그 몸집을 빠르게 키워갔다.

"이대로 가면 저택 경비병들에게 잡힐 걸?"

"이 망할 꼬맹이가!!"

"내가 보물고에 있다는 걸 들켜도 당신을 보고 잡으러 왔다고 하면 되고, 더 늦으면 석화 저주 못 풀 수도 있어."

"이, 이……!"

"나보고 알아서 하라며?"

그래, 내 인생인데 내 살길은 알아서 찾아야지. 내 코가 석잔데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수단방법 안 가리는 것쯤이야 당연하잖아. 희번뜩하게 빛나는 소년의 보라색 눈에 레이븐은 저놈이 아주 독종새끼임을 깨달았다. 진짜 안 데리고 가면 저 망할 지팡이를 절대 놓지 않을 기세다.

위험한데. 서서히 팔다리의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낀 레이븐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야 너 요리할 줄 아냐."

"어, 대충은?"

뜬금없이 뭔 요리 타령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다른 의미로 진지한 눈빛에 소년은 그렇다고 거짓말했다.

"데려가주마. 대신 앞으로 내 식사는 네가 만들어라."

"진짜지? 약속하는 거지?"

"그래그래, 약속할테니까 이거 빨리 놔! 더 있으면 저주 못 푼다며!?"

"아, 알았어!"

소년은 석화 지팡이를 보물고 저 구석을 향해 집어던졌다. 캬악! 뱀머리 여자장식이 울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레이븐은 황급히 아까 챙겼던 치유 마법이 새겨진 천으로 석화 부위를 감았다. 바깥엔 어느새 불이 꽤 번져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옷 꽉 잡아라. 급하니까 빨리 움직여야 하거든."

"응!"

레이븐은 소년을 어깨에 들쳐매고 어둠을 두르고 밤에 뛰어들었다. 한 순간에 저택에서 빠져나와 찬 밤공기를 들이킨 소년은 휘영청 뜬 달과 별을 보고 놀랐다.

"테, 텔레포트?!"

"그쪽 계통 기술이긴 하지."

까마귀 깃털로 어루어진 어둠의 장막[Shroud]으로 몸을 숨긴 그는 쭉 늘어진 화려한 저택들의 지붕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으로 지나가는 그 저택들은 그 인간이 그리도 손에 넣고 싶어하던 명예와 권위를 가진 이들이 사는 곳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도둑의 발판일 뿐이었다.

한참 달리던 레이븐은 어느 저택 옥상에 착지해 미리 숨겨놓았던 경비행기에 시동을 걸었다.

"2인승은 아니지만 물건 싣는 칸은 따로 있으니까 거기 들어가 있어."

"어디로 가는 거야?"

"가보면 알게 될 거다."

레이븐은 소년을 훔친 보물들과 함께 조종석 뒤쪽의 짐칸에다 싣고 조종석에 앉았다. 마법으로 엔진의 예열을 빠르게 마친 경비행기는 프로펠러를 세차게 돌리며 밤하늘로 비상했다.

이윽고 펼쳐진 야경이란.

"아, 우와아……!"

"멋지지?"

모든 것이 모형처럼 작게 줄어들었다. 조금 전에 지나온 저택의 거리도, 감옥같았던 집도, 그것들이 있던 도시도 모두.

자유다. 드디어 저곳에서 벗어났어.

그 사실이 생생하게 눈에 보여, 소년은 터질듯이 뛰는 심장과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앞이 흐려질만큼 기뻐했다.

***

"야 이 자식아 요리할 줄 안다며?!"

"못한다고 하면 안 데리고 갈 거였잖아. 그래서 거짓말 한 거야."

"이 놈이!!"

소년이 요리를 못한다는 사실은 하룻만에 발각되었다.

레이븐의 아지트, 일명 '둥지'에 온 다음날 소년은 약속대로 레이븐에게 아침식사를 만들어줘야 했는데 데릴사위로 팔려갈 거니 뭐니 했지만 어찌됐든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던 소년은 당연히 요리를 못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바닥이 눌러붙어 탄 스프와 덜 익은 고기, 안 부푼 빵과 제대로 씻지도 않은 샐러드라는 환장의 메뉴를 본 레이븐이 뒤집어진 건 당연지사였다. 그나마 멀쩡한 건 밖에서 사온 샐러드 소스뿐이었다.

"젠장 그 저택에 도로 갖다놓아야지 진짜……."

"그건 싫어! 절대로 안 돌아가!"

"그럼 이 쓰레기말고 좀 괜찮은 식사를 만들어보라고!"

"요리책 줘! 책 보고 만들게!"

"야, 책만 보고 요리를 척척 만들 수 있으면 누구나 요리사 되게?"

"일단 주고 말해!"

레이븐은 기가 차면서도 언젠가 구해놓았던 요리책을 몇 권 소년에게 던져준 뒤 밖에 나가 먹을 거리를 사왔다. 당분간 외식으로 떼워야겠구만.

그리고 그 날 저녁, 레이븐은 멀쩡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미친……?"

"봐봐! 책만 보고 따라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혹시 모양만 그럴싸한게 아닐까 한 입 먹어보니 맛도 괜찮았다. 아침의 그 음식쓰레기를 생생히 기억해서 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반나절만에 이렇게 실력이 급변할 수 있는 거야?

"아침에 일부러 못 만든 거냐?"

"그럴리가 없잖아. 나 그땐 진짜 요리 못했어."

"그럼 어떻게……."

"책 보고 따라했다고 했잖아."

"…… 당장 다시 한 번 만들어봐."

"어? 어어, 알았어."

어차피 본인 몫 저녁도 만들어야 했기에 소년은 부엌에 들어가 아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레이븐은 그 모습을 면밀히 관찰했다.

식재료를 다듬는 것부터 칼질하는 것, 불을 조절하는 것 등 요리에 대한 기술 전반이 아침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빠르고 능숙하다.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나? 그렇다기엔 아침의 음식쓰레기가 말이 안 된다.

'저거 설마…….'

본인은 다른 걸 먹고 싶은지 요리책을 펴 저에게 만들어준 것과 다른 음식을 찾아 한 차례 보고는 설명대로 따라하는 - 책을 단숨에 이해해 재현해내는 소년의 모습까지 봤을 때 레이븐은 이 기이한 상황을 이해했다. 저 소년은 요리에 재능이 있는게 아니다. 이해력과 통찰력,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난 거다.

"이제 조금만 더 끓이면 완성이야."

"야, 너 내 제자할래?"

"…… 뭐?"

"너는 네가 어떤 재능을 타고났는지 아냐."

소년은 뜬금없는 제안에 당황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지. 그러고보니 이놈 보물고에서 뭘 연습하고 있었지?

"난 뭐든 빨리 잘 배워. 다른 사람이 몇 년동안 수련해야 할 수 있는 걸 난 몇 달도 안 되서 바로 할 수 있고,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제대로 설명되어있다면 책만 보고도 어느정도 재현해낼 수 있어."

"구체적으로 어째서 그런지는 알고?"

"음…… 글쎄? 그냥 보면 알고 할 수 있어서, 다 잘하는 재능이라 생각하는데."

검도, 활도, 마법도. 대충 보고도 그 정수를 쏙쏙 빼낼 수 있어. 레이븐은 이놈이 방구석 마법사(책으로만 마법을 배워 실전감각이 없는 마법사)였다는 것도 기가 차는데 그런 놈에게 일격이 막힌데다 되려 한 방 먹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을 뻔 했다.

"물론 그 모든 분야에 재능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네 재능의 본질은 그런게 아니다."

"그럼 뭐야?"

"넌 여기가 굉장히 좋아."

레이븐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머리? 그래.

"정확히는 본질을 간파하고 이해하는 능력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이해한 걸 재현해내기 위한 손재주까지 뛰어나니 뭐든 잘 할 수 밖에 없지. 통찰력과 손재주는 어떤 기술에나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니까."

"아……."

"내가 너한테 제자하겠냐고 제안하는 건 그런 이유다. 네 재능은 썩히기엔 너무 아까워."

"그럼 제자 할래!"

"흐응~ 네 입으로 하겠다고 했다?"

소년은 어쨌든 집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란 확신에 기뻐 히죽 입꼬리를 올리는 레이븐의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년은 둥지에 온 지 하루만에 레이븐의 식모(?)에서 제자로 바뀌었다. 이는 소년의 생각대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면 레이븐의 심기가 나빠진 것 만으로 이전에 살았던 집에 돌려보내질 일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단순히 밥차리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게 뭐야! 어떻게 며칠만에 방을 이따위로 만들 수 있어?!"

"조사자료 정리하다보면 항상 그래. 대충 치워놔."

"뭘 어떻게 치우란 거야?!"

"저기 있는 것만 빼고 적당히 정리하면 돼. 아, 원위치하고 너무 다른 곳에 두진 말고."

"이런 건 제자가 아니라 가정부 고용해서 시켜!"

레이븐의 제자가 된 이후 소년은 그에 대해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귀족들이 업신여기는 괴도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지식과 무력 모두 상당한 깊이를 가진 실력자였고, 물건을 훔침에 있어서도 굉장히 많은 준비를 가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생활은 그의 방만큼이나 개판이었다.

"누가 누굴 고용해? 제자야, 네 스승 직업이 뭔지 다시 떠올려봐라."

"거 돈도 많으면서 입 무거운 가정부도 하나 못 들여?"

"그래. 믿을 수 있는 놈이 적거든."

단칼에 떨어진 대답에 소년은 움찔했다.

"내 둥지에 쌓여있는 보물을 보고 눈돌아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 거라 생각하냐?"

"음…… 난 갖고싶은 게 몇 개 있긴 해도 그렇게 탐나진 않은데."

"너같은 사람이 어디 흔하겠냐."

"내 건 나중에 내가 구하면 되니까!"

"으이구……."

결국 식사 준비에 이어 방청소까지 제자라는 미명하에 소년의 몫이 되었다. 당연히 불평불만에 입이 댓발 나왔지만, 레이븐은 부려먹는만큼 다양한 것을 가르쳐줬기에 소년은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일을 했다.

그리고 레이븐이 가르쳐주는 다양한 기술들 중엔 가끔 소년을 당황하게 하는 것도 있었다.

"…… 난 남잔데 대체 화장따윌 왜 배워야 하는 거야?"

"그야 변장할 때 써먹을 수 있으니까. 잘 된 화장은 변신 마법보다 더 좋을 때가 있거든."

"그냥 변신 마법 쓰면 안 돼?"

그게 더 편한데. 소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각양각색의 화장품을 보았다.

"제자야. 마법이 만능인 건 맞지만 전능하진 않아. 만약 마법을 못 쓰는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로 급히 변장해야할 때 어떻게 할래?"

"어, 어……."

"유용하다고 패를 하나만 들고 있으면 그 하나가 막힌 순간 끝이잖아. 현실엔 늘 돌발상황이란 게 생기고, 그럴 때를 대비해 이런저런 대책을 준비해놔야하지 않겠냐."

카드패는 다양할수록 진가를 발휘한단다. 틀린 말은 아닌데 색색의 화장품을 들이밀며 '자~ 그러니까 어서 써봐라~' 키득키득 웃는 스승의 모습은 암만 봐도 저를 놀리기 위한 것 같아 소년은 레이븐의 얼굴에다 립스틱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야 했다. 결국 소년은 화장술을 포함한 변장술(여장 포함)을 배웠다.

이외에 소년은 암호학, 언어학, 역사학 등 각종 분야의 지식을 쌓았고 - 뭔 괴도가 이런 걸 줄줄이 꿰고 있나 의아했으나 하나같이 보물 감정에 필요한 것들이란다 - 마법이나 검술, 궁술 등에 대한 스킬도 배웠다. 레이븐은 대마법사나 대전사 급 강자는 아니었으나 적의 헛점을 파고드는 실전적인 기술들을 굉장히 많이 알고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됐다.

몇 년 뒤, 레이븐은 제자를 데리고 괴도 활동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

"아 빨리 좀 끝내라고 스승!"

"뒤에 님 자 안 붙이냐 제자야."

"좀, 더 이상 못 버텨!"

"으휴, 근성없는 놈."

버릇없는 제자가 경비용 골렘들을 혼자 막는 사이 마침내 보안 마법과 장치들을 해제한 레이븐은 이중삼중으로 채워진 자물쇠를 간단히 땄다. 귀족 저택은 보안 해제가 자물쇠 풀기보다 귀찮다니까.

"그래도 이번엔 수고했으니 창고에 있는 것 중에 적당한 거 하나 주마."

"그거 진짜지?!"

"당연히 진짜지. 넌 속고만 살았냐."

"그동안 당신이 날 몇 번이나 속였는지 생각하라고!"

소년은 레이븐의 제자가 된 이후 여러모로 실력이 꽤나 향상되었고, '좀 쓸만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엔 집에서 완전히 나왔을 때만큼 기뻤다. 딱 그 때만. 실전경험을 쌓게 해준답시고 별의 별 일에 동원되기 전까지 말이다.

경비 병력 유인용 미끼는 기본중의 기본에, 정보를 모아오라고 하녀로 여장시켜 저택에 잠입시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오늘처럼 경비 병력을 대신 상대하는 건 차라리 양반일만큼 소년은 철저하게 부려먹혔다. 심지어 레이븐으로 변장해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것도 몇 번이나 해야했다!

"제자야."

"뭔데!?"

"예전에도 말했지만 싫으면 독립해라."

"……."

건방진 제자를 입다물게 한 레이븐은 능숙하게 보물들을 챙기고는 밤의 베일을 두르고 바람처럼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들어올 땐 쥐도새도 모르기만 하면 얼마나 시간을 들여도 되지만, 나갈 때는 속전속결로 빠져나와야 한다.

본래 1인승이었지만 소년이 커가며 2인승으로 개조한 경비행기를 타고 둥지로 돌아온 둘은 입고있던 웃옷과 케인, 페르소나 등을 모조리 방구석에 던져버리고 소파와 바닥에 널브러졌다. 예전엔 왜 옷가지도 정리 안하냐고 따졌던 소년은 이젠 왜 레이븐이 그랬는지 모두 이해했다.

"아, 삭신이야……."

"어린 놈이 뭔 삭신타령이냐."

"경비병들 따돌리고 보물고의 골렘까지 상대한 건 나거든?!"

"그렇게 따돌린 경비병들 피해서 보물고까지 오는 안전한 루트 찍어주고, 사전에 보안 자료 긁어모아 분석해 경비병들이 돌아오기 전에 모두 해제한 건 이 스승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으 씨…… 어쨌든 오늘은 나도 많이 했다고!"

"그래, 그래. 나중에 가져온 것 중에 대충 마음에 드는 거 골라라."

소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이상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 레이븐은 제자를 물끄러미 보다 조금 전 방구석에 던져놓았던 망토를 탁탁 털어 담요대신 제자에게 덮어주고 다시 소파에 누워 페르소나로 제 얼굴을 덮었다.

다음 날, 소년은 스승이 약속했던 성과금(?)을 받았다.

"이걸로 할래!"

"엉? 그거?"

촤라락─ 카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일반적으로 놀이에 쓰이는 카드가 아닌 빛으로 짜여진 것처럼 은은히 빛나는 카드들이 소년의 손안에서 놀았다. 저게 뭐더라…… 아, 옛날에 도박 좋아하는 어떤 대마법사가 만든 아이템이랬나.

"그럼 그거 가져라."

"앗싸~"

"오늘 아침은 건너뛰었으니 점심은 풍성하게 차리고."

"알았어!"

저 장난감이 뭐가 좋은지 룰루랄라 부엌에 들어간 제자는 얼마 되지않아 척척 점심을 만들어냈다. 잘 구운 빵과 스프, 몽실몽실한 스크램블 에그와 해쉬브라운, 노릇노릇한 소시지가 식탁에 올라왔다.

레이븐은 빵을 찢어 먹으며 피곤함이 가시지않은 눈으로 제자를 보았다. 어제까지 삭신이 어쩌고 하더니 하룻만에 팔팔해지다니, 역시 젊어서 그런가. 동안에 몸에 좋은 것들 먹으며 관리를 잘 해서 아직은 20대 후반정도로 보이지만 실상 소년을 거뒀던 시점에서 30대였던 그는 슬슬 몸이 삐그덕거리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그 장난감을 어디다 쓰려는 거냐? 사기치는데?"

"그것도 괜찮지만 이거 이렇게도 쓸 수 있더라고. 봐봐!"

방 한구석에 던져놓았던 케인을 집어온 제자는 그 위에 카드를 몇 장 던졌다. 그러자 카드들은 빛 조각이 되어 케인에 덧씌워져 창날이 되는 게 아닌가?

"허어……?"

"이러면 이 카드와 케인만으로 여러 무기를 든 거나 다름없지! 이제 일하러 갈 때 이것저것 챙길 게 줄었어!"

"그런 기믹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냐?"

"스승 말대로 장난감인 줄 알고 가지고 놀다가."

기막힌 물건이었네. 마력을 불어넣어 카드 그림만 바꿀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기능때문에 사기용 도구로 생각했었다. 소년은 이참에 카드들을 더 써 케인을 완전한 창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가 활로도 만들고, 대검으로도 만들다 제 시선에 무기를 등 뒤로 가져가며 외쳤다.

"줬다 뺏기 없기다!"

"안 뺏는다 그런 장난감."

생각외의 기능에 놀라긴 했지만 그것뿐. 그도 여러 무기를 다룰 줄 알지만 케인을 활용한 봉술을 주로 쓰는지라 저런 소도구까진 필요없다. 다시 식탁에 앉은 소년은 싱글벙글 웃으며 소시지를 포크로 푹 찍어 먹었다.

"이걸로 최고의 괴도까지 한 발짝 더~ 나중에 준 거 후회하지 말라고!"

"하, 그런 장난감으로 무슨 최고의 괴도냐."

"두고봐! 지금 스승의 위명을 덮을만큼 굉장한 괴도가 되어줄테니까!"

"그래그래, 잘 해봐라."

어린아이의 치기 대하듯 넘겼지만 레이븐은 저 말이 허언이 아닌 사실이 되리라 예상했다. 몇 년동안 보아오며 겪은 제자의 재능은 과거 자신이 통찰했던 것보다 더했으니까.

그랬기에…… 내심 걸리는 게 있다.

"근데 너 괴도말고 다른 거 될 생각 없냐?"

"어?"

"너정도 능력이면 괴도말고 다른 것도 될 수 있잖냐. 그런 쪽엔 관심없냐고."

기사도 좋고, 마법사도 좋다. 지금까지 자신한테 배워서 쌓은 지식만해도 어지간한 귀족보다 더할테고, 실력도 그 나이대의 누구보다 빼어나지만 앞으로 더 성장할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하필 괴도가 될 생각인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말임을 깨달은 소년은 입에 물고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 갑자기 그건 왜?"

"네가 갈 수 있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왜 하필 괴도가 되려는 거냔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왕국의 귀족도 될 수 있잖─"

"귀족따위 될 일 없어. 난 내 갈 길 갈거야."

귀족이란 단어에 노골적으로 혐오의 기색을 내비치는 제자의 모습에 레이븐은 왜 제자가 저러는지 깨달았다. 아아, 이 애는 제 과거가 싫은 거구나. 이어지는 말은 그의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었다.

"어딘가의 기사든, 어느 왕국의 마법사든. 전부 뭔가에 묶여있잖아. 난 괴도가 되서 스승처럼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거 마음껏 하며 살 거야."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멋대로 미래를 정하고, 돈과 안전을 이유로 빠져나오지 못해 하루하루 숨을 죽이고 몰래 능력을 키워가며 기회을 엿보던 나날. 그 숨막혔던 과거는 집에서 나온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년을 억압하고 있었다.

기긱. 레이븐이 들고 있던 포크가 접시 바닥을 긁으며 작은 소음을 냈다.

"자유라…… 확실히 그거라면 목숨걸고 추구할 가치가 있지."

"스승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말이다 제자야."

─네가 추구하는 게 정말 자유가 맞느냐?

"그야 물론,"

"어딘가의 기사나 마법사가 되고싶지 않은 이유가 집단에 소속되어버리기 때문이라면, 내 제자로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니냐."

"달라! 한참 달라!"

"부와 명예에 취해 부패한 귀족이 될까 걱정된다면 네 스스로 조심하면 된다. 자유를 원한다면 괴도보다 정당한 방법으로 그만한 권리들이 주어지는 자리에 오르는게 나아."

"대신 다른 것들을 짊어져야 하잖아! 난 그런 거 싫어. 그러니까 이런 기분나쁜 건 말하지도 마! 난 내 길을 갈 거라고!"

"흐……."

'내 길'이라.

"너는 그 길이 온전히 너만의 선택으로 고른 길이라고 장담하는 거냐."

"당연히─"

"하필 괴도인 건 이 스승의 영향을 받은게 뻔히 보이는데?"

"무, 물론 스승의 영향도 받았지! 그래도 하기로 한 건 내 결정이야!"

"제자야."

사람의 길이라는 건, 선택이라는 건 온전히 그 한 사람의 뜻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정해진 채 나버리거든.

"뭐……?"

"외모, 성격, 재능, 호불호, 노력 등이 태어난 순간 유전이란 이름으로 다 정해져버리지. 환경도 마찬가지로, 너는 네가 원해서 그곳에서 태어났었냐."

제자의 보라색 눈이 떨렸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제자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히는 걸 알지만, 스스로를 똑바로 보기위해선 알아야만 한다.

"너의 그 잘난 얼굴은 네가 혐오해 마지않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거고, 그 재능도 조상 중 어딘가에서 왔겠지. 성격과 지능, 호불호와 노력까지 가면 더 말하기 입아플 정도다. 그런 것들이 모두 정해진 채 나서, 지금도 네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있는 그 저택에서의 과거까지 고려하면…… 두 말하면 잔소리지."

오롯이 자신의 선택으로 괴도가 되겠다 말했지만, 그 속을 까보면 아직도 그곳에 묶여있는 걸 왜 모르는 건지.

"혐오하고 경멸하는 존재처럼 되고싶지 않아 그와 반대로 가겠다. 그건 오히려, 그 존재를 더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밖에 안 된단다."

"그……!"

"마찬가지로, 아무리 이 스승의 은혜가 하해와 같다 해도 그 이유만으로 내 뒤를 밟으려는 것 역시 자유와는 거리가 멀지."

그러한 행위가 오히려 자유와 더 멀어지는 길인 것을. 여기까지 말한 레이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흔들리던 소년의 눈은 끓어오르는 감정에 일그러졌다.

"그게, 뭐야! 그런 식이면……! 다 정해진 채로 나버리니까 내 선택도 내 것이 아니라면!"

─나란 존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얼마나 포크를 세게 쥐었는지 기어코 식기 하나가 박살났지만 레이븐은 제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식탁에서 일어나 제자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푹 눌렀다.

"윽, 뭐하는 짓이야! 손 치우고 빨리 대답이나 해!"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제자야. 너는 여기 있잖아."

"엉뚱한 소리하지 말고─!"

"한 사람을 이루는 것들의 상당 부분이 정해져버린채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야."

말하자면 토대같은 거지. 그 토대 위에 무엇을 어떻게 쌓아갈지는 네가 정해야 해. 너만 정할 수 있어.

"너의 삶에 무엇을 채워넣을지,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다."

"내가……?"

"그렇게 채워넣은 것들이 네게 토대를 물려준 이들과 구분되는,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증명해줄 거야."

그러니 너의 과거에 너무 얽매이지 마라.

"명예욕을 위해 자식을 파는 부모같은 존재가 되고싶지 않다. 좋은 뜻이야. 하지만 그것때문에 너의 가능성을 아예 죽이는 건 안 좋아."

너는 아직 어리고, 재능도 대단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싫더라도 미래에 어떤 이유로 귀족이 되고싶어질 수도 있지. 그런데 귀족이 될 가능성을 지금부터 막아버리면 그때가선 어떻게 할 거냐?

"……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제자야. 웬만해선 호언장담은 하지 말거라."

미래는 어떻게 될 지 모르거든. 알았으니까 그만 쓰다듬어! 다소 진정된 기색에 레이븐은 제자의 머리를 마구 흐트리던 손을 뗐고, 소년은 늘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던 노란 눈이 부드럽게 풀어진 것을 보았다.

"아까 내가 괴도 말고 다른 게 되고싶지 않냐고 물어본 건 너 자신을 좀 더 돌아보라는 의미였다. 그냥 그 사람들이 싫으니까, 내 제자니까 괴도가 되겠다고 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한 뒤에 뭐가 될 지 정해도 돼."

아무도 너에게 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아. 그 말에 소년은 말없이 스승을 응시하다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그럼 생각해볼게.

***

시간이 지나 소년이었던 제자는 슬슬 청년티가 났다. 성악대의 소프라노를 맡아도 될 것 같았던 미성은 여심을 뒤흔드는 부드러운 저음이 되었고, 잘 먹고 많이 움직인 덕에 키도 쑥쑥 커 한참 성장기때엔 밤낮으로 성장통을 앓아 제 스승을 고생시켰다. 원래부터 잘 빠졌던 이목구비엔 성숙함이 더해져 어디 수 백년 묵은 귀족가의 혈통좋은 도련님처럼 되었다.

그리고, 괴도가 되겠다는 결심은 여전했다.

"으이구 쇠고집아…… 기술 하나만 잘 익히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데 몇 십 개의 기술을 익히고도 하겠다는 게 괴도냐."

"스승이 할 말이 아니잖아?"

"난 너랑 반대야 임마! 이거 하다보니까 이것저것 익힌 거지 너처럼 잡다한 기술들이 있다고 괴도를 한 게 아니라고!"

끝내 괴도를 고집하는 제자의 모습에 혀를 차며 레이븐은 그럼 이제부터 단독으로 괴도 일을 해보라는 시험을 내려줬다. 그는 같이 안 가거나 가더라도 간단한 보조말고는 아무것도 안 해서 제자는 투덜거렸지만, 제 능력을 더 기르기 위해 필요한 과정임을 납득하고 괴도의 보조가 아닌 한 명의 괴도로 거듭나기 위해 밤하늘을 누볐다.

"제자야. 빨리 안 하면 바깥 놈들이 눈치챈다."

"걱정, 말라고. 인식 저해 마법이 풀리기까지 아직 남았으니까."

"그거 여기 마법 방어진에 중화되는 중인데?"

"어? 뭐?"

"30초 이내에 풀린다."

"아 젠장 그런 건 일찍 좀 말해달라고!"

뭐래? 알아서 해야지. 내가 그동안 가르쳐준 건 어따 팔아먹었냐? 사전 조사가 반 이상이라고 했잖아. 레이븐의 깐죽거림에 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자물쇠를 푸는 게 더 급했기에 제자는 말없이 손을 더 빨리 놀렸다.

그리고 마침내 금고가 달칵, 열리며 이 저택의 주인이 꽁꽁 숨겨둔 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휘유! 유물 마니아라더니 끝내주네."

"얼마나 마니아면 이것들 얻겠다고 유적 근처 주민들까지 협박하고 죽였겠냐. 일단 감정부터 하고 챙겨라."

"시간없어. 일단 넣어두고 돌아가서 확인하면 돼."

"그냥 보물이 아니라 고대 유물인데 감정도 제대로 안 하면─"

시간이 없어 급하게 케이스에 유물들을 쓸어넣으려는 제자의 모습에 레이븐은 쯧쯧 혀를 차다 금고의 안쪽에 박혀있던 한 보석을 본 순간 얼굴이 굳었다. 용암을 담은듯한 붉은 보석. 그러나 실제로 그 안에는 용암이 차라리 깜찍해보일 정도로 불길한 기류가 천천히, 때를 기다리듯이 일렁였다.

그 보석에 제자가 손을 뻗고 있다.

퍼억! 느닷없이 날아든 레이븐의 돌격에 제자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몸을 겨우 가누며 왁 외쳤다.

"갑자기 무슨 짓─!?"

"크, 커헉!!"

"스……승?"

레이븐은 간발의 차로 제자를 보석에서 떨어뜨렸지만, 그 대신 보석에서 튀어나온 기류를 뒤집어써버렸다. 불 자체가 제멋대로 뿌리내려 혈관과 근육, 뼈를 가리지않고 불사르는듯한 고통에 그대로 쓰려져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에 제자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서 소리가 들린다!"

"침입자다! 당장 문을 열어!"

젠장. 바깥에서 사람이 몰려오는 소리에 제자는 급히 붉은 보석에 봉인을 건 뒤 케이스에 넣은 뒤 레이븐을 들쳐메고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인생 통틀어 손꼽히는 실패를 저지른 날이었다.

얼마 뒤 그는 보석에 걸려있던 것이 지독한 고대의 저주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의 생명에 가까운 이 저주는 대상의 몸에 퍼져 전신이 불타는듯한 고통을 주는데, 단순히 고문용이 아니라 진짜로 생명이 연소되기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점이 그를 미치게 했다.

"잠시만 기다려. 금방 저주를 풀 수 있는 비숍을 찾아 데려올테니까─"

"필요, 없다."

"뭐?"

"내 둥지에, 외지인따위 못 들여."

"그게 뭔 소리야?! 비숍의 도움이 없으면 죽는다고!"

"차라리…… 죽고 만다."

"인간아!! 이 지경까지 됐으면서 그딴 소릴 지껄일 군번이야?!"

그리고 레이븐은 죽어가면서도 그 특유의 인간불신 성향을 놓지 않았다. 저주를 풀려면 일류 비숍의 도움이 필요한데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끝까지 둥지에 외지인을 들이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제자는 비숍을 찾아내 해주 마법을 베껴와야했다. 원래부터 뛰어났던 통찰력은 간절한 마음에 힘입어 그 날부터 타인의 스킬마저 베끼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런 천신만고 끝에 제자는 스승의 저주를 푸는데 성공했으나…… 저주가 걸린 초기 시점의 대응 실패와 아무리 빨라도 해주 마법을 배워오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소요된 결과, 저주는 풀렸지만 레이븐의 생명력은 거의 다 타버린 뒤였다.

"이게…… 뭐냐고."

"됐다. 이제 안 아프네."

"되긴 뭐가 돼!! 이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네가 이 꼴 났으면 나라고 멀쩡했을 것 같냐."

스승의 말에 제자는 입을 다물었지만, 눈물을 참진 못했다.

이후 제자는 수련도 모두 그만두고 둥지에서 스승의 수발을 들었다. 더이상 몸이 불타는 고통에 시달리진 않지만, 생명력이 대부분 연소된 결과 급격히 쇠약해져 침대에서 일어나 움직이기도 버거워했기 때문이다. 정작 레이븐은 본인 몸상태보다 앞으로 삼시세끼 고기 구경을 포기해야한다는 사실에 더 좌절해 제자를 환장하게 했지만.

물론 행동이 가볍다고 해서 그의 속내까지 가벼운가 한다면─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 슬슬 얼마 안 남았나.'

저주에 시달린 이후 그것에서 풀려났음에도 그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원래부터 불규칙적인 생활패턴을 가졌지만 그 일로 인해 그는 잠에서도 몸이 불타는 악몽을 종종 꾸었고, 새벽에 식은땀 범벅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제자놈에겐 하도 안 움직여서 잠자리가 자주 더러워진다고 얼버무렸지만…….

그런데 오늘은 어언 일인지 상쾌한 기분으로 눈이 떠졌다. 제 몸에 달려있음에도 축축 처지던 팔다리엔 어째선지 힘이 잘 들어갔고, 정신도 유독 맑았다.

'미련한 놈.'

침대 옆에 작은 소파까지 끌고 와 자고있는 제자놈을 보며 레이븐은 혀를 찼다. 그가 저주에 걸린 게 완전히 제 탓이라 여기며 어떻게든 몸에 좋다는 것들을 찾아와 먹이려드는 제자놈의 모습은 감격스럽긴 했지만, 제자를 지키려고 한 건 어디까지나 레이븐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조용히 내려와 드레스룸에 들어갔다. 비숍을 찾느니 뭐니 하며 한동안 집안일도 안 하더니 제 간호를 시작하며 옷정리도 빠릿하게 다 해놨다. 일하러 갈 때 그가 입는 망토와 페르소나 역시 깔끔히 손질되어 있어 망설임없이 걸쳤고, 화장대에 앉아 제 얼굴에 잔뜩 맺힌 죽음의 그늘들을 숙련된 화장기술로 덮은 뒤 보석으로 치장된 케인을 들었다.

"어…… 스, 승? 잠깐 어디 간 거야?!"

"이쪽이다 제자야."

잠에서 깨 침대가 비어있는 것에 당황하던 제자는 스승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제 눈을 의심했다. 하루하루 생기가 마르는 것이 보이던 스승이 언제 그랬냐는듯 멋드러지게 차려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거 꿈인가?

"마침 잘 일어났구나. 오랜만에 이 스승이 여행을 가려하니 배웅하거라."

"여행……? 어디로?"

"먼 곳. 그리고 꽤 오래 떨어져있게 될 거다."

"나도 같이 가!"

"안 돼. 넌 나중에 와."

대신 내가 먼저 가서 명당을 알아보마.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이 진담인지 꿈인지 구분이 힘들었다.

"갑자기, 무슨 여행이야. 몸도 안 좋으면서……!"

"그냥 가게 됐다. 나도 별로 가고싶진 않은데, 때가 되서 말이지."

"안 가면 안 돼?"

"가야 해. 유감스럽게도 이번 여행 일정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언젠가 가야하는 건데, 그게 오늘이 되었을 뿐이야. 이게 꿈인지 생신지 혼란스러워하던 제자는 스승이 말하는 게 뭔지 서서히 이해하며 잠에서 깼다. 잠깐만, 잠깐, 안돼, 안돼!

"가지 마 레이븐─!!"

"스승님이라 불러 임마. 사내새끼가 그 정도로 컸으면서 매달리지 말라고."

"스승님 가지 마! 내가 더 노력해서 어떻게든 좋아지게 할 테니까……!"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처음 그를 만났던 날처럼 까마귀 날개같은 망토를 붙잡는 제자의 모습에 레이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정말 어른이나 다름없는데 왜 이리 애같을까. 왜 이리 걱정만 될까.

"울지마라 제자야. 내가 가기전에 마지막으로 볼 얼굴이 네 우는 모습이여야 하냐?"

"큽……."

"…… 그래. 많이 힘들겠지. 하지만 기왕이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너의 얼굴은 웃는 쪽이 좋아서 한 번 부탁해봤다."

제자는 필사적으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보려 했지만, 수없이 웃음을 그려냈던 얼굴은 이 순간만은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레이븐은 그런 제자를 물끄러미 보다 쓰고 있던 페르소나를 벗어 제자의 머리에 푹 눌러씌웠다.

"무슨……!"

"제자야. 너는 내가 손에 넣었던 수많은 보석 중에서 가장 멋진 보석이야."

페르소나를 벗어 어떻게든 레이븐을 보려던 제자는 그 말에 손을 멈췄다.

"네가 나의 기술을 빠르게 익히고, 남들이 못하는 걸 멋드러지게 성공시키는 걸 보며 기쁜 한 편 아쉬웠단다. 이렇게나 뛰어나고 잘난 제자[보석]인데 하필 스승이 괴도라서 남들에게 이런 재주들을 대놓고 뽐내지 못하다니."

"난 그런 거,"

"네가 나와는 달리 태양 아래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넌 내 뒤를 이어 괴도가 되겠다 하니, 너의 빛나는 재능과 미래를 내가 망쳐버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

그럴리가 없잖아! 나는 당신의 제자인 걸 후회한 적도, 당신을 원망한 적도 없어! 대마법사나 기사따위보다, 당신이 내 스승인 게 가장 자랑스럽다고!!

당신의 제자가 된 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 네 선택이 그러하니 내가 더 뭐라할 건 없지만, 노파심에 하나만 말하마."

"뭔, 데."

"앞으로 있을 너의 삶에, 빛나는 보석[사람]들을 채우거라."

태양[만인]앞에 당당히 내보일 수 있고, 어디서든 함께하는 것만으로 네 삶을 풍요롭게 해줄 이들로 너의 인생을 채운다면 그 인생은 어떤 보물보다 값질테니.

너 하나만으로 내 삶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추억과 감정들로 가득 찼었단다. 그러니 너는 그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얻기를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까마귀는 길고 긴 여행을 떠났다.

========== 작품 후기 ==========

***

괴도의 제자는 몇 달 간의 휴식 끝에 한 명의 괴도로서 활동을 개시했다. 어느 졸부 집안의 보물고를 완전히 털어버리는 걸 시작으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수많은 탐관오리들의 재산을 훔쳤다. 괴도 레이븐과 비슷하면서도 더 화려하고 신출귀몰하게 빠져나가는 마치 유령[Phantom]과도 같은 그 행적에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를 팬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괴도는 사람들이 붙인 팬텀이란 별명이 마음에 들어 그대로 사용했고, 그렇게 그는 괴도 팬텀이 되었다.

수많은 보물을 훔치며 한창 이름을 날리던 그의 귀에 어떤 소문이 들려온 건 그 무렵이었다. 에레브엔 스카이아란 보물이 있다. 여제는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여제가 사는 섬이면 당연히 보안도 굉장할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실력도 시험할 겸 팬텀은 에레브로 향했다.

"당신이 괴도 팬텀……?"

그리고 그는, 다른 의미로 하늘에 묶인 보석과 만났다.

아리아 여제와 맞닥뜨려 물러난 이후, 팬텀은 몇 번이나 에레브에 다시 찾아가며 여러 정보들을 모았다.

스카이아에 대한 소문은 아리아 여제가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가짜에 불과했고, 스카이아란 보석 자체는 실존하나 평범한 보석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까지 알았을 때 팬텀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에레브에 찾아가는 건 멈추지 않았다.

"또 온 건가요 팬텀."

"내가 보고싶어서 마중나온 건가?"

"아무리 찾아와도, 에레브의 보물은 넘겨주지 않을 거에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할 일인데."

스카이아는 평범한 보석이었지만, 다른 보석과 계속 만나게 해줄 매개체였기에 그는 포기하기 않고 계속 하늘섬을 찾았다.

"너, 황제님 호위지?"

"그렇다."

"그럼 그녀를 잘 지켜줘."

그 보석의 옆에 있던 것을 신경쓰지 못한 것이 그의 불찰. 레이븐을 잃게 된 것과 함께 손꼽히는 최악의 실패였다.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짊어지고도 자신이 주는 장미꽃 한 송이에 미소를 짓던 여인은, 그 날 이후 허무하게 스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잃은 것이 또다른 만남의 계기가 되었다.

"소개할게. 이쪽은 메이플 월드의 이름높은 괴도 팬텀이야. 오늘부로 우리의 동료가 됐어."

"아~ 그 신출귀몰하다는 괴도? 실물이 이렇게 생겼었어? 의외로 잘 생겼네."

"실력은 확실하겠지?"

"프리드가 보고 뽑았으니 확실할 거다."

"…… 좀도둑이 동료라니."

그 중엔 그리 달갑지 않은 만남도 있었지만.

군단장과 그들을 부리는 검은 마법사에게 반발해 들고 일어난 이들 - 영웅. 그녀의 마지막 뜻에 따라, 그리고 그녀를 죽인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는 밤의 장막에서 나와 사람들 앞에 섰다.

영웅이 되는 괴도라…… 나쁘지 않잖아?

사람들을, 세상을 지키는 일은 자신과는 그리 맞지않은 것 같았지만 도와줘서, 구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이들을 보며 가슴 한 켠에서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 그는 스승이 그토록 원했던 - 모두[태양]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칭송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음, 역시 나쁘지 않아.

물론 그런 나날이 순탄했냐하면 그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쓰러뜨려야 하는 이를 자신들의 힘이 부족해 봉인으로 대신하고, 그가 마지막으로 쓴 저주에 당해 8백 년을 타임슬립 당하는 건 결코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미래에서도, 자신들이 해야할 일은 변치 않았으니까.

뭣보다, 그 옛날보단 평화롭고.

"아…… 팬텀 씨?"

[일어났네?]

프리드를 무척 닮은 동그란 얼굴에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를 뻔한 팬텀은 눈앞의 소년이 그로 착각당하는 걸 진저리나게 싫어하는 걸 떠올리며 그의 이름을 삼켰다.

"하암, 미안. 날이 좋아서 기다리다 깜빡 잠들었네."

"괜찮아요. 온 지 얼마 안됐거든요."

[그런데 무슨 꿈을 꿨어? 눈가에 눈물이 맺히던데.]

어린 오닉스 드래곤의 말에 그는 눈가에 어린 물기를 닦아냈다. 간만에 옛날 꿈을 꿨더니 감정이 북받쳤었나 보네.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꿈을 꿨어."

"그리운 사람……?"

[혹시 선대 여제님?]

"미르!"

"아리아는 아니고, 다른 사람이야."

"누구…… 요?"

조심스럽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소년의 모습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저 오닉스 드래곤의 마스터가 맞는 걸 실감했다. 뭐, 그나마 예의는 있어서 다행이네.

"나한테 아버지같았던 사람."

"네?"

[그게 누군데?]

"비밀이야."

여자 여럿 홀릴 미소를 지으며 쉿, 제스처를 취하는 그의 모습에 미르는 도끼눈을 떴고 에반은 다소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자였다면 효과가 좋았겠지만 둘은 남자/수컷이었다.

"수다는 이쯤하고, 잠도 다 깼으니 이제 공부 시작하면 되지?"

"아, 네."

[근데 진짜 신기하네. 당신 도적이라면서 4차 전직 마법도 쓸 줄 알다니.]

"그야 난 보통 도적이 아니니까."

에반과 미르가 팬텀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둘은 리엔에서 2년간 유학했지만 실전적인 운용엔 한계가 있어 영웅들에게 가르침을 얻으려 했는데, 때마침 루미너스는 볼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워버려 어쩔까 고민하던 중 아란에게서 팬텀한테 가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식을 전해받은 팬텀은 여유도 있겠다 간단히 둘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원소 마법만 따지면 내가 샌님보다 나을 걸? 그놈은 빛 마법 특화니까."

"우와~!"

"아, 물론 실전적인 운용만이야. 이론이나 연구는 내 체질이 아니라서."

"그것만으로도 대단해요!"

[말이 도적이지 못하는 게 없네.]

당연한 말을. 어릴 때부터 레이븐에게서 배운 수많은 기술들을 떠올린 팬텀은 케인을 들었다.

"그래서 내 수업방식은 이것저것 설명하기보다 직접 써가면서 감각을 익히는 거야. 너도 지팡이 들어."

"네, 네!"

"너의 마스터 실력 확인해야 하니까 넌 돕지말고 뒤로 가 있고."

[오케이~]

그렇게 미르는 뒤로 빠졌고, 팬텀과 에반의 지팡이 끝에 수많은 마법이 꽃피었다.

하얀 구름 몇 점이 떠다니는 한낮, 까마귀 부리같은 페르소나를 잠시 벗어 드러난 화려한 금발이 햇빛 아래에 반짝였다.

***

팬텀의 과거사 외전... 인데 어째 실제 주인공은 레이븐에 더 가깝네요.

차원의 도서관에서 팬텀이 루미너스를 절망하게 한 사실들을 바로 아니라고 답할 수 있는 이유. 본인이 같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고, 그에 대한 답을 스승에게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레이븐은 실력에 비해 단명했습니다. 힘이나 능력을 따지면 팬텀의 하위호환이지만 그래도 현 시점의 전직관이나 기사단장따위 웃으면서 바를 수 있는 강자였는데 상당히 허무하게 갔죠. 덧붙여 저 사건으로 팬텀 인생 최초의 스틸 스킬은 포인트 맥스 찍은 디스펠.

죽어가면서까지 인간불신 성향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레이븐의 과거는 딱히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본편이나 다른 외전에서 그게 나올 일은 없지만요.

이번 외전을 쓰는 김에 말하자면... 검호에선 절대로, 절대로 '이 악녀가!','기생오라비!'따위의 장면같은 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오르카를 죽이려는 팬텀을 에반과 제논(영웅즈는 절대 안 말림)이 말린다던가, 스우를 상대할 때 혹시 모르니 고기방패로 쓰기 위해 끌고가려는 장면같은 건 나올 수 있어도 그 그지같은(뿌득!) 장면은 제 손으로 절대 쓰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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