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205화 (205/208)

<-- 앎의 고통 -->  존재조차 몰랐던 세피로트의 난입과 그가 윌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지는 광경에 알파와 베타는 당황했지만,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륀느는 이제 더이상 윌의 처리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어짐을 느끼고 고요한 얼굴로 둘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뗐다.

"방금 그 사람은……?"

"…… 뭐였지?"

"그 자는 진짜 메이플 월드에서 온 이입니다."

"여신님?"

그래도 마지막에 온 이가 그라서 다행이다. 붉은 검의 전사였다면 윌을 상대하는데 다소 난항을 겪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권사는 완전히 놈의 천적이라 봐도 무방하니까.

"현존하는 필멸자들 중에서 손꼽히는 강자이니, 걱정할 필요 없답니다."

"그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륀느는 지금은 사라진 시간대들을 희미하게 기억했다. 그녀가 다른 무엇도 아닌 '시간'의 초월자이기에, 그리고 세계를 되감았던 이가 그녀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의 오버시어였기에 다른 초월자들은 세계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걸 인식조차 못했지만 그녀만은 약간이나마 기억이 남은 것이다.

물론 지금의 세피로트는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과 다소 달랐지만, 그동안 여러 일들을 겪은 걸로 보이니.

"그나저나,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군요."

초월자는 평생을 살며 같은 영역을 관장하는 초월자를 만날 일이 사실상 없다. 하나의 영역에 또다른 초월자가 생기는 경우는 기존의 초월자가 사라질 때 뿐이니까. 거울세계라는 감옥이 만들어준 우연이지만 그럼에도 륀느는 순수하게 기뻐하며 둘에게 축복을 내렸다.

"이건……?"

"저의 축복을 받았으니 부정한 자는 사라지고, 두 분은 다시 온전한 신의 아이로 돌아왔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완전한 초월자로 각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거울 세계가 남아있는 한 두 분은 진정한 초월자로 각성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가 초월자로 각성하면 거울 세계에서 나갈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순서가 잘못되었어요. 이 거울 세계는 검은 마법사가 제 힘을 이용해서 만든 감옥. 이 감옥이 유지되는 한 저는 계속 살아있게 되지요."

한 세계에 두 명의 초월자는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당신이 소멸돼야만 하는 겁니까?!"

"그건 싫어요!"

"…… 소멸은 이미 결정된 일이에요."

이 세상의 시간의 근원된 이가 직접 그 현신하여 그녀의 끝을 정해주었지만, 그 사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동안 여신으로 추앙받으며 초월자로서 필멸자는 상상도 못할 많은 것들을 보았고, 마지막에 와선 아이들을 눈앞에서 볼 기회까지 주셨으니 죽기 전에 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셨다.

"저는 슬프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도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곧……."

후두둑. 질척한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알파와 베타는 헛숨을 들이켰다.

"커흐으…… 무슨, 크, 어떻게 사람이 차원을."

거대한 공성추에 직격한 것 마냥 으스러진 한쪽 팔과 다리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기괴하게 꺾여 부러졌고, 등에 난 8개의 거미 다리가 박살나거나 뽑힌 윌이 피를 잔뜩 흘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꼴이 너무 처참해 그를 쓰러뜨리러 왔던 둘조차 순간 동정심이 들었을 정도다.

이어서 허공에 검은 틈새가 쩍 벌어지더니 세피로트의 상반신이 튀어나왔다.

"질리지도 않냐? 그냥 포기하지?"

"미, 친."

"아 여신님, 좀 있으면 끝나니까 그 동안 할 얘기 다 해둬."

이놈이 학자처럼 생겨선 의외로 근성있네. 이런 놈 확실하게 죽이는 것도 노동이라니까. 윌을 다시 거울 차원으로 끌고 가는 세피로트의 모습에 알파와 베타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진짜 저놈 뭐지. 륀느는 좀 변했지만 여전히 해야할 일은 착실하게 잘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윌을 죽이면 제 힘에 대한 봉인도 풀릴 겁니다. 그 때 거울 세계를 없애면 제 힘은 둘에게 모두 갈테니, 그 힘으로 그와 함께 메이플 월드에 돌아가…… 검은 마법사에게서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여신님……!"

"겨우 만났는데 이렇게 가지 말아주세요!"

곤란하네요. 둘의 애원에 마음이 약해지려 해 륀느는 눈을 감았다.

철퍽, 젖은 발소리가 떨어졌다.

"거 더럽게 질기네. 벌써부터 죽여도 되나 고민했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었구만."

"끝났나보군요."

"예에. 확실하게 끝냈습니다."

녹옥의 염주를 쥔 양 손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는 건 물론, 옷 여기저기에 붉은 흔적이 잔뜩 묻은 세피로트는 꽤 찝찝한 표정으로 두르고 있던 붉은 머플러를 수건삼아 피가 묻은 손과 얼굴을 닦아냈다. 옷이야 자동 청결기능으로 알아서 깨끗해지니까 어떻게 더러워져도 상관없다.

"차원 이동 해봤자 소용 없는 거 알면서 5번 넘게 도망치더라고요. 솔직히 쫓아가서 잡는 게 더 귀찮았습니다."

"저, 정말로 윌을 죽인 거야? 시체는?"

"그건 안 가져왔는데."

"그럼 정말로 죽었을 지 어떻게─"

"시체라고 할 만한 걸 안 남겼거든."

""…….""

군단장은 강할뿐만 아니라 생명력도 대단히 뛰어나다. 스스로의 시간대에서 죽은 줄 알고 놓친 군단장때문에 몇 번이나 피를 보며 이를 뼈저리게 체감했던 그는 검은 마법사와 마지막 싸움을 할 즈음 놈들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았었고, 그래서 윌을 죽이는데 일부러 손속을 더 과하게 썼다. 문자 그대로 뼈와 살이 으스러져 피곤죽이 될 때까지 패서 죽여버리고, 그래도 혹시 몰라 갈기갈기 찢어 허차원에 내다버리고 온 것이다. 마법사라 아카이럼처럼 사역마같은 것에 혼을 옮겨 부활하면 곤란하니까.

자세한 과정은 몰라도 좀 전의 윌의 꼴을 떠올려봤을 때 그가 절대 곱게 가지 못했음을 직감한 알파와 베타는 더이상 저 부분을 묻지 않기로 했다.

"괜찮습니까 여신님?"

"예. 이제 힘이 돌아오고 있군요."

"그것 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다행이죠. 드디어 새로운 시간의 초월자가 탄생하니까요."

둘의 시선이 알파와 베타에게 향했다. 이제 거울 세계와 륀느를 없애 진정한 초월자로 각성하라는 무언의 종용에 신의 아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린 겨우 만난 여신을, 비록 감옥이었다지만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를 없애고싶지 않은데.

"당신 뭐야?"

"어?"

"윌은 우리가 쓰러뜨릴려고 했어."

"우리가 해야할 복수를 왜 당신이 하냐고!"

"어, 음. 그건 정말 미안해."

비슷한 경우를 이미 봤었기에 세피로트는 둘의 분노를 이해하고 바로 고개숙여 사과했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그놈을 처치하려 했던 건 아니었어. 그런데 놈이 하는 짓거리를 보다보니 이대로 놔두면 나중에 굉장히 귀찮은 적이 될 거라고 판단했고, 때마침 여신님께서 도와달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나섰던 거야."

"여신님이?"

"그게 정말이에요?"

둘의 시선이 륀느에게 향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의 힘을 못 믿은 건 아니에요. 분명 둘이라면 윌을 이길 수 있었겠죠. 하지만……."

"도망치는 걸 막진 못했을 거야."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야 그놈, 책략가 타입이었는 걸. 군단장들 중에서 그런 타입은 진짜 죽는 걸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죽은 게 아니야. 심지어 죽어서도 움직이는 놈이 있다고."

스우와 아카이럼, 힐라같은 부류는 그래서 더 짜증난다. 힘도 힘이지만 머리를 기똥차게 굴려서 일을 벌이니까. 그래서 그놈들은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뒤탈이 매우 많이 생긴다.

"여신님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뭣보다 그놈들과 여러 번 싸워본 내 경험으로 봤을 때 그 군단장을 놓쳐선 안된다고 판단해서 끼어든 거야. 너희가 해야할 복수의 기회를 뺏아간 건 정말 미안하지만, 군단장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막아야하는 내 입장 상 손 놓고 있을 수 없었거든. 방금 놓쳤으면 언제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고."

"당신……."

"당신은 진짜 메이플 월드에서 왔다고 들었어. 그리고 군단장과 적대시하는 입장에 있는 것 같고. 어떻게 거울 세계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에 대해 설명해줘."

베타의 말에 그는 잠깐 고민하다 팔짱을 꼈다. 어차피 얘들 데리고 나가야하는데 미리 설명해두는 게 좋겠지.

"내 전직명은 세피로트, 길면 롯뜨라고 불러도 좋아. 이미 들었다시피 진짜 메이플 월드에서 왔고, 이곳에 온 이유는 군단장 윌의 조사때문이었어."

"조사……?"

"나는 검은 마법사을 무찌르기 위한 조직에 소속되어 있어. 군단장은 검은 마법사의 수족이니까 당연히 모두 없애야 하는 놈들인데, 본격적으로 소탕하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하려고 여길 찾아온 거야."

"어떻게?"

"난 차원을 이동하는 스킬을 쓸 줄 알거든. 자세한 원리는 나도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서 존재는 알지만 그 외의 정보는 거의 없는 윌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아 거울 세계까지 왔지."

그러고보니 조금 전에 그에게서 어찌어찌 도망쳐나왔던 윌이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세피로트의 말에 알파는 다른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잠깐 그럼 언제부터 거울 세계에 있었던 거야?! 윌이 하는 걸 보고 놓쳐선 안된다고 결론내렸다는 건, 하루 이틀 본 건 아니란 뜻이잖아?"

"냐하, 그건 노 코멘트."

"이봐!!"

일주일 가까이 둘과 윌 주변을 오갔다는 걸 들으면 분명 화내겠지. 세피로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신전에도 들어왔었어?"

"글쎄. 어땠을 거 같아?"

"피엥은 우리가 각성하면서 신전이 메이플 월드와 거울 세계 중간으로 이동되어 우리와 신관들 외엔 들어올 수 없다고 했는데……."

혼자 힘만으로 차원을 자유로이 이동하는 이가 신전에 가는 게 불가능 했을까? 베타의 물음에 세피로트는 여전히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세상엔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적지 않다.

"질문은 이걸로 끝?"

"크…… 하나만 더, 당신이 소속되어 있다는 검은 마법사를 무찌르기 위한 조직은 뭐야?"

"말 그대로 검은 마법사가 하려는 일을 저지하고, 놈을 없애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야. 명칭은 대외적으로 '용의 후예'."

주로 메이플 월드에서 활동하지만 구성원들은 메이플 월드 외에 다른 차원의 이들도 많고. 이것저것 준비도 많이 해서 곧 본격적으로 군단장들부터 소탕해갈 계획이지. 방금 죽인 윌은 어디까지나 시작이야.

"너희도 알다시피 검은 마법사는─ 아, 이건 아직 모르겠네. 그놈의 목적은 세계를 새로 창조하는 거거든."

"그게 나쁜 거야?"

"세계를 새로 창조한다는 건, 기존에 있는 세계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뭐……!?"

"여신님 말대로야. 그놈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지금 이 세계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게 돼."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가볍게 울리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내가 받은 임무는 윌의 조사였지만, 너희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있었어."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고?"

"시간의 초월자가 한 편이 되어준다면 든든하니까. 거기다 아까 너희도 윌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했지? 윌이 너희의 원수인 건 맞지만, 그놈에게 너희를 가둬 각성을 막으라고 지시한 건 검은 마법사야."

우리와 협력해주겠어? 조금 전까지 헤실헤실 웃던 그는 진지한 얼굴로 제안했다.

처음 보는데다 어딘가 꺼림칙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은 이. 검은 마법사를 적대시한다는 건 조금 전 윌을 죽인 행위만으로 충분히 증명되었고, 뭣보다 여신님이 그에 대해 알고 믿는듯하니…….

"좋아."

"협력할게."

"오, 정말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해!"

세피로트는 활짝 웃으며 양 손으로 하나씩 알파, 베타와 악수를 주고받았다.

"이야~ 이번엔 이데아한테 쪼인트 안 까이겠네. 데미안도 너네가 오면 무진장 좋아하겠어."

"그건 또 누구야?"

"내가 속한 조직의 사람들. 나중에 만나면 그 때 소개해줄게."

데미안은 아카이럼이 보존하고 있는 어머니의 시신을 빼돌리는 것에 대해 이리저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솔직히 빼내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은데 보존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의 힘을 다룰 줄 아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시간 마법은 프리드나 가능한 대 마법이고, 그를 포함한 트립퍼들의 시간의 힘은 보존과 거리가 멀었다. 파픈스타가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래서 루디브리엄 최하층에서 발견되는 시간의 조각을 연구해보고 있던데 알파, 베타의 합류로 이 고민이 싹 해결되었다.

"이야기는 모두 끝난 건가요?"

"아…… 아아."

"시간이 되었습니다."

거울 세계와 함께 륀느를 소멸시키고 둘이 시간의 초월자로 각성해야하는 때가. 대화로 시간을 끌었지만 그게 언제까지고 계속될 리 없었다.

"여신님, 저희는─"

"저희는 이곳과 여신님을……!"

"아참, 내쪽에서 너희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어."

용건이 끝난 것 같았던 세피로트가 그들의 말을 끊었다.

"뭐, 뭔데?"

"임무는 끝났잖아."

"어엉. 그렇긴한데 이건 임무와 별개로 내 개인적인 부탁이거든."

정확히는 내 부탁이 아니라 생명의 오버시어가 에레브로 가기 전에 그에게 내린 지시였다. 약속대로 자기가 하는 일을 도우라 했지. 메이플 월드로 돌아가선 말할 타이밍을 찾기 힘드니까 여기서 말해야겠다.

"너희…… 세계를 위해 검은 마법사에게 죽어줄 수 있어?"

"어?"

"뭐?"

그 뜬금없으면서 충격적인 말에 신의 아이들은 당황했고, 륀느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세피로트 앞에 뛰어가 그의 싸대기를 짜악─! 날렸다.

***

프리드가 세계의 온갖 정보들이 모이는 곳에 가기 위해 차원 마법을 연구하는 과정은 시간 관계상 빨리 넘기기로 했다. 이미 아마란스에게 대략적으로 들었기도 했고, 그가 수명까지 소모해가며 연구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기 거북하다는 영웅들의 의견때문도 컸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차원 마법을 연구하는 과정을 한 번에 다 넘기진 못했다. 구체적으로 몇 년을 연구했는지 모르니까.

「쿨럭……!」

「프리드! 아아, 또 무리해버리면 어떡해요?!」

「괜, 찮아. 이번 걸로, 확실히 감을 잡았어.」

마력은 물론 생명력까지 소모한 여파로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는 프리드의 모습에 아마란스는 급히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자체 재생력을 북돋는 통상의 치유 마법은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라 땅의 생명력을 뽑아내 전해주는 형태의 회복 마법을 사용하는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을 표하며 프리드는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 수명이 길어도 이렇게 막 쓰면……!」

「반대야 아마란스. 나는 내 수명이 긴 걸 알기때문에 이참에 마구 쓰기로 한 거야.」

「…… 뭐라고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않고 조금 전에 잡았던 감을 되새기며 빠르게 마법진과 술식을 고쳤다.

「잠깐 프리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지. 거기 술식을 더 보강해야하니까 잠깐 비켜줘.」

「아니 수명이 창고에 쌓아두는 비품같은 건 줄 알아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아마란스.」

한참 마법진을 고치던 프리드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내가 앞으로 몇 년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못해도 수 백년은 살겠죠. 3백은 기본에, 그동안 더 실력을 갈고닦으면 4백 이상은…….」

「그래. 시간 마법을 무리하게 익혀서 수명이 좀 깎이긴 했지만, 대충 그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오래 살아서 뭐하지?

「그야……!」

「마법을 연구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 세계의 진리를 파헤치고, 아무도 닿지 못한 미답지를 개척해내가는 건 수 백년의 시간을 살아가는데 좋은 활력소가 되어줄 거야. 그런데 말이야, 그건 '마법사로서의 행복'이지 '사람으로서의 행복'이 아니잖아.」

아마란스는 뭐라 말하려던 걸 멈추고 프리드를 마주보았다. 끝모를 지혜로 가득차 있던 푸른 눈에는 어째선지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걸 잃어왔어. 가족, 동료이자 친구들, 날 믿어준 이들까지. 하나하나 잃을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텼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 날 지탱해주는 이들까지 잃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거든. 프리드는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아직 중년도 되지않은 이의 입에 걸리기엔 너무 많은 고통이 베어들어 있었다.

「나의 긴 수명이 그들과 함께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버릴 수 있어.」

「프리드…….」

「이제 혼자 남겨지는 건 싫어. 이걸로 가족들과 같은 시간을 살 수 있게 됐으니까 오히려 좋은 걸? 심지어 사람들에게 위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위해 희생을 택해 잊혀져버린 동료를 찾는 일이야. 중요한 일에 쓰는 거니까 일석이조라고.」

「사자성어를 그런 곳에 쓰지 마요!!」

하하! 하지만 나한테는 딱맞는 말인 걸. 사람 가슴졸이게 하지 말라구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이유를 대강 납득한 페어리 퀸의 모습에 프리드는 쓴웃음을 지우고 진짜 미소를 띄웠다.

"생물이라면 나이를 얼마나 먹어도 살려고 발버둥치는게 당연한데…… 저놈은 죽는 것보다 혼자 남겨지는 게 더 두려웠던 모양이네."

"다 죽어가면서도 삶에 매달리는 것이 생물의 본능이라면, 누군가와 함께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게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영웅들이 그런 그를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동안, 테스와 데몬은 짧은 감상을 남겼다.

페이지가 넘어가며 풍경이 바뀌었다. 이후 프리드는 몇 차례의 실험을 더 거치며 차원의 거울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해 마침내 차원의 도서관에 도착했다.

「여긴……?」

「안녕하십니까. 간만에 손님이 왔군요.」

「당신은, 아니 여기가 세상 모든 정보가 모인다는 비경이 맞습니까?」

「세간에선 그렇게 전해지고 있긴 합니다.」

[진짜 저 사람이 본 책도 그대로 나오려나?]

"그렇다면 그 잊혀진 영웅에 대한 것도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나인하트는 외알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분명 그들은 프리드가 보았던 모든 책을 받아 봤는데 이상하게도 잊혀진 영웅에 대한 책은 없었다. 남은 책중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째…….

「어떤 책을 찾으십니까?」

「한 사람에 대한 책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해주시겠습니까.」

「…… 이름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름 대신 불렸던 호칭같은 건─」

「모릅니다. 제가 확신하는 건 그의 존재뿐이라, 그에 대해 알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탈레스 관장은 꽤 난감한 얼굴로 우리에게 했던 말을 프리드에게 똑같이 해줬다. 이름없이 특정한 사람의 책을 찾기 위해선 검색 필터들을 많이 써야 하는데, 이게 하나도 없으면 찾기 매우 곤란하다고. 차이점이라면 프리드는 검색 필터에 대해 한 차례 자세한 설명을 들은 뒤 잠시 고민하다 바로 해결책을 내놓았다는 거다.

「그럼 사건을 기준으로 찾아주시죠.」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빛의 초월자 검은 마법사가 시간의 신전에서 봉인된 그 날, 그곳에서 검은 마법사나 군단장과 싸웠던 사람들의 책 모두.」

「흠,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건 에반이 생각해낸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맞췄네 마스터! 그, 그러게. 조건으로 범위를 줄이고 목록이 나오자 종달새 리타는 그 작은 몸으로 용케 책을 '일곱 권' 가져왔다.

「이중에 손님께서 원하는 책이 있기를.」

「저도 그러길 바래요. 일단 하나씩 읽어봐야…… 아 이건 메르세데스 책인가?」

「인물책의 경우 책표지에 그 사람을 상징하는 것들이 그려집니다.」

한 쌍의 듀얼 보우건과 싱그러운 식물들로 장식된 표지의 책을 들어본 프리드는 꽤나 알기쉽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 카드와 보석이 그려진 건 팬텀이고, 설산 배경에 얼음을 깨는 폴암은 아란인가.

「지팡이를 보니 이건 루미너스같은데 왜 검은색이 있는 거지.」

흑백으로 나누어진 루미너스의 책표지를 보고 의아해하던 프리드는 목차를 쓱 흝어본 뒤 책을 펼쳤다. 만약 루미너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만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프리드의 주변은 과거 오로라 대신전에 배치되어 있던 빛나는 새하얀 광물들로 밝혀진, 허나 말 그대로 신전에 가까웠던 그곳과 달리 지하를 통째로 파내 만든 마법사들의 공방에 더 가까운 어딘가로 변했다.

『크으…….』

『정신이 드셨습니까?』

『……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분명,』

미르가 말했던 대로 프리드가 보고있는 루미너스의 책 내용이 극중극처럼 나왔다. 다만 선명한 정도, 요컨데 화질이 다소 열화되어 제대로 보려면 그냥 해당 책을 찾아 보는게 나을 정도였고 중간중간 대화소리도 지직거렸다.

『그 어둠의 힘은 검은 마법사와의 전투 때인가요?』

『정확히는 검은 마법사를 순간이었던 것 같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서…… 그나마 그때 그가 날 빼내려한 덕에 이 정도로 끝났을지도 몰라.』

이어진 빛으로 이루어진 영과 루미너스와의 대화를 끝까지 들은 프리드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그의 가설대로 루미너스는 검은 마법사의 봉인에 함께 봉인된게 맞았고, 그가 깨어난 건 정말, 정말 긴 시간이 지난 뒤라는 것. 그리고 깨어났음에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라는 것.

마지막으로, 차원의 도서관에 있는 책들에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 역시 기록되어 있다는 것까지.

「…… 위험한데 이거.」

「무엇이 말입니까.」

「이 책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던데, 그 내용대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글쎄요. 이곳에 모이는 이야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이기도 하고, 이미 일어난 것이기도 하니까요.」

프리드는 책을 든 채 상념에 잠겼다. 가능성이라 해도 미래는 미래. 시간의 초월자인 륀느 여신조차 미래를 보아도 여간해선 구체적으로 발설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이걸 이용해서 미래를 마구 보았다간…… 그 가능성이 현실로 확정되버릴 수도 있다.

긴 시간의 고민끝에 그는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보지말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먼 훗날 얼음속에서 깨어난 직후 동료들의 상황과 잊혀진 동료에 대한 것. 생각을 정리한 프리드는 동료들의 책 페이지를 신중히 넘겼다.

『이게 대체 누구지?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했나?』

『공교롭게도 제가 하고있는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요.』

물론 그럼에도 뜻밖의 사실들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아란!!』

『오랜만이야 메─ 으왓?!』

생각이상으로 괜찮은 것들도 있었다.

저주의 여파로 약해졌지만 어쨌든 사지 멀쩡하게 깨어나는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한 프리드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남은 건 2권의 책. 하나는 검호 씨의 것일테니 남은 하나가 잊혀진 동료의 책일텐데…….

「어느쪽이지?」

구름같은 문양이 그려진 오래된 고목빛 표지의 책은 그렇다치고, 다른 한 권은 마치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엉망진창이라 누가 일부러 훼손한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분명 인물책의 표지는 그 사람을 상징하는 것들이 그려져있다고 했는데 이건 어떤 문양도 없이 검붉은 색에 당장이라도 피를 흘릴 것같은 상처들만 가득했다.

남은 두 책을 두고 다른 이들도 말을 주고받았다.

"저거 남은 2권 중 하나 아닌가요?"

"그러게. 거기다 저 멀쩡해보이는 쪽은 본 기억이 없는데 왜 빠졌지?"

"차차 나오겠죠. 어느 쪽이든 프리드 님은 둘 다 볼듯하니 빠진 쪽의 내용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나인하트의 말대로 프리드는 둘 다 보기로 했으며, 두 책 중 그나마 멀쩡한 쪽을 먼저 보기로 했다.

고목빛 책이 펼쳐지자 한숨같은 연기가 쏟아지며 사방을 메웠다.

***

『이 밥버러지가! 똑바로 못 해?!』

『재, 죄송, 죄송합니다. 잘못했, 악!』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때리던 중년 남성은 씩씩거리며 휘두르던 지팡이를 짚으며 절뚝이는 다리를 끌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남성에게 맞던 아이는 고통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웅크린 채 겨우 숨을 쉬었다.

고목빛 머리에 보라색 눈. 갈비뼈가 살거죽 위로 드러날만큼 빼빼마른 아이는 힘겹게 고개만 돌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오늘도 굶겠구나. 온몸을 두들겨맞았음에도 드는 생각은 오늘 저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뿐이었다.

이런 건 늘 있는 일이니까.

[암만봐도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잊혀진 동료쪽 책인가보네.]

"그, 그러게."

"저 자의 과거는 썩 좋아보이지 않군요."

데몬의 말대로 아이가 남성에게 받는 대우는 노예와 하인 사이의 무언가였다. 몸이 불편한 남성의 수발을 들다 조금만 잘못하면 두들겨맞고, 하루에 한 끼는 굶는 게 일상인 나날. 정말 죽지않은게 용할 정도임에도 간신히 살아갈 수 있던 건 아이를 동정한 다른 주민들이 간간히 주는 미약한 온정 덕이었다.

그리고 중년 남성, 은퇴한 용병 역시 마냥 아이를 부려먹는 것도 아니었다.

『좀 더 쭉 뻗으라고! 체중을 실으면서 쭉!』

『이익!』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은퇴 용병은 아이가 죽을듯말듯하다 어찌어찌 계속 살아있는 걸 보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보는 입장도 그렇지만 당사자인 아이도 대체 뭔 생각으로 이러는가 궁금해했지만 그는 별다른 설명없이 강제로 그것들을 익히게 했다. 늘 그렇듯, 못하면 폭력을 휘두르며.

그렇게 시간이 지나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 원체 마르고 상태가 안 좋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안 됐었다 - 은퇴 용병에게 배운 싸움법으로 야생 동물등을 알아서 사냥해 먹은 덕에 어느정도 살이 붙어 그럭저럭 볼만해졌다.

"어……."

[뭔가, 낯이 익은데.]

"저 소년 설마……?"

그럼에도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젖살조차 없는 탓에 알아보기 더 쉬웠다. 다듬지못해 막 기른 고목빛 머리카락 사이로 우울하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과 나이에 비해 그럭저럭 단련된 몸, 저기서 좀 더 체구가 커지면 딱 그 사람이다.

어릴 적 상태가 원체 안 좋아 바로 알아보지 못한 에반을 포함한 몇몇 이들과 달리, 영웅들은 소년을 본 순간부터 싸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으며 윤곽이 어느정도 잡히자 저 소년이 누군지 바로 직감해버렸다.

그는 스스로를 '8백 년 전 최강의 무투가'라 자칭했었다지.

"…… 그래. 어째 묘하게 샌님을 잘 알더라."

"우리가 어떻게 싸우는지도 귀신같이 잘 알았지."

"그래서 그 때, 제대로 공격을 못 했었구나."

잊혀진 동료가 있었다는 걸 알게된 뒤 그들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과연 그 - 혹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을지 아니면 제물이 된 여파로 죽었을지 한참을 생각했었다.

만약 죽었다면 그건 안타까우면서 숭고한 희생이지만, 살아남았다면─ 그 누구에게 기억되지 못한 채 아직도 세상을 떠돌며 자신을 기억못하는 동료들을 보고있다면 결국 스스로가 내린 선택에 의해 그런 처지가 된 셈인데 그건 비참하다던가 안타깝다는 표현으론 부족할테니까.

그러나 진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가혹했다.

『어, 째서.』

소년이 어느 날 은퇴용병의 심부름으로 화전민 촌에서 잠시 나간 사이, 몬스터들이 그곳을 습격했다. 돌아왔을 때 소년이 본 것은 어려운 사정에도 틈틈히 자신을 챙겨주던 이들의 시신과 호감따위 없었지만 그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은퇴 용병의 상반신. 진정한 의미로 소년이 혼자가 되버린 날이었다.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소년은 그의 보호자였던 이가 그랬듯 용병이 되었다. 아는 게 그것뿐이었으니까. 거기다 악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수많은 전장을 구르고 다녔음에도 어떻게든 성인이 될 때까지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미래의 영웅답게 싹이 있었다고 해야할까.

「저 사람은?」

사내는 용병중에서도 나름 강한 축에 들긴 했지만 마땅한 목적도, 욕망도 없어 혼란스러운 세계의 흐름 속에서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던 중 어느 날 한 귀족에게 고용되었다. 프리드는 그 귀족을 언젠가 한 번 본 것 같아 그의 책을 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내를 호위역으로 고용했다 적대관계에 있던 귀족이 여행중이던 프리드를 저택에 초대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용주는 이를 훼방놓기 위해 사내를 부렸다. 훼방자체는 그렇다치더라도 사내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살특공에 가까웠을 그 명령을 사내는 아무렇지않게 받아들였다.

"어어……? 뭔 생각으로 저러는 겁니까?"

"저 때엔 가끔씩 저런 놈이 있었어. 유년기 시절 대충 봤잖아. 너무 고생해서 마땅한 꿈도, 희망도, 욕망도 없이 그냥 살아있어서 살기만 하는 부류 말이야."

설마 영웅이나 되는 사람이 저런 이일 줄은 몰랐지만. 테스의 말에 나인하트는 아무리 고용주의 명령이라도 저런 불합리한 지시마저 망설임없이 실행하는 사내의 모습에 기가 찬 얼굴이 되었다. 다른 영웅들도 그와 프리드의 만남이 설마 저런 입장에서 이루어질 줄은 예상못했기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의 특공은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아직 영웅은 아니지만 대마법사는 대마법사, 그도 노련한 용병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오닉스 드래곤의 왕과 계약한 프리드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여기선 딱히 원한살만한 일은 안 했는데.』

『대마법사라면서 뭘 모르는군. 누굴 죽이는데 원한같은 거창한 감정까지 필요하지 않아.』

『그럼 왜…….』

『실패했으니 돌아가지.』

모래가 푸석푸석 떨어지는 것처럼 건조하기 짝에없는, 한 편으로 저 당시 사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었다. 이후 고용주에게 돌아간 사내는 실패를 이유로 기사들에게 과격하게 제압당했다.

『이 무능한 것이! 겨우 이것도 제대로 못해!?』

『명령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지! 젠장, 놈이 눈치채고 오기 전에 처리해!』

토사구팽. 아니, 사냥에 성공하지 못한 개를 죽이는 거니 다른가. 사내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의 검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대로 검에 목이 달아나려는 순간, 빛의 올가미가 그들을 묶었다.

『잠깐 멈춰주겠어?』

『어떤……!』

『역시 날 습격한 건 당신이었나보네.』

아프리엔과 함께 저택의 벽을 뚫고 나타난 프리드의 모습에 사내의 고용주는 당황했다. 어떻게 안 거지? 이놈은 명령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아프리엔을 타고 급히 날아왔는지 프리드는 땅에 내려오다 휘청일 뻔 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당신이 진짜 배후였다는 것쯤은 간단히 알 수 있었어.』

『크으…….』

『이대로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대로 알리면 어떻게 될지 잘 알겠지?』

『억측이다! 이놈이 충성심에 멋대로 행동했던 것 뿐이야!』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앉았냐는 말이 절로 나올만큼 뻔뻔한 태도였다. 정작 사내는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채 고용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고, 증거를 대려던 프리드는 그런 사내를 물끄러미 보았다.

『…… 좋아. 그렇게 주장한다면 이번만 믿어줄게.』

『뭣? 아, 아니 정말인가?』

『다만 그에게 습격당한 당사자로서 그에 대한 처분은 내가 직접 하고싶어. 거부한다면 나는 이번 일에 대해 리프레에 공표할 거야.』

『그럼 당장 가져가라.』

사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사건을 무마시킬 수 있다면 결코 손해가 아니기에 귀족은 언제 부정했냐는 양 바로 사내를 떠넘겼다. 프리드는 혐오가 떠오른 눈으로 그를 흘깃 보다 저택에서 나왔다.

자신을 어떻게 죽이려고 이러나 어린 대마법사를 물끄러미 보던 사내는 보복은 커녕 되려 상처를 치료해주는 그의 모습에 자물쇠라도 채운 것처럼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왜 나를 살려주는 거지.』

『글쎄.』

당신이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돌려주자면─

『누굴 살리는데 대의명분같은 거창한 이유까진 필요없으니까.』

『……!!』

그 대답에 사내는 처음으로 크게 표정이 변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처럼.

『갑작스럽긴 한데 나랑 같이 여행할래? 이런저런 경험을 쌓으러 여행중이거든.』

『나는 널 죽이려 했었다.』

『하지만 나한텐 아무 감정 없잖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 눈부시다.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이번 일에서처럼 난 대마법사지만 어리다고 좀 만만하게 취급받고 있어서 말이지. 세상물정 모른다는 말도 뒤에서 들리고 실제로도 그렇긴한데, 당신같이 경험많은 용병이 동료면 꽤 든든할 것 같아서 제안하는 거야.』

『그런…….』

『싫으면 거절해도 좋아. 억지로 붙잡을 생각은 없으니까.』

사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럼 받아주는 거야? 프리드의 물음에 사내는 머뭇거리다 그렇다고 답했고─ 그렇게 사내는 프리드의 동료가 되었다.

거절하기엔 그는 이미 사내에게 강한 이끌림을 받고 있었다. 너무 밝은, 그러면서도 그가 여태껏 만나본 이들 중 가장 바른 사람. 그와 함께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날이 이어질까.

『받아줘서 고마워! 내 이름은 프리드야. 당신 이름은?』

『없다.』

『뭐?』

『원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부모가 오래전에 죽어서 들어본 적 없다.』

[어째 이름이 언급 안되더니 저 나이 먹도록 무명이었냐. 자기가 대충 붙여도 되잖아?]

"이해는 되는데 조용히 해줘 미르."

프리드는 잠시 당황하다 그럼 어릴 때 자주 불린 별명같은 건 있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보다 더했다. 애새끼에 밥버러지랑 또 뭐? 처음 생긴 동료를 그딴 식으로 부를 생각따위 전혀 없었기에 프리드는 끙끙거리며 고민하다 그냥 자기가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필립은 흔하고 크리스는 좀 여성적인데. 솔라는 안 어울리고…… 아, 유에는 어때?』

『유에?』

『옛 언어로 달이란 뜻이야.』

그는 반사적으로 밤하늘에 휘영청 뜬 달을 보았다. 프리드를 습격하러 갔을 때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구름은 어느새 사라져 환한 달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다.』

『그래? 그럼 이제부터 유에라고 부를게.』

앞으로 잘 부탁해! 밝게 웃으며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프리드를 보며 사내, 유에는 어색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독자의 입장에서 보던 프리드는 끝내 일그러진 얼굴로 주저앉았다.

「나의…… 최초의 동료였어? 직접 이름까지 준?」

그걸 여태까지 잊어버렸고?

영웅들이 그랬듯 프리드 역시 잊혀진 유에의 존재를 제대로 알게되며 충격을 받았다. 다만 그 종류는 달랐는데, 영웅들은 애초에 잊혀진 동료가 있었다는 걸 몰라 그를 적으로 대했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면, 프리드의 경우 그가 단순히 제물로 사라진 동료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 저토록 의미있던 존재를 완전히 망각했다는 것에 절망했다.

「어떻게, 어떻게 저걸 잊어버린 거야? 가장 오래 함께한 동료잖아! 내가 직접 구하고, 이름도, 내가 지어줬잖아!!」

이어지는 이야기를 도저히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수동적으로 주변 상황에 따라 흘러가기만 하던 그가 서서히 프리드의 정의관에 물들며 타인을 돕는 것에 가치를 두게 되고, 감정을 거의 내비치지 않던 얼굴은 서서히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동료가 행하는 일을 돕기 위해 혹독하게 수련했다.

유에라는 사람에게 있어 프리드란, 메말라있던 삶에 의미를 준 - 단순한 동료를 넘어선 존재였던 것이다.

정작 그는 다 잊어버렸는데!

「아, 아아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흐르는 눈물은 손틈 사이로 뚝뚝 떨어졌고, 그런 그의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마력에 책이 버티지 못하고 그를 튕겨냈다.

「손님 진정하십시오! 뭘 보셨는지 몰라도 책을 망가뜨리면 손님을 추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에 탈레스는 헐래벌떡 뛰어와 책들을 보호했다. 그의 외침이 들리긴 했는지 폭풍의 범위는 점차 줄어들며 투명한 결계에 감싸여졌는데, 스스로의 격정을 당장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프리드가 자신을 결계에 가둬 책과 도서관을 보호한 것이다.

결계 속의 폭풍이 멎은 건 십 수분이 지난 후였다. 어찌어찌 감정을 추스른 그는 멍한 얼굴로 주저앉은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관장님.」

「말씀해보시죠.」

「제가 방금 본 책의 주인공은 존재의 시간을 모두 잃어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인데, 우연히 그의 존재를 깨닫고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거였거든요.」

「그랬습니까?」

「그는 제 소중한 동료였습니다. 또 그에게도 저는 굉장히 의미있는 사람이었고요. 그런데 모두 잊혀져서, 저도 방금 책을 보기 전까지 그에 대해 어떤 기억도 없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묻지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 획득한 존재의 시간을 모두 잃은 이에 대한 정보는, 여기서 나가도 계속 기억에 남습니까?」

「예. 물론이죠.」

칼같이 돌아온 대답에 되려 긴장하며 물었던 프리드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존재의 시간을 잃은 이는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없어 기억에서도, 기록에서도 완전히 지워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워지는 과정 이후 직접적인 대면 외의 수단으로 그 자의 존재를 알게 된거라면 알아낸 기억 자체는 그대로 남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별도의 '지식'이니까요.」

「다행, 다행, 이네요. 정말로 다행이야. 아아…….」

밀려오는 안도감에 그의 눈에 또다시 물기가 어렸다.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달랐지만.

그리고 그 확인에 영웅들 역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여기서 나가자마자 그 - 유에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정말 참담했을 것이다.

「그 책을 다시 보고싶은데 주시겠습니까.」

「이번에도 소란을 피우시면 안됩니다.」

「괜찮아요. 아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랬고…… 마력을 거의 다 써버려서 아까처럼 폭풍을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다만 또 소란을 피우고 책을 망가뜨리게 되면 이곳에서 추방할 겁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프리드는 유에의 고목빛 책을 돌려받으며 다시 페이지를 펼쳤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 내로 유에 책 다 보고 검호 책으로 넘어가려 했는데! 왜 40키바가 넘어도 프리드 책이 안 끝나는 거야?! 쓰면 쓸수록 늘어나는 용량에 검호 책은 다음 화로 또 미루기로 했습니다 젠장. 최근에 Q&A에서 220화 안에 완결날 것 같다 했는데 대폭 수정. 250화 안에 끝날 것 같습니다...

일단 다음화는 이번주내로 써보도록 노력은 할텐데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털쒸 - 그 외전은 쓸지 안 쓸지 모르겠지만 일단 스토리 내에서 트립퍼 원본이 둘정도 출연 예정되어있습니다. 정확히 누군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은하수같이 - 반영하기엔 너무 멀리왔네요.

@레페시아 - 프리드가 봤던 책 목록중에 은월책이 왜 안 나왔는지는 다음편에 나올 겁니다. 일단 은월책 내용은 프리드 책을 통해 극중극 형태로 나오는중.

@비숍O가드프리 - 설명 대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걸 질렀을쯤엔 블랙헤븐까지 밖에 없어서 그 이후의 것들은 반영하기 힘듭니다. 그나마 끼워넣기 괜찮은 것들은 몇 개씩 넣고 있지만 신직업이라던가 새로운 설정들은 좀...

@킴마령 - 세피로트는 평소엔 한심할정도로 풀어져 있지만 이번화처럼 할 땐 정말 제대로 합니다. 안 그랬다가 몇 번이나 피봤었거든요.

@NnKightRun - 영웅즈 단체 멘붕.

@Ratios - 전 메론빵 안 좋아합니다.

@션트 - 빠른 퇴장. 상대가 너무 안좋았어요.

@l감 - 일단 은월~프리드까진 진지합니다 진짜. 다음화에서 검호 보면서 좀...(검호 초반부를 본다)

@디자울 - 근데 미르가 말 안하면 이번에 보는 것들은 너무 진지해서 아무도 말을 안 한다구요!

@푸르고큰소나무 - 책을 통해 다른 책을 볼 순 있습니다만, 화질이나 음질은 다소 열화되어 나옵니다. 720p가 240p 정도로 까임. 물론 그 정도는 신경쓰면 다 알아볼 수 있는 초인들이라 상관없지만!

@레볼레이션 - 내용을 정리하니 검호책까지 40키바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저는 또 다음화로 미루기로...

@시엘최고 - 볼수는 있습니다. 대충 120프레임에 노이즈가 덕지덕지 끼어있는 형태로.

@Skyhappiness - 트립퍼가 상대인 이상 예정된 운명이었지만 하필 극상성인 세피로트라 더 처참히 발림.

@yejinor1617 - 아뇨. 하마 만나는 장면부터입니다.

@mmo0522 - 다음화도 빨리 써보겠지만 아무 기대도 마세요!

@crede001 - 은월 정체에 대한 멘붕과 검호에 대한 멘붕은 방향은 다르지만 대미지가 쩌는 건 똑같음ㅋ

@역십 - 참고로 프리드는 검호책 보고 대폭발했었음.

@찬양천사 - 당연하게도 없습니다. 오버시어에게 나이는 너무 무의미해서.

@적현월 - 검호가 개쩌는 항마력때문에 마법공격 자체가 안 먹혀서 마법사들의 천적이라면, 세피로트의 시간 전이는 비유하자면 전투하는 내내 스킬들에 쿨타임을 5~10초씩 붙여대서 마법사들의 천적입니다. 랜덤한 확률로 사용 스킬들에 쿨타임이 붙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우.

@워테루 - 일단 프리드는 펑펑 울었습니다. 영웅들이 본격적으로 멘탈 깨지는 건 이후 유에가 영웅이 되고난 이후.

@SKYDRUM - 근데 그랬어도 수명크리 터졌을 거에요. 같은 인간이랑 결혼한게 나았음.

@미카츠키아이코 - 당연히 트립 이후입니다.

@J스티카 - 7월 안에! 올렸습니다!

@리아카에린 - 그래서 팬텀과 레이븐 외전을 썼습니다.

@prider - 앞으로 검호 편만 최소 3개는 써야하는데 앞길이 막막하네.

@코로미 - 취준생이라 쓰고 백수라 월요일이고 뭐고...

@Leliel - 많이 달라졌죠. 사실 대략적인 스토리는 다 정리됐지만 세부적으로 채우는 건 아직 덜해서 지금도 쓰면서 조금씩 바꾸는 중.

@Faceless - 세피로트 간지는 앞으로 하나는 더 있을 겁니다.

@토아루 - 예상치못한 복병! 그것은 19금!

@KRamiya - 본인도 동료들 프라이버시 무시하고 봤으니 쌤쌤으로 칩시다.

@소라노아카시 - 어릴때부터 쓰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본편에 언급만 됐던 봉인 이후 혼자 살아남은 이야기부터 시작.

@AbViaLectea - 검호는 크리티아스에서 열심히 구르는 중.

@Blake117 - 그대로 기록해두는 곳이니까 검열따위 있을리가...

@생명체는꿈을꾼다 - 지금쯤 방학이겠네요. 재밌게 보내세요!

@칼크래프트 - 군단장의 성에 도굴하러 오는 놈따위 없다(진실).

@bcyu0217 - 즈어는 독자님들 코멘을 보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