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에는 과묵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이였다. 노련한 용병인 그는 풍부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어린 대마법사를 만만히 보는 이들에게서 프리드를 지켜줬고, 이후 프리드가 아리아 여제의 부름을 받고 군단장들과 싸워줄 영웅이 될만한 이들을 찾아나설 때엔 그 역시 도움이 되기 위해 힘을 기르러 일부러 동료와 떨어져 수행에 나섰다.
『무릉? 거긴 왜?』
『나는 더 강해져야할 필요가 있다.』
무릉에서 왔다고 알려져 선인(仙人)이라 불리고 있던 아란을 찾아간 건 그 무렵이었다. 유에와 어떤식으로 만났는지 전혀 기억못하는 아란은 과거의 자신을 직접 찾아간 그의 모습에 얼굴이 굳었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 확실히 무릉의 수행을 받으면 강해질 수 있긴 하지.』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려줬으면 한다.』
『왜 강해지려고 하는데?』
그는 그리 말솜씨가 좋지않았지만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 최대한 자세히 수행의 목적을 설명했다. 자신의 동료가 사람들을 구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들과 맞서기 위해 영웅이 되어줄 사람을 모으고 있는데, 이에 도움이 되기 위해 힘을 기르려 한다고.
『오…… 생긴거랑 다르게 꽤 착한 놈이었구나 너.』
『가르쳐주는 건가.』
『그런 이유라면 가르쳐줄 수 있긴 한데, 지금 너한테는 별로 도움이 안될 수도 있어.』
『어째서지?』
과거의 아란은 손부채질을 하다 그걸로도 모자란지 마하로 냉기를 끌어올리며 이유를 알려줬다. 무릉은 지리적으로 오시리아 대륙에서 고립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특별한 수행을 위해 도술로 지역 전체를 여러겹의 결계로 감쌌는데, 이 결계들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무릉은 다른 지역과 시간 흐름이 다소 다르게 흐르며 이 때문에 그곳에 수행을 하게 되면 여러모로 곤란한 일들이 생길 수 있다고.
『네가 도움이 되어주고 싶다는 동료보다 더 나이를 많이 먹어버릴 수 있고, 반대도 일어날 수도 있어. 강해지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런 목적을 가지고 거길 가겠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게 좋을 거야.』
『그런, 가.』
확실히 그는 더 강한 힘이 필요하지만, 그 힘을 얻다가 동료를 돕지 못하면 주객전도나 다름없기에 무릉에 가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표정 변화는 크게 없었지만 다소 가라앉는듯한 분위기에 과거의 아란은 씩 웃으며 말했다.
『대신 괜찮은 제안 하나 해줄까? 내가 널 가르쳐 줄 수 있어.』
『……?!』
『난 무릉에서 수련했고, 비전이나 거기서 말고는 못하는 수련법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적당히 알려줘도 괜찮거든.』
『그게 정말인가?』
『물론이지. 그냥 강해지려고 하는 놈이었으면 생각할 가치도 없었겠지만 당신은 믿어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어.』
겨우 느낌만으로 그래도 되냐고 묻자 과거의 아란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물론이지. 난 내 감을 믿어. 지금까지 틀린 적 없으니까. 하물며 당신처럼 누군가를 위해 강해지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기회를 줘도 된다고 생각해.』
『…… 고맙다.』
『이 정도로 뭘~ 대신 나중에 당신 동료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있어?』
영웅까진 몰라도 나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강해지려 한 몸이라 한 팔 거들어줄 수 있어. 유에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란은 그와 악수를 주고받은 뒤 카운터쪽에 외쳤다. 좋은 날이네! 여기 술 좀 주세요!
이후 유에는 아란에게서 수련을 받으며 그녀도 놀랄만큼 빠르게 강해졌고, 그녀 못지않는 힘을 길렀을 때 다시 프리드를 찾아갔다. 그렇게 둘은 영웅의 일원이 되었다.
"하…… 하. 저렇게 된 거였나. 난 그냥 소문 따라서 간 걸로 기억했는데 저놈이 이어준 거였구나."
"보기 괴로우시면 잠시 나가있어도 되요 아란 누나."
"아니, 그냥, 그냥 좀…… 말로 표현이 잘 안 되네."
몇 차례 입을 달싹이던 아란은 겨우 제 심정을 말로 표현했다. 프리드가 느꼈던 충격을 알 것 같아. 저렇게 밀접하게 이어져있었는데, 그게 완전히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영웅에 합류한 그는 프리드를 중심에 두긴 했지만 다른 동료들 역시 조용히 챙겼다. 하루가 멀다하고 다투는 팬텀과 루미너스를 힘으로 말리는 건 주로 그의 역할이었고, 주방에 들어가려는 아란과 메르세데스를 저지해 식사를 사수하는 것도 그의 중요 임무 중 하나였다. 연구하다 지쳐 쓰러지다시피 잠든 프리드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그의 몸상태를 확인해 아프리엔에게 알려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또 쓰러졌나.』
『아아. 요즘들어 많이 무리하고 있어서 걱정이다.』
유일하게 거리를 둔 건 검호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쪽에서 다른 영웅들과 모두 거리를 두고 있어서 유에 역시 그에게 딱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저런 관계였는데 어쩌다 지금은 그 사람 편에 가있지?]
"글쎄. 이후에 좀 변했나."
"보다보면 그에 대해 나올지도 모르지만……."
자신들이 직접 책을 보는게 아니라 프리드가 본 것을 극중극의 형태로 보는 것이기에 왜 그가 현재 검호의 편에 서있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책이 있으면 확인할 수 있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없고. 메르세데스는 잊어버린 것을 알게되는 것과 별개로 울적해지는 심경에 한숨을 내쉬다 어째선지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듯한 나인하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책사?"
"아, 아까 전에 저 사람의 이름을 듣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 것 같아 생각중이었습니다."
"응? 설마 기록같은 게 남아있었어?"
"아뇨 그건 아니고, 최근에 저 사람이 에레브에 수감되었다 탈출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스스로 말하기 껄끄럽지만 유에 - 은월이 에레브 측에 잡혀 갇혀있다 검호의 도움으로 탈출한 그 사건. 당시엔 겨우 블랙윙 간부가 어떻게 기사 단장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영웅과도 접전을 펼쳤었다는 것에 경악했는데 지금 보니 이해가 됐다. 그 역시 영웅의 일각으로서 자신의 분야에 정점을 찍은 이였으니 기사 단장만으론 역부족이었던 거지. 오히려 잠시나마 발목을 잡은 게 대단한 거다.
"아 그거…… 그의 정체가 영웅이었으니 너희가 상대를 못했던 것도 그나마 위안이…… 될까?"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당시 저 사람을 감시하고 있던 호크아이가 유에라는 이름을 언급했었다는 겁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유에가 탈옥하기 하루 전 날 그를 면회하러 갔던 키네시스가 그를 은월이 아닌 유에라고 불렀었다는 거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지……?"
"호크아이는 가벼운 이지만 그런 실수를 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이 유에라고 부르자 며칠동안 침묵하던 그가 반응했었다고 하더군요."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땐 단순히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불러서 그랬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다. 세상에서 지워진 자신의 본명을 꺼냈기 때문에 반응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잠깐, 그렇다는 건……!"
"키네시스 군이 그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보다는 누군가 키네시스 군에게 그의 본명을 알려주었고, 이를 이용해 다음 날 탈옥을 유도했다는 게 더 그럴싸하겠죠."
그리고 다음 날 그를 구하러 온 이는 검호였다. 또 그는 아래에서 비행선이 대기하고 있었다지만 하늘섬에서 뛰어내리라는 지시에도 망설임없이 행할만큼 검호를 믿고 있었다. 거리를 두었던 과거와 달리 말이다.
"…… 정리하자면, 검호는 우리와 달리 유에를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야?"
"거기까진 저도 모르죠."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과거의 프리드는 중요하지 않거나 사적인 부분들을 몇 번 스킵해 어느새 봉인석을 만드는 부분까지 내용이 진행되었다. 그들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 메이플 월드 곳곳을 돌아다니던 그 때.
『빛의 수호자로서의 의무라니, 어떻게 이런 부분까지 샌님같을 수 있는 거야?』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아아, 재미없어. 좀 웃긴거면 놀리려 했는데.』
『애초에 사람들을 구하고 검은 마법사와 싸우는 이유가 우스운 것일 리 없지 않나. 좀도둑답게 생각이 짧군.』
『뭐야?』
늘 그랬듯 으르렁거리는 팬텀과 루미너스였지만 그 날은 조금 달랐다. 다른 때였으면 크게 싸우기 전에 유에나 메르세데스가 나서 말렸겠지만 그 날 말다툼을 한 이유는 영웅으로서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너의 이유는 얼마나 잘난 거냐.』
『…… 아리아는 내가 영웅이 되길 원했었으니까.』
그 대답에 한껏 비꼬아줄 기세였던 루미너스는 괜한 것을 물었음을 깨달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가만히 둘 수 없고, 또 그녀가 이 세상을 지키려 했었으니까 나도 그러기로 한 거야.』
『멋지네! 우리 중 최고의 로맨티스트다워!』
더 분위기가 우중충해지기 전에 아란이 웃으며 다가와 팬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팍팍 쳤다.
『내 이유는 너희에 비하면 빈약하네. 난 그냥 나한테 힘이 있으니까, 그 힘으로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나선거거든.』
『그런 이유였나?』
『뭐어, 내 손에 넘치도록 들려있는 걸 다른 이를 구하는데 쓰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실로 단순한 논리였다. 마치 한 지역의 왕 역할을 하는 짐승이 자기 영역의 동물들을 다른 지역에서 습격해오는 맹수들에게서 지켜주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더없이 순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둘을 말리기 위해 끼어든 것에 불과했지만, 어째 분위기가 영웅으로서 움직이는 이유 발표~ 같은 느낌이라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메르세데스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종족을 위해서 나섰어. 내겐 엘프의 왕으로서 종족을 지켜낼 의무가 있고,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의 발호는 확실하게 세계를 위협 중이지. 세계가 멸망하면 엘프 역시 설 자리가 사라져버리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어? 메르 너 왠일로 왕같은 말을 하네.』
『왠일로라니! 내가 평소에 어때서?!』
위엄있던 표정이 단숨에 날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팬텀은 큭큭 웃었고, 분위기가 풀리는 모양새에 루미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에는 아란에게 잘 끼어들었다고 눈짓을 보냈다.
『무슨 일이야? 또 둘이 싸웠어?』
『싸울뻔했지.』
『그 전에 멈춰서 다행이네…… 또 너네 싸움에 내 연구실까지 날아가나 걱정됐는데.』
동료들의 안전보다 자기 연구실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프리드의 모습이 당황스러울법도 했지만, 그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듯 다른 이들은 그러려니 했다.
[새삼 느끼는 건데 군단장만큼은 아니지만 이쪽도 꽤 콩가루인 것 같지않아 마스터?]
"그, 글쎄."
"저 둘만 유독 그런 거야."
"어쩔 수 없다고. 나랑 샌님은 근본적으로 상성이 안 맞아."
본인도 사이좋다곤 절대 말 못했다.
『그런데 무슨 얘기하는 중이었어?』
『왜 본인이 영웅으로서 검은 마법사와 싸우고 사람을 구하는가 나름의 이유나 동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헤에…… 간만에 진지한 얘기중이었네. 그럼 나도 말할까?』
『우리 대마법사님 이야기라면 당연히 들어야지.』
그렇게 거창하진 않은데. 프리드는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다간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니까,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서는 것 뿐이야.』
『뭐?』
『너무 요약했나? 그러니까 놈들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난 잘 알겠거든. 세계도 사람도 아주 끔찍해질 거야. 그런 미래가 오는 걸 절대로 두고 볼 수 없어서 영웅이 되기로 했어.』
그의 말대로 많이 함축되어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 그리고 8백 년 뒤에도 찬사받을 대마법사는 점차 가시화되는 파멸의 미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에 맞서 싸우기로 한 거였다.
『대단하네…… 너답고!』
『하하.』
『너무 무리하지 마라.』
『걱정마. 세상을 구할 때까지 먼저 죽진 않을테니까.』
피로한 얼굴로 짓는 미소임에도 빛나보이는 건, 그 결의가 더없이 고결하기 때문이겠지. 다른때였으면 그걸 보고 함께 미소지을 수 있었겠지만 유에는 그러지 못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때 시내에 나가 식료품을 사러갔던 검호가 돌아왔다.
『아참, 검호! 당신은 어때?』
『…… 뭐가 말이냐.』
『지금 한참 왜 영웅이 되었는지 얘기중이었거든.』
『동기나 이유, 정확하게는 왜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과 싸우기로 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바깥에 착륙한 아스카의 등에 실어놓았던 식료품들을 옮기던 검호는 손을 멈추고 그들을 보다 대답했다.
『당연하고, 마땅히 해야하는 게 옳은 거니까 하는 것 뿐이다.』
그 말만 한 그는 식료품들을 정리하기 위해 주방에 들어갔다. 다른 영웅들은 그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다 뒤늦게 크고작은 놀라움을 얼굴에 띄웠다.
『역시 검호. 상상이상이네.』
『예상하고 있었지만 다른 의미로 샌님보다 더한 사람이었구만.』
『좀도둑 네놈보단 백배는 대단하고 말이지.』
『저렇게 올곧으면서 왜 그때는…… 아, 유에. 당신은 어째서─?』
메르세데스는 유일하게 이유를 말하지 않은 유에를 찾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검호가 식료품 정리하는 걸 도우러 갔나 생각했지만 그는 검호의 대답을 들었을 때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왜…….』
충동적으로 나온 그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는듯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거기서 나왔지. 왜 내 이유를 그들 앞에서 꺼내지 못한 거야. 나는 프리드가 행하는 거니까 당연히 선하고 옳을테니 그를 돕기 위해 영웅이 되었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아.』
자신의 이유를 곱씹은 순간 그는 왜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는지 깨달았다.
프리드도, 아란도, 루미너스와 팬텀, 메르세데스, 그리고 검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유는 다르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서 이 자리에 섰다.
그에 비해 나는
『내가, 그들과 같은 영웅이 맞다고 할 수 있나.』
스스로 생각하지않고, 타인을 뒤따르기만 하고 있잖아.
유에. 옛 언어로 달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달[나]은 스스로 빛나지 못하고 태양의 빛[프리드와 동료들]을 반사해 빛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지.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영웅들 중에서 가장 영웅답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자신의 이유가 창피해 자리에서 도망쳤다는 사실도.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런 유에의 생각을 과거의 프리드는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
***
그 날 이후 유에는 과연 내가 동료들과 같은 위치에서 영웅이라 불릴만한 사람인가 의문을 가졌다. 복수를 위해 괴도를 그만두고 태양 아래에 나온 팬텀은 곧잘 스우에게 영웅같지 않다고 비꼼받았지만, 그에 비하면 차라리 나아보였으니까.
그저 프리드를 뒤쫓을뿐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자신이 영웅이기 전에 용병으로서 별다른 생각없이 의뢰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사람들을 죽였었다는 사실이 의문의 크기를 불렸다. 그토록 따르는 프리드조차 첫 만남은 적대적인 입장이 아니었던가?
한편으론 누군가 이 의문을 부정해줬으면 했지만, 타인에게 매달려 답을 구하려는 순간 정말로 자신이 스스로의 기준도 뭣도 없이 휘둘리기만 하는 이라고 증명하는 꼴이 될 것 같아 누구에게도 - 심지어 프리드에게도 이를 토로하지 못했다. 이는 검은 마법사와의 첫 전투에서 검호가 장렬히 사망하며 더 심해졌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전의 그 날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들어줘. 이제부터 검은 마법사를 봉인시킬 거야.』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들은 강대했고, 또 굉장한 난적이었다. 그들에게 점령당한 시간의 신전을 돌파하며 이를 뼈저리게 체감한 프리드는 본래 목적인 검은 마법사의 처치가 불가능한 걸 깨닫고 플랜B, 봉인을 하기로 했다.
『봉인의 방식은 검은 마법사가 륀느님으로부터 빼앗은 시간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으로, 아무리 그라 해도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거야. 다만 봉인을 발동시키려면 검은 마법사로부터 시간의 힘을 이끌어내야 해.』
과거의 프리드는 저 당시의 자신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귀기울였다. 저기까지는 그도 잘 아는 이야기다.
『좀 전에 검호씨가 검은 마법사의 시선을 끌 때 나는 이 일대에 봉인을 설치했어. 그러니 이제부터 두 사람은 내가 잠시 시간을 멈춰서 검은 마법사가 눈치 못채게 하는동안 봉인들을 활성시켜줘.』
거기까지 말했을 때 당시의 그는 기억하는대로 시간을 멈췄고, 유에와 루미너스가 봉인들을 활성화시켰다. 검호는 본인의 항마력을 의식한듯, 봉인을 활성화시키러 가지 않고 적당한 위치에서 숨을 고르며 시간 정지가 풀리는 즉시 검은 마법사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봉인을 모두 작동시켰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검은 마법사에게서 시간의 힘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돼. 물론 작은 조건 하나가 있지만.』
그 조건은 사실 절대로 작지 않았다.
『봉인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한 사람의 모든 시간, 즉 '존재'가 필요해. 제물 혹은 대가라고 해야할까. 아 울상짓지마. 이건 내가 할테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야!』
눈에 띄게 당황한 루미너스를 보고도 프리드는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웃으며 지팡이를 들었다.
『이걸 만든 건 나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지. 그리고 나도 한 번쯤은 주인공 노릇 해보자. 매번 너희 뒤치닥거리만 하느라 지쳤다고.』
「내가…… 하려 했었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저 사실을 분명히 알고있는 자신이라면, 반드시 희생되어야 하는 제물 역할을 동료들 중 누군가에게 떠넘기려하지 않았을테니까.
그러나 당시의 프리드는 제물이 되지 못했다. 유에가 그를 막아서며 대신 나선 것이다.
『내가 하지.』
『유에……?』
『너까지 왜 그래? 메이플 월드의 운명이 달린 일이야. 감정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겠다는 거다. 지금 프리드 네 몸상태로 봉인을 감당하는 건 무리고, 루미너스 너는 봉인을 발동시키는데 필요한 빛의 힘을 써야하잖아. 검호 당신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지극히 이성적이면서 타당한 판단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지만 존재를 걸어야 하는 거야! 제물이라고! 죽는다는 말하고 뭐가 달라?!』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라면 내가 하는 게 맞아. 나한테는 너희들처럼 짊어지고있는 뭔가가 없으니까.』
너희와 같은 위치에서, 동등한 존재가 되고 싶어. 프리드가 제 삶의 이정표라면 다른 이들은 함께하는 것만으로 충족감이 느껴지는 소중한 동료들이다. 그들을 만나 다행이라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생각했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희와 같은 위치에 있어도 되는지, 함께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증거가 필요해. 소중한 이들과 같은 곳에 있어도 된다는, 내가 영웅이 맞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안돼…… 안돼, 안돼, 안된다고! 그런 이유로 제물이 되겠다고 하지마!! 잊혀진단 말이야! 너의 그 소중한 이들에게 전부 잊혀진다고!!」
이를 그대로 들은 과거의 프리드는 목이 터져라 유에에게 외쳤지만 들릴 리 없었다. 한참 보고있던 다른 영웅들과 사람들도 그가 제물이 되겠다고 자처한 이유가 겨우 저런 자격지심때문이었다는 사실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시의 프리드도 봉인식에 다가가는 유에를 막으려 했지만 그의 말대로 이미 지칠대로 지쳐 제대로 움직이는 것도 무리였고, 루미너스는 대마법사다운 통찰력으로 그가 제물이 되는 게 가장 낫다는 걸 알았지만 동시에 그가 제물이 되는 건 원치않아 갈등했다.
그때 조용히 전투태세를 재정비하던 검호가 검을 든 한쪽 팔을 비스듬히 들어 그를 막아섰다.
『왜 막는 거지?』
『하나 묻겠는데, 넌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나.』
『물론.』
후회할 리가 없다. 비로소 그들과 같은 곳에 서게 되니까.
그 끝이 죽음이라도 상관없다. 죽더라도 원하는 걸 이룬 셈이니.
『만약 다시 한 번 똑같은 선택의 기회가 온다해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나.』
『기꺼이.』
검호는 여러 감정들로 일렁이는 붉은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보다 토해내듯이 말했다.
『내 생각에 넌 그럴 수 없을 거다.』
『…….』
그 모습이 마치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말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탓일까. 결국 그는 들고있던 팔을 내리며 길을 비켜줬지만, 봉인식에 올라서는 유에의 뒷모습을 눈도 깜빡이지않고 끝까지 보았다.
이내 그는 봉인식에 빨려들어가 점차 투명해지며 - 존재의 시간을 모두 바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지 않아도 됐다고!! 그게 아니더라도 네가 우리 동료인 건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는데 왜 그런 거야!? 차라리, 차라리 내가 하게 내버려두지 왜……!」
당시 상황상 유에가 제물이 되는 게 최선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머릿속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가 제물이 되겠다고 한 이유가 험난했던 삶을 의미있게 바꿔준 동료들과 같은 자리에 서고 싶다는, 소박하기 짝에 없는 바램때문이었다는 것만이 그의 심장을 헤집었다. 만약 마력이 남아있었다면 또다시 한바탕 폭풍을 일어났을만큼 과거의 프리드는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한참 오열하던 그는 문득 자신이 아직 책에서 나와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뭐지?」
제물로 사라졌으니 이제 책이 끝난 거 아닌가?
현재의 영웅들은 그 뒤의 이야기를 알기에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저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프리드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경이 또 바뀌어갔다.
어느 숲 속의 공터 한복판, 시체처럼 기절해있는 유에를 지나가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가가 구경했다. 그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있는 어떤 특징에 에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꼬리?"
[귀도 동물귀네.]
"하프링은 아닌 것 같고, 밝혀지지 않은 소수종족인가."
"아니…… 그 이전에 메이플 월드가 아닌 것 같은데."
저기가 어딘지 알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던 팬텀은 하늘에 뜬 달'들'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샛별처럼 빛나는 달이 하나도 아니고 2개. 명백하게 메이플 월드가 아니라는 증거와 더불어 생전 처음봤던 노바족이 다른 차원의 종족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저 아이들도 메이플 월드의 종족이 아닌 것이다.
『으…… 여, 여긴?』
『오, 일어났다, 일어났어!』
『대~박. 말도 했어. 말은 할 줄 아나봐!』
『엄청 크다! 막 우리 잡아먹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건 또 무슨……?」
저곳이 다른 차원이라는 것까진 아직 생각이 닿지 않았는지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과거의 프리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이들과 유에를 번갈아 보았다.
『윽!』
『야 이거 어디 아픈가봐. 네가 가서 아프냐고 물어봐.』
『왜 나한테 그래? 난 무섭다고.』
『이 겁쟁이들! 다 비켜봐. 너, 어디 아픈거야?』
『아니, 이제 괜찮다. 머리가 좀 울리긴 하지만…… 여긴 어디지? 그리고 너희는…….』
아이들 중 분홍머리에 당차보이는 인상의 소녀는 유에의 물음에 이것저것 답해주었다. 자신들은 뾰족귀 여우고,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다. 그 외에 여러가지를 묻고 답하던 중 유에와 한참 그들을 보고있던 과거의 프리드는 달이 2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설마 봉인의 여파로 다른 차원에 튕겨난 건가?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하필이면,」
『안되겠다. 일단 마을에 데리고 가자.』
『그치만 외부인을 함부로 마을에 데려가면 어른들한테 혼날 거야.』
『그렇다고 아프고 모자란 사람을 여기다 버리고 갈 순 없잖아. 다 내가 책임질 거니까 너넨 이 사람 부축해줘!』
아프고 모자란…… 유에는 드물게 기가 찬 표정이 되었고, 그 사이 아이들은 그에게 달라붙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야, 진짜 꼬리가 없어!』
『귀도 이런 곳에 붙어있네.』
『너네 진짜 나빴어. 다른 사람 약점가지고 장난치면 안된다고 엄마가 그랬다고!』
이 상황은 대체. 부축이 아니라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삐걱이는 팔다리를 움직이는 그는 내심 죽을맛이었다. 뜬금없이 장애인 취급받은 것도 황당한데 힘까지 잃다니.
『랑아, 우리 먼저 마을에 가 있을게. 여기까지 왔으니까 네가 저거 데리고 와.』
『알았어.』
그새 흥미를 잃었는지 애들은 마을이 가까워지자 그에게서 떨어져 휙 가버렸고, 랑이라고 한 분홍색 소녀만 유에 앞을 걸었다. 짐덩이들이 없으니 움직이는데 괜찮아졌지만 그럼에도 숲을 가로지를뿐인데 숨이 찼다.
『…… 인간은 원래 이렇게 걸음이 느려? 꼬리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 그건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난 힘을 잃은 것 같은데─』
『으으, 됐어! 나 먼저 갈래. 마을도 거의 다 왔으니까 위험한 것도 없고, 이쪽 길로 쭉 따라오기만 하면 돼. 딴 길로 새면 안돼? 나 먼저 간다!』
다다다 말을 쏟아낸 소녀, 랑은 휙 바람을 타듯 순식간에 저 편으로 사라졌다.
「정령? 저 애들 모두 정령을 쓸 줄 아는 건가?」
그리고 그런 몸놀림의 이유를 바로 간파해낸 프리드는 아까까지 당황했던 기색을 지우고 호기심을 내비치다 혼자 덩그라니 남겨진 채 숨을 헐떡이며 숲을 걷는 유에의 모습을 안쓰럽게 보았다. 힘이 멀쩡했다면 좀 전의 애들을 10명이든 20명이든 짊어지고 숲을 질주할 수 있었을텐데 저게 무슨 꼴이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여긴 어디고 힘은 또 왜 사라진 거야? 혹시 처음부터 다시 길러야 하는 건가.』
저 심정 잘 알지. 영웅들과 데몬은 웃는데 웃는 게 아닌 얼굴로 겨우겨우 뾰족귀 여우족의 마을에 도착한 유에를 보았다.
이야기는 빠르게 넘어갔다. 뾰족귀 여우족 마을에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마저 그를 장애인…… 몸이 모자라게 태어난 사람 취급했고, 이내 불쌍히 여겨 마을에 받아주었다. 하다못해 힘이라도 멀쩡했으면 문제없다고 했을텐데 그렇지 않으니 거절하기도 그랬다.
『그러고보니 자네 이름이 '인간'이라고? 허허, 참으로 재미있는 이름일세.』
『이름이 아니라 종족이 인간입니다.』
『잉? 이름이 아니라고? 그럼 자네 이름은 뭔가?』
『제 이름은…….』
유에. 달. 프리드가 준 이름. 그러고보니 그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듣도보도 못한 곳에 떨어졌는데 그놈도 그렇게 된 건 아니겠지? 다른 애들은 멀쩡할까?
『허어, 이름 하나 말하는데 뭘 그리 뜸을 들이나? 혹시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겐가.』
『아니 그건 아니고 잠시 생각을 하느라…….』
『자네 표정을 보니 딱 그렇구먼. 그렇다면 내 괜찮은 이름을 하나 지어주지! 보자…… 자네 털이 검으니 깜시가 어떤가? 아니면 몸집이 크니 떡대도 좋겠어.』
"푸흡!"
"작명감각 보소."
진지하게 보고 있던 아란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고, 테스는 노야의 네이밍 센스를 깠다.
『아니 저도 이름이 있─』
『그게 뭐야? 인간이랑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인간은 내가 주워왔으니까 이름도 내가 지어줄래. 음, 음…… 그러고보니 인간은 달이 하나뿐인 곳에서 왔다고 했지? 그럼 달이 하나 숨은 곳…… 은월, 은월이 좋겠다! 숨겨진 달이란 뜻이야.』
공교롭게도 또 달이 들어간 단어가 이름으로 주어지자 유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뭐야 저 이상한 이름 쟤가 지은 거였어? 문화 차이로 그런 거였네. 미르와 에반이 두런두런 떠들었다.
『에잉, 그건 너무 촌스럽지 않느냐. 그거보다는 깜시나 떡대가 훨씬…….』
『은월로 하겠습니다.』
그 감정을 곱씹을 새도 없이 터무니없는 이름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는 본명을 알려줘야한다는 것도 잊고 재빨리 은월을 이름으로 하겠다고 말해버렸다.
『후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집에, 새 이름에,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다른 애들은 살아 있을까? 제물로 죽었어야 할 내가 살아있는 걸 보면 봉인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곳에서 어떻게 메이플 월드로 돌아가지? 근심걱정이 계속 생겼지만 지친 몸은 더 움직일 수 없노라 격렬히 외치고 있어 그는 청소도 못하고 새로 받은 집의 침상에 풀썩 쓰러졌다.
『…… 작네.』
다리 길이가 모자라. 아까부터 보면서 안 사실이지만 뾰족귀 여우족은 인간보다 평균 체형이 작았다. 당연히 침상 길이도 인간의 것보다 짧아 다리가 침상 밖으로 튀어나왔으나, 바닥에 이부자리 까는 것도 힘들어 그냥 잠들었다.
***
다음날부터 유에는 마을의 이런 저런 일을 도우며 정보를 모았다. 뾰족귀 여우족이 정확히는 아니마족이라는 수인(獸人) 비슷한 종족이며, 이 지역의 이름이 미우미우라는 것, 달이 몇 개나 떠있는 이 세상이 그란디스라는 것까지.
하루라도 빨리 메이플 월드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약해진 이 상태로는 돌아가봤자 도움이 안될 게 분명했기에 그는 일단 힘을 어느정도 기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일들을 또 겪었는데, 그저 토테미즘 신앙의 일종이라고 여겼던 여우신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정령을 내려주어 새로운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간단히 정령을 쓸 수 있다니, 프리드가 알았으면 연구하고 싶다고 달려들었겠군.』
「젠장 저기 어떻게 가지? 여우신이란 건 또 뭐야? 설마 초월자인가. 저 차원에도 초월자가 있는 건가?」
그리고 당사자들은 몰랐지만 분명 서로 말이 닿을 리 없는데 귀신같이 말이 통하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자, 첫 사냥감을 시식해볼 차례야. 이렇게 다리를 떼고, 더듬이도 떼고…… 이거 안 떼면 엄청 써. 자! 이제 먹어도 돼!』
『…… 벌레를 그냥 먹나?』
『어? 못 먹어?』
『못 먹는 건 아닌데…….』
어릴 땐 풍족하게 배를 채웠던 적이 거의 없어 직접 사냥해 먹었고, 용병이 되선 온갖 험한 꼴을 봤던지라 벌레따위를 먹는 것에 거부감은 없다. 다만 문제는,
『겨우 벌레 몇 마리 먹는다고 내 배가 찰 것 같지 않다.』
『아아, 은월은 덩치가 커서 많이 먹어야 하지?』
『물론 벌레는 크기 대비 영양과 포만감이 좋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사냥해가며 먹어야 한다면 이걸 섭취해서 얻는 것보다 사냥에 쓰는 힘이 더할 거다..』
『어…… 어려운 말 쓰지 말고 쉽게 말해!』
『이거말고 고기는 없나?』
거기다 아무리 그가 비위가 좋아도 극한 상황도 아닌데 삼시세끼 벌레는 아니다.
『고, 고기?』
『너희 여우 아니마족은 여우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벌레뿐만 아니라 육식도 할테니까…… 아닌가?』
『그렇긴 한데 그, 잠깐만 기다려! 일단 은월이 첫사냥 성공한 거 마을에 알려주러 갔다올 거니까! 어디 다른 곳에 가면 안된다!?』
후다닥 마을에 뛰어가는 랑의 뒷모습을 보며 유에는 잠시 생각했다. 오랜만에 덫이랑 함정을 만들어 동물들을 잡아야 하나. 손바닥 안에서 꼼질거리는 정령들은 편의성은 좋아도 전투에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잠시 후 그는 바라던 고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사냥 성공 기념으로 마을 주민들이 알 수 없는 짐승의 생간을 준 것이다.
『…….』
"저쯤되니 불쌍하다기보단 희극적으로 보이네요."
"닥치라고 하고 싶은데 비슷한 심정이야. 젠장, 반마족과 같은 생각을 하다니."
[근데 생간이 어때서? 저거 싱싱하고 육즙 가득한 게 맛있어 보이는데.]
"드래곤 식성하고 인간 식성이 같을 리 있겠니."
프리드의 드래곤답게 지혜롭고 현명했던 아프리엔이 허기를 채울땐 몬스터들을 쓸어담아 한 입에 먹어치우던 모습이 떠오른 메르세데스는 왠지 이마를 짚고 싶었다. 종족차이가 이런 곳에서.
이어지는 나날은 여전히 당황스럽지만 한 편으론 메이플 월드에서 겪어본 적 없는 평온함과 온기가 곳곳에 배어있어 유에는 천천히 뾰족귀 마을에서의 생활에 적응해갔다. 그 와중에 그가 너무 약하다며 랑이 제 정령을 냅다 줘버린 사건이라던가, 한 마리의 여우로 인정한다면서 여우귀 머리띠와 꼬리장식을 받는 일 등도 있었다.
『…… 내키진 않지만 선물로 받은 거니까 한 번은 써볼까. 일단 예의상으로 한 번만…….』
유에는 주저하다 머리띠와 꼬리장식을 달아보더니 방 한 켠에 있는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굳어버리곤 후다닥 귀와 꼬리장식을 벗었다.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여우들이랑 어울리다보니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보군. 정신 차리자! 더는 휘말리면 안돼. 이 꼴을 다른 애들이 봤다간 거하게 웃을 거라고!』
「푸하하하!!」
"크흡……!"
"아, 색깔까지 맞춰서 묘하게 어울리네."
원체 얼굴이 되다보니 저런 어린애 장난감 같은 걸 달아도 그렇게 이상하지가 않다. 뭐랄까, 조금 취향 특이한 사람정도? 물론 유에의 말대로 과거의 프리드는 그 꼴을 보고 열심히 웃었고, 다른 영웅들도 큭큭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뒤 유에가 머무는 집의 원주인, 방랑여우 몽이라는 이가 돌아오며 메이플 월드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메이플 월드라, 디멘션 게이트 너머의 세상이 그런 이름이라고 들어보긴 했지.』
『메이플 월드에 대해 알고 있나? 어떻게 알고 있지? 아니, 그보다 지금 그곳은 어떻지? 아는 것이 있다면 내게─』
『아아, 거기까진 못 가봤어. 난 그냥 그런 곳이 있다고 게이트를 관리하는 신관들에게 들어만 봤거든.』
그란디스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온 몽이는 노바족들의 영역 판테온에 메이플 월드와 이어진 디멘션 게이트라는 게 생겼다고 알려줬다. 이에 유에는 바로 그곳에 가려 했으나,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언젠가 은월이 떠날 거라는 거, 사실은 알고 있었어.』
『랑.』
『은월한테 내 정령 준 것도 못 가게 하려고 그런 건데, 내 곁에서 나 지켜달라고, 가지말라고 그런 건데…… 나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가지 마!』
마냥 작고 귀엽게만 보이는 여우 아니마족은 자연의 약육강식을 그대로 따라서, 그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기대지 못하고 스스로 일어나야만 했다고 한다.
『…… 내겐 친구가 있었다. 나한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사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이를 살려주고,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따위 필요없다고 했지.』
이 낯선 세계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도 그의 얼굴이었다. 선택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얼굴로 붙잡으려 했었지.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다.
「그런, 그런 문제가 아니야. 지금 네가 메이플 월드에 돌아와봤자……!」
과거의 프리드는 숨이 턱 막힌듯 말을 잇지 못하고 상념에 잠겼다. 봉인의 여파로 다른 차원으로 튕겨나버린 그가 다시 메이플 월드에 오면, 시간이랑 공간축이 어떻게 되지? 과연 현재의 메이플 월드에 도착할 수 있나? 아니 그 전에 서로 다른 두 차원의 시간 흐름이 같을까? 차원 마법을 익혔기에 차원을 넘을 때 고려해야하는 수많은 것들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돌아가야만 해. 나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괴로워하고 있을 녀석에게 살아있다고 말해줘야만 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그곳을 끝까지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제 말이 이어질수록 울먹이는 소녀를 보며 유에는 흐린 미소를 지었다.
『……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 그때 다시 돌아올게.』
『그럼, 그러면 하나만 확실히 말해줘.』
나도 은월의 친구가 맞지? 은월의 친구라는 사람처럼, 나도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지?
대가없는 호의와 또 다른 이름, 스스로를 지킬 힘마저 준 소녀를 보며 유에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물론이야.
그는 알게모르게 정든 미우미우를 떠나 판테온으로 향했다.
***
노바족의 영역 판테온은 과거의 프리드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집중해서 보았다. 그 노바족들이 사는 곳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건축물들은 대부분 독특하게 가공된 흰 나무들로 지어져 신비로우면서 무게감 있었고, 도시 곳곳엔 마법을 활용한 구조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게 눈에 띄였다.
"흐음, 실생활에 마법이 저리 활용되는 걸 보니 역시 노바족은 종족 전체가 마법에 능한 모양군요."
"뭘 새삼스러운 반응이야?"
"지금까지 저희가 만난 노바족은 모두 전투원들이었니 전체적으로 마법에 능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생활 전체에 마법이 녹아있다는 건 종 자체가 마법에 능하다는 말이죠. 이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물론 그들과 부딪힐 일은 더이상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알아둬서 나쁠 거 없다. 한 편 데몬과 아란은 낯선 판테온의 풍경에서 익숙한 기류가 떠다니는 걸 느꼈다.
"…… 최근에 전쟁이 있었군요."
"네놈도 느껴지냐. 하긴, 네놈들이 지나간 곳은 모두 이렇게 됐으니 잘 알겠네."
여기저기에 보수중인 건물, 거리를 다니는 노바족들의 얼굴엔 모두 그늘이 드리워져있고, 도시 전체엔 피폐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들에게 더없이 익숙한, 전화(戰火)가 휩쓸고 간 도시의 풍경이었다. 유에 역시 이를 느낀 듯 잠시 굳어 있었는데, 그런 그의 앞에 붉은색이 나부끼며 뭔가가 뚝 떨어졌다.
『어이, 그쪽 형씨는 누구야?』
[어?]
"저 사람이 왜……?"
길고 폭이 넓은 빨간색 머플러를 두른채 조용히 다가온 이는 세피로트였다. 그는 사람좋은 미소를 띄우며 묻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한 대 후려칠 듯 녹옥의 염주를 쥔 손 위로 힘줄이 올라와 있었다.
「인간이…… 맞나? 귀가 뾰족한 게 엘프 혼혈, 아니 근데 다른 차원에 엘프가 있을리는 없는데.」
"듣고보니 저놈 귀가 뾰족했네."
[여태 몰랐어?]
"엘프처럼 길게 눈에 띄이지않고 좀 뾰족한 수준인데 그마저도 저놈 더벅머리에 대부분 가려져 있잖아."
새삼 그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걸 안 그들이었다. 물론 크게 의미없는 사항이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롯뜨는 유에를 탐문하다 그의 목적등을 전해듣고 위험하지 않다 판단했는지 바로 디멘션 게이트가 있는 곳을 안내해줬다. 이상한 점이라면 어째선지 그는 유에가 새로 받은 이름, 은월을 듣고 눈에 띄게 당황했다는 건데 막 지어진 그 이름에 그가 왜 당황했냐는 거다.
[어떻게 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수상한 구석뿐이지.]
"그러게."
「적의는 안 보이지만 유에를, 그것도 은월이란 이름으로 저 사람이 알 법한 루트가…… 아무리 봐도 없는데 대체 왜지?」
과거의 프리드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세피로트가 한참 설명하고 있는 디멘션 게이트에 대한 경악스러운 사실들을 들으면서도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니까 안된다고 형씨.』
『이 손 놔라.』
『왜 사지에 제 발로 가는 거야? 그리고 심지어 저쪽에서 여기로 오는 것도 엄청 힘들어. 다시는 여기에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진짜로 갈 거야?』
순간 뭔가가 떠오른 듯 유에는 세피로트의 손을 뿌리치려다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돌리진 않았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 녀석에게 살아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녀석들이 사랑하는 그곳을 지켜야 해.』
『…….』
유에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디멘션 게이트 너머 풍경을 보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말을 들은 세피로트의 얼굴은 안타까움에 젖어 있었다. 마치 동정하는 것처럼, 그가 메이플 월드에 돌아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는 것처럼.
『펜릴 씨. 나 잠깐 메이플 월드에 갔다올게.』
『예? 갑자기 무슨─』
『이 약해빠진 형씨가 듣도보도 못한 곳에 떨어져서 객사하면 굉~장히 찜찜할 것 같거든. 자살을 도운 것 같다고 해야할까? 그러니까 이 형씨 좀 지켜준 다음에 다시 올게. 늦지는 않을 거야.』
『아까 전에 여기로 다시 오는 건 굉장히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펜릴이라고 불린 노년의 여성 노바족에게 일방적으로 외출을 통보한 그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렇긴한데 나는 예외거든. 냐하하!』
이후 세피로트는 유에를 붙잡고 디멘션 게이트를 건넜다. 그렇게 둘은 메이플 월드에─
========== 작품 후기 ==========
탁! 급히 책을 덮은 프리드가 도서관 홀에 나왔다. 두 사람이 어떻게 되나 지켜보던 이들은 갑자기 도서관 풍경으로 변한 것에 책에서 튕겼나 생각하다 유에의 책이 극중극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프리드가 책에서 나온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세피로트의 기묘한 행동들에 눈살을 찌푸리다 디멘션 게이트의 정체와 유에의 상태를 떠올리고 이후 벌어질 일을 무의식적으로 짐작했다.
「…… 존재의 시간이 모두 지워진 이가, 차원을 건너면 어떻게 되지?」
"그게 문젠가? 노바족 놈들도 자기들 세계랑 메이플 월드를 뺀질나게 왔다갔다 했잖아."
"문제니까 당황하고 있는 거겠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분은 차원 마법과 시간 마법을 동시에 익혔으니 다른 사람은 짐작못할 것까지 아시는 것 같습니다."
나인하트의 말대로 프리드는 조금 전까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차원을 건너는 행위 자체는 그 이전에 여러 사람들이 했었다. 그것이 우연이든 사고든 다른 차원의 존재 자체가 알려진 건 수많은 선례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러니 차원을 건너는 행위만 놓고보면 문제가 없다.
진짜 문제는 그 행위를 하는 자가 존재의 시간을 모두 잃어버린 이라는 거다.
「존재의 시간은 그 존재를 세계에 기록해 남기는 잉크같은 것. 그게 없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기록에서 사라진다. 이는 이미 증명됐어.」
앞서 차원을 건너는 행위가 문제없다고 했지만 그건 정상적인 사람에 한해서다. 어떤 사람이든 차원을 건너는 순간 - 자신이 속해있던 세계에서 벗어나버리면 그 존재가 흔들린다. 이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에게 적용되며, 당연히 존재의 시간을 잃은 그도 마찬가지리라.
안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못하는 이인데 차원을 건넘으로 그 존재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그 결과는 당연히─
「차원을 건넌 순간 새로 남긴 존재의 기록이 사라질 수 있……!?」
프리드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충격적인 사실에 들고있던 유에의 책을 떨어뜨릴 뻔 한 그는 다음 장을 펼치지 못하고 팔을, 어깨를, 다리에 떨림이 번지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잖아. 이건 너무 비참하다고. 이유야 어쨌든 세계를 구한 영웅인데, 우리 동료인데 왜 그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저, 저게 무슨 말이야?"
"…… 상상이상으로 끔찍하군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어쩌면 지금 시대에 와서 우리가 그를 처음 봤던 때가 처음이 아닐 수도 있겠네."
"둘 다 설명을 좀 하지 그래."
프리드의 절규와 고위 마법사라 프리드의 표현을 알아들은 팬텀과 나인하트가 무섭도록 굳어버린 모습에 유에의 상태가 심상치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안 이들은 둘에게 설명을 촉구했다.
"간만히 말하자면, 그는 차원을 건너는 순간 그 차원에서 쌓은 인연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겁니다."
"뭐……?"
"프리드 님이 말했듯 존재의 시간은 그 존재를 세계에 남기는 잉크이며, 차원을 오가는 것이 해당자의 존재가 흔들리는 행위임에도 안전한 건 존재의 시간으로 세계에 남겨둔 기록 덕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 세계에 이러이러한 일들을 했다'는 시간이 남긴 기록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놈은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없어. 그래서 차원을 건너 기존에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세계에서 해온 모든 일들이 '없던 것'이 되는 거야."
"그, 렇다면."
에반은 희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블랙윙 아지트에서 처음 만났던 그는, 어째서인지 가르쳐주지도 않았던 제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메이플 월드에 돌아온 순간 미우미우에서 만든 모든 인연이 사라졌을 겁니다."
프리드가 왜 차마 다음 장을 못 보고 절규했는지 이해될만큼, 실로 비참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외마디 비명조차 못 지르고 침묵하는 사이, 프리드는 숨을 헐떡이며 제 손의 책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다음 장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겨우 만든 인연을 모두 잃고, 자신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진 동료들을 찾아해멜 그의 모습을 멀쩡히 바라볼 자신이 없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지 않나?
「…… 일단, 확인하자.」
딱 하나만. 그가 처음으로 동료 중 한 명과 재회하는 순간만 보자. 한 쪽만 재회이고 다른 한쪽은 첫만남일테지만, 그거 하나만 보고 끝내자. 그 이상은 못 견딜 것 같으니까.
프리드는 다시 책의 목차로 돌아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을 재차 확인한 뒤 페이지를 넘겼다.
풍경은 창 밖으로 멋진 바다가 보이는 어느 고급스러운 방으로 변했다. 어? 저긴? 에반과 미르는 저곳이 어딘지 바로 알아보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처음으로 만난 영웅이 누군가 알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유에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검호?』
『일어났나.』
[엑?]
"말도 안돼……."
당황한 건 그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프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저 사람을? 책으로 보기만 했지만 모두와 적당히 친한 것 같던 유에가 가장 거리를 둔 게 검호였다. 그런데 그를 가장 먼저 만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어떻게 당신이 윽, 그리고 여기는 어디지?』
『여긴 빅토리아 아일랜드, 골드비치다. 난 여기 바캉스를 즐기러 왔었는데 일이 생겨서 못하게 됐고, 넌 타고 있던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한 걸 같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롯뜨라는 남자가 구해줬다.』
『그놈이 진짜……!』
드물게 말을 많이 하는 그의 모습이나 어쩌다 유에가 비행기에 탔다가 바다에 추락했는가는 그렇다치고, 뭔가 이상하다.
『혹시 치료가 덜 된 곳이 있나? 그렇다면 호텔 내 마법사를 불러줄 수 있는데.』
『문제없다. 이 정도는 참을만 하니까. 그런데 당신이 여기있다는 건 다른 동료들도─』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꽤 많은데…… 일단 진정하고 들어줄 수 있나 유에?』
「뭐야? 어째서?」
검호 씨가 유에를 기억하고 있는 거야?
멀쩡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검호의 모습에 유에가 겨우 만난 동료들에게 거부당하고 상처받을 미래를 각오했던 프리드는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광경을 보았다. 다른 이들도 예상과 한참 다른 둘의 재회에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의구심을 띄었다.
그러나 이어진 이야기를 그들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검호를 중심으로 풍경 전반과 목소리가 모조리 일그러진 것이다.
「갑자기 무슨…… 누가 이 책에 물이라도 엎질렀나?」
화면이 잘 안 보이는 건 프리드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엉망인 부분인데 그들의 경우 책 속의 책의 형태로 보느라 한 차례 더 열화되어 알아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 유에의 책을 직접 보는 프리드는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지만 그들이 보기엔 인물과 배경, 대화까지 모두 노이즈가 끼어 계속 봐봤자 뭐가 어떻게 되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부분은 넘어갈까요? 나중에 그분의 책을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
"그의 책이 있으니 그러도록 합시다."
결국 그들은 해당 장면을 스킵하고 멀쩡한 부분을 찾아 보기로 했다. 페이지가 많이 넘어가며 배경은 골드비치에서 엘리니아로 바뀌었다.
[아깐 만나는 부분만 보고 그만둔다더니 계속 보고있네.]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그렇겠지."
"에반 당신은 그 바다가 어딘지 알아본 것 같았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스승님과 같이 갔던 곳이에요. 갑자기 슬라임이 대량발생해 리조트를 습격해서 처치하는 걸 도와줬었거든요. 저희말고도 거기 가던 다른 사람이 사고로 떨어졌었는데……."
[우린 그때 떨어진 사람이 롯뜨라는 양반하고 비행기 조종사 2명으로 기억하거든. 근데 유에 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두 사람이 저 때 유에와 만났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말인 즉, 유에는 이후 한 번 더 차원이동을 했었다는 뜻이겠지.
「어? 두 번째 동료랑 만날 때 검호 씨가 함께 있었어?」
프리드는 검호만 유에를 기억하고 있는지, 다른 이들도 기억하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두 번째 만남까지 찾았다. 그리고 그때에도 검호가 함께 있었다는 것에 누굴 만나는 건가 갸웃거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큰 폭음이 울리며 숲이 진동했다. 나뭇가지들이 요란하게 부딪히며 사방에서 잎이 우수수 떨어졌고, 두 전사는 들썩이는 땅 위에서 바로 균형을 잡으며 폭음의 근원지를 향해 달려갔다.
보라빛 불길이 넘실거리며 숯덩이가 된 나무들의 가운데,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있었다.
『크, 하하! 하하하하─!!』
「어…….」
"어어……."
"…… 샌님?"
[뭐지. 도플갱어인가.]
파괴의 중심지에서 어둠을 흩뿌리며 미친듯이 웃는 남자는 루미너스의 모습을 한 사람이었다. 루미너스 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도저히 그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는 루미너스란 남자는 검은 마법사의 사슬파편들을 둥둥 띄워놓고 사방에 어둠의 불을 지르며 냉철한 이성을 밤하늘의 은하수 저 편에 보낸 이가 아니다.
『야 이 미친 자식아──!』
그 광경에 다들 벙찐 사이 검호만이 비호처럼 자리에서 뛰쳐나가 루미너스의 머리를 붙잡고 숯덩이가 된 나무 중 하나에 쳐박았다.
『유에! 저 애를 아스카랑 에반한테 데리고 가서 치료해!』
『아, 알았다.』
마찬가지로 얼빠진 표정으로 루미너스의 모습을 한 미치광이를 보던 유에는 땅에 쓰러져있던 한 소녀를 데리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두 번째 동료와의 재회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가 데려온 소녀를 에반이 치료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다소 지친 기색의 검호가 돌아왔다.
『스승님!』
『엘리니아로 바로 간다. 유에, 그 애를 업고 갈 수 있나?』
『가능하다만 그보다 좀 전에 그 남자, 루미─』
『아니다.』
단호하게 그의 의문을 부정하는 검호의 모습에 다른 이들마저 진짜 도플갱어인가? 의심했다. 아니라는 걸 내심 직감했으면서도.
『그 놈은 루미너스가 아니야.』
『그럼…… 누구지?』
『얼굴만 닮은 놈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나중에 만나도 오해하지 마라. 가능하다면 그냥 모른척하고.』
「그, 그러고보니 아까 루미너스 책을 봤을 때 검은 마법사때문에 어둠이 어쩌고 했었…….」
그 와중에 프리드는 혼란해하면서도 루미너스가 그렇게 변한 이유를 정확히 맞췄다. 즉, 저때의 루미너스는 검은 마법사에 의해 몸에 스며든 어둠이 폭주해 저 꼴이 됐다는 소리다.
『지금 그놈과 대화해봤자 네 머리만 아플거다.』
『…… 그렇겠지.』
불행인지 행운인지 유에는 루미너스를 만나긴 했지만 대화는 하지 않음으로 - 루미너스 상태를 볼 때 그 순간 유에의 존재를 눈치채긴 했는지 의문이다 - 자신이 잊혀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만약 그놈이 네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마 내 탓때문일 거다.』
『응? 무슨 말이지?』
『아까 너무 화가 나서 머리를 때렸는데, 생각해보니 좀 과할정도로 세게 때린 것 같다. 안 그래도 심각한데 정신이 완전히 맛이 갔어.』
정말 진지하기 짝에 없는 그 말에, 그들은 뒤늦게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팬텀의 웃음소리가 컸다.
***
아... 이번편 내에 좀 끝내려 했는데 왜 분량이이이이이!!!! 아예 2편을 써서 연참할까 했는데 제사에 친척들과 물놀이를 가기로 해서 이번 주 주말 내내 다음편 쓸 시간이 없... 저번 주까지 한 편 쓰기로 한 약속도 못 지켜서 그냥 중간까지 써서 올렸습니다.
기어코 까발려진 루미너스의 흑역사. 심지어 한 두명도 아님(...) 거기다 검호 책으로 나중에 한 번 더 나옴(...)
@Alinnalae - 이전에도 설명했지만 트립퍼는 원래 메이플 세계관의 존재가 아니기때문에 책 자체가 생길 수 없습니다. 생긴 검호가 특이케이스에요.
@레볼레이션 - 잘하면 또 한 편 쓸지도 모르지만 이번 달은 지쳐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kjjin100587 - 원래는 시그너스의 후손 중 한 명이 초월자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시그너스는 그 힘을 넘겨주는 인계자의 역할이었고요. 그런데 생오버가 어차피 초월자 시스템은 이번 사건을 끝으로 폐기하기로 했으니 시그너스를 반 초월자로 각성시키기로 한 겁니다.
@Endogeny - 나중에 말할 기회가 없어서라고 하지만 너무했죠~
@KRamiya - 자세한 설명은 검호 책 차례가 될 때!
@l감 - 과거의 프리드 포함 영웅즈의 멘탈이 남아나질 않음. 그리고 유에가 검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