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거의 프리드가 기가 찬 얼굴로 또 책에서 나와 이마를 짚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웃고 또 웃었다.
그 루미너스가!
질릴정도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그가!
어둠에 취해 정신줄을 놓다니!
"크흡, 겨우 힘의 파편만으로 그 인간을 그렇게 망가뜨리다니 그 자의 강함이 새삼 놀랍군요."
[이야~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 마스터랑 같이 따라가보는 거였는데 진짜 아깝다!]
"푸흐흐, 그랬으면 나중에 루미너스 씨한테 입막음 당했을 거야."
"어떤 의미로 그분이 이번 책을 안 본 게 다행이군요."
"있었으면 100% 발광했을 걸."
영웅이 아닌 이들은 웃음을 흘리며 어찌어찌 말을 이어갔지만 그의 동료인 영웅들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고 있었다.
"흐흐, 샌님이, 샌님이 그, 아하하하!"
"그렇게, 엄청 폼 잡아놓고 한 방에, 푸훕!"
"이걸로 10년은 놀려줄 수 있겠네!!"
말은 10년인데 분위기는 평생 우려먹을 기세다. 실로 참동료가 아닐 수 없다.
「이러면 제대로 동료를 만난 건 세 번째쯤에나…… 잠깐 이건 또 뭐야?」
어둠에 물든 루미너스때문에 헛웃음까지 흘리던 과거의 프리드는 유에가 다음 동료를 만나는 시점을 찾다 이상한 것을 보고 다시 책을 펼쳤다. 풍경은 몇몇 이들에게 익숙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엘프의 마을, 에우렐로 변했다.
"설마 세 번째가 나였어?"
"일단 그런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데. 왜 다 멀쩡한 거야?"
메르세데스는 자신도 그를 만났으면서 잊은 건가 생각하다 곧 에우렐의 풍경이 이상한 걸 눈치챘다. 분홍색 꽃잎을 떨어뜨리는 수호목도, 건물들도 모두 멀쩡한 건 그렇다치고 어째서─ 엘프들이 얼음속에서 모두 깨어나있는가.
아직도 그들은 다 깨어나지 못했는데.
『이곳은 엘프들의 영역. 어떤 일로 이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헬레나에게 연락받지 못했나.』
『헬레나의 연락…… 아, 네. 물론 받았습니다. 그 아이가 말한 게 당신이었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하군. 헬레나에게 듣기론 검은 마법사의 저주로 엘프들이 모두 얼어버렸다고 했었는데.』
그도 찾아가봤자 의미없을 거라 했었지만 그래도 마침 엘리니아까지 왔으니 가까운 에우렐에 한 번 들러본 건데 상상이상으로 양호한 상태다. 장로 필리우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답해주었다.
『검은 마법사의 저주요? 하하, 그건 풀린 지 오래입니다. 에우렐은 예전의 평화를 되찾았죠.』
『그거 다행이군.』
"저 무슨……."
"침착해 여왕님. 현실과 동떨어진 저 과거가 뭔지는 곧 밝혀질테니까."
『메르세데스 님도 돌아와 계십니다. 왕의 쉼터에 계시니 들어가보시지요. 옛 친구분을 보면 왕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실례하지.』
팬텀이 메르세데스를 진정시키는 동안 유에는 필리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왕의 쉼터로 향했다.
『저 그런데……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음?』
그는 과거 동료들과 함께 에우렐에 왔었는데 왜 제 이름을 기억 못하나 의아해 했지만, 그때 자신은 엘프들과 딱히 교류하지 않고 프리드를 돕거나 수련만 했었으니까 기억에 안 남을만 했다고 대충 납득했다. 과거의 프리드도 필리우스가 그를 기억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여겼다.
그리고 유에는, 바로 제 이름을 말하려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잊은 장로에게 조금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은월이다.』
『아, 은월님이시군요. 어서 가보시죠. 저는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오도록 하겠습니다.』
의심없이 새로운 이름은 본래 제 이름으로 믿는 필리우스의 모습에 유에는 흐, 작게 김빠지는 웃음을 내뱉고는 왕의 쉼터에 들어갔다. 나중에 제대로 알려주면 당황하겠지.
왕의 쉼터에는 필리우스의 말대로 메르세데스가 푹신한 흔들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가볍게 발을 까딱이며 따뜻한 햇살을 즐기던 그녀는 유에의 등장에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와! 이게 얼마만이지? 수백 년 만인가?』
『글쎄.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다르겠지.』
『푸훗. 그래. 우린 저주에 걸려서 수백 년을 얼음 속에서 보냈으니 엊그제 일만 같으니까.』
「이건 또 뭐야……?」
검호 씨에 이어 메르세데스까지. 설마 다른 동료들은 얼음에 갇힘으로 존재의 시간이 사라진 여파에서 벗어난 건가? 과거의 프리드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것저것 생각하는 동안 이어지는 대화에 메르세데스와 팬텀, 아란은 나란히 인상을 썼다.
『아무튼 오랜만이다. 그 날은 제대로 인사도 못 했지. 만나자마자 이런 이야기부터 꺼내서 미안하지만, 그 날 내가 사라진 이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
『그, 그 날?』
『혹시 바로 얼음에 갇혀서 아는 게 없나?』
『그게 그러니까…… 아이참, 간만에 만났는데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 마을부터 구경하는게 어때? 이제 다 멀쩡해져서 보여주고 싶거든.』
저거 수상한데. 아란은 이미 지나간 과거라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마하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만약 저게 지금 벌어지는 일이었으면 그녀는 망설임없이 폴암을 치켜들었을 것이다. 팬텀과 데몬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느정도 추측을 끝냈고, 메르세데스 본인은 눈을 치켜뜨며 고운 치아를 뿌득, 갈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마을이더군. 다른 녀석들도 이곳에 온 적 있나?』
『으, 응! 물론 다들 다녀갔지. 네가 제일 늦게 온 거야!』
영웅들 중에서 아란은 최근에야 메르세데스를 만나러 에우렐에 한 번 가봤었고, 팬텀은 깨어난 이후 블랙윙과 군단장 조사에 바빠 아직도 들르지 않았다.
『그런가. 프리드도 꼭 다시 와보고싶다 했었는데…….』
『프리드? 으, 응! 프리드도 당연히 다녀갔지!』
『…… 뭐?』
『네가 꼴찌라니까? 대체 얼마나 잠을 잔 거야? 다같이 잠들었는데 지금 너만 깨어났잖아.』
과거의 메르세데스가 부산스럽게 말을 이었지만 유에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프리드가, 왔었다고?
이미 몇 백년은 전에 죽은 프리드가?
그는 에우렐에 오기 전 검호가 한 번 만나보라고 했던 페어리 퀸 아마란스에게 찾아가 그녀가 보존해온 프리드의 생가를 방문했었다. 그녀는 프리드에게 일찍히 자신에 대해 들은 눈치였고, 거기서 프리드가 어떻게 살다갔는지 확인하고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프리드가 네 얘기도 했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렇게 늦냐고 말이야. 그동안 뭔 일 있었어 은월?』
『…… 네놈은 누구냐.』
『응?』
그제서야 그는 검호에 이어 동료를 만난 기쁨에 취해 미처 눈에 들어오지 못한 위화감들을 깨달았다. 과거의 프리드 역시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에 얼굴을 구겼다.
정말이지, 질나쁜 환상을.
『메르세데스 연기는 그만둬라. 은월은 그녀가 모르는 이름이고, 프리드는 오래 전에 죽었다. 네놈은 누구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후후…… 용케 알아챘네?』
보기보다 제법인 걸요? 말투가 바뀌며 메르세데스의 신형이 일렁이며 다른 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짧게 정리된 분홍색 머리, 꽃과 깃털이 장식된 검은 실크햇과 고딕풍의 미니 드레스를 입은 - 엘프.
『내가 보여주는 달콤한 꿈 속에 머물러있는 게 더 나았을텐데. 메르세데스 님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돌아갔으면 좋았잖아요?』
『엘프인가. 왜 엘프가 메르세데스 흉내를 내고있는 거지? 넌 누구냐.』
『그건 당신이 알 거 없어요. 그 동안 에우렐에서 제법 재미있었는데, 당신덕분에 이 놀이를 끝내게 생겼거든요.』
꿈은 꿈이라는 걸 아는 순간 깨버리니까. 몽환적인 분홍색 눈을 나비처럼 접으며 눈웃음을 그려낸 정체모를 엘프는 연극 배우처럼 실크햇을 들어 인사했다.
『오늘의 빚은 나중에 갚아줄게요. 그땐 끔찍한 악몽을 보여줄테니…… 아, 당신은 이미 현실이 악몽이던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나중에 알게 될 거에요.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죠. 안녕히.』
『기다려!!』
유에는 퍼뜩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리고 그들이 있던 왕의 쉼터부터 에우렐이 마치 환상이 벗겨지듯 색색의 나비들로 화해 흩어졌고, 발밑이 사라져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았던 유에는 왕의 쉼터 한복판에서 누운 채 정신을 차렸다.
『…… 하?! 여긴?』
그는 빠르게 몸상태를 확인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우렐의 왕의 쉼터. 그럼 여기 온 것까진 현실이었나? 그럼 어디서부터가 환상이었지? 급히 쉼터에서 뛰어나온 그는 아까 보았던 것과 반대로 여기저기 솟아있는 얼음들의 존재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을이 멀쩡했던 것도 환상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그는 정체모를 엘프 여자가 손을 써 악몽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던 엘프 장로들을 깨웠고, 진짜 메르세데스는 힘을 회복하기 위해 메이플 월드를 여행중이란 말을 듣고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 다시 돌아오실지 모르지만 왕께서 나중에 마을에 돌아오시면 당신께 가장 먼저 연락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그건 고맙군.』
『옛 친구가 만나러 왔다는 걸 알면 그분도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알다시피 왕께선 정이 많으신 분이니까요.』
그렇게 필리우스와 장로들의 감사인사와 함께 배웅을 받으며 에우렐을 떠나는 유에를, 과거의 프리드는 찌푸린 얼굴로 보다 또 책에서 나와 깊게 생각에 잠겼다. 다른 이들도 조금 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엘프는 뭐였던 거지?]
"당신은 아는 바 없습니까."
"나도 모르겠어. 엘프라면 내가 모를 리 없는데 기억에 없는 아이야."
엘프족 자체가 예나 지금이나 수가 많지 않아 낯선 이는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녀가, 엘프의 왕이 본 적 없는 엘프라니. 심지어 조금 전에 보인 힘의 규모는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악몽을 꾸게 만든 걸 보면 꿈을 조종하는 계통의 힘같은데, 제가 알기론 그건 꽤 희귀한 힘이에요."
"거기다 약해진 상태라곤 해도 영웅인 그까지 말려들게 한 걸 보면 상당히 강한 것 같고. 대체 뭐지?"
"왕인 당신이 짚이는 게 없다면 프리드 쟤도 딱히─"
「─왜 저 애가 저런 짓을 하는 거지?」
테스의 말과 반대로 한참 생각하던 프리드는 분홍머리 엘프가 누군지 대충 아는듯한 말을 흘렸다. 뭐야 어떻게 아는 거야?
그리고 실제로 프리드는 좀 전의 분홍머리 엘프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빅토리아 반도의 봉인석을 만들러 에우렐에 한 번 찾아갔을 때,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멀리서나마 메르세데스를 집요하게 보던 소녀 시절의 그녀를 봤었다. 누구냐고 묻고싶었지만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정작 메르세데스 앞에 가서 말을 걸 용기는 없었는지 꽤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아 그건 그거대로 특이해 기억은 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 본인은 상상도 못했으리라. 모든 엘프들의 기억에서 스스로를 지우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스쳐지나가듯 그녀를 보았던 한 인간이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 물론 대마법사, 프리드의 기억력이 유독 범상치않은 거지만.
「메르를 꽤 좋아하던 것 같았는데 왜…… 모르겠네. 이름이라도 알면 책을 찾아 확인할 수 있을텐데.」
"지나가듯이 본 저 자는 기억하고 있는데 정작 엘프의 왕이라는 사람은 전혀 기억을 못하다니. 뭡니까 이게?"
"시, 끄러워."
메르세데스는 존재의 시간이 지워진 유에를 검호가 기억하는 것을 봤을 때처럼 기묘한 얼굴로 프리드를 보았다. 뭔가 더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의 관심사는 유에의 책을 마저 보는 쪽에 맞춰져 있어 꿈을 조종하는 분홍머리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까지 제대로 만나지 못하다니, 이건 운이 좋은 거라고 해야 할까 나쁜 거라고 해야 할까.」
참혹한 진실을 깨닫기까지 유예기간이 연장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길어지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가. 유에는 에우렐에서 나와 다른 동료들을 찾았으나 얼음에서 깨어난 그들 역시 그처럼 모두 약해져 힘을 되찾기 위해 메이플 월드를 여행중이라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는 행방이 묘연한 그들 중 한 명이 반드시 들를만한 곳을 떠올리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최근 매우 잘생긴 청년에게 고급스러운 비행선을 발주받았다는 오르비스로.
***
『감사합니다 모험가님!』
『별 거 아니다.』
『참, 부탁하셨던 오르비스 지도 여기 있습니다.』
님프의 감사 인사를 받은 유에는 지도를 펼쳐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크게 달라진 곳은 없어 그것 역시 제가 아는 위치에 있을 것 같다.
오르비스에 도착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이곳에서 비싼 부유선을 발주했다는 미남 - 팬텀의 행방을 찾는 거였고 이 과정에서 그는 주민들의 민원 해결을 하다 오르비스 무게를 늘리는 픽시들을 상당 수 줄여주었다.
『이쯤이겠군.』
"어? 저긴?"
"뭡니까."
유에가 향하는 방향을 보던 팬텀은 조금 당황했다. 그도 동료였던만큼 알고있어도 이상할 건 없는데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저곳이 까발려지는 건 안 좋은데. 하늘 공원의 외진 곳에 도착한 그는 팔에 정령을 강령시키고 허공을 더듬다 뭔가를 찾은듯 틈을 벌리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큼직한 바위들이 보였다.
"아…… 저거 혹시."
"팬텀 네 창고잖아!"
"하아, 나 만나려고 창고들 찾아다녔었나."
"현명하네요. 어딜 돌아다니는지 모르는 사람이니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보다 반드시 갈만한 곳에 죽치고 기다리고 있는게 더 낫다고 생각한 거겠죠."
그들의 말대로 유에가 찾아낸 바위들의 틈 사이로 화려한 금장이 입혀진 문이 숨겨져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가자 지하로 이어진 계단 끝에 팬텀을 상징하는 문양의 문이 또 나타났다.
"네 보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어?"
"잘 숨겨놨었으니까. 몇 개 털린 것도 있었지만……."
"훔친 걸 도둑맞다니, 괴도 명성이 울겠습니다."
"시끄러. 1, 2년도 아니고 8백 년인데 그동안 보안 시스템이 멀쩡하면 그쪽이 더 이상하잖아."
나중에 돌아가면 저기 창고에 든 보물들은 모두 다른 곳에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며 팬텀은 창고를 둘러보는 유에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문이 잠겨있지 않고 보물이 다소 줄어든 흔적에 팬텀이 이미 여길 왔다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비행선 대금지불을 위해 여기 것을 땄던 모양이군.
그 뒤로 그는 다른 지역의 창고들을 더 찾아가며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여긴 자물쇠가 굳게 잠겨있는데…… 아직 다녀가지 않았나. 하지만 너무 멀쩡한 걸 보면 최근에 다시 단 것 같기도 한데.』
"마법으로 격리 시켰으니까 멀쩡하지……!"
『일단 들어가서 확인하자. 상당히 비싸다고 했지만 급전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 했던 녀석이니 자물쇠 하나 부쉈다고 물어내라 하진 않겠지.』
"얌마!!"
"혹시 당신 창고 턴 사람 중 한 명이 저 사람 아닙니까."
[에이 설마~ 그냥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려고 저러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동료 재산을 털까. 과거의 프리드도 거침없이 자물쇠를 부수고 창고에 들어가는 유에의 모습에 의외로 무대포였다고 당황하는 한 편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다음 창고에서 유에가 기어코 팬텀과 만나버렸기 때문이다.
『아, 저게 창고를 지키기 위해 세워뒀다는 가디언인가.』
"잠깐 저거 고장난 건데?"
"뭐?"
"몇 백년이나 지나서 작동은 하는데 고장나서 날 못 알아보고 공격했던 거야."
[그런데 세월때문이 아니라 저 양반이 들어가면서 좀 만져준 탓에 그리 된 건가 의심중이고?]
"그, 그건 아니야. 만약 그랬으면 내가 찾아갔을 때 이미 박살나 있었겠지."
말을 하면서도 팬텀은 다소 떨리는 눈으로 가디언에 다가가는 유에를 보았다. 큰 돈 들였던 건데 수 백년이나 지나 이젠 환불도 못 받는 가디언이 고장나서 전에 자신은 저 창고에 갔었을 때 저것과 대판 싸웠었기 때문이다. 저 때의 유에가 얼마나 힘을 회복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걸 이길 수 없을만큼 약한 상태라면 꽤 곤란해질 거다.
『흐음…… 부수기엔 꽤 정교한데다 비싸보이는데.』
『음성, 확인.』
『쯧. 침입자로 인식한 건가. 여기는 포기─』
『확인 완료. 출입을 허가한다.』
『…… 응?』
"저 고철이 진짜!!"
돌아가면 반드시 버린다. 팬텀이 주인은 공격하더니 정작 침입자한테는 냉큼 비켜주는 배은망덕한 가디언을 욕하는 사이 유에는 얼떨떨한 얼굴로 창고에 들어갔다.
『가디언이 저 모양인 걸 알면 팬텀이 화 좀 내겠군. 그래도 여기는 아직 안 온 것 같은데.』
그는 앞서 지나온 곳들에 비해 배 이상은 많은 금은보화가 쌓여있는 보물창고를 둘러보았다. 일단 누군가가 손댄 흔적은 없다.
"실례지만 팬텀 님 연합에 조금 적선해주실 생각 없습니까?"
"응? 왜?"
"근래 여기저기 돈 쓸 일이 많아서 예산이……."
"와! 저 사람 시그너스 여제님을 닮았네요?"
에반의 외침에 나인하트와 얘기하던 팬텀은 아차했다. 그들이 얘기하는 사이 저곳에 있는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 아리아 여제의 초상화를 다른 이들이 모두 감상하고 있었다.
"아리아 선대 여제네."
"저, 저 사람이요?!"
[일전에 나타나셨을 때랑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데.]
"그건 그 때가 이상했던 거야."
기억하는 아리아 여제의 모습이라곤 - 사실 팬텀한테 빙의했던 거라 생전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 할버드를 들고 하늘베기를 시전하는 위엄넘치는 자태뿐인 에반과 미르는 뜨악하며 초상화를 다시 보았다. 유에도 아리아 여제의 초상화를 보곤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팬텀 녀석, 여기에 가디언까지 세운 이유가 저거때문이었나.』
「그러고보니 저 초상화도 어느 귀족한테서 훔쳤다고 들었는데 누구였더라……?」
"맙소사 저거까지 훔친 겁니까."
"넌 다물어."
그러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뭐야? 가디언이 망가진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침입자? 아아, 괴도 팬텀의 체면이 말이 아니네.』
어쨌든 손님 대접은 제대로 해주지. 여유롭게 계단을 걸어내려온 과거의 팬텀의 모습에 유에가 살짝 놀라며 그를 부르려는 순간, 빛으로 이루어진 카드들이 날아왔다.
날아드는 카드들을 클로로 쳐내기 무섭게 사각에서 찔어들어오는 케인을 수호의 정령들로 막아낸 그는 이어서 대지의 정령을 강령시켜 땅을 내려쳐 큰 진동을 일으켰다. 다리를 저릿하게 타고 올라오는 진동파에 과거의 팬텀은 인상을 쓰며 회복 마법과 부유 마법을 연달아 사용해 거리를 벌렸다.
『하…… 제법인데? 이 팬텀 님의 보물창고를 노릴 자격은 충분해. 하지만 애송아,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나도 이젠 제대로 상대해주겠─』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물론 허락없이 들어온 건 내 잘못이 맞긴 하다만 좀 과격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불의 마력을 한껏 머금은 카드들을 쥔 과거의 팬텀은 페르소나 아래로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나지않는 과거의 제 모습에 팬텀은 저때의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 잘 알 것 같아 헛웃음조차 못 짓고 조용히 팔짱을 꼈다.
『여기서 더 격하게 싸우면 아리아 여제의 초상화가 망가질지도 모른다. 이거 감추려고 못 들어오게 한 거 아닌가? 들켜서 민망한 건 알겠는데 그런 장난 별로 재미없다.』
『…… 너 누구야. 아리아를 어떻게 아는 거지.』
꽤나 길었던,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유에가 듣게 되었을 그 말을 과거의 팬텀이 내뱉었다.
『장난이 심하다. 기억상실 컨셉은 루미너스가 이미 가져갔으니까 썩 유쾌하지 않아.』
『샌님까지 알고, 너 대체 누구야. 검은 마법사가 보낸 놈이냐?』
『……?!』
그래도 드디어 제대로 동료를 만났다는 사실에 희미하게 미소를 유지하던 유에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이를 보던 과거의 프리드와 다른 이들 역시 미약하게 탄식을 흘렸다.
『계속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힘으로 실토하게 해주겠어. 순순히 말하는게 좋을 거야.』
『잠깐…… 잠깐! 뭔가, 뭔가 잘못됐어. 이건……!』
『잘못되긴 뭐가 잘못 돼? 흥, 이제와서 겁이라도 먹은 거야?』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 지금은 먼저 확인해봐야할 게 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아봐야해. 아리아와 루미너스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기억상실은 아닌데, 부분 기억상실이라기엔 너무 절묘하게 자신만 잊어버렸다. 연기라 보기엔 저 살기는 진짜다.
『야! 가긴 어딜 가!? 당장 이리 안 와? 야!』
『네 장난이 더 심해진 거길 빈다. 그게 아니면…… 아니, 다른 경우의 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라는 거야 너?』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빠르게 창고에서 빠져나와 멀찍히 떨어진 곳까지 도망치는 유에를 보며 과거의 프리드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마 유에를 잊어버렸을 저 때의 팬텀에게 아리아를 기억하는 이는 동료 아니면 적. 그리고 낯선 이라면 십중팔구 적이라 판단하겠지.
그리고 저런 과거를 전혀 기억 못하는 팬텀은 별다른 말없이, 그러나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묵묵히 보았다.
『장난? 아니야. 그러기엔 그 눈빛과 표정은 진심이었어. 그리고 그 정도 장난을 칠 정도로 악질인 놈도 아니고. 그럼 이 상황은 대체……!』
만약 처음부터 그를 기억 못하는 동료를 봤다면 바로 상황을 알 수 있었지만, 그가 최초로 만난 건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를 멀쩡히 기억하는 검호와 이어서 만난 이들도 이리저리 꼬여 유에가 잊혀졌음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짐작가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헤쓱해진 얼굴로 나무를 짚으며 몸을 세웠다.
『일단…… 일단 다른 놈들도 만나보자. 그럼 이 상황이 어떤지 확인할 수 있을테니까…… 설마, 설마 그럴리 없어. 내가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걸 거야, 그래야만 해.』
유에는 간절함마저 엿보이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다음 동료를 만나러 향했다.
그가 간 곳은 때마침 여행중이던 아란이 돌아왔다는 리엔이었다.
"아, 이런."
"왜 그럽니까?"
"기억이 없으니 내가 저 때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알 것 같아서."
영웅을 추앙하는 리엔에서 아란을 만나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해주지 않아 그는 리엔까지 가서 아란을 못 만날 뻔 했지만, 안타깝게도 저 때의 유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매우 쉽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란 누나를 만나러 왔다고요? 곧 데려올게요!』
『그……래.』
저무렵 검호의 추천장을 받고 리엔에서 막 공부를 시작했던 과거의 에반이 골드비치에서 만났던 유에가 리엔에 찾아오자 기쁘게 맞이하며 아란과의 만남을 접선해준 것이다. 밝은 얼굴로 아란을 데리러 간 과거의 제 모습에 에반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떡해 전혀 기억이 안 나.
『당신이 날 찾아왔다고? 무슨 용건인데?』
『어? 아는 사람 아니에요?』
『몰라. 처음 본다고.』
『하지만 스승님은 전에 동료라고 했었는 걸요.』
『검호가……?』
과거의 아란은 자신을 찾아왔다는 낯선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다 검호가 동료라고 언급했었다는 에반의 말에 곰곰히 생각했다. 옛날에 우리 도와줬던 사람인가? 그런 고민하는 모습 자체가 자신을 전혀 기억못한다는 뜻임을 알아버린 유에는 절망해버렸다.
『미안, 내가 자잘한 건 기억 못 해서 옛날에 우리 도와줬던 사람은 잘 모르겠네. 그런데 당신 요정족 혼혈같은 거야? 우리야 얼음속에 갇혀있었다지만 당신은 어떻게 8백 년을─』
『됐다. 괜히 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하다. 이만 가지.』
『어, 어?』
『아란 누나한테 용건 있던 거 아니셨어요?』
『있었는데…… 이제 됐다.』
그는 뒤에서 저를 부르는 에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듯 생기가 완전히 빠져나간듯 유령같은 걸음으로 리엔에서 나와 빅토리아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최악이라 생각했던 가정이 거의 사실임을 알아버린 그는 반쯤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리며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여섯갈래 길에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을 들었다.
『용케 살아남았군. 그때 전투 여파에 휩쓸려서 죽은 줄 알았는데.』
『저도 제가 어떻게 거기서 살았는지 궁금합니다만, 당신도 모르는 것 같군요.』
새벽 이슬처럼 청아한 목소리와 은연중에 힘이 내려깔린 목소리. 과거의 유에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자 새하얀 유니콘을 거느린 메르세데스와 이전의 예복이 아닌 수수한 차림의 군단장 데몬이 보였다.
『메, 메르세데스?』
『어?』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 모르는데. 그대는 누구지?』
[와, 저렇게 운이 없기도 힘든데.]
"나도 같은 생각인데 지금은 조용히 해줘 미르."
"저도 만났었군요."
동료들에게 보여주었던 친근한 모습이 아닌 대외적으로 보이는 왕의 자세로 자신을 대하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에 유에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고, 그런 그를 과거의 데몬은 메르세데스의 위압감에 눌렸다고 생각했는지 예의를 차리며 다가갔다.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이 여자 멀쩡하게 보이지만 꽤 단순해서 대하기 쉬우니까요.』
『뭐얏?!』
『보십시오. 참고로 당신은 옛날에 아란과 함께 저희가 상대하기 쉬운 영웅 1, 2위를 다퉜습니다.』
"…… 그런 것도 있었냐."
"적에 대해 대책을 세우려면 당연히 분석을 해야죠."
데몬은 자신도 유에를 잊었다는 것에 크게 충격받지 않았다. 어차피 옛날엔 적이었고, 지금이라고 딱히 의미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리고 과거의 유에는 메르세데스는 물론이고 목숨걸고 싸웠던 군단장까지 자신을 기억못하는 모습에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도망쳐 어느 포탈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그란디스로 이어진 차원의 균열임을 그는 몰랐다.
「이쯤에서, 슬슬 끝내버리는 게,」
팬텀을 만나는 시점부터 내내 안색이 창백했던 과거의 프리드는 자신이 그란디스로 건너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유에를 보며 책을 메만졌다. 중간중간 자신을 닮은 소년이라던가, 전 군단장 데몬이 살아있다는 것에 시선이 가긴 했지만 유에에 대해 알만큼 알았으니 이쯤에서 끝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가 괴로워 하는 걸 더 봤다간 자신도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거라는 사실에 가까운 예감도 들었고.
그러나 이어서 유에에게 벌어진 일은 그조차 눈물이 안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다가 그란디스에 온 걸 안 과거의 유에는 메이플 월드에서 자신이 잊혀졌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자신을 기억하는, 자신을 필요로 할 곳 - 미우미우로 향했다.
『아니 자네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겐가?』
『예?』
『이 마을은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여우신의 결계가 쳐져 있는데! 귀도 꼬리도 없는 자라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로다.』
『무슨, 말씀을.』
『어찌됐건 당장 이 마을에서 나가주게. 지금 당장!』
자신을 기억못하는 노야의 모습에 유에는 당황하며 그의 집에서 나왔다. 설마, 설마.
『노야는 나이가 많으니까…… 나를 깜빡했을 수도 있어. 그렇잖아? 그러니까, 다른 여우들을 확인해보자.』
이미 스스로도 믿지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뾰족귀 마을을 돌며 다른 여우들을 만나러 갔고,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훠, 훠이! 물러나라 이 괴물! 우리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테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당장 썩 꺼지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볼 것이야!』
『아이고 이게 왠 일이래. 너, 너 이곳은 여우들이 사는 마을이니 어서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자자, 착하지?』
…… 귀도 꼬리도 없는 낯선 생물체에게 적대심을 내비치는 여우들을 보며, 그는 이제 실성한듯 웃음을 흘렸다.
『아직까지 마을에서 나가지 않았나? 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와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겐가?』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누굴 말인가?』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아이.
『랑, 이라고.』
『랑이? 자네가 내 손녀를 어떻게 알고 있는…… 설마 랑이 그 아이가 자네를 이 마을로 끌어들인 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에잉, 정령을 못 다루게 되더니 하루종일 여우나무 앞에만 앉아서 귀신에 홀렸다는 소릴 듣더니 이젠 외지인을 끌어들이나.』
랑이가 정령을 잃고 여우나무 앞에만 앉아있다는 말에 유에의 음울한 눈에 희미하게 빛이 돌았다. 어쩌면. 그러나 과거의 프리드는 그가 희망을 가지는 모습에 더 안타까워했다.
『너는…… 누구야?』
『…… 은월이다.』
『은월? 숨겨진 달? 되게 이상한 이름이네. 근데 왜 너는 귀랑 꼬리가 없어? 어디 아파?』
아팠다. 심장이 칼로 저며지는 것처럼 아파 숨을 쉬기 힘들었다.
『있잖아, 사실 나 수호정령이 없다? 원래는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졌어. 내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여우신님이 데려갔나봐.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하고 있어. 앞으로 착한 여우가 될테니 돌려달라고.』
『…… 나도, 소원을 빌어도 될까.』
『으음, 너는 여우가 아니니까 여우신님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오늘은 여우신님 기분이 좋으실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빌어봐!』
자 이렇게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아서~ 재잘재잘 설명해주는 랑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어느때보다 진지하게 기도했다. 초월자만큼은 아니더라도 한 종족에게 가호를 내려주는 실존하는 신이라면, 적어도 들어는 줄테니까.
제 소원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힘과, 이를 해낼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는 겁니다.
부디 마지막까지 꺾이지 않기를.
그 간절한 소원을 정말로 들은 듯, 여우신의 조각상에서 푸른빛의 연기가 타고내려와 그의 몸을 한차례 휘감았다.
『우와! 방금 그거 봤어? 여우신님이 네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셨나봐! 힝, 근데 내 소원은 언제 들어주는 거에요 여우신님.』
감탄하는 랑의 목소리에도 그는 이전보다 더 강해진 정령의 힘과 전신에 맥동하는 힘에 잠시 침묵했다. 이제 그는 과거 무투가로서 정점에 섰을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으리라.
『…… 너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나는 네게 빌린 게 있다. 다시 만나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잠시 더 빌려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응? 뭘 빌렸는데?』
『그때까지…… 아프지 마라.』
그렇게 뾰족귀 여우족의 마을에서 나와 다시 판테온으로 가 디멘션 게이트를 타고 메이플 월드로 돌아온 그는 심신 모두 완전히 지쳐버려 여섯갈래의 길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나무의 가지에 기대어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거봐요. 당신은 현실이 악몽이라고 했죠?』
색색의 나비떼가 그의 시야를 채웠다.
***
『무슨 짓을……!』
『아핫, 별 짓 안 했어요. 제가 손댈 것도 없이 당신은 이미 현실이 악몽인데 굳이 뭘 할 것도 없었다고요.』
화려한 걸 넘어 보는 것만으로 눈이 어지러울만큼 현란한 빛깔의 꽃 위에 앉아있던 분홍머리 엘프는 사뿐히 내려와 그의 앞에 걸어왔다.
『슬슬 상황을 깨달았을테니 데려오라는 그 분의 지시에 따라 온 것이니, 안심하시길.』
『그 분?』
『이미 알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되면서까지 봉인했던 상대. 그 말에 유에는 눈을 흡 뜨며 무기를 휘둘렀으나, 그녀의 피부에 닿자마자 클로는 나비가 되어 흩어졌다.
『이곳은 제 꿈의 공간. 여기서 저를 상대하는 건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랍니다.』
『같잖은 수작을─!』
『같잖은 수작이라…….』
유에의 팔을 잡아끌고 가려던 분홍머리 엘프의 입가에 시리도록 차가운 미소를 걸리며 그녀의 등 뒤로 환상같은 나비날개가 펼쳐졌다.
『그 '같잖은 수작'에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당신은.』
마치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는 나비날개를 본 순간, 그의 눈앞에 어지러운 환영들이 펼쳐졌다.
즐겁게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한 무리. 더없이 익숙한 그의 동료들의 모습에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누구지?』
『설마 적인가.』
『모두 주의해! 범상치않은 힘이 느껴져!』
『잠깐, 얘들아 난─!』
난 적이 아니야! 너희의 동료라고!
이어지는 풍경. 작지만 포근한 뾰족귀 여우족의 마을 한 켠에서 놀고있는 아니마족 아이들을 본 그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그런 그를 눈치채고 아이들은 겁먹은듯 허둥지둥 일어났다.
『꺅! 괴물이다!』
『귀도 꼬리도 없는 괴물이 나타났어!』
『빨리 어른들을 불러와!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아니 겁먹지 않아도……!』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도망치는 아이들과 애써 자신을 막아서며 아이들을 지키려드는 랑의 모습에 그는 뒷걸음질 쳤고, 그와 함께 환상이 흩어졌다.
『어때요?』
『헉…… 허억!』
『이미 한 번 겪었으면서 뭘 그렇게 놀라요?』
겪어봤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거다. 유에는 거칠게 일렁이는 보라색 눈을 치켜뜨며 분홍머리 엘프를 노려보았다.
『한 번 더 제 힘을 그딴 식으로 말하면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게 해줄 거에요.』
『이미 내 현실이 악몽이나 다름없는데?』
『그렇긴 하죠. 하지만 다음에 제가 당신에게 보여줄 악몽은─』
무척이나, 무척이나 달콤한 꿈이니까요.
동료들과 여우족은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과 그토록 친했던 프리드는 여전히 살아있고, 그들과 힘을 합쳐서 검은 마법사를 무찔러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그런, 행복하기 짝이없는.
『그리고 그 모든 게 이루어진 순간! 꿈에서 깨버리는 거죠.』
『…….』
제 말에 석고상처럼 쩍 굳어버린 유에의 얼굴이 마음에 든 듯, 분홍머리 엘프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알아들었으면 얌전히 따라오세요.』
『너는, 대체.』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답니다.』
그녀는 가볍게 손짓해 색색의 꽃과 덩굴들을 얽어 길을 만들어냈고, 이 길을 따라 끝까지 가라고 유에의 등을 떠밀었다.
[저거 개년이네.]
"그런 말 쓰지 말라고 해야하는데 이번엔 넘어가줄게."
"메르, 나중에 저놈 책 찾아봐."
"새로운 군단장이 영입됐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저 자가 군단장임을 확신합니까."
"직접 지시받았다고 했잖아요. 평범한 부하는 그에게 직접 명령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물론 과거의 프리드도 손안에서 마력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먼 미래에 나타날 놈이 아니었으면 지금 처리했을텐데.
아름답지만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꽃길의 끝에 다다른 유에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휘몰아치는 어둠의 중심,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 사슬을 두른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가 불타는 안광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군.』
『검은 마법사……!』
용케도 죽지않았어. 검은 마법사는 고개를 기울이며 시체같은 손으로 턱을 굈다.
『어떻게 풀려난 거냐!?』
『아직 풀려난 건 아니다만…… 머지 않았지.』
[그러고보니 저 양반 지금이면 완전히 풀려났을텐데 뭐 하고 있을까?]
"어, 글쎄?"
"군단장들 부리고 있잖아요."
검은 마법사를 보자마자 유에는 바로 주먹을 들고 - 클로는 아까 나비가 되버려서 - 몸을 긴장시켰다.
『어떻지? 그토록 소중한 존재들에게 잊혀진 느낌은.』
『닥쳐라!』
『네놈은 그 날 존재의 시간을 모두 잃은 순간 죽었어야 했다.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던 것이 되어 사라졌어야 했던 네놈이 어떻게 지금 살아있는지 아나?』
유에도, 이를 보던 과거의 프리드도 흠칫하며 검은 마법사를 보았다. 존재의 시간을 모두 잃은 이는 역시 죽는 거였나? 그들의 의문에 답해주듯 검은 마법사의 후드 안에 찢어지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
『나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네놈은 존재의 시간을 잃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거다.』
[오…… 오.]
"초월자는 세상의 여러 규칙에서도 초월해 있었군요."
"허어, 저렇게까지 비참하기도 힘든데 진짜,"
어지간히도 기구한 인생이구나. 테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잔인한 진실에 충격받은 과거의 유에를 보았다.
『만약 그때와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져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
그는 답하지 못했다.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었던 소중한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했던 선택이, 무찔러야만 하는 악의 존재에 의해 연명되는 삶과 그 소중한 이들에게서 영영 잊혀지는 결과를 낳아버렸는데, 어떻게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이를 악무는 그를 보며 검은 마법사는 타오르는 안광을 가늘게 떴다.
『내게로 온다면 네놈의 자리를 주지.』
『뭣……?!』
『지금 네놈에게 돌아갈 곳이 있나.』
메이플 월드나 그란디스나 어디서든 이방인이 되버렸으면서.
『나는 네놈을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네놈을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가 사라짐으로, 네놈 역시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도 나와 다시 싸울테냐』
『그런,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을텐데.』
이미 스스로 깨닫지 않았나. 이 내가 거짓말따윌 해서 뭘한다고.
이 이상 안색이 안 좋아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창백해진 유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먹쥔 그의 손에서부터, 어깨, 등 전신에 이르기까지 떨림이 번졌고, 울음소리같은 것이 뚝뚝 떨어졌다. 프리드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꽉 쥐었다.
『…… 거절, 한다.』
『호오.』
『네놈 덕에 살아있으니 네놈의 편에 서라고? 웃기지 마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짓만은 하지 않아.』
『어째서냐.』
그는 고개를 치켜들어 끓어오르듯이 일렁이는 눈으로 타오르는 안광을 마주했다.
『그건 옳지 않으니까.』
『…… 흐.』
『꺼져라. 내가 생존을 이유로 네놈의 편에 설 날따위 오지 않을테니 다시는 이딴 제안하지 마라.』
거친 축객령에 그가, 꿈이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어리석은 사람. 허세 부리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네요~』
몽환세계를 거두는 분홍머리 엘프의 선명한 비웃음을 부인할 새도 없이,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 작품 후기 ==========
루시드 저런 캐 아니지않냐? 싶은 분은 여기선 성격이 좀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솔직히 수 십년~ 수 백년 동안 얼음 속에서 자각몽만 꿨는데 정신이 안 망가졌다고 하면 그게 더 놀랍겠네.
연참으로 리코멘은 다음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