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꿈에서 깨어난 유에는 한동안 말없이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린 채 멍하니 있었다. 이제, 어째야 할까.
검은 마법사가 머지않아 깨어나고, 그를 무찔러야 한다. 놈이 자신을 유일하게 기억해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그보다 더 괴로운 건 다른 거였다.
『또, 잊혀졌겠구나.』
꿈에서 깨어나며 그는 검은 마법사가 다 말해주지 않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몇 가지 더 알 수 있었다. 얄팍한 동정심이었을까? 아니면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자신이 차원을 이동할때마다 이전 차원에서 한 일들이 -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다는 걸 알았다.
정말 어디를 가야할까. 놈이 깨어나기 전에 최소한 이전만큼의 힘을 되찾고 강해져야 하지만 그럴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한탄하던 그는 문득 왜 자신이 곧바로 세상에서 잊혀졌다는 걸 못 깨달았는지 떠올렸다. 단순히 눈뜬 곳이 메이플 월드가 아닌 그란디스였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 만났던 동료가 똑똑히 저를 기억해서였지 않았나?
『잠깐만, 검호는 분명 날 기억하고 있었잖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하마터면 나무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가지를 붙잡고 겨우 자세를 바로잡은 유에는 다시 검호를 만났을 때를 곱씹으며 바람의 정령을 부려 땅에 내려왔다. 우연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확인해볼 가치는 있다. 아니, 확인해야만 한다.
그런 유에를 보며 프리드 역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검호 씨만은 유에를 멀쩡히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 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에는 검호를 만나기 위해 그의 행방을 알만한 이, 에반이 있는 리엔으로 다시 찾아갔다.
『절 만나러 오셨다고 했는데…… 실례지만 누구세요?』
『은월이라고 한다.』
『이상한 이름이네.』
그란디스에 한 차례 갔다온 여파로 자신을 잊어버린 에반의 모습에 그는 쏟아지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너의 스승 검호를 만나고자 하는데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나.』
『어, 음…….』
『마스터도 몰라. 최근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먼 곳에 갔거든.』
『거기가 어디지?』
『그것도 몰라. 알 수 없는 포탈을 타고 가버렸어.』
『포탈……?』
『왜 있잖아, 여섯갈래 길 중심에 자라있는 댑따 큰 나무. 거기에 정체불명의 포탈이 생겼거든.』
그란디스로 가버렸어?! 거하게 길이 엇갈렸다는 사실에 유에는 표정관리도 못하고 괴상한 얼굴이 되버렸고, 에반과 미르는 하필 저 때냐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은 이젠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스승님은 왜─』
『그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그, 아무튼 대답해줘서 고맙다. 잘 있어라 에반.』
『예, 예?』
퍼뜩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여섯갈래 길로 돌아왔다. 여기 오는게 이제 세 번째인데 징하다는 느낌만 든다.
"잊혀지기 싫다더니 이번엔 망설임없이 차원을 넘네요."
"저 때는 딱히 한 일이 없잖냐."
데몬과 테스가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이 유에는 차원의 균열을 지나 그란디스에 도착했다. 판테온. 전쟁의 불씨가 여기저기에 번진 도시. 그러나 어째서인지 분위기가 그새 조금 바뀐 것 같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만약 사고같은 걸 당해 여기 와버린거라면 조금 기다린 다음 저걸 타고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찾아왔는데, 혹시 검호라는 사람이 여길 지나갔나.』
『검호…… 그분이라면 이곳에 머물고 계십니다만, 어째서 그분을 찾으십니까.』
여기 있다. 그 사실에 유에는 신관이 검호를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메이플 월드에서도 영웅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항상 존칭으로 불렸던 이라 더 그랬다.
"저기서 검호가 뭘 한 거야?"
"그건 나중에 그의 책을 보면 알게 되겠죠."
"분위기가 이미 뭔 일이 지나간 뒤인 것 같은데."
유에는 신관에게 그가 어디있는지 묻다 때마침 창 밖으로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검호를 보고 황급히 뛰어갔다.
『검호!』
『누굽니까 당신은!』
『어,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그의 옆에서 마치 보좌하듯이 서있던 이데아와 노바족과 비슷한 용인(龍人)으로 변한 아스카가 검호를 지키듯이 앞서 나왔다. 그러나 정령과 깃털같은 몸놀림으로 단숨에 둘을 제친 유에는 자신을 보고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검호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너는 날 기억하고 있나?』
『크, 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양 팔을 기이한 문자들이 적힌 붉은 붕대로 감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의문을 가질법도 했지만, 그보다 더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 그는 재차 물었다.
『부디 기억하고 있다고 해라. 너까지 날 잊었으면……!』
말을 이을수록 울먹이는 그의 모습에 유에를 검호에게서 떼어내려던 이데아와 아스카는 검호에게 눈짓으로 어쩌겠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 미안하다.』
아.
그때는 그저 요행이었던 걸까?
기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내가 차원을 넘어서 완전히 잊어버린 건가? 그렇다면, 결국 또 내 선택으로 지금 상황을 자초한 것뿐이라면 난─!
『미안하다 유에. 역시 그때 널 붙잡았어야 했는데.』
이어지는 말에, 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간신히 유지되던 그의 표정과 몸이 무너졌다.
『아아, 아, 아아아……!!』
유에는 그대로 검호의 옷을 붙잡은 채로 오열했다. 보호자였던 용병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때도, 제물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자신이 이방인이 되었을 때도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쏟아졌다. 한 명이나마 자신을 기억하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만큼 가슴이 벅차올라 그는 울고 또 울었다.
***
과거의 프리드는 울음을 삼키며 힘겹게 책을 덮고 도서관 홀에 나왔다.
「이런, 이런 미래는 너무하잖아. 한 사람이나마 있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다고.」
그 한 명이 유에와 가장 사이가 소원했던 이였다는 건 둘째치고, 과거의 프리드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짧게 확인만 하려 했는데 너무 집중하다 상당량을 봄으로 여러가지를 알아버렸고, 그 중에서 쉬이 넘길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건 나중에 또 따로 책을 찾아서 확인하도록 하고.
「이제 검호 씨의 책을 이어서 볼까.」
저 무렵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차원을 건너 그란디스까지 갔는지, 깨어난 이후 어떤 상황이었는지 조금만 보자. 유에의 책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그는 검호의 책을 집어들었다. 훼손되었다기보단 다친 것처럼 검상이 가득한 검붉은 책. 이거 제대로 읽을 순 있을까?
「그 책을 보시려는 겁니까?」
「아, 예.」
「보시는 건 상관없지만 절대로 훼손하시면 안됩니다. 그건 원래 생길 수 없던 책이다보니 내구도라던가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거든요.」
「뭐라고요?」
생길 수 없던 책이라니, 여긴 모든 정보들이 기록되는 곳이 아닌가.
「정확히는 세계의 백업을 위한 데이터 베이스지요. 그래서 이 세계의 모든 정보들이 기록되는 거고요.」
반대로 말하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존재'는 백업 대상이 아니므로 책이 생기지 않는다.
「자, 잠시만요 그럼 이 책의 주인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이죠.」
독자들엔 이미 들은 걸 또 확인받은 것에 불과했지만 예상치못한 상황에서 저 사실을 듣게 된 과거의 프리드는 그대로 서서 얼어버렸다. 검호 씨가 이계인? 무슨 말이야 이게.
「그러므로 책이 생기지 않아야 정상이지만, 그 책의 주인은 많은 일들을 해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 백업 대상이 아님에도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계가 왜 그런 형태가 되었는가 설명하려면 반드시 언급해야하기 때문에 책이 만들어진 겁니다. 말하자면 중요 참고자료같은 거죠.」
「참고 자료…….」
「다만 그렇다보니 다른 책들과 많이 다르니 보는데 있어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좀 전에 보셨던 책처럼 훼손되면 고치기 힘들거든요.」
존재의 시간이 완전히 사라진 이는 말 그대로 없던 존재가 되기때문에 책 자체는 남아있지만 파손되면 수복이 거의 안됩니다. 주의사항을 마저 알려준 탈레스는 책을 정리하러 가버렸고 프리드는 멍청한 얼굴로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있다 몇 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메이플 월드가 아닌 그란디스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겠지. 당장은 보고 생각하자.」
프리드는 목차를 보기 위해 책을 펼쳤다가 표지만큼이나 멀쩡하지 않은 페이지 상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표지는 상처투성이인데 페이지는 피범벅이야. 책장을 넘기며 손에 피가 묻지 않았나 무심코 몇 번 확인했을만큼 실감나는 붉은 자국들에 뭔 참고자료 상태가 이리 메롱하냐고 생각했다.
「유에가 갔을 무렵이─ 아 찾았다.」
그리고 페이지를 완전히 펼친 순간, 활자는 칼날의 비가 되어 그에게 쏟아졌다.
「커, 크흑!?」
몸이 난도질당하는듯한 환상통에 반사적으로 방어 마법들을 연달아 사용한 프리드는 변한 풍경을 보고 숨을 헐떡였다. 맙소사 방금 그게 뭐야? 다른 책들도 들어갈 때 고유 이펙트같은 게 있긴 했지만 이렇게 독자를 공격하는 건 없었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달의 수를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지만 하늘에는 칙칙한 먹구름이 짙게 깔려 비를 퍼붓는 중이었고, 주위에는 마치 폐허처럼 알 수 없는 새하얀 건물 파편같은 게 널려있었다. 눈썰미가 있는 몇몇은 건물의 양식이 판테온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폐허 한복판에 그가 있었다.
『…… 미안해.』
간신히 저것이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을만큼 처참한 몰골의 시체를 앞에 두고.
『이렇게 되버렸지만,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 미안해요.』
상처입은 짐승처럼 웅크린 채 - 아니, 양 팔에 끔찍한 상처를 입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시체를 향해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 무슨.」
그가 왜 저렇게 된 거지?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저 시체는 또 뭐고? 다가가서 살펴보고자 발을 옮긴 순간, 보이지 않는 검이 휘둘러진 것처럼 사방에 검흔같은 금이 마구 생겼다.
『어떻게든 당신을 구하고 싶었어.』
그 금에서 쏟아져내린 피같은 뭔가가 그와 시체, 풍경을 매몰시켰고.
『구하지 못해서 미안해.』
「검호 씨!」
마지막으로 프리드를 삼키며 공간이 무너져내렸다.
쿨럭, 쿨럭! 책에서 튕겨져나온 프리드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몸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책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지만 피같은 뭔가에 닿은 순간 마치 검에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지만 고통자체가 너무 생생해 팔다리가 부들거렸다.
그리고 이는 극중극으로 보고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끄흡……!"
[으으으, 진통 마법 쓰자 마스터!]
"안 돼. 방금 써봤는데 안 먹혔어."
"낯선 건 아닌데 엄청 기분나쁜 느낌이네."
"보통 책과 다르다더니 정말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프리드만큼은 아니지만 그들도 검에 찔리고 베이는 통증을 느꼈고, 그 중 아란은 인상을 쓰며 환상통이 느껴지는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말했다.
"방금 전에 그건 어떤 상황이었던 것 같아?"
"그 시체에게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 같은데…… 부분뿐이라 이렇다싶은 추측은 아직 못 내겠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부상 정도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특히 양 팔은 일류 비숍의 조치를 곧장 받지 않으면 절단하는게 나은 수준이었고요."
"대체 누가 그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지?"
검호가 얼마나 강한지 알기에 그가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그 지경까지 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솔직히 옷차림이 아니었으면 그 사람이 검호라는 걸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아는 검호는 강하고 또 강한 이니까.
어느정도 통증이 사라진 과거의 프리드는 식은땀을 닦으며 책을 빤히 보았다. 들어갈 때 충격이 너무 심해서 바로 다시 들어가진 못하겠다.
「하아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떤 걸 보셨길래 그러십니까.」
「책에 들어가니까 검에 당한 것처럼 아프고, 그나마 본 것도 중간에 일그러지면서 튕겨났는데 이거 정상인가요?」
「당연히 아니죠.」
「그럼 이거 보통의 책처럼, 아니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내용은 끝까지 볼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리입니다.」
저도 일단 확인차 한 번 봤다가 당사자의 심적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서 다시 확인하지 않았거든요. 어차피 보관 자료가 아니라 참고 자료고. 관장이라는 양반이 일을 왜 그리 대충하냐는 말이 목끝까지 나왔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걸 들어 참았다. 방금 전에 느낀 고통은 오류같은 게 아니라 그 당시의 검호가 겪은 심적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 거란 사실.
「보통의 책은 안에 들어갈 때 주인공이 되어 체험하는 것과 제 3자가 되어 보는 것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은 어느쪽을 택하든 책의 주인과 너무 밀접하게 이어진 탓인지, 심적 고통이 물리적인 충격이 되어 독자에게 가해지더군요. 그래서 한 번 보고 다신 안 봤습니다.」
죽음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탈레스였지만 고통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고, 뭣보다 책의 주인공이 겪는 수많은 시련들을 계속 보는 게 다소 괴로웠다.
"잠깐만요, 그럼 조금 전에 저희가 받은 고통은 스승님이 느낀 고통이 전해진 거라는 얘기잖아요?"
"그렇죠. 거기다 어쩌면 직접 본 게 아니라 극중극으로 봐서 다소 경감된 것일 수 있습니다."
화질이 열화된 것처럼. 유에의 책도 그랬지만 이쪽은 더했다. 옷과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검호라는 것도 못 알아 볼 뻔 했을만큼 열화되고 지직거리던 풍경을 떠올린 데몬과 몇몇 이들은 프리드의 책을 통해 검호의 이야기를 계속 본다고 멀쩡한 부분이 그렇지 않은 부분의 반은 되기나 할지 고민했다.
「그래도…… 보긴 봐야겠지.」
최소한 깨어나고 나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하기로 했으니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현재 그들이 들어온 책의 주인인 프리드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책을 펼쳤고, 검의 파도에 전신이 찢기는 환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만들어지는 풍경을 똑똑히 보기 위해 눈을 부릅 떴다.
그 풍경을 그들은 볼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소리 역시 극심한 노이즈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세계가 이미 멸망했다니 그런 말도 안되는──!」
그러나 그가 어떤 내용을 보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
유일하게 제대로 들린 것은 겨울바다처럼 차가우면서도 앳된 목소리의 의미모를 사과였다.
***
예상했던대로 이후 검호의 책은 거의 대부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프리드의 시점에선 어느정도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시점에선 안 보느니만 못한 수준이라 그대로 덮을까 했으나, 이후 프리드가 뭘 했는지 알아야 했기에 부분부분 스킵해가며 끝을 보았다.
프리드는 검호의 책을 통해 세계가 이미 멸망한 상태라는 것과 후일 그 사실을 알게 된 검호가 어떤 일을 하려는지 본 충격에 적잖은 시간동안 고심했고, 끝내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있는 책을 필사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나중에 다시 올테니 그대까지 제가 말하는 책들을 찾아주세요.」
그는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기로 했다. 그들이 추측했던대로 이 무지막지한 진실을 알게 된 프리드는 당연히 미래에 대한 대비를 했던 것이다. 다만 그 대비를 받아갈 이는 거의 검호로 정해놓았다.
한 차례 집에 갔다와 굉장한 양의 종이와 잉크, 펜을 챙겨와 탈레스와 리타가 가져온 책들을 빠르게 독파해가며 중요한 내용들은 모두 필사해갔고, 무엇을 해야 8백 년 뒤 검호에게 도움이 될 지 알아냈다.
냉정하게 말해서 어떤 안배를 하든 8백 년이란 시간을 버티기는 힘들다.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거니와, 운이 나쁘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무조건 그들의 손에 들어갈 것에 안배를 해두면 되겠네.」
의미모를 말을 하며 어떤 안배들을 남길지 머릿속으로 정리한 그는 검호의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세계가 이미 멸망했고 그 사실을 안 그가 어떤 일을 할지 보느라 정작 이 책 자체는 검호가 깨어난 직후의 부분밖에 보지 못했다.
「조금은…… 괜찮겠지?」
프리드는 검호의 책 초반 부분을 펼쳤다. 이 부분에선 심적 고통이 심하지 않았는지 환상통이 굉장히 약했다.
[사생활 침해를 막 하네. 이제 상관없는 부분 아니야?]
"보러온 우리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
풍경이 펼쳐졌지만 역시나 굉장히 일그러져있어 대충 밤이 된 숲이라는 걸 빼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물론 프리드의 시점에선 여긴 꽤 잘 보였는지 그는 물론 다른 사람도 발견했다.
「어, 저 사람은……?!」
검호와 어떤 사람이 함께 있었다. 둘은 무슨 얘기를 했고, 그 얘기를 듣던 과거의 프리드의 얼굴이 점점 이상해지더니 검호로 추측되는 붉은 사람이 뭐라고 하자 다른 사람쪽이 크게 반응하듯한 모습에 프리드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이게 뭐야 대체. 저게 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상스러운 말을 간신히 참았지만 다음날 아침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서 다시 검호와 다른 사람이 만나 나누는 어떤 이야기에 그는 기어코 폭발해버렸다.
「야 이 등신들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감정의 대폭발에 완전히 회복한 마력이 터져나갔고, 차원의 도서관 홀에는 앞서 그랬듯 엄청난 마력 폭풍이 휘몰아치며 그가 보기위해 쌓아두었던 상당량의 책들을 망가뜨려버렸다. 그가 감정적으로 마력을 휘둘러 책을 망가뜨렸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럴 줄은 예상 못하기에 그들은 당황했다.
"뭐, 뭐야 저게."
"뭘 봤길래 프리드가 저러는 거야?"
"쟤가 어지간해선 이성을 잃을 일이 없는데 뭔 일이래."
기어코 책을 망가뜨린 프리드를 용납할 수 없었던 탈레스는 당장 꺼지라며 그를 내쫓았고, 프리드는 실수였다고 항변도 못하고 차원의 도서관에서 쫓겨나버렸다. 망가뜨린 책들 중에 유에의 책까지 끼어있어 뭐라고 변명할 수 없었다.
"어째 그의 책만 없더니 저 때 망가져버린 거군요."
"존재의 시간이 사라져 복구되지 않는 책을 하필 쟤가 훼손시키다니, 아이러니하네."
"그런데 진짜 뭘 보셨길래 그렇게 폭발해버린 걸까요?"
"나중에 확인합시다."
차원의 도서관에서 추방당한 프리드는 스스로의 실수에 기회를 던져버렸다고 자책하다 그래도 앞서 알아낸 것들을 바탕으로 하나씩 미래에 대한 안배를 남기기로 했다.
첫 번째는 그와 가족이 살고 있는 집. 차원의 도서관에 갈 수 있는 연구기록을 포함한 집 전체에 마법을 걸어두고 아마란스에게 이를 유지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분명 여기쯤에 있었는데…….」
니할 사막을 돌아다니며 탐색 마법을 연거푸 쓰던 프리드는 어느 모래언덕을 빙빙 돌며 모래바닥을 지팡이로 푹푹 찍었다. 그러다 한 지점에 지팡이가 쑥 들어가더니 그의 몸이 모래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래로, 아래로 계속 떨어지는 영겁같은 시간이 잠시, 유사(流沙)의 파도에 너덜거리는 방어막을 세 번째 다시 치려는 순간 그는 드넓은 지하공동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후, 설마 여기가 그게 있는 유적일 줄이야.」
과거 얼음에 갇힌 동료들을 찾기 위해 몬스터들을 정리하다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었던 프리드는 물리 법칙을 무시하듯 기괴하게 쌓여있는 바위탑들을 지나 석문을 찾아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에 가디언같은 골렘이 나타나서 막으려 했지만 앞서 여기 왔을 때와 달리 '자격있는 자'라면서 다시 돌무더기로 흩어졌다.
내려가는 도중 그들 입장에선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인물이나 풍경이 새겨진 벽화가 있었지만, 프리드는 저것에 대해서도 차원의 도서관에서 이미 봤는지 무덤덤한 얼굴로 지나가며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저곳에 무엇이 있길래?
"…… 저, 저건?"
"아 젠장 저거 그놈들 거잖아!"
"범상치 않은 거라 생각했지만 용의 마법사가 그를 위해 남긴 물건이었군요."
"저게 뭐길래……?"
새와 램프를 합친듯한 기묘한 형태의 구조물. 그들이 몇 번이나 본 용의 후예 노바족들의 비행선이 공동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이거면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찾는데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프리드는 품에서 가공된 리튬처럼 생긴 보석을 꺼내들었다.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들이 물러났음에도 끝끝내 내전에 빠져버린 아리안트에서 빼돌린 니할의 봉인석이었다. 맙소사 그놈들 손에 들어간 봉인석 중 하나를 저 놈이 넘겨준 거였어? 8백년짜리 대계에 영웅들과 나인하트는 기가 찬 얼굴이 되었다.
「검호 씨든, 유에든 이걸 가져가려면 여기 와야하니까.」
가져온 시약들과 매개체들을 쭉 늘어뜨리며 복잡한 마법식을 그려낸 그는 봉인석의 힘을 조금 이용해 먼 훗날 이곳에 올 이를 위한 약간의 배려를 남김으로 두 번째 안배를 마련했다.
이어서 그가 향한 곳은 니할과 반대로 눈이 내리는 설귀도였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나의 후계자에게 이걸 넘겨줘 아프리엔.」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먼 훗날 깨어났을 때 깨달을 수 있도록 프리드는 계약의 인장을 통해 아프리엔에게 정교한 마법 각인을 만들어내 새겨주었다. 에반은 그 마법각인 - 푸른 문양이 생명의 초월자가 자신에게 뜬금없이 준 그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큰 일이 벌어질 거야…… 그때 그걸 막지 못하면 안되니까, 최소한 거기 갈 수 있는 열쇠는 있어야겠지.」
되든 안되든 시도라도 할 수 있도록. 마지막 안배를 남긴 그는 아프리엔의 머리를 한 차례 쓸어내린 뒤 그와 마지막으로 인사했던 때와 달리 힘있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마음같아선 더 많은 것들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이전처럼 강하지 않고, 위기 역시 너무 먼 훗날이라 그때까지 유지될 수 있는 안배들을 고르는 것도 힘들어 최대한 할 수 있으면서 반드시 도움이 될 것들을 선별해내 준비해두는 게 그의 최선이었다.
아마 이전이었다면 세계가 멸망해버렸음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이리도 없다는 것에 극도의 무력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최선이라 생각했던 선택으로 오닉스 드래곤족이 멸종했을 때나 처음 검은 마법사를 직접 만났을 때처럼. 그러나 그는 멸망의 사실과 함께 여러가지 사실들을 많이 알았다.
세계가 마지막으로 치닫는 그 순간에 나는 없지만 그들은 있다. 누구보다도 믿는 동료들과 이 사실을 알고서도 일어난 그가.
그들을 믿는다. 세상 누구보다도,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그들의 많은 단점과 부족한 부분들을 알기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강한 신뢰가 그의 가슴속에 있다. 그렇기에 그는 미래에 대해 하루하루 시달리듯이 걱정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기로 했다.
「그래도…… 다시 만나지 못하는 건 아쉽네.」
한 번은 보고 싶었는데.
마지막 숨과 함께 유일한 아쉬움을 내뱉으며 희대의 대마법사는 눈을 감았다.
***
프리드의 책에서 나온 뒤 영웅들은 조용히 울거나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데몬을 제외한 다른 이들도 꽤나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들이 프리드의 책을 보는동안 자료와 책을 정리하고 쉬던 루미너스가 다가왔다.
"이제 끝났나? 꽤 걸린 것 같군."
"좀, 볼 게 많았거든."
"어땠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
"그게, 그러니까……."
"목이 메이는 것 같은데 제가 말하죠."
데몬은 유에의 책이고 프리드의 책이고 가장 충격을 덜 받았기에 가장 침착하게 설명해줄 수 있었지만, 하필 그에게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루미너스는 인상을 썼다. 물론 다른 이들은 뭘 봤는지 머리속이 꽤 복잡한듯한 모양새에 루미너스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책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들어야 했다.
"…… 믿기 힘든 이야기군."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 그랬으면 저쪽에서 뭐라고 했겠지."
그러지 않는다는 건 모두 사실이란 뜻이기에 더 믿기 힘들었다.
그 블랙윙 간부가 봉인을 위해 제물이 되었었다는 잊혀진 동료라는 이고, 프리드가 남긴 미래에 대한 안배중 하나가 노바족들이 타고다니는 비행선이라니. 심지어 니할의 봉인석을 그들에게 넘겨준 게 프리드였단다. 자신이 검은 마법사의 분신같은 존재라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굉장하다.
"나중에 당신이 직접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안 그래도 그럴 거다. 그 전에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책을 볼 차례…… 라고 하고 싶은데 다들 상태가 좋지않아 보이는군."
"꽤 오래 안에 있었으니 잠시 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아, 난 찬성."
"나도─."
[머리속이 과부하인데 좀 쉬자~]
그렇게 그들은 1시간 가량 쉬고난 뒤에 마지막으로 남은 2권 중 검호의 책을 펼쳤고, 검이 찔리고 베이는 환상통과 목소리가 그들을 덮쳤다.
그 때는 왜 이렇게 운이 없냐고 욕했었다. 미래의 재앙과 곧 몰락할 종족의 영역에 머문다니, 언제 뭐가 잘못될지 몰라 하루하루 어떻게 이곳에서, 그놈에게서 벗어날까 속을 태웠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는 차라리 나았다. 그 숲에서 나온 이후의 일들에 비하면 그곳, 엘린 숲에서의 나날은 차라리 천국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세계에 온 이래 나는 수많은 잘못들을 저질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그럼에도 노력하는 걸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 수 없─.
[뭔가 나레이션이 심상치 않은데.]
"앞부분은 좀 들렸는데 그 뒤로 많이 지직거려서 못 들었어."
"프리드의 책을 통해 봤을 땐 몇 개 빼고 제대로 된 게 없더니 실제 책도 이정도일 줄이야."
"애초에 생길 수 없는 책이었다잖아."
그래도 검호의 모습 자체는 제대로 보이는 게 다행이다. 그들은 책에 들어오면서 전신을 덮친 환상통을 애써 덜어내기 위해 페어리퀸이 되기 이전, 보통의 페어리였을 적의 아마란스와 함께 숲을 가로지르는 그를 보며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각자 의견을 나누었다.
"이 무렵이면 제가 알기론 페어리들을 잡으러 온 사냥꾼들을 처리해주던 시절일 겁니다. 어릴 때 들어봤었거든요."
"그것도 있지만 검은 마법사가 하얀 마법사일 때 여기서 그를 만났었다고 했었잖아. 그게 나오지 않을까?"
"이번엔 좀도둑 네 말이 맞다."
"응?"
"저기 봐라."
페어리 아마란스가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황급히 그를 불렀다.
새하얀 장발, 지성으로 가득 찬 푸른 눈, 빛의 길을 걷는 이의 증표가 달린 마법복을 입은 이 - 하얀 마법사가 명화의 한 장면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뛰어온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요정 기사.」
그리고 그 인사에 과거의 검호는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영 좋지않은 모양이다.
『아 씨발 저거 미래의 검마 새끼잖아.』
…… 모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