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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10화 (110/195)

[110화] 흉노의 공주

오윤 선우가 한부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듣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 순간, 천막의 문을 열고 들어온 2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선우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아버지. 은인과 함께 제 얘기를 하시고 계신 듯 하니 소녀도 이 자리에 끼어도 괜찮겠지요?”

한부는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선우에게 말을 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지간한 흉노의 남자 전사만큼 키가 크고 마른 근육질에 이목구비는 어머니를 닮은 건강미 넘치는 미인이었는데, 선우의 연지처럼 천으로 지은 고운 빛깔의 옷 대신 늑대 가죽으로 만든 가죽옷을 몸에 두르고 어깨에는 마상용 단궁을 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말하는 걸 들어보니 흉노의 공주인 것 같긴 하지만, 선우가 외국의 태자하고 얘기하고 있는데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대화에 끼어들다니?’

고대와 중세의 유목민 사회 중에는 동시대의 정주민족

사회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서 여자도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하러 다니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고 보니 흉노에선 연지가 나랏일에 관해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지. 한고조 유방도 흉노 원정하다가 묵돌 선우의 군대에 포위당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에 연지에게 뇌물을 줘서 간신히 풀려났다는 기록을 읽었던 것 같은데. 사서에는 남지 않았지만, 흉노의 공주도 발언권이 꽤 강한 모양이다.’

오윤 선우는 당돌하게 대화에 끼어드는 딸을 애정이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진서야! 벌써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느냐? 그래서 국경선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조나라군이 있더냐?”

“다행히 국경선 근처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진서야. 외국의 태자와 함께하는 자리이니 본인을 아버지가 아니라 선우라 부르거라.”

“아! 소장이 미숙하여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늘이 내린 푸른 늑대의 후손이신 탱리고도선우시여.”

한부는 진서 공주의 말을 듣고 문화충격을 느끼면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소녀가 아니고 소장······? ’

그러자 흉노의 공주 진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조선의 태자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은인이시여. 소장의 아버지이신 탱리고도선우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흉노의 공주이자 좌기도왕인 이 진서, 평생 은인을 흉노의 친구로 여기고 소장의 천막을 찾으실 때마다 향기로운 마유주와 육즙이 흐르는 고기를 대접하겠습니다.”

“선우께도 말씀드렸지만, 위대한 전사가 교활한 책략에 빠져서 허무하게 초원에 쓰러지는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만간 부부가 될 사이에 본인을 손님처럼 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소장이 아직 태자 전하를 제 남편감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부와 오윤 선우는 그녀의 당돌한 대답을 듣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선우는 간신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성난 목소리로 딸을 꾸짖었다.

“진서야! 감히 흉노의 탱리고도선우인 아비의 명을 거스르려는 것이냐?!”

“소장이 감히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의 명을 거스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오나 소녀도 위대한 전사이신 선우의 피를 이어받았고 그동안 전장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워왔으니 그에 걸맞은 남편을 맞이할 자격이 있습니다. 소장은 어제 전투에서 부장들이 화살에 맞고 죽어 나가는 동안에도 끝까지 선우의 곁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보다시피 조선의 태자는 풍채가 당당한 데다 연나라의 늙은 귀신 극신을 물리치고 어제는 조나라의 적장 이목을 쫓아내서 우리의 목숨을 구했다. 거기에 동방 정벌까지 성공하면 네 배필로 부족함이 없을 터인데 뭐가 불만인 거냐?”

“선우시여. 우리 흉노인 중에서 조선의 태자가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여 극신을 물리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음······. 없지. 하지만 조선이 연나라를 멸하고 극신이 조선의 장수가 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전히 동쪽의 접경지역에 갔다가 극신을 봤다는 전사가 많다더구나.”

“조선의 다른 장수가 극신을 물리쳤을 수도 있지요. 또 조나라의 적장 이목도 조선의 군대를 보자마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어떻게 조선의 태자가 뛰어난 무장임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음······. 듣고 보니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물론 조선의 태자에게는 수많은 전사의 목숨을 빚졌지만, 그 보답이 소장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정 저를 조선에 시집보내고 싶으시다면 이번 조선군의 동방 원정에 소장도 종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 두 눈으로 직접 은인의 실력을 확인하고 남편감으로 적당한 분인지 판단하겠습니다.”

“뭐라고?! 어제 전투에서 너무 많은 전사를 잃어서 국경을 지키려면 네게 호위병을 넉넉하게 붙여줄 여유가 없다. 그래도 조선군을 따라나설 생각이냐?”

“물론입니다. 선우시여. 소장 진서, 남방인 사내들 사이에서 제 한 몸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오윤 선우는 장녀의 당찬 대답을 듣고 기가 막힌 듯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허허! 이 정도 기백은 있어야 푸른 늑대의 핏줄이라 할만하지! 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네 남편이 될 사람을 내 후계자로 삼기로 한 거다! 두만이가 네 반만 닮았어도 얼마나 좋을꼬!”

한부는 두 부녀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전생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흉노의 감춰진 역사를 알 수 있었다.

‘두만이라면 기원전 2세기에 흉노 제국을 건설하고 한나라를 쳐부순 묵돌 선우의 아버지 두만 선우인 것 같은데? 그럼 진서 공주는 두만 선우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친누나구나! 원래 진서 공주는 어제 조나라군한테 죽을 운명이었는데 내가 끼어들어서 역사가 바뀌는 바람에 살았구만.’

그는 더욱 동호 정벌의 의지를 다지면서 선우에게 말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시여. 부디 용감한 공주의 청을 들어주시지요. 조선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감히 흉노의 공주님께 무례를 저지를 자는 참수하겠다고 엄포를 놓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소? 딸의 억지를 들어줘서 고맙소. 조선의 태자여.”

“저야말로 약관의 나이에 흉노의 좌도기왕 자리에 오를 정도로 유능한 무장과 함께 전장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방인이 흉노의 작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단 말이오? 알면 알수록 놀라운 분이로군요.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무기든 군량이든 형편이 되는 대로 지원해 주겠소.”

“그럼 군량과 마초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동방 부족

기병대를 상대할 때 필요한 마름쇠를 좀 만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흉노의 야금술은 남쪽 대륙에서도 유명하니 이곳의 대장장이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마름쇠라? 처음 들어보는 물건이구먼. 대장장이 몇 명을 이곳으로 불러올 테니 그자들에게 마름쇠라는 물건의 모양을 설명해 주시오.”

“감사합니다. 하늘이 내린 푸른 늑대의 후손이신 탱리고도선우시여.”

* * *

한부와 오윤 선우의 회담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난 후 고조선군 병사들은 흉노 부족민의 도움을 받아 보급품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48년 5월 초, 병사들이 동호 정벌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자 상장군 무명은 고조선군 주둔지의 지휘관 막사에 찾아가서 태자에게 보고했다.

“태자 전하. 분부하신 대로 동호 원정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수고했소. 상장군. 다행히 예상보다 빨리 끝났구려.”

“계를 악간 박사에게만 맡겨두기 불안해서 병사들을 채근해 행군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언제 연횡군이 하북을 침략할지 모르니 어서 흉노와의 약조를 완수하시고 귀국하시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진나라의 주도로 중원의 여러 나라가 조선을 치려고 연횡책을 추진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나라와 조나라가 원수지간이라 아마 올해 연횡군이 하북의 국경을 넘기는 어려울 거요.”

“이번에도 전하의 예상이 맞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흉노의 공주가 호위병 네 명이 주둔지에 찾아와서 초병에게 전하와 함께 원정길에 오를 거라고 했다는데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인지요?”

“그렇소. 흉노의 선우가 목숨을 빚진 보답으로 장녀 진서 공주를 내게 준다고 하니 공주가 자기 눈으로 본인이 훌륭한 신랑감인지 확인해보고 싶다는구려.”

“허! 흉노의 처자들은 진나라에서 봤었던 서융의 처자들보다도 훨씬 당돌하군요! 전하. 설마 흉노의 공주에게 병사들의 지휘를 맡기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소? 진서 공주는 조선의 말을 할 줄도 모르지 않소? 이번 전투에서 공주는 전장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본인과 그대가 병사를 다루는 실력을 보고 감탄하게 될 거요.”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다시는 흉노의 유목민이 조선군의 위력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겠습니다.”

“부탁하오, 상장군. 동호를 집어삼킨 흉노가 혼인동맹을 맺고 나면 중원에서 감히 조선을 넘보는 나라는 없을 거요.”

“그뿐만 아니라 훗날 전하께서 조선의 왕검과 흉노의 선우를 겸하게 되시겠지요. 소장의 나이가 많아 그 감격스러운 모습을 보지 못할 거 같아 한스럽습니다.”

“허! 경이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진나라 최고의 명장이 이제 조선 사람이 다됐구려!”

“왕검 폐하와 전하를 모신지 벌써 12년째입니다. 소장이라고 사람의 마음이 없겠습니까? 부디 이 팔에 창을 휘두르고 활시위를 당길 힘이 남아있을 때 전하께서 진나라의 연횡책을 분쇄하고 조선의 위세를 중원에 떨치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반드시 그리될 것이오. 자, 그럼 이제 출발합시다. 전군에 행군 명령을 내려주시오. 상장군.”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태자의 명이 전군에 전해지자 3만 2천 명의 고조선군 병사들은 오르도스 고원의 초원을 지나 동호의 부족들이 모여 사는 만주를 향해 힘차게 진군했다.

고조선군이 며칠 동안의 행군 끝에 흉노의 영역을 벗어나 동호의 영토에 발을 디디자, 한부의 눈에 중원 대륙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 황하가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듯 만주벌판의 위를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한부는 누런 강물이 동쪽을 향해 흐르는 황하를 굽어보더니 기병대장 석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석아. 진서 공주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부터는 동호의 영역이라 언제 적 기병대의 기습을 받을지 알 수 없다는구나. 동호의 왕 임묵이 움직일 때까지 이대로 황하를 따라서 보란 듯이 행군할 생각이니 너는 본대보다 한발 앞서서 행군 진로를 정찰하면서 주변 지역의 지형과 적군의 동태를 살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다만 이렇게 큰 강을 끼고 행군하다 많은 적군과 마주치면 본의 아니게 배수의 진을 치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퇴로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지형에서 행군하시는 편이 나을듯합니다.”

“이번에 상대할 적이 진나라군이나 조나라군이었다면 일리 있는 말이구나. 하지만 동호의 군대는 거의 모든 병사가 기병이라 퇴로를 확보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너무 탁 트인 장소에서 적과 마주치면 기병이 적은 우리는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럼 전하께서는 결국 배수의 진을 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아니. 임묵이 이끄는 적군이 강물을 등지도록 유도해볼 생각이다. 이번 전투는 황하를 아군으로 삼는 쪽이 승자가 될 거야.”

“보병으로 기병을 막다른 곳으로 몰 생각이시란 말입니까? 이번에는 얼마나 기발한 전술을 준비하셨는지 기대됩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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