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예상했던 반응이야. 이 정도쯤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서운한 마음마저 외면하지는 못했다.
조부가 정해준 결혼 상대가 바람이 나서 사생아까지 만들었다. 가문의 불명예이기 이전에 그녀의 불명예이며, 그보다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준 충격이었다.
이번만큼은 질책보다 다른 반응이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웨이브는 한결같았다.
바닥 언저리를 헤매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간다. 아시카는 저와 꼭 닮은 검은 눈동자를 올곧게 마주 보았다. 긴장했을지언정 주눅 들지 않은 시선으로.
“가문에 누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부님, 저는 이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파혼하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는 한마디 한마디 힘이 있었다. 손녀의 단호한 어조에 웨이브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밖에서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지만 그에게만큼은 말 잘 듣는 착한 손녀였다. 하나뿐인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위치를 잘 알고 처신에 소홀함이 없던 아이였다.
그런 아시카가 수도 사교계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얌전한 아이가 한번 돌변하면 무섭다더니, 아시카가 딱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파혼이 완료될 때까지 레이디 슈베른을 저택에 두었으면 합니다.”
“보호하는 거냐?”
“완벽한 증인이자 증거입니다.”
웨이브는 조심스럽게 말하는 손녀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영리하고 강단 있는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곱게 자란 귀족 레이디였다. 남자들도 생각 못 할 파격적인 행동과 추진력에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약혼자의 아이를 밴 내연녀를 감금해놓고 파혼 요구라.’
어지간한 귀족이라면 사교계의 추문이 무서워서라도 감히 할 수 없는, 어찌 보면 무모하리만큼 단호한 행동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라 누가 나서서 말릴 틈도 없었다고 한다.
나쁘게 말하면 무모한 거고 좋게 말하면 대담한 거였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졌다. 웨이브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짧게 결론을 내렸다.
“오클레인 후작가와 파혼 협의하는 문제에서 너는 빠져라. 그리고.”
아시카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입술이 말을 이어갔다.
“올해 네게 배정된 예산 중 절반을 반납해라. 당분간 무도회나 연회에도 참석을 자제하고.”
어차피 아시카는 공작가의 업무를 소화하느라 사교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 처벌은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다. 웨이브가 손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려란 고작 이 정도였다.
“…네, 조부님.”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웨이브는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이며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이번에 대공령에 집행되는 예산은 어떻게 됐지?”
“아직 협의 전입니다.”
웨이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진작에 마무리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아차 싶어서 아시카는 서둘러 대답했다.
“회신만 보내면 됩니다. 금주 내로 마무리 지을게요.”
드루쉬아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미룬 탓이 컸다. 거기다 코랄의 문제가 터지면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웨이브의 시선이 잠시 아시카에게 머물다 떨어졌다.
과거에는 보좌관에게 일임했었고 이제는 아시카가 도맡게 된 대공령 업무. 그 무관심조차 한결같았기에 웨이브가 더할 말은 없었다.
“나가봐.”
“네.”
대화는 담백하게 끝을 맺었다. 아시카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는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웨이브의 시야에서 벗어나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생각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고 나왔는데도 가슴이 먹먹하다.
‘이게 최선이겠지.’
하나 남은 가족이지만 언제나 어렵기만 한 사람. 가족이기보다는 그녀의 인생을 통제하는 공작의 위치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힘들지 않았느냐, 다 괜찮아질 거다.’ 이런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것이 웨이브였다.
아시카는 피로한 눈가를 손으로 쓸며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대공령 문제로 서신을 보낸 다음 날, 탈리온 공작저에서 회신이 왔다. 차일피일 답을 미루며 아시카를 곤란하게 만들던 예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협의 장소는 중심가를 벗어나 숲을 끼고 있는 아담한 저택이었다. 높다란 담장을 따라 안쪽에는 장미꽃이, 바깥쪽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목이 소담스럽게 꽃을 피웠다.
마차에서 내린 아시카의 시선이 담장 아래를 스쳐 정문에서 멈췄다. 그 앞에는 양쪽으로 나뉘어 살벌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 기사들이 있었다.
“잔느, 여기서 기다려.”
“네, 아가씨.”
혼자 남아있으라는 지시에도 잔느는 선선히 수긍했다. 평소 같으면 곁에 있겠다고 고집을 피웠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여기서 정문을 통과해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시카의 보좌관뿐이었다.
이그레인의 기사가 정문으로 다가가자 맞은 편에서 탈리온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이그레인 기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비키시죠.”
“확인이 필요합니다.”
탈리온의 기사는 뻣뻣한 태도로 대꾸했다. 경직된 얼굴에는 호의도 적의도 없었다. 대신 절차를 관철하겠다는 고집스러운 표정이 언뜻 보였다.
“확인은 무슨. 머리가 나빠서 해마다 보는 얼굴도 까먹었습니까?”
“공작님께 알리겠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
이그레인의 기사가 발끈하자 아시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 별장이 누구의 소유인지 잊었나 보군. 확인은 그쪽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괜히 시비를 걸던 탈리온의 기사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쪽 가문의 기사들이 살벌하게 점령하고 있는 이곳은 이그레인의 소유였다. 그러나 온전히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민감한 문제가 있었다.
웨이브의 아내였던 반느 탈리온이 지참금으로 가져온 별장. 반느가 아끼던 곳이라 본가보다 더 자주 머무른 장소였다. 그러나 이 정략혼은 반느의 자살로 막을 내리면서 양쪽 가문의 사이가 틀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탈리온은 반느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요구했지만 웨이브는 이를 묵살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별장이라도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결같은 묵묵부답. 웨이브는 맞서 싸우지 않았고 반응하지도 않았다. 탈리온이 협의 장소로 이곳을 강력히 주장한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웨이브는 별장의 존재조차 잊어버렸고 아시카는 부러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반느는 웨이브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아시카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 같은 존재.
아시카는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탈리온의 사람들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걸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같은 애매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건물로 들어선 뒤, 응접실 문 앞에서 아시카는 숨을 가다듬었다.
“후….”
드루쉬아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코랄의 문제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남자였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시카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돌아간 시선 앞에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르쉬…. 탈리온 공작님.”
잘못 튀어나온 호칭 때문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뻔했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와 당황한 얼굴을 보고 드루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그렇게 놀랄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먼저 와 계신 줄 알았어요.”
아시카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연회가 있던 날 발코니에서 마주친 이후 첫 만남이었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그렇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으니 차라리 모르는 척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불편한 아시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루쉬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언제나처럼 오만한 시선도, 관심 없다는 양 다소 심드렁한 태도도.
다만 평소와 다른 옷차림이 시선을 끌었다. 광택이 나는 어두운색 재킷에 금장 문양이 들어간 조끼, 구김살 하나 없이 손질된 바지는 제대로 격식을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뭐… 지? 반짝반짝하네.’
뭘 입어도 잘난 남자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빛이 난다.
‘포마드도 발랐어?’
덕지덕지 바르는 느낌이 난다고 싫어하지 않았나.
문득 떠오른 생각을 아시카는 황급히 털어버렸다. 그렇게 친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드루쉬아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응접실 문을 열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별로 예의 따윈 차리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대신 드루쉬아의 보좌관 칼프는 아시카가 먼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지. 내심 찔리는 게 많은 탓 아니겠어?”
“설마요. 이그레인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답니다.”
그녀의 속내와 상관없이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퍽 다행이라 여기며 아시카는 나붓한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합의도 하지 않고 기사들을 빼간 건 잊었나 보지?”
“기사분의 부상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시면 얼마든지 드리죠.”
드루쉬아의 눈꼬리가 획 치켜 올라갔다.
“누가 돈 많은 집안 아니랄까 봐. 기사들의 명예까지 돈으로 처바르시나?”
“싸움을 시작한 건 양쪽이니까 더하고 빼고 남은 건 결과뿐이지 않나요? 우리 쪽엔 다친 사람이 없으니 부상당한 분을 배려하겠다는 거죠.”
준비해놓은 것처럼 대답이 술술 흘러나왔다.
아시카는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의자에 앉았다. 언제나 짜증 나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평소와 같은 태도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드루쉬아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짙푸른 눈동자가 유독 선명하다. 부담스러울 만큼 빛이 나는 눈동자였다.
‘뭐지?’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오묘한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