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39화 (39/153)

#39.

그 사이 미하일은 다시 비탈로 내려가 여자의 허리를 안아 위쪽으로 올라왔다. 아이와 여자를 구한 뒤 애거나이트와 킨빌, 미하일이 달려들어 구덩이에 빠진 마차를 끌어냈다.

“고맙습니다. 나리, 정말 고맙습니다.”

마부의 인사에 애거나이트가 장갑을 벗어 툭툭 털며 당부했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 큰일 날 뻔했어. 여기는 길이 험해서 조심해야 하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와 마부는 몇 차례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드루쉬아 일행도 방향을 바꿨다.

한바탕 힘을 뺀 탓에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반나절쯤 더 갔을까. 문득 미하일이 애거나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저, 단장님. 근데 말입니다.”

“왜?”

“아까 그 마차, 대여소 마차 아니었습니까?”

“대여소 마차? 그게 왜?”

귀족들은 가문의 마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대여소 마차를 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장거리 여행에 대여소 마차를 끌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까?”

드루쉬아가 말을 멈추고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미하일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대여소 마차는 잘 포장된 도시에서만 운행하기 때문에 내구성이 약합니다. 이런 산길을 다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 하루 이틀 거리에 다른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뒤늦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딱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무기도 지니지 않은 평민들이었어.”

“네, 그러긴 합니다만.”

마부로 보이는 사내와 그 아내,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 무방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하일의 말을 듣는 순간 드루쉬아의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기, 단장님….”

조용히 따라오던 킨빌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저, 실은 아까부터 몸이 이상했는데요. 그게….”

“킨빌!”

킨빌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애거나이트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드루쉬아와 미하일도 말에서 내렸다.

“애거나이트, 킨빌의 상태는?”

“맥박이 좀 빠르고 열이 있습니다.”

애거나이트의 대답에 드루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도 모르게 열이 오르는 목 뒷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아무래도 불길한 느낌이 든다.

“뭐가 문제였지? 아까 아이와 여자를 올린 건 킨빌이 아니었잖아.”

“네, 그건 저였습니다.”

대답한 건 미하일이었다.

“아이와 여자, 그리고 밧줄.”

곰곰이 생각하던 드루쉬아가 중얼거렸다. 그곳에서 접촉한 사람 또는 낯선 물건은 그 정도가 다였다.

“밧줄… 이요?”

뒤늦게 애거나이트도 그때 상황을 떠올렸다.

“킨빌만 장갑을 끼지 않았습니다만. 저희에게 이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목표가 나였다면 어떨까?”

사람이 부족했다면 드루쉬아도 돕기 위해 나섰을 터다.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드루쉬아는 가만히 애거나이트에게 손짓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애거나이트는 재빨리 움직였다.

“내 목 뒤 좀 확인해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각하.”

정중히 양해를 구한 뒤 드루쉬아의 뒷덜미 옷깃을 내렸다.

“각하, 언제 부상을 입으셨습니까?”

“부상?”

“피가 흥건한데 모르셨습니까?”

상처가 난 느낌도 없었는데 피가 배어 나와 뒷덜미를 흠뻑 적신 상태였다.

“느낌이 없었어.”

“열도 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아이로군.”

드루쉬아는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가장 어리고 약한 아이가 가장 위험한 상대였다. 너무 오래 평화롭게 지내왔던 걸까. 무기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방심했던 것이 실수였다.

“수도로 돌아간다. 킨빌은 애거나이트가 데려가고, 미하일은 먼저 출발해서 칼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의원과 약제사를 미리 대기시켜 놓도록 해.”

“근처 마을로 가서 치료사부터 만나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를 목표로 했다면 그렇게 쉽게 치료가 되겠나? 거기다 죽이려고 했다면 극독을 썼겠지. 그나마 정신이 있을 때 움직여야 해.”

한 사람이 쓰러졌으니 드루쉬아도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돌아간다.”

드루쉬아는 말에 올라타며 단호하게 지시했다. 부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둘러 말을 출발시켰다.

그러나 상황은 바람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진 드루쉬아는 수도를 하루 앞둔 거리에서 끝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최대한 보안을 유지했으나 탈리온 공작이 의식불명으로 실려 왔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수석보좌관인 칼프의 지휘 아래 대기하고 있던 가문의 주치의 셋이 드루쉬아와 킨빌에게 달려들었지만 누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있자는 겁니까? 다른 의원들을 수소문해서라도 방법을 찾아야지요!”

칼프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아무리 채근해도 없는 방법을 마련할 길은 없었다.

“전대 공작님께 연락해서 황궁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언제 영지에 연락해서 폐하를 알현하고 황궁의를 부른답니까? 사흘이나 의식 없는 사람이 그때까지 기다려 주겠습니까?”

드루쉬아는 내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건강했던 피부색이 온통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것이 이제껏 봐왔던 여느 독과도 달랐다.

칼프가 주치의를 닦달하는 사이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열어. 나에게도 그 정도 권한은 있어.”

“공작님께선 누굴 만나실 상태가 아닙니다.”

“알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냐. 집사, 당장 열어!”

앙칼진 목소리가 침실 안쪽까지 울릴 정도였다. 칼프는 주치의를 뒤로하고 침실 문을 열었다.

“크라우니 남작, 드루를 보러왔어요.”

호위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샤프리가 칼프를 보고 반색했다. 그녀의 뒤에는 처음 보는 수행원 둘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환자가 있는 곳입니다.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디 마이헬러.”

“드루를 만나게 해줘요.”

“손님을 만날 상태가 아닙니다.”

“알고 왔어요. 주치의나 다른 의원들도 손을 못 쓰고 있다면서요? 저도 도우려고 온 거예요.”

칼프의 시선이 샤프리와 함께 온 중년의 사내에게 향했다.

창백한 낯빛에 큼직한 광대와 유난히 큰 눈매, 손끝에는 녹색과 푸른색의 얼룩이 보였다. 애거나이트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상대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마이헬러 가문의 주치의이자 약제사인 노아입니다.”

“제국인이 아닙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저희 가문에서만 수십 년을 일해온 사람이에요. 설마 크라우니 경은 드루의 약혼녀인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칼프는 샤프리의 주장에 반박하기 어려웠다. 드루쉬아가 파혼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서류 작업을 미룬 상태였다. 때문에 탈리온 공작의 약혼녀인 샤프리는 현재 이 저택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

칼프가 공작 대리로서 권한을 행사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위치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발, 내가 돕게 해줘요.”

샤프리는 이제 애원하다시피 했다. 칼프는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로 문에서 비켜섰다. 무언의 허락이 떨어지자 샤프리는 동행 둘과 함께 침실로 들어섰다.

“세상에, 드루!”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드루쉬아를 발견하고 샤프리는 경악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입니다. 일단은 제게 맡겨주세요, 아가씨.”

샤프리가 드루쉬아에게 달려가려는 걸 노아가 막았다.

칼프의 손짓에 호위 기사 둘이 방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노아가 드루쉬아를 살피는 동안 칼프와 기사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언제부터 의식이 없으셨습니까?”

“사흘이나 됐네. 환자가 한 명 더 있는데 그쪽은 닷새 전에 쓰러져서 내내 같은 상태고. 각하께서는 꽤 오래 정신을 유지하셨어.”

노아는 드루쉬아가 입고 있는 상의를 내려 목 뒤의 상처를 살폈다. 이어 어깨에서 이어진 붉은 흔적을 확인했다.

“공작님께선 파병군으로 직접 이상 지역에 다녀오셨다지요? 아마도 파병 훈장 또는 파병 인장이라 불리는 이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비밀이랄 것도 없이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파병 인장은 단순한 흉터가 아닙니다. 이상 지역에 휩쓸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생기는 흔적이죠. 꽤 강력한 중독이라 죽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생존자에게는 내성 같은 게 생기는 모양인데, 그게 일차 방어선 역할을 했을 겁니다.”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겠나?”

“지금부터 찾아봐야지요.”

노아의 손짓에 뒤에 서 있던 조수가 가방을 열어 펼쳐놓았다. 약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들이 즐비한 가운데 종이칼처럼 얇고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뭐 하는 건가?”

노아가 드루쉬아에게 칼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칼프가 막아섰다.

“피를 뽑아 제가 아는 독인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칼프와 침실에 들어온 다른 기사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노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방법을 찾아달라면서요? 치료를 막으실 겁니까?‘

“크라우니 남작, 협조해줘요. 내가 보증한다잖아요.”

샤프리가 나서서 칼프와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칼프는 마지못해 가까이 서 있는 기사에게 지시했다.

“단검을 빌려주게.”

기사는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노아에게 건넸다. 노아는 자신의 도구 대신 기사의 검으로 드루쉬아의 손에 상처를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칼프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공작님께 사용할 도구는 우리 쪽에서 준비할 걸세. 공작님께서 드실 약 또한 우리 쪽에서 시음해 본 뒤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게.”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태도에 샤프리는 말을 잃었다. 노아는 작은 병에 드루쉬아의 피를 채우고 칼프를 돌아보았다.

“그게 절차라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몸에 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공작님의 옷을 벗겨주시겠습니까?”

노아는 공손하게 칼프에게 부탁했다.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전 칼프는 샤프리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마이헬러께서는 이만 자리를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칼프는 드루쉬아와 샤프리의 진짜 관계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측근 중 하나였다. 도움은 필요하지만 제 주인의 민낯을 아무에게나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럼, 노아. 잘 부탁할게.”

샤프리는 선선히 수긍하며 방을 나섰다.

칼프의 지휘 아래 기사와 공작가의 주치의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간단한 처치를 마치고 시종들이 들어와 어수선한 방을 정리했다. 피에 젖은 옷도 함께 치워졌다.

노아가 치료를 시작한 뒤, 샤프리는 공작저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혼수상태에 빠진 약혼자를 홀로 남겨둘 수는 없다는 주장에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결국 샤프리는 손님방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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