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65화 (65/153)

#65.

단단한 목조로 빙 둘러싼 경주로는 황토색 맨바닥이었고 바깥쪽은 관중석이었다. 그중 절반은 지면에서 높이 솟은 계단식 좌석이었고 절반은 맨땅에 울타리만 쳐진 입석이었다.

모처럼 벌어진 경마대회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여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시카는 다른 귀족들을 따라 계단식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흐린 하늘에서 구름이 물러나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낸 시각, 경마장에는 기수를 태운 여덟 마리의 말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은 좀처럼 벨 소리가 울리지 않자 경기장을 향해 목을 빼고 주위를 살폈다. 아시카는 느릿하게 부채질하며 미간을 좁혔다.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글쎄요. 저도 경마장에 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귀족들이 앉아있는 관람석 위에는 커다란 차양이 드리워져 있지만 한낮의 열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귀부인들은 연신 부채질을 해댔고 남자들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경기의 시작을 기다리는 군중들은 다소 지루한 얼굴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경기장에 집중한 이들의 모습은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 때문에 관중석에서 벌어진 작은 소요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아아아악!”

경기장 울타리 너머 입석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무리가 쫙 갈라졌다. 관람석에 앉아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빼고 반대편 관람석을 살폈다.

“무슨 일이야?”

“허억! 저, 저런!”

입석 쪽에서 연달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란 사람들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서로 밀치면서 뒤엉키고 말았다.

“저게 뭐야?”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은 소요가 일어난 현장을 보고 경악했다. 사람들이 서로 피하려고 아우성치는 한 가운데 내던져지듯 끼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무엇이.

얼굴을 제외하고 드러난 상반신 전체가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채 말라 있었다. 흡사 살아있는 미라처럼 기괴한 형상이었다.

“경비, 경비 어딨어!”

“아아악! 이거 놔!”

상대는 제정신이 아닌 듯 닥치는 대로 아무나 붙들고 늘어졌다. 정체가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누군가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구빈원에서 도망친 환자다!”

“전염병 환자야!”

그 말이 일으킨 파장은 대단했다. 다급한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 경기장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공령에서 도망친 놈들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적인 외침까지.

“대공령?”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잠시뿐. 귀족들이 모여있는 관람석 쪽에도 소요가 일었다.

“아아아악! 괴물이야!”

“비켜! 길을 트란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의 사람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관중석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갑자기 난입한 불청객을 피하려고 서로 밀쳐대는 통에 관람석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비, 경비들은 어디 있어!”

귀족들은 앞다투어 좌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시카는 제 발로 움직이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말았다.

“아가씨!”

잔느가 황급히 쫓으려고 했지만 아시카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순식간에 멀어졌다.

“잔느, 괜찮아. 밖으로 나가면 돼.”

아시카는 출구를 손짓하며 잔느에게 신호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누군가 검을 빼 들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피비린내가 확 번졌다.

“사람들에게 닿기 전에 제거해!”

어디선가 들려온 지시에 경비원들이 일제히 검을 들고 불청객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귀족들의 관람석에 뛰어든 이들만 해도 열 명 가량. 상대는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하고 단칼에 쓰러졌다.

“크헉.”

쓰러지는 이들에게서 솟구치는 검붉은 피가 도망치던 귀족들의 바지와 드레스를 적셨다.

“아악! 저, 저리 가!”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몸뚱이가 곳곳에 쓰러지고 겁먹은 사람들은 더욱 공포에 질렸다. 공황상태에 빠진 이들이 너도나도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온 힘으로 서로를 밀어댔다.

“악! 밟지 마!”

“비켜!”

“내가 누군 줄 알고, 으악!”

그러나 비좁은 계단 출구는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막히고 말았다.

소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경기장 안쪽과 이어진 문이 쿵 하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열렸다.

“말들이 도망친다!”

“꺄아악!”

말 목장에 있던 말들이 뭔가에 놀랐는지 일제히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말을 탄 기수들조차 방향을 잡지 못한 사이 서른 마리에 가까운 말들이 한꺼번에 날뛰었다.

소요를 피해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날뛰는 말에 채여 깔리거나 밟히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가씨,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잔느의 비명이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그러나 인파에 밀려 뜻대로 방향을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시카는 떠밀리다시피 난간 쪽으로 가게 되었다.

관중석의 난간은 불과 허리 높이였다. 사람들에게 휩쓸린 아시카가 난간에 부딪힌 순간 강한 힘이 그녀를 떠밀었다.

“아악!”

무언가를 잡을 새도 없었다. 상체가 확 꺾이면서 그대로 경기장 안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퍽, 하고 온몸이 땅에 부딪혔다.

“아시카!”

사람들의 비명을 뚫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시카는 정신이 없었다.

“허억.”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얼어있기를 잠시, 아시카는 황급히 팔다리를 당겨 몸을 일으켰다.

“윽.”

엉덩이와 골반에 통증이 급습했다. 그러나 아파할 겨를은 없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말들이 사람들과 뒤엉켜 있었다.

눈앞이 아찔하다. 메마른 땅에서 흙먼지가 일고 기수들조차 날뛰는 말에서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는 당장 말에 밟힐 판이었다.

‘출구가 어딨지?’

관람석은 키 높이를 넘어가는 위치라서 시야가 완전히 막혀버렸다. 빠르게 주변을 확인한 끝에 아시카는 말들이 난입했던 목장 쪽 출구를 확인했다.

급히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얇게 펄럭이는 옷자락이 다리에 휘감겨 뛰기가 쉽지 않았다. 통증으로 부자연스러운 몸을 움직여 울타리를 빙 둘러 달렸다.

“허억.”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말들에게 길이 막히고 말았다. 사람들의 비명과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에 머릿속까지 아득해진다.

아시카는 벽에 바짝 몸을 붙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콜록, 콜록.”

그렇지않아도 위험천만한 상황. 매캐한 먼지에 눈물까지 쏟아졌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동안 가까이에서 누군가 아시카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헉.”

“이리로.”

아시카는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쪽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쿵, 하고 그녀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문하나를 사이에 두고 갑자기 적막이 찾아들었다. 소란스러운 밖의 소음이 꿈결인 양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시카는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위험천만한 곳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한 걸음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금색과 짙은 녹음을 담은 색,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마이헬러 공자?”

“호위 기사는 어쩌셨습니까? 경비병들이 몰려오는 것을 봤는데 왜 나가지 않고 안으로 들어오신 겁니까?”

“아, 나가려고 했는데 관람석에서 떨어졌어요.”

“세상에, 괜찮으신 겁니까? 걷기 불편한 곳은 없나요?”

에르윈이 놀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시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런,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놀라지 마세요. 도우려던 것뿐입니다.”

에르윈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공식 석상에서 종종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샤프리만큼이나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마이헬러가의 장남. 그러나 색이 다른 눈동자는 아름답기보다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다.

위험이 지나갔다는 생각에 가쁜 숨결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마이헬러 공자께선 어째서 여기 계신 건가요?”

“사람들에게 밟힐 것 같아서 이쪽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말들이 난동을 피우는 통에 꼼짝없이 갇혀버렸지요. 바깥보다는 여기가 안전한 것 같아서 일단 기다리는 중입니다.”

두 사람이 들어온 곳은 경기장에 딸린 작은 창고였다. 경비원들이 나섰으니 바깥 상황은 곧 진정될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곳에서 기다리는 편이 안전해 보였다.

대화가 끊기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 생각을 곱씹는데 에르윈이 친근한 어조로 다시 말을 걸었다.

“그거 아십니까? 레이디 이그레인과 단둘이 대화를 나눠보는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마이헬러와 이그레인은 딱히 접점이 없지요.”

그 중간에 탈리온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시겠지만, 이제 저희도 관계의 폭을 넓혀보려는 중입니다.”

파혼으로 인해 탈리온과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의미였다. 에르윈은 사심 없는 태도로 미소지었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답이 필요한 이야기였나요?”

아시카의 서늘한 어조에 에르윈의 미소가 굳어졌다.

“제 호의가 부담스러우신가 봅니다. 그렇게 정색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 친목을 다질만한 상황은 아니죠.”

“겁이 나서 그러십니까? 염려 마세요. 이곳은 안전합니다. 제가 보호해드릴 수 있습니다.”

차게 빛나는 시선이었다. 순간 아시카의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으슥한 창고 안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바깥보다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울타리 안에 갇힌 사냥감이 되어버린 그런 기분.

아시카가 뒷걸음질 치자 에르윈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저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없어요. 호위 기사가 곧 저를 찾을 거예요.”

“예,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왜 자꾸 뒷걸음질을 칩니까?”

‘뭐지?’

두려움을 느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본능이 그녀에게 위험하다고, 이곳에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에르윈이 손을 뻗는 순간, 아시카는 문손잡이를 확 당겨 열었다. 문밖에서 요동치는 혼란스러운 소음이 한꺼번에 귓가를 때린다.

“레이디 이그레인!”

이성적인 판단보다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아시카는 그대로 창고에서 뛰쳐나왔다. 뭐에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 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달렸다.

아직도 경기장 안에는 말들이 사납게 달리고 있었다. 아시카는 정면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말을 발견하고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드레스 자락을 밟으면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헉!”

“아시카!”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덩치가 달려들 때, 그녀를 확 낚아채는 힘이 있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아시카는 그대로 바닥에 팽개쳐지고 말았다. 데굴데굴 구르던 몸이 쿵, 하고 벽에 부딪혔다.

“윽.”

나직한 신음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감싸 안은 단단한 팔과 너른 가슴. 아시카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르쉬아? 어떻게…!”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드루쉬아는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다쳤어요? 어깨를 부딪친 거 아닌가요?”

다급한 채근에도 드루쉬아는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도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이 날뛰는 말을 피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말들이 왜 이래!”

“당장 밖으로 나가요!”

“경비! 여기 부상자가 있어요!”

이쪽저쪽에서 당황한 사람들의 비명과 도와달라는 외침이 난무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입석 쪽을 가리켰다. 처음 불청객이 난입했던 자리에는 검붉은 피와 붉은 살덩이가 나뒹굴었다.

“아시카, 뛸 수 있지? 내 손 놓지 말고.”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시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드루쉬아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달렸다. 말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확인하고 한발 앞서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아시카는 앞서가는 너른 등을 바라보며 달렸다. 그녀를 잡아끄는 힘은 강하고 견고했기에 오로지 그만 보고 달리면 되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피를 말리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멀어져갔다. 미친 듯이 날뛰는 말들의 난동조차 다른 세상의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시간을 잡아 늘인 듯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만이 선명한 현실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색이 바래지 않는 밝은 금색의 머리칼, 사위를 살피는 예리하고도 단단한 얼굴. 그 와중에도 순간순간 뒤돌아 그녀를 살피는 눈동자에는 따뜻한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두려움으로 옥죄었던 가슴에 뜨거운 파동이 휘몰아친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 그것은, 내내 외면하고자 했던 자신의 감정이었다.

눈가에 뜨거운 열이 올랐다.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시카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이 마음은 제 것이다. 환각으로 인한 혼란 따위가 아닌, 온전한 제 마음이다. 그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르쉬아, 당신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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