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70화 (70/153)

#70.

“아.”

강한 힘이 그녀를 옭아매는 동시에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파고들었다. 숲에서 나는 향기처럼 묵직하면서도 청량한 나무 향. 온몸을 감싸 안는 너른 가슴과 요란하게 뛰는 심장 소리마저 익숙하다.

“…르쉬아.”

정수리 위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한숨이었다. 아시카는 뒤늦게 이곳이 공개된 장소라는 걸 깨달았다.

“놔줘요.”

드루쉬아의 팔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 아시카는 재빨리 품에서 벗어났다. 이내 커다란 손이 꼬리처럼 따라붙어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서신에 답장조차 못 할 만큼 바빴나? 아님, 여기 오려고 단장하느라 바빴던 거야?”

화를 억누르는 날 선 목소리. 에르윈을 상대하는 내내 흔들림 없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오늘 떠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여기 있어요?”

“나에게 할 말이 고작 그런 것뿐이야?”

영지에서 온 다급한 호출도 뒤로하고 허겁지겁 되돌아왔다. 두 팔 벌려 환대하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채근하는 아시카의 태도에 열이 뻗쳤다.

“분명 미아에게 전해달라고….”

“청혼서를 받고 있었다며?”

아시카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다.

드루쉬아는 예정에도 없던 무도회에 참석하려고 공작저로 돌아가 다급하게 준비를 했다. 그러는 동안 칼프가 전해준 소식은 그렇지않아도 언짢았던 드루쉬아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이그레인 공작이 서둘러 진행한 일이라고 했다. 청혼서를 받는 일이다 보니 탈리온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소식도 늦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나대로 만나고, 결혼은 결혼대로 준비하고. 정말 그랬던 건가?”

믿을 수 없었다. 아시카가 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니, 언제고 다가올 미래라는 걸 알면서도 못 견디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의 인생에 아시카가 없을 거라는 사실이, 마치 제 미래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푸른 눈동자가 겨울 호수처럼 쨍하니 얼어붙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시카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 남자가 이렇게 분노하는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않은가.

처음부터 끝이 예정된 시작이었다. 생각보다 그 끝이 너무 빨리 다가왔을 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시작된 관계는 꿈으로 끝나야 한다.

머뭇거리던 입술이 열리고 마음에도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알고 시작한 것 아닌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억눌린 감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잇새로 새어 나온다.

“말했지. 나는 약혼녀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짓 따위 안 한다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시작한 관계도 아니잖아요.”

“내 마음을 당신 멋대로 판단하지 마!”

언제부터였을까. 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서 그녀의 올곧은 진심을 느끼게 된 것이. 의심하거나 따져 묻기도 전에 드루쉬아는 그 감정에 휩쓸려갔다. 저도 모르게 아시카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저 욕구에 충실한 파트너였을 뿐이라고?

“거짓말.”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도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속내가 드러났다.

“이 결혼을 추진하는 건 조부님이에요. 저는 조부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요.”

드루쉬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가 어쩌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현실.

제국 내의 성인 남녀는 얼마든지 원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문의 후계자를 정하는 권리는 전적으로 가주에게 있었고 가주가 살아있는 한 황제조차 관여하지 못한다.

만약 아시카가 웨이브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녀는 가문에 대한 모든 권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 그러니 결혼문제에 있어서 처음부터 아시카에게 선택권 따윈 없었다.

긴장된 침묵이 팽팽하게 서로를 당긴다. 불안한 마음과 상처받은 진심이 서로를 날카롭게 할퀴는 느낌.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그런데도 놓고 싶지 않은 절박한 마음이 숨을 틀어막았다.

어둡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아시카에게 못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아시카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차고 단단했다.

그 얄팍한 껍데기를 사정없이 부수고 싶어졌다. 드루쉬아의 입술이 열리고 긴장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약혼, 나랑 해.”

아시카의 눈동자가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무슨….”

“당신은 결혼을 해야 하고, 나는 당신을 놔줄 수 없으니까 거기에 맞는 최선을 찾는 거야. 약혼이 됐든 결혼이 됐든 나와 하면 돼.”

지독히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안돼요.”

단호한 거절에 드루쉬아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끝끝내 나를 두고 다른 놈과 결혼하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이 여자의 곁에 다른 남자가 함께하는 꼴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꼴을 본다면 제 눈을 후벼 파던지 상대가 될 놈을 후벼 파서 치워버리던지 둘 중 하나였다.

부릅뜬 눈동자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기가 질릴 만큼 난폭한 시선에 아시카는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그만 놔줘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시카는 한편으로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파요.”

그제야 그녀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드루쉬아는 흉흉한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당신이 시작했다고 해서 당신 마음대로 끝낼 수 있다는 착각은 하지 마.”

그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의 바른 몸짓으로 이제껏 사나웠던 태도를 갈무리한다. 드루쉬아는 잠시 아시카를 내려다보고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등 돌린 드루쉬아의 뒷모습에는 애써 지워내려는 감정이 잔상처럼 드리웠다.

* * *

영지행을 취소하고 다급히 무도회에 다녀온 뒤 드루쉬아는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정확히는 집무실 창가에 선 채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벽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커다란 유리창 너머에서는 푸르스름한 여명의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다가오는 희미한 빛 속에서 불분명했던 세상이 형체를 갖는다. 아시카의 마음도 이렇게 선명하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에게 이 만남은 불장난 같은 거였을까. 처음이라 앞뒤 가늠하지 못하고 시작해버린 관계. 그러나 냉정한 현실 앞에서 언제든 털어내 버릴 수 있었던 그런 관계.

아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지, 혼맥을 제안할지, 물러나야 할지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않았나.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그런 생각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치워 버린 지 오래였다.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것이 지나치게 황홀한 정사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만날 때마다 정신없이 그녀를 탐했으니까 미치도록 황홀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아시카를 안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충족감을 느꼈다.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토록 벅찬 감정을 느끼고 나서 다른 여자를 품에 안을 수 있을까.

사랑스러운 몸짓과 다정한 목소리,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른한 미소, 그 모든 것에 사랑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온몸으로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것처럼.

아시카와 함께하는 매 순간순간이 지독하게 달콤했다.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동이 터올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드루쉬아와 마찬가지로 잠들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던 칼프였다.

“각하,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지로 가기 위해 모든 일정을 취소한 상태였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지 영지로 가게 될지 아무런 지시가 없어서 모두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드루쉬아는 느리게 몸을 움직여 창가를 벗어났다. 동요 없는 몸짓으로 단호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잠시 책상 위에 놓여있는 빈 문서를 바라보았다. 잉크병을 열고 펜을 적시는 일련의 행위가 물이 흐르듯 매끄럽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빠르게 펜을 휘갈겼다.

칼프는 묵묵히 드루쉬아를 바라보았다. 제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드루쉬아의 펜 끝에서 마지막 서명이 힘차게 미끄러진다. 완성된 문서를 들어 올려 칼프에게 건네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그레인으로 보내.”

서류를 받아든 칼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언제나 침착하던 보좌관이 드물게 평정을 잃었다.

“진심입니까?”

“그럼 내가 장난으로 그런 공문서를 만들어 보낼까?”

“이거…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러라고 보내는 거야.”

칼프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한동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던 드루쉬아가 끝내 정신이 나간 건 아닐까, 잠시 불충한 생각을 했더랬다.

“영지에는 뭐라고 서신을 보내면 되겠습니까?”

“일정을 미룬다고 해. 일주일만… 아니, 젠장!”

드루쉬아는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작게 욕설을 뱉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언제나 냉철했던 계산이 모조리 어그러졌다. 당장 급한 문제들이 산적했는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시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리라는 불안 때문에.

“나중에, 모든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초조하게 한숨이 흘렀다. 정작 당사자가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가 말랐다.

‘가볍게 아무나 만날 여자가 아니야. 아시카는 내가 처음이고 전부였어.’

누구에게나 처음이란 강렬한 법.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지만 드루쉬아는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

아시카는 알아야 한다. 그가 호락호락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의 손에서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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