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방 안을 채워놓은 화려한 가구들 위로 늦여름 햇살이 흘러간다. 대리석으로 상판을 얹은 테이블과 금칠을 한 조각 장식, 벽을 가린 랑브리의 테두리 장식조차 황금색으로 칠해 놓아 부담스러울 만큼 현란하다.
화려한 방 안에서 창문을 반쯤 가린 커튼만이 어울리지 않게 진갈색의 두꺼운 벨벳이었다.
황태후는 시녀들에게 머리 손질을 맡겨두고 커튼 자락이 늘어진 창을 노려보았다. 커튼이 바람에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면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악!”
황태후의 움직임에 막 모양을 잡으려던 장식이 머리를 찌르고 말았다.
“뭐 하는 짓이야!”
“죄, 죄송합니다. 폐하.”
황태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실수한 시녀를 확 밀쳐냈다.
“내가 이 제국 황제의 어미야! 감히 나를 다치게 하는 건 황제를 능멸하는 것과 같다는 걸 모르느냐!”
“용서하세요. 잘못했습니다. 폐하.”
“어찌 이리 하나같이 아둔해. 아둔하기 짝이 없어!”
화가 난 황태후는 성난 고함을 내질렀다. 가뜩이나 두통으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시녀가 자극한 것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겠고 제 침실조차 편치 않아서 때때로 오금이 저릴 만큼 겁에 질리곤 했다.
“커튼은 왜 저리 어두워! 진작 바꿨어야 하는 걸 너희가 게으름을 피운 게지? 황궁을 나왔다고 내가 우스워? 저따위 커튼으로 나를 능멸할 만큼 우습냐고!”
“폐하, 하녀장에게 일러 당장 바꾸라고 하겠습니다.”
시녀 둘이 옆에서 납죽 엎드려 빌었다. 실은 밤잠을 거의 못 자는 황태후가 낮에도 잘 수 있도록 일부러 어두운 커튼을 달아놓았다. 황태후가 원한 일인데도 화가 나니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꼴도 보기 싫다. 나가. 다 나가버려!”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 몸단장을 해주던 시녀들과 옆에서 돕던 하녀들까지 우르르 밖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황태후는 설렁줄을 급히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하녀장은 어디 갔느냐! 하녀장을 불러와!”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에 다급히 문이 열렸다. 하녀장은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황태후에게 다가갔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왜 빈손으로 오느냐? 네 할 일을 잊었느냐?”
“아닙니다. 여기 준비해 왔습니다.”
하녀장이 품에 감춰두었던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녀가 건네기도 전에 덜덜 떨리는 손이 약병을 잡아챘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과 달리 후들거리는 손에서 약병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챙, 하고 바닥에 떨어진 약병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안돼!”
황태후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에는 위엄도 품위도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성난 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게 어떤 약인데, 네가 감히, 감히!”
“폐하, 아직 남아있습니다. 제가 다시 가져오면 됩니다. 고정하세요.”
하녀장이 유리병이 깨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바닥을 짚은 손과 팔이 유리 파편에 긁혀 피가 나는데도 정신없이 용서를 빌었다.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 것을 보고서야 황태후가 악다구니를 멈췄다.
씨근덕거리며 하녀장을 노려보던 황태후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거울 속에 눈이 부실만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장한 모습과 눈이 돌아갈 만큼 현란하게 세공된 보석 장식, 갈색으로 물들여 가꾼 머리칼은 여전히 윤기가 흘렀다. 그러나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다 시들어가는 고목처럼 늙고 추했다.
‘저건 내가 아니야.’
그녀에게도 분홍빛 뺨이 싱그럽게 아름답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창 아름다울 때조차도 제 언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황태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사기 장식을 낚아채 거울을 향해 던졌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울이 산산이 부서졌다.
“헉, 폐하.”
하녀장의 새된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거울이 깨진 뒤에도 바닥에 흩어진 잔해에 추한 얼굴이 잔상처럼 남았다.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이 바닥으로 처박히게 될 거야. 너는 네 인생이 끝장나는 걸 보면서 죽음에게 자비를 구걸하게 될 거란다.」
밤새도록 제 목을 조르며 들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윙윙 맴돌았다. 무수히 많은 남자들을 홀리던 그 얼굴 그대로, 새파란 분노를 쏟아내며 저를 노려보았다.
꿈속의 자매는 40년 전 그때처럼 여전히 요요히 아름다우며 잔혹한데 어째서 저만 이렇게 변했나.
‘그냥 죽일 게 아니라 얼굴 가죽을 벗겨냈어야 했어.’
추한 제 얼굴을 가리고픈 욕망으로 채 버리지 못한 미련을 곱씹었다. 죄책감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살의로, 살의는 이제 광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자매가 산채로 말라 죽어가는 저를 보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이 꼴을 봤다면 아마도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며 통쾌해했을 것이다.
‘진작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살아남은 자가 승자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가끔, 아주 가끔 눈이 돌아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아직은 제 손안에 쥔 것이 더 많았다.
황태후는 허리를 곧게 펴고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약을 다시 가져오고, 머리 장식할 애들도 불러와. 단장을 마무리해야지.”
“예, 폐하.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하녀장은 피를 뚝뚝 흘리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방을 나가기 직전 황태후에게 흘깃 눈길을 주었다.
콘솔 앞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우아했지만 방은 엉망진창이었다.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황태후의 머릿속처럼.
* * *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황태후가 나타나지 않자 여자들은 지루한 얼굴로 부채를 흔들었다.
“오늘도 늦으시네요.”
“보통 늦으시죠. 새삼스러울 게 있나요.”
모임 주최자가 나타나지 않다 보니 둘이나 셋씩 소곤소곤 저희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얼마 전 로디안 정원에서 있었던 일 들었어요?”
“아, 그 유명한 정원사가 도망친 일 말이죠?”
“여기서 보낸 병사들이었다면서요?”
“꽃축제가 그날부로 중단되었다잖아요. 하여간 유난하시다니까.”
나무 그늘에 있어도 여름의 한낮은 뜨거웠다. 격식에 맞게 차려입은 드레스와 몸을 휘감은 보석이 묵직해서 앉아있기도 곤욕스러운 날이었다.
샤프리는 속닥거리는 귀부인들에게서 떨어져 홀로 찻잔을 기울였다. 다들 눈치만 볼 뿐 선뜻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챙그랑.
“어맛!”
“깜짝이야.”
사기 주전자가 깨지는 소리에 가장 상석에 있던 황태자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녀의 손이 미끄러지면서 찻주전자를 놓친 것이다.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내오겠습니다.”
실수한 건 하녀인데 창백해진 것은 황태자비였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저…, 폐하께서 많이 늦으시나 봐요. 제… 제가 가서 확인해보고 올게요.”
황태자비는 말을 마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귀부인들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귀부인 중 하나가 옆 사람에게 고개를 기울여 나직이 속삭였다.
“또 일주일째 모주의 궁전에 잡혀있다면서요?”
“황태자께서도 무심하시지. 황제 폐하께서도 감당하지 못한 분에게 태자비를 보내시다니. 여기 올 때마다 파리하게 질려서 말라가는 게 안 보이시나.”
“좀 배우라고 보냈겠죠. 저리 유약해서 나중에 어찌 자리를 지키겠어요.”
“저런 성정이니 황태자비로 책봉된 것이 아니겠어요? 아니면 옛날 폐황후 꼴이 날 수도 있죠.”
옆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스무 살 초반의 레이디가 슬그머니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예전 황후께서는 불임으로 폐해지신 게 아니었나요?”
개중에 가장 나이 많은 귀부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정치 기반이 없는 백작가 출신인데다 황태후 폐하와 뜻이 맞지 않았어. 자세한 속사정이야 모를 일이지만 황태후 폐하 눈 밖에 나서 고초를 겪은 건 사실이지.”
“그리고 황태후 폐하께서 엄격히 골라 새로 맞이한 게 현재 황후 폐하신데, 결국 그분 때문에 황궁에서 나오게 됐으니 세상 참 모를 일이죠.”
“쉿, 다들 입조심 해요.”
하녀가 차를 새로 내오는 걸 보고 귀부인들은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황태후 폐하께서 오십니다.”
언제 돌아왔는지 황태자비가 작은 목소리로 주최자의 참석을 알렸다. 본래 예정됐던 것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진 뒤였다. 황태후는 시녀들과 시중드는 하녀들까지 줄줄이 달고 자리에 나타났다.
“내가 좀 늦었지? 아름다운 정원을 만끽하라고 여유를 두었네.”
“그렇지 않아도 여름꽃이 만발한 것이 보기 좋다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사계절 쉬지 않고 색색들이 꽃이 피니 황궁의 정원이 부럽지 않습니다, 폐하.”
억지웃음을 짓던 황태후의 얼굴이 딱 굳었다. 연로한 귀부인이 눈치 없는 레이디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황급히 입을 닫았다.
이미 한바탕 진을 빼고 온 황태후는 화를 내는 대신 샤프리에게 화제를 돌렸다.
“레이디 마이헬러가 요즘 사교계에 발길을 뚝 끊었다지? 오라비가 걱정이 많아 보였어.”
“혹여 가문에 누가 될까 봐 조심하는 중입니다.”
“그래, 자숙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자숙이라는 말에 샤프리는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가 잘못해서 깨진 약혼이 아닌데 행동거지에 조심이랄게 뭐가 있을까. 근거 없는 추문을 듣고 싶지 않아서 몸을 사렸을 뿐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 은근한 관심이 쏠렸다. 탈리온 공작의 전 약혼녀 샤프리. 진작부터 궁금해서 초대장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나타난 걸 보고 다들 놀란 상태였다.
고위 귀족의 파혼치곤 소리소문없이 신속하게 처리되어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가장 무게가 실리는 추측은 탈리온 공작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으리라는 거였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시카와 얽혀있으니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었다.
“마이헬러 후작도 걱정하길래 내가 좋은 혼처를 주선하기로 했네. 조만간 그라나티 백작에게서 청혼서가 갈 거야.”
“네?”
샤프리는 놀란 나머지 손에 든 찻잔을 떨굴뻔했다. 놀란 것은 샤프리만이 아니었다. 놀란 귀부인은 자신에게 황태후의 시선이 머물자 얼른 고개를 떨궜다.
샤프리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저, 황공하옵니다만 폐하, 말씀하시는 것이 혹시 센드 그라나티 백작님인가요?”
“그래, 이미 알고 있다니 한결 수월하겠구나.”
샤프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로한 귀부인도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센드 그라나티 백작은 마이헬러 후작과 비슷한 연배였다. 그러니까 샤프리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셈이다. 나이가 많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라나티 백작은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전적이 있는 남자였다. 첫 번째 부인은 출산 직후 사망했고 두 번째 부인은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혼 후 아무도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들었다.
샤프리의 시선이 황태후의 목에 걸린 커다란 루비 목걸이로 옮겨갔다.
‘그라나티 백작이 자기네 루비광산에서 나온 최상품을 진상했다고 했었지.’
황태후의 사치를 거들어주는 그라나티 백작가. 공교롭게도 마이헬러 영지와도 인접해있었다.
“그라나티 백작이 씀씀이가 커. 제 부인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고 들었어. 좋은 혼처가 될 거야.”
황태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목걸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샤프리는 까마득해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웃고 있는 것은 황태후와 샤프리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귀부인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돌렸고 아직 어린 레이디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