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82화 (82/153)

#82.

황토색 대지 위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폭 넓은 강이 지나간다. 강변에서 멀리까지 펼쳐진 갈대는 누렇게 타들어 가고 메마른 흙먼지 바람이 훅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지독한 가뭄. 수년째 비가 거의 오지 않아서 깊고 넓었던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트리델리아 제국의 남부를 관통하는 이 강은 탈리온에서 시작되어 대공령과 이그레인 영지까지 이어지는 로샤 강이었다.

강을 옆에 끼고 대공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출입자를 감시하는 병사들의 초소와 마을이 있었다. 한때는 수많은 여행자들로 북적이던 마을이 이제는 한산하다 못해 황량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곳이 되었다.

썰렁하던 여관은 오랜만에 찾아온 방문객들로 생기를 되찾았다. 입구부터 열댓 명이 넘는 짐꾼과 호위, 상인까지 줄줄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국에 대공령에 납품을 가쇼?”

“일정이 하필 그리되었소. 우리 같은 배달꾼이야 주인이 가라면 가야지 별수 있나.”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후드를 내리며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이 버석거릴 정도로 흙먼지가 잔뜩 묻어났다.

“물부터 좀 주게. 오는 중에 계곡물이 다 말라서 아주 애를 먹었어.”

“로샤 강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니 주변 지류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인원수에 맞춰 식사도 내주고.”

“짐마차에 물통은 어찌해드릴까?”

“당연히 채워가야지. 대공령 안쪽은 가뭄이 더 심하다고 들었네.”

“에휴, 심하다 뿐인가.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텅텅 비어있던 1층 식당에 손님들이 자리를 잡자 점원이 바쁘게 움직였다. 여관주인은 인솔자로 보이는 중년 사내에게 물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수도에서 새로운 소식은 없소?”

“새로운 소식은 무슨, 마냥 그렇지 뭐가 있겠나.”

“대공령 때문에 수도가 들썩였다던데….”

아마도 여관주인이 기대하는 것은 대공령의 힘든 사정이 알려졌다거나, 모주의 궁전에서 황태후가 나서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기대와 달리 대공령에 대한 동정론보다 불편한 소문이 더 커지고 있다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봤자지.”

그래 봐야 뭐 변하는 것이 있겠느냐고. 그런 속내를 내비치는 어투에 여관주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태후 폐하께서도 무심하시지. 마지막 대공께서는 그리도 온후하셨다던데….”

황태후는 어찌 그리 표독스럽냐면서, 사내의 눈치를 보면서 속삭이듯 말끝이 수그러들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사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주인을 잃고 버려진 거나 다름없는 대공령. 아크펠라 대공가의 마지막 핏줄인 황태후 일레르나 아크펠라 콘틸리아.

대공령이 지금껏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지 못하고 방치된 것은 대공령의 마지막 후계자인 황태후가 황실에 모든 권리를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쇄령을 내렸던 선황제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의 황제는 대공령에 관심이 없었다. 이제는 숨통을 트여줄 만도 하건만 황태후조차 나 몰라라 하면서 대공령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려 온 것이 무려 40년. 대공령 주민들은 황태후를 원망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상단 사람들은 물을 넉넉히 싣고 다시 짐마차에 올랐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시간이라 대공령 안쪽까지 그대로 들어갈 참이었다.

검문소를 지키고 선 병사들이 인솔자가 건네는 허가증을 확인하고 상단 행렬을 돌아보았다.

“거참, 이럴 때 대공령으로 가는 상단도 있습니까?”

“어째 오늘은 보는 사람마다 그 소리일세.”

“안이나 밖이나 영 분위기가 안 좋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얼른 마치고 돌아가려 하오.”

“근데 사람 수가 제법 되는 모양입니다. 허가증으로 봐서는….”

장거리를 오가는 상단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인다. 호위 인원이 그만큼 늘기 때문에 짐꾼은 현지에서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가증에 나온 물량으로 보면 열댓 명 정도면 충분한데 검문소 앞에 늘어선 인원은 곱절이나 된다. 아마도 짐꾼까지 모두 데려온 모양이었다.

상대의 의문을 알아차리고 인솔자가 슬쩍 말을 더했다.

“우리가 여기만 들르는 게 아니라서 그렇소. 여기서 다시 탈리온 영지로 넘어가야 하거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가십시오.”

검문소의 병사가 허가증을 돌려주며 손짓했다. 허가가 떨어지자 길 중앙을 가로질러 설치된 울타리 문을 병사들이 달려들어 열었다.

문이 열리자 짐을 가득 실은 여덟 대의 마차와 말을 탄 호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단 행렬이 채 반도 지나지 못했을 때, 갑자기 커다란 고함이 들렸다.

“거기, 멈춰라!”

검문소 주변에서 느긋하게 앉아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게 누구야?”

“기사인 것 같은데?”

멀리서 말 한 필이 빠르게 검문소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통과를 중단하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동안에도 상단의 마차는 검문소 너머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검문소를 닫으라는 얘긴가?”

“근데 뭐가 저리 급해?”

“어라? 한둘이 아닌데?”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기사 뒤로 줄줄이 다른 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기사가 검문소에 도착했다. 급하게 말을 멈추고 쩌렁한 고함이 울렸다.

“통과 업무를 중단합니다. 상단은 허가증을 다시 제시하고 확인이 끝날 때까지 지시를 기다리십시오.”

“에잉? 이미 절반은 넘어갔는데요?”

“공작님의 지시입니다.”

“헉, 탈리온 공작님이요?”

검문소를 관리하는 것은 탈리온의 병사들이었고, 절차를 떠나서 드루쉬아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놀란 병사가 검문소 반대편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거기 앞쪽에 사람 보내. 다시 돌아오라고 해!”

갑작스러운 명령에 주위가 소란해졌다. 검문소를 통과하던 상단 행렬은 허리가 잘렸고 비좁은 길에서 되돌아오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 탈리온의 기사들이 무리 지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말을 달려오는 이들은 검문소까지 도착해서야 급하게 말을 멈췄다. 거칠게 움직이는 말들 탓에 사방에 부옇게 먼지가 일었다.

드루쉬아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검문소의 책임자가 달려왔다.

“각하,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내가 말한 건? 상단 허가증하고 출입자 기록 가져와.”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병사 하나가 상단 행렬의 인솔자에게서 빼앗듯이 허가증을 받아오고 검문소의 병사는 기록지를 찾아왔다.

드루쉬아는 두 개를 받아들고 빠르게 확인한 뒤 고개를 들어 상단 행렬을 보았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드루쉬아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얇은 상의는 가슴과 등 쪽이 흠뻑 젖었다.

“소규모 상단이라고 들었는데 실제는 좀 다르군.”

“아, 예. 대공령을 들렀다 탈리온 영지에서도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까다롭게 굴려는 건 아닌데.”

갑작스러운 공작의 출현에 병사들은 당황한 상태였다. 큰일이 난 게 아닌가 싶어 드루쉬아의 입에서 나올 말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다.

“상단의 인솔자를 억류하고 동행한 이들 전원의 신분을 확인하도록 해.”

“예에?”

“가, 각하. 그건….”

원래도 드나드는 사람이 적어서 출입자의 신분을 따로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반박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 뭐가 급해서 이리 서둘러? 어차피 오늘 내로 대공령에는 못 들어갈 테니까 숙소 잡으라고 해.”

드루쉬아는 서류를 병사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 시간부터 검문소의 통과 업무를 중단한다. 대공령에 들어가겠다는 사람들 신분, 모조리 확인해서 내게 가져와.”

감히 왜냐고 이유도 묻지 못했다. 병사들은 황망한 시선을 떨구며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드루쉬아는 급하게 잡은 여관에서 며칠 동안 뒤집어쓴 흙먼지를 씻어냈다. 생각 같아서는 상단 행렬을 세워놓고 직접 하나하나 다 까뒤집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겁먹은 병사들이 더 움츠러들까 봐 참았다.

객실을 걸어 다닐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워낙 낡은 건물이라 나무로 된 바닥이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내는 소리였다.

마을 안쪽에 귀족들을 위한 여관도 있었지만 부러 이곳을 택했다. 이곳이 검문소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예민한 귀가 건물 밖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잡아냈다. 드루쉬아는 창문을 열고 검문소 쪽을 확인했다.

해가 저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어둑한 하늘 아래 검문소 주변에만 노랗게 타오르는 횃불의 빛이 보였다. 건물 밖 공터에는 여관 점원도 나와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거기, 무슨 일이지?”

“예, 나리. 검문소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아마 검문소를 일찍 닫아서 그럴 겁니다.”

검문소 앞에는 오늘 통과하지 못한 상단의 마차들이 공터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개중 짐마차 하나를 앞에 두고 병사들이 모여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드루쉬아가 이내 방을 나섰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셔츠가 젖어 들었다.

검문소가 가까워질수록 다투는 이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러게 왜 레이디에게 함부로 손을 대요?”

“신분을 모르는데 레이디인지 뭔지 내가 알게 뭐요?”

“허가증에 명단 있잖아요. 이미 다 제출했는데 뭘 또 확인해?”

“그러니까 이상하잖소. 왜 귀족 아가씨가 상단 짐마차 속에 끼어있냐고.”

“상단 일행이라니까!”

“저분이 어딜 봐서 상단에서 일할 사람으로 보이오?”

병사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마차 문 앞을 가리켰다. 계속되는 소란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람. 모두의 관심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상대에게 모여들었다.

두근, 두근. 드루쉬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심장만큼이나 그의 걸음도 빨라졌다. 후드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데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확연하게 느껴지는 기분.

병사들은 묵묵부답인 상대에게 다가갔다.

“일단 신분증을 내주시게. 그럼 될 거 아냐?”

“거 협조 좀 합시다. 아가씨가 그러니까 우리만 난처해지잖아.”

“무슨 일인가.”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드루쉬아에게로 향했다.

그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짐마차 앞에 선 두 사람뿐이었다.

“어이쿠, 공작님. 나오셨습니까? 별일 아닙니다.”

“그 별일 아닌 일이 뭐냐고.”

상황을 무마하려던 병사의 대답에 드루쉬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돌아보지 않는 상대에게로 향했다.

“신분 확인을 거부해서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더니, 저기 저놈이 다짜고짜 주먹을 날려서 구속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드루쉬아까지 나오자 병사들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친김에 일행을 밀어내고 병사 하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가씨, 이렇게 버티면 구속할 수밖에 없어.”

“이봐!”

나일이 당장 병사를 뜯어내기 위해 다가갈 때였다. 쩌렁한 고함 소리가 병사에게 날아들었다.

“그 손 놔!”

사람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병사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내내 시선을 피하려던 나일마저 드루쉬아를 돌아보고 놀라 멈춰섰다.

그러나 놀란 사람들의 반응은 드루쉬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친 사내의 손에 잡혀있는 가녀린 팔과 하얗고 작은 손만이 눈에 들어올 뿐.

부릅뜬 푸른 눈동자가 얼어있는 병사를 사납게 다그쳤다.

“당장 놓으라는 말, 안 들리나?”

“네? 네! 죄송합니다!”

병사는 화들짝 놀라 쥐고 있던 가녀린 팔을 놓았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드루쉬아가 병사를 밀어내고 나일을 노려보았다.

“안녕… 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를 마주하고 나일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나일을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일이 있다면 그 옆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는 뻔한 노릇.

심장이 지끈거릴 정도로 요동쳤다. 온몸의 감각이 모조리 곤두서서 눈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드루쉬아는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병사들 모두 제 위치로.”

“네?”

“주위 비우라고.”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병사들이 질겁하며 물러났다.

“그, 그럼. 필요하시면….”

“부를 일 없으니까, 물러들 가.”

“네, 알겠습니다.”

모여있던 이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일에게 향했다.

“저는 못 갑니다.”

나일의 뻔뻔한 대꾸에 드루쉬아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 흉흉한 기세에 나일이 한발 물러났다.

“몇 걸음만 떨어져 드리죠.”

그 이상은 양보 못 한다면서, 나일은 두 사람을 시야에 담은 채 뒷걸음질 쳤다. 드루쉬아는 그제야 눈앞의 여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등 돌리고 있는 상대에게로.

“나 좀 봐.”

이제껏 들끓었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놀라고 화난 마음이 한풀 꺾였다.

“나 좀 보라고.”

힘으로 돌려세울 수도 있었다. 고집스럽게 외면하는 작은 등을 보기 싫어서 우악스럽게 어깨를 쥐고 저를 보게 하고 눈을 마주하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억지를 쓰는 대신 그녀 스스로 저를 보아주기를 바랐다. 여기까지 쫓아 왔으니까, 애타는 저의 마음을 조금쯤은 알아주기를 바랐다.

“…아시카.”

움찔, 여자의 작은 등이 반응을 보였다. 망토 아래 늘어뜨린 하얀 손이 주먹을 움켜쥔다.

뭐가 저렇게 힘들어서 안간힘을 쓰는 걸까.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뿐, 아시카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조용한 곳으로 가죠.”

서늘한 목소리에는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반가움이나 당혹감 같은 당연히 있어야 할 어떤 감정도. 그 차디찬 음색에 드루쉬아의 심장이 덜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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