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한낮인데도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둔 방안은 어둑했다. 숲의 차가운 바람이 새어들까 봐 창문을 꼭 닫아둔 탓에 방안의 공기가 답답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드루쉬아의 표정은 이미 평정을 잃었다. 희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시카, 나 좀 봐.”
“흐으…윽. 르쉬아….”
“그래, 나 여기 있어.”
드루쉬아는 제힘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시카를 품에 끌어안았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가 그의 가슴에 기대어온다. 아시카는 맥없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피가…, 얼굴에 피가….”
“아니야, 난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렇게 당신을 안고 있잖아.”
“흐으… 으….”
경련하듯 덜덜 떨리는 하얀 손을 드루쉬아의 손이 감싸 쥐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입을 맞추고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당신도, 나도.”
가녀린 어깨를 그러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리 힘있게 안아줘도 아시카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환각을 보는 건지 아직도 악몽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반쯤은 정신이 나간 채 알아듣지도 못 할 말들을 중얼거리고 그 와중에도 드루쉬아를 찾아댔다.
대공성을 나온 직후 부상이 심한 네오렌을 살피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가 회복하는 걸 보고 움직이려고 했지만 대공령을 떠나라고 재촉한 것은 네오렌이었다.
「대공성에서 벌어진 일이 알려지면 안 된다. 당장 돌아가. 수도로 돌아가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라.」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네오렌은 두 사람을 보내려고 했다.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되면 수도로 따라가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드루쉬아는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시카에게도 그편이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일단 움직여야 했다.
대공령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아시카는 멀쩡해 보였다. 기이하게도 화살에 맞았던 상처마저 이미 아물어 있었다. 남은 것은 그을린 것 같은 약간의 흔적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침묵하는 그녀에게 억지로 입을 열라고 종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대공령을 출발한 지 이틀 만에 아시카가 쓰러졌다. 그래서 급하게 안가로 옮겨오면서 수도 저택에 있는 기사들과 주치의를 불러들였다.
안가로 도착한 뒤에도 아시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루는 기절할 정도로 울다가, 또 하루는 열이 올라 정신을 못 차렸다. 그걸 지켜보는 드루쉬아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혼미한 가운데에도 아시카는 끊임없이 그를 찾았다. 불안한 와중에도 드루쉬아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시카, 괜찮으니까 제발 쉬어.”
가녀린 신음 소리에 섞여드는 조곤조곤 달래는 목소리. 흐느끼던 아시카의 몸이 맥없이 늘어졌다. 더는 울 기운이 없어서 기절하고 만 것이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곁을 지키고 있던 주치의에게 매서운 질책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좀 해봐. 이렇게 진이 빠져서 사람이 어떻게 견뎌?”
“말씀드린 대로 과로와 정신적인 충격 때문입니다.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것만이 답입니다.”
“심신의 안정, 그래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잖아.”
“그것이… 약이 듣지 않아서….”
수도에서 급히 불려온 주치의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심하게 발작하지는 않는다. 정신 나간 것처럼 헛소리를 하다가도 드루쉬아를 알아보는 걸 보면 미친 건 아닌 것 같았다.
탈진할 만큼 울어대는 것이, 자식을 잃은 어미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모질게 잃은 여자 같기도 했다.
귀하게 자란 귀족 레이디에게 무슨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면서도 저러다 죽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약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일단은 푹 주무시는 게 중요합니다.”
주치의는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그가 방문을 열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애거나이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시카를 침대에 눕히고 드루쉬아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다시 침대가에 주저앉았다. 커다란 상체가 의식 없는 여자 위로 기울어진다.
울고 싶지만 차마 울 수가 없어서 너른 어깨가 떨렸다. 위협적일 만큼 커다란 사내의 체구가 병자의 그것처럼 무기력하게 움츠러들었다.
“내가 더 주의 깊게 살폈어야 했어.”
다치지 않았는지 몸의 상처만 확인하고 말았다. 중상을 입은 네오렌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아시카는 홀로 충격을 감내하고 있었을 터다.
대공성에서 살해 위협을 겪은 것만이 이유는 아닐 거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감당하기 어려운 뭔가가 아시카를 이 지경으로 무너뜨렸다.
대체 그것이 뭔지, 아는 것도 없고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피가 말라 죽을 것 같아.”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흐느꼈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에 잠을 잘 수도 곁을 떠날 수도 없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보고를 위해 방에 들어왔던 애거나이트는 조용히 다시 방을 나섰다.
피를 뒤집어쓴 채 하얗게 질려있던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기절할 것만 같은 얼굴로 덜덜 떨면서도 네오렌을 살리고자 안간힘을 쓰던 여자의 모습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안가에 도착하고 꼬박 사흘째에야 아시카의 발작이 잦아들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아시카의 침실을 찾은 드루쉬아는 그림처럼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달빛에 어두운 실루엣이 유령처럼 위태롭다.
순간 아시카의 이름을 부르려던 입술을 질끈 다물었다. 소리를 내었다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위태로운 실루엣이 정말로 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에도 아시카는 돌아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서 흔들리는 촛불의 빛을 따라 그녀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드루쉬아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내밀 때까지도 아시카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머물렀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기를 잠시, 드루쉬아는 테이블 옆에 있는 물수건을 들었다.
아직까지 땀에 젖어있는 아시카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그제야 반쯤 넋이 나간 눈동자가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새까맣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진 눈동자가 불현듯 불안해졌다.
“당장 식사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수프를 가져오라고 했어.”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말을 꺼냈다. 아시카는 여전히 동요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마르지? 물 줄까?”
다정한 목소리가 깃털로 간질거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귓가에 스며들었다. 안온하게 스며드는 온기가 따뜻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울고 또 울었는데도 아직도 연소 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는 걸까.
“답답하면 창문을 열어줄까? 아니면 필요한 게 뭐든….”
턱 막힌 목소리가 끝을 맺지 못했다. 애써 억누르던 감정이 푸른 눈동자 속에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금세 눈물을 떨굴 것처럼 흔들리는 짙푸른 눈동자. 이미 오래전에 평정을 잃어버려서 차마 숨길 수도, 숨겨지지도 않았다.
그 격한 감정을 마주하지 못하고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처연하게 떨구는 시선에 드루쉬아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가슴이 오그라든다.
드루쉬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아시카는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노공작께선 어떠신가요?”
당장이라도 파사삭 부서질 것처럼 메마른 목소리였다. 물수건을 쥔 드루쉬아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당연한 질문인데도 그것이 아시카가 감추고픈 무언가의 서막처럼 느껴져서 불안했다.
“회복되고 계셔.”
저를 좀 봐주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녀가 야속하다.
“수시로 보고를 받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마차를 탈 정도가 되면 수도로 오신다고 했으니까 뵐 수 있을 거야.”
“다행이네요.”
“상처는 어때? 아프지는 않아?”
아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령에서 확인한 이후 다른 변화는 없었다. 화살이 박혔던 어깨에는 까맣게 그을린 자국만 남았다. 흉터가 아니라 검은 점처럼 보이는 자국이었다.
“…미안해.”
드루쉬아의 사과에 내내 피하던 검은 눈동자가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경솔했어. 가능한 모든 위험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내 안일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당신 탓이 아니에요. 애당초 내가 데려가 달라는 부탁만 안 했어도….”
“미안해, 이건 그냥….”
그녀를 잃을 뻔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가정인지 소리 내어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
아시카는 그가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부러 외면했다. 그 진심을 마주했다가는 속절없이 끌려갈 것만 같아서.
“콜테른 경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여기 있나요?”
방문자의 존재를 숨기기에는 건물이 작았다. 며칠 전 도착한 이그레인 기사들은 내내 주위를 배회하며 아시카와의 만남을 요구하고 있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해. 일단 몸부터 회복하고.”
“콜테른 경을 불러주세요. 만나야겠어요.”
“무슨 얘기를 하든 내가 먼저야. 나는 아직 당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드루쉬아가 전적으로 아시카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이불깃을 쥔 하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는데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숨조차 멈추고 달싹이던 입술이 간신히 소리를 내었다.
“대답할 의무… 없어요.”
짙푸른 눈동자가 확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진다. 아시카는 매서워지는 시선을 외면하지 않으며 나머지 말을 뱉었다.
“충실하게 거래에 응해준 것 고마워요. 이 일로 인해 다른 문제가 생긴다면 이그레인 소공작의 지위를 걸고 책임질게요. 그러니까….”
드루쉬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이없어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아시카가 내뱉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콜테른 경과 함께 집에 돌아갈게요.”
순간 드루쉬아의 숨조차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애틋하게 느껴지던 감정이 자취를 감추고 견고한 외피가 그를 에워싼다.
드루쉬아는 그녀에게 기울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똑바로 일어나 아시카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그림자가 위압적이다. 어떤 질책이나 분노의 말보다도 두려운 침묵이었다. 그러나 아시카는 그가 내보이는 위협적인 침묵을 받아들였다.
드루쉬아의 손에서 툭, 하고 물수건이 떨어졌다.
“그래, 그간 고생이 많았지.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나올 수는 있나?”
“내가 알아서 할 문제예요. 그걸로 당신이 신경 쓰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신경이 쓰이는데.”
“그동안 도와준 것 고마워요. 기대보다 많이 애써줬어요. 하지만 이제는 내가 알아서….”
“그게 당신이 내린 결론인가?”
짙푸른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파리한 안색의 여자는 금세 기절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이제 그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하녀를 불러주지. 혼자서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거야.”
드루쉬아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듣고 싶지 않은 어떤 말이 아시카의 입에서 나올 것만 같아서 말을 잘랐다.
진심이든 아니든 그 말을 듣고 나면 이성을 잃어버리고 정말 미친 짓을 할 것만 같아서, 더는 그녀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