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에 이그레인과 탈리온 사이에 또 한 번 혼맥이 추진될 뻔했었다. 적어도 그건 정략혼이 아니었다.
“고작이 아니야. 내 딴에는 이그레인과 탈리온을 갈라놓으려고 무던히 애썼다고. 씨를 말리기보다는 온건한 방법을 택한 거야.”
이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아아악! 이 악마!”
그러나 후작이 옆으로 피하면서 이븐의 가녀린 몸뚱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에 쓰러지고도 악에 받친 외침은 계속되었다.
“내 고향을, 내 아이들을 네 놈이 모두 앗아갔어! 천벌을 받을 놈. 너는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거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비스. 나도 네가 이그레인하고 붙어먹을 줄은 몰랐어. 진작에 죽은 줄만 알았지. 일레르나 고것이 나보다 먼저 너를 찾았을 줄이야!”
웨이브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븐과 결혼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때였다. 하필 그때 당시의 황후 일레르나가 먼저 이븐을 찾아냈다. 정확히는 아크펠라의 대공녀 이비스와 그 아이들을.
“일레르나가 너를 그렇게 싫어하는 줄은 몰랐지. 아니, 두려워서였을까? 어쩌면 질투였는지도 모르고.”
후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조소했다. 이븐의 눈동자에서 푸른 안광이 뚝뚝 떨어졌다.
“저주를 받은 게 황족뿐인 줄 알아? 제르뵈, 네놈은 착각하고 있는 거야! 잠들어 있던 그를 깨운 건 선황제고 깨어난 신은 신방을 부수고 싶어 하지.”
그걸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어리석은 남자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축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선황제의 착각이 재앙을 불러왔듯, 네 놈 또한 마찬가지야.”
“착각이든 아니든 이제 중요하지 않아. 이비스, 너와 나를 봐. 영생을 사는 내게 꼭 같은 운명을 지닌 반려라니. 이보다 더 운명이 있을 수 있어?”
“영생? 웃기지 마라, 제르뵈. 이건 그렇게 달콤한 축복 같은 게 아니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신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터였다.
경고를 어긴 순간부터 황족에게 스며든 저주는 대대손손 농도를 더해가며 끔찍한 파국을 불러올 것이다. 대공령에서 시작된 병은 제국 전체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계속 번져갈 테고.
“늙지 않는다고 해서 몸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네 놈도 느끼고 있을 텐데? 점점 움직이는 게 부자연스러워지지? 어딘지 모르게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안 그래?”
마이헬러 후작의 얼굴이 움찔했다. 이븐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화병은 신의 경고를 어기고 힘을 남용한 황족에게서 시작되었지. 그런데 40년 전, 갑자기 대공령에서도 시작되었어. 그래도 모르겠느냐? 병은 점점 더 확산되어 결국 제국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될 거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다!”
그리고 종국에는 파괴적인 재앙을 불러오게 될 터였다.
“영생? 그따위 축복은 없어.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 같은 육체라면 모를까.”
매일 밤 그녀에게 찾아와 애원하고 윽박지르고 악몽을 쏟아부으며 협박했던 목소리. 그 소리가 태양 아래 눈을 뜨고 있어도 끊임없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긴 세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아크펠라의 아이야, 문을 열어줘. 나를 내보내 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몸서리치는 이븐을 보면서 후작은 입매를 비틀었다. 비열하게 번들거리는 미소였다.
“의견 차이는 차차 좁혀가면 돼. 시간은 넘쳐날 만큼 많으니까. 네가 고분고분해진다면 이그레인의 아이 하나쯤은 살려줄 수도 있어. 적어도 그 아이는 네 핏줄이잖아?”
후작이 침대가로 걸음을 옮겨 설렁줄을 당겼다. 신호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건장한 사내들이 들어왔다.
이븐은 다가오는 사내들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사내 둘이 그녀의 양팔에 달라붙었다.
“뭘 하려고….”
“내가 왜 연금술사의 약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과거 웨이브가 그토록 연금술사를 찾아 헤맸는데. 하마터면 성공할 뻔했지. 너를 다른 사람인 양 데려다 이그레인 영지에 숨겨두려던 계획을 말이야.”
마이헬러 후작은 킬킬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븐을 잡고 있던 사내들이 그녀의 턱을 쥐고 강제로 벌리자 시종이 다가와 후작에게 약병을 건넸다.
“너도 퍽 힘들었겠구나, 이비스. 부작용이 적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해방시켜 주마. 이젠 네 모습대로 사는 거야.”
저항은 소용없었다. 도리질을 치려 해도 얼굴을 움켜쥔 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벌어진 입속으로 우악스럽게 약병이 밀려들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약이 입속을 가득 채우고 목구멍과 턱을 타고 흐른다.
“컥, 콜록. 콜록.”
약을 다 삼킨 걸 확인하고서야 사내들은 이븐을 놓아주었다.
이븐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쿵쿵, 진동하는 심장박동에 맞춰 머릿속도 함께 요동친다. 차가운 냉기가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손끝 발끝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저린 감각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마이헬러 후작이 손짓하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지저분한 머리색 좀 어떻게 해 봐.”
하녀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이븐을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끌고 갔다.
“흐윽… 놔….”
미약한 저항은 먹히지 않았다. 약 기운 때문에 맥을 못 추는 사이 머리칼에 뭔가를 들이붓고 씻어내기를 수차례. 적금발의 머리칼이 사라지고 본래의 창백한 백금발이 드러났다.
어느새 눈동자도 원래의 색을 되찾아 선명한 청보라빛이 되었다. 보석처럼 아름답지만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였다.
이븐과 시선이 마주친 하녀가 흠칫 놀라 고개를 떨궜다. 두 하녀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의 신분이 보통은 아닐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녀들이 매달려 머리칼을 말리고 옷을 입히는 동안에도 이븐은 인형처럼 맥을 못 췄다. 뒤따라 들어온 후작이 탄성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무수히 많은 사내들이 이 모습에 홀려 청혼서를 보냈었지.”
불임이라는 이유로 황태자에게 파혼당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 대공가와 격이 맞는 남자나 정당한 가문의 후계자는 하나도 없었지만.
후작이 다가와 이븐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불임이 아니라 더한 사유를 만들어줄 걸 그랬어. 기왕이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한 병이라던가.”
이븐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후작을 밀어내지 못하고 힘없는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네 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이븐의 목소리가 어눌하게 잦아들었다.
예상은 했다. 분명 대공가의 주치의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웨이브와 함께 지낸 지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아 첫 아이를 임신했다.
그때 알았다. 독에 중독된 것은 그녀의 모친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 여자아이에게 어려서부터 독을 먹여 초경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그보다 훨씬 쉬웠을 테니까.
마이헬러 후작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대공가를 노려왔는지, 얼마나 집요한 방법으로 그녀를 손에 넣으려고 했는지 몸서리가 쳐졌다.
문득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븐을 씻기면서 사용한 향유의 냄새가 유독 신경에 거슬렸다.
“이 냄새, 향유를 누가 가져온 거지?”
“예? 후작님의 지시로 오늘 특별히 들여온 향유입니다만….”
아마도 새로운 향이라서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흘렸다.
“침실로 옮겨.”
“네, 후작님.”
하녀들이 이븐의 양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하녀 한 명이 주룩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 바람에 이븐도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뭐 하는 짓이야. 얼른 일어나.”
옆에 있던 동료가 다급히 채근했다. 주섬주섬 몸을 추스른 하녀가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맥없이 고개가 꺾이고 말았다.
“애가 왜 이래?”
다른 하녀가 이븐을 놓고, 쓰러진 동료를 일으키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금 전까지 멀쩡해 보였던 하녀 둘이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이븐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쓰러진 두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향유가 아니었다. 밀도가 다른 이질적인 공기가 문틈에서 새어들어 오고 있었다. 마이헬러 후작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후작님! 무슨 일입니까?”
“모두 입을 막아. 건물에서 떨어져!”
후작은 그렇게 소리치고 별채 앞 정원으로 달렸다. 그러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별채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고 후작의 시야는 그대로 암전되었다.
방에 주저앉아 있는 이븐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렀다. 이질적으로 아름다운 청보라빛 눈동자는 생기가 빠져나간 보석과도 같았다.
유일한 탈출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걸 이븐은 자각하지 못했다. 허공에 멈춰있던 눈동자에서 눈물이 고이고 입술이 달싹였다.
“…아가야….”
느리게 깜박이던 눈동자에서 주륵 눈물이 흘렀다.
“어디 있니….”
어릿하게 흘러나온 말끝이 뭉그러졌다. 젖은 눈동자가 처연히 아래로 떨어진다. 이븐은 회색빛이 얼룩덜룩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하얗고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약에 절어 흉해진 손으로 나무 바닥을 더듬었다.
“어디 있니… 엄마가 찾는데.”
반들반들하게 매끄러운 나무 바닥을 손으로 훑고 힘을 잃어버린 다리를 질질 끌어 앞으로 기어갔다.
“우리 아기 숨바꼭질을 하나….”
툭, 툭. 마른 나무 바닥 위로 검은 얼룩이 점점이 번져간다.
“엄마가 찾으면 우리 아기가 술래….”
다리를 끌어 옮길 때마다 화려하게 치렁거리는 드레스가 바닥에 긁혔다. 이븐은 더듬더듬 기어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 사이 창문 밖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지나갔지만 이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털썩, 풀숲에 스러지는 둔탁한 소음이 이어졌다. 그동안에도 이븐은 여전히 두 팔과 다리로 바닥을 더듬으며 방안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 뒤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안으로 뛰어든 이들은 홀로 방을 기어 다니는 여자를 보고 경악했다.
“세상에 맙소사. 목표물이 저 여자가 맞아?”
뒤따라 들어온 나일이 이븐을 발견하고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맞는… 것 같은데요.”
나일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분명 그가 아는 얼굴이지만 전혀 달라진 모습에 말을 잃었다.
당황한 나머지 드루쉬아는 얼굴을 가린 복면을 거칠게 끌어내렸다.
“아시카가 아무 얘기도 안 해줬어?”
“그건 제가 물어볼 말이죠. 저보다 아가씨와 가까우신 분께서 그걸 저한테 물어보면 어쩝니까?”
두 사람이 멈춰있는 사이 뒤따라 들어온 이들이 내부를 살피고 욕실 안쪽에 쓰러진 하녀들을 발견했다.
“여자 둘이 있습니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일과 드루쉬아가 정신을 다잡았다.
“죽은 건 아니지?”
“네, 의식을 잃은 것뿐입니다.”
오늘 일로 사망자가 나오면 곤란하다. 그게 설령 하녀일 뿐이라 해도.
“그런데 왜 저 여자만 기절하지 않은 거야? 장정들도 정신을 잃었는데?”
드루쉬아의 질문에 나일도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이븐은 깨어있기는 하지만 제정신은 아니었다. 침입자들이 있는데도 끊임없이 방 안 어딘가를 더듬고 있었다.
“환각 성분이 있었던 걸까요?”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드루쉬아는 검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이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내 아기… 어디 있니.”
들릴 듯 말듯 작은 속삭임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미안해… 엄마가 지켜주지 못해서….”
가까이 다가온 나일도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얼어붙었다.
“흐으… 윽. 가엾은 내 아기. 울지마. 울지마….”
서럽게 흐느끼는 여자의 눈물이 처연하다. 잃어버린 아기를 찾는 목소리가 단장을 끊어놓을 듯 처절했다.
이븐의 기억은 수십 년 전 숲속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