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24화 (124/153)

#124.

시리게 얼어있던 심장이 크게 박동하기 시작하고 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급해진다. 마침내 문을 열었을 때 회색 후드 망토를 걸친 작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여자의 시선은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누가 볼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태도였다. 나일은 그녀가 방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발 물러나 비켜섰다.

방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여자가 나일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빠르게 나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몸은 어떠신가요? 어디 아픈 데는 없습니까? 치료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인사조차 생략되었다. 다급한 마음에 질문이 줄줄이 쏟아져나온다. 방으로 들어와서 푹 눌러쓴 후드 망토를 벗지도 않았다.

후드에 반쯤 가려진 하얗고 작은 얼굴. 눈가에 깔린 옅은 주름이 마지막 봤을 때보다 한층 깊어졌다.

“어쩌자고 그리 무모하게 돌아다닙니까. 그러다 더 나빠지기라도 하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구구절절 애끓는 감정이 애써 삼키는 목소리 끝에 묻어난다.

“…치료는….”

나일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제 부모라 이르는 자작 부부와 사뭇 다른 반응에 입에서 허허로운 웃음이 흘렀다.

“…수도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수도요? 이제껏 수도에 계셨습니까?”

클레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따뜻한 연갈색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드러났다.

“이그레인 공작저에 머물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그레인이라뇨?”

권력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해도 수도의 세력 가문이었다. 나일이 가능한 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길 바랐던 클레멘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수도의 소식을 아직 못 들으셨어요?”

예상대로 지방 영지까지는 소식이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황태후 때문에 수도가 발칵 뒤집혔어요.”

황태후 이야기가 나오자 클레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도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황태후 폐하께서 마이헬러 후작가의 사생아였답니다. 혹시 알고 계셨어요?”

클레멘은 헛숨을 들이켰다. 경악으로 눈동자가 크게 벌어지고 힘이 쭉 빠져버린 다리가 그대로 꺾였다. 나일이 재빨리 팔을 뻗어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주었다.

“아아….”

탄성과도 같은 신음이 흘렀다. 최고의 권좌 위에서 냉혹하게 바라보던 황태후의 얼굴.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서서 그녀를 위협하던 얼굴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없다.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 수십 년을 거쳐 오다 보면 조금은 방심하게 되고 그 순간 비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어 나간다.

그렇게 클레멘은 알게 되었다. 황제조차 알지 못했던 황태후의 비밀을.

“그 일로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요.”

나일은 클레멘의 팔을 잡아주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모친인 폐황후 클레멘을 만나는 것, 그것이 나일이 여기로 다시 돌아온 이유였다.

* * *

흐린 하늘만큼이나 넓은 정원도 색이 바랬다. 한동안 화단을 점령했던 화사한 가을꽃이 빛을 잃어 누렇게 시들어갔다. 정원사들은 서리를 맞고 색을 잃은 꽃들을 하나하나 잘라내며 겨울 초입에 접어든 정원을 정돈해나갔다.

녹음이 우거졌던 정원수도 노랗게 물들어가며 낙엽을 떨구는 계절. 채 치우지 못해 소복이 쌓인 낙엽 위를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며 밟고 지나갔다.

이그레인 공작저로 들어선 마차가 본 채 앞에서 멈춰 섰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반쯤은 굳어진 얼굴을 수습하면서, 반쯤은 떨떠름한 얼굴로 드루쉬아를 맞이했다.

탈리온 공작이 시시때때로 이그레인 공작저를 찾아오는 날이 오다니. 그걸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루쉬아는 태연하게 제 목적에만 충실했다.

“아시카는 어딨지?”

“의상실에서 온 사람들과 드레스룸에 계실 겁니다.”

“어찌 된 게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얼굴 보기가 힘들어?”

드루쉬아의 푸념에 펄번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려 공작가의 결혼입니다. 당연히 바쁘시겠죠.”

“나도 결혼하는 당사자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희 아가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공작님께서는 왜….”

펄번이 드루쉬아를 흘깃 보고는 말을 삼켰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곧 아가씨의 부군이 되실 공작님께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격의 없이 지내던 것은 신분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았던 파병군 시절의 일이었다. 여기가 이그레인 공작저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며 펄번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물론 드루쉬아는 상한 생선을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건 신종 괴롭힘인가? 아니면 항의하는 방법을 바꿨어?”

“앞으로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닌데 제 신분에 맞게 처신하겠습니다.”

펄번은 진지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그래, 평생 지겹도록 볼 사이지. 주제 파악이 빨라서 좋아.”

“예의를 갖추겠다는 말은 반대도 해당됩니다, 공작님.”

그러니 드루쉬아도 이그레인의 기사단장에게 예의에 맞는 언행을 사용하라는 의미였다. 물론 통하지는 않았지만.

드루쉬아는 피식피식 비소를 날리며 펄번을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당황한 하녀장이었다.

“탈리온 공작님, 오셨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면 아가씨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나더러 어디서 기다리라고? 응접실? 아니면 현관?”

기다리라는 말에 드루쉬아의 어조가 곱지 않았다. 사전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통에 사용인들도 이만저만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는 무려 제국에 넷밖에 없는 공작 중 한 명이었다. 하다못해 접객조차 아무나 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웨이브는 자주 저택을 비웠고 아시카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그럴수록 드루쉬아는 더욱 제집처럼 저택을 활보하고 다녔다. 그 꼴을 보기 싫어서 웨이브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말이 돌 정도였다.

드루쉬아는 당황한 하녀장을 뒤로하고 아시카의 방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선 드루쉬아는 드레스룸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벌렸다.

“탈리온 공작님? 아, 안녕하세요?”

“이스나 남작 부인?”

드레스룸에서 의상실 직원들과 씨름하고 있는 사람은 아시카가 아닌 이스나 남작 부인이었다.

수십 개의 원단과 자수 견본, 그 배는 넘는 드레스 장식과 보석 디자인 북, 뭐가 뭔지 다 알아보기도 어려운 물건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이게 다… 뭔가?”

“뭐긴요. 신부의 드레스를 만들 재료들이죠.”

당황한 것도 잠시뿐, 이스나 남작 부인은 명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랜만에 돈 걱정 없이 값비싼 재료들을 늘어놓고 고르는 즐거움에 한껏 취한 탓이다.

“이걸 하나하나 다 직접 골라야 한다고? 주문만 하면 되는 것 아니었어?”

“이게 어디 보통 드레스인가요? 무려 결혼식 드레스예요. 당연히 꼼꼼하게 주문해서 제작해야죠.”

드레스를 제작할 원단뿐만 아니라 기본 디자인에 들어가는 자수의 종류, 위치, 보석 장식과 꽃장식까지 모두 골라야 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남작 부인이 하고 있나?”

“아, 그게 말이죠.”

남작 부인은 손에서 자수 견본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레이디 이그레인이 바쁘셔서요.”

본래 결혼 준비를 할 때는 신부의 어머니가 모든 일을 지휘한다. 어머니가 없는 경우에는 대모가, 혹은 가까운 혈족의 부인이 돕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아시카에게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시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던 방계의 혈족들은 그녀가 성년이 된 이후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곤란하기는 이스나 남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준비를 도와달라길래 기쁘게 달려왔더니 정작 준비는 그녀에게 떠넘기고 아시카는 다른 일로 바빴다.

상황을 파악한 드루쉬아도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뭐가 얼마나 바쁘다고 제 결혼식조차 팽개쳐 버린 걸까.

“그래서 아시카는 어디 있는데?”

“아, 그건… 잠시만요. 마릴린, 레이디 이그레인께선 어디 계시니?”

심지어 신부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아, 2층에 계시는데요.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셔서….”

“2층 어디?”

“공작님의 집무실이요. 제가 가서 말씀 전해드리고 올게요.”

드루쉬아는 손을 휘휘 저으며 문으로 향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며. 각자 할 일 하도록 해. 여기서 제일 안 바쁜 내가 가도록 하지.”

“아니 그래도….”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드루쉬아는 이미 밖으로 사라졌다. 긴장하고 있던 의상실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탈리온 공작이 원래 저렇게 격의 없던 사람이었나, 그런 얼굴이었다.

드루쉬아는 단숨에 2층으로 내려가 웨이브의 집무실을 찾았다.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이번에는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어수선한 3층과 달리 커튼을 쳐둔 집무실 안은 어둑하고 고요했다.

“어디 있다는 거야?”

만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두 사람은 결혼식 날짜를 정한 뒤부터 거의 함께 있지 못했다. 사실상 그럴 시간이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드루쉬아가 찾아와야지만 간신히 얼굴이나 볼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결혼식을 남에게 다 맡겨놔?”

예식이 머지않았는데 결혼식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아시카에게 서운함마저 들었다.

집무실 안쪽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애타게 원하는 사람은 저 안쪽에 있을 터다. 조급했던 마음을 다잡고 드루쉬아는 가만히 문고리를 쥐었다. 사위가 고요해서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문이 열리고 그림처럼 앉아있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 드루쉬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방이었다. 벽면의 선반은 서류로 가득 차 있고 가운데 있는 작은 테이블에는 촛대가 아닌 등롱이 놓여 있었다.

아시카는 문이 열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서류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를 부르려던 드루쉬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일하는 모습조차 그림처럼 고요한 여자였다. 서운했던 마음은 일에 몰두한 아시카의 모습 앞에서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창 집중해 있던 얼굴에 슬며시 미간이 좁아지고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깜박였다. 생각에 잠겨 앙다문 입술과 생기 가득한 얼굴이 조목조목 뜯어볼수록 새삼스러워 넋을 놓고 보게 된다.

지금의 평화로운 모습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만큼 이 순간이 행복해서 드루쉬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바스락, 아시카의 손에서 서류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아시카보다 드루쉬아가 먼저 떨어진 서류를 손에 쥐었다.

“아, 르쉬아?”

“이제야 내 얼굴이 보여?”

아시카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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