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처음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우리 얼마 뒤면 결혼할 사이야.”
“아무리 그래도….”
추위에 희게 질린 얼굴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시카가 망설이는 걸 보며 드루쉬아가 등을 돌렸다.
“안 볼 테니까 옷 벗고 여기 이 담요 두르고 있어.”
침대라고 말하기도 뭐한 나무판자 위에 거칠한 담요가 있었다. 드루쉬아는 등을 돌린 채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 동안 아시카는 옷을 벗었다. 그렇다고 다 벗을 수는 없어서 제일 부피가 작은 아래 속옷만 남기고 마른 담요를 몸에 둘둘 말았다. 담요에서 눅눅한 풀냄새가 훅 끼쳤다.
드루쉬아는 담요에 파묻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시카를 보고 웃었다.
“왜… 왜 웃어요?”
아무래도 찬기에 머릿속까지 마비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아시카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드루쉬아는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르쉬아!”
아시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루쉬아는 옷을 벗어 던졌다. 외투를 벗고 흠뻑 젖어 달라붙은 바지와 셔츠를 뜯어내듯이 걷어낸 뒤 속옷까지 벗어버렸다.
“나는 창피하지 않으니까. 보고 싶으면 마음껏 봐도 돼.”
드루쉬아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아시카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바로 근처에서 하얀 살결이 아른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든 빨리 입어요!”
“입을 게 없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죠. 담요라도 걸치면 되잖아요.”
깊은 울림이 있는 웃음소리가 비좁은 오두막 안을 울렸다. 드루쉬아는 마른 수건을 들고 아시카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든 입으라니까요?”
“담요가 한 장밖에 없어.”
“아….”
“그 담요, 같이 덮을까? 그러면 되겠는데?”
드루쉬아의 손이 담요를 여민 아시카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담요를 넓게 벌려 함께 덮자는 의미였다. 아시카는 황급히 그의 손을 피해 몸을 돌렸다.
“이리 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아시카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나신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눈을 감아도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과 하얀 나신이 아른거려 아찔했다.
그 사이 드루쉬아는 마른 천으로 아시카의 젖은 머리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할게요.”
“그럴까? 담요는 나 주고?”
아시카는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손이 모자라잖아.’
담요를 둘둘 말고 있는 손을 놓으면 당장 드루쉬아가 달려들어 그마저도 벗겨낼 것만 같았다.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좋아서 그러는 거잖아.”
쿡쿡, 웃음을 흘리며 능청스러운 고백이 이어졌다. 순간 아시카는 말을 잃었다.
기시감이 든다. 이 비슷한 기억이 언젠가 있었다.
그게 언제였을까. 가슴께를 간질거리는 따뜻한 온기와 소년처럼 풋풋하게 웃던 남자의 기억이.
“하얗게 질려서는. 그러다 쓰러지겠어.”
드루쉬아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망연히 서 있는 그녀를 끌어다 침대 가에 앉히고 머리칼의 물기를 털어냈다. 능숙하면서도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설마….’
아주 사소한 의혹과 혹시 모를 가능성. 아시카는 웃고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자 드루쉬아의 얼굴에도 홍조가 올랐다.
“음, 좋긴 한데. 너무 뜨거운걸?”
“아, 응?”
물기가 가신 머리칼을 커다란 손이 살금살금 쓸어내렸다.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새카만 먹색 머리칼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순백의 피부. 검은 머리칼이 휘감긴 하얗고 가녀린 목선.
드루쉬아는 물 냄새를 머금은 머리칼을 손에 쥐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뭐 하느냐고, 그만하라고 해야 하는데 아시카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칼에 닿는 입술이 조심스럽고도 애틋해서. 동시에 온전히 드러난 남자의 나신이 색스러워서 묘한 열기가 일었다.
머리칼을 문지르던 입술이 슬며시 목 언저리로 다가왔다.
“그거 알아? 여기, 하얀 네 목을 보면 깨물고 싶어져.”
그리고 마음껏 핥아 붉은 흔적을 잔뜩 남겨놓고 싶다고.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목소리와 간질거리는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아시카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담요를 움켜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드루쉬아의 손이 아시카의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슬쩍 잡아당기는 힘에 담요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물러나려고 하자 나머지 한 손이 담요 사이로 파고들어 맨살을 훑었다.
“흣.”
목선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쇄골을 핥다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시린 한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몸에서 야릇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잠깐…, 아….”
드루쉬아의 체중에 떠밀려 그녀의 상체가 침대 위로 기울었다. 그의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가면서 몸을 휘감고 있던 담요가 맥없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쓰러진 그녀의 상체 위로 커다란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흐앗….”
차가운 피부 위로 내려앉은 입술이 뜨겁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느낌이 뭉글뭉글 맨살을 문지르며 저릿한 자극을 남겼다.
커다란 한 손이 부드럽게 엉덩이를 쓸며 들어 올리더니 얇은 속옷을 잡아 그대로 내렸다. 피할 틈도 없이 벗겨진 속옷이 한쪽 발목에 걸려 달랑거렸다.
“르쉬아, 여기… 누가 올지도….”
“…아무도 안 와.”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뜨거운 숨결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사실은 드루쉬아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사방에 아시카를 찾는 탈리온의 기사들이 깔려있으니 언제, 누구든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누구든 찾아오면 쫓아내면 되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입술이 더 아래쪽으로 미끄러졌다.
아시카의 입술에서 탄성과도 같은 신음이 새었다. 뜨겁게 닿는 체온과 질척하게 휘감기는 강렬한 자극. 아래쪽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저릿한 쾌감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점점 거세어지는 빗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촛불 하나만이 아른거리는 오두막 안에는 달뜬 숨소리와 살 부딪는 질척한 소리가 이어졌다. 거세던 비가 잦아들고 하늘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이 물러갈 때까지도.
따뜻한 온기가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보드랍고 간질거리는 느낌은 햇살이 전해주는 온기였다.
길게 드리워진 까만 속눈썹이 달싹였다. 눈을 뜨기도 전에 입술 위로 따뜻하고도 매끄러운 감각이 닿았다. 촉촉하게 달라붙은 입술이 슬며시 그녀의 아랫입술을 눌러 벌리고 말캉한 혀가 입속으로 파고든다.
“으응….”
단잠을 깨우는 혀 놀림이 입안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양. 침입자를 밀어내기 위해 고개 돌리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이 아래턱을 쥐고 있었다.
두툼한 혀가 그녀의 혀를 얽어매고 깊게 빨아들이며 입속을 휘저었다. 잠이 깨는 동시에 달큰한 자극이 몰려들었다. 진한 정사만큼이나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아시카가 버둥거리자 입속을 문질러대던 혀가 물러나고 욕심껏 빨아대던 입술이 틈을 만들어주었다.
“흐읍, 르쉬….”
“으음… 말하지 마. 너무 자극적이야.”
드루쉬아는 살금살금 입술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나 버려두고 실컷 잤으면 이제 보상을 해줘야지.”
닿아있는 입술이 조곤조곤 말을 건넬 때마다 간질거렸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아시카의 입에서 웃음이 새었다.
“르쉬아, 좀….”
“왜.”
“말을… 하려거든, 좀 떨어져요.”
“싫어.”
서로의 숨결이 뒤엉켜 닿아있는 입술이 촉, 촉 달라붙었다. 습한 숨결을 머금은 웃음까지도 서로의 입술에 닿아 섞여들었다.
“간지러워요.”
“으음, 나도.”
이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은 나른한 기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뒤엉키는 피부의 감촉이 한숨이 나올 만큼 좋았다. 뜨거운 그의 체온 덕분에 불이 꺼져 싸늘해진 공기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맞닿아있는 몸 아래쪽이 유독 뜨겁다. 점점 열기를 더해 가며 단단한 것이 아랫배를 짓누르며 꿈틀거렸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러겠어. 바쁘다고 정신 팔려서 결혼도 뒷전이면서.”
그동안 종종 핀잔하더니 꽤 감정이 쌓여있었나 보다. 드루쉬아는 바르작거리는 가녀린 여체를 체중으로 눌러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아랫도리의 단단한 살덩이는 더 크기를 키워가며 그녀의 중심부를 짓눌렀다.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가 들썩였다. 맞닿은 아래쪽을 짓누르듯 문지르며 민감한 부위를 자극했다. 거친 담요가 들썩이면서 피부를 스치는 느낌조차 자극적이었다.
“하아…, 르쉬아.”
“더 불러줘. 후… 좋아.”
그만 가야 한다고,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으냐고 머릿속에 뱅뱅 돌던 생각은 농밀한 자극에 떠밀려 사라졌다. 그러나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의 나신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무슨 소리죠?”
아시카는 당황했고 드루쉬아는 작게 욕설을 뱉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금세 오두막 근처까지 가까워졌다.
드루쉬아는 미적거리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아마 내 기사들일 거야. 이 일대에 기사를 풀었거든.”
아시카는 헛숨을 들이켰다.
“옷, 내 옷, 르쉬아.”
“걱정하지 마. 예의 없이 막 들이닥치진 않아.”
드루쉬아가 침대를 떠나기도 전에 아시카는 먼저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옷부터 줘요.”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하얀 나신이 지독히 자극적이었다. 드루쉬아는 미간을 좁히며 갈등했다.
놓아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사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면….’
맞닿아있는 아랫도리에는 아직도 그의 중심이 빳빳하게 곤두서 있었다. 짙푸른 눈동자에서 채 해소되지 않은 정염을 읽고 아시카는 더욱 당황했다.
“사람들이 온다면서요! 르쉬아!”
“후…. 잠깐이면 되는데. 아시카, 우리….”
“르쉬아!”
은근하게 허리를 감아오는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잠깐이나 마나, 밖에 기사들을 두고 뭘 하자는 걸까.
‘미쳤어, 미쳤어.’
팔뚝을 얻어맞고서야 드루쉬아는 마지못해 손을 거뒀다. 가늘어진 눈매에는 채 삭이지 못한 욕구와 불만이 가득했다.
“내 부인은 나에게만 매정하지.”
거기다 일 중독의 기질도 있고. 이그레인 소공작의 자리에다 공작부인의 위치까지. 가만 보니 아시카의 일이 곱절로 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문제가 심각하잖아?’
뒤늦게 깨달은 드루쉬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생각에 빠진 사이 아시카는 담요로 몸을 가리고 황급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테이블과 의자, 선반에 얌전히 걸쳐 있는 옷들은 다행히 대부분 말라 있었다. 드레스가 형편없이 구겨졌지만 두툼한 외투를 걸치면 그럭저럭 가려질 것 같았다.
아시카가 다급히 옷을 챙겨 입는 동안 드루쉬아는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바쁘네, 바빠.’
품위조차 내던지고 옷을 챙겨입는 손길이 어찌나 급한지. 불퉁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입매가 슬며시 올라갔다. 조금 더 놀려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진짜로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아시카가 옷을 챙겨 입고 드루쉬아가 바지에 한쪽 다리를 밀어 넣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안에 누구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