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정오 무렵부터 이그레인의 본성 주변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본성 안쪽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밖에서도 축연이 벌어졌다. 길바닥에 깔린 살얼음은 정오의 햇볕과 사람들의 발길에 바스러져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병사들은 성채 밖에서 들려오는 악공들의 연주 소리와 흥겹게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결혼식 축연은 앞으로 일주일간 밤낮으로 계속될 예정이라 본성의 병사들에게는 금주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문 앞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짐꾼과 막아서는 병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실랑이였다.
“지금 꼭 들어가야 한다니까요?”
“모든 운송은 어제 마무리해야 한다고 알렸잖소?”
“일이 좀 많았어야지!”
짐꾼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에 있던 병사와 순찰 돌던 기사들까지 멈춰서서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엇, 단장님.”
펄번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모여든 병사와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구경하고 있을 새가 어딨어?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오늘은 제국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두 개 공작가의 결합을 알리는 중요한 날이었다. 작은 소란으로 빈틈이 생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 흘금거리며 각자 자리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펄번은 소란을 일으킨 상대를 확인했다.
“자넨 누군가?”
“도축업자입니다. 오늘 피로연 때 쓸 고기라서 지금 못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본성은 오늘 종일 출입을 통제하네. 그 때문에 성 밖의 출입자는 어제까지 일을 마치라고 심부름꾼을 보내 알렸을 텐데?”
“듣긴 했습니다만 어쩌다 보니….”
워낙 주문량이 많아서 시간 내에 도축을 끝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좋은 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고?”
“예외는 허락하지 않겠네, 콜테른 경.”
펄번의 추궁에 등 뒤에서 답이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애거나이트가 탈리온의 기사 둘과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 정문에서 벌어진 실랑이를 들었기 때문이다.
본성의 외부 경비를 탈리온이 맡고 내부 경비를 이그레인의 기사들이 맡았다. 아무래도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봐주느라 빈틈이 생길 것을 염려해서였다.
애거나이트를 발견하고 펄번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융통성을 좀 발휘해 주시죠?”
“사소한 예외가 큰 사고가 될 수 있네. 모르지 않을 텐데?”
애거나이트는 문제의 도축업자와 병사를 슥 훑어보고는 펄번에게 툭 말을 뱉었다.
“꼬장꼬장하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귀가 밝은 사람에게는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였다.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펄번에게 쏟아내는 대신 도축업자에게 입을 열었다.
“돌아갔다가 내일 일찍 다시 오게.”
“생고기입니다. 그러다 상하면 어쩌려고요!”
“지금 날씨를 봐. 하루 만에 상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배달을 못 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탈리온의 기사단을 찾아오게. 배상해줄 테니.”
“허허.”
꼬장꼬장한 애거나이트의 태도에 펄번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째 탈리온의 기사들은 주인과 영 달랐다. 드루쉬아의 반의반만 닮았어도 이보다는 융통성이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결혼식 당일 날 양쪽 가문의 기사단장이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펄번은 터지는 속을 꾹 눌러 담으며 입을 열었다.
“탈리온의 기사단장님, 아니 델피노 남작님. 이렇게 합시다.”
애거나이트는 어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태도였다.
“일단 내용물만 들어가면 되는 문제니까, 내성의 병사들에게 고기를 운반하게 하고 도축업자는 돌려보냅시다.”
“아니, 저….”
대금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라는 말에 도축업자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대금은 나중에 받으러 오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문제가 생기면 나나 탈리온의 기사단장을 고발해도 상관없고.”
애거나이트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펄번은 슬쩍 주도권을 빼앗아 왔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델피노 남작님?”
무작정 안된다고 하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않은가. 애거나이트는 구겨진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짓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병사 둘이 달려왔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고기는 무사히 본성으로 들어갔고 도축업자는 펄번에게 대금 지급을 재차 약속받고 물러났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슬금슬금 펄번과 애거나이트의 눈치를 보았다. 도저히 함께 있기 어려운 두 가문의 기사단장이 한자리에 있으니 호기심이 동한 터다.
애거나이트가 자리를 뜨려는 걸 보고 펄번은 찾아온 용건이 생각났다.
“이그레인 소공작님께서는 예식이 끝나는 대로 탈리온으로 가실 겁니다. 행렬의 호위에 저도 참여합니다.”
애거나이트는 바로 얼굴을 구겼다.
“그건 공작님의 지시와 다른데? 그리고 호칭은 바로 하지. 레이디 이그레인께서는 이제 탈리온 공작부인일세.”
“장차 이그레인 공작님이 되실 분입니다. 결혼했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당장 탈리온 영지로 가는 걸 보게. 탈리온 공작부인이라 부르는 게 마땅하지.”
퉁명스러운 대꾸에 펄번의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콧김을 푹푹 뿜어대면서도 펄번은 화를 꾹 눌렀다. 같은 기사단장이라 해도 상대는 정식 작위가 있는 귀족이었다. 준작위를 갖고 있는 펄번과는 급이 달랐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면서도 사소하달 수 없는 문제였다.
펄번은 미래의 주인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 신경이 곤두섰고, 애거나이트는 주인의 반려가 가문에 온전히 소속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시카가 결혼식 직후 탈리온의 영지로 가는 것은 안전상의 이유가 컸다. 이그레인 영지는 대대로 평온했고 성채도 전쟁을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 아니다 보니 빈틈이 많았다. 때문에 결혼식 이후 호위는 전적으로 탈리온 기사들의 몫이었는데 펄번이 거기에 손을 얹은 것이다.
“후. 호칭 문제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하죠.”
펄번이 한발 물러났다. 당장 저쪽에 합류해야 하는 것은 그였다.
“이그레인 공작님의 명령입니다. 저와 베르트 경은 소공작님의 최측근으로 탈리온에 머물게 될 겁니다.”
“베르트 경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네만, 우리 쪽에서 배정될 예정인 기사들도 있는데?”
“소공작님께서는 혹시나 해서 하녀조차 몇 명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런 분에게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펄번의 토로는 진심이었다.
당장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양쪽 가문의 해묵은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카는 제 사람들을 데려갔다가 저 대신 표적이 될까 봐 아예 홀로 탈리온으로 가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이그레인 공작이 나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애거나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작님께 말해보지.”
“허락을 구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건 통보입니다. 저 역시 양보 못 합니다.”
펄번은 단호했다. 서로 밀리지 않으려는 기 싸움에 주위의 공기까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사람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고 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애써 둘을 외면했다.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펄번과 애거나이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시카는 아까부터 거울에 손을 기댄 채 간신히 서 있었다. 드레스를 다 입은 것이 한참 전인데 아직도 등 쪽에 마감이 덜 끝난 탓이다.
“마릴린, 아직 멀었어?”
“아앗. 움직이지 마세요, 아가씨!”
“어떻게 한 달 만에 드레스가 작아질 수가 있어?”
애써 꾸며놓은 머리가 망가질까 봐 어디 기대지도 못하고 아시카는 애꿎은 거울만 잡고 한숨을 쉬었다.
“그…, 아니에요. 다 되어가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드레스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아시카의 허리에 살이 붙은 것이다. 차마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마릴린은 등 쪽의 봉제선 일부를 한땀 한땀 잘라냈다.
몸에 꼭 맞게 완성된 드레스의 주름을 다시 터서 여유 있는 사이즈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입고 벗기가 어려운 드레스다 보니 아시카는 그대로 작업할 것을 지시했다.
“내가 살이 찐 거야. 그렇지? 얼마나 살이 찌면 한 달 사이에 옷을 못 입을 지경이 돼?”
“아가씨께서 한참 말라 있을 때 가봉을 해서 그래요.”
원래 아시카는 가녀린 체구를 타고났다. 한 달 전에는 그나마도 살이 내려서 위태로워 보일 때였다. 그걸 생각 안 하고 드레스를 맞췄으니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아시카의 예식용 드레스는 추운 겨울 날씨에 맞게 순백의 벨벳으로 제작되었다. 원단 전체에는 금사로 촘촘하게 자수를 새겨 놓아서 눈이 부실 만큼 환하게 겨울 햇살을 반사했다.
장식과 함께 어깨에 걸칠 트레인은 한쪽에 공간을 마련해 걸어두었다. 어찌나 긴지 드레스 전체 길이의 네 배가 넘어 바닥 한 면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자수가 빼곡하게 그려진 아름다운 트레인은 한 사람이 다 들기도 버거울 만큼 풍성했다.
하녀들은 원단이 손상되지 않도록 잘 다려 펼쳐놓은 트레인과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기 위해 걸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언제 끝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앉지도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한 채 등을 내주고 서 있느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식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쓰러지겠어.’
아시카의 인생에서 최고로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드레스가 제작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후….”
아시카의 한숨에도 준비를 돕는 하녀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에는 크고 작은 꽃송이와 보석이 휘감겨있고 순백의 드레스에는 황금빛 자수가 찬란하다. 아시카가 느끼는 고통과 별개로 예복을 갖춰 입은 자태만큼은 눈이 부셨다.
“아….”
깊은 저음의 목소리가 탄성을 뱉었다. 거울에 기대어 있던 아시카와 바쁘게 손을 놀리던 하녀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하녀들은 탄성과도 같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점령하고 선 상대는 드루쉬아였다. 그가 입은 예복은 탈리온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아시카의 것과 반대로 빛 한점 스며들지 않는 검정색이었다.
연미복보다 단순하면서도 탈리온 가문의 전통을 드러내는 기사의 제복에는 아시카의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섬세한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각 잡힌 골격에 딱 맞는 제복 차림, 검정색에 대조되는 햇살처럼 밝은 금발과 선명한 이목구비, 짙푸른 바다를 담은 눈동자가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
하녀들은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돌렸다. 안으로 들어서던 드루쉬아는 문고리를 잡고 어정쩡하게 멈춰서 있었다.
“벌써 준비가 끝났어요?”
아시카의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잠시나마 쉴 틈이 생겼다는 데 대한 반가움이었다.
“르쉬아?”
“아? 음.”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드루쉬아가 슬며시 입가를 가렸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못하고 뺨에도 홍조가 올랐다.
“왜요? 뭐가 이상해요?”
아시카는 슬며시 몸을 돌려 수선 중이던 등을 가렸다. 드루쉬아는 여전히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어쩌지 못하고 푸슬푸슬 웃음을 흘렸다.
“후…. 태양이 방에 내려앉은 줄 알았어.”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마릴린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한발 물러나 있던 하녀들도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뭐예요, 그건.”
“왜, 너무 낯간지러워? 더한 말도 해줄 수 있는데?”
“하, 하지 마요.”
아시카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워낙 뻔뻔한 남자라서 또 무슨 민망한 말을 할지 겁부터 났다.
“아아, 그래. 내 부인은 칭찬에 약하구나.”
“르쉬아.”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에 드루쉬아는 더욱 크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