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겨울의 끝 무렵이었다. 얕은 둔덕에는 얼마 되지 않았던 눈도 모두 녹아내렸다. 주변 숲 그늘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눈이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햇살을 받은 땅이 눅눅하게 녹아있었다. 아침부터 곡괭이질 하던 인부들은 삽으로 바꿔 땅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엉겨 붙은 마른 풀뿌리와 무성하게 자란 잡목을 뿌리째 뽑아내는데도 상당한 수고가 필요했다.
로샤강 상류의 메마른 둔덕에는 작업하는 인부들로 북적였다. 동원된 사람들만 해도 백여 명이 넘는 데다 양쪽 영지에서 자원한 사람들과 국경지대에서 귀환한 기사들까지 가세했다.
인부들이 땅을 파헤치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흙을 퍼 날랐다. 말이 갈 수 있는 부근에서는 짐말이 써레를 끌며 땅을 부쉈다.
인부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는 천막이 설치되었다. 급하게 설치되어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불만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춥게 왜 나와 있어.”
멍하니 서 있는 아시카에게 드루쉬아가 다가와 담요를 둘러주었다.
봄이 오고 있다지만 아직은 추운 날씨였다. 외투를 입었는데도 아시카의 입술은 추위에 파랗게 질려 있었고 담요를 여미는 손길이 차게 얼어 부자연스러웠다. 드루쉬아는 손을 내밀어 직접 앞을 여며주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이븐의 고백이 있고 나서 양쪽 영지의 가신들이 사람들을 동원하고 발굴 작업이 시작된 지.
봄이 다가오는 계절이었다. 따뜻한 날씨에 비까지 내리면 물이 불어날 것을 염려해 신속하게 공사가 추진되었다.
“상상이 가지가 않아.”
아시카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븐에게 들은 이야기가 믿기지 않아서,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조모님께선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것을 보았어. 매몰되어 있는 동안 어떻게 미치지 않고 버텼을까?”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작은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시린 냉기가 안쓰러워서 더욱 팔에 힘을 주었다.
“그것도 저주일지 모르지.”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싶은데 미치지도 않는다면, 그래 저주가 맞겠네.”
이븐은 멀리서나마 아들을 보고 싶어서 행사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지자 사람들은 각자의 진영에 있는 가건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당시 사고는 산사태가 먼저였다고 한다. 탈리온 진영이 쏟아지는 토사에 매몰되었고 직후 댐이 붕괴되었다.
강물에 휩쓸린 사람들은 그나마 시신이라도 찾았지만 산사태로 매몰된 이들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현장이 물에 잠겨 아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어서 이제껏 아무도 알지 못했던 진실이었다.
아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븐은 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매몰된 흙더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기어 나왔다. 생존한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한 것이다. 죽어야 할 상황에서 죽지도 못하는 괴물, 그것이 이븐이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뺨을 매만지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저쪽에 난로가 있어. 몸이라도 녹이고 있는 게 어때?”
“조부님도 아침부터 나와계셔.”
멀리 공사현장 지척에 웨이브가 있었다. 그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몇 시간 째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리하다 쓰러지면, 이렇게 지키고 있지도 못해.”
드루쉬아는 재차 채근했다. 생각 같아서는 성에 돌아가 기다리라고 하고 싶지만 저와 같은 마음일 것을 알기에 말리지 못했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아시카의 시선은 여전히 작업이 한창인 현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아래부터 둔덕 위까지 모두 파헤쳐야 하는 거야?”
아시카가 가리키는 방향은 강줄기가 흐르는 곳에서 얕은 비탈이 측면으로 빠져나간 삼각지 형태의 구간이었다.
“그 사이 지형이 변했어. 나무도 많이 자랐고. 그러니까 최대한 넓은 범위에서 파 내려가려고.”
“강물이 많이 줄어서 다행이야.”
아시카의 말에 드루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말로는 물길이 변했다고 해. 이쪽 지역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물에 잠겨있었거든.”
거기다 대공령과 인근 지역에 수년째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 탓에 과거에는 물에 잠겨있던 땅이 드러나 말라붙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흐어어억!”
공사장 한쪽 가장자리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인부들이 일시에 일을 멈췄다.
“왜? 뭐라도 찾았어?”
“사, 사…, 사람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비명이 들린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뭐야?”
겁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과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시카는 쥐고 있던 담요를 놓고 홀린 듯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시카, 기다려.”
드루쉬아가 뒤를 쫓았다. 시신을 찾았다면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닐 것이다. 충격받을 아시카가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작게 드러난 구덩이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먼저 달려온 웨이브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간신히 냉정을 되찾고 지시를 내렸다.
“삽과 곡괭이는 치우게. 작은 도구를 가져와.”
뒤늦게 온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주변의 흙을 파 들어가자 순식간에 파묻혀 있던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저, 저게 뭔가?”
“세상에!”
그제야 사람들은 인부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깨달았다. 아시카와 드루쉬아조차 놀라 말을 잃었다.
땅속에서 끌어낸 시신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과 흙이 엉겨 붙은 머리칼까지. 십수 년 전이 아니라 조금 전에 숨이 끊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시신이 걸치고 있던 갑옷만이 세월에 삭아 붉게 녹이 슬었을 뿐.
“상하지 않게 끌어내게.”
웨이브는 놀란 마음을 빠르게 수습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못하고 살아나온 현장이었다. 그보다 더 기괴한 일이 어디 있을까.
“모두 곡괭이 사용을 멈추고 조심해서 땅을 파라고 해.”
드루쉬아는 몰려온 인부들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사람들의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시신이 그대로야. 땅속에 파묻혀 있던 세월이 얼만데….”
부패하기는커녕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생생해서 시신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어서 서둘러!”
드루쉬아의 고함 소리에 여기저기서 현장 감독관이 지시를 반복했다. 사람들은 충격을 채 갈무리하지 못한 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재개했다.
“이쪽에도 있습니다!”
“여, 여기도….”
이어 곳곳에서 토사에 매몰된 시신이 발견되었다. 처음 발견된 시신과 마찬가지로 조금 전 숨이 끊어진 것처럼 생생한 모습이었다.
두려움과 참담함에 인부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땅을 파 들어갔다. 산사람처럼 느껴지는 시신을 혹시라도 훼손할까 봐 작업은 극도로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차례차례 시신을 밖으로 끌어내는 동안 누구도 쉬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갈 무렵, 토사에 파묻힌 가장자리에서 땅을 파 내려가던 기사 하나가 작업을 멈췄다.
“허.”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둔덕 위에 서 있는 웨이브에게 향했다. 기사는 땅속에서 드러난 망토 자락을 손에 쥐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든 웨이브가 기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기사는 작업을 중단한 채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왜….”
웨이브는 질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둔덕에서 뛰어내렸다. 다급한 발걸음은 가파른 비탈에 미끄러져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공작님!”
넘어져서 흙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웨이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흙을 털어낼 정신도 없이 기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기사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이그레인의 문양이 섬세하게 수놓아진 망토였다. 흙물이 들고 삭아있지만 분명 이그레인의 것이었다. 탈리온의 시신만 가득한 곳에서 나온 유일한 이그레인의 흔적.
웨이브는 기사를 밀쳐내고 손으로 흙을 헤집기 시작했다.
“공… 작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두꺼운 장갑이 거추장스러웠는지 단숨에 벗어던지고 맨 손가락으로 땅을 긁어댔다. 숨구멍을 찾는 짐승처럼 손놀림은 점점 다급하고 절박해졌다.
“누가, 이리 좀 도와….”
기사의 목소리는 꽉 잠겨 말을 맺지 못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이그레인의 사람들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시카는 뒤늦게 술렁이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저도 모르게 드루쉬아의 손을 밀어내고 웨이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급해진 발걸음이 울퉁불퉁한 흙더미에서 휘청이고 죽죽 미끄러진다.
“아시카, 기다려.”
드루쉬아가 아시카의 뒤를 쫓아 현장으로 달려갔다.
알 수 없는 예감이 아시카의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쿵, 쿵 뛰는 심장 소리가 점점 거세어진다. 생각이 멈추고 부산한 주변의 소음이 귓가에서 멀어져간다.
숨이 차올랐다. 정신없이 땅을 파헤치는 웨이브를 보면서, 다급히 손을 놀려 돕는 사람들을 보면서.
웨이브의 다급한 손길에 조금씩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온전한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을 때 뒤쫓아온 드루쉬아는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고모님….”
“아….”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말을 잃었다. 현장에 모여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웨이브가 파헤친 자리에서 나온 사람은 둘이었다. 망토를 담요처럼 두른 란체와 그 품속에 아이처럼 숨겨져 있던 여자. 젤로시아 탈리온이었다.
몸에 힘이 쭉 빠져 아시카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드루쉬아가 거의 들다시피 안아줘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아버지.”
왜 이그레인의 진영에서 란체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 란체는 도망가기보다 젤로시아를 찾아 탈리온의 진영으로 달려온 것이다.
15년 전, 란체의 나이는 불과 스물여섯이었다. 현재의 아시카와 별반 차이 나지 않는 젊은 청년이었던 란체는 그렇게 흙더미 속에 파묻혀 생을 마감했다. 연인 젤로시아와 함께.
“흐….”
웨이브는 새카맣게 흙물이 든 손으로 상처 하나 없는 아들의 얼굴을 더듬었다.
“흐으으….”
무너져내린 심장이 경련을 일으키듯 아들을 더듬는 손길이 사정없이 떨렸다.
차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웨이브는 아들의 시신 위로 무너져내렸다. 평생 한 번도 자신을 잃어본 적 없던 남자가, 처음으로 무너져내렸다.
내장을 끊어내는 애끓는 오열이었다.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통곡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시카는 처음으로 웨이브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슬픔을 토해내는 것을 보았다. 아니 차마 볼 수 없어서 드루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드루쉬아는 말없이 아시카를 당겨 품에 안았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품 안에서 온몸으로 전해진다. 먹먹해지는 가슴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어린 시절 그때처럼 숨죽여 우는 아시카를, 그 슬픔을 그러안아 주었다.
긴 세월 사라졌던 사람들. 끝없는 그리움으로 풀리지 않는 멍울처럼 심장에 들어 앉아있던 상처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며, 누군가의 부모였던 이들이 돌아왔다.
15년 만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