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목표는 공작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순히 잡아들이는 것이 아닌 척살이 목적인 공격이었다. 드루쉬아는 애거나이트가 말하지 못한 상황을 읽었다. 불길한 느낌이 스쳐 갔다.
펄번과 함께 온 기사들 모두 의아한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상한 낌새는 없었습니다만.”
펄번은 산 아래에서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곱씹어보았다.
드루쉬아를 비롯해 펄번과 기사들 모두 정신이 없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불길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고 그걸 피해가며 호수로 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강풍으로 숲이 온통 들썩여서 이상을 느낄 틈도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아시카를 안은 드루쉬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시카와 함께 있던 기사들은 애거나이트를 포함해서 일곱 명. 드루쉬아와 함께 온 것은 네 명이었다.
산불과 공격으로 기사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호위 인원이 현저하게 줄었다.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호수 근처에 은신할 만한 곳이 어디지? 추격을 피할만한 곳은?’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밧줄은 없나?”
“급하게 나오느라 챙기지 못했습니다.”
“길을 돌아서 가지. 바위 협곡 안쪽으로.”
“길이 협소한데 괜찮겠습니까?”
불길은 닿지 않아도 연기와 열기가 흘러들면 위험해진다.
“불이 산등성이로 번지고 있어. 이쪽까지 오지 않을 가능성이 커.”
아시카와 일행들은 내내 숲 안쪽에 있어서 불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볼 수 없었다. 반면 드루쉬아는 산불을 확인하자마자 지대가 높은 곳에서 불길의 방향부터 확인했다.
“공작부인께서 이대로 계속 걷는 건 무리입니다. 들것을 만들어 모시고 가는 편이….”
“기동성이 떨어져서 안 돼.”
펄번의 제안을 드루쉬아는 단칼에 잘랐다. 차라리 그가 안고 가는 편이 나았다.
대화를 듣고 있던 아시카는 저 때문에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걸 알았다. 안일했던 자신이 후회스럽고 이 와중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럽다.
“미안해….”
또 짐이 되어서. 아시카는 너른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작게 속삭였다.
“왜 미안해하는데? 네가 미안해할 건 그런 게 아니라.”
드루쉬아는 헝클어진 아시카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다치지 마. 아프지도 마. 제발….”
쿵, 쿵, 뛰는 심장의 진동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드루쉬아가 느끼는 긴장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일단 이동하지. 애거나이트가 앞장서고 나머지는 세 개 조로 나눠서….”
아시카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드루쉬아를 올려다보았다.
이상을 느낀 것은 드루쉬아만이 아니었다. 펄번과 나머지 기사들의 시선이 어두운 숲 가장자리로 향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강렬한 살기.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빼 들었다.
“미아, 아시카를 보호해!”
“적이다!”
아시카가 놀랄 틈도 없이 미아가 그녀를 확 당겨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몸을 피하는 순간 타다닥, 어둠 속에서 날아든 화살이 발치에 박혔다.
“제기랄.”
가장 먼저 달려든 상대의 검이 드루쉬아의 검과 부딪혔다. 단 한 차례의 공격은 현저한 힘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고 말았다.
“컥.”
드루쉬아는 단숨에 검을 쳐내고 그대로 상대의 목을 베었다.
“시간 끌지 마라!
적들이 모일 시간을 주면 상황은 더욱 불리해진다. 짙은 어둠 속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 때문이다.’
드루쉬아는 제 실수를 통감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분별력 없이 움직였다. 추격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바로 아시카를 찾으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시카는 바닥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듣지 않으려 해도 고통스러운 비명이 연이어 귓가에 파고들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이들이 검에 베여 쓰러지는 소리였다.
‘제발, 제발.’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르면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속삭임이었다.
지나치게 절박했기 때문일까. 바늘 끝처럼 곤두선 신경이 사소한 감각을 잡아냈다. 땀에 젖은 몸에서 느껴지는 습기와 마른 땅의 흙먼지 냄새, 바로 가까이에서 몸으로 그녀를 막고 선 미아의 체온. 그리고 아랫배에서 느릿하게 꿈틀거리는 감각이 있었다.
“아….”
확연하게 느껴지는 생명의 움직임. 그녀의 배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어쩌면 살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태동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밑이 빠질 것 같은 뭉근한 통증에 아시카는 숨을 몰아쉬었다.
“안돼….”
뭔가 잘못되었다. 분명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아악!”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 아시카를 현실로 데려왔다. 그녀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
무서웠다. 이미 겪어보았던 죽음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더더욱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꼼짝없이 웅크려있던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확 잡아 일으켰다. 너무 무서워서 아시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등과 다리를 강하게 감싸 안는 감각에 이어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순간 익숙한 체향과 함께 피비린내가 코끝에 파고들었다.
“르쉬아. 피가, 피가….”
그녀를 안고 있는 팔과 목 언저리가 피에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였다.
피를 닦아낼 정신 따윈 없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안아 올린 그대로 비좁은 바위 산길로 뛰어들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안고 있는 팔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추어올렸다. 바로 뒤에는 잔느와 애거나이트, 미아와 기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까보다 숫자가 줄어 있었다.
또 누군가 시간을 벌기 위해 남은 것일까.
아시카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아까부터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공작님, 연기가 날아듭니다.”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는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불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르쉬아, 뒤에….”
아시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바람 소리가 요동치는 가운데에서도 숲을 헤치는 발걸음 소리가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렸다. 추격자들이 쫓아 오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늘어난 숫자의 적들이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달렸다.
일행은 산불의 연기를 피하고 적들의 추격을 피해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러나 도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앞장서 달리던 애거나이트가 멈춰 섰다.
어둠 속이라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가파른 바위 절벽이었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앞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잦아든 숲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움직임은 아시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곧장 따라오고 있었다.
“공작님.”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한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품에 안은 채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긴장된 침묵 가운데 나선 것은 미아였다.
“저희가 자객들을 유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자는 거지?”
“놈들은 두 분을 쫓고 있으니까 저와 애거나이트가 두 분인 것처럼 해서.”
미아의 말을 애거나이트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답답했는지 미아가 드루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님의 망토를 제게 주세요. 델피노 남작이 공작님과 체구가 비슷하니까 외투만 바꿔입고 저를 안고 가시면 되잖아요.”
달도 뜨지 않은 밤이라 사위가 어두웠다. 미아의 말대로 자객들은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는 아시카를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이대로 도망친다 한들 오래가지 못할 것이 뻔한 상황. 어떻게든 놈들을 떨쳐내야 도망칠 기회가 생긴다. 애거나이트가 그제야 알아듣고 미아의 의견에 동의했다.
“저희는 놈들을 유인한 뒤 기회를 봐서 흩어졌다가 다시 호수 쪽으로 가겠습니다.”
드루쉬아는 주위를 둘러보고 고민에 빠졌다. 그 사이 절벽 근처를 살피던 잔느가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숨길만한 공간이 있습니다. 짐승의 둥지였던 것 같은데, 비좁지만 안쪽으로 더 공간이 있습니다.”
“당장 여기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인원은 많지 않아.”
인원이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최소한만 남게 된다.
“저와 미아 단둘만 도망치면 적들이 의심할 겁니다. 다시 돌아오더라도 일단은 함께 가야 합니다.”
“저는 남겠습니다.”
잔느와 펄번도 남기를 희망했다. 남아있던 탈리온의 기사들 중 셋은 애거나이트와 함께 가기로 했다.
“적들이 너무 빨리 알아챈다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드루쉬아는 빠르게 움직였다. 미아는 아시카의 망토를 건네받아 후드까지 깊게 눌러쓰고 드루쉬아의 옷을 걸쳐 입은 애거나이트가 미아를 안아 들었다.
“어서, 이쪽으로.”
잔느는 절벽 안쪽 수풀을 가리키며 다급히 손짓했다.
“미아, 델피노 남작. 조심해.”
아시카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당부했다.
제발 무사하기를, 더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 밤이 끝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잔느는 아시카의 손을 잡아끌어 절벽 쪽으로 향했다. 숨겨진 공간은 세로로 길쭉하게 벌어진 절벽 틈새였다. 나무와 넝쿨이 우거져서 밖에서는 아래쪽에 일부만이 드러난 곳이다.
벽을 더듬어 비좁은 통로를 지나자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나왔다. 잔느는 야광석을 꺼내 안쪽을 살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쉿.”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드루쉬아와 기사들은 입구에 기대어 숨을 죽였고 잔느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아시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미아와 애거나이트 일행은 적들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저기다!”
“협곡 쪽으로 간다!”
적들이 서로에게 신호하는 소리와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 어둠 속에서도 아까보다 늘어난 적들의 무리가 확연히 느껴졌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비좁은 공간을 채웠다. 아시카는 얼어붙은 채 눈을 감았고, 드루쉬아는 검을 틀어쥐고 밖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타다닥,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예상대로 자객들은 다급히 움직이는 미아 일행의 뒤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이 잦아들고 주위에는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들렸다.
“하….”
드루쉬아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잠시나마 시간을 벌었다. 어떻게든 아시카를 안전한 곳에 보낼 수 있다면 다음은 두렵지 않았다.
안쪽에서 숨죽이고 있던 아시카가 잔느의 팔을 움켜쥐었다.
“잔느… 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아시카에게로 향했다.
“소공작님, 왜….”
다음 순간 잔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시카의 시선 아래, 드레스 아래쪽과 바닥이 흥건히 젖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잔느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놀란 나머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