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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79화 (79/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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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트 대신 앞으로 나선 줄칸이 재호에게 허리를 숙인 뒤, 크루와상과 죽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저는 엘리시아 화원의 재상, 줄칸입니다.”

“재, 재상?!!”

깜짝 놀란 크루와상.

나라라기엔 어설프기 짝이 없던 엘리시아 화원에 웬 재상?

하지만 그 소개는 명백히 사실이었다.

이데란에 충성했던 서기관 가문의 일원으로서, 다른 왕을 섬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줄칸은 마음이 바뀌었다.

변절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브리즈였다.

그가 진행하는 엘프 특강은 고귀한 신분이었던 이데란의 생존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그건 줄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런 와중에 재호가 내민 제안은 너무나 달콤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왕자 피스오조차 굴복할 정도로!

그들 입장에선 그 인격 파괴의 현장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어쨌든 그는 지금까지 엘리시에 화원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현황들을 듣곤 뛰어난 통찰력으로 엘리시아에 대해 파악한 뒤였다.

“일단……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들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더군요.”

줄칸의 시선이 먼저 크루와상에게 향했다.

“크루와상님의 상단은 지금까지 알시아님과 독점 거래를 하고 있었죠.”

“네, 맞아요. 이곳까지 상단의 직원을 이용해 물건들을 직접 운송하며 판매를 해 왔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상인이라면 명품을 독점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닙니까?”

“?!”

“사실 알시아님과의 거래 관계에서 크루와상님은 전혀 손해를 보는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알시아님 덕분에 많은 이윤을 챙겨왔지요.”

“그렇긴 하지만…….”

“현재 알시아님의 물약이 거래소에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아시죠. 헌데 그런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면서 판매 대행을 제외하곤 그 어떤 성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크루와상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건…….”

크루와상은 오톨크에 초대했던 일을 떠올렸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에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결코 재호 입장에서 좋다고 할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줄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번엔 죽장을 향했다.

“사실 마스터 죽장의 경우엔 이 사안에 대해 항의할 자격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저 사만다님을 통해 최근 유명세를 타는 이곳에 한발 걸쳐 보려는 것일 뿐. 그를 위해선 당연히 적합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입니다.”

“…….”

죽장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심 자신과 같은 상위권 길드가 도시에 머무는 것 자체가 치안 상승효과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당백 엘프들이 있어 의미 없는 소리였다.

“알시아님께선 그간 의리로 일을 진행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엘리시아 화원의 재상으로서 저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시죠. 이대로 엘리시아 화원에서 떠나거나, 아니면 지금의 배려를 수용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줄칸의 최후통첩에 크루와상과 죽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오…….’

재호는 대화를 노련하게 이끌어가는 줄칸의 모습에 감탄했다.

생각보다 더 뛰어난 그의 능력!

덕분에 자신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돈을 벌게 생겼으니 새삼 그가 남달리 보였다.

“……좋아요. 전 받아들일게요.”

결국 크루와상은 수락했다.

어쨌든 자신들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혜택이란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엘리시아 화원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상인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죽장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대답에 줄칸은 고개를 끄덕이곤 지안트 뒤쪽으로 물러섰다.

“자, 그럼 결정이 내려졌으니 원하시는 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지안트가 다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 * *

“야, 소문 들었어? 엘리시아 화원에 인간 거주 구역을 만든다는 거.”

“아, 맞아. 그쪽 토지를 분양한다고 했었지.”

“거기 카페 같은 거 하나 잘 만들어 놓으면 기막힐 거 같던데 말이야.”

“이참에 한번 사 볼까?”

엘리시아 화원의 토지 경매에 대한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현실은 물론, 뉴월드의 세계에도.

엘리시아 화원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많은 주목을 받는 도시였고, 동시에 욕심을 내는 장소였다.

대체 어디서 엘프와 정령이 함께 노니는 걸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제국의 밀키웨이 정원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답다고 소문 난 도시 전경은 어떻고?

물론 엘리시아 화원의 중심부로는 아무나 갈 수 없다는 것도 모두가 알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장소였고, 또 미래에는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토지 분양에 대한 문의는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그만큼 부지에 대한 가격은 점점 치솟았고.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절정에 달한 어느 날, 불청객이 엘리시아 화원을 찾아왔다.

“라셀 왕국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 * *

꽃집 안에서 앉은 채 사절을 맞이한 재호.

“음? 저번에 왔던 사람하고 다르네?”

“그는 국왕 폐하의 명예를 더럽힌 죄로 처형당했소.”

“……그거 참 안됐네. 어쩌다 그런 짓을…….”

“정녕 모르는 것이오? 그대가 라셀 폐하를 모욕했기 때문에 그가 그 책임을 지고 죽었다는 것을!”

“이놈! 감히 사절로 온 놈이 분수를 모르고 제 놈이 왕이 된 것처럼 구는구나!”

재호 옆에 있던 줄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 쳤다.

‘이거 참…… 편하네.’

자신을 대신해 상대를 꾸짖어 주는 줄칸.

재호는 처음으로 왕이 된 듯한 느낌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일도 잘했다.

서기관 출신이라 그런지 아는 것도 많았고, 특히 이런 예민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털썩―

그때, 갑자기 재호 앞에 줄칸이 무릎을 꿇었다.

“?”

그리고 재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불길한 사태의 전조라고.

“폐하!”

우렁차고 호소력 짙은 줄칸의 외침.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전 망국 이데란의 신하로서 모든 걸 지켜보았습니다!”

“……잠깐만. 그 이야기는 좀 조용한 데서 하면 안 될까?”

“아니옵니다! 전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 배경은 결국 나태한 국력입니다. 상대에게 우습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야야…….”

“그러니 저들이 엘리시아 화원을 쉽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

“헉?!”

그 발언을 들은 사절단은 입을 쩍 벌렸다.

“이, 이 발언에 대해 해명하시오! 알시아!!”

“이놈!!! 폐하께 예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새삼 이 영감이 얼마나 겁 없는 작자인지 깨달은 재호.

‘그래. 혼자서 용을 찾겠다고 성 지하를 뒤지는 것도 정상은 아냐……!’

어쨌든 일은 터져 버렸다.

말을 내뱉은 이상, 주워 담는 건 불가능했으니.

“네, 네 이놈들!!! 이 사태를 반드시 국왕폐하께 전할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도록 모조리 불태워 버릴…… 컥!!”

이번엔 뒤에서 날아든 엘프의 주먹질에 목이 꺾인 사절.

결국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사절은 의식을 잃고 짐짝처럼 실린 채, 함께 온 사절단과 함께 도망치듯 멀어져갔다.

씩씩거리던 엘프들이 재호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저자들이 또 알시아님을……!”

“응? 아니, 별일 없었…….”

“엘프들이여!!!”

이번에도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선 줄칸.

“저들은 알시아 폐하를 폄하하며 무시하고 욕을 해댄 몰상식한 자들이오!”

“그,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비록 그대들이 우리 인간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으나, 알시아님을 욕하는 자들을 그냥 둘 순 없지 않은가?!!”

“뭔 소리야?!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이 영감이!!”

재호는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소리쳤다.

애초에 재호는 저들이 찾아온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줄칸이 급발진한 탓에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힐끔-?

그때, 저 멀리 사절단이 사라지는 걸 곁눈질로 살피던 줄칸이 분노한 표정을 싹 지웠다.

“폐하.”

그러곤 재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좀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왜, 왜 그래?”

돌변한 그의 태도에 재호는 움찔했다.

“지난 며칠 동안 폐하를 곁에서 지켜본 결과, 폐하께선 아주 신사적이고 자상한 분이란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외모에 치우치지 않은 평가에 재호는 감동 받을 뻔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라셀 왕국에서 이곳을 다시 찾아올 테고, 이곳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란 걸 보여줘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결과가 방금 보인 깽판이야?”

“예. 라셀 왕국에 경고를 한 것이지요. 이곳엔 나라 잃은 ‘미친개’가 있다고.”

결국 사절단에게 엘리시아 화원이 예전과 다르단 것을 알리기 위해 줄칸이 그런 짓을 벌였단 뜻이었다.

“그래도 전쟁은 심하잖아.”

“후후,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이곳이 결코 쉽게 볼 곳이 아니란 걸 알고 다른 대응책을 찾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

의도는 이해했으나, 걱정이 안 될 순 없었다.

* * *

줄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절대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못 박았지만, 재호는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휘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틴라이트님과 라셀 왕국의 거래에 대해서 알고 싶다구요?”

오랜만에 찾은 엘다와의 티타임.

그 자리에서 재호는 라셀 왕국이 대체 틴라이트에게 뭘 받고 럭시 숲과 페르마 사막을 포기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것만 알면 라셀 왕국에게 확실히 항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흐음…….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해선 저희도 잘 모르겠네요.”

“혹시 짐작되는 거라도 없나요?”

“전혀요. 그런 점에서 틴라이트님은 입이 무거웠으니까요.”

“흠…….”

재호는 곤란한 표정으로 신음했다.

사실 틴라이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는 꼰대였지만 이미 녀석도 모른다고 답을 한 상황이었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이라면 역시 당사자들 아닐까요?”

“……당사자?”

엘다의 말에 재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사자라면 역시 라셀 왕국의 사람들이겠지요.”

“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지 않았나요?”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그렇지요. 하지만 가끔씩, 종족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들이 세상에는 존재하지요. 틴라이트님처럼 말이지요.”

“……!”

그 순간, 재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존재가 있었다.

“누군가 떠오른 모양이군요?”

엘다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네, 뭐……. 수상쩍은 한 사람이 있긴 하네요.”

뤼니오르!

단, 그를 만나기 위해선 여러모로 곤란한 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엘프들.

‘어떻게 해야 떼어 놓고 살 수 있으려나…….’

라셀 왕국에 간다고 하면 당장 전쟁 준비를 할 기세였으니.

‘일단 레드 씨에게 한번 물어봐야겠군.’

뤼니오르와 그나마 가깝게 있는 사람이었으니, 운이 좋다면 메신저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레드에게 귓속말을 보낸 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덩달아 어떻게 엘프들을 떼어 놓고 라셀 왕국을 다녀올까 싶던 고민도 해결되었고.

파앗―

엘리시아 화원의 외곽,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그곳에서 적색 마탑의 수장 뤼니오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호오― 과연……. 대단히 아름다운 장소로구나!”

이미 재호에게 언질을 받은 엘프들은 순순히 그를 꽃집으로 안내했다.

“오셨군요.”

“허허, 아주 멋진 곳이구려. 소문에는 야경이 아주 기막히다던데, 혹시 잠시 머무르며 구경해도 되겠소?”

“얼마든지요. 차 드시죠?”

“음! 좋지!”

재호는 뤼니오르에게 이펠츠 꽃 차를 끓여 주었고,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참 향을 음미했다.

“참 재밌단 말이야…….”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오. 꽃집을 하는 시대의 패자라…….”

“전에도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요?”

“허허, 그랬지. 하지만 직접 보지 않았기에 완전히 믿진 않았던 게 사실이기도 했고. 으음― 맛도 향만큼이나 좋군!”

차를 한 모금 마신 뤼니오르가 활짝 웃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그리도 급히 나를 보고자 한 이유가 뭔가? 내 궁금해서 이렇게 한달음에 올 수밖에 없었다오.”

“아, 정보를 좀 얻었으면 싶어서요.”

“뤼니오르가 아닌, 레드벌룬이 필요한 일이군. 그래, 이야기해 보게나. 역시 최근 그대가 저질러 놓은 선전포고와 관련된 것이오?”

“……뭐, 그것도 문제긴 한데 지금은 다른 겁니다.”

재호는 잠시 뜸을 들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틴라이트에 대해서 아는 것 있습니까?”

“음?”

눈을 동그랗게 뜬 뤼니오르.

“허허허……. 내가 착각했구먼.”

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레드벌룬이 아니라 뤼니오르가 필요한 거였어.”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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