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172화 (172/641)

172

“어, 근데 레드는요?”

출발하자마자 문득, 레드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메이가 물었다.

“레드? 죽었어.”

다키스트의 시큰둥한 대답에 메이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주, 죽을 일은 없다고……!”

“죽을 일이 왜 없어? 여기 얼마나 살벌…… 우웁?!”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은 재호.

“걔는 스스로 죽었어.”

“예? 스스로 죽었다고요?”

“응.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 걔 말곤 아무도 죽은 사람 없어.”

재호는 그렇게 둘러댔지만.

“야! 우리는 사람으로도 안 쳐 주는 거냐!”

“즉시 부활 때문에 여기 서 있는 거지, 우리가 몇 번이나 죽어댔는지 네가 알아?!”

다키스트의 입을 막자 이젠 불곰 길드가 말썽이었다.

“흠흠, 쟤들은 어차피 죽어도 싼 애들이니까 신경 꺼.”

“…….”

“아… 네…….”

사실 메이도 그게 전혀 설득력 없는 소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주변 풍경부터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후우― 정신 차리자…….”

메이는 양 뺨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 정도는 각오한 일.

게다가 떠나오기 전, 동업 관계를 맺고 있는 유하에게 받은 중요한 임무도 있었다.

“나는 갈 수 없으니까, 네가 그곳에서 직접 촬영을 해 와!”

“응? 거기 가면 보나마나 싸우는 것 말곤 없을 텐데? 난 싸울 줄도 모르고.”

“누가 네 얼굴 찍으래? 알시아님을 찍으라고. 잘 없는 기회잖아. 더군다나 최근 급부상한 대형 퀘스트가 벌어지는 장소기도 하고. 아무나 찍을 수 없는 곳이니까 네가 꿀꺽 해.”

“……근데 우리 방송 컨셉이랑은 전혀 안 맞지 않아?”

“이따금 매운 맛도 들어가야 볼 맛이 나지.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방송국 쪽이나 시청자들은 엄청 좋아할걸?”

해서 메이는 녹화를 시작했다.

재호 역시 허락을 했고.

불곰 길드가 “어, 그러면 우리도…….”라고 했다가 욕을 먹은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알시아님. 그 꽃으로 정말 효과를 볼 수 있습니까?”

사만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물론이지. 이 불꽁꽁화가 얼마나 무서운 물건인지 모르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맞아요!”

재호와 함께 불꽁꽁화를 타고 용암 서핑을 했던 티나가 가슴을 쫙 피며 소리쳤다.

“그 불붙은 악마 개도 단숨에 똥강아지가 될 걸요?”

“으음…….”

영 못미더운 다른 사람들의 표정.

특히 불곰 길드가 유난히 어두웠다.

아무래도 자신들에게 저 커다란 꽃을 들고 헬트리버에게 달려들라고 할 것 같은…….

“꿈 깨. 너희한테 맡길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재호는 딱 잘라 말했다.

어렵게 얻은 귀한 불꽁꽁화를 남의 손에 맡길 순 없었다.

쿠우우우―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하는 헬트리버의 코고는 소리.

“다들 뒤로 물러서! 내가 접근해 볼게!”

재호는 등에 메고 있던 불꽁꽁화를 방패처럼 앞으로 들었다.

크응―?

그때, 번쩍 뜨인 헬트리버의 눈.

사아아아―

[불꽁꽁화가 주변 열기를 흡수합니다.]

용암에 있다 사막의 서늘한 계곡으로 옮겨져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를 하던 불꽁꽁화.

극도로 굶주린 상황에서 온몸이 불타오르는 헬트리버를 만나자 걸신들린 듯, 마구잡이로 열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헬트리버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온도 변화를 느끼고 눈을 뜬 것이다.

크르르르―

이를 드러내며 눈동자 안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재호를 향해 집중되었다.

[<헬트리버>의 시선이 당신의 움직임을 제약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저주 계열인지 녀석의 공격은 무력화되어 버렸다.

크응?

재호가 멈추지 않고 여전히 다가오자 잠시 당황한 듯한 헬트리버.

이번에는 힘껏 콧김과 함께 불을 내뿜었다.

그리고 불꽁꽁화의 사기성을 모두가 목도했다.

[모든 종류의 화염에 면역이 됩니다.]

다른 옵션은 제외하고서, 이것 하나만으로도 헬트리버를 상대로 무적이었다.

콰르르르르―

그렇게 불꽁꽁화로 화염을 막아내며 한걸음씩 내딛는 재호!

“마, 말도 안 돼!!”

“저거 꽃 아냐? 어떻게 타지도 않고 공격을 막아?!”

놀라운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콰과과광―!!!

한 번 뿜을 때마다 한 명씩 태워 버리던 콧김에도 재호가 멀쩡하자 이번에는 헬트리버가 몸을 마구 털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수십 개의 불덩이들.

척―

재호는 앞으로 내밀었던 불꽁꽁화를 우산처럼 뒤집어쓰고 걸었다.

마치 가랑비 사이를 걷듯, 여유로운 모습!

구구구구―

뭔가 심상치 않음을 분명히 느낀 헬트리버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드러낸 커다란 앞발.

그것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재호를 향해 휘둘렀다.

콰아앙!!!

앞발 내리찍음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으나, 폭발의 여파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것마저도 불꽁꽁화가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물리력까지 흡수는 불가능했으나, 애초에 단순 내리찍기는 재호가 피하기에 너무나 쉬웠다.

“흡!”

바닥에 닿은 헬트리버의 동그란 발에다 불꽁꽁화를 들이민 재호.

콰르르르―

온몸을 뒤덮은 화염 털을 흡수하기 시작한 불꽁꽁화!

헬트리버는 깜짝 놀라 발을 떼어냈으나, 재호는 한발 빠르게 반대쪽 발을 노렸다.

“와…… 저게 뭐냐?”

“대체 뭔 짓거리인지 난 전혀 모르겠다.”

멀리서 지켜보던 불곰 길드원들의 감상평.

커다란 꽃을 짊어진 채, 헬트리버의 내리찍기를 피하는 것도 신기한데, 대체 꽃에 무슨 효과가 있기에 화염을 흡수하는 것인가?!

“우리…… 이대로 계속 구경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엘프들도 가만히 있는데?”

“하긴……. 때가 되면 쟤들도 뛰어들겠지. 그때 우리도 가자.”

오랜만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린 불곰 길드였다.

* * *

재호의 원맨쇼는 거의 5분 동안 이어졌고, 재호는 물론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뭔가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캬아아아아앙!!!!

잔뜩 약이 오른 헬트리버의 포효.

그런데 아까와 같은 위용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헬트리버의 덩치가 거의 반은 줄어든 탓이었다.

“어후, 이제 눈높이가 좀 맞네.”

녀석이 뿜어내던 화염은 줄곧 불꽁꽁화에 흡수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크기도 줄어들었다.

‘확실히 약해진 것 같은데.’

더 이상 이전처럼 어마어마한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재호 역시 손해를 본 게 있었지만.

[불꽁꽁화가 휴면기에 들어갑니다.]

간만에 포식을 한 불꽁꽁화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해.’

재호는 불꽁꽁화를 인벤에 다시 넣었다.

“어때? 예전 같지 않지?”

모종삽을 단단히 움켜쥔 재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제 조져!!”

“알겠습니다!!!”

엘프들이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했고, 사만다, 다키스트와 불곰 길드도 뒤따라 달려들었다.

“뭐야? 전혀 안 뜨겁잖아!!”

“어떻게 한 거야? 대체 그 꽃에 무슨 효과가 있는 거야?”

“떠들 시간 있으면 한 대라도 더 치는 게 좋지 않냐?”

재호는 모종삽을 힘껏 휘둘러 헬트리버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쉽게도 <인삼 뽑기>가 먹히지 않는 대상이라 평타질밖에 불가능했으나, 신성 속성 공격이라 공격력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게다가 압도적 깡딜러들인 엘프가 백 명이나 있었다.

헬트리버의 절대적인 방어가 사라진 지금, 엘프들은 거침없이 사방에서 쏘고 찔러댔다.

끼이잉!!!

고통에 찬 헬트리버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했으나, 아무도 속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이 녀석이 얼마나 살벌한 괴물이었는지.

파스스―

피해가 누적되어갈수록 점점 덩치가 작아지는 헬트리버.

그리고 끝끝내, 녀석은 평범한 강아지 크기까지 작아졌다.

“어…… 이건 좀…….”

“죄책감이 드는데…….”

인종 차별 길드로 유명한 불곰길드조차 멈칫하게 만드는 작아진 헬트리버의 모습.

“이래서 헬트리버였군.”

재호도 바닥에 축 늘어진 녀석을 보며 혀를 찼다.

비교적 얌전해진 불꽃 털은 당장이라도 꺼질듯이 피식거리는 상태였고, 그 덕분에 녀석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골든 리트리버와 똑같이 생긴 외모.

그 특유의 멍청함을 뽐내는 얼굴로 헐떡거리고 있으니, 차마 숨통을 끊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물 학대라는 죄악감…….

끼잉…….

잘그락―

“응?”

전투의 여파로 뒤집힌 지면.

그 아래에서 무언가 소리를 들은 티나가 발로 땅을 팍팍 찼다.

찰그락―

“어? 알시아님!”

그녀의 부름에 다가온 재호는 땅에서 나온 걸 들어 올렸다.

“사슬이네.”

그것은 헬트리버와 연결되어 있었고, 아무래도 녀석이 별다른 움직임을 못 보인 게 이것 때문인 듯싶었다.

덩치가 작아지면 질수록 움직임이 빨라진 것 역시.

“흠……. 보통 사슬이 아닌 모양인데?”

일반적인 사슬이면 진작 헬트리버가 뿜어내는 열에 녹아버려야 했다.

따앙― 따앙―!!

모종삽으로 때려 봐도 전혀 흠집도 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쇠사슬.

당장 잘라내는 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범상치 않네. 일단 뽑아 보자.”

재호의 말에 엘프들의 시선은 일제히 불곰 길드를 향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그냥 말로 해. 그런 식으로 눈치 주지 말고…….”

툴툴거리며 불곰 길드원들은 사슬을 따라 주변을 수색했다.

거의 10미터는 될 법한 쇠사슬.

끝이 땅속 깊이 박혀 있는 걸 확인한 불곰 길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삽질을 시작했다.

“그래도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에요.”

헬트리버 옆에 쪼그려 앉은 메이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녀석을 콕콕 찔러 보았다.

끼이잉…….

더 이상의 저항 의지는 상실한…….

“근데 조그마해지니까 귀엽…….”

크르르르―

“……?”

쓰다듬어 보려던 다키스트는 헬트리버가 잇몸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멈칫했다.

“왜 나만…….”

으르르르―

“너만 그런 건 아니네.”

사만다도 슬쩍 손을 뻗어 보니 헬트리버가 적개심을 보였다.

“이거 혹시 자기랑 싸웠던 사람들한테만 이러나?”

그 추측은 다른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사실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왜 난 괜찮은 거지?”

“뭐… 메이 너는 싸움엔 참여 안 하고 영상만 촬영했으니…….”

그리 따지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헬트리버를 죽어라 두들겨 패지 않은 이는 메이가 유일하긴 했다.

“아니, 이 녀석도 생각이 있으면 알 거 아냐? 메이도 우리랑 한패라는 거.”

―뭘 모르는군.

“?”

“??”

전투 내내 보이지 않다 불쑥 나타난 징징이가 끼어들었다.

―머리가 좋기 때문에 메이 저 녀석에게 더욱 매달리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히 말해, 자기가 살려면 여기서 누군가에게 빌붙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그럴 거면 그냥 모두에게 친한 척하는 게 더 간단하지 않나?”

충분히 나올 만한 의문.

―쯧. 자존심이 있다면 자기를 죽이려던 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겠냐?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그렇게 단순하진 않아.

“쿨럭―”

“케헥…….”

징징이의 말에 가만있던 불곰 길드원들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은 그들의 자존감일까…….

콰드득―

“어? 됐다!!”

“드디어 뽑았다!!!”

마침내 땅에 박혀 있던 쇠사슬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 불곰 길드.

재호는 그것을 정리한 뒤, 헬트리버 옆에 던져놓았다.

“징징아. 너 얘랑 말 통해?”

혹시나 싶어 던진 질문.

―어… 안 돼.

“아니면 구면이라거나.”

―헬트리버는 좀 잘나가는 악마들이라면 흔히들 기르는 녀석이라……. 다른 건 전혀 모른다.

“흠……. 뭐, 그럴 수 있지.”

‘심연 등불초 정령은 심해 악어랑 말이 통하던데…….’

―…….

징징이는 풀이 죽어 쪼그라들었다.

“알시아님. 얘는 그럼 어떻게 할 건가요?”

메이의 물음에 재호는 고민에 빠졌다.

“묶어 놓은 걸 보면 원래 주인이 있다는 뜻 같은데. 설마 우리가 와서 도망간 건가?”

그리 생각하니 한없이 안쓰러워 보이는 헬트리버였으나…… 어림도 없었다.

“결국은 이 녀석도 악마나 다름없지?”

―악마가 아니라 마수지.

징징이가 바로잡았다.

“어쨌든 마계가 고향이란 거잖아. 안타깝지만 끝장낼 수밖에 없지.”

“야!”

재호의 발언에 땀을 닦던 불곰 길드가 발끈했다.

“그럴 거면 삽질은 왜 시킨 건데!!!”

“죽일 거면 그냥 죽이지!”

“아, 이 쇠사슬 챙겨가 보려고.”

재호가 쇠사슬을 툭툭 차며 말했다.

척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닌 듯싶었으니.

다만 이걸 풀려면 결국 당장 헬트리버를 죽이는 건 어려웠다.

사슬을 제대로 분석해 보려면 드워프들이 제격인데, 혹여나 헬트리버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기라도 해 버리면 안 되었으니.

하지만 그런 결정은 갑자기 등장한 이들에 의해 문제가 생겼다.

“그 불똥개는 우리에게 맡기시오!”

콰아아앙―!!!

그때,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울끈! 불끈!

먼지 사이로 보이는 살벌한 대흉근.

터질 듯한 구릿빛 근육을 자랑하는 야생의 팬티맨들이 나타났다!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