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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의 등장 역시 모두 계획된 연출.
그리고 티나도 이 연극에 상당히 집중하고 있었다.
파바밧-
이어 나타난 수 명의 엘프들이 말칸트를 포위하자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 알시아 치사하다!!”
“일 대 일 대결에서 엘프를 이용하냐!!”
“치졸하고 더러운 새ㄲ…… 악!!! 누구야?! 어떤 놈이 돌 던졌어?!!”
“어? 야야! 돌이 아니라 화살인데?!”
어쨌든 분위기는 삽시간에 재호가 악역인 것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티나가 악마를 언급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분위기 자체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흥! 좋다. 모두 덤벼라!!”
처억-
뒷짐을 지고 있던 왼팔까지 앞으로 꺼낸 말칸트.
그리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엘프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엘프들의 모든 공격을 유연하게 피해내는 말칸트.
주먹으로 싸우던 재호와 달리, 엘프들은 칼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몰입감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말칸트 VS 엘프들
엘프의 전투력은 최정상급 플레이어들을 훨씬 상회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오늘이 어쩌면 말칸트의 제삿날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촤학-!!
결국 엘프의 검이 말칸트의 팔을 스치며 피를 뿌리자 그 우려, 혹은 기대가 점점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튄 것은 말칸트의 피가 아니었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른 공방 속, 검 한쪽 면에 몰래 달아 놓은 붉은 콩알탄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것이 말칸트의 팔뚝과 바닥에 흩뿌려지니 사람들은 꼼짝없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큭!! 제법이로군! 하지만 진짜는 이제 시작이다!!”
작정하면 여기 있는 모두를 털어 버릴 수도 있을 사람의 가증스러운 연기.
“오라!! 지옥에서 올라온 용암 거인!!”
투기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말칸트의 외침에 관중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용암 거인? 그게 뭐야?”
“아까 엘프 하나가 말칸트가 악마한테 조종당하네 뭐네 하던데… 설마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이거 근데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실황이야 뭐야?”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쿠웅-
땅을 울리는 묵직한 충격음.
쿠웅- 쿠웅-
규칙적으로 지축이 뒤흔드는 충격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쿠웅-
그리곤 투기장 바로 밖에서 멈추었다.
쿠구구구-
높은 담벽 위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가짜)뿔과 타오르는 화염 머리카락을 가진 거인!!
“헉?!!!”
“뭐, 뭐야!!! 몬스터다!!!!”
사람들이 기함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왔구나, 용암 거인!!!”
말칸트가 그리 부르는 녀석은 사실 산골 자연인!
며칠간 엠베이 숲을 뒤흔들었던 폭음의 정체는 그를 지상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고블린들의 폭파 작업이었다.
‘미쳤지……. 이런 막장 드라마를 위해서 땅속에 잘 살고 있는 거인까지 지상으로 끄집어내고…….’
재호는 눈알까지 뒤집으며 자연인과 교감을 나누는 말칸트를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재호가 멘트를 치며 나서야 했다.
“말칸트 대왕!! 어찌 서대륙의 수호자인 당신이 악마와 손을 잡을 수 있습니까!!”
무슨 근거로?
“크크큭……. 어쩔 수 없다. 더 강한 힘을 얻으려면 더 강한 존재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설득력 떨어지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말칸트 대왕이 팔을 뻗으며 자연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놈들을 몽땅 쓸어 버려라!!”
콰앙-!!
바닥을 내리찍은 자연인의 주먹.
키이이익!!!
자연인의 머리 뒤에 숨어 있던 악마들도 팔을 타고 투기장 안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패싸움.
어떤 투기장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와… 이거…….”
누가 봐도 막장 연출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구 뒤섞여 잘 짜인 전투를 선보이다 보니 눈이 너무 바빴던 것이다.
엘프들이 악마와 치고 박고 싸우는 사이, 재호는 말칸트를 마크했다.
난장판 속에서도 빛나는 둘의 결투.
“알시아 왕. 슬슬 ‘그걸’ 해야 할 때오!”
그리고 혼란한 틈 속에서 말칸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합니까?”
재호는 질색하며 물었다.
“물론이오! ‘그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지 않소? ‘그걸’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싸움의 끝을 낼 수 없소!”
“……후우.”
이 각본에서 재호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던 ‘그것’!
콰앙-!!!
재호와 말칸트가 요란하게 충돌한 뒤, 서로 멀찍이 떨어졌다.
“말칸트 대왕!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크크,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지?”
“당신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겠습니다!”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군! 이것이 나의 의지다!”
쿠구구구-
허세 잔뜩 실린 기운을 밖으로 마구 뿜어내기 시작한 말칸트.
주변에 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재호는 작은 풀잎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더니…….
삐이이이-
소용돌이를 뚫고 재호의 풀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뜬금없는 재호의 행동에 관객들은 모두 넋이 나갔다.
“미쳐 버린 건가? 이 상황에서 갑자기 피리를 분다고?”
말칸트 역시 한껏 비웃음을 보냈다.
뚝-
연주를 멈춘 재호는 말칸트를 향해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악마들은 자연과 적대하는 존재. 순수한 자연의 소리는 말칸트 대왕, 당신의 내면에 잠든 본성을 깨울 겁니다!”
이게 뭔 미친 소리야?
…라고 싶은 게 재호의 속마음.
부르르-
온몸의 털이 곤두서 뿜어낼 지경이었으나, 말칸트는 연기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아니, 재호 빼고 다른 모두가 연기에 과몰입 중이었다.
“알시아님 말이 맞아요!”
티나가 재호 옆에 서며 소리쳤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은 당신이 불쌍해요!”
그러더니 커다란 풀잎 하나를 꺼내들었다.
척-척-
연이어 다른 엘프들도 재호 뒤로 자리를 잡더니 각자의 악기들을 꺼냈고…….
‘아… 미치겠다.’
재호는 시뻘게진 얼굴로 엘프들과의 합주를 시작했다.
쪽팔려 죽기 직전의 상태인 것과는 반대로 연주는 굉장했다.
재호보다 몇 배는 뛰어난 풀피리 장인들인 엘프들이었으니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마음이 편해지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심지어 이 합주엔 강력한 버프도 담겨 있었으니.
[충만해진 정령력이 주변의 모든 것을 소생시킵니다.]
뒤집어지고 파헤쳐진 투기장 바닥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초목들.
그걸 본 악마들은 제초 작업 걱정에 얼굴이 순간적으로 찌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귀를 틀어막고 고통에 찬 연기를…….
“?!”
“꺼, 꺼억?!!!”
“키이이이익!!”
진짜 고통스러웠다!
엘프들의 연주에 실린 강력한 생령과 재호의 신성력이 뒤섞이자 악마들에게 실제로 데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도, 도망……!!”
풀썩!
“?!”
결국 하나둘 거품 물고 쓰러지기 시작한 악마들.
원래 계획이라면 거인의 팔을 타고 다시 바깥으로 도망가야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음악의 힘에 그들은 버티지 못했다.
한편 연주를 들은 플레이어들도 강력한 효과를 체감 중이었다.
[엘프들의 풀피리 합주를 들었습니다.]
[모든 회복 효율이 200% 증가합니다.]
[마나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20 증가합니다.]
[저주 저항력이…….]
[…….]
“와! 대박!! 이거 뭐냐? 음악만 들었는데 이런 버프가 들어온다고?!”
“와! 알시아 최고다!!!”
“알시아! 알시아!!!”
잔뜩 흥분한 사람들의 응원 소리가 풀피리 합주와 뒤섞였고, 말칸트는 그 소리에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으으윽……! 그, 그만둬라!!! 내 머리에 무슨 짓을……!!! 이런 고통은…….”
‘그건 내가 할 소리…….’
오히려 고통을 받고 있는 건 재호.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엔 말칸트의 호위 기사들의 항의 탓이었다.
강력한 힘과 크루마 무력의 상징인 말칸트 대왕이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 연출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 주장!
그렇다고 말칸트가 재호를 두들겨 패는 것도 역시 왕의 격을 지닌 재호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게 이런 괴작이었다.
말칸트는 악마에게 타락했고, 무력이 아닌 음악의 힘으로 그를 치유한다!
“으윽, 알시아 왕……? 내가 왜 여기에……?”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재호에게 말을 거는 그.
누가 봐도 이제는 제정신이 들었다는 게 보이는 명연기에 재호는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정신이 듭니까?”
재호의 물음에 말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중요한 건 지금부터지요.”
재호는 투기장 밖에서 멀뚱멀뚱 내려다보는 자연인을 가리켰다.
“최종 보스를 끌고 오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재호의 말에 말칸트는 씩 웃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사악한 녀석인 것은 알겠군.”
투쾅-!!!
땅을 박차고 솟아오른 말칸트.
그리곤 커다란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곤 허공에서 힘껏 휘둘렀다.
쩌엉-!!!!
공기를 찢으며 일어난 충격파가 자연인의 얼굴을 덮쳤고, 그의 머리 위에서 활활 타던 불을 단번에 꺼트려 버렸다.
-으어어어!!!
쿠웅- 쿠웅- 쿠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연인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탁-
가볍게 지상으로 내려선 말칸트는 재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그대가 아니었다면 난 악에 물들어 세상을 파멸로 물들였겠지.”
“아…… 네…….”
“그대는 역시 나의 친우. 앞으로도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힘써 주시오!!”
“네… 우욱…….”
자칫 모든 걸 망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긴 재호.
“와아! 만세!!”
“알시아 님 만세!!!”
“말칸트 대왕 만세!”
그리고 엘프들의 만세와 함께 투기장 사방에서 고블린들의 특제 폭탄들이 쏘아 올려졌다.
* * *
이번 일을 통해 말칸트가 생각보다 매니악한 취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은 재호.
자신이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고 온몸의 털이 화났던 것에 반해, 말칸트는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게 증거였다.
‘후……. 그래도 한숨 돌렸다.’
이 촌극을 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제 남은 건 관중들의 인기투표.
투기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입장 때 받았던 투표용지를 제출했다.
‘애초에 뭘 보고 인기투표를 하란 건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말칸트는 이 각본에서 자신의 역할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이 감동한 관중들은 무조건 자신에게 표를 줄 것이라고.
하지만 재호에겐 말칸트가 가지지 못한 비밀 무기가 있었다.
바로 인터넷 홍보!
이미 전럭협을 동원해 투표 이벤트를 진행했고,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혹자는 투표 조작이라고 비난하긴 했지만, 다행히 선거법 논란까진 번지지 않았다.
모든 관중이 떠난 뒤에 시작된 개표.
그리고 결과는 일찌감치 나 버렸다.
“죄다 알시아 왕 이름밖에 없습니다.”
개표를 함께 진행한 기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허허… 그런…….”
역시 할인 이벤트의 힘은 대단했다.
스윽-
재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칸트에게 화분 목걸이를 내밀었다.
“제가 직접 기른 것이라 관리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물은 하루 한 번 주시고 평소에는 해가 잘 드는 곳에 놓아두시면 됩니다. 아, 크루마가 사막이라 한낮은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움직이실 일이 있을 때면 목에 걸고 다니시면 되고 깨질 걱정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화분은 월화수로 만들어진 것으로…….”
재호는 말칸트의 마음이 변할까, 허겁지겁 설명을 퍼붓고는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거 참……. 뭐, 일단은…….”
마지못해 바람꽃 화분을 받아든 말칸트가 천천히 목에 걸었다.
“음?”
순간, 동그랗게 뜨이는 말칸트의 두 눈.
“이, 이건……?”
“어떻습니까?”
재호의 물음에 말칸트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허허… 이거……. 정말로 움직임이 가벼워진 게 바로 느껴지는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재호의 이야기를 정말로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진심으로 놀란 상태였다.
“하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희 꽃집의 꽃들은 다르다고.”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자 재호는 안도했다.
여기서도 곤란한 상황이 이어졌으면 더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었을 테니.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