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드디어 제국으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줄칸의 충고에 따라 미리 사절 또한 보내 놓았고.
제국행 인원은 평소보다 제법 많았다.
재호, 티나, 메이, 사만다, 레드, 다키스트, 버팔로, 골드투스 등등 수많은 사람들.
거기다 소식을 들은 완식과 진아까지 오랜만에 푸른산호 섬을 떠나 재호와 합류했다.
사실 일행 뒤로는 고잉헬 호 선원들을 비롯한 다른 플레이어들도 상당수 있었다.
제국을 간다는 소식에 우르르 따라 나선 재호의 동료들.
그렇게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나서니 또 어디선가 대형 퀘스트를 진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다른 플레이어들이 졸졸 따라붙은 것이었다.
그래 봐야 어차피 제국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재호 한 명 정도가 될 테지만.
“후- 떨리네.”
“푸핫! 뭐야? 네가 긴장도 해?”
약간은 창백한 안색의 재호를 보고 완식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나라도 그럴 거야.”
미드스트 제국.
대륙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하고 있는 최강 제국.
그 어떤 플레이어도 안까지 가본 적 없는 성역과 같은 곳.
온갖 대형 퀘스트를 모두 헤쳐 나온 재호라고 해도 긴장이 되는 게 당연…….
“제발 팬티 바람으로 사람들 앞에 설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
재호의 말에 완식은 김이 팍 새버렸다.
“미친놈. 그럼 그렇지.”
전혀 다른 종류의 걱정이었다.
어쨌든 그 왁자지껄한 무리와 함께 도착한 제국.
실제 미드스트 제국의 영토는 어마어마하게 드넓었으나,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제국은 황성이 있는 수도 쪽을 지칭했다.
물론 그 수도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나라 대여섯 개는 합친 듯한 규모로, 제대로 길을 모르고 움직였다간 빠져나오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알시아 폐하십니까?”
다행히 재호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수도 성문에서 대기 중인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재호에게 다가와 물었다.
“맞다. 내가 알시아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륙의 또 다른 영웅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재호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기사의 모습에 뒤에 선 일행들은 입을 헤 벌렸다.
제국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자들이 재호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으니.
“젠장! 나도 괜히 깝치지 말고 저 자식 옆에 찰싹 붙어 있을걸.”
한 명의 훌륭한 사제가 되어 돌아온 완식은 피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걱정 마.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딱히 이득 본 것도 없으니까.”
메이는 완식을 위로…….
“아, 그쪽에 계신 분도 알시아 폐하와 함께 드래곤으로부터 대륙을 지켜내신 영웅 아닙니까?”
“?!”
함께 드래곤을 잡은 메이를 알아보는 기사.
찌릿-
뒤통수로 꽂히는 완식의 따가운 시선을 메이는 애써 모른 척했다.
어쨌든 마중을 나온 기사를 따라 근처에 준비된 마차로 향한 그들.
그 마차에 올라선 황궁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 * *
기사가 안내해 준 곳은 황궁 내의 손님을 위한 별장.
“황제 폐하께서 저녁 만찬에 초청을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편히 머무시면 됩니다.”
그 말을 남긴 채, 안내를 해 주었던 기사는 별장 경계 근무를 위해 다시 사라졌다.
“대박이에요! 황궁 안으로 들어오다니!”
“오오, 여기저기 쳐다보기만 해도 건설 관련 경험치가 쑥쑥 오릅니다!”
“명성치가 어마어마하게 느는데요?”
일행들은 전부 난리가 나 경험치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사방으로 어슬렁거리며 흩어졌으나 재호는 아니었다.
애초에 꽃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그렇게 필사적이지 않았으니까.
‘정원이 꽤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이미 엘리시아 화원이 몇 배는 더 훌륭한 꽃의 천국이라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재호는 따로 만날 상대가 있었다.
‘아마 곧 있으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좀 더 기다리자 마침내 바깥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알시아 폐하.”
재호의 방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시비가 재호를 불렀다.
“헤라리 1황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응?”
갑자기 1황자가?
재호가 기다리던 게 황자가 맞기는 했다.
5황자 젠트르노.
헌데 갑자기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1황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뭐, 선택권이 없군.’
황궁 내로 들어온 이상,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존재들일 황자들을 문전박대할 순 없었다.
“오- 그대가 알시아 왕인가?”
재호와 마주한 1황자 헤라리.
그는 젠트르노보다 열 살 정도는 더 많아 보였고, 상당히 다부진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재호의 살벌한 얼굴을 보고도 위축되지 않는 건 젠트르노와 마찬가지.
“하하! 소문보다 더 늠름한 모습이로군. 그래, 이번에도 엄청난 위업을 남겼다지?”
그는 해적을 일망타진한 재호에게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와 같은 뛰어난 존재라면 우리 제국과도 더 깊은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게 당연지사 아니겠나?”
그가 원하는 건 결국 젠트르노와 비슷했다.
“어떤가? 이 나와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 보겠나?”
바로 손을 잡자는 것.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자인 그조차도 재호와 엘리시아 화원은 가능하면 품는 게 가장 좋은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황실을 비우는 것이 눈치가 보여 가만히 있었지만, 재호가 직접 찾아온 지금은 둘도 없는 기회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일단 재호는 정중하게 답했다.
“하지만 당장 섣불리 결정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시간이 좀 필요할 듯합니다.”
“암암, 물론이지.”
헤라리는 재호를 충분히 이해해 주었다.
어차피 당장 결과를 보는 건 어려웠고, 이렇게 만나 자신의 호감을 어필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연히 수락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자리를 떠났다.
“젠트르노 황자에게 듣긴 했는데… 황자들이 정말로 날 노리고 있긴 한 모양이네.”
1황자가 곧장 찾아온 걸 보면…….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황자들도 연이어 재호를 찾아와 자신과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대륙 곳곳에서 업적을 세운 재호의 존재는 그들의 차기 황제 이력서를 빵빵하게 채워줄 수도 있었으니.
“알시아 폐하. 젠트르노 5황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모든 황자들이 다녀간 뒤, 마침내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 * *
재호와 마주한 젠트르노는 영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재호가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황실을 방문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마치 재호가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상황.
“기분이 썩 좋진 않군요.”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을 다른 형제들에게 노출시키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저들은 오늘의 만남을 가지고 자신들 입맛대로 황위 다툼에 이용해 먹을 테니 말입니다.”
그 불만을 충분히 이해한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충분히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오늘로서 황위 싸움은 끝이 날 테니 말입니다.”
“……?!”
갑작스러운 재호의 말에 젠트르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무, 무슨……! 설마 멋대로 이곳에서 일을 저지르겠단 거요?!”
이미 문 밖의 시비는 멀리 물려 놓았으나, 이야기의 심각성 탓에 젠트르노는 연신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지금 상황에서 일을 벌여 봐야 손해만 볼 뿐입니다! 도리어 다른 형제들에게만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재호가 상당히 도발적이고 충동적인 인물이라는 건 나름의 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황궁 안에서 암살이라니!!
“아닌데요.”
“……?”
아무리 미쳐도 황궁 한복판에서 황제 암살을 꾸미지 않을 터.
“오늘 저는 황제 폐하와 담판을 지을 겁니다. 젠트르노 황자님을 차기 황제로 왕세자로 책봉해 줄 것을.”
“헙?!”
경악한 젠트르노에게 재호는 자신이 준비해 온 계획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재호가 꾸민 모든 계획을 들은 젠트르노는 한참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습니까? 이미 5황자님이 잘못되면 저도 같이 죽는 판인데.”
“으음…….”
젠트르노는 다시 고심에 빠졌다.
재호의 계획은 간단명료했으나, 어찌 보면 허무맹랑하기도 했다.
황제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 공을 젠트르노에게 돌리는 것.
현 황제는 노환과 지병으로 인해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
그런데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약이 재호에게 있단다.
그게 사실이라면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피를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황위를 물려받는 게 제국의 국력 유지에도 최적이었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불로장생초란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또한 아바마마께서 드시는 모든 음식은 철저히 관리됩니다. 그런 정체불명의 약을 대체 어떻게 먹이겠단 겁니까?”
“그래서 이걸 준비했습니다.”
재호는 소름다움을 꺼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 자세히 뜯어보곤 투명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뭡니까?”
“황제 폐하를 유혹하기 위한 특수 옷입니다.”
“………….”
걸친다고 다 옷이 아니었다.
옷의 기본 기능 중 하나가 맨살을 가려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재호가 들고 있는 건 그 기본적인 것조차 충족시키지 못했으니.
그리고…….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바마마는 그런 취향이 아니십니다. 한창 때는 정력황제라고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흠흠, 그게 아니라…….”
재호는 소름다움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젠트르노는 불로장생초에 대해 들었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워했다.
“놀리지 마십시오!”
“젠트르노 황자님! 이건 절호의 기회입니다!”
재호는 강력하게 어필했다.
“제국의 황제라면 분명 이 옷의 진가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웃기지 마십시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아바마마를 벌거벗고 만나라니!!”
완강히 거부하니 두 눈으로 직접 증명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젠트르노 황자님.”
재호는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하게 그를 불렀다.
“황자님은 분명 황실 내 입지가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했지 않습니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황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리 외친 재호는 거침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이, 이런 미친놈이!!”
젠트르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상스러운 욕설.
하지만 곧 그의 눈은 부릅떠졌다.
“이, 이게 무슨……?”
뤼니오르보다 더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젠트르노.
아마 그의 눈에 지금 찬란한…….
“이게 무슨 짓이오!! 알시아 왕! 체통을 지키십시오!!”
“응?”
분명 젠트르노의 눈에 자신의 모습은 찬란한 빛으로 휩싸여 있을 텐데……?
“아. 맞다.”
재호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재호보다 명성이나 악명이 높은 상대여야만 진가를 알아보는 아이템.
재호는 옵션이 헷갈려 순간 반대로 생각한 것이었다.
[젠트르노 황자의 호감도가 감소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지나친 호감도 하락은 동맹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아, 이게 아닌데.”
“당장 옷을 입지 못하겠습니까!”
재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선 젠트르노 황자가 절대 재호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터.
‘일단 이 옷의 효과를 체감하게 해 줘야 해.’
아마 입어만 본다면 그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니! 난 절대 멍청이가 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흠흠, 젠트르노 황자님. 일단 들어보십시오. 이게 말입니다…….”
재호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듣기 좋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젠트르노 입장에서도 혹할 만한 여러 조건들을 제시했으니.
그중 가장 달콤한 건…….
“해적 소탕의 공 일부를 젠트르노 황자님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
재호는 젠트르노와 이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해적 문제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나누었음을 꾸며내는 것이었다.
“그, 그건 솔깃하긴 하는데…….”
그래도 대체 왜 팬티 바람으로 황제를 만나야 한단 말인가!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덥썩-!
재호는 황자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말했다.
“혼자가 아닙니다. 저도 이 옷을 입을 겁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악마의 속삭임.
“대륙의 영웅이라 불리는 제가 스스로 체면 깎자고 이 옷을 입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으으…….”
“용기를 가지십시오!”
재호의 달콤한 유혹에 결국 젠트르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떨리는 손으로 소름다움을 받아들었다.
손을 통해 느껴지는 감촉은 자신이 느껴본 그 어떤 원단보다 고급스러웠으니, 확실히 보통 옷이 아니긴 한 것 같았다.
“후……. 알겠습니다. 한번 입어보겠습니다.”
그러곤 침대 주변의 커튼 뒤에 숨어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화아앗-!
“윽!!”
소름다움을 입은 젠트르노를 입은 재호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
젠트르노보다 더 높은 명성치를 가진 재호였기에 소름다움의 본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뤼니오르의 말이 맞았다.
빛 그 자체를 입은 듯, 광채를 뿜어내는 형체 없는 옷.
‘이게… 소름다움의 진가!’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에 재호는 확신을 들었다.
황제가 반드시 넘어올 것이라고!
“이, 이러면 된 것입니까?”
“좋습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뭔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재호의 물음에 젠트르노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 확실히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기도…….”
“알시아 님! 알시아 님!”
드르륵-
그 순간,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메이.
“어?”
“???”
드르륵-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메이는 민첩하게 문을 닫았다.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