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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젤란 숲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네임드 보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적들을 찬찬히 살피다 곧 재호에게서 멈추었다.
“네놈이로구나.”
“?”
“어르신을 지독하게 방해한 놈이.”
“어르신?”
짐작되는 이가 하나 있긴 했다.
“모른 척 하지 마라! 네놈 때문에 파이라 대공께서는 화병에 드러누워 오랜 시간 요양을 하셔야 하는 상태다!”
그 말에 재호는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점도 있었다.
“파이라 그 영감 저번에 봤을 땐 펄펄하던데?”
재호가 마계로 넘어갔을 당시, 그는 당장 처죽일 기세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간악한 놈……. 네놈의 명령을 받은 그 미친 인간들이 한 짓을 시치미 떼려는 게냐!!”
“?!”
스트로앤 주교!
푸른 산호섬의 용맹한 전사!(제)
“네 이놈!!”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챈 피게르 대주교도 노호성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 교단원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뭐, 뭐라고……?”
부들부들 떠는 그는 결국 눈을 까뒤집더니 헬트리버의 앞발을 크게 들어올렸다.
“오냐!! 그 기분 나쁜 땀냄새가 나는 걸 보니 네놈도 아나볼릭 놈이구나!! 그 자식들이 우리 마계를 엉망으로 만든 만큼, 너희들도 망가트려 주겠다!!!”
콰아아앙-!!!
그렇게 재개된 전투.
헌데 유라바스 백작은 오로지 아나볼릭 교단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필 그들이 온통 헐벗고 있는 탓에 한눈에 띄기도 했으니.
“후발대는 아나볼릭 교단을 지원하고 저희는 앞으로 가겠습니다!”
재호는 그렇게 통보하고 슬그머니 유라바스 백작을 지나쳤다.
굳이 저것 하나를 잡겠다고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 없었다.
하지만 그런 얍삽이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곧 또 다른 네임드 악마 귀족이 등장했다.
이번엔 여섯 개의 팔을 가진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존재였는데, 척 봐도 무투파 악마로 보였다.
그 역시 가장 먼저 재호를 향해 말을 건넸는데, 그 내용은 유라바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대가 마계에 저지른 행패……. 그대의 피로 반드시 갚겠소.”
이쯤 되니 재호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마계에 남았던 스트로앤 일행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놓은 것인가?
그리고 아직 살아 있긴 한가?
터엉-
재호를 향해 전투태세를 갖추었던 그.
헌데 이번에는 말칸트가 그를 막았다.
“알시아 왕! 미안하지만 이놈은 내가 상대하고 싶군.”
그의 두 눈은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으니.
“팔이 여섯 개라……. 싸우는 맛이 어떨지 너무 궁금하군.”
“……뭐, 그러십시오.”
재호로선 나쁠 것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지나친 재호는 몇 번이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그쯤 되니 아무리 멍청이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거…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황재호 선수의 강력한 전력들을 배제하는 것 같은데요?
해설진들도 핵심을 짚어냈다.
하나 둘, 전력이 떨어져 나가면서 결국 남은 건 순수한 엘리시아 화원 전력이 전부.
재호가 호감도로 동원했던 강력한 NPC들은 다른 네임드 악마를 상대한다는 핑계로 모두 흩어졌다.
‘판은 깔아주지만… 내 퀘스트는 내가 깨라는 거군.’
재호는 각오를 다시금 다졌다.
어차피 현재 전력도 역대급으로 강력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레이드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게 클리어를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겠지.’
게임의 패턴 상,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다양하고 강한 적을 상대해 본 재호는 이제 단순히 평범한 게이머가 아닌, 최정상 탑플레이어였으니까.
* * *
거침없이 전진해 리젤란 숲 앞까지 도달한 재호 일행.
섬 각지에서 강력한 전력들이 네임드 악마들을 도맡아 상대해 주니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저기입니다.”
리젤란 숲은 엘다가 말했던 것처럼, 커다란 강이 가운데 섬을 휘감고 있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길은 웅장한 대교 하나였는데, 마기에 침식된 것인지 온통 핏줄 같은 검붉은 점액질로 뒤덮여 있었다.
“생명의 다리가…….”
“맙소사…….”
그 끔찍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엘프들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다들 괜찮습니까?”
재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엘프들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대로 좌절하고 돌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반드시 리젤란 숲을 되찾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기억 속 그대로의 숲을 물려줄 것입니다.”
그들의 각오를 들은 재호는 골렘을 이끌고 다리를 건넜다.
리젤란 숲의 상태는 섬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심했다.
‘엠베이 숲을 처음 갔을 때보다 심하군.’
이미 마계를 고스란히 옮겨다 놓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헌데 적대적으로 나서는 이가 하나 없군.’
적들이 바글바글했던 바깥과 달리, 내부엔 몇몇 마수들의 존재감이 느껴지긴 했으나 덤벼들진 않았다.
“이쪽으로 계속 가면… 신목께서 계시던 곳이에요.”
엘다의 말.
그런 상징적인 장소로 향하는 길이거늘, 아무도 막는 이가 없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일곱 명의 악마 대공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중 한 명인가?’
대악마로 분류되는 일곱 악마 공작들.
‘큰 피해 없이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많은 엘프들과 고블린, 오크 등등, 현재의 강력한 전력을 믿긴 했으나, 어느 정도의 피는 흘리게 될 것이 자명한 일.
그렇게 몇 번이고 각오를 다지며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엘프들에게 특히나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했다.
“이, 이게 어찌……?”
“아아……!”
하늘 위로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굵은 나무기둥엔 혈관과 같은 새빨간 핏줄들이 뒤엉켜 꿀렁였고, 잎이 하나도 없이 썰렁한 나뭇가지에는 붉은 살점 같은 열매들이 맺혀 있었다.
꾸르륵-
그때, 열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일제히 갈라지더니 시뻘건 눈이 드러나 재호 일행을 주시했다.
끔찍한 몰골의 신목.
그리고 직감했다.
이 전쟁의 최종 보스가 저것임을.
[아… 이 기분 나쁜 땅의 주인이… 돌아왔구나…….]
개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동자 열매들이 제멋대로 돌아가며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서로 맞물리며 방금 들은 기괴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 끔찍한 곳에서…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너는…… 정령화장……. 그래… 틴라이트 그 교활한 놈이… 그냥 우리를 내버려뒀을 리 없지…….]
‘틴라이트 그 양반은 참… 안 낀 곳이 없군.’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든 재호.
[하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 복수에 눈에 멀어… 이렇게 많은 생명을…… 선물해 주었으니…….]
쿠드드드-
주변의 땅이 뒤집히더니 붉은 나무뿌리들이 솟아났다.
[제법 강대한 힘을 푼은 이들도 있으니… 내 부활의 자양분으로… 고맙게 먹겠다……. 그리고… 마왕이자 마계의 위대한 존재인 나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겠다……!]
콰아앙-!!!
일행을 덮친 나무뿌리들.
그리고 곧장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마, 마왕입니다! 마왕이 등장했어요!!
흥분한 캐스터 김정수의 외침.
-정확히 말하면 마왕의 본체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침착함을 유지한 채 상황을 분석한 해설자 정요셉이 말했다.
-마왕이라 하면 자고로 마계 최고의 강자 아니겠습니까? 그런 존재가 이 시점에 나타나는 건 좀 이른 감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아마 어떠한 식으로든 힘이 제약되어 있는 상태일 겁니다. 과거 대악마 파이라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 분석대로, 현재 상대하는 마왕의 움직임은 상당히 단순했다.
나무에 맺힌 수백 개의 눈동자들이 깜짝일 때마다 쏘아지는 핏빛 광선, 그리고 촉수 같은 나무뿌리들이 전부.
그 외에 여러 저주도 시전이 되었으나, 다행히 재호에겐 해당이 없었다.
곤란함을 겪는 건 함께 온 다른 동료들.
그들을 위해 재호는 밀키웨이 정령화를 통해 계속해서 저주를 해제해 주고 있었다.
[일정 범위의 오염을 정화시키며 사용자는 저주에 면역이 됩니다.]
콰과과광-!!!
원거리에선 고블린들의 대포가 불을 뿜었고, 오크들도 살벌하게 생긴 온갖 무기로 나무뿌리들을 잘라댔다.
하지만 마왕에겐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하는 상황.
‘무작정 때려야 하는 게 아닌, 어딘가를 노려야 하는 게 분명한데.’
현재 상대 중인 마왕이 정상이 아니란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마왕은 이 섬을 침입한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양분으로 삼겠다는 발언을 했었으니까.
‘애초에 외모만 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마치 죽은 신목에 기생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잠깐.”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과거 재호가 마계에서 포섭했던 악마, 패로우는 말했었다.
마왕은 신목과의 전투로 인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근데 지금 여기엔 멀쩡히 있지 않은가?
‘멀쩡하다고 표현하기엔 애매하지만 어쨌든.’
물론 패로우가 말단이라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굳이 그런 식으로 악마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소문을 퍼트리진 않았겠지. 그렇다면…….’
재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수많은 일들이 빠르게 오버랩되며 한 가지 가능성을 추론해 냈다.
신목은 자신의 힘을 짜내어 엘프들을 탈출시켰고, 틴라이트는 신목의 정신체를 분리시켜 먼 훗날, 신목의 부활을 대비했다.
그렇다면 남은 마왕은?
패로우의 말대로 신목과 싸웠으되, 결판을 보기 전에 틴라이트가 개입한 건 확실했다.
또한 마왕이 틴라이트를 교활하다고 평한 걸 보면 그 과정에서 무언가 얍삽한 짓을 했다는 뜻.
신목은 틴라이트 손에 의해 빼돌려졌고, 힘을 잃고 정신을 잃은 마왕은 여기서 나무가 되어 있다?
‘틴라이트가 신목의 남은 몸체를 이용해…… 봉인을 시켜 버린 건가?!’
이 일에 대해 신목조차 모르는 걸 보면 틴라이트가 독자적으로 저지른 일이 분명했다.
[누구도 모르는 숨겨진 역사의 일면을 엿보았습니다!]
[명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고맙게도 시스템이 재호의 깨달음을 인정해 주었다.
* * *
굳건했던 신목의 몸체에 남아 있던 힘은 무한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봉인되었던 마왕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힘을 회복했으나, 아직 완전히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한 상태.
하지만 이 섬에 진입한 후, 연합군의 피가 마왕을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 피를 빨아들이고 있던 마왕이 마침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하늘을 뒤덮는 검은 장막.
섬의 각지에서 붉은빛들이 그 장막을 향해 빨려 들어가더니, 이윽고 중심부에서 뭉쳐지더니 마왕을 향해 쏘아졌다.
[혈류 포식으로 인해 마왕의 각성 단계로 진입하였습니다.]
‘설마… 우리 전력을 적당히 분산시키는 걸 노렸던 건가?’
재호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이제야 네임드 NPC들과 병력들이 순차적으로 찢어진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래도 뒤에 두고 온 많은 강자들이 있기 때문에 어느 선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으리라.
카가가각-
쩌저적-
나무뿌리들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곤 갑자기 신목의 몸체로 둥글게 말리며 파고들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굵은 기둥에 뿌리를 박은 채 서로 얼기설기 얽혀 만들어진 고치.
그리고 그 내부에 갇힌 재호 일행.
쿠-궁 쿠-궁.
고치는 서서히 박동하더니 일행의 체력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몸의 완벽한 부활을 위한… 자양분이 되어라…….]
“이미 말라 죽은 놈이 할 소리야?!”
큰소리는 치지만 명백히 난처한 상황.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마왕.
이 상태에서도 두드려 보지만 나무줄기에는 상처조차 잘 나지 않았다.
억지로 생채기를 만들어도 빨아들인 피로 다시 회복시키는 상황.
‘버텨서 해결이 될까?’
그렇진 않을 것 같았다.
‘젠장. 망할 신목! 몸뚱이는 더럽게 단단해서!!’
무심코 신목에게 비난을 퍼부은 재호는…….
“…아! 신목!!”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공격을 퍼붓던 상대는 마왕이 아니었음을.
꽃만 키우는데 너무 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