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우람의 존재감에 압도된 와띠스.
재호에게 몇 번 당하며 남은 트라우마, 그리고 황재호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우람이라 압박감은 훨씬 심했다.
재호가 그냥 아메리카노라면 우람은 에스프레소 쓰리샷.
“댁은 누구요? 알시아는 왜?”
“예, 예? 아, 제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뒤늦게 상대가 재호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
이곳이 게임 내라는 걸 잊을 정도로 우람에게선 원초의 야생성이 느껴졌으니.
‘얼굴을 보니 최소 전설 NPC 느낌인데 패션을 보면 뉴비……. 아니! 멍청한 놈아! 패션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만큼 멍청한 건 없다! 알시아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는 거냐?!’
어쨌든 왜 저런 인간이 초보 사냥터 근처에 있단 말인가?
‘혹시 여기 보물을 노리고… 아! 아니면 보물을 지키는 수문장인가?!’
이런저런 오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동안, 우람은 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그런데 와띠스라고? 그거 어쩐지 귀에 익은데…….”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우람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묘하게 짝퉁의 짝퉁 같은 느낌이 드는군.”
“…예?”
그 말을 들은 와띠스는 멈칫했다.
짝퉁의 짝퉁!
만약 뭔가 알고서 한 말이라면 상대는 명백히 플레이어였다.
왜냐면…….
“아! 생각났다. 분명 와피스라는 전설의 명작이 게 있었지.”
“헉?!”
깜짝 놀란 와띠스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놀랍게도(?) 플레이어가 맞았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다.
가히 재호에게 비견될 만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잠깐. 또 있다고?’
번쩍-!
그 순간,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기억.
‘설마 알시아… 황재호의 아버지?!’
그리 생각하고 나니 재호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보였다.
또한 재호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요란한 리액션으로 카메라에 잡혔던 그 살벌한 얼굴도 떠올랐고.
“크, 크흠. 저기 선생님 혹시 한국분이십니까?”
일단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와피스를 안다면 백프로 한국인일 것이다.
“그렇네만. 누가 봐도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았나?”
“…….”
우람을 보고 확신할 수 있는 건 같은 지구인이라는 것 정도였다.
“흠흠! 사, 사실 저도 한국인입니다!”
어쨌든 한국인이란 걸 알게 된 지금, 자신의 짐작은 정답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제 아이디는 와피스를 따라한 거죠.”
상대가 재호의 아버지라면 척지어서 득이 될 건 전혀 없었다.
‘차라리 친분을 만드는 게 낫다!’
보아하니 재호의 그 말도 안 되는 피지컬은 아버지에게 받은 것 같았으니 우람도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몰랐다.
“오호라. 요즘 젊은 친구들도 와피스를 안다고?”
우람은 진심으로 놀라워하며 말했다.
그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인터넷에 유행했던 것이었으니까.
“하하… 사실 젊어 보이려고 주름을 조오금 당겼습니다. 원랜 11년 토끼띠입니다.”
“응? 그럼 한 살 아래구먼. 난 10년 호랑이띠네.”
우람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이거 참, 게임 내에서 동년배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반갑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은혜와 떨어진 뒤, 그 어디에서도 느껴 본 적 없는 외로움을 느끼던 참이었으니까.
“하하, 저도 반갑습니다. 형님!”
와띠스도 제법 붙임성 좋게 다가오니 우람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우람은 바보가 아니었다.
처음 다짜고짜 자신을 도발하던 상대가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변하는 것엔 이유가 있는 법.
“뭘 원해서 그렇게 살갑게 대하는 겐가?”
“하하,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저 같은 민족을 만난 게 반가워서 그렇습니다.”
“재호 때문인가?”
“…….”
이미 상대의 반응에서 우람은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재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걸.
“보아하니 나와 척지고 싶진 않아 하는 것 같은데, 난 다시 사냥을 하러 가야 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음 얼른 하게.”
“그, 그게…….”
“아까 보물이랬던가? 그것 때문이라면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비켜 줄 테니.”
그리 말하고 우람이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형님!”
털썩-
난데없이 무릎을 꿇는 와띠스.
“도와주십시오. 형님!”
“방금 본 사람에게 너무 쉽게 무릎을 꿇는군. 게다가 난 자네 형님도 아냐.”
고레벨도 아니고.
우람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저… 신대륙 가고 싶습니다!”
“신대륙? 이번에 재호 녀석이 간다는 그곳?”
“예! 바로 거기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우람의 힘으로 재호의 원정에 와띠스를 집어넣어 달라는 것.
“쯧! 한심하군.”
“예……?”
“사나이가 되어서 그렇게 쉽게 무릎을 꿇는 것도 모자라 자존심도 내팽개치다니.”
우람이 혀를 차며 와띠스를 내려다보았다.
“자네가 동년배라면 알겠지. 무릎을 꿇는 건.”
“…추진력을 얻을 때뿐이다.”
우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들 녀석에게 손을 벌릴 생각은 없네. 더욱이 쓸데없는 부담을 지우는 것은 더더욱!”
격투기를 시키겠다고 난리를 쳤던 긴 과거는 머릿속에서 삭제한 우람.
“나는 정면돌파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자네는 어떻지?”
“저는…….”
와띠스는 떠올렸다.
처음 뉴월드를 시작할 때의 설레임과 용솟음치던 제2의 청춘 열정.
그 뜨겁고 용기 있던 그때를 기려서 이름도 와띠스라고 지었었다.
대놓고 베낄 정도로 용감했던 그들의 패기를 따라서.
분명 그랬는데…….
“아.”
와띠스는 깨달았다.
현실의 차갑고 냉정한 현실을 피해 왔던 이 세상인데, 재호를 만난 그 순간부터 다시 겁쟁이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형님.”
와띠스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왜지?”
“형님의 비주얼이 필요합니다.”
솔직한 발언.
“건방질 정도로 솔직하군.”
하지만 우람은 그런 걸 더 좋아했다.
“와동생!”
“형님!”
[<와띠스> 님을 친구로 등록했습니다.]
[<지존우람> 님을 친구로 등록했습니다.]
* * *
대륙을 가로지른 고잉헬 호는 크루마에서 멈추어 섰다.
재호에게 큰 호감을 가진 말칸트 대왕도 만나고 제국 지점 다음으로 큰 규모로 만들어진 엘리시아 화원 크루마 지점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으하하하! 알시아 대왕! 언제쯤 크루마를 한번 찾아오려나 기다렸다네!”
재호와 마주 앉은 말칸트가 호탕히 웃으며 말했다.
“별 일 없이 지내고 계셨습니까?”
“물론! 요즘 밤잠을 살짝 설치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괜찮다네.”
“잠을 말입니까?”
“후우……. 뭐 별로 대단한 건 아니네. 자네도 잘 알겠지만 요즘 서쪽 바다 너머에서 발견된 신대륙으로 떠들썩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크루마에서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다만…….”
“맞아. 그래서 요즘 잠을 못 자고 있다네. 직접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아…….”
별 시답지 않은 이유에 재호는 말끝을 흐렸다.
“엘리시아 화원을 갈 때도 난리들이더니……. 신대륙 좀 다녀오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러는지 원.”
마치 옆 동네 다녀오는 것에 불과하다는 듯이 말하는 말칸트.
재호는 크루마의 대신들은 밤잠을 설치는 게 아니라 매일 술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어떤가?”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꾼 말칸트가 자신의 팔을 주무르며 물었다.
“오랜만에 한바탕하는 것이?”
* * *
크루마 투기장이 오랜만에 만석이 되었다.
심지어 관중석 꼭대기의 통로에 모여든 구경꾼 숫자도 좌석만큼이나 될 정도.
그들 모두는 재호와 말칸트의 결투를 보기 위해서 모인 것이었는데, 말칸트가 충동적으로 요구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재호가 크루마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미리 모여든 탓이었다.
말칸트라면 당연히 재호와 싸우려 들 테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군.”
결투장 가운데 마주 선 말칸트가 말했다.
“알시아 대왕 그대는 무료하던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줬었어. 정말 오랫동안, 나를 만족시켜 주었던 진정한 전사는 없었으니. 게다가…….”
말칸트의 맹수 같은 눈동자가 재호를 관조했다.
“그대에 내면에 용솟음치는 힘은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군. 과연 대륙의 영웅! 대단해!”
“말칸트 대왕님이 없었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lv.182 알시아]
[정령화장(후계 등급)]
[힘 : 691]
[지능 : 328]
[민첩 : 518]
[체력 : 558]
[마나 : 499]
[명성 : 10,250]
[악명 : 16,220]
현재 재호의 기본 능력치.
마왕 레이드 이후 지금까지 24레벨이 올랐다.
능력치 총합으로 환산해 본다면 최소 250레벨에 달하는 수준.
하지만 생각 없이 투자해 놓은 능력치는 누가 보더라도 잡캐라고 할 상태였다.
재호의 말도 안 되는 피지컬 덕분에 그 부분이 가려지는 것일 뿐.
온갖 칭호나 업적을 통한 능력치 뻥튀기도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그 손해가 적기도 했고, 특히 마왕 토벌전에서 반인반마, 용인 특성을 얻은 게 컸다.
말칸트는 그런 재호의 본질을 꿰뚫어 봤기 때문에 과거와 전혀 다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기대되는군. 그럼 어서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재호의 무장 상태는 평소 그대로.
심지어 무기도 끼지 않았다.
어차피 말칸트가 원하는 건 한계까지 끌어올린 순수한 피지컬 공방이니까.
* * *
결투는 시작되었다.
역시나 시작부터 대단한 두 사람의 결투.
둘 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음에도 적중하는 순간 죽을 것 같은 위용의 공격들이 연신 퍼부어졌다.
파앙-! 파앙-!
관중석까지 선명하게 전달되는 파공음.
“진짜 대박이다…….”
“알시아는 진짜 같은 사람이 맞는 걸까?”
사람들은 넋을 놓은 채 결투에 집중했다.
그들이 모인 건 단순히 큰 이벤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수준 높은 결투를 보는 것만으로도 보너스를 얻을 수 있기 때문.
[명성이 증가했습니다.]
[민첩이 증가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스킬이…….]
새삼 그걸 가능하게 만든 황재호의 피지컬이 경이로울 정도.
사람들이 알시아와 황재호에 열광하는 이유를 재호는 확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역시 다시 봐도 대단합니다. 형님을 완전히 똑 닮아서 저렇게 강한 거겠죠.”
경기장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석진 곳에 겨우 선 와띠스가 우람에게 말했다.
“크, 크흠.”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우람은 헛기침으로 넘겼다.
자신은 저렇게 싸울 수 없다는 걸.
“흐흐, 아들 이야기를 하려니 민망하신 모양입니다?”
그걸 와띠스는 다르게 이해했다.
“뭐, 형님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제가 길드를 적극적으로 동원해서 형님을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 고맙군.”
일단 함께 게임을 할 사람이 생긴 건 좋았으나 이들의 지원이 과연 도움이 될 것인지 의문이었다.
와띠스가 찾던 보물의 실체도 애들 용돈 같은 은화 몇 개였던 걸 보면 영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지. 차라리 그래서 마음이 편할 수도 있겠군.’
오히려 과한 지원을 받았을 경우, 우람의 실력이 들통 났을 때 민망함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근데 아쉽군. 너무 멀어서 이건 뭐 보이지도 않아.”
“그러게 말입니다. 휴……. 앞쪽의 로얄석만 좀 줄여도 지금 서 있는 사람들의 반은 더 들어갈 것 같은데 말입니다.”
결투장 가장 아래, 누구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널찍한 자리.
돈 많은 이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그 자리는 일반석의 열 배는 넓어 보였다.
“참… 게임으로 용돈 벌어 보겠다고 시작했는데 아직 투기장 로얄석을 갈 능력도 안 되는군요. 언젠가 크게 한 탕 할 수 있을 거라곤 믿고 있지만…….”
“운으로 잡으려 해선 안 되는 법이지. 사나이란 어떤 역경에도 묵묵히 정면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야.”
“하하, 저도 형님을 따라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 대답한 와띠스는 다시 결투로 눈을 돌렸다.
우람도 다시 재호에게 고개를 돌리던 중, 순간 스쳐 지나간 익숙한 실루엣에 시선이 멈추었다.
“어……?”
로얄석 중에서도 가장 좋아 보이는 자리.
그곳에 앉아 있는 낯익은 두 사람.
“은혜?!”
바로 은혜와 요세프 교관!
두 사람은 재호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결투를 관람 중이었다.